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원은 지금 급전이 필요했다. 윤문희를 보살핀다는 명분이 있어야만 남양에서 입금할 것이다.강명원은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금까지 해온 이 행각이 위험한 건 사실이다.남양의 윤씨 가문이 어떤 가문인가? 하나같이 용맹스럽고 사나운 가문이다. 그들은 그깟 돈은 신경 쓰지 않겠지만 자신이 속았다는 건 절대 용납하지 못할 것이다.만약 강명원이 그들을 이십 년 넘게 속였다는 걸 알게 된다면 결과가 어떨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대충 알 수 있었다.강명원은 눈살을 찌푸리고 집안에서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얼마 전에 감옥에 있는 오승준의 면회를 하러 갔던 때가 문득 떠올랐다.오승준은 마치 미라처럼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고 심지어 걸을 때도 교도관의 부축을 받아야만 걸을 수 있었다.그리고 정신 상태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 실성한 것처럼 딴소리했고 앞니도 두 개나 빠져 있었다.그런 그의 모습이 역겨워 강명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때 오승준이 갑자기 얼버무리며 말했다.“형님... 서연이 이젠 예전의 서연이가 아니에요...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에요. 걔 뒤에... 어둠의 세력이 있고... 남양도 있고 최연준도 있어요.”강명원은 넋이 나간 얼굴로 제자리에 굳어버렸다.오승준은 미친 사람처럼 실실 웃었는데 그 웃음이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서웠다.“형님도 너무 잘난 척하지 마십시오. 허허... 형님네 사위 감옥에 다녀온 사람이 아니라 바로 최연준이에요. 최연준이 언젠가는 와서 복수할 테니까 기다려요...”교도관은 오승준을 다시 데려갔다.그 생각을 하던 강명원은 다른 꿍꿍이가 떠올랐다. 그에게 있어서 강서연이 최연준과 함께한 건 오히려 더 잘된 일이었다.‘최연준이 서연이를 엄청 신경 쓰나 본데? 서연이 약점만 내 손에 넣는다면 최연준도 어쩔 수 없이 나설 거야. 최연준의 말 한마디면 강진 그룹은 기사회생할 수 있어.’강명원은 잇몸까지 드러내고 교활하면서도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그나저나 어디 가서 약점을 찾지?’
“널 아끼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는 건 딱히 나쁠 거 없어.”그런데 임우정의 이 한마디가 최연준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밖에 서 있던 그는 질투심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강서연이 하도 빛나는 사람이어서 집에 숨기고 싶어도 숨길 수 없다는 걸 최연준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연적이 여자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최연준은 어두운 얼굴로 아래층으로 성큼성큼 내려가 베란다에서 휴대 전화를 꺼냈다.비록 그도 곽보미의 성적 취향에 문제가 있다는 걸 믿지 않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나중에 진짜로 일이 터졌을 때 해결책이 없으면 더욱 골치가 아플 것이다.방한서의 휴대 전화가 한참 동안 울렸다. 그 시각 그는 한창 배경원과 함께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지난 몇 차례 교훈을 통하여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최연준의 앞에서 알짱거리지 말고 멀리 피하면 피할수록 더 좋다는 걸 깨우치고 나서는 배경원을 찾아갔다. 그런데 얼마 놀지도 못했는데 최연준의 전화에 소스라치게 놀랐다.“너 어디야?”최연준이 성난 목소리로 소리치자 방한서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도련님이 방해하지 말라면서요...’최연준은 휴대 전화를 들고 씩씩거렸다.‘방한서 이 자식 요즘 왜 이래?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어. 오지 말아야 할 때는 나타나서 방해만 하더니, 필요할 때는 또 코빼기도 안 보이네?’그의 성난 목소리를 들은 배경원은 테이블에 엎드려 배꼽 잡고 웃었다.방한서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나름 자연스러운 미소를 쥐어짰지만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도... 도련님, 무슨 일 있어요?”최연준은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응!”“하실 분부가 무엇입니까?”최연준이 싸늘하게 말했다.“곽보미에 대해서 좀 알아봐. 대체 정체가 뭔지 알아야겠어.”방한서는 또 어안이 벙벙했다.‘곽보미 씨가 도련님의 심기를 건드렸나? 그냥 요즘 서연 씨와 가깝게 지낼 뿐이잖아.’방한서는 순간 뚱냥이가 왜 보내졌는지 알게 된 것 같았다.역시 사랑에 빠진 남자는 지능
