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현수가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담배꽁초를 바닥에 휙 던지자 양털 카펫에 순식간에 시커먼 구멍이 뚫렸다.양연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망해가는 이 집안에서 양털 카펫은 얼마 남지 않은 비싼 물건이었다.“구현수 이 나쁜 새X!”양연이 주먹을 불끈 쥐고 그에게 달려들려 하자 강명원이 말렸다.“날 왜 막아요?”“이리 와.”강명원이 두 눈을 부릅떴다. 지금까지 양연은 계속 강명원에게 잡혀 살았고 강명원이 두 눈만 부릅뜨면 양연은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물러섰다.강명원은 힘들게 바닥에서 일어났고 허리가 죽을 것처럼 아팠다.“구현수.”강명원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네 말이 맞아. 우린 대대로 친분을 이어왔으니 널 보살피는 건 당연한 거야.”구현수는 그를 보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여기서 공짜로 먹고살아도 돼.”강명원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앞으로는 내가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해야 해.”“허!”구현수의 눈빛이 싸늘해지더니 그의 목을 덥석 조였다. 화들짝 놀란 강명원은 미처 손쓸 새가 없었고 하마터면 숨이 막혀 죽을 뻔했다.“너... 이거 놔...”“빌어먹을 영감탱이 같으니라고.”구현수는 이를 꽉 깨물었다.“이런 낡아빠진 집에 내가 사는 건 당신의 체면을 세워주는 거야.”강명원의 두 눈에 핏발이 섰고 얼굴도 검붉게 변했으며 죽음의 공포가 점점 덮쳐오는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이 하얘지고 정신을 거의 잃으려던 그때 구현수가 갑자기 손을 놓았다.강명원은 쿵 하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옆에 있던 양연은 사색이 된 얼굴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오늘 너무 피곤해요.”구현수는 손을 툭툭 털며 차갑게 웃었다.“어머님, 가서 밥 좀 해주시겠어요? 너무 풍성할 필요는 없어요. 닭고기와 생선 요리만 있으면 돼요.”“구현수 너...”강명원은 심하게 기침하다가 구현수가 나가기 전에 소리를 질렀다.“강서연과 결혼하기 싫어?”구현수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뚫어
양연의 울부짖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구현수는 손을 툭툭 털고 강명원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 후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집에서 밥을 주지 않으니, 밖에 나가서 먹어야지.구현수가 나간 후 양연은 한참 동안 바닥에 멍하니 앉아있었고 두 눈에 절망이 가득했다.강명원은 앓는 소리를 내며 겨우 일어나 절뚝거리면서 서재로 들어갔다. 그는 주머니를 만져보았다. 다행히 구현수는 돈만 밝혔고 휴대 전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지갑 안에 사실 돈이 얼마 없었고 휴대 전화 안에 저장된 것이야말로 최후의 적금이나 다름없었다.그 시각, 양연은 거실에서 처량하게 울었다.강명원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는 누군가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통화연결음이 한참이나 울렸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가 전화를 끊으려던 그때 누군가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 회장님?”“허, 회장님이라고 부르지도 마.”강명원은 그의 말투에 담긴 조롱을 단번에 알아챘다. 하지만 따져 물을 시간이 없어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얘기했다.“지석아, 언제 구현수를 데려갈 거야?”“그게... 아직 도련님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어요.”“최지한이 이 일을 진작 잊은 건 아니겠지?”“조급해하지 마세요, 회장님.”인지석은 그를 비꼬았다.“아무튼 회장님의 딸이 지금 도련님의 곁에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너...”강명원은 말문이 막혀버렸다.“인지석, 저 재수탱이를 당장 데려가. 계속 이대로 뒀다간 내가 버티지 못해!”인지석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데 짧디짧은 침묵이었지만 강명원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심지어 인지석의 숨소리에서 냉기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회장님, 회장님은 그저 강진 그룹을 다시 일으켜 세울 자금이 필요한 거 아닌가요?”인지석이 천천히 말했다.“회장님의 딸 강서연 말고는 회장님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그렇긴 하지만...”“하지만 우리가 다 함께 힘을 합쳐야죠.”인지석이 싸늘하게 웃었다.“며칠만 더 버티세요. 얼마 후에 구현수에게 강주로 돌아
