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지지 마.”윤문희는 그녀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이 안에 딱 두 개밖에 없어. 망가뜨리면 다시 만들어야 한단 말이야.”“엄마...”강서연은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할아버지를 뵈러 가는데 왜 이걸 가져가야 해요? 저도 몇 번 못 먹어봤다고요.”“이 녀석.”윤문희가 피식 웃었다.“우리 그쪽에서는 어른을 공경할 때 다 이렇게 했어.”“우리 그쪽이요?”강서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자신의 고향이 강주라고 알고 있었다. 윤문희는 그제야 괜한 소리를 많이 했다는 걸 알아채고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가져가기 싫으면 됐어.”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다른 선물들도 다 귀한 거니까 최씨 가문에서 널 업신여기진 않을 거야.”그러고는 묵묵히 방으로 돌아갔다.강서연은 거실에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얼굴을 찡그렸다....약속 당일, 야근하려 했던 김자옥은 미팅을 두 개나 취소하고 최상 빌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가는 길에 최연준에게 전화하여 한바탕 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인마, 서연이가 네 할아버지를 만나기로 했다며? 왜 나에게는 얘기하지 않았어?”최연준은 어안이 벙벙했다.“그걸 왜 엄마에게 얘기해요? 와서 소란을 피울 게 뻔한데.”“불효자식 같으니라고!”김자옥은 미친 듯이 액셀을 밟았고 노란색 신호등이 반짝일 때도 아슬아슬하게 건너갔다.“네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몰라서 그래? 너와 임나연을 계속 붙여놓으려고 했잖아. 임씨 가문에 일이 터지자마자 서연이를 만나겠다는 건... 무슨 음모가 있는 게 틀림없어. 연준아, 네 할아버지 혹시 임씨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서연이를 협박하는 건 아니겠지?”최연준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한편으로 엄마의 풍부한 상상력을 감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설명했다.“엄마, 할아버지가 노망이 난 것도 아니고 임나연이 오성에서 쫓겨났는데 그럴 리가 있겠어요?”“난 그 노인네가 젊었을 때부터 나중에 치매에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어.”최연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누가 같이 왔대?”“누가 같이 왔대요?”상황을 알 리가 없는 최연준은 답답하기만 했다. 두 사람의 표정을 봐서는 방금 한바탕 치열하게 싸운 것 같았다. 그리고 아까 이쪽으로 다가올 때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다름 아닌 그들이었다.최연준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두 사람 사이에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이봐요!”윤정재는 그를 보자마자 두 눈을 부릅떴다.“왜 아직도 여기 있어요? 오늘 여자친구가 집에 인사하러 온다면서요?”“안 그래도 지금 데리러 가려던 참이었어요.”“얼른 안 가고 뭐 해요!”윤정재는 마음 같아서는 그의 엉덩이라도 확 걷어차고 싶었다.“회장님.”최연준이 눈살을 찌푸렸다.“그나저나 여긴 어떻게...”“길을 잘못 들어섰어요.”윤정재는 눈을 희번덕거리고는 다시 차에 올라탔다. 그의 차가 멀어지고 나서 최연준은 의아한 눈빛으로 김자옥을 쳐다보았다.그런데 그가 입을 열기 전에 김자옥이 먼저 말했다.“재수 없어.”“엄마,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대낮에 귀신을 봤어.”최연준은 어이가 없었다.“엄마, 혹시 윤정재 회장님을 알아요?”김자옥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최연준은 두 사람 사이에 말 못 할 과거가 있다는 걸 더욱 확신했다.“엄마?”그는 갑자기 뭔가 깨달은 듯 표정이 확 굳어졌다.“설마 저 사람 때문에... 그때 이혼한 거 아니죠?”김자옥은 그를 노려보며 냅다 따귀를 후려갈겼다.“이 엄마를 뭐로 보고. 내가 바람을 피워도 저런 사람과는 안 피워!”“그럼 대체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그건...”김자옥은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더는 과거 일을 꺼내지 않고 아이들에게도 얘기하기 싫다던 윤문희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녀는 조용히 살고 싶다고 했었다. 하여 김자옥은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손을 내저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잠깐 안 좋은 일이 있었어... 아무튼 저 사람과 너무 예의 차릴 필요 없어.”최연준은 더욱 어리둥절해졌고 웃지도 울지도
