그때 학업이 긴장하여 그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학생들은 모두 있는 집 자식들이었다. 학생들은 이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힘든 학업을 이어가던 중에 어느 날 큰일이 터졌고 학생들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는 화젯거리로 떠올랐다.그 일은 바로 남학생 탈의실의 유찬혁 옷장에 익명의 연애편지가 나타난 것이었다. 결국 졸업할 때까지 그 편지는 풀리지 않은 의문으로 남게 되었다.배경원이 다 지난 일을 꺼내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최연준은 눈살을 찌푸렸다.“아무튼 졸업 후에 곽보미는 영화 찍기 시작했어요.”배경원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하지만 지금까지도 찬혁이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어요.”최연준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다시 말해 그때 그 연애편지는 곽보미가 쓴 것이었다.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만약 진짜로 곽보미가 쓴 거라면 성적 취향에 문제가 없다는 건데... 하지만...’최연준은 잠깐 멈칫하다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찬혁이 학교 다닐 때 짝사랑하던 애가 있었잖아.”배경원이 히죽 웃었다.그때 그가 짝사랑하던 상대는 곽보미가 아니라 학교의 유명한 퀸카였다. 피부도 하얗고 얼굴도 예쁘장한 데다가 다리도 쭉 뻗어 바비 인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최연준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리가 없었다.그는 심지어 퀸카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까맣게 잊었을 것이다.‘연준 형과는 참으로 말이 안 통해.’최연준의 의심을 지워주는 게 아니었더라면 절대 그와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형이 까먹었나 본데 곽보미가 학교 다닐 때는 정상이었어. 너무 빼어난 미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청순했었어. 그러니까... 전형적인 우등생, 엄친딸 이런 이미지였어.”“그런데 지금은 왜 저래?”최연준은 어이가 없었다.“아주 서연이 수호천사가 다 됐어.”이건 배경원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그들은 곽보미가 아직 유찬혁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학교 다닐 때 혼자 몰래 짝사랑하다가 유찬혁이 다
강서연은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그를 툭 쳤다.“경원이랑 통화했어.”최연준은 거짓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걔 요즘 수정 씨랑 잘 지내는 것 같더라고. 두 사람 맨날 인터넷에서 핫한 가게를 찾아다녀. 이번에 또 한 집 찾았다면서... 우리도 함께 가자고 하던데?”강서연이 두 눈을 깜빡였다.“수정 씨에 대한 마음이 진짜 진심이에요? 설마 그저 한때일 뿐이다가 새로움이 사라지면 버리는 거 아니겠죠?”최연준이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경원이 평소에는 건성 건성하고 진지하지 않을 때도 많지만... 이 세상에서 극히 드문 좋은 남자라는 건 내가 확신해.”“경원 씨에 대한 평가가 아주 높네요?”강서연의 두 눈이 반짝였다.“설마 당신 친구들도 다 좋은 남자니까 당신은 더 좋은 남자라고 얘기하려던 거 아니죠?”“아무튼 주위 환경이 중요하잖아. 어떤 사람과 어울리는지도 중요하고.”최연준이 진지하게 말했다.“난 절대 그런 걸로 거짓말 안 해. 내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다 괜찮은 사람이야.”“알았어요. 그럼 내가 땡잡은 거네요?”“땡잡은 건 나지.”최연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 사랑이 어찌나 가득한지 꽁꽁 얼어붙은 얼음마저 녹여버릴 것만 같았다.그는 강서연의 귓가에 대고 또박또박 말했다.“내 아내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야.”강서연은 쑥스러운 나머지 고개를 숙이고 히죽 웃었다.최연준은 목소리뿐만 아니라 하는 얘기도 듣기 좋았다. 게다가 최근 자주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곤 했다.이건 그녀의 마음을 녹여버리겠다는 건가?지난주 친정에 갔을 때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윤문희는 그녀에게 예뻐졌다고 했다.그녀의 칭찬에 강서연은 여간 놀란 게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윤문희의 미의 기준이 얼마나 높은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역시 여자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화장품은 사랑이었다.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면 진심으로 행복하고 독특한 매력을 뽐내면서 생기가 가득해진다.“왜 그렇게 웃어?”최
구현수가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담배꽁초를 바닥에 휙 던지자 양털 카펫에 순식간에 시커먼 구멍이 뚫렸다.양연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망해가는 이 집안에서 양털 카펫은 얼마 남지 않은 비싼 물건이었다.“구현수 이 나쁜 새X!”양연이 주먹을 불끈 쥐고 그에게 달려들려 하자 강명원이 말렸다.“날 왜 막아요?”“이리 와.”강명원이 두 눈을 부릅떴다. 지금까지 양연은 계속 강명원에게 잡혀 살았고 강명원이 두 눈만 부릅뜨면 양연은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물러섰다.강명원은 힘들게 바닥에서 일어났고 허리가 죽을 것처럼 아팠다.“구현수.”강명원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네 말이 맞아. 우린 대대로 친분을 이어왔으니 널 보살피는 건 당연한 거야.”구현수는 그를 보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여기서 공짜로 먹고살아도 돼.”