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임나연이 우리 엄마만 다치게 하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었어요. 어차피 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해서라도 엄마를 지켜주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임나연은 날이 갈수록 저를 점점 더 심하게 괴롭혀서 증거를 남기기 시작한 거예요. 매번 병원에 갈 때마다 몰래 진단서를 받았고 또 유전자 검사까지 했어요. 그런데 그날 저녁에...”임수정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지다가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결심을 내리게 한 사람을 만났죠.”강서연은 그 사람이 바로 배경원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만약 그날 저녁이 없었더라면 임수정은 복수를 갈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배경원을 만난 덕에 그녀의 어두운 인생에 한 줄기의 빛이 들어왔고 모든 걸 알릴 용기가 생긴 것이었다.임수정이 나지막이 말했다.“그 사람을 만난 후로 이 세상에 저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고 또... 그 사람 곁에 있고 싶어졌어요.”강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고 코끝이 찡했다.“경원 씨는 절대 수정 씨를 배신하지 않아요.”강서연은 그녀의 두 눈을 지긋이 쳐다보았다.“수정 씨는 지금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어요.”임수정이 히죽 웃었다. 햇살이 그녀의 미소를 더욱 밝게 비춰주었다. 이십여 년 동안 가장 아름답게 핀 그녀의 웃음꽃이었다....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간 후, 최재원은 강서연에게 만남을 청했다.“가기 싫으면 가지 않아도 돼. 할아버지에게는 내가 얘기할게.”최연준은 강서연을 품에 안고 귓가에 속삭였다.한창 귤껍질을 까고 있던 강서연은 귤 한 알을 그의 입에 밀어 넣었다. 새콤달콤한 귤이 입안을 적시면서 갈증이 확 가시는 것 같았다.그가 더 달라고 입을 벌리던 그때 강서연이 움직임을 멈췄다. 최연준은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입을 다물고 다정하게 말했다.“무슨 결정을 하든 내키지 않는 건 절대 하지 마.”강서연은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가볍게 웃었다.“연준 씨 할아버지를 뵈러 가는데 뭐가 내키지 않을 게 있어요?”최연준이 잠깐 멈칫했다.“할아버지께서 날 먼저 보자고 했어요.”
“만지지 마.”윤문희는 그녀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이 안에 딱 두 개밖에 없어. 망가뜨리면 다시 만들어야 한단 말이야.”“엄마...”강서연은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할아버지를 뵈러 가는데 왜 이걸 가져가야 해요? 저도 몇 번 못 먹어봤다고요.”“이 녀석.”윤문희가 피식 웃었다.“우리 그쪽에서는 어른을 공경할 때 다 이렇게 했어.”“우리 그쪽이요?”강서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자신의 고향이 강주라고 알고 있었다. 윤문희는 그제야 괜한 소리를 많이 했다는 걸 알아채고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가져가기 싫으면 됐어.”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다른 선물들도 다 귀한 거니까 최씨 가문에서 널 업신여기진 않을 거야.”그러고는 묵묵히 방으로 돌아갔다.강서연은 거실에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얼굴을 찡그렸다....약속 당일, 야근하려 했던 김자옥은 미팅을 두 개나 취소하고 최상 빌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가는 길에 최연준에게 전화하여 한바탕 욕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인마, 서연이가 네 할아버지를 만나기로 했다며? 왜 나에게는 얘기하지 않았어?”최연준은 어안이 벙벙했다.“그걸 왜 엄마에게 얘기해요? 와서 소란을 피울 게 뻔한데.”“불효자식 같으니라고!”김자옥은 미친 듯이 액셀을 밟았고 노란색 신호등이 반짝일 때도 아슬아슬하게 건너갔다.“네 할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몰라서 그래? 너와 임나연을 계속 붙여놓으려고 했잖아. 임씨 가문에 일이 터지자마자 서연이를 만나겠다는 건... 무슨 음모가 있는 게 틀림없어. 연준아, 네 할아버지 혹시 임씨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서연이를 협박하는 건 아니겠지?”최연준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한편으로 엄마의 풍부한 상상력을 감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설명했다.“엄마, 할아버지가 노망이 난 것도 아니고 임나연이 오성에서 쫓겨났는데 그럴 리가 있겠어요?”