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최연준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강서연은 한창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최연준은 회사 일이 하도 바빠 점심도 대충 때우고 다시 중요한 업무를 처리했다. 그렇게 오후가 돼서야 모든 일이 끝났고 속이 빈 나머지 위가 째질 듯이 아팠다.예전에 그가 위병에 걸린 건 강서연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고 했었는데 진짜로 그대로 되었다.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찌르자 최연준은 갑자기 허기가 졌다. 그는 바쁘게 움직이면서 요리를 하는 강서연을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이런 밥 냄새가 집안에 가득 퍼졌던 강주에서의 나날들이 너무도 그리웠다.최연준이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겉옷을 벗은 후 주방으로 가려던 그때 강서연이 생선찜을 들고나왔다.“왔어요?”강서연은 햇빛처럼 찬란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그런데 최연준은 되레 움찔했다. 남자의 쓸데없는 육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그녀의 웃음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경실 아주머니에게 오늘 쉬라고 했어요.”강서연은 다른 요리들도 하나씩 내왔다. 국이며 반찬이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까지 아주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그녀의 반짝이는 두 눈에 웃음이 담겨 있었다.“오늘 저녁 요리는 전부 내가 했어요. 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이에요.”최연준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강서연은 밥과 국을 떠서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참마국이었는데 예전에는 아주 싫어했었지만 강서연을 만난 후로 참마를 좋아하게 되었다.그리고 새우 마늘찜과 생선찜도 만들었다. 색과 향, 그리고 맛이 모두 완벽하여 딱 봐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이런 행복한 나날이 정말로 오랜만인 것 같다.최연준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자연스럽게 밥그릇을 들고 쭉 내밀었다. 그녀가 생선 눈알을 집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강서연은 생선 눈알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줘야 한다고 했었다.하지만 강서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최연준이 고개를 든 순간 그녀의 웃을 듯 말 듯 하는 눈빛과 딱 마주쳤다.마음이 움찔한 최연준은 조용히 밥그릇을 내려놓았다.“얼른
‘첫사랑?’그는 또다시 멍해졌다.‘가만히 있다가 이걸 왜 묻는 거지? 난 첫사랑도 없는데. 하지만 오늘 이 저녁은 뭔가 준비를 단단히 한 게 분명해...’최연준은 심호흡을 크게 했다. 절대 아무 이유 없이 이런 질문을 할 그녀가 아니다. 누군가 그녀 앞에서 쓸데없는 헛소리를 한 게 틀림없었다.하여 지금 급선무는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선을 긋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티를 내서는 안 되고 자연스럽게 발을 빼야 했다. 최연준은 이런 시험 정도는 쉽게 견딜 수 있다는 걸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그다음 강서연에게 쓸데없는 얘기를 한 사람을 잡아내서 육경섭에게 맡길 생각이다. 그가 고문하든 뭘 하든 그건 육경섭의 일이다.“뭐 해요?”강서연은 작은 손을 흔들었다.“왜 그렇게 멍하니 있어요? 이젠 나와 말도 섞기 싫어요?”“그런 거 아니야.”최연준이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화들짝 놀란 강서연은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그를 빤히 보았다. 최연준은 다급하게 그녀의 손을 잡고 충심을 표했다.“서연아, 이 질문은 생각할 필요도 없어.”“네?”“무조건 이수 씨 남자친구 잘못이야.”최연준이 또박또박 말했다.“이수 씨와 결혼까지 하기로 했으면 당연히 이수 씨에게 숨기는 게 있으면 안 되지. 부부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게 믿음이야. 믿음이 있어야 평생 함께하지. 그리고 그런 사람이 첫사랑을 마음에 품을 자격이나 있어? 와이프로도 부족하대? 왜 첫사랑과 연락하는 건데? 정말 너무했어. 이건 파렴치한 짓이야!”강서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당하고 진지한 그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따뜻해졌고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강서연은 그저 떠보고 싶었을 뿐인데 그가 이렇게까지 흥분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연준 씨, 나...”“여보.”최연준이 계속하여 말했다.“그런 남자는 살아있을 자격도 없어.”그러더니 젓가락으로 생선 눈알을 집어 밥 위에 휙 던졌다.그 모습에 강서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가까스로 참았다. 어깨가 으쓱거렸고 마음도 따뜻