강명원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앞으로는 내가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해야 해.”“허!”구현수의 눈빛이 싸늘해지더니 그의 목을 덥석 조였다. 화들짝 놀란 강명원은 미처 손쓸 새가 없었고 하마터면 숨이 막혀 죽을 뻔했다.“너... 이거 놔...”“빌어먹을 영감탱이 같으니라고.”구현수는 이를 꽉 깨물었다.“이런 낡아빠진 집에 내가 사는 건 당신의 체면을 세워주는 거야.”강명원의 두 눈에 핏발이 섰고 얼굴도 검붉게 변했으며 죽음의 공포가 점점 덮쳐오는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이 하얘지고 정신을 거의 잃으려던 그때 구현수가 갑자기 손을 놓았다.강명원은 쿵 하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옆에 있던 양연은 사색이 된 얼굴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오늘 너무 피곤해요.”구현수는 손을 툭툭 털며 차갑게 웃었다.“어머님, 가서 밥 좀 해주시겠어요? 너무 풍성할 필요는 없어요. 닭고기와 생선 요리만 있으면 돼요.”“구현수 너...”강명원은 심하게 기침하다가 구현수가 나가기 전에 소리를 질렀다.“강서연과 결혼하기 싫어?”구현수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뚫어
양연의 울부짖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구현수는 손을 툭툭 털고 강명원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 후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집에서 밥을 주지 않으니, 밖에 나가서 먹어야지.구현수가 나간 후 양연은 한참 동안 바닥에 멍하니 앉아있었고 두 눈에 절망이 가득했다.강명원은 앓는 소리를 내며 겨우 일어나 절뚝거리면서 서재로 들어갔다. 그는 주머니를 만져보았다. 다행히 구현수는 돈만 밝혔고 휴대 전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지갑 안에 사실 돈이 얼마 없었고 휴대 전화 안에 저장된 것이야말로 최후의 적금이나 다름없었다.그 시각, 양연은 거실에서 처량하게 울었다.강명원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는 누군가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통화연결음이 한참이나 울렸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가 전화를 끊으려던 그때 누군가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 회장님?”“허, 회장님이라고 부르지도 마.”강명원은 그의 말투에 담긴 조롱을 단번에 알아챘다. 하지만 따져 물을 시간이 없어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얘기했다.“지석아, 언제 구현수를 데려갈 거야?”“그게... 아직 도련님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어요.”“최지한이 이 일을 진작 잊은 건 아니겠지?”“조급해하지 마세요, 회장님.”인지석은 그를 비꼬았다.“아무튼 회장님의 딸이 지금 도련님의 곁에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너...”강명원은 말문이 막혀버렸다.“인지석, 저 재수탱이를 당장 데려가. 계속 이대로 뒀다간 내가 버티지 못해!”인지석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데 짧디짧은 침묵이었지만 강명원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심지어 인지석의 숨소리에서 냉기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회장님, 회장님은 그저 강진 그룹을 다시 일으켜 세울 자금이 필요한 거 아닌가요?”인지석이 천천히 말했다.“회장님의 딸 강서연 말고는 회장님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그렇긴 하지만...”“하지만 우리가 다 함께 힘을 합쳐야죠.”인지석이 싸늘하게 웃었다.“며칠만 더 버티세요. 얼마 후에 구현수에게 강주로 돌아
강서연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사실 남자 셋이 술집 룸에 앉아서 술을 마시며 얘기를 나누는 건 딱히 이상할 게 없었다.“우정 언니, 정확히... 들은 거 맞아요?”강서연은 그녀의 성격이 급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첫사랑이 연준 씨 첫사랑인 건 어떻게 확신해요?”“내가 직접 들었어.”“하지만 술집이 복잡하잖아요. 잘못 들은 거 아니에요?”“그럼... 내가 들은 걸 곧이곧대로 얘기해줄게.”임우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때의 실제 상황은 이러했다.그날 남자 몇이 룸으로 들어가 로열 살루트를 마시던 그때 배경원이 큰소리로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찬혁의 첫사랑이 돌아왔대요. 다들 알고 있어요?”하지만 임우정의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첫사랑이 돌아왔대요. 다들 알고 있어요?”“왜 하필 이때 돌아왔대요? 그래서 연준 형이랑 상의해 보려고요. 찬혁이와 곽보미를 어떻게 붙여놓으면 놓을지.”방안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렸다.“왜 하필 이때 돌아왔대요? 연준 형이랑... 붙여...”“이 일 그 누구에게도 얘기해서는 안 돼요. 알겠죠? 앞으로 어떻게 할지 잘 계획해 봐요.”이 말 또한 임우정의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누구에게도 얘기해서는 안 돼요... 앞으로 잘 계획해봐요...”임우정은 제대로 듣지도 못한 얘기를 강서연에게 전부 얘기했다.강서연은 그 얘기를 듣고 마음이 움찔했다. 어머니의 말씀이 갑자기 귓가에 맴돌았다.“최 서방 잘 잡고 있어야 해. 나중에 갑자기 첫사랑이라도 나타나면 어떡해?”‘설마 진짜 첫사랑이 돌아온 거야?’강서연은 또 문득 강주에 있을 때가 떠올랐다. 윤찬이 16살이 됐다는 소리를 듣고 최연준은 우쭐했었다.“내가 16살일 때는...”그러더니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때 강서연은 그가 16살에 벌써 첫사랑을 만난 건 아닌지, 심지어 연애도 한 건 아닌지 의심했었다.그 의심이 현실이 되었단 말인가?“서연아, 서연아.”강서연이 한참 동안 말이 없자 임우정은 조급해지지 시작했다.“서