“난 그 노인네가 젊었을 때부터 나중에 치매에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어.”최연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누가 같이 왔대?”“누가 같이 왔대요?”상황을 알 리가 없는 최연준은 답답하기만 했다. 두 사람의 표정을 봐서는 방금 한바탕 치열하게 싸운 것 같았다. 그리고 아까 이쪽으로 다가올 때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다름 아닌 그들이었다.최연준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두 사람 사이에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나?’“이봐요!”윤정재는 그를 보자마자 두 눈을 부릅떴다.“왜 아직도 여기 있어요? 오늘 여자친구가 집에 인사하러 온다면서요?”“안 그래도 지금 데리러 가려던 참이었어요.”“얼른 안 가고 뭐 해요!”윤정재는 마음 같아서는 그의 엉덩이라도 확 걷어차고 싶었다.“회장님.”최연준이 눈살을 찌푸렸다.“그나저나 여긴 어떻게...”“길을 잘못 들어섰어요.”윤정재는 눈을 희번덕거리고는 다시 차에 올라탔다. 그의 차가 멀어지고 나서 최연준은 의아한 눈빛으로 김자옥을 쳐다보았다.그런데 그가 입을 열기 전에 김자옥이 먼저 말했다.“재수 없어.”“엄마,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대낮에 귀신을 봤어.”최연준은 어이가 없었다.“엄마, 혹시 윤정재 회장님을 알아요?”김자옥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최연준은 두 사람 사이에 말 못 할 과거가 있다는 걸 더욱 확신했다.“엄마?”그는 갑자기 뭔가 깨달은 듯 표정이 확 굳어졌다.“설마 저 사람 때문에... 그때 이혼한 거 아니죠?”김자옥은 그를 노려보며 냅다 따귀를 후려갈겼다.“이 엄마를 뭐로 보고. 내가 바람을 피워도 저런 사람과는 안 피워!”“그럼 대체 어떻게 아는 사이예요?”“그건...”김자옥은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더는 과거 일을 꺼내지 않고 아이들에게도 얘기하기 싫다던 윤문희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녀는 조용히 살고 싶다고 했었다. 하여 김자옥은 마른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손을 내저었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잠깐 안 좋은 일이 있었어... 아무튼 저 사람과 너무 예의 차릴 필요 없어.”최연준은 더욱 어리둥절해졌고 웃지도 울지도
최재원의 서재는 마치 도서관처럼 아주 컸다. 책장은 천장에 거의 닿을 정도로 높았고 여러 분야 전문가들의 서적이 가득했다.책들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어도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메아리 소리가 들렸다.소파에 앉은 강서연은 떨리는 마음에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최연준은 그녀와 깍지를 끼고 위로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최재원은 한복을 입고 책상 뒤에 앉아있었다. 연세가 지긋했지만 강건하고 활력이 넘쳐 보였다. 강서연을 아래위로 훑어보던 그의 눈빛이 어딘가 복잡했다.“차 마셔요, 서연 씨.”최재원은 그래도 나름 예의를 갖췄다.강서연은 차를 마시기 전 고개를 들어 최연준이 어떻게 마시는지 본 다음 그대로 따라 하며 한 모금 홀짝였다.최재원은 강서연이 머리가 좋은 아이라는 걸 보아냈다. 거칠고 무모하지 않았고 당돌하지도 않았다. 최연준이 옆에 있어도 여전히 예의 바른 모습이었고 어른 앞에서 그와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최연준이 편을 들어줄 거라는 생각에 함부로 행동했을 것이다.최재원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번졌다.그는 강서연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가 무슨 질문을 하든 강서연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잠시 후 서재에서 나온 강서연은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면서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그렇게나 긴장했어?”최연준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아까 할아버지께서 당신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았어.”“그래요?”하지만 강서연의 생각은 달랐다. 이런 집안의 어른은 보통 자기주장이나 고집이 세서 한 사람에 관한 생각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아무래도 당신을 받아들인 것 같아.”“예전에도 안 받아들인 건 아니었죠.”강서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연준 씨 내연녀가 되라고 하셨잖아요.”“당신...”최연준이 두 눈을 부릅뜨며 그녀를 간지럽히려 하자 강서연이 그를 말렸다.“연준 씨네 집에서는 이러지 말아요.”“알았어.”최연준은 음흉하게 웃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운전기사는 헛웃음을 지었다. 