그때 학업이 긴장하여 그 학교에 다닐 수 있었던 학생들은 모두 있는 집 자식들이었다. 학생들은 이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힘든 학업을 이어가던 중에 어느 날 큰일이 터졌고 학생들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는 화젯거리로 떠올랐다.그 일은 바로 남학생 탈의실의 유찬혁 옷장에 익명의 연애편지가 나타난 것이었다. 결국 졸업할 때까지 그 편지는 풀리지 않은 의문으로 남게 되었다.배경원이 다 지난 일을 꺼내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최연준은 눈살을 찌푸렸다.“아무튼 졸업 후에 곽보미는 영화 찍기 시작했어요.”배경원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하지만 지금까지도 찬혁이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어요.”최연준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다시 말해 그때 그 연애편지는 곽보미가 쓴 것이었다.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만약 진짜로 곽보미가 쓴 거라면 성적 취향에 문제가 없다는 건데... 하지만...’최연준은 잠깐 멈칫하다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찬혁이 학교 다닐 때 짝사랑하던 애가 있었잖아.”배경원이 히죽 웃었다.그때 그가 짝사랑하던 상대는 곽보미가 아니라 학교의 유명한 퀸카였다. 피부도 하얗고 얼굴도 예쁘장한 데다가 다리도 쭉 뻗어 바비 인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최연준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리가 없었다.그는 심지어 퀸카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까맣게 잊었을 것이다.‘연준 형과는 참으로 말이 안 통해.’최연준의 의심을 지워주는 게 아니었더라면 절대 그와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형이 까먹었나 본데 곽보미가 학교 다닐 때는 정상이었어. 너무 빼어난 미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 청순했었어. 그러니까... 전형적인 우등생, 엄친딸 이런 이미지였어.”“그런데 지금은 왜 저래?”최연준은 어이가 없었다.“아주 서연이 수호천사가 다 됐어.”이건 배경원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그들은 곽보미가 아직 유찬혁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학교 다닐 때 혼자 몰래 짝사랑하다가 유찬혁이 다
강서연은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그를 툭 쳤다.“경원이랑 통화했어.”최연준은 거짓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걔 요즘 수정 씨랑 잘 지내는 것 같더라고. 두 사람 맨날 인터넷에서 핫한 가게를 찾아다녀. 이번에 또 한 집 찾았다면서... 우리도 함께 가자고 하던데?”강서연이 두 눈을 깜빡였다.“수정 씨에 대한 마음이 진짜 진심이에요? 설마 그저 한때일 뿐이다가 새로움이 사라지면 버리는 거 아니겠죠?”최연준이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경원이 평소에는 건성 건성하고 진지하지 않을 때도 많지만... 이 세상에서 극히 드문 좋은 남자라는 건 내가 확신해.”“경원 씨에 대한 평가가 아주 높네요?”강서연의 두 눈이 반짝였다.“설마 당신 친구들도 다 좋은 남자니까 당신은 더 좋은 남자라고 얘기하려던 거 아니죠?”“아무튼 주위 환경이 중요하잖아. 어떤 사람과 어울리는지도 중요하고.”최연준이 진지하게 말했다.“난 절대 그런 걸로 거짓말 안 해. 내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다 괜찮은 사람이야.”“알았어요. 그럼 내가 땡잡은 거네요?”“땡잡은 건 나지.”최연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눈빛에 사랑이 어찌나 가득한지 꽁꽁 얼어붙은 얼음마저 녹여버릴 것만 같았다.그는 강서연의 귓가에 대고 또박또박 말했다.“내 아내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야.”강서연은 쑥스러운 나머지 고개를 숙이고 히죽 웃었다.최연준은 목소리뿐만 아니라 하는 얘기도 듣기 좋았다. 게다가 최근 자주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이곤 했다.이건 그녀의 마음을 녹여버리겠다는 건가?지난주 친정에 갔을 때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윤문희는 그녀에게 예뻐졌다고 했다.그녀의 칭찬에 강서연은 여간 놀란 게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윤문희의 미의 기준이 얼마나 높은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역시 여자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화장품은 사랑이었다.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면 진심으로 행복하고 독특한 매력을 뽐내면서 생기가 가득해진다.“왜 그렇게 웃어?”최