그날 최연준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강서연은 한창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최연준은 회사 일이 하도 바빠 점심도 대충 때우고 다시 중요한 업무를 처리했다. 그렇게 오후가 돼서야 모든 일이 끝났고 속이 빈 나머지 위가 째질 듯이 아팠다.예전에 그가 위병에 걸린 건 강서연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고 했었는데 진짜로 그대로 되었다.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찌르자 최연준은 갑자기 허기가 졌다. 그는 바쁘게 움직이면서 요리를 하는 강서연을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이런 밥 냄새가 집안에 가득 퍼졌던 강주에서의 나날들이 너무도 그리웠다.최연준이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겉옷을 벗은 후 주방으로 가려던 그때 강서연이 생선찜을 들고나왔다.“왔어요?”강서연은 햇빛처럼 찬란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그런데 최연준은 되레 움찔했다. 남자의 쓸데없는 육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그녀의 웃음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경실 아주머니에게 오늘 쉬라고 했어요.”강서연은 다른 요리들도 하나씩 내왔다. 국이며 반찬이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까지 아주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그녀의 반짝이는 두 눈에 웃음이 담겨 있었다.“오늘 저녁 요리는 전부 내가 했어요. 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이에요.”최연준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강서연은 밥과 국을 떠서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참마국이었는데 예전에는 아주 싫어했었지만 강서연을 만난 후로 참마를 좋아하게 되었다.그리고 새우 마늘찜과 생선찜도 만들었다. 색과 향, 그리고 맛이 모두 완벽하여 딱 봐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이런 행복한 나날이 정말로 오랜만인 것 같다.최연준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자연스럽게 밥그릇을 들고 쭉 내밀었다. 그녀가 생선 눈알을 집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강서연은 생선 눈알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줘야 한다고 했었다.하지만 강서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최연준이 고개를 든 순간 그녀의 웃을 듯 말 듯 하는 눈빛과 딱 마주쳤다.마음이 움찔한 최연준은 조용히 밥그릇을 내려놓았다.“얼른
‘첫사랑?’그는 또다시 멍해졌다.‘가만히 있다가 이걸 왜 묻는 거지? 난 첫사랑도 없는데. 하지만 오늘 이 저녁은 뭔가 준비를 단단히 한 게 분명해...’최연준은 심호흡을 크게 했다. 절대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질문을 할 그녀가 아니다. 누군가 그녀 앞에서 쓸데없는 헛소리를 한 게 틀림없었다.하여 지금 급선무는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선을 긋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티를 내서는 안 되고 자연스럽게 발을 빼야 했다. 최연준은 이런 시험 정도는 쉽게 견딜 수 있다는 걸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그다음 강서연에게 쓸데없는 얘기를 한 사람을 잡아내서 육경섭에게 맡길 생각이다. 그가 고문하든 뭘 하든 그건 육경섭의 일이다.“뭐 해요?”강서연은 작은 손을 흔들었다.“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요? 이젠 나와 말도 섞기 싫어요?”“그런 거 아니야.”최연준이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화들짝 놀란 강서연은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그를 빤히 보았다. 최연준은 다급하게 그녀의 손을 잡고 충심을 표했다.“서연아, 이 질문은 생각할 필요도 없어.”“네?”“무조건 이수 씨 남자친구 잘못이야.”최연준이 또박또박 말했다.“이수 씨와 결혼까지 하기로 했으면 당연히 이수 씨에게 숨기는 게 있으면 안 되지. 부부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게 믿음이야. 믿음이 있어야 평생 함께하지. 그리고 그런 사람이 첫사랑을 마음에 품을 자격이나 있어? 와이프로도 부족하대? 왜 첫사랑과 연락하는 건데? 정말 너무했어. 이건 파렴치한 짓이야!”강서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당하고 진지한 그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따뜻해졌고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강서연은 그저 떠보고 싶었을 뿐인데 그가 이렇게까지 흥분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연준 씨, 나...”“여보.”최연준이 계속하여 말했다.“그런 남자는 살아있을 자격도 없어.”그러더니 젓가락으로 생선 눈알을 집어 밥 위에 휙 던졌다.그 모습에 강서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가까스로 참았다. 어깨가 으쓱거렸고 마음도 따뜻
