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연의 눈빛이 우울해지더니 표정도 서글퍼졌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녀가 한마디 던졌다.“아니요.”가슴이 움찔한 최연준은 그녀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윤제 그룹이라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공주가 이십여 년 동안 갖은 고생을 겪으면서 살아왔다. 남에게 업신여김도 당했고 생활도 고달팠으며 이 세상의 어려움을 스스로 감당해야만 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결혼까지 했었다...최연준은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만약 그때 그 마을에서 요양하지 않았더라면, 구현수의 신분으로 살아가지 않았더라면 강서연을 만날 수 있었을까?만약 강서연이 진짜 구현수와 결혼했더라면 그에게 마구 짓밟혀도 참고 견뎠을 것 같다. 그렇게 됐더라면 그녀의 두 눈은 영원히 빛을 잃었을 것이다.그 생각만 하면 최연준은 겁이 덜컥 났다. 그는 그녀의 어깨를 더욱 세게 감쌌다.“연준 씨.”강서연이 부드럽게 말했다.“왜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는 건데요?”“아, 아무것도 아니야.”그가 대충 대답했다.“그냥 생각나서 물어본 거야.”“오늘 그 여자애가 귀여워서 부성애라도 생긴 거예요?”최연준은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강서연은 마치 귀여운 고양이처럼 그의 가슴팍에 살포시 기댔다. 그녀는 어깨가 드러난 얇은 잠옷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두 볼은 탐스럽게 익은 복숭아처럼 발그스름했다.“모성애는 여자의 본성이잖아.”그가 웃으며 말했다.“사실 남자의 부성애도 본능이야.”강서연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그러니까 내 친아빠도 날 사랑한단 말이에요?”최연준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윤정재의 행동을 떠올렸다. 그가 강서연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절대 가짜가 아니었다.강서연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면 쉽게 용서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지만 남자의 입장에서 보면 윤정재가 조금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윤정재가 아무리 나빠도 윤문희에게는 일편단심이었다. 단 이 점만 놓고 봐도 최연준은 그의 편을 들어주고 싶었다.“서연아.”그는 목소리를 내리깔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
평소 두 사람의 대화 스타일과는 완전히 달랐다.최연준은 절대 그녀와 이런 자질구레한 얘기를 할 사람이 아니다. 오늘 평소와 다른 데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첫 번째 가능성은 그녀가 아이를 낳아주지 않아서 빙빙 돌려서 투정하는 것이고 두 번째 가능성은... 설마 그녀를 버릴 생각이 있다는 건가?강서연은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그 생각에 사로잡힌 순간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프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서연아... 여보!”최연준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난 그 뜻이 아니야. 당신이 오해했어.”“손 저리 치워요!”강서연은 소리를 지르며 그의 베개와 이불을 냅다 던지려 했다. 최연준은 재빨리 그녀 앞을 막아서서 육경섭이 가르쳐준 방법을 써먹으려 했다. 그런데 무릎을 꿇기도 전에 강서연은 그를 안방 밖으로 밀어냈다.최연준은 안방 문을 두드렸다. 그제야 뜨거운 가마 속의 개미가 어떤 기분일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판다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깨우쳤다.배경원과 밥 한 끼 먹고 나서 최연준도 바보가 되었나? 그러게 왜 윤정재의 편을 들어서는.한참이 지나도 안방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 밤 문을 열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최연준은 게스트룸으로 가지 않고 소파에 쭈그려 누웠다. 소파가 창가 옆에 있어 마침 밖에서 벌벌 떨고 있는 뚱냥이가 보였다.그가 문을 빼꼼 열자 뚱냥이는 뒤뚱뒤뚱 안으로 들어왔다. 최연준이 내쫓지 않는 걸 보고는 이번에는 욕심내고 소파까지 뛰어 올라와 그의 이불속으로 쏙 들어갔다.“야옹.”최연준은 누워서 뚱냥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뚱냥아, 네 엄마 성질이 너무 사나워.”그가 중얼거렸다.“야옹.”“예전에는 엄청 다정했었는데 왜 점점 사나워지는 걸까?”“야옹.”“여자들은 원래 다 이렇게 억지를 부려?”이번에 뚱냥이는 아무 대답이 없었고 고개를 움츠린 채 어느 한 곳을 쳐다보았다.최연준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밀려와 뚱냥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강서연이 계단에 서서 그를 싸늘하게 내
