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훈은 최연준의 안색이 좋지 않은 걸 알아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뭐가 잘못됐는지 알지 못했다.“정말 그저 여동생으로만 생각해요?”최연준의 질문에 신석훈은 숨을 들이쉬며 머뭇거렸다.“아니면요?”신석훈이 최연준을 보며 말했다.“무엇으로... 생각해야 하는데요?”“다른 쪽으로 생각해본 적 없어요?”‘다른 쪽이라...’신석훈은 또다시 멍해졌다. 그의 이런 모습만 보면 최연준은 답답하기만 했다. 이러니 임우정도 결국에는 놓치고 말았지.“연준 씨.”신석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도대체 무슨 뜻이에요?”최연준은 그를 힐끗 째려보았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계속 동생으로만 생각해요.”그러고는 홱 돌아섰다.신석훈은 제자리에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바보 같은 웃음을 지으며 최연준의 뒤를 따라나섰다.예전에 강주의 마을에 있을 때도 최연준은 성격이 이상했고 두어 마디 하다가 홱 돌아서곤 했다. 그 바람에 주변 사람들이 그를 멀리했지만 신석훈만 별로 개의치 않아 했다.이젠 오성으로 돌아왔고 신분도 되찾았지만 성격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방안에서 최연희는 열심히 웨딩드레스를 고르고 있었는데 가끔 강서연과 독특한 디자인에 관해 얘기를 나누곤 했다.“이건 C사의 한정판 웨딩드레스인데 타이트한 디자인이 언니와 잘 어울릴 것 같아요.”“언니, 이것 봐요... 이런 머메이드 웨딩드레스를 입으면 여왕이 따로 없을 거예요.”“와, 이걸로 해요. 베라의 고급 웨딩드레스인데 가슴 쪽에도 전부 보석이 박혀있어요.”강서연은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내 웨딩드레스를 고르는데 연희 씨가 더 열심히 골라주네요? 연희 씨도 입어보고 싶지 않아요?”최연희는 쑥스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연희 씨.”강서연이 자연스럽게 물었다.“결혼식 날에 연희 씨가 신부 들러리 서줄 수 있어요?”“정말요?”최연희의 두 눈이 반짝였다.“네. 그리고 신랑 들러리는 석훈 씨에게 서달라고 할 생각이에요.”최연희의 두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언니도 참.”강서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는데 갑자기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사모님, 당장 빌라 본가로 가보셔야겠어요.”“무슨 일이야?”“회장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셨답니다.”최연준이 어두운 얼굴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강서연과 최연희가 그의 뒤를 따랐고 은미연과 최문혁도 따라나섰다.최재원의 본가에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 전부가 최씨 가문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갑자기 쓰러졌다는 건 그야말로 큰일이었다.최진혁과 최지한이 진작 도착해있었고 최연준이 도착했을 때 박경수가 초조한 얼굴로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할아버지 상태는 어떠세요?”“의사 선생님이 안에서 진찰하고 있어요.”불시의 필요에 대비하여 최상 빌라에는 전문적인 의료팀이 있다. 하지만 의료팀에 사람이 많아 최연준은 그들을 믿지 못했다. 하여 의료팀을 전부 내보내고 신석훈만 안으로 들여보냈다.신석훈은 간단한 검사를 마친 후 진단을 내렸다.“혈관 색전증이에요.”“혈관이 막혔단 말인가요?”“네.”신석훈이 고개를 끄덕였다.“다행히 그리 심각하지 않아요. 제때 발견해서 아까 의료팀이 혈관을 뚫어주는 주사를 놓은 덕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최연준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에요.”강서연이 일그러진 얼굴로 나지막이 물었다.“혈관 색전증은 노년층에서 자주 발병하는 질병인데...”“왜 그래?”강서연이 입술을 적셨다.“내가 이 집에 올 때마다 서재에서 할아버지가 혈관을 뚫어주는 약을 드시는 걸 봤어요. 평소에도 건강에 매우 신경 쓰시는데 혈관이 왜 막혔죠?”“여러 가지 가능성이 있어요.”신석훈이 설명했다.“하나는 연세가 있으셔서 약으로도 조절이 안 될 수 있고 또 하나는... 음식 때문이에요. 평소 지방과 염분이 많은 음식을 섭취하면 혈관이 쉽게 막힐 수 있어요. 그러면 그 어떤 약도 효과가 없어요.”최연준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최씨 가문에서 식단을 조절하는 것도 욕망을 조절하는 것 중의 하나이기에 어릴 적부터 음식을 조절하는 법을 배웠다.할아버지