최재원의 서재는 마치 도서관처럼 아주 컸다. 책장은 천장에 거의 닿을 정도로 높았고 여러 분야 전문가들의 서적이 가득했다.책들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어도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메아리 소리가 들렸다.소파에 앉은 강서연은 떨리는 마음에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최연준은 그녀와 깍지를 끼고 위로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최재원은 한복을 입고 책상 뒤에 앉아있었다. 연세가 지긋했지만 강건하고 활력이 넘쳐 보였다. 강서연을 아래위로 훑어보던 그의 눈빛이 어딘가 복잡했다.“차 마셔요, 서연 씨.”최재원은 그래도 나름 예의를 갖췄다.강서연은 차를 마시기 전 고개를 들어 최연준이 어떻게 마시는지 본 다음 그대로 따라 하며 한 모금 홀짝였다.최재원은 강서연이 머리가 좋은 아이라는 걸 보아냈다. 거칠고 무모하지 않았고 당돌하지도 않았다. 최연준이 옆에 있어도 여전히 예의 바른 모습이었고 어른 앞에서 그와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최연준이 편을 들어줄 거라는 생각에 함부로 행동했을 것이다.최재원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번졌다.그는 강서연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무슨 질문을 하든 강서연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잠시 후 서재에서 나온 강서연은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면서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그렇게나 긴장했어?”최연준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까 할아버지께서 당신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았어.”“그래요?”하지만 강서연의 생각은 달랐다. 이런 집안의 어른은 보통 자기주장이나 고집이 세서 한 사람에 관한 생각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아무래도 당신을 받아들인 것 같아.”“예전에도 안 받아들인 건 아니었죠.”강서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연준 씨 내연녀가 되라고 하셨잖아요.”“당신...”최연준이 두 눈을 부릅뜨며 그녀를 간지럽히려 하자 강서연이 그를 말렸다.“연준 씨네 집에서는 이러지 말아요.”“알았어.”최연준은 음흉하게 웃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운전기사는 헛웃음을 지었다. 저도 모르게 핸들을 해원 별장 쪽으로 틀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명황산에서 둘째와 셋째 사이의 원한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아닙니다, 아니에요.”운전기사는 재빨리 핸들을 틀었다.“저긴 별로 좋지 않은 곳이에요. 가까이 가면... 부정 타요.”“그래요?”강서연은 별로 믿지 않는 눈치였다.‘건물은 나름 이쁘고 화려해 보이는데? 저기 안에도 할아버지가 예뻐하는 자손이 살고 있겠지?’“서연 씨, 다른 곳도 보여드릴게요...”그런데 운전기사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옆길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튀어나왔다.화들짝 놀란 운전기사는 다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관성 때문에 강서연은 하마터면 앞 좌석에 부딪칠 뻔했다.마음을 가라앉히고 차 앞에 나타난 사람의 얼굴을 본 순간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강유빈?”“서... 서연아!”헝클어진 머리에 메이크업도 하지 않은 강유빈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보기 흉할 정도로 여윈 게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서연아.”강유빈은 유리창을 마구 두드렸다.“서연아, 잠깐 내려. 너에게 할 얘기 있어.”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며 운전기사에게 차 문을 잠그라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강유빈은 다급하게 차 문을 열려 했다.“문 열어, 서연아.”문이 열리지 않자 미친 듯이 유리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뭐라 해도 우린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자매야. 서연아, 언니 좀 살려줘.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거야?”강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가 막연하게 쳐다보자 운전기사가 마른기침을 두어 번 했다.“제 말이 맞죠? 이쪽에만 오면 부정 탄다니까요. 제가 알아서 따돌릴게요.”“대체... 왜 저러는 걸까요?”운전기사가 대답하기 전에 밖에서 처참한 비명이 들려왔다.강유빈이 몇몇 경호원에게 끌려 나가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그녀의 목소리가 허공에 맴돌다가 점차 사라졌다. 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소름이 쫙 돋았다.“서연 씨, 사실... 저도