강서연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사실 남자 셋이 술집 룸에 앉아서 술을 마시며 얘기를 나누는 건 딱히 이상할 게 없었다.“우정 언니, 정확히... 들은 거 맞아요?”강서연은 그녀의 성격이 급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첫사랑이 연준 씨 첫사랑인 건 어떻게 확신해요?”“내가 직접 들었어.”“하지만 술집이 복잡하잖아요. 잘못 들은 거 아니에요?”“그럼... 내가 들은 걸 곧이곧대로 얘기해줄게.”임우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때의 실제 상황은 이러했다.그날 남자 몇이 룸으로 들어가 로열 살루트를 마시던 그때 배경원이 큰소리로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찬혁의 첫사랑이 돌아왔대요. 다들 알고 있어요?”하지만 임우정의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첫사랑이 돌아왔대요. 다들 알고 있어요?”“왜 하필 이때 돌아왔대요? 그래서 연준 형이랑 상의해 보려고요. 찬혁이와 곽보미를 어떻게 붙여놓으면 놓을지.”방안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렸다.“왜 하필 이때 돌아왔대요? 연준 형이랑... 붙여...”“이 일 그 누구에게도 얘기해서는 안 돼요. 알겠죠? 앞으로 어떻게 할지 잘 계획해 봐요.”이 말 또한 임우정의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누구에게도 얘기해서는 안 돼요... 앞으로 잘 계획해봐요...”임우정은 제대로 듣지도 못한 얘기를 강서연에게 전부 얘기했다.강서연은 그 얘기를 듣고 마음이 움찔했다. 어머니의 말씀이 갑자기 귓가에 맴돌았다.“최 서방 잘 잡고 있어야 해. 나중에 갑자기 첫사랑이라도 나타나면 어떡해?”‘설마 진짜 첫사랑이 돌아온 거야?’강서연은 또 문득 강주에 있을 때가 떠올랐다. 윤찬이 16살이 됐다는 소리를 듣고 최연준은 우쭐했었다.“내가 16살일 때는...”그러더니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때 강서연은 그가 16살에 벌써 첫사랑을 만난 건 아닌지, 심지어 연애도 한 건 아닌지 의심했었다.그 의심이 현실이 되었단 말인가?“서연아, 서연아.”강서연이 한참 동안 말이 없자 임우정은 조급해지지 시작했다.“서
그날 최연준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강서연은 한창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최연준은 회사 일이 하도 바빠 점심도 대충 때우고 다시 중요한 업무를 처리했다. 그렇게 오후가 돼서야 모든 일이 끝났고 속이 빈 나머지 위가 째질 듯이 아팠다.예전에 그가 위병에 걸린 건 강서연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고 했었는데 진짜로 그대로 되었다.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찌르자 최연준은 갑자기 허기가 졌다. 그는 바쁘게 움직이면서 요리를 하는 강서연을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이런 밥 냄새가 집안에 가득 퍼졌던 강주에서의 나날들이 너무도 그리웠다.최연준이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겉옷을 벗은 후 주방으로 가려던 그때 강서연이 생선찜을 들고나왔다.“왔어요?”강서연은 햇빛처럼 찬란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그런데 최연준은 되레 움찔했다. 남자의 쓸데없는 육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그녀의 웃음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경실 아주머니에게 오늘 쉬라고 했어요.”강서연은 다른 요리들도 하나씩 내왔다. 국이며 반찬이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까지 아주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그녀의 반짝이는 두 눈에 웃음이 담겨 있었다.“오늘 저녁 요리는 전부 내가 했어요. 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이에요.”최연준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강서연은 밥과 국을 떠서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참마국이었는데 예전에는 아주 싫어했었지만 강서연을 만난 후로 참마를 좋아하게 되었다.그리고 새우 마늘찜과 생선찜도 만들었다. 색과 향, 그리고 맛이 모두 완벽하여 딱 봐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이런 행복한 나날이 정말로 오랜만인 것 같다.최연준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자연스럽게 밥그릇을 들고 쭉 내밀었다. 그녀가 생선 눈알을 집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강서연은 생선 눈알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줘야 한다고 했었다.하지만 강서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최연준이 고개를 든 순간 그녀의 웃을 듯 말 듯 하는 눈빛과 딱 마주쳤다.마음이 움찔한 최연준은 조용히 밥그릇을 내려놓았다.“얼른
‘첫사랑?’그는 또다시 멍해졌다.‘가만히 있다가 이걸 왜 묻는 거지? 난 첫사랑도 없는데. 하지만 오늘 이 저녁은 뭔가 준비를 단단히 한 게 분명해...’최연준은 심호흡을 크게 했다. 절대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질문을 할 그녀가 아니다. 누군가 그녀 앞에서 쓸데없는 헛소리를 한 게 틀림없었다.하여 지금 급선무는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선을 긋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티를 내서는 안 되고 자연스럽게 발을 빼야 했다. 최연준은 이런 시험 정도는 쉽게 견딜 수 있다는 걸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그다음 강서연에게 쓸데없는 얘기를 한 사람을 잡아내서 육경섭에게 맡길 생각이다. 그가 고문하든 뭘 하든 그건 육경섭의 일이다.“뭐 해요?”강서연은 작은 손을 흔들었다.“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요? 이젠 나와 말도 섞기 싫어요?”“그런 거 아니야.”최연준이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화들짝 놀란 강서연은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그를 빤히 보았다. 