구현수가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담배꽁초를 바닥에 휙 던지자 양털 카펫에 순식간에 시커먼 구멍이 뚫렸다.양연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망해가는 이 집안에서 양털 카펫은 얼마 남지 않은 비싼 물건이었다.“구현수 이 나쁜 새X!”양연이 주먹을 불끈 쥐고 그에게 달려들려 하자 강명원이 말렸다.“날 왜 막아요?”“이리 와.”강명원이 두 눈을 부릅떴다. 지금까지 양연은 계속 강명원에게 잡혀 살았고 강명원이 두 눈만 부릅뜨면 양연은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물러섰다.강명원은 힘들게 바닥에서 일어났고 허리가 죽을 것처럼 아팠다.“구현수.”강명원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복잡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네 말이 맞아. 우린 대대로 친분을 이어왔으니 널 보살피는 건 당연한 거야.”구현수는 그를 보며 의기양양하게 웃었다.“여기서 공짜로 먹고살아도 돼.”강명원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앞으로는 내가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해야 해.”“허!”구현수의 눈빛이 싸늘해지더니 그의 목을 덥석 조였다. 화들짝 놀란 강명원은 미처 손쓸 새가 없었고 하마터면 숨이 막혀 죽을 뻔했다.“너... 이거 놔...”“빌어먹을 영감탱이 같으니라고.”구현수는 이를 꽉 깨물었다.“이런 낡아빠진 집에 내가 사는 건 당신의 체면을 세워주는 거야.”강명원의 두 눈에 핏발이 섰고 얼굴도 검붉게 변했으며 죽음의 공포가 점점 덮쳐오는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이 하얘지고 정신을 거의 잃으려던 그때 구현수가 갑자기 손을 놓았다.강명원은 쿵 하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옆에 있던 양연은 사색이 된 얼굴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오늘 너무 피곤해요.”구현수는 손을 툭툭 털며 차갑게 웃었다.“어머님, 가서 밥 좀 해주시겠어요? 너무 풍성할 필요는 없어요. 닭고기와 생선 요리만 있으면 돼요.”“구현수 너...”강명원은 심하게 기침하다가 구현수가 나가기 전에 소리를 질렀다.“강서연과 결혼하기 싫어?”구현수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뚫어
양연의 울부짖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구현수는 손을 툭툭 털고 강명원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 후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집에서 밥을 주지 않으니, 밖에 나가서 먹어야지.구현수가 나간 후 양연은 한참 동안 바닥에 멍하니 앉아있었고 두 눈에 절망이 가득했다.강명원은 앓는 소리를 내며 겨우 일어나 절뚝거리면서 서재로 들어갔다. 그는 주머니를 만져보았다. 다행히 구현수는 돈만 밝혔고 휴대 전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지갑 안에 사실 돈이 얼마 없었고 휴대 전화 안에 저장된 것이야말로 최후의 적금이나 다름없었다.그 시각, 양연은 거실에서 처량하게 울었다.강명원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는 누군가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통화연결음이 한참이나 울렸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가 전화를 끊으려던 그때 누군가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 회장님?”“허, 회장님이라고 부르지도 마.”강명원은 그의 말투에 담긴 조롱을 단번에 알아챘다. 하지만 따져 물을 시간이 없어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얘기했다.“지석아, 언제 구현수를 데려갈 거야?”“그게... 아직 도련님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어요.”“최지한이 이 일을 진작 잊은 건 아니겠지?”“조급해하지 마세요, 회장님.”인지석은 그를 비꼬았다.“아무튼 회장님의 딸이 지금 도련님의 곁에 있는데 뭐가 걱정이에요?”“너...”강명원은 말문이 막혀버렸다.“인지석, 저 재수탱이를 당장 데려가. 계속 이대로 뒀다간 내가 버티지 못해!”인지석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데 짧디짧은 침묵이었지만 강명원은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심지어 인지석의 숨소리에서 냉기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회장님, 회장님은 그저 강진 그룹을 다시 일으켜 세울 자금이 필요한 거 아닌가요?”인지석이 천천히 말했다.“회장님의 딸 강서연 말고는 회장님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그렇긴 하지만...”“하지만 우리가 다 함께 힘을 합쳐야죠.”인지석이 싸늘하게 웃었다.“며칠만 더 버티세요. 얼마 후에 구현수에게 강주로 돌아