비록 마음속으로는 최씨 집안이 이런 대접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있어야 할 예절은 조금도 소홀할 수 없다.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시비를 걸게 해서는 안 된다.윤정재는 만약 강서연이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버지로서 당연히 준비를 해줘서 반드시 영감님을 놀라게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윤정재는 이미 마음속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몇백 번을 생각했지만 강서연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강서연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당연히 빈손으로 오지 않았어요. 우리 어머니께서 선물을 준비해줬어요!”윤정재는 잠시 멈칫하고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어머니?”“네.”윤정재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어머니께서 무엇을 준비하셨어요?”강서연은 준비한 것들을 몇 개 말했는데 전부다 남양 쪽에서 여자가 처음으로 남자 집에 갈 때 가지고 갈 물건이었다.윤정재는 코끝이 찡했다. 윤문희가 딸을 위해 준비한 것이니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맞아요. 하나 더 있어요.”강서연은 윤정재를 보며 말했다.“어머니께서 직접 만드신 녹옥떡도 있어요.”윤정재는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그는 강서연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침묵에 잠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심지어 안부의 말도 할 수가 없었다.윤정재는 무슨 신분으로 그런 것을 물을 수 있을까?김자옥의 말처럼 강서연이 그동안 자신이 했던 일들을 알게 되면 아저씨라고도 불러 주지 않을 것이다.“아저씨, 왜 그러세요?”윤정재는 갑자기 정신을 차렸고 고개를 숙여 황급히 설명했다.“아니에요... 아까 바람이 불어서 눈에 먼지가 들어갔나 봐요.”“서연 씨.”방한서가 멀지 않은 곳에서 급히 달려와 윤정재에게 인사를 건넨 후 공손하게 강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도련님께서 먼저 집까지 모셔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서연 씨, 차에 타세요.”“방 비서가 바래다주지 않아도 돼요!”윤정재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제가 바래다주면 돼요!”“그게...”방한서가 어떻
윤정재는 제자리에 굳어 있었다.가슴이 뭔가에 세게 부딪히는 것 같았고, 한바탕 쥐어짜는 듯 아프다가 또 마구 뛰었다.강서연은 윤정재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별생각 없이 돌아서서 차에 올라갔다. 방한서는 기사를 불러 함께 출발하려고 했다.차를 몰고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윤정재는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쫓아갔다.강서연이 탄 차를 계속 따라갔고 핸들을 움켜쥔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몇 번이나 윤정재의 시선은 흐려졌다.윤정재의 머릿속에는 그 맑고 달콤한 목소리가 계속 울려 퍼졌고 여인의 미소와 눈빛이 떠올랐다.연보라색의 드레스를 입고 달빛 아래 서 있는 소녀는 소년을 볼 때마다 환하게 웃었다.소녀는 소년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모두한테 등을 돌렸다.소년이 소녀를 속였다는 것을 알게 된 소녀의 눈빛에는 충격과 분노, 절망이 담겨 있었다...윤정재는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다.차가 갑자기 길 한가운데 멈춰서는 바람에 뒤차들의 불만을 샀고 귀에 거슬리는 경적 소리가 울려 퍼졌다.다른 기사들이 윤정재를 지나갈 때마다 그를 한 번씩 쳐다보고는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다.교통경찰이 달려와 윤정재의 차 창문을 두드렸다.반면 윤정재는 혼을 잃은 듯 차 안에 앉아 얼굴은 창백했고 이마에는 콩알만 한 땀방울이 솟아나며 눈물은 비 오듯 쏟아졌다....“서연 씨, 무엇을 찾으세요?”앞에 앉은 방한서는 그녀가 계속 뒤를 돌아보는 것을 보자 물어봤다.“아니에요.”강서연이 담담하게 말했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저씨의 차가 뒤따라오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또 없어졌어요.”방한서는 눈살을 찌푸리고 생각해 보았는데 이 일을 최연준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강서연을 안전하게 데려다준 후 아래층에서 최연준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했다.“... 네. 서연 씨를 사모님 댁에 모셔다드렸습니다.”“응.”최연준은 서류를 처리하는 중이었다.“빌라에서 별일 없었지?”“없었어요, 그냥...”방한서가 뜸을 들였다.“문 앞에서 윤 회장님을 만났는데 서연 씨를 직접 데
지금의 최연준은 장모님 댁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윤정재가 서연이를 따라갔을까? 이 영감탱이!’최연준은 마음속으로 욕을 했다.‘도대체 무슨 속셈이지?’...강서연이 집에 도착했을 때 윤문희는 베란다에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강서연이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자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서연아, 이리 와봐!”강서연이 급하게 달려갔다.윤문희는 자신이 키우는 다육식물 화분 몇 개를 가리키며 딸에게 자랑했다.“이거 봐, 내가 잘 키웠지! 생명력이 정말 강해서 십수일에 한 번 물을 줘도 이렇게 자랐다니까!”강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강서연의 기억 속으로는 윤문희는 화초를 다스릴 줄 몰랐다. 