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연은 줄곧 침대 옆에서 윤문희를 보살폈다. 하지만 윤문희의 상태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강명원과 강유빈이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간 바람에 그전에 했던 치료가 물거품이 돼버리고 말았다.강서연은 넋이 나간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그녀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신석훈이 전에 윤문희를 치료했던 주치의와 정신과 전문의에게 문의한 결과 다들 환경을 한번 바꿔보라고 했다.“서연 씨, 환경 좀 바꾸면 아주머니의 병세가 호전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신석훈이 계속하여 말했다.“제가 아주머니의 증상과 비슷한 여러 케이스를 연구해봤는데 환경이 바뀌니까 다들 회복되더라고요. 회복되는 정도는 다르긴 하지만. 아주머니는 강주에서 안 좋은 일을 겪었잖아요. 그럼 계속 이곳에서 지내게 하지 말고 환경을 바꾸거나 생활 방식을 바꾸면 아주머니한테 도움이 될 거예요.”한숨을 내쉬던 강서연은 최연준이 그날 했던 말이 떠올랐다.‘정말 함께 오성으로 가야 하나?’“서연아...”윤문희가 두 눈을 떴다. 허약한 몸을 이끌고 일어나 앉으려 애를 썼다. 강서연은 재빨리 그녀를 부축하고는 등받이를 가져다주었다.“엄마, 좀 어때요?”“가슴이 답답해.”윤문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 더 이상 여기 있고 싶지 않아. 이곳에만 있으면 강명원이 나한테 했던 짓들이 자꾸만 떠올라...”그녀의 손을 잡은 강서연은 코끝이 찡해져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했다.만약 구현수에게 협박당하지 않았더라면 이 기분을 절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번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그녀는 윤문희의 기분이 어떨지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그 일이 지난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그녀는 여전히 트라우마 때문에 커피숍에 가지 못했다. 마당에 들어설 때마다 구현수에게 몹쓸 짓을 당할 뻔했던 그날이 떠올랐다.“엄마.”그녀가 잠깐 멈칫하더니 떠보듯이 물었다.“우리가 다른 도시로 가서 사는 건 어떨 것 같아요?”“다른 도시?”윤문희가 화들짝 놀랐다.“찬이가 다니는 대학교
강서연은 마음이 복잡해져 잡고 있던 이불을 더 꽉 쥐었다.그동안 그녀는 최연준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다가 리조트 밖에서 만났던 점쟁이 할머니의 말을 떠올렸다.가까이 있을 땐 남편이고 멀리 있을 땐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었다. 그녀는 갑자기 울컥한 마음이 들어 눈가가 촉촉해졌다. 점쟁이 할머니가 두 사람이 언젠가는 헤어질 것이라고 했었다...그녀는 최연준을 힐끗 보았다. 희미한 불빛 사이로 그의 손목에 낀 빨간 팔찌가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그런 소리를 왜 믿냐고 했었다. 사실 그도 그런 걸 쉽게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빨간 팔찌까지 낀 건 그녀를 잃는 게 두려워서였다.강서연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사실 그녀도 그를 잃을까 봐 두려운 건 마찬가지였다.만약 운명이 그들을 갈라놓으려고 한다면 헤어지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내밀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연준 씨.”최연준은 가슴이 움찔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귀는 쫑긋했지만, 감히 돌아보지 못하고 계속 딱딱하게 앉아있었다.“며칠 뒤에... 아마 오성으로 갈 거예요.”“뭐?”강서연이 가볍게 웃었다.“귀가 잘 안 들려요?”최연준은 꿈꾸는 건 아닌지 확인하려고 볼을 꼬집었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바라보았다.“정말이야?”“네.”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찬이도 대학교에 가야 하고 엄마도 다른 곳에서 지내고 싶대요. 그래서 오성에 가려고요.”최연준은 모든 걸 그에게 맡기라고 얘기할 참이었다. 그런데 강서연이 그의 마음을 알아챈 듯 먼저 말을 가로챘다.“이 일은 연준 씨가 신경 쓰지 말아요. 지낼 집도 알아놓았고 이력서도 몇 군데 넣었어요. 저한테 면접 보러 오라고 회사에서 연락이 올 거예요.”“서연아...”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우린 오성에 그냥 생활하러 갈 뿐이에요.”최연준은 그녀의 뜻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엄마와 함께 환경을 바꿀 생각이었는데 마침 윤찬이 오성대에 붙었다. 그녀가 최연준 때문에 오