그 후 며칠 동안 강서연은 최연준에게 계속 쌀쌀맞은 태도로 일관했다. 강서연은 어진 엔터테인먼트에 휴가까지 내고 윤문희를 보살피러 친정으로 갔다.두 사람이 싸운 이유를 들은 윤문희는 배꼽 빠져라 웃었다.“고작 그것 때문에 싸운 거야?”윤문희는 강서연의 이마에 딱밤을 때리며 꾸짖었다.“정말 점점 철이 없어진다니까.”“엄마...”강서연은 이마를 어루만졌다. 마음을 진정하고 가만히 되돌아보면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여자의 육감은 늘 옳았다. 그날 밤의 최연준은 평소와 달랐고 말속에 다른 뜻이 숨어있는 것 같았다.“최 서방이 돌잔치에 갔다 와서 감회에 젖어서 말하는데 그렇게까지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있어?”“하지만 아빠 얘기까지 꺼냈단 말이에요...”강서연은 윤문희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윤문희의 표정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꽃에 물을 주던 손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떨렸다.“바보 같긴.”그녀는 걱정 어린 눈빛으로 강서연을 쳐다보았다.“최 서방은 네 아빠와 달라.”윤문희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네 아빠라고 했다. 사실 강서연도 아빠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다.“엄마.”그녀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떠보듯이 물었다.“그때 아빠가 우릴 버렸을 때... 진짜 무슨 말 못 할 고충이라도 있었어요?”윤문희의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응.”“엄마는 아빠를 원망해요?”“원망?”윤문희는 잠깐 멈칫하다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는 윤정재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 윤정재가 그녀를 이용하여 윤씨 가문에 복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속상하고, 절망했었지만 원망은 하지 않았다.원망은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되레 더 깊은 늪으로 빠지게 한다.“서연아, 엄마와 뭐 하나 약속할 수 있어?”“뭔데요?”윤문희는 그녀를 다정하게 쳐다보았다.“나중에 아빠를 만나면 절대 원망하지 마.”강서연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왜 원망하지 말라는 거지? 그 사람이 우릴 먼저 버렸는데.’하지만 엄
방한서가 멋쩍게 웃었다.“그게... 서연 씨는 예외인가 보죠.”최연준은 홧김에 차 문을 쿵 내리쳤다.방한서는 그의 눈치를 보며 겨우 어진 엔터테인먼트 밑에 도착했다.최연준은 로비에 들어가자마자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다가가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했다.“윤 회장님?”이곳에서 그를 만날 거라 생각지 못한 윤정재는 깜짝 놀랐다.진용수와 방한서는 서로 인사를 주고받은 후 옆에 있는 상사에게 시선을 돌렸다.“회장님 여기 어쩐 일이세요?”윤정재가 아무 말 없이 그의 시선을 피하자 최연준이 차갑게 웃었다.“저희 엄마 만나러 오셨죠? 무슨 일 있으면 저에게 얘기하셔도 돼요.”“김 대표님과 사적인 얘기를 나눌 게 있어서요.”‘사적인 얘기? 허! 서연이 친아빠라는 얘기?’최연준의 눈빛이 어두워졌고 입가에 조롱 섞인 미소가 번졌다.며칠 전 윤정재의 편을 들면서 말 못 할 고충이 있을 거라는 얘기를 했다가 강서연이 지금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그 사실을 밝히려고요? 쉽지 않을 겁니다.’최연준은 그 생각만 하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요 며칠 동안의 답답함을 전부 윤정재에게 쏟아내고 싶었다.“회장님은 남양에서 오셔서 우리 집 규정을 잘 모르시나 본데 엄마는 함부로 누굴 만나지 않아요.”윤정재는 순간 멈칫했다.‘이 자식 평소에도 나에게 적대심이 조금 있긴 했지만 오늘따라 왜 더 심하지?’“최연준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최연준은 한걸음 나서서 그의 앞길을 막았다. 윤정재보다 한 뼘은 더 커서 그를 내려다보았다.“회장님은 오성 말을 못 알아들으시는 겁니까, 아니면 사람 말을 못 알아들으시는 겁니까?”“너...”“사람이라면 떳떳하게 살아야죠.”최연준이 소리를 질렀다.“이것저것 숨기는 게 그게 남자예요?”윤정재는 너무도 화가 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고 한참 후 큰소리로 호통쳤다.“최연준 이 자식아! 김자옥이 대체 널 어떻게 가르쳤기에 어른에게 이딴 식으로 말하는 건데?”“어른도 어른답게 굴어야 존중하죠.”“너!”윤정재가 은침을