손에 닿은 것들은 죄다 죽었기 때문이다.예전에 강서연은 윤문희를 비웃으며 그녀가 유일하게 죽지 않게 키운 생물이 바로 자기와 윤찬 남매라고 말한 적이 있다.윤문희는 강서연을 힐끗 쳐다보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딸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계속해서 식물잎을 만지작거렸다.“엄마.”강서연이 갑자기 궁금해했다.“엄마는 아이를 낳기 전에 식물을 안 키워봤어요?”“응.”윤문희는 고개를 저었다.그때 집에는 식물원과 유리 온실이 있어 전 세계의 온갖 희귀한 식물들이 다 그 안에 있었다. 또 개인 소유의 열대 우림이 있었기 때문에 윤문희가 가꾸지 않아도 되었다.강서연은 베란다에 널려있던 빨래를 걷어 하나씩 개고 집 안부터 밖까지 다시 청소했다.강서연은 윤문희와 역할이 바뀌는 경우가 많았다.강서연이 엄마 같았고 윤문희는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딸에 더 가까웠다.강서연은 웃으며 중얼거렸다.“가끔 엄마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엄마는 뭔가 귀하게 자란 공주님 같아요!”윤문희는 잠시 멈칫하고 좀 슬퍼했다.“서연아...”윤문희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그동안 엄마가 너한테 민폐만 끼치고 많이 못 해줬어.”“아니에요!”강서연이 급하게 윤문희를 껴안았다.“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나는 그런 뜻이 아닌데요! 방금 한
“그래도 너희 둘이 결혼하지 않고 계속 같이 살면 남들에게 비난받을 거야. 서연아, 여자는 평판이 중요하다고! 예전에는 네가 최 서방 신분을 몰라서 결혼한 줄 알았을 때 같이 사는 건 남들이 뭐라 안 할 거야. 그런데 이제 알았으니 계속 같이 살고 싶으면 빨리 결혼해야지!”윤문희는 부드럽게 말했다.“엄마.”강서연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띠었다.“엄마는 생각이 너무 올드해요!”“올드한 게 아니라 너를 지키려고 하는 거야!”윤문희는 강서연의 손을 꼭 잡았다.“결혼을 하지 않으면 그건 명분이 정당하지 않고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야. 엄마는 네가 상처받을까 봐 두려워.”강서연은 코끝이 찡했다. 강명원과 안 좋았던 과거로 인해 윤문희가 명분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강서연은 엄마 품에 떼쓰듯 기대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윤문희와 이렇게 애교를 부릴 기회가 극히 드물었다.윤문희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토닥였다. 잔소리 많은 엄마들이 그렇듯 윤문희 역시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 끊임없이 중얼거렸다.“알겠어요.”강서연이 위로했다.“현재 진행하고 있는 일들을 다 마치면 결혼 준비할게요, 이러면 됐죠?”“약속을 지켜야 해!”“걱정하지 마세요!”“맞다.”윤문희는 또 뭐가 생각나서 물었다.“너랑 최 서방... 둘이 있을 때 최 서방이 너한테 잘해주지?”강서연은 듣고 어리둥절했다.다소 말을 돌려서 얘기한 윤문희는 딸의 멍한 모습을 보며 절로 웃음이 나왔다.“내 말은 최 서방이 평소에 너를 얼마나 귀찮게 하니?”강서연은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엄마, 왜 그런 걸 물어요?”“이게 왜? 엄마니까 물어볼 수 있지!”윤문희는 어려서부터 서양식 교육을 받아 성에 대해서는 한 번도 숨기지 않았다.“엄마가 너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단지 너무 힘들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거야. 피임은 너희 둘이 상의하면 돼! 물론 나는 빨리 손자를 보고 싶긴 하지만...”“엄마!”강서연은 발을 동동 굴렀다.“장모님, 제
“정 선생님, 아직도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으신가요? 영미가 대체 얼마나 좋은 조건을 내걸었기에, 백인서를 모함하는 데 가담한 거죠?”정대명은 눈동자를 굴리며 머뭇거렸다. 어디까지 입을 열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당신이 인서의 양아버지라는 말은 사실입니까?”“그... 그건 두말할 필요도 없이 진실이야!”“그렇다면 딸을 키운 정도 있을 텐데 왜 모함하려 하신 거죠?”정대명의 몸이 떨렸고 시선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정 선생님, 이제 영미조차도 당신을 지켜줄 수 없습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신다면 감옥에서 나올 수 없게 될 겁니다!”그때, 바깥에서 소연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소아는 정대명을 매섭게 노려본 뒤, 사람을 시켜 문을 잠그도록 지시했다.소연화는 최군형과 최지용을 데리고 들어왔다.“여보!”최군형은 강소아를 보자 반갑게 웃으며 말했다.“권온유와 정승우, 두 아이 모두 찾았어!”“정말인가요?”“그래.”최지용도 후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드디어 인서의 억울함을 풀 수 있게 됐어.”“인서는 원래부터 결백했어요!”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누가 아이들을 찾았나요?”“아이들이 어찌나 영리하던지, 스스로 빠져나왔더군.”최군형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그날 밤, 우리가 정대명을 찾았을 때, 정대명의 머리가 다쳐 있었던 거 기억하지? 