날짜가 1년 전으로 바뀌어있었다.“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다면서요?”강서연이 다정하게 말했다.“작년 이날에 우리가 결혼했어요.”그날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이었다. 강서연이 폭풍우를 뚫고 흙투성이인 흰색 드레스를 입은 채 마을의 작은 집으로 들어왔다.마을의 어르신들은 이런 날씨에 결혼하면 행복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두 사람은 누구보다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최연준은 천천히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흐릿한 달빛이 이불 밖에 내민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환하게 비췄다.최연준이 손을 잡자 강서연이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 없어 발버둥 치다가 결국 그냥 잡게 내버려 두었다. 그의 손바닥이 어찌나 따뜻하고 두꺼운지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중저음 목소리가 들려왔다.“1년 전으로 돌아갔으니 다시 서로를 알아가는 게 좋겠어. 난 최연준이라고 해. 집에 돈이 많긴 하지만 그리 대단한 사람은 아니야. 난 그저 내 와이프가 주는 용돈을 받아 쓰면서 와이프 옆에 평생 있고 싶어.”“여보.”최연준이 사랑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난 나가서 일하고 싶지 않아. 오성에 오면 당신이 날 먹여 살리면 안 돼?”강서연은 아무 말이 없었다. 마음이 먹먹해지면서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그래요, 내가 평생 먹여 살릴게요. 당신이 돈을 벌지 못해도 내가 벌게요.’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수도 없이 이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볼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강서연을 배웅하러 나온 임우정은 아쉬움에 강서연의 손을 놓지 못했다.두 사람은 학교 때부터 함께한 사이라 친자매보다도 더 가까웠다. 강서연이 떠난다고 하니 임우정은 가슴이 먹먹했고 공항에 도착해서도 눈시울이 여전히 붉었다.“거기 가서도 몸 잘 챙겨!”임우정이 그녀의 손을 잡고 귓가에 속삭였다.“도움이 필요하면 연준 씨한테 얘기해. 어쨌거나 1년이나 함께 산 부부잖아. 그리고 연준 씨도 널 엄청나게
강서연은 오성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회사에서 면접 연락을 받았다.면접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그녀는 새 회사에 출근하게 되었다. 퇴근 후에는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챙겼고 주말에는 윤찬을 보러 학교에 가면서 필요한 생필품도 가져다주곤 했다.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 다시 단순하고 조용하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최연준은 묵묵히 그녀 옆을 지키기만 할 뿐 그녀의 생활은 방해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 집에 자주 가서 집안일을 도와주곤 했다.솔직히 말해서 도와줬다고 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한 집안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강서연이 다시 한번 해야 했기 때문이다.그녀가 기분이 좋으면 뭐라 하지 않았지만, 업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야근하거나 혹은 생리할 때면... 아무리 다정하던 그녀도 까칠해졌다.강서연이 그에게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를 때마다 윤문희가 나서서 말렸다.“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우리 최 서방한테 말을 좀 예쁘게 하면 안 돼?”“소리 지를 시간에 네가 직접 하면 되잖아. 왜 우리 최 서방한테 그리 무섭게 굴어?”혹은 또 이런 말로 그의 편을 들었다.“우리 최 서방이 아무리 널 좋아한다고 해도 함부로 해서는 안 돼! 계속 이렇게 최 서방한테 소리를 지르면 엄마 화낸다?”강서연은 이런 상황이 어이없기만 했다.‘대체 엄마는 누구 친엄마야?’그리고 최연준이 장모님이라고 어찌나 친근하게 부르는지, 두 모녀보다도 더 가까워 보였다.강서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피식 웃었다....그녀가 출근하는 회사는 한 신문사였다. 출근 첫날 상사가 그녀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젊은 사람은 자신을 많이 단련해야 해요. 힘든 일을 잘 참고 견디고 남을 위해 헌신하는 정신이 있어야 해요.”다들 사실 상사의 얘기를 귓등으로 들었지만 강서연만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열심히 일에 몰두했다.그 결과 동료들이 그녀를 만만하게 여기면서 일이 점점 쌓여만 갔다. 기사 원고를 써야 할 뿐만 아니라 편집, 그리고 사무실의 잡다한 일까지 전부 그녀의