강서연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사실 남자 셋이 술집 룸에 앉아서 술을 마시며 얘기를 나누는 건 딱히 이상할 게 없었다.“우정 언니, 정확히... 들은 거 맞아요?”강서연은 그녀의 성격이 급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첫사랑이 연준 씨 첫사랑인 건 어떻게 확신해요?”“내가 직접 들었어.”“하지만 술집이 복잡하잖아요. 잘못 들은 거 아니에요?”“그럼... 내가 들은 걸 곧이곧대로 얘기해줄게.”임우정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때의 실제 상황은 이러했다.그날 남자 몇이 룸으로 들어가 로열 살루트를 마시던 그때 배경원이 큰소리로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찬혁의 첫사랑이 돌아왔대요. 다들 알고 있어요?”하지만 임우정의 귀에는 이렇게 들렸다.“첫사랑이 돌아왔대요. 다들 알고 있어요?”“왜 하필 이때 돌아왔대요? 그래서 연준 형이랑 상의해 보려고요. 찬혁이와 곽보미를 어떻게 붙여놓으면 놓을지.”방안의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렸다.“왜 하필 이때 돌아왔대요? 연준 형이랑... 붙여...”“이 일 그 누구에게도 얘기해서는 안 돼요. 알겠죠? 앞으로 어떻게 할지 잘 계획해 봐요.”이 말 또한 임우정의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누구에게도 얘기해서는 안 돼요... 앞으로 잘 계획해봐요...”임우정은 제대로 듣지도 못한 얘기를 강서연에게 전부 얘기했다.강서연은 그 얘기를 듣고 마음이 움찔했다. 어머니의 말씀이 갑자기 귓가에 맴돌았다.“최 서방 잘 잡고 있어야 해. 나중에 갑자기 첫사랑이라도 나타나면 어떡해?”‘설마 진짜 첫사랑이 돌아온 거야?’강서연은 또 문득 강주에 있을 때가 떠올랐다. 윤찬이 16살이 됐다는 소리를 듣고 최연준은 우쭐했었다.“내가 16살일 때는...”그러더니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그때 강서연은 그가 16살에 벌써 첫사랑을 만난 건 아닌지, 심지어 연애도 한 건 아닌지 의심했었다.그 의심이 현실이 되었단 말인가?“서연아, 서연아.”강서연이 한참 동안 말이 없자 임우정은 조급해지지 시작했다.“서
그날 최연준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강서연은 한창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최연준은 회사 일이 하도 바빠 점심도 대충 때우고 다시 중요한 업무를 처리했다. 그렇게 오후가 돼서야 모든 일이 끝났고 속이 빈 나머지 위가 째질 듯이 아팠다.예전에 그가 위병에 걸린 건 강서연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고 했었는데 진짜로 그대로 되었다.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찌르자 최연준은 갑자기 허기가 졌다. 그는 바쁘게 움직이면서 요리를 하는 강서연을 보며 뿌듯하게 웃었다.이런 밥 냄새가 집안에 가득 퍼졌던 강주에서의 나날들이 너무도 그리웠다.최연준이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겉옷을 벗은 후 주방으로 가려던 그때 강서연이 생선찜을 들고나왔다.“왔어요?”강서연은 햇빛처럼 찬란하게 웃으며 그를 반겼다.그런데 최연준은 되레 움찔했다. 남자의 쓸데없는 육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그녀의 웃음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경실 아주머니에게 오늘 쉬라고 했어요.”강서연은 다른 요리들도 하나씩 내왔다. 국이며 반찬이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까지 아주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그녀의 반짝이는 두 눈에 웃음이 담겨 있었다.“오늘 저녁 요리는 전부 내가 했어요. 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이에요.”최연준은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강서연은 밥과 국을 떠서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참마국이었는데 예전에는 아주 싫어했었지만 강서연을 만난 후로 참마를 좋아하게 되었다.그리고 새우 마늘찜과 생선찜도 만들었다. 색과 향, 그리고 맛이 모두 완벽하여 딱 봐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이런 행복한 나날이 정말로 오랜만인 것 같다.최연준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자연스럽게 밥그릇을 들고 쭉 내밀었다. 그녀가 생선 눈알을 집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강서연은 생선 눈알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줘야 한다고 했었다.하지만 강서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최연준이 고개를 든 순간 그녀의 웃을 듯 말 듯 하는 눈빛과 딱 마주쳤다.마음이 움찔한 최연준은 조용히 밥그릇을 내려놓았다.“얼른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