그 틈을 타 도망쳤대. 길에서 착한 운전사분을 만나 도움을 받았고 그 운전사가 집까지 데려다줬어. 차 안에서 정승우가 휴대전화를 빌렸는데 다행히도 권온유가 자기 엄마 전화번호를 기억하고 있어서 덕분에 바로 연락할 수 있었어. 아마 20분 후면, 두 아이 모두 안전하게 권씨 집안에 도착할 거야.”“정말 놀랍군요...”강소아는 감탄이 담긴 눈빛으로 답했다.“이렇게 어린아이들이 그런 상황 속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니. 역시 아이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어요! 저도 이제부터 가원이에게 제 전화번호를 외우게 해야겠어요!”“그런 말 하지 마!”최군형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집으로 돌아온 영미의 마음속엔 불안이 가득 찼다. 그러다 문득 시장 선거의 마지막 대결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이 스쳤다.지금이라도 폭탄 같은 뉴스가 터진다면 사람들의 관심은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쏠릴 것이 분명했다.그리고 그 뉴스가 백인서와 관련된 것이라면 금상첨화일 것이다.영미는 잠시 생각하더니 입가에 자신감 넘치는 차가운 미소를 띠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기자와의 약속을 잡았다.“조순철 씨의 외손녀가 실종된 사건, 알고 계십니까?”카페의 한구석,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리였다. 영미는 얼굴을 거의 가릴 만큼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맞은편에는 기자는 커피잔을 천천히 저으며 영미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이건 단순한 어린이 실종 사건이 아닙니다. 누군가 계획적으로 벌인 일입니다.”“영미 씨.”기자가 녹음기를 켜며 말했다.“아시는 내용을 모두 말씀해 주세요. 자료는 제가 정리해 영미 씨 말씀대로 보도하겠습니다.”“좋아요.”영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제가 알고 있기로, 권씨 가문의 어린 딸을 데려간 사람은 바로 그 공익학교 프로젝트에 있던 한 학생입니다. 그리고 그 학생은 백인서의 지시를 받았죠!”녹음기를 쥔 기자의 손이 떨렸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강소아는 방문 앞을 서성이며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그 방에는 정대명이 갇혀있었는데 강소아가 아무리 질문해도 정대명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육경섭은 딸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보고 희철을 시켜 예전 식으로 정대명을 다루려 했지만, 강소아가 막아섰다.현재 육씨 가문은 이미 정식 사업가로 자리 잡은 상황이었다.과거의 폭력적인 방식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강소아는 육경섭을 설득해 물러서게 한 뒤, 다음 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소연화가 급히 뛰어왔다.“아가씨, 이것 좀 보세요!”소연화는 휴대전화를 내밀었다.화면에는 뉴스가 떠 있었고 제목은 눈에 띌 정도로 충격적이었다.[조씨 공익학교에서 터진 충격적인 추문, 관리직
가끔 차가 지나갔지만, 정승우가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도 아무도 멈춰 서지 않았다.어둠이 내려앉았고 기온은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며칠 동안 육체와 마음이 지친 권온유는 이제 무너질 듯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정승우는 어쩔 수 없이 온유를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길을 걸었다.“오빠...”권온유는 울먹이며 말했다.“해가 졌어요. 저... 무서워요.”“괜찮아.”정승우는 뒤돌아 미소를 지었다.“오빠가 집에 데려다줄게.”“오빠, 우리 그냥 돌아가요...”“뭐라고?”권온유의 시선이 정승우의 피로 물든 발에 닿았다.“발이 많이 아프죠?”권온유의 작은 얼굴 위로 눈물이 두 줄기 흘러내렸다.“오빠, 저 내려주세요. 그냥 돌아가요...”“온유야?”권온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그 집이 낡고 춥긴 해도... 오빠 발에서 피가 나진 않잖아요!”정승우는 멍하니 잠시 굳어 있다가 그 어눌한 말 속에 담긴 다정함을 깨달았다.이 작은 아이는 납치당했던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라도 정승우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정승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작은 새들이 집으로 향해 줄지어 날고 있었다.정승우는 온유를 데리고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다짐했다.“바보야.”정승우는 온유를 내려놓지 않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난 하나도 안 아파. 그리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어.”“그 사람이... 우리를 때릴까요?”“그럴 거야.”정승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어린 시절, 정대명에게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탈출할 때 그의 뒤통수를 내려친 한 방은 그동안의 빚을 모두 갚은 셈이었다.“그런데 오빠, 그 사람은 오빠 아빠잖아요?”권온유는 작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하지만 오빠가 아프다고 제가 말했을 때 오빠 아빠가 들어왔었잖아요.”정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자신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정대명이 들어온 것은 아마 걱정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죽으면 함께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없어질까 봐서였었다.정대명은 단지