“하 매니저님,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죄송합니다.”하 매니저가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가끔 색소폰이 흘러나오는 조용한 술집이었는데 전화를 받으면 옆 사람도 통화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곁에 있던 방한서는 의아한 듯 그를 올려다보았고 위스키를 막 마시려던 찰나 다시 묵묵히 손을 내렸다.하 매니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서연 씨께서 늦은 시간에 무슨 일입니까?”“한 사람에 대해 조사해주세요.”강서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 사람에 대해서 하나도 빠트림 없이 알아봐 주세요! 제가 원하는 건 인터넷에 있는 공식 자료가 아니에요... 하 매니저님께서는 제 뜻을 이해하죠?”“네,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서연 씨께서 조사하려고 하는 대상이 누구예요?”“정섭 엔터테인먼트 성설연입니다.”하 매니저는 잠시 멈칫하더니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방한서를 바라보았다.그는 평소에도 머리가 빨리 돌아가고 강서연의 사람됨을 잘 알기 때문에 그녀가 아무 이유 없이 남을 조사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성설연이라는 이름은 하 매니저도 들어본 적이 있다. 엄친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최근에 정섭 엔터테인먼트로 계약되었다.그렇다면 강서연이 성설연을 조사하고 싶은 것은 임우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인가?방한서는 순간 안색이 변했다. 그는 속사정을 알고 있었으나 도련님께서 절대로 밖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셨기 때문에 방한서는 절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강서연이 오해할 수 있다!방한서는 최연준을 지키려는 마음이 굴뚝같아 양손으로 쉬지 않고 하 매니저에게 손짓을 해서 강서연에게 성설연과 최연준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설명하게 했다.하 매니저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가 왜 손으로 날뛰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잠시 침묵하는 사이에 강서연은 바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하 매니저님 주변에 다른 사람도 있어요?”“서연 씨, 그게...”하 매니저는 착실한 사람이어서 그녀에게 숨기지 않았다.“오랜만에 다들 잔업이 없어서 한서 씨랑 술
신작 영화 준비가 막바지에 다다랐고 곧 촬영이 시작될 예정이었지만 곽보미는 이에 대해 관심이 많지 않아 몇 번의 회의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강서연이 커피를 마시자고 불러내자 그녀는 커피를 두 모금 마시고는 내려놓고 생각에 잠긴 채 창밖을 바라봤다.강서연은 그런 모습이 마치 영화나 드라마 속 여주인공의 실연을 닮았다는 느낌을 받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만약 곽보미가 정말로 실연을 당했다면 영화의 진도를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는가? 곽 감독처럼 재능으로 먹고사는 사람에게는 기분과 영감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강서연은 알고 있었다.강서연은 곽보미를 일깨워 주고 싶었지만 이런 일은 당사자가 주동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그녀도 묻기 어렵다.강서연은 심심해서 핸드폰을 꺼내 웹 서핑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동영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화면에는 남다른 미모를 가진 여자가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음색이 매력 있어 팬들이 끊임없이 ‘좋아요’ 를 눌러 줬고 실시간 시청하는 사람 수가 벌써 10만 명을 돌파하였다.“후.”강서연은 담담하게 웃었다. “성설연의 호소력이 장난 아니네요. 경섭 씨가 이번에 엄청 많은 돈을 벌어들이겠어요.”“네?”성설연이라는 세 글자를 듣자마자 곽보미는 감전된 듯 벌떡 일어나 강서연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그리고 화면을 똑바로 응시하며 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이게... 뭐예요!”곽보미는 화면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노래도 별로네요.”강서연이 곽보미를 바라보았다.여태껏 남자답기만 했던 곽 감독의 얼굴에는 어린 소녀가 질투하는 표정이 나타났다. 질투심이 가득한 그런 것은 아니었고 소심한 질투 뒤에는 은은한 상실감이 있었다.곽보미는 테이블 위의 휴지를 집어 한 줄 한 줄 찢었다.강서연은 이상해했다.“내가 호소력이 있다고 딱 한 마디만 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반응이 크세요?”성설연은 최연준의 첫사랑이어서 반응이 커야 할 사람은 강서연이었어야 했다.“그게...”곽보미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반쯤 뜸을 들였다가