“하 매니저님,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죄송합니다.”하 매니저가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가끔 색소폰이 흘러나오는 조용한 술집이었는데 전화를 받으면 옆 사람도 통화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곁에 있던 방한서는 의아한 듯 그를 올려다보았고 위스키를 막 마시려던 찰나 다시 묵묵히 손을 내렸다.하 매니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서연 씨께서 늦은 시간에 무슨 일입니까?”“한 사람에 대해 조사해주세요.”강서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 사람에 대해서 하나도 빠트림 없이 알아봐 주세요! 제가 원하는 건 인터넷에 있는 공식 자료가 아니에요... 하 매니저님께서는 제 뜻을 이해하죠?”“네,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서연 씨께서 조사하려고 하는 대상이 누구예요?”“정섭 엔터테인먼트 성설연입니다.”하 매니저는 잠시 멈칫하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방한서를 바라보았다.그는 평소에도 머리가 빨리 돌아가고 강서연의 사람됨을 잘 알기 때문에 그녀가 아무 이유 없이 남을 조사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성설연이라는 이름은 하 매니저도 들어본 적이 있다. 엄친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최근에 정섭 엔터테인먼트로 계약되었다.그렇다면 강서연이 성설연을 조사하고 싶은 것은 임우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인가?방한서는 순간 안색이 변했다. 그는 속사정을 알고 있었으나 도련님께서 절대로 밖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셨기 때문에 방한서는 절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강서연이 오해할 수 있다!방한서는 최연준을 지키려는 마음이 굴뚝같아 양손으로 쉬지 않고 하 매니저에게 손짓을 해서 강서연에게 성설연과 최연준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설명하게 했다.하 매니저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가 왜 손으로 날뛰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잠시 침묵하는 사이에 강서연은 바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하 매니저님 주변에 다른 사람도 있어요?”“서연 씨, 그게...”하 매니저는 착실한 사람이어서 그녀에게 숨기지 않았다.“오랜만에 다들 잔업이 없어서 한서 씨랑 술
“정 선생님, 아직도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으신가요? 영미가 대체 얼마나 좋은 조건을 내걸었기에, 백인서를 모함하는 데 가담한 거죠?”정대명은 눈동자를 굴리며 머뭇거렸다. 어디까지 입을 열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당신이 인서의 양아버지라는 말은 사실입니까?”“그...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진실이야!”“그렇다면 딸을 키운 정도 있을 텐데 왜 모함하려 하신 거죠?”정대명의 몸이 떨렸고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정 선생님, 이제 영미조차도 당신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신다면 감옥에서 나올 수 없게 될 겁니다!”그때, 바깥에서 소연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소아는 정대명을 매섭게 노려본 뒤, 사람을 시켜 문을 잠그도록 지시했다.소연화는 최군형과 최지용을 데리고 들어왔다.“여보!”최군형은 강소아를 보자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권온유와 정승우, 두 아이 모두 찾았어!”“정말인가요?”“그래.”최지용도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드디어 인서의 억울함을 풀 수 있게 됐어.”“인서는 원래부터 결백했어요!”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누가 아이들을 찾았나요?”“아이들이 어찌나 영리하던지, 스스로 빠져나왔더군.”최군형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그날 밤, 우리가 정대명을 찾았을 때, 정대명의 머리가 다쳐 있었던 거 기억하지? 그 틈을 타 도망쳤대. 길에서 착한 운전사분을 만나 도움을 받았고 그 운전사가 집까지 데려다줬어. 차 안에서 정승우가 휴대전화를 빌렸는데 다행히도 권온유가 자기 엄마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어서 덕분에 바로 연락할 수 있었어. 아마 20분 후면, 두 아이 모두 안전하게 권씨 집안에 도착할 거야.”“정말 놀랍군요...”강소아는 감탄이 담긴 눈빛으로 답했다.“이렇게 어린아이들이 그런 상황 속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니. 역시 아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어요! 저도 이제부터 가원이에게 제 전화번호를 외우게 해야겠어요!”“그런 말 하지 마!”최군형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영미의 마음속엔 불안이 가득 찼다. 그러다 문득 시장 선거의 마지막 대결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 스쳤다.지금이라도 폭탄 같은 뉴스가 터진다면 사람들의 관심은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쏠릴 것이 분명했다.그리고 그 뉴스가 백인서와 관련된 것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영미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가에 자신감 넘치는 차가운 미소를 띠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기자와의 약속을 잡았다.“조순철 씨의 외손녀가 실종된 사건, 알고 계십니까?”카페의 한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였다. 영미는 얼굴을 거의 가릴 만큼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맞은편에는 기자는 커피잔을 천천히 저으며 영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이건 단순한 어린이 실종 사건이 아닙니다. 누군가 계획적으로 벌인 일입니다.”“영미 씨.”기자가 녹음기를 켜며 말했다.“아시는 내용을 모두 말씀해 주세요. 자료는 제가 정리해 영미 씨 말씀대로 보도하겠습니다.”“좋아요.”영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제가 알고 있기로, 권씨 가문의 어린 딸을 데려간 사람은 바로 그 공익학교 프로젝트에 있던 한 학생입니다. 그리고 그 학생은 백인서의 지시를 받았죠!”