차 안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영미는 조용히 걸음을 옮겨 정대명에게 다가갔다. 그의 머리 아래로 어두운 핏자국이 퍼져 있었고 그 흔적은 이미 굳어 있었다. 영미는 정대명의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영미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채 차가운 눈빛으로 정대명을 내려다보다가 거칠게 발길을 휘둘렀다.“일어나요!”강소아와 최군형도 다가와 공장 안을 살폈지만 안은 고요히 비어 있었다.“아이들은요?”“아이고...”정대명은 간신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살려줘, 살려줘... 저 괘씸한 녀석이!”“정대명 씨!”영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했다.어쨌든 이번 일은 영미가 자신 있게 권온유의 행방을 안다고 장담한 일이었다.영미는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함께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확신에 차 말했다.그런데 지금... 정대명은 다쳐 쓰러져 있고 두 아이는 사라졌었다.백인서를 함정에 빠뜨리려던 영미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린 것이다.그제야 상황을 이해한 정대명은 도움을 청하려다 영미가 눈짓을 주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영미의 눈길을 따라 보니 최군형과 강소아도 함께 와있었다.정대명은 예전에 영미가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는 척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정대명은 머리를 살짝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당신이 정대명인가요?”최군형이 다가가 물었다.정대명은 말끝을 흐리며 최군형의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다.“백인서의 양아버지시고?”최군형은 다시 물었다.“당신이 당신 아들과 함께 권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게 맞나요?”“아니야, 나 아니야!”정대명은 크게 당황하며 손을 흔들었다.“이봐, 동생, 난 억울해! 내 아들 녀석이 나를 해치려고 했어! 내 머리를 봐, 그 자식이 벽돌로 내리쳤다니까!”“그만해요!”영미는 정대명의 말이 길어질수록 상황이 불리해질 것을 우려해 정대명을 노려보며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했다.강소아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그들의 서툰 수법이 한심하기만
경찰서 밖에서 최지용은 초조하게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고개를 들어 보니, 젊은 경찰관이 안에서 뛰어나오고 있었다. 최지용은 급히 다가가며 말했다.“정호야!”정호라는 젊은 경찰관은 최지용을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 녀석!”최지용은 정호에게 다가가 가볍게 주먹을 툭 날리며 말했다.“도대체 무슨 일이야? 왜 사전에 알려주지 않은 거야?”정호는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방금 최씨 집안에서 백인서를 데려간 사람 중에 정호도 있었다. 최지용도 놀라웠지만, 영미 역시 경찰이 직접 찾아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떠나기 전, 정호가 살짝 눈짓을 보냈고 최지용은 그의 의도를 알아채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지용이 형.”정호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형수님께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잘 구분하고 계시니 문제없을 겁니다!”“도대체 누구 지시로 백인서를 여기로 데려온 거지?”“소아 아가씨예요!”정호는 어깨를 으쓱했다.“소아 아가씨가 갑자기 지시한 거라 사전에 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최지용은 살짝 놀랐다. 강소아의 지시라니.“형수님께서도 이번 사건과 관련이 있으니까요. 그 아이가 실종되기 전에 형수님께서 만난 적이 있거든요. 경찰이 형수님을 데려가서 조사하는 건 당연한 절차입니다.”최지용은 잠시 생각에 잠긴 뒤, 피식 웃음을 지었다.강소아가 이런 ‘당연한 절차’를 이용해 백인서를 경찰서로 보낸 이유는 경찰서야말로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음모를 꾸며 백인서에게 덮어씌우려 한다 해도 경찰서에서는 통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경찰서 안에는 일을 봐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백인서가 여기서 며칠 지내는 동안 힘든 일 없이 외부의 소란도 피할 수 있는 셈이었다.최지용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강소아는 정말 자매를 위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렇게까지 배려심 깊은 방안을 생각해 내다니!“지용이 형.”정호가 계속해서 말했다.“도련님께서