진용수는 이제는 적응한 듯 그저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하지만 바로 윤정재에게 무자비하게 제압당했다!“마시면 안 돼!”윤정재가 눈을 부릅떴다.“술 마시면 운전 못 하잖아!”진용수가 혼란스러워하며 말했다.“회장님께서 방금... 끝나고 걸어간다고 하지 않으셨나요?”“내가 언제!”윤정재는 진용수에게 눈을 부릅뜨고 성을 내고 있지만 전화 너머에 있는 사람에게는 자상하고 무조건 맹종했다.“서연아, 조급해하지 마... 너무 급해하지 마요!”“제가 근처에 있어요.”“멀지 않아요. 제가 곧 가서 반드시 영감님을 낫게 해 줄게요!”“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예요. 저한테 고마워할 필요가 없어요.”윤정재는 재빨리 외투를 입고 뛰쳐나갔다.진용수는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씁쓸하게 웃었다. 손대지도 않은 칵테일 두 잔을 미련하게 보고는 한숨을 쉬며 쫓아 나갔다.이 술집은 분명히 최상 빌라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가는 도중에 윤정재는 쉬지 않고 진용수에게 액셀을 세게 밟으라고 재촉했다.최상 빌라의 본채에 도착했을 때 이미 거실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윤정재의 시선은 강서연에게만 향해 있었다.윤정재는 강서연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딸에게 필요한 사명감과 영예감을 갖고 약상자를 들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최연준은 윤정재의 뒷모습을 보며 어진 빌딩에서 자기와 말다툼을 하고 씁쓸하게 떠나는 윤정재가 생각나서 저도 모르게 짠한 마음이 들었다.최연준은 강서연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어깨를 살포시 감싸 안은 채 복잡한 심경으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잠시 후 윤정재가 방에서 나오자 사람들이 앞으로 몰려갔다.“다들 걱정하지 마세요.”윤정재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조금 전에 영감님에게 침을 놓아줬으니 아무 문제가 없을 겁니다.”그러고는 알약 한 병을 꺼내서 박경수에게 건네주었다.“이 약을 하루에 두 번, 한 번에 한 알씩 영감님께 드리세요.”박경수는 약을 정중히 받아 들여오고 말씀을 마음에 새겼다.“제가 봤을 때 영감님은 영양분이 과잉되어 혈관 색전증이
최진혁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런 추태를 부려 그의 체면을 구겼다.이때 다른 사람들이 최진혁을 신경 쓰지 않는 건 둘째 치고, 최지한조차도 보지 못하는 척한다!최진혁이 막 최지한을 부르려고 하는데 자기 친 아들이란 놈이 사람들 속에서 몰래 도망가려는 것을 발견했다!“지한아, 최지한!”최진혁은 감정이 격해졌다.“야, 이 망할 놈아!”“경수야, 나 좀 도와줘!”박경수는 최진혁을 힐끗 보고 담담하게 말했다.“어르신, 정말 죄송합니다. 영감님 곁에 사람이 없으면 안 돼서 제가 빨리 위층으로 올라가야 합니다.”“너...”최진혁이 화를 내기도 전에 최연준은 가주의 기세로 모두에게 명했다.“할아버지는 이미 위험에서 벗어났으니 다들 그만 여기에 모여들 있고 할 일을 하러 가세요!”모두가 한목소리로 대답했다.“예, 도련님!”최연준은 웃으며 강서연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너희들 다 가면 나는 어떡해!”최진혁이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최연준! 이 얌생이야... 나한테 사람 한 명이라도 남겨주고 가야지! 다들 돌아와! 야!”“어르신, 조용히 하세요.”윤정재가 냉소했다.“영감님께서 쉬고 계시는데 여기서 소란을 피울 거예요?”최진혁은 할 수 없이 눈만 부릅뜨고 있었고 사람들이 잇달아 그의 앞에서 떠나는 것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마당을 걸어가던 윤정재는 진용수가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발걸음을 재촉해 차에 오르려고 했다. 갑자기 뒤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감사해요.”윤정재는 잠시 멈칫하고 돌아서서 최연준과 눈이 마주쳤다.윤정재는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그를 상대하려 하지 않았다.최연준은 윤정재를 바라보다가 문득 이 모습이 뚱냥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가볍게 웃었다.“왜 웃어?”윤정재는 눈을 부릅떴다.“아무것도 아니에요.”최연준이 담담하게 말했다.“회장님, 제가 좀 전에 한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정말 감사드립니다.”“내가 네