순간 멈칫한 강서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두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빵 부스러기를 비둘기에게 먹이고는 그녀 옆에 앉은 최연준은 그녀를 보며 씩 웃었다.“기분 안 좋은 일 있었어?”강서연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어떻게 알았지?’“아직 당신한테 내 어릴 적 얘기 안 했네.”최연준이 덤덤하게 말했다.“우리 부모님은 내가 아주 어릴 적에 이혼했어. 아빠랑 함께 살긴 했지만, 엄마 보러 영국에 자주 가. 우리 엄마 성격이 강해서 내가 나약해지는 걸 용납 못 하셔. 최씨 가문 쪽에서 할아버지는 날 후계자로 키우셨어. 그래서 내가 하는 모든 일, 심지어 밥 먹고 물 마시고 걷는 걸음걸이까지 모두 엄격하게 가르쳤어... 그뿐만 아니라 가족 내부의 경쟁도 시도 때도 없이 마주쳐야 했어. 할아버지가 누굴 중히 여기면 그 사람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경쟁 타겟이 되거든.”씁쓸하게 웃는 최연준을 보고 있자니 강서연은 마음이 아팠다.‘그때... 연준 씨는 고작 예닐곱 살 정도 되는 아이였을 텐데...’“겨울방학 대부분은 맨체스터에서 보냈어. 거기 아주 유명한 알버트 광장이 있는데 기분이 우울할 때면 거기 가서 비둘기 먹이를 주곤 했어.”강서연은 그를 묵묵히 쳐다보았다. 그의 차가운 얼굴에 옅은 서글픔이 드리워졌다.다들 최연준처럼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은 세상의 고통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어릴 적 부모님의 이혼으로 상처받은 아이들은 저마다 같은 불행이 있었다.강서연은 묵묵히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두 사람의 그림자가 바닥에 나란히 비쳤다. 벤치에 딱 붙어 앉은 건 아니지만 그림자는 그야말로 빈틈없이 붙어있었다.“서연아.”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업무상에 문제가 있으면 내가...”“괜찮아요.”그녀가 단칼에 거절하자 최연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강서연은 고개를 들고 반짝이는 두 눈으로 그에게 다정하게 말했다.“연준 씨가 좋은 뜻으로 그러는 거 알아요. 하지만 내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게요. 오성에 온 것 자체가 나한테는
최연준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강서연이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내리깔자 기다란 속눈썹도 따라서 파르르 떨렸다.“나중에 알게 되었죠.”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신분과 이름은 그저 기호일 뿐이라는 걸 말이죠. 당신이 돈이 많든 돈이 없든, 최연준이든 구현수든 다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은 변한적 없이 그대로였고... 나도 마찬가지예요.”최연준은 그녀를 보며 손을 살며시 잡았다. 강서연은 씩하고 웃더니 그와 깍지를 끼었다.“서연아, 그럼 나 용서하는 거야?”“난 당신을 탓한 적이 없어요. 그냥 당신의 정체를 갑자기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에요.”그녀가 입술을 삐죽거렸다.“하지만 나 시간이 더 필요한데... 기다려줄 수 있어요?”“그럼! 당연하지!”그는 평생 기다려야 한다고 해도 기다릴 수 있었다. 최연준은 지금 이 상황이 혹시라도 꿈일까 봐 두려워 그녀를 꽉 껴안았다.“서연아, 이젠 날 떠나지 않을 거지?”그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재차 확인했다. 그러자 강서연이 히죽 웃었다.“네. 안 떠나요.”“내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평생 안 떠날 거지?”강서연이 화들짝 놀랐다.‘왜 또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 거지? 지난번 성당에서도 이렇게 물었었는데!’“연준 씨, 그때 다 녹화했잖아요. 증거가 연준 씨 손에 있는데 또 물어요?”최연준은 휴대 전화를 꺼내고는 환하게 웃었다.그런데 그때 주변의 비둘기들이 뭔가에 놀랐는지 푸드덕 날아갔고 풀숲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쿵 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누군가가 풀숲에서 튀어나오면서 발을 헛디딘 바람에 마침 두 사람의 앞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최연준은 본능적으로 화들짝 놀란 강서연의 앞에 서며 그녀를 지켜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얼굴을 본 순간 두 사람 모두 경악했다.“배경원?”배경원이 무릎을 어루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머리에 나뭇잎이 묻은 채로 두 사람을 향해 어색하지만,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연준 형... 형수님, 비둘기 먹이를 주고 있었나 봐요?