영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소아 언니, 저를 믿지 않으세요?”“난 오직 사실만을 믿어.”“권씨 가문의 딸이 실종된 사건에 백인서 씨의 양아버지와 남동생이 관련되었어요, 그게 바로 사실이에요!”강소아는 순간 멍하니 있다가 어이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려 했다.세상에 이렇게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호텔 뒷뜰에 있는 그 CCTV가 정말 완전히 고장 났다고 생각하는 걸까? 육씨 가문과 최씨 가문이 힘을 합쳐 그 고장 난 CCTV 하나도 못 고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최군형은 강소아의 어깨를 가볍게 눌러 안심시키며 슬며시 휴대전화를 건넸다.강소아는 화면을 확인했다. 최군형의 부하가 보낸 메시지였다.“도련님, CCTV 데이터를 복구 중입니다. 곧 진실이 밝혀질 겁니다!”강소아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영미가 이렇게까지 백인서를 몰아세우는 걸 보니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꺼림칙한 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어차피 꼬리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었기에 그저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바로 그때, 집사가 다소 당황한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집사의 뒤에는 몇 명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신분을 밝힌 후 방 안을 둘러보며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기 백인서 씨가 계십니까?”표아정은 등을 꼿꼿이 펴고 대답했다.“경찰관님께서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당신이 백인서 씨인가요?”“저는...”“백인서 씨가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신고를 접수했습니다!”“뭐라고요?”백인서는 얼굴이 창백해졌다.“백인서 씨, 조사에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권온유가 납치된 지 하루가 지났다.그동안 정대명은 단 한 번 음식을 가져왔는데, 그것도 차갑게 식은 죽 한 그릇과 딱딱한 빵 한 조각뿐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귀하게 자란 권온유에게 이런 음식은 처음이었다. 울고 싶었지만, 감히 울지 못하고 그저 눈물을 참으며 빵을 조금씩 뜯어 먹고 있었다.정승우는 그런 온유의 모습을 보고
“아줌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럼, 제가 알아낸 사실을 전부 말씀드릴게요!”영미는 입가에 교만한 미소를 띠며 백인서를 차갑게 한 번 쳐다보았다.“백인서 씨의 친어머니인 백홍은 인신매매범이었다는 사실, 모두 아셨나요? 백인서 씨의 어머니는 백인서를 정대명의 집에 맡겼고... 흥! 정대명의 아내도 백홍이 납치해 왔다는 소문이 있어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잖아요. 제 생각엔... 인신매매범의 딸이라면 그런 일쯤은 익숙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은 권온유의 실종이 정말로 백인서 씨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시나요?”“영미!”강소아가 나서며 분노를 가득 담아 소리쳤다.“허위 사실을 퍼뜨리지 마!”“소유 아가씨, 억울하네요!”영미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이렇게까지 조사한 건 다 아가씨를 위한 거예요! 딸도 있는 사람이 백인서를 곁에 두고도 마음이 놓이세요?”“그만해!”최지용이 크게 소리쳤다.백인서는 몸을 떨며 믿기지 않는 눈으로 최지용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최지용의 얼굴에는 의심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최지용은 굳건한 눈빛으로 뒤에 있는 백인서를 지키고 있었다.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처럼 백인서를 아끼고 있었다.백인서는 코끝이 찡해지며 본능적으로 최지용의 손을 꼭 붙잡았다. 최지용의 따스한 손은 백인서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그 온기가 어둠의 두려움을 잊게 해주었다.최지용은 백인서에게 부드럽게 미소 지어 보였고 다시 영미를 바라볼 때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졌다.“영미야.”최지용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두 집안의 관계를 생각해서 그저 넘어가는 거야. 더 이상 선을 넘지 마.”최군형도 나서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요, 백인서가 어떤 사람인지 우리가 모르겠어요? 영미 아가씨, 우리 최씨 가문 사람들을 바보로 생각하는 건 아니죠?”영미는 순간 긴장했다. 최군형의 말 속엔 어딘가 숨은 뜻이 있는 듯했다.최군형의 깊고 복잡한 눈빛을 파악하기 어려웠다.표아정은 천천히 일어나 어깨에 걸친 숄을