윤정재는 한참 동안 최연준을 응시했고 눈에 의심이 가득했다.“당최 뭐라고 하는지 못 알아듣겠네.”“회장님.”최연준은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렸다.“저한테까지 숨길 필요는 없어요! 저는 병은 볼 줄 몰라도 할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아요. 솔직히 말해서 제가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가 이 한약을 드시는 것을 보았는데, 전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왜 갑자기 문제가 생겼을까요? 그리고 경수 아저씨께서 최근에 할아버지께서 약을 유난히 많이 드신다고 하였어요. 전에는 사흘에 한 번 드셨는데 지금은 하루에 세 번도 드실 수 있다고 해요. 약이 맛있어봤자 얼마나 맛있겠어요. 산해진미 앞에서도 세 입밖에 드시지 못하는데 이런 약에 대해 통제 불능이라는 게 이해가 안 가서요.”최연준은 안색이 어두워지고 또박또박 물었다.“회장님, 이 약에는 보약만 들어 있는 게 아니죠?”윤정재는 조용히 최연준을 바라보았다.‘이 녀석은 다행히 멍청하지 않아 문제의 본질을 한눈에 간파할 수 있구나. 음, 그러고 보니 서연이가 이 녀석과 결혼하는 것도 보장이 될 수 있네. 똑똑한 사람과 살면 귀찮은 일이 많이 줄어들 수 있을 거야. 그리고 후대의 아이큐도 낮지 않을 것이고. 서연이가 얼마큼 영리하고 귀여운 아기를 낳을까... 똑똑한데다가 부모님의 빼어난 외모를 물려받을 수 있다니, 그야말로 천생연분이다! 장차 윤씨 가문에도 후계자가 있을 거야!’윤정재는 생각만 해도 자애로운 미소가 지어졌고 최연준을 바라보는 눈빛도 한결 부드러워졌다.‘이제 좀 마음에 드네!’그러나 최연준은 윤정재의 내심 세계를 알지 못했고 윤정재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생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그래, 맞아.”윤정재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약에 다른 성분이 있는 게 분명해. 하지만 아직 성분을 알아내지 못해서 당분간 입 밖에 내지 말도록 하자. 사전에 대비하지 못하게 하려고.”최연준은 즉시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 나는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사리 분별은 할 수 있어. 노인에게 만성 독약을
자기 후반생을 위해서라도 최연준은 어떻게 해서든 강서연이 윤정재의 침술을 배우게 해서는 안 된다.“여보.”최연준은 말을 돌리기 시작했다.“오늘 정말 대단했어!”“뭐가요?”“당신이 우리 삼촌한테 그렇게 말해줄 때 너무 통쾌했어!”강서연은 살짝 웃었다.그건 최진혁이 너무 오만하고 다른 사람에게 죄를 덮어씌우려고 해서 나온 말이다.몇 번의 만남을 통해 강서연은 최문혁이 성실하고 나약한 것 외에는 별다른 단점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약한 사람은 괴롭힘을 당해도 된다는 말인가?강서연은 기어코 이런 생각에 불복한다.게다가 은 대표가 혼자 힘겹게 버티고 있는 것을 보고 강서연은 그제야 나섰다.“오늘 정말 영광이네. 당신의 멋진 모습을 보다니!”“당신도 오늘 말을 번지르르하게 하네요.”강서연은 최연준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최연준은 그녀의 어깨에 기대고 두 손으로 팔짱을 끼었다.“당신도 봤겠지만... 우리 집은 호시탐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내가 그 틈새에서 살아남기가 정말 힘들어! 당신이 날 잘 지켜줘야 해!”강서연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최연준을 힘껏 밀어냈지만 다시 그에게 끌려왔다.“최연준!”강서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왜요? 또 여자 등쳐먹는 소리 하려고요?”남자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내가 위가 좋지 않다는 것을 잊었어? 여자를 등쳐먹고 호강하는 부분에서는 내가 탑이지!”최연준은 눈을 번쩍 뜨고 입가에 짓궂은 웃음을 띠며 강제로 강서연을 소파에 눕혔다....다음날 강서연은 나가기 전 드레스룸에서 겨우 목폴라를 찾아 목의 흔적을 가렸다.최연준은 이미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그러나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강서연은 뚱냥이도 같이 차에 놔뒀다!가는 내내 최연준은 웃지 않았고 이따금 옆에 있던 뚱냥이를 흘겨보며 눈을 부릅뜨기도 했다.결국 참지 못하고 강서연에게 물었다. “장모님 보러 가는데 뚱냥이를 데리고 가서 뭐 하려고?”“엄마가 좋아할 거예요!”강서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나는 일이 바빠서 집에 가는