두 사람은 동시에 움직임을 멈추고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강서연이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그들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옆에서 말리고 있긴 했지만 윤정재가 한 수 더 위인 게 분명해 보였고 손에 뭔가를 들고 있는 것 같았다.윤정재는 바로 눈치채고 은침을 다시 옷소매에 숨겼다.“강서연?”최연준은 잠깐 멈칫하다가 이내 배우급 연기를 펼쳤다. 그는 목의 대동맥 부분을 움켜쥐고 눈살을 찌푸리며 고통스러운 척했다.“왜 그래요?”화들짝 놀란 강서연이 재빨리 다가와 그의 상태를 살폈다.“좀 아파...”최연준은 그녀를 보며 말했다.“머리도 조금 어지러워.”“도련님.”방한서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놀라게 하지 말아요. 아까 제가 힘껏 말렸고 윤 회장님도 도련님을 건드리지 않았어요.”“콜록콜록.”최연준은 심하게 기침하며 방한서를 무섭게 째려보았다. 방한서는 그제야 눈치채고 냉큼 입을 다물었다.최연준의 기침 소리 덕에 다행히 마지막 한마디가 묻혀버렸다.강서연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최연준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어디를 다쳤는지 계속 물었다. 그리고 가끔 윤정재를 돌아보기도 했다.윤정재의 두 눈에 분노만 가득했고 전에 있었던 다정함은 온데간데없었다.“빌어먹을 자식!”윤정재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지금 서연 씨 앞에서 연기한다 이거지? 그래, 어디 한번 연기해 봐!”그는 다시 은침을 번쩍 꺼내 들더니 최연준을 찌르려 했다. 강서연은 그제야 은침이라는 걸 확인하고 최연준 앞에 나서서 지켜주었다. 윤정재를 노려보는 그녀의 표정이 아주 진지했고 살벌한 기운까지 내뿜었다.“서연 씨...”“윤 회장님, 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쟤를 믿지 말아요. 지금 연기하는 거라고요.”“그럼 손에 들고 있는 건 뭐예요?”강서연이 또박또박 말했다.“회장님께서 침술에 능하시다고 들었는데 오늘 그 들고 있는 은침으로 사람을 해하려 할 줄은 몰랐어요.”윤정재는 두 눈을 크게 뜨고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잇지 못했
최연준과 강서연이 최상 빌라에 도착했다.최문혁과 은미연이 사는 곳은 성수 별장이었고 빌라에서 풍경이 가장 예쁜 곳이었다.뒤쪽에는 산이 있고 강이 흐르고 있으며 정원에 정자도 있는 게 마치 조선 시대의 양반 저택을 연상케 했다.강서연은 여기저기 구경하느라 바빴다.최재원이 큰아들을 가장 예뻐한다는 게 사실인 모양이다. 큰아들이 가진 것도 없고 무능해도 가문에서 가장 좋은 걸 차지했다.“할아버지께서는 우리 아버지를 참 예뻐하셔.”최연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담담하게 웃었다.“그래서 작은삼촌이 날 눈엣가시로 여겼던 거야.”“사람은 진짜 자기 자식도 차별해요?”강서연이 궁금해했다.최연준의 아버지는 입을 꾹 닫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점잖은 사람이다. 최재원이 최진혁처럼 말을 잘하는 아들을 더 예뻐해야 정상일 텐데.“할아버지는 우리 아빠가 첫아들이라 더 예뻐한다고 하셨어.”최연준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는 아무래도 첫 자식을 더 예뻐하나 봐. 작은삼촌 말고도 고모 두 분과 막내 삼촌이 있어. 하지만 다들 해외에서 일하느라 집에는 자주 오지 못해.”“일반적으로 연준 씨 작은삼촌 같은 분이 어르신들의 예쁨을 더 받던데.”강서연이 커다란 두 눈을 깜빡였다.“연준 씨 할아버지는 참 똑똑하세요. 자식들의 성격과 특징을 잘 알고 계시고 옳고 그름도 똑똑히 가리시잖아요.”“그럼.”최연준은 할아버지가 자랑스러웠다. 최재원이 어리석었더라면 최상 그룹도 지금처럼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끔 그가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건 서로의 이익을 공평하게 하기 위해서였다.두 사람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성수 별장에 도착했다.“연준 씨가 사는 집은 여주 별장, 연준 씨네 형이 사는 집은 해원 별장인데...”강서연이 부드럽게 물었다.“연희 씨는 왜 여기에 살아요?”“여자애는 자기 집이 필요 없으니까.”강서연이 입을 삐죽거렸다.“이 집은 아직도 남아 선호 사상이 남아있어요?”“남아를 선호하는 게 아니라.”최연준이 피식 웃었다.“시집가기 전에 부모님과
“언니, 다른 쿠키 굽는 법도 가르쳐주면 안 돼요? 집에서 엄마에게 해드리고 싶어요.”강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상태가 그동안 눈에 띄게 많이 좋아졌다.최연희와 신석훈이 함께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아주 잘 어울렸다. 마치 캠퍼스 소설에 나오는 남녀 주인공 같았다.강서연은 최연희가 신석훈과 얘기할 때 얼굴이 저도 모르게 발그스름해진다는 걸 알아챘다. 강서연이 최연준에게 눈짓하자 최연준은 단번에 알아챘다.두 사람은 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서연은 최연희에게 태블릿 PC로 웨딩드레스를 골라달라면서 자연스레 최연희의 방으로 들어갔다. 최연준은 신석훈에게 물어볼 게 있다면서 정원으로 불러냈다.“고마워요.”그의 진심 어린 인사에 신석훈은 몸 둘 바를 몰랐다.“친구끼리 이러지 않아도 돼요.”“진짜 진심으로 고마워요.”최연준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그때 내가 어려움에 부닥쳐서 아무도 날 도와주지 않았을 때 석훈 씨가 내 목숨을 살려줬어요...”“아니에요. 그 어르신이 주신 약이 연준 씨를 살렸죠. 난 단지 그 약을 연준 씨에게 먹였을 뿐이고요.”“그래도 당신이 보살펴주지 않았더라면 살지 못했을 거예요.”최연준이 웃으며 말했다.