최연준은 다급하게 그녀의 손을 잡고 충심을 표했다.“서연아, 이 질문은 생각할 필요도 없어.”“네?”“무조건 이수 씨 남자친구 잘못이야.”최연준이 또박또박 말했다.“이수 씨와 결혼까지 하기로 했으면 당연히 이수 씨에게 숨기는 게 있으면 안 되지. 부부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게 믿음이야. 믿음이 있어야 평생 함께하지. 그리고 그런 사람이 첫사랑을 마음에 품을 자격이나 있어? 와이프로도 부족하대? 왜 첫사랑과 연락하는 건데? 정말 너무했어. 이건 파렴치한 짓이야!”강서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당하고 진지한 그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따뜻해졌고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강서연은 그저 떠보고 싶었을 뿐인데 그가 이렇게까지 흥분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연준 씨, 나...”“여보.”최연준이 계속하여 말했다.“그런 남자는 살아있을 자격도 없어.”그러더니 젓가락으로 생선 눈알을 집어 밥 위에 휙 던졌다.그 모습에 강서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가까스로 참았다. 어깨가 으쓱거렸고 마음도 따뜻
“하 매니저님,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죄송합니다.”하 매니저가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가끔 색소폰이 흘러나오는 조용한 술집이었는데 전화를 받으면 옆 사람도 통화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곁에 있던 방한서는 의아한 듯 그를 올려다보았고 위스키를 막 마시려던 찰나 다시 묵묵히 손을 내렸다.하 매니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서연 씨께서 늦은 시간에 무슨 일입니까?”“한 사람에 대해 조사해주세요.”강서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 사람에 대해서 하나도 빠트림 없이 알아봐 주세요! 제가 원하는 건 인터넷에 있는 공식 자료가 아니에요... 하 매니저님께서는 제 뜻을 이해하죠?”“네,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서연 씨께서 조사하려고 하는 대상이 누구예요?”“정섭 엔터테인먼트 성설연입니다.”하 매니저는 잠시 멈칫하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방한서를 바라보았다.그는 평소에도 머리가 빨리 돌아가고 강서연의 사람됨을 잘 알기 때문에 그녀가 아무 이유 없이 남을 조사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성설연이라는 이름은 하 매니저도 들어본 적이 있다. 엄친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최근에 정섭 엔터테인먼트로 계약되었다.그렇다면 강서연이 성설연을 조사하고 싶은 것은 임우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인가?방한서는 순간 안색이 변했다. 그는 속사정을 알고 있었으나 도련님께서 절대로 밖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셨기 때문에 방한서는 절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강서연이 오해할 수 있다!방한서는 최연준을 지키려는 마음이 굴뚝같아 양손으로 쉬지 않고 하 매니저에게 손짓을 해서 강서연에게 성설연과 최연준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설명하게 했다.하 매니저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가 왜 손으로 날뛰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잠시 침묵하는 사이에 강서연은 바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하 매니저님 주변에 다른 사람도 있어요?”“서연 씨, 그게...”하 매니저는 착실한 사람이어서 그녀에게 숨기지 않았다.“오랜만에 다들 잔업이 없어서 한서 씨랑 술
신작 영화 준비가 막바지에 다다랐고 곧 촬영이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곽보미는 이에 대해 관심이 많지 않아 몇 번의 회의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강서연이 커피를 마시자고 불러내자 그녀는 커피를 두 모금 마시고는 내려놓고 생각에 잠긴 채 창밖을 바라봤다.강서연은 그런 모습이 마치 영화나 드라마 속 여주인공의 실연을 닮았다는 느낌을 받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만약 곽보미가 정말로 실연을 당했다면 영화의 진도를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는가? 곽 감독처럼 재능으로 먹고사는 사람에게는 기분과 영감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강서연은 알고 있었다.강서연은 곽보미를 일깨워 주고 싶었지만 이런 일은 당사자가 주동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그녀도 묻기 어렵다.강서연은 심심해서 핸드폰을 꺼내 웹 서핑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동영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화면에는 남다른 미모를 가진 여자가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음색이 매력 있어 팬들이 끊임없이 ‘좋아요’ 를 눌러 줬고 실시간 시청하는 사람 수가 벌써 10만 명을 돌파하였다.“후.”강서연은 담담하게 웃었다. “성설연의 호소력이 장난 아니네요. 경섭 씨가 이번에 엄청 많은 돈을 벌어들이겠어요.”“네?”