강서연이 잠시 멈칫했다.“유 변호사님?”곽보미가 급하게 말을 바꾸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물어보는 거예요! 유 변호사가 최 대표와 절친이잖아요. 그래서 나는 최 대표가 있는 곳에 유 변호사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강서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은근히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곽보미는 강서연의 예리함으로 눈치챘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애써 밝은 미소를 지어서 속내를 감추려 했다.“사실... 일이 있어서 유 변호사를 찾고 싶은 거예요. 영화 판권에 관한 법률 조문과 또...”“영화 판권?”강서연은 또 의아했다.“그 부분에 대해서 왜 걱정하는 거예요? 어진 엔터테인먼트의 법무팀은 전문성이 엄청 강해요. 이미 계약서를 작성했을걸요!”“...”곽보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이 열이 나는 것처럼 후끈 달아올랐다.강서연은 가볍게 웃기 시작했다.평소의 곽보미라면 이렇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더군다나 그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오늘의 곽보미를 보고 오히려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면을 발견했다.“유 변호사님은 갈 것 같아요.”강서연이 말했다.“그때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세요.”곽보미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식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켰다....성설연는 분장실에 앉아 매니저가 그녀에게 짜준 각종 스케줄을 집중적으로 듣고 있었다.귀국한 후부터 성설연은 쉴 새 없이 바쁘게 일하기 시작해서 계약도 하고 음반도 냈다. 다행히도 바쁘게 살아온 삶이 마침내 조금이나마 보답을 얻은 것 같다.그녀는 음악계에 뛰어든 다크호스가 되어 짧은 시간에 수십만 명의 팬을 얻었다.게다가 마케팅을 잘해서 회사에서는 성설연에게 유학파 창작형 재녀라는 타이틀을 달아줬다. 평소 카메라 앞에서도 조용하고 겸손한 웃음을 지어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다.그러나 인지도가 많아지면서 성설연은 다소 자만해지고 일반적인 스케줄은 이미 성에 안 찼다.매니저 낸시가 다섯 번째를 읽을 때 성설연은 짜증이 나서 립스틱을 내려놓고 뒤로
“내가 벌써 알아봤어요! 최연준은 아직 결혼 안 했어요.”“그러면... 유 변호사님은?”성설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학창 시절부터 유찬혁이 자신을 향한 마음을 알고 있었고 오랜 세월 동안 유찬혁이 줄곧 자기를 그리워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러나 성설연은 유찬혁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유씨 가문은 학자 집안에 불과하여 최씨 가문, 배씨 가문과 같은 대가족과는 아직 거리가 멀다.공부할 때부터 성설연은 학교의 퀸카여서 그녀의 결혼 상대도 뛰어난 사람이어야 한다!“설연아.”낸시가 걱정스럽게 말했다.“정말 최연준을 만나고 싶은 거야? 하지만 나는 유 변호사님도 괜찮다고 생각해. 적어도 너에게는 진심이니까... 그리고 최연준 같은 사람은 변덕스러워서 네가 감당할 수 없을 거야.”“무슨 소리예요!”성설연이 그녀를 노려보았다.낸시는 입술을 깨물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그녀는 성설연이 재능이 있고 야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지금까지 운이 안 따라와서 오랜 세월 동안 잠적해 있을 뿐이다.진짜 최연준과 엮일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방법이다...낸시는 한숨을 내쉬며 성설연의 어깨에 손을 얹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이 길은 걷기가 쉽지 않을 거야.”그녀는 성설연을 바라보았다.“네가 굳이 간다면 나도 너를 지지할 수밖에 없어.”“고마워요, 언니!”성설연이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리 어려워도 나는 걸어갈 거예요! 그리고 나랑 최연준은 동창이잖아요!”...주말의 임씨 가문은 떠들썩하기 그지없다. 몇 채의 별장은 전부 다시 공사를 했는데 권민지는 별장 사이에 같은 양식의 화단을 가꾸고 조약돌이 깔린 작은 길로 연결해 특별한 설계를 하였다.몇 채의 별장은 유럽의 거리를 모두 옮겨놓은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했다.축하연에 권민지는 임수정을 데리고 참석했다. 임수정은 휠체어를 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보다 안색이 많이 좋아졌고 얼굴에는 진심 어린 미소를 담고 있었다. 겉으로는 창백하고 연약하지만 생명력이 더해져 색다른 아