“이젠 내 동생까지 구해줬으니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그런 소리 말아요.”신석훈이 머리를 긁적였다.“난 원래 의사잖아요.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게 당연하죠. 계속 이렇게 고맙다고 하면 되레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요.”“알았어요.”최연준은 그에게 부담 주기 싫었다.“앞으로는 더는 꺼내지 않을게요. 하지만 이 은혜는 영원히 기억할 겁니다. 아마... 연희도 평생 잊지 않을 거예요.”최연준은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석훈 씨, 우리 연희 어때요?”신석훈이 깜짝 놀랐다.“회복 잘하고 있어요. 사실 연희의 상태가 너무 심각한 건 아니었어요. 적극적으로 치료에도 협조하니까 호전되는 속도도 빠르고요. 앞으로 가족분들이 신경 더 많이 쓰셔야 할 겁니다. 뭔가 이
신석훈은 최연준의 안색이 좋지 않은 걸 알아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뭐가 잘못됐는지 알지 못했다.“정말 그저 여동생으로만 생각해요?”최연준의 질문에 신석훈은 숨을 들이쉬며 머뭇거렸다.“아니면요?”신석훈이 최연준을 보며 말했다.“무엇으로... 생각해야 하는데요?”“다른 쪽으로 생각해본 적 없어요?”‘다른 쪽이라...’신석훈은 또다시 멍해졌다. 그의 이런 모습만 보면 최연준은 답답하기만 했다. 이러니 임우정도 결국에는 놓치고 말았지.“연준 씨.”신석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대체 무슨 뜻이에요?”최연준은 그를 힐끗 째려보았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계속 동생으로만 생각해요.”그러고는 홱 돌아섰다.신석훈은 제자리에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바보 같은 웃음을 지으며 최연준의 뒤를 따라나섰다.예전에 강주의 마을에 있을 때도 최연준은 성격이 이상했고 두어 마디 하다가 홱 돌아서곤 했다. 그 바람에 주변 사람들이 그를 멀리했지만 신석훈만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이젠 오성으로 돌아왔고 신분도 되찾았지만 성격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방안에서 최연희는 열심히 웨딩드레스를 고르고 있었는데 가끔 강서연과 독특한 디자인에 관해 얘기를 나누곤 했다.“이건 C사의 한정판 웨딩드레스인데 타이트한 디자인이 언니와 잘 어울릴 것 같아요.”“언니, 이것 봐요... 이런 머메이드 웨딩드레스를 입으면 여왕이 따로 없을 거예요.”“와, 이걸로 해요. 베라의 고급 웨딩드레스인데 가슴 쪽에도 전부 보석이 박혀있어요.”강서연은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내 웨딩드레스를 고르는데 연희 씨가 더 열심히 골라주네요? 연희 씨도 입어보고 싶지 않아요?”최연희는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연희 씨.”강서연이 자연스럽게 물었다.“결혼식 날에 연희 씨가 신부 들러리 서줄 수 있어요?”“정말요?”최연희의 두 눈이 반짝였다.“네. 그리고 신랑 들러리는 석훈 씨에게 서달라고 할 생각이에요.”최연희의 두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언니도 참.”강서
“정 선생님, 아직도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으신가요? 영미가 대체 얼마나 좋은 조건을 내걸었기에, 백인서를 모함하는 데 가담한 거죠?”정대명은 눈동자를 굴리며 머뭇거렸다. 어디까지 입을 열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당신이 인서의 양아버지라는 말은 사실입니까?”“그...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진실이야!”“그렇다면 딸을 키운 정도 있을 텐데 왜 모함하려 하신 거죠?”정대명의 몸이 떨렸고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정 선생님, 이제 영미조차도 당신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신다면 감옥에서 나올 수 없게 될 겁니다!”그때, 바깥에서 소연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소아는 정대명을 매섭게 노려본 뒤, 사람을 시켜 문을 잠그도록 지시했다.소연화는 최군형과 최지용을 데리고 들어왔다.“여보!”최군형은 강소아를 보자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권온유와 정승우, 두 아이 모두 찾았어!”“정말인가요?”“그래.”최지용도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드디어 인서의 억울함을 풀 수 있게 됐어.”“인서는 원래부터 결백했어요!”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누가 아이들을 찾았나요?”“아이들이 어찌나 영리하던지, 스스로 빠져나왔더군.”최군형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그날 밤, 우리가 정대명을 찾았을 때, 정대명의 머리가 다쳐 있었던 거 기억하지? 그 틈을 타 도망쳤대. 길에서 착한 운전사분을 만나 도움을 받았고 그 운전사가 집까지 데려다줬어. 차 안에서 정승우가 휴대전화를 빌렸는데 다행히도 권온유가 자기 엄마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어서 덕분에 바로 연락할 수 있었어. 