녹음기를 쥔 기자의 손이 떨렸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강소아는 방문 앞을 서성이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그 방에는 정대명이 갇혀있었는데 강소아가 아무리 질문해도 정대명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육경섭은 딸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고 희철을 시켜 예전 식으로 정대명을 다루려 했지만, 강소아가 막아섰다.현재 육씨 가문은 이미 정식 사업가로 자리 잡은 상황이었다.과거의 폭력적인 방식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강소아는 육경섭을 설득해 물러서게 한 뒤, 다음 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소연화가 급히 뛰어왔다.“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소연화는 휴대전화를 내밀었다.화면에는 뉴스가 떠 있었고 제목은 눈에 띌 정도로 충격적이었다.[조씨 공익학교에서 터진 충격적인 추문, 관리직
가끔 차가 지나갔지만, 정승우가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도 아무도 멈춰 서지 않았다.어둠이 내려앉았고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며칠 동안 육체와 마음이 지친 권온유는 이제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정승우는 어쩔 수 없이 온유를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길을 걸었다.“오빠...”권온유는 울먹이며 말했다.“해가 졌어요. 저... 무서워요.”“괜찮아.”정승우는 뒤돌아 미소를 지었다.“오빠가 집에 데려다줄게.”“오빠, 우리 그냥 돌아가요...”“뭐라고?”권온유의 시선이 정승우의 피로 물든 발에 닿았다.“발이 많이 아프죠?”권온유의 작은 얼굴 위로 눈물이 두 줄기 흘러내렸다.“오빠, 저 내려주세요. 그냥 돌아가요...”“온유야?”권온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그 집이 낡고 춥긴 해도... 오빠 발에서 피가 나진 않잖아요!”정승우는 멍하니 잠시 굳어 있다가 그 어눌한 말 속에 담긴 다정함을 깨달았다.이 작은 아이는 납치당했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정승우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정승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작은 새들이 집으로 향해 줄지어 날고 있었다.정승우는 온유를 데리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다짐했다.“바보야.”정승우는 온유를 내려놓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난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그 사람이... 우리를 때릴까요?”“그럴 거야.”정승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린 시절, 정대명에게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탈출할 때 그의 뒤통수를 내려친 한 방은 그동안의 빚을 모두 갚은 셈이었다.“그런데 오빠, 그 사람은 오빠 아빠잖아요?”권온유는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하지만 오빠가 아프다고 제가 말했을 때 오빠 아빠가 들어왔었잖아요.”정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정대명이 들어온 것은 아마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죽으면 함께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없어질까 봐서였었다.정대명은 단지
차 안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영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정대명에게 다가갔다. 그의 머리 아래로 어두운 핏자국이 퍼져 있었고 그 흔적은 이미 굳어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영미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차가운 눈빛으로 정대명을 내려다보다가 거칠게 발길을 휘둘렀다.“일어나요!”강소아와 최군형도 다가와 공장 안을 살폈지만 안은 고요히 비어 있었다.“아이들은요?”“아이고...”정대명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살려줘, 살려줘... 저 괘씸한 녀석이!”“정대명 씨!”영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어쨌든 이번 일은 영미가 자신 있게 권온유의 행방을 안다고 장담한 일이었다.영미는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함께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확신에 차 말했다.그런데 지금... 정대명은 다쳐 쓰러져 있고 두 아이는 사라졌었다.백인서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영미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정대명은 도움을 청하려다 영미가 눈짓을 주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영미의 눈길을 따라 보니 최군형과 강소아도 함께 와있었다.정대명은 예전에 영미가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정대명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신이 정대명인가요?”최군형이 다가가 물었다.정대명은 말끝을 흐리며 최군형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백인서의 양아버지시고?”최군형은 다시 물었다.“당신이 당신 아들과 함께 권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게 맞나요?”“아니야, 나 아니야!”정대명은 크게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이봐, 동생, 난 억울해! 내 아들 녀석이 나를 해치려고 했어! 내 머리를 봐, 그 자식이 벽돌로 내리쳤다니까!”“그만해요!”영미는 정대명의 말이 길어질수록 상황이 불리해질 것을 우려해 정대명을 노려보며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했다.강소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들의 서툰 수법이 한심하기만