유찬혁은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권민지에게 술 한 잔을 청했다.그의 오늘 차림은 권민지의 눈을 번쩍 뜨게 했다.권민지가 기억하는 평소의 유찬혁은 비교적 경직되어 있었다. 아마도 직업상의 관계 때문인지 늘 엄숙했고 블랙 슈트 차림으로 재판 중이거나 재판장에 가는 길이었다.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블랙 슈트를 옅은 카키색으로 바꿔 입었다. 이런 칼라는 사람과 몸매를 가리지만 유찬혁이 입으니 마치 화보에서 걸어 나온 남자 모델 같다.권민지가 위아래로 한번 훑어보더니 웃으며 말했다.“유 변호사님께서 오늘 참 잘생겼네요! 젊은 사람은 이렇게 밝게 입어야 활력이 넘쳐 보여요!”유찬혁은 가볍게 기침을 두 번 하고 눈 밑에는 남모를 웃음기가 스쳐 지나갔다.그는 이 축하연에서 줄곧 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그런데 유찬혁은 멀리서 계속 그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심지어 그 사람은 일부러 유찬혁과 같은 색상의 슈트로 골라 입었다.그 사람은 계속 슈트의 단추를 만지작거렸고 눈빛은 유찬혁의 그림자를 따라다니며 감정 기복이 심했다....최연준이 도착했을 때는 연회가 막 시작된 참이었다.그는 어른들과 몇몇 중요한 파트너들과 인사를 나누고 또 직접 축하 선물을 전달하고는 한쪽으로 물러나 소파에 앉아 심심하게 손에 든 술잔을 흔들었다.강서연이 최연준과 함께 오지 않아 그는 외로워 죽을 지경이었다.“도련님, 조급해하지 마세요.”방한서가 옆에서 설명했다.“서연 씨께서 일이 끝나면 바로 오겠다고...”“무슨 일이 그렇게 중요한데!”최연준은 처음에는 화를 내다가 나중에는 또 약간 받아들이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엄마도 참, 자기는 일벌레라고 해도 이젠 서연이까지 잘못 가르쳐 주고 있단 말이야!”방한서는 입가가 두 번 씰룩거렸다.‘할 수 있으면 황태후 앞에 가서 직접 말하던가!’“도련님, 화내지 마세요... 김 대표님께서는 단지 일에 대한 열정이 넘칠 뿐이에요. 서연 씨도 책임감이 강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으로서 오늘 야근하는 것도 회사를 위해서
성설연은 머리가 백지가 되어 멍하니 이 남자 앞에 서 있었고 감히 크게 숨을 쉬지도 못했다.학창 시절부터 최연준이 냉혹하고 무정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졸업한 지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았다.그러나 최씨 가문의 유혹이 너무 커서 성설연은 결코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재빨리 마음을 가다듬어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애써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오랜만에 동창을 만났는데 이렇게 내쫓는다고요?”최연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참으로 이상한 여자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배경원이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옛 동창이라는 것도 기억 못하고 있을 것이다.게다가 강서연에게서 한 통의 문자도 오지 않아 그의 마음은 더욱 착잡해서 아예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성설연은 깜짝 놀라 최연준이 떠나려는 것을 보고 황급히 따라갔지만 두 걸음도 가기 전에 맞은편에 또 한 여자가 나타났다.이 여자의 외모는 여배우에 비해 못 미쳤지만 온몸에는 여배우가 따라올 수 없는 귀티가 배어 있어 아마도 어느 가문의 따님일 것이다.최연준은 눈살을 찌푸렸고 각진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그리고 다시 한번 이런 연회를 꺼리는 마음이 극치로 도달했다.성설연은 웃으며 앞으로 다가와 또 그를 도와 여자를 막았다.그 여자가 멀리 가버리자 성설연은 자신을 바라보는 최연준의 눈빛이 아까처럼 차갑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고맙습니다.”남자는 차갑고 딱딱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성설연은 머리를 숙이고 미소를 지었다.“저는 다른 여자가 가까이하는 것을 싫어해요.”최연준은 이 말을 남기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연회장의 인파 속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성설연은 제자리에서 잠시 멈칫했다.최연준이 방금 한 말이 아직도 그녀의 귓가에 맴돈다.다른 여자가 가까이하는 것을 싫어한다...하지만 연회에서 그녀만이 최연준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성설연은 속으로 미칠 듯이 기뻤고 황홀했다.혹시 최연준이 표현하고 싶은 것은 다른 여자가 가까이하는 것을 싫어하지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