아마 20분 후면, 두 아이 모두 안전하게 권씨 집안에 도착할 거야.”“정말 놀랍군요...”강소아는 감탄이 담긴 눈빛으로 답했다.“이렇게 어린아이들이 그런 상황 속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니. 역시 아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어요! 저도 이제부터 가원이에게 제 전화번호를 외우게 해야겠어요!”“그런 말 하지 마!”최군형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영미의 마음속엔 불안이 가득 찼다. 그러다 문득 시장 선거의 마지막 대결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 스쳤다.지금이라도 폭탄 같은 뉴스가 터진다면 사람들의 관심은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쏠릴 것이 분명했다.그리고 그 뉴스가 백인서와 관련된 것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영미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가에 자신감 넘치는 차가운 미소를 띠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기자와의 약속을 잡았다.“조순철 씨의 외손녀가 실종된 사건, 알고 계십니까?”카페의 한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였다. 영미는 얼굴을 거의 가릴 만큼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맞은편에는 기자는 커피잔을 천천히 저으며 영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이건 단순한 어린이 실종 사건이 아닙니다. 누군가 계획적으로 벌인 일입니다.”“영미 씨.”기자가 녹음기를 켜며 말했다.“아시는 내용을 모두 말씀해 주세요. 자료는 제가 정리해 영미 씨 말씀대로 보도하겠습니다.”“좋아요.”영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제가 알고 있기로, 권씨 가문의 어린 딸을 데려간 사람은 바로 그 공익학교 프로젝트에 있던 한 학생입니다. 그리고 그 학생은 백인서의 지시를 받았죠!”녹음기를 쥔 기자의 손이 떨렸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강소아는 방문 앞을 서성이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그 방에는 정대명이 갇혀있었는데 강소아가 아무리 질문해도 정대명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육경섭은 딸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고 희철을 시켜 예전 식으로 정대명을 다루려 했지만, 강소아가 막아섰다.현재 육씨 가문은 이미 정식 사업가로 자리 잡은 상황이었다.과거의 폭력적인 방식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강소아는 육경섭을 설득해 물러서게 한 뒤, 다음 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소연화가 급히 뛰어왔다.“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소연화는 휴대전화를 내밀었다.화면에는 뉴스가 떠 있었고 제목은 눈에 띌 정도로 충격적이었다.[조씨 공익학교에서 터진 충격적인 추문, 관리직
가끔 차가 지나갔지만, 정승우가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도 아무도 멈춰 서지 않았다.어둠이 내려앉았고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며칠 동안 육체와 마음이 지친 권온유는 이제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정승우는 어쩔 수 없이 온유를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길을 걸었다.“오빠...”권온유는 울먹이며 말했다.“해가 졌어요. 저... 무서워요.”“괜찮아.”정승우는 뒤돌아 미소를 지었다.“오빠가 집에 데려다줄게.”“오빠, 우리 그냥 돌아가요...”“뭐라고?”권온유의 시선이 정승우의 피로 물든 발에 닿았다.“발이 많이 아프죠?”권온유의 작은 얼굴 위로 눈물이 두 줄기 흘러내렸다.“오빠, 저 내려주세요. 그냥 돌아가요...”“온유야?”권온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그 집이 낡고 춥긴 해도... 오빠 발에서 피가 나진 않잖아요!”정승우는 멍하니 잠시 굳어 있다가 그 어눌한 말 속에 담긴 다정함을 깨달았다.이 작은 아이는 납치당했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정승우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정승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작은 새들이 집으로 향해 줄지어 날고 있었다.정승우는 온유를 데리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다짐했다.“바보야.”정승우는 온유를 내려놓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난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그 사람이... 우리를 때릴까요?”“그럴 거야.”정승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린 시절, 정대명에게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탈출할 때 그의 뒤통수를 내려친 한 방은 그동안의 빚을 모두 갚은 셈이었다.“그런데 오빠, 그 사람은 오빠 아빠잖아요?”권온유는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하지만 오빠가 아프다고 제가 말했을 때 오빠 아빠가 들어왔었잖아요.”정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정대명이 들어온 것은 아마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죽으면 함께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없어질까 봐서였었다.정대명은 단지