저도 모르게 핸들을 해원 별장 쪽으로 틀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명황산에서 둘째와 셋째 사이의 원한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아닙니다, 아니에요.”운전기사는 재빨리 핸들을 틀었다.“저긴 별로 좋지 않은 곳이에요. 가까이 가면... 부정 타요.”“그래요?”강서연은 별로 믿지 않는 눈치였다.‘건물은 나름 이쁘고 화려해 보이는데? 저기 안에도 할아버지가 예뻐하는 자손이 살고 있겠지?’“서연 씨, 다른 곳도 보여드릴게요...”그런데 운전기사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옆길에서 누군가가 갑자기 튀어나왔다.화들짝 놀란 운전기사는 다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관성 때문에 강서연은 하마터면 앞 좌석에 부딪칠 뻔했다.마음을 가라앉히고 차 앞에 나타난 사람의 얼굴을 본 순간 그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강유빈?”“서... 서연아!”헝클어진 머리에 메이크업도 하지 않은 강유빈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보기 흉할 정도로 여윈 게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서연아.”강유빈은 유리창을 마구 두드렸다.“서연아, 잠깐 내려. 너에게 할 얘기 있어.”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나며 운전기사에게 차 문을 잠그라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강유빈은 다급하게 차 문을 열려 했다.“문 열어, 서연아.”문이 열리지 않자 미친 듯이 유리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뭐라 해도 우린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자매야. 서연아, 언니 좀 살려줘.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거야?”강서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가 막연하게 쳐다보자 운전기사가 마른기침을 두어 번 했다.“제 말이 맞죠? 이쪽에만 오면 부정 탄다니까요. 제가 알아서 따돌릴게요.”“대체... 왜 저러는 걸까요?”운전기사가 대답하기 전에 밖에서 처참한 비명이 들려왔다.강유빈이 몇몇 경호원에게 끌려 나가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그녀의 목소리가 허공에 맴돌다가 점차 사라졌다. 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소름이 쫙 돋았다.“서연 씨, 사실... 저도
비록 마음속으로는 최씨 집안이 이런 대접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있어야 할 예절은 조금도 소홀할 수 없다.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시비를 걸게 해서는 안 된다.윤정재는 만약 강서연이 제대로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버지로서 당연히 준비를 해줘서 반드시 영감님을 놀라게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윤정재는 이미 마음속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몇백 번을 생각했지만 강서연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강서연은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당연히 빈손으로 오지 않았어요. 우리 어머니께서 선물을 준비해줬어요!”윤정재는 잠시 멈칫하고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어머니?”“네.”윤정재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어머니께서 무엇을 준비하셨어요?”강서연은 준비한 것들을 몇 개 말했는데 전부다 남양 쪽에서 여자가 처음으로 남자 집에 갈 때 가지고 갈 물건이었다.윤정재는 코끝이 찡했다. 윤문희가 딸을 위해 준비한 것이니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맞아요. 하나 더 있어요.”강서연은 윤정재를 보며 말했다.“어머니께서 직접 만드신 녹옥떡도 있어요.”윤정재는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그는 강서연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침묵에 잠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심지어 안부의 말도 할 수가 없었다.윤정재는 무슨 신분으로 그런 것을 물을 수 있을까?김자옥의 말처럼 강서연이 그동안 자신이 했던 일들을 알게 되면 아저씨라고도 불러 주지 않을 것이다.“아저씨, 왜 그러세요?”윤정재는 갑자기 정신을 차렸고 고개를 숙여 황급히 설명했다.“아니에요... 아까 바람이 불어서 눈에 먼지가 들어갔나 봐요.”“서연 씨.”방한서가 멀지 않은 곳에서 급히 달려와 윤정재에게 인사를 건넨 후 공손하게 강서연을 바라보며 말했다.“도련님께서 먼저 집까지 모셔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서연 씨, 차에 타세요.”“방 비서가 바래다주지 않아도 돼요!”윤정재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제가 바래다주면 돼요!”“그게...”방한서가 어떻