성설연이라는 세 글자를 듣자마자 곽보미는 감전된 듯 벌떡 일어나 강서연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그리고 화면을 똑바로 응시하며 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이게... 뭐예요!”곽보미는 화면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노래도 별로네요.”강서연이 곽보미를 바라보았다.여태껏 남자답기만 했던 곽 감독의 얼굴에는 어린 소녀가 질투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질투심이 가득한 그런 것은 아니었고 소심한 질투 뒤에는 은은한 상실감이 있었다.곽보미는 테이블 위의 휴지를 집어 한 줄 한 줄 찢었다.강서연은 이상해했다.“내가 호소력이 있다고 딱 한 마디만 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반응이 크세요?”성설연은 최연준의 첫사랑이어서 반응이 커야 할 사람은 강서연이었어야 했다.“그게...”곽보미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반쯤 뜸을 들였다가
강서연이 잠시 멈칫했다.“유 변호사님?”곽보미가 급하게 말을 바꾸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물어보는 거예요! 유 변호사가 최 대표와 절친이잖아요. 그래서 나는 최 대표가 있는 곳에 유 변호사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은근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곽보미는 강서연의 예리함으로 눈치챘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애써 밝은 미소를 지어서 속내를 감추려 했다.“사실... 일이 있어서 유 변호사를 찾고 싶은 거예요. 영화 판권에 관한 법률 조문과 또...”“영화 판권?”강서연은 또 의아했다.“그 부분에 대해서 왜 걱정하는 거예요? 어진 엔터테인먼트의 법무팀은 전문성이 엄청 강해요. 이미 계약서를 작성했을걸요!”“...”곽보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이 열이 나는 것처럼 후끈 달아올랐다.강서연은 가볍게 웃기 시작했다.평소의 곽보미라면 이렇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더군다나 그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오늘의 곽보미를 보고 오히려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면을 발견했다.“유 변호사님은 갈 것 같아요.”강서연이 말했다.“그때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세요.”곽보미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식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성설연는 분장실에 앉아 매니저가 그녀에게 짜준 각종 스케줄을 집중적으로 듣고 있었다.귀국한 후부터 성설연은 쉴 새 없이 바쁘게 일하기 시작해서 계약도 하고 음반도 냈다. 다행히도 바쁘게 살아온 삶이 마침내 조금이나마 보답을 얻은 것 같다.그녀는 음악계에 뛰어든 다크호스가 되어 짧은 시간에 수십만 명의 팬을 얻었다.게다가 마케팅을 잘해서 회사에서는 성설연에게 유학파 창작형 재녀라는 타이틀을 달아줬다. 평소 카메라 앞에서도 조용하고 겸손한 웃음을 지어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다.그러나 인지도가 많아지면서 성설연은 다소 자만해지고 일반적인 스케줄은 이미 성에 안 찼다.매니저 낸시가 다섯 번째를 읽을 때 성설연은 짜증이 나서 립스틱을 내려놓고 뒤로
“어떻게 소피아라는 걸 확신하죠?”배윤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부모님이 회사의 핵심 자료를 제게 모두 맡기셨어요. 그런데 그걸 받은 지 이틀 만에 공격을 당했죠. 이게 단순한 우연일까요?”임지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고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그 자료들은 어디 있어요?”“아마 소피아가 가지고 있을 거예요. 그 자료들은 너무 중요해서 항상 제 곁에 두고 다녔거든요. 하지만 그날 제가 기절하고 다시 깨어났을 때, 가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다만...”“다만 뭐요?”“법인 도장은 가방 안에 없었어요.”배윤아는 미소를 지으며 약간 능글맞은 표정을 지었다.“법인 도장은 본사가 모든 자원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이에요. 엄마가 제게 주자마자 저는 바로 군성이에게 맡겼어요. 지금 법인 도장은 최씨 가문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어요.”“그렇다면 소피아가 자료를 손에 넣더라도 아무 쓸모가 없겠군요?”배윤아는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똑똑하네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었다.“배씨 가문 사람들도 다 무능하진 않나 보네요.”“임 선생님...”배윤아는 고개를 약간 숙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오빠가 송윤지에게 잘못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는 임 선생님이 우리 가문에 복수하려고 저를 납치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요. 선생님은 그런 수준 낮은 사람이 아니니까요.”임지강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확실히 똑똑한 사람이네요.”그러나 배윤아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그런데... 정말 우리 오빠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요?”임지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임지강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가족들에게 안부 전화라도 주세요.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실 거예요.”“이미 군성이에게 연락을 했어요.”배윤아가 말했다.“군성이에게 조용히 아빠에게 알려 드리라고 했어요. 엄마는 충격을 받으시면 안 되니까요... 하지만 제 상황을 오빠에겐 비밀로 해야 해요. 오빠와 소피아는 제가 조 회장님에게 잡혀 있고 선생님이 일부러 복수를 위해 조 회장님을