차 안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영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정대명에게 다가갔다. 그의 머리 아래로 어두운 핏자국이 퍼져 있었고 그 흔적은 이미 굳어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영미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차가운 눈빛으로 정대명을 내려다보다가 거칠게 발길을 휘둘렀다.“일어나요!”강소아와 최군형도 다가와 공장 안을 살폈지만 안은 고요히 비어 있었다.“아이들은요?”“아이고...”정대명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살려줘, 살려줘... 저 괘씸한 녀석이!”“정대명 씨!”영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어쨌든 이번 일은 영미가 자신 있게 권온유의 행방을 안다고 장담한 일이었다.영미는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함께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확신에 차 말했다.그런데 지금... 정대명은 다쳐 쓰러져 있고 두 아이는 사라졌었다.백인서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영미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정대명은 도움을 청하려다 영미가 눈짓을 주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영미의 눈길을 따라 보니 최군형과 강소아도 함께 와있었다.정대명은 예전에 영미가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정대명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신이 정대명인가요?”최군형이 다가가 물었다.정대명은 말끝을 흐리며 최군형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백인서의 양아버지시고?”최군형은 다시 물었다.“당신이 당신 아들과 함께 권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게 맞나요?”“아니야, 나 아니야!”정대명은 크게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이봐, 동생, 난 억울해! 내 아들 녀석이 나를 해치려고 했어! 내 머리를 봐, 그 자식이 벽돌로 내리쳤다니까!”“그만해요!”영미는 정대명의 말이 길어질수록 상황이 불리해질 것을 우려해 정대명을 노려보며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했다.강소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들의 서툰 수법이 한심하기만
경찰서 밖에서 최지용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젊은 경찰관이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최지용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정호야!”정호라는 젊은 경찰관은 최지용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녀석!”최지용은 정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툭 날리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야?”정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방금 최씨 집안에서 백인서를 데려간 사람 중에 정호도 있었다. 최지용도 놀라웠지만, 영미 역시 경찰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떠나기 전, 정호가 살짝 눈짓을 보냈고 최지용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지용이 형.”정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께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고 계시니 문제없을 겁니다!”“도대체 누구 지시로 백인서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소아 아가씨예요!”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소아 아가씨가 갑자기 지시한 거라 사전에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최지용은 살짝 놀랐다. 강소아의 지시라니.