“동의한다고 한 적 없어!”윤문희는 강서연의 얼굴에 살짝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윤정재와 평생 다시 만날 수 없을지라도 딸과 아들은 이미 그 남자가 그녀에게 준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윤문희는 부드럽게 말했다.“네가 나를 위해서 그런 거 알아. 하지만 엄마는 정말 다른 사람을 찾고 싶지 않아. 강명원이 날 어떻게 대했는지... 아직도 생생해.”강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네가 말하는 그 사람은 강명원만큼 나쁘지 않겠지?”“네?”강서연은 잠깐 멈칫했다.“당연하죠!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에요!”“한 쌍의 손으로 병을 고치고 사람을 살리는 것은 존경할 만한 일이야.”윤문희가 가볍게 웃었다.“재혼은 동의하지는 않지만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만나서 인사 정도는 해도 무방할 것 같아.”“진짜요?”강서연의 눈이 번쩍 뜨였다.강서연은 애교스럽게 어머니를 껴안았고 부드러운 햇살이 서로 의지해서 앉아있는 두 사람을 비췄다. 뚱냥이도 옆에서 우는 소리를 내며 눈을 가늘게 뜨고 기지개를 켰다.세상 만물은 모두 세월의 향기와 정취가 묻어있는 모양이다.강서연은 엄마가 이 단계까지 온 것 자체가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앞으로의 일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면 된다. 많은 부부도 남남 관계에서 시작하는 거다!“맞다.”윤문희가 강서연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분은 무슨 고양이를 키워?”“저번에 봤을 땐 샴고양이를 데리고 있었어요!”“그래?”윤문희는 순간 가슴이 조여오고 왠지 모를 서운함이 느껴져 숨 쉬는 것조차 아팠다.마치 전생에 있었던 일인 것처럼 예전의 그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는 행복한 나날들이 떠올랐다.그때 윤문희와 김자옥이 몰래 고양이를 기르고 있었는데 학교 측에서 발견했다. 국제 학교는 규칙이 엄격하고 학업이 과중하여 학생들이 공부와 관계없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학교 측은 그녀 둘에게 즉시 고양이를 동물 보호소로 보내라고 명령했고 그렇지 않으면 학교 내 처분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윤문희는 교문
윤문희는 재혼할 뜻이 없었지만 “인사 정도는 할 수 있다” 라는 말에 강서연은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다.그래서 강서연은 요 며칠 동안 두 사람을 맺어 줄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많은 방법을 생각해 봤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아마도 가장 전통적인 면대면이 아닌가 싶다.강서연은 먼저 윤정재에게 전화를 걸고 간단하게 말했다. 그냥 잠깐 앉아서 담소를 나누고 싶다며 지난번 그 샴고양이를 데려오라고 특별히 당부했다.윤정재는 전화를 끊고 한참 동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하지 못했다.“용수야,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지?”윤정재는 믿을 수가 없어 여러 번 확인했다.“서연이가... 나랑 커피 마시고 싶다고?”진용수도 해가 서쪽에서 뜨는 느낌이 들었다.강서연은 성격이 부드럽고 친절했지만 그녀가 먼저 이렇게 요청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진용수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갑자기 통화 내용이 생각났다.“회장님, 서연 씨가 샴고양이를 데려오라고 하셨어요!”“응? 무슨 뜻이야?”“지난번에 동물병원에서 만났을 때 서연 씨가 치즈냥을 안고 있었는데... 두 고양이가 잘 놀더라고요!”진용수는 추측했다.“회장님, 서연 씨가 고양이를... 교미시키고 싶은 거 아닐까요?”“그게...”윤정재는 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고양이 품종도 다른데 교미할 수 있을까?딸이 요청한 것이니 설사 윤정재더러 가시밭길에 뛰어 들어가라고 해도 가야지, 이 좋은 기회를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다!그런데 고양이는 어디서 찾아야 하지?저번에 그 샴고양이는 강서연에게 접근하기 위해 산 것이었는데 다 쓰고는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주었다.“용수야, 빨리!”윤정재가 급하게 말했다.“빨리 가서 예쁜 샴고양이 한 마리를 구해와!”진용수는 승낙하고 서둘러 행동했다.윤정재는 재빨리 드레스룸에 들어가 옷을 고르려고 했는데 손이 격하게 떨렸다.다음날 윤정재는 정장 차림에 넥타이를 매고 실크모자를 쓴 채 샴고양이를 품에 안고 한 시간 일찍 강서연이 말한 카페에 도착했다.윤정재는 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유리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