“설마...”“소피아!”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이름을 입에 올린 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정말 소피아일 줄이야.”임지강이 담배를 꺼내 들었다. 조 회장이 눈짓을 하자 부하가 공손히 불을 붙였다.방 안은 금세 니코틴 냄새로 가득 찼고 임지강은 잠시 침묵하며 담배 재를 털어냈다.“아마... 조 회장님도 지금 저와 같은 처지겠죠.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했다는 누명을 쓰게 됐으니 말이에요.”“그러게 말이야.”조 회장은 차갑게 웃었다.“겉으로는 온갖 아부를 떨면서도 뒤에서는 이런 음모를 꾸미고 내가 배윤아를 납치했다고 소문까지 퍼뜨리고 있더군.”“회장님과 제가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의심의 화살을 제게도 돌리겠죠.”임지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면, 연루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겁니다. 저 때문에 저의 매형까지 연루되면, 배씨 가문과 육씨 가문의 사이도 틀어질 거고요.”“그 여자는 이런 식으로 우리 모두를 자기 손바닥 위에서 가지고 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조 회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웃기지 말라 그래.”조 회장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임지강은 조 회장의 꽉 쥐어진 주먹을 발견했다. 그의 손등에는 화가 잔뜩 난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조 회장님.”임지강은 잠시 침묵한 뒤 부드럽게 말했다.“운산시 광산의 가격을 조작하도록 제가 이미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 두 광산은 이제 그렇게 가치 있는 자산이 아닙니다.”“알고 있어.”조 회장은 임지강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이 일은 원래 자네 복수를 위해 시작한 일이야. 자네의 화가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내 수고도 헛된 게 아니야. 하지만 문제는...”조 회장은 손짓으로 방 안을 가리켰다.그때 방 안에서 배윤아가 몸을 뒤척이며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임지강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배윤아와 단둘이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조 회장은 잠시 망
임지강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차가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그를 철저히 파산시키고 싶습니다.”“배씨 가문 전체를 함께 무너뜨리겠다는 뜻인가?”조 회장이 묻자, 임지강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말하면, 예전의 저라면 그렇게 했겠죠. 하지만 지금은...”“지금은 마음이 약해졌다는 건가?”조 회장이 비웃듯 웃으며 말했다.“내가 알던 임지강은 그런 자비를 베풀 인물이 아닌데?”임지강도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 뒤로 누군가의 맑은 눈빛과 깨끗한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이번 일은 송윤지가 부탁해서 오게 된 것이었다.송윤지는 배윤아의 실종 소식을 듣고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 비록 배현진과 부부의 연을 맺지 못했지만, 배윤아와는 과거에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기에 친구로서 걱정되었기 때문이다.임지강 자신도 이곳에 올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송윤지의 부탁 때문이고 또 하나는 배윤아의 납치 사건이 왜 갑자기 자신에게 덮어씌워졌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임지강은 배윤아와 거의 만난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사실상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조 회장님, 전 자비를 베푸는 게 아닙니다.”임지강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단지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이미 많은데 한낱 파리 한 마리와 얽혀서 진흙탕 싸움을 벌이는 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 녀석에게 적당히 벌을 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게다가 저는 배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으니, 배씨 가문을 완전히 망가뜨릴 필요는 없습니다.”“흠...”조 회장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1조라... 적지 않은 금액이지. 배현진은 은행에서 전 재산을 담보로 대출받았다고 하더군. 이 일이 발각되면 한동안 꽤 고생하겠지.”“조 회장님, 사실 오늘 제가 온 이유는 다른 목적도 있어서입니다.”임지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약간 굽히며 공손히 말했다. 그러나 조 회장은 손짓으로 그를 제지하며 미소를 지었다.조 회장은 아무 말 없이 손짓으로 따라오라는