윤정재는 제자리에 굳어 있었다.가슴이 뭔가에 세게 부딪히는 것 같았고, 한바탕 쥐어짜는 듯 아프다가 또 마구 뛰었다.강서연은 윤정재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별생각 없이 돌아서서 차에 올라갔다. 방한서는 기사를 불러 함께 출발하려고 했다.차를 몰고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윤정재는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쫓아갔다.강서연이 탄 차를 계속 따라갔고 핸들을 움켜쥔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몇 번이나 윤정재의 시선은 흐려졌다.윤정재의 머릿속에는 그 맑고 달콤한 목소리가 계속 울려 퍼졌고 여인의 미소와 눈빛이 떠올랐다.연보라색의 드레스를 입고 달빛 아래 서 있는 소녀는 소년을 볼 때마다 환하게 웃었다.소녀는 소년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모두한테 등을 돌렸다.소년이 소녀를 속였다는 것을 알게 된 소녀의 눈빛에는 충격과 분노, 절망이 담겨 있었다...윤정재는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다.차가 갑자기 길 한가운데 멈춰서는 바람에 뒤차들의 불만을 샀고 귀에 거슬리는 경적 소리가 울려 퍼졌다.다른 기사들이 윤정재를 지나갈 때마다 그를 한 번씩 쳐다보고는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다.교통경찰이 달려와 윤정재의 차 창문을 두드렸다.반면 윤정재는 혼을 잃은 듯 차 안에 앉아 얼굴은 창백했고 이마에는 콩알만 한 땀방울이 솟아나며 눈물은 비 오듯 쏟아졌다....“서연 씨, 무엇을 찾으세요?”앞에 앉은 방한서는 그녀가 계속 뒤를 돌아보는 것을 보자 물어봤다.“아니에요.”강서연이 담담하게 말했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저씨의 차가 뒤따라오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또 없어졌어요.”방한서는 눈살을 찌푸리고 생각해 보았는데 이 일을 최연준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강서연을 안전하게 데려다준 후 아래층에서 최연준에게 전화를 걸어 보고했다.“... 네. 서연 씨를 사모님 댁에 모셔다드렸습니다.”“응.”최연준은 서류를 처리하는 중이었다.“빌라에서 별일 없었지?”“없었어요, 그냥...”방한서가 뜸을 들였다.“문 앞에서 윤 회장님을 만났는데 서연 씨를 직접 데
지금의 최연준은 장모님 댁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윤정재가 서연이를 따라갔을까? 이 영감탱이!’최연준은 마음속으로 욕을 했다.‘도대체 무슨 속셈이지?’...강서연이 집에 도착했을 때 윤문희는 베란다에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강서연이 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자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서연아, 이리 와봐!”강서연이 급하게 달려갔다.윤문희는 자신이 키우는 다육식물 화분 몇 개를 가리키며 딸에게 자랑했다.“이거 봐, 내가 잘 키웠지! 생명력이 정말 강해서 십수일에 한 번 물을 줘도 이렇게 자랐다니까!”강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강서연의 기억 속으로는 윤문희는 화초를 다스릴 줄 몰랐다. 손에 닿은 것들은 죄다 죽었기 때문이다.예전에 강서연은 윤문희를 비웃으며 그녀가 유일하게 죽지 않게 키운 생물이 바로 자기와 윤찬 남매라고 말한 적이 있다.윤문희는 강서연을 힐끗 쳐다보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딸이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계속해서 식물잎을 만지작거렸다.“엄마.”강서연이 갑자기 궁금해했다.“엄마는 아이를 낳기 전에 식물을 안 키워봤어요?”“응.”윤문희는 고개를 저었다.그때 집에는 식물원과 유리 온실이 있어 전 세계의 온갖 희귀한 식물들이 다 그 안에 있었다. 또 개인 소유의 열대 우림이 있었기 때문에 윤문희가 가꾸지 않아도 되었다.강서연은 베란다에 널려있던 빨래를 걷어 하나씩 개고 집 안부터 밖까지 다시 청소했다.강서연은 윤문희와 역할이 바뀌는 경우가 많았다.강서연이 엄마 같았고 윤문희는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딸에 더 가까웠다.강서연은 웃으며 중얼거렸다.“가끔 엄마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엄마는 뭔가 귀하게 자란 공주님 같아요!”윤문희는 잠시 멈칫하고 좀 슬퍼했다.“서연아...”윤문희는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그동안 엄마가 너한테 민폐만 끼치고 많이 못 해줬어.”“아니에요!”강서연이 급하게 윤문희를 껴안았다.“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나는 그런 뜻이 아닌데요! 방금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