경찰서 밖에서 최지용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젊은 경찰관이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최지용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정호야!”정호라는 젊은 경찰관은 최지용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녀석!”최지용은 정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툭 날리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야?”정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방금 최씨 집안에서 백인서를 데려간 사람 중에 정호도 있었다. 최지용도 놀라웠지만, 영미 역시 경찰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떠나기 전, 정호가 살짝 눈짓을 보냈고 최지용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지용이 형.”정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께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고 계시니 문제없을 겁니다!”“도대체 누구 지시로 백인서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소아 아가씨예요!”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소아 아가씨가 갑자기 지시한 거라 사전에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최지용은 살짝 놀랐다. 강소아의 지시라니.“형수님께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실종되기 전에 형수님께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경찰이 형수님을 데려가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절차입니다.”최지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피식 웃음을 지었다.강소아가 이런 ‘당연한 절차’를 이용해 백인서를 경찰서로 보낸 이유는 경찰서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 백인서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해도 경찰서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경찰서 안에는 일을 봐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백인서가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 힘든 일 없이 외부의 소란도 피할 수 있는 셈이었다.최지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강소아는 정말 자매를 위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방안을 생각해 내다니!“지용이 형.”정호가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께서
영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소아 언니, 저를 믿지 않으세요?”“난 오직 사실만을 믿어.”“권씨 가문의 딸이 실종된 사건에 백인서 씨의 양아버지와 남동생이 관련되었어요, 그게 바로 사실이에요!”강소아는 순간 멍하니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려 했다.세상에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호텔 뒷뜰에 있는 그 CCTV가 정말 완전히 고장 났다고 생각하는 걸까? 육씨 가문과 최씨 가문이 힘을 합쳐 그 고장 난 CCTV 하나도 못 고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최군형은 강소아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안심시키며 슬며시 휴대전화를 건넸다.강소아는 화면을 확인했다. 최군형의 부하가 보낸 메시지였다.“도련님, CCTV 데이터를 복구 중입니다. 곧 진실이 밝혀질 겁니다!”강소아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영미가 이렇게까지 백인서를 몰아세우는 걸 보니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꺼림칙한 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어차피 꼬리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었기에 그저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바로 그때, 집사가 다소 당황한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집사의 뒤에는 몇 명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신분을 밝힌 후 방 안을 둘러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기 백인서 씨가 계십니까?”표아정은 등을 꼿꼿이 펴고 대답했다.“경찰관님께서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당신이 백인서 씨인가요?”“저는...”“백인서 씨가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신고를 접수했습니다!”“뭐라고요?”백인서는 얼굴이 창백해졌다.“백인서 씨, 조사에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권온유가 납치된 지 하루가 지났다.그동안 정대명은 단 한 번 음식을 가져왔는데, 그것도 차갑게 식은 죽 한 그릇과 딱딱한 빵 한 조각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귀하게 자란 권온유에게 이런 음식은 처음이었다. 울고 싶었지만, 감히 울지 못하고 그저 눈물을 참으며 빵을 조금씩 뜯어 먹고 있었다.정승우는 그런 온유의 모습을 보고