배현진은 병원 복도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완전히 무너진 모습이었다.“그럴 리가 없어...”한참 동안 앉아 있던 배현진은 갑자기 고개를 들며 말했다.“연준 아저씨와 서연 이모는 소피아와 함께 지낸 적이 없잖아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소피아는 절대 저를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이 녀석아,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고집을 부릴 거야.”최연준이 엄하게 꾸짖었다.배경원은 아무 말 없이 아들의 손을 잡았다. 그의 눈에는 깊은 절망이 서려 있었다.“그만해요, 셋째 형님...”배경원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지금 수정이가 응급실에 있는데, 이 아이와 더 이상 다투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없는 아들이라고 생각하려 합니다.”“아버지!”“꺼져버려!”배경원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눈빛 너머에는 모든 걸 놓아버린 듯한 깊은 허무가 스며 있었다.배현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돌아섰다. 떠나기 전, 그는 다시 돌아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윤아를 반드시 무사히 데려올게요. 엄마도 무사할 거예요. 우리 가족은... 예전처럼 다시 행복해질 거예요.”배경원은 아들에게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잠시 후, 응급실의 불이 꺼졌다. 배경원은 화살처럼 뛰어가며 아내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의사가 땀으로 흠뻑 젖은 마스크를 벗으며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배 선생님, 사모님께서는 일단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뭐라고요?”강서연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일단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건, 앞으로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다들 진정하세요.”의사는 부드럽게 설명했다.“사모님의 상태가 많이 복잡합니다. 곧바로 특수 병동으로 옮길 예정이라 당분간 면회는 어려울 겁니다. 이번 주가 아주 중요한 시기이긴 하지만, 제 판단으로는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실 가능성이 큽니다.”세 사람은 안도의 숨을 쉬며 그나마
“아내라고?”강서연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현진이와 정식으로 결혼한 적 있니? 다른 사람과 약혼한 상태에서 끼어든 건 너잖아. 명분도 없는 관계에 ‘아내’라는 말을 쓰다니, 웃음거리밖에 안 될 거야.”“최 사모님...”“갑자기 생각난 건데.”강서연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수정 씨가 쓰러졌을 때 네가 침대 옆에 있었던 거 맞지?”“아, 네.”소피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현진 씨를 대신해 효도하러 갔던 거예요. 하지만 어머님 건강이 그렇게 나쁘실 줄은 몰랐습니다.”“수정 씨가 쓰러지기 직전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말해보렴.”소피아는 순간 멈칫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말할 수 없는 이유라도 있니?”강서연은 한 발짝 다가가며 소피아를 몰아붙였다.“수정 씨는 평소 건강관리를 철저히 하던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쉽게 쓰러질 리 없지. 분명 큰 충격이 있었을 거야. 쓰러지기 직전 병실에 너 혼자 있었다며?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해.”“서연 이모,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배현진은 소피아를 자신의 뒤로 끌어당기며 소피아에게 나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복도를 따라 빠르게 사라졌다.소피아가 사라지자, 배현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서연 이모, 소피아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배현진!”강서연은 배경원이 아들을 두 번이나 때린 이유를 이제야 완벽히 이해한 듯,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너 어떻게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니? 네 엄마는 지금 저 안에 누워 있어.”“정말로 소피아와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배현진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핥으며 설명했다.“서연 이모, 사실 소피아도 자책하고 있어요. 그날 소피아도 윤아의 안전을 걱정하다가 엄마 앞에서 그만 실수로 말을 흘리고 만 거예요. 그래서...”“뭐라고?”최연준이 눈을 부릅뜨며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배현진, 네 엄마 쓰러졌을 때 넌 방에 없었잖아.”“소피아가 제게 그렇게 말했어요.”“너...”최연준은 순간