백인서는 복잡한 눈빛으로 최지용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그때 최지용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건 사람은 표아정이었고 다급한 목소리로 서둘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최지용은 결국 어머니의 말에 따라 백인서를 데리고 최씨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넓은 거실에는 최군형과 강소아도 나와 있었고 모두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백인서가 들어서자, 표아정이 백인서를 올려다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다.강소아는 백인서와 눈을 마주치며 단호하게 미소 지었다.백인서가 의아해하던 찰나, 영미가 천천히 밖에서 걸어 들어왔다.“아줌마, 지용 오빠. 제가 권온유의 행방을 알아냈어요. 어디에 있는지 알아요!”“뭐라고?”최지용이 놀라서 물었다.“네가 어떻게 아는데?”영미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지용 오빠, 특수부대 출신이라고 정보가 우리보다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최씨 가문은 만능이 아니에요, 최씨 가문도 모르는 정보가 있다고요.”표아정은 가볍게 기침하며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았다.최군형과 강소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주목하고 있었다.최지용의 이마에는 점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미의 눈에는 한 줄기 교만한 빛이 번졌다.영미는 오는 길에 이미 모든 계획을 짰다. 정대명의 말이 맞았다. 누구를 훔치든 상관없었다. 인신매매범의 딸인 백인서가 아이들을 해치러 다닌다는 누명을 씌우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하면 백인서는 모두의 신뢰를 잃게 될 터였다.영미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강소아가 인신매매범을 곁에 둘 리 없다고 믿었고, 최지용 역시 이 사실을 알면 더는 백인서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영미는 정대명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영미는 권온유를 넘기고 정대명과 정승우가 백인서와 한패가 되어 권온유를 납치했다고 주장할 계획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백인서는 변명의 여지도 없이 궁지에 몰릴 것이었다!“지용 오빠.”영미는 고개를 돌려 최지용을 바라보며 한 글자씩 천천히 말했다.“권온유는 정승
“그... 괜찮아!”정승우는 억지로 미소 지으며 권온유에게 말했다. 정승우는 이곳에서 권온유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겠다고 결심했다.그런데 이때, 공장 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곧바로 하이힐 소리가 들려왔다.정승우는 재빨리 권온유에게 눈짓했고 권온유도 알아채고는 즉시 땅바닥에 쓰러져 의식이 없는 척했다.정승우는 벽에 기대어 눈을 반쯤 감았다.“이 아이인가요?”영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맞아.”정대명은 영미를 흘깃 노려보며 묵묵히 대답했다.영미는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서서 희미한 빛 속에 있는 아이를 살펴보더니, 곧 얼굴빛이 확 변했다.“이 아이... 혹시 권씨 집안의 막내딸 아니에요?”정대명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아이를 훔쳐 올 때 이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리가 없었다.“정대명 씨.”영미가 차갑게 웃으며 돌아보았다.“제가 최씨 가문 집안 아이를 훔쳐 오라고 했지, 권씨 집안 아이를 훔치라고 했나요? 이러고도 저를 속이지 않았다고요?”“그게...”정대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영미 아가씨, 어차피 목적은 백인서를 곤경에 빠뜨리는 거잖아? 그러니 누구를 훔쳐 오든 상관없지 않아? 아이를 훔치기만 하면 유괴범이 되는 거니까.”이 말은 영미에게만 충격을 준 게 아니었다. 정승우의 귀에도 또렷이 들어왔다.“좋아요.”영미는 깊은숨을 들이마신 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이 아이는 잘 지키고 있어요, 제가 다시 연락할 테니까.”...한편, 권씨 집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권욱은 조순영을 탓하며 아이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했고, 조순영은 오열하며 남편을 원망했다. 조순영은 권욱이 바깥에서 여자와 부적절하게 얽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고 했다.“헛소리하지 마! 사람들이 나한테 어떤 소문을 퍼뜨렸는지 잘 알잖아. 결혼 생활 내내 너한테 부끄러운 일 한 적 없어.”“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정말 떳떳하게 행동했다면 왜 사람들이 당신만 가만두지 않는 건데?”며칠 전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