“아줌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럼,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부 말씀드릴게요!”영미는 입가에 교만한 미소를 띠며 백인서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보았다.“백인서 씨의 친어머니인 백홍은 인신매매범이었다는 사실, 모두 아셨나요? 백인서 씨의 어머니는 백인서를 정대명의 집에 맡겼고... 흥! 정대명의 아내도 백홍이 납치해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잖아요. 제 생각엔... 인신매매범의 딸이라면 그런 일쯤은 익숙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권온유의 실종이 정말로 백인서 씨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시나요?”“영미!”강소아가 나서며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허위 사실을 퍼뜨리지 마!”“소유 아가씨, 억울하네요!”영미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조사한 건 다 아가씨를 위한 거예요! 딸도 있는 사람이 백인서를 곁에 두고도 마음이 놓이세요?”“그만해!”최지용이 크게 소리쳤다.백인서는 몸을 떨며 믿기지 않는 눈으로 최지용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최지용의 얼굴에는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최지용은 굳건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백인서를 지키고 있었다.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백인서를 아끼고 있었다.백인서는 코끝이 찡해지며 본능적으로 최지용의 손을 꼭 붙잡았다. 최지용의 따스한 손은 백인서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그 온기가 어둠의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다.최지용은 백인서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고 다시 영미를 바라볼 때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영미야.”최지용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저 넘어가는 거야. 더 이상 선을 넘지 마.”최군형도 나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백인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모르겠어요? 영미 아가씨, 우리 최씨 가문 사람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영미는 순간 긴장했다. 최군형의 말 속엔 어딘가 숨은 뜻이 있는 듯했다.최군형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파악하기 어려웠다.표아정은 천천히 일어나 어깨에 걸친 숄을
백인서는 복잡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그때 최지용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표아정이었고 다급한 목소리로 서둘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최지용은 결국 어머니의 말에 따라 백인서를 데리고 최씨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넓은 거실에는 최군형과 강소아도 나와 있었고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백인서가 들어서자, 표아정이 백인서를 올려다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다.강소아는 백인서와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미소 지었다.백인서가 의아해하던 찰나, 영미가 천천히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아줌마, 지용 오빠. 제가 권온유의 행방을 알아냈어요.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뭐라고?”최지용이 놀라서 물었다.“네가 어떻게 아는데?”영미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지용 오빠,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정보가 우리보다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최씨 가문은 만능이 아니에요, 최씨 가문도 모르는 정보가 있다고요.”표아정은 가볍게 기침하며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았다.최군형과 강소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주목하고 있었다.최지용의 이마에는 점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미의 눈에는 한 줄기 교만한 빛이 번졌다.영미는 오는 길에 이미 모든 계획을 짰다. 정대명의 말이 맞았다. 누구를 훔치든 상관없었다. 인신매매범의 딸인 백인서가 아이들을 해치러 다닌다는 누명을 씌우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하면 백인서는 모두의 신뢰를 잃게 될 터였다.영미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강소아가 인신매매범을 곁에 둘 리 없다고 믿었고, 최지용 역시 이 사실을 알면 더는 백인서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영미는 정대명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영미는 권온유를 넘기고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한패가 되어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주장할 계획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인서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궁지에 몰릴 것이었다!“지용 오빠.”영미는 고개를 돌려 최지용을 바라보며 한 글자씩 천천히 말했다.“권온유는 정승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