병원 응급실 밖.배경원은 의자에 주저앉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충혈된 눈으로 응급실 문을 응시하며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한때 당당했던 그의 어깨는 지금 축 처져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절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배경원은 주먹을 단단히 쥐었지만, 온몸은 떨리고 있었다.적막이 흐르는 복도는 불길한 정적마저 감돌았다.결국,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눈물이 조용히 뺨을 적셨다.“경원아!”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경원이 고개를 들자, 최연준과 강서연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질 뻔한 배경원을 최연준이 재빨리 부축했다.강서연은 응급실 문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치료는 연희 씨와 신석훈 씨의 제자들이 맡고 있어요. 모두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수정 씨는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하셨으니 금방 회복될 겁니다.”“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갑자기 병세가 심각해진 거야? 그리고 윤아는...”배경원은 떨리는 손으로 최연준의 팔을 붙잡으며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셋째 형님, 제발 윤아를 찾아주세요. 딸은 사라지고 아내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요. 둘 다 잃으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그런 바보 같은 말 하지 마세요. 둘 다 무사할 겁니다.”강서연이 단호히 말했다.“윤아는 우리 집안의 며느리예요. 누가 윤아를 해치려 한다면 최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그 결과가 어떤 건지 모를 리도 없고요. 그리고...”강서연은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어가려다 복도 끝에서 배현진이 소피아와 함께 급히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말을 삼키고 배현진을 노려보았다.“연준 아저씨, 서연 이모...”배현진은 어딘가 죄책감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배현진은 배경원에게 다가가 팔을 살며시 부축하며 조심스레 말했다.“아버지...”그 순간, 배경원이 배현진의 뺨을 내려쳤다.배경원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배현진을 노려보며
임수정은 갑작스러운 기침을 하며 침대 옆 경보 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소피아에 의해 단호히 막혔다.“사모님, 제 말을 듣는 게 좋으실 겁니다.”소피아는 부드럽지만 섬뜩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제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고 독을 넣을 만큼 제가 어리석지도 않아요. 안심하세요. 이 모든 재료는 사모님의 건강을 생각하며 준비한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진심으로 사모님을 돌보고 싶어서예요.”임수정은 가슴을 움켜쥔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임수정의 눈엔 불신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요즘 배경원은 외출이 잦아졌고 이유를 묻자, 회사 일 때문이라며 안심하라는 대답뿐이었다.그럼에도 임수정의 마음속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임수정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겉으론 소피아의 말을 따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사모님, 잘 생각하셨어요.”소피아는 임수정에게 쿠션을 건네며 은은하게 웃었다.“우리 결국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될 사이잖아요. 지금부터 제 존재에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흥! 내 아들이 눈이 먼 게 분명해.”임수정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떻게 너 같은 사람에게 속을 수 있는지...”“저를 깔보지 마세요. 저는 이혼하고 아이도 데리고 있지만, 현진 씨를 향한 제 진심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현진 씨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누구와는 달리 겉으론 순수한 척하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짓은 안 한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해요.”“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임수정은 언성을 높이며 노려보았다.소피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욱 날카롭게 말했다.“사모님, 제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사모님의 그 옛날 며느리가 될 뻔했던 그 사람이에요.”“헛소리하지 마!”임수정은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그 일은 우리 배씨 가문이 송윤지에게 잘못한 일이야. 그 애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사모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에요.”소피아는 태연한