“형수님께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실종되기 전에 형수님께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경찰이 형수님을 데려가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절차입니다.”최지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피식 웃음을 지었다.강소아가 이런 ‘당연한 절차’를 이용해 백인서를 경찰서로 보낸 이유는 경찰서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 백인서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해도 경찰서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경찰서 안에는 일을 봐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백인서가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 힘든 일 없이 외부의 소란도 피할 수 있는 셈이었다.최지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강소아는 정말 자매를 위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방안을 생각해 내다니!“지용이 형.”정호가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께서
영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소아 언니, 저를 믿지 않으세요?”“난 오직 사실만을 믿어.”“권씨 가문의 딸이 실종된 사건에 백인서 씨의 양아버지와 남동생이 관련되었어요, 그게 바로 사실이에요!”강소아는 순간 멍하니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려 했다.세상에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호텔 뒷뜰에 있는 그 CCTV가 정말 완전히 고장 났다고 생각하는 걸까? 육씨 가문과 최씨 가문이 힘을 합쳐 그 고장 난 CCTV 하나도 못 고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최군형은 강소아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안심시키며 슬며시 휴대전화를 건넸다.강소아는 화면을 확인했다. 최군형의 부하가 보낸 메시지였다.“도련님, CCTV 데이터를 복구 중입니다. 곧 진실이 밝혀질 겁니다!”강소아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영미가 이렇게까지 백인서를 몰아세우는 걸 보니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꺼림칙한 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어차피 꼬리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었기에 그저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바로 그때, 집사가 다소 당황한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집사의 뒤에는 몇 명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신분을 밝힌 후 방 안을 둘러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기 백인서 씨가 계십니까?”표아정은 등을 꼿꼿이 펴고 대답했다.“경찰관님께서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당신이 백인서 씨인가요?”“저는...”“백인서 씨가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신고를 접수했습니다!”“뭐라고요?”백인서는 얼굴이 창백해졌다.“백인서 씨, 조사에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권온유가 납치된 지 하루가 지났다.그동안 정대명은 단 한 번 음식을 가져왔는데, 그것도 차갑게 식은 죽 한 그릇과 딱딱한 빵 한 조각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귀하게 자란 권온유에게 이런 음식은 처음이었다. 울고 싶었지만, 감히 울지 못하고 그저 눈물을 참으며 빵을 조금씩 뜯어 먹고 있었다.정승우는 그런 온유의 모습을 보고
“아줌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럼,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부 말씀드릴게요!”영미는 입가에 교만한 미소를 띠며 백인서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보았다.“백인서 씨의 친어머니인 백홍은 인신매매범이었다는 사실, 모두 아셨나요? 백인서 씨의 어머니는 백인서를 정대명의 집에 맡겼고... 흥! 정대명의 아내도 백홍이 납치해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잖아요. 제 생각엔... 인신매매범의 딸이라면 그런 일쯤은 익숙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권온유의 실종이 정말로 백인서 씨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시나요?”“영미!”강소아가 나서며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허위 사실을 퍼뜨리지 마!”“소유 아가씨, 억울하네요!”