“너와 상관없다고?”임우정은 다급하게 외쳤다.“네 형부가 이미 윤아의 통화 기록을 조사했어. 윤아가 실종되기 전에 조 회장이랑 통화했던 게 드러났다고! 지강아, 너와 조 회장이 어떤 관계인지 나한테도 숨길 작정이었어?”임지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그래요. 저와 조 회장이 가까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와 배윤아 사이엔 원한이라곤 없잖아요... 누나, 왜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지강아!”임우정의 목소리가 더욱 절박해졌다.“너, 송윤지 일 때문에 배현진을 미워하는 건 알아.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윤아한테까지 증오를 전가하면 안 되잖아!”“누나, 정신 좀 차리세요!”임지강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어둠이 깃든 그의 얼굴은 단호함을 더했다.“무슨 근거로 저를 의심하시는 건데요?”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임지강의 강경한 태도에 임우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 후, 임우정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렇다면... 배씨 가문을 좀 도와줄 순 없겠니?”임지강은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맑고 투명한 송윤지의 눈빛과 마주쳤다.“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요양원 병실 문 앞.소피아의 하이힐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소피아의 손엔 보온 도시락이 들려 있었고 문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제가 사모님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경호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이건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거예요.”소피아는 휴대전화를 꺼내 그들에게 일부러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실래요? 아시다시피 사모님 건강이 좋지 않으세요. 세 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책임지실 겁니까?”경호원들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 결국 길을 내주었다.“이제야 말이 통하네.”소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송윤지는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 사레가 들어 술을 뱉을 뻔했다. 마신 술이 얼굴에 스며든 듯 송윤지의 뽀얀 볼은 어느새 매혹적인 와인빛으로 물들었다.임지강은 그런 송윤지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다가가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입가에 묻은 술자국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임 대표님...”송윤지는 조심스럽게 임지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하지만 임지강은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아 통유리창 앞까지 데려갔다.송윤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 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깊고 짙은 밤하늘에 수많은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잘게 부서진 불빛들이 반짝거렸다.불꽃은 색과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며 꿈같은 광경을 만들어냈다.송윤지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마음에 들어요?”임지강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송윤지의 귀에 스며들었다.“잠깐 눈 좀 감아 봐요.”“네?”임지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제가 별을 따다 줄게요.”마지막 불꽃이 빛의 궤적을 남기며 밤하늘로 사라지고 다시 평온한 고요가 찾아왔다.송윤지는 미소를 지으며 임지강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러자 따뜻하면서도 약간 서늘한 남자의 손길이 송윤지의 손을 잡더니 손바닥 위에 무언가가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송윤지는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손에는 정말로 ‘별’이 있었다.“이건...”그것은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별 모양으로 깎아낸 다이아몬드로, 완벽하게 다듬어져 찬란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제가 해줄게요.”임지강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이건 너무 비싼 거라서 제가...”“받아줘요.”임지강의 눈빛은 따스하고도 단호했다.“그리고...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였다. 귀 끝까지 붉어진 송윤지의 얼굴은 마치 열이 오른 듯했다.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의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 주었다.“사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 윤지 씨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