영미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조사한 건 다 아가씨를 위한 거예요! 딸도 있는 사람이 백인서를 곁에 두고도 마음이 놓이세요?”“그만해!”최지용이 크게 소리쳤다.백인서는 몸을 떨며 믿기지 않는 눈으로 최지용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최지용의 얼굴에는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최지용은 굳건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백인서를 지키고 있었다.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백인서를 아끼고 있었다.백인서는 코끝이 찡해지며 본능적으로 최지용의 손을 꼭 붙잡았다. 최지용의 따스한 손은 백인서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그 온기가 어둠의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다.최지용은 백인서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고 다시 영미를 바라볼 때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영미야.”최지용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저 넘어가는 거야. 더 이상 선을 넘지 마.”최군형도 나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백인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모르겠어요? 영미 아가씨, 우리 최씨 가문 사람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영미는 순간 긴장했다. 최군형의 말 속엔 어딘가 숨은 뜻이 있는 듯했다.최군형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파악하기 어려웠다.표아정은 천천히 일어나 어깨에 걸친 숄을
백인서는 복잡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그때 최지용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표아정이었고 다급한 목소리로 서둘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최지용은 결국 어머니의 말에 따라 백인서를 데리고 최씨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넓은 거실에는 최군형과 강소아도 나와 있었고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백인서가 들어서자, 표아정이 백인서를 올려다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다.강소아는 백인서와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미소 지었다.백인서가 의아해하던 찰나, 영미가 천천히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아줌마, 지용 오빠. 제가 권온유의 행방을 알아냈어요.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뭐라고?”최지용이 놀라서 물었다.“네가 어떻게 아는데?”영미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지용 오빠,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정보가 우리보다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최씨 가문은 만능이 아니에요, 최씨 가문도 모르는 정보가 있다고요.”표아정은 가볍게 기침하며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았다.최군형과 강소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주목하고 있었다.최지용의 이마에는 점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미의 눈에는 한 줄기 교만한 빛이 번졌다.영미는 오는 길에 이미 모든 계획을 짰다. 정대명의 말이 맞았다. 누구를 훔치든 상관없었다. 인신매매범의 딸인 백인서가 아이들을 해치러 다닌다는 누명을 씌우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하면 백인서는 모두의 신뢰를 잃게 될 터였다.영미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강소아가 인신매매범을 곁에 둘 리 없다고 믿었고, 최지용 역시 이 사실을 알면 더는 백인서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영미는 정대명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영미는 권온유를 넘기고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한패가 되어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주장할 계획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인서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궁지에 몰릴 것이었다!“지용 오빠.”영미는 고개를 돌려 최지용을 바라보며 한 글자씩 천천히 말했다.“권온유는 정승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