“다시 알게 되었으니 제대로 소개할게.”최연준이 가볍게 웃었다.“유찬혁 변호사는 오성에서든 강주에서든 아주 유명한 변호사야. 자문 비용도 아주 초 단위로 계산해서 받는다니까. 그리고 배경원은...”그의 시선이 강서연에게 머물렀다.“그때 당신이 쟤에 관한 자료를 달달 외우고 교통사고까지 났으니 더 소개할 필요는 없겠지?”배경원이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왜요! 인터넷에 떠도는 자료는 다 잘못된 거예요! 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형수님, 제가 어떤 사람인지 다시 아셔야 해요! 제가 보기에는 바람둥이 같지만 사실 누구보다 일편단심이에요. 그리고 얼굴이 잘생기다 보니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는다고나 할까요. 연준 형도 포함... 아이고!”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찬혁이 그의 머리를 툭 쳤다. 고개를 든 배경원은 최연준의 싸늘한 눈빛과 딱 마주쳤다. 배경원은 억울하다는 생각밖에 없었다.‘어휴, 잘생긴 게 죄지.’...해원 별장에 온 임나연은 경호원이 말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안으로 쳐들어갔다.거실에 들어와 보니 옷들이 바닥에 잔뜩 널브러져 있었는데 빨간 옷에 걸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그녀는 하이힐을 신은 채 대리석 바닥을 또각또각 걸었다. 그런데 커다란 소파 위에서 최지한이 한 여자와 진한 키스를 나누고 있는 것이었다.순간 구역질이 난 임나연은 등을 돌리고 기침을 두어 번 했다. 인기척이 들리자 최지한이 고개를 들고 실눈을 뜬 채 그녀를 쳐다보았다.“도련님...”여자가 손을 내밀어 그를 잡았다. 최지한은 웃을 주워 그녀에게 던지고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임나연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때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됐어요?”임나연이 성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마침 옷을 다 입은 강유빈은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최지한이랑 뜨거운 시간을 보내자 했더니 이 년 때문에 다 망쳤잖아! 대체 누구이기에 최지한의 집에 마음대로 드나드는 거지?’강유빈이 입술을 깨
결국 강유빈은 임나연의 상대가 아니었다. 강유빈의 얼굴에 임나연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나타났다.그때 최지한이 눈짓을 보내자 경호원들은 재빨리 나서서 두 사람을 말리고는 강유빈을 데리고 나갔다.강유빈은 발버둥 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도련님, 왜 절 안 도와주세요! 도련님...”그녀의 목소리가 해원 별장에서 빠르게 사라졌다.임나연은 강유빈의 뒷모습을 보며 침을 퉤 하고 뱉었다. 그러고는 도우미의 손에서 깨끗한 수건을 건네받고 소파에 앉아있는 최지한을 흘겨보았다.“당신 눈멀었어요?”임나연은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저년이 날 때리는 데 왜 가만히 있어요?”“나연 씨.”최지한이 잇몸을 드러내고 웃었다.“나연 씨 신분에 왜 저런 애랑 싸우고 그래요.”“최지한 씨!”“됐어요, 그만 화 풀어요.”최지한이 도우미에게 차를 내오라고 했다.“차 좀 마시면서 마음을 가라앉혀요.”임나연은 그를 째려보았다. 오늘 그를 찾아온 건 그가 대체 어쩌려는 생각인지 정확히 들어보기 위해서였다.최지한은 줄곧 그녀에게 강서연을 없애고 최연준을 되찾게 도와주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꽤 지났지만, 강서연을 없애기는커녕 오성에 왔는데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이러니 임나연이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그녀는 최지한을 매섭게 째려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도련님, 우리 임씨 가문이 그동안 당신네 부자한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줬는데 이러기예요? 돈만 챙기고 입 싹 닫겠다는 건 아니죠?”“나연 씨 무슨 말을 그리 섭섭하게 해요?”최지한은 기지개를 켜고는 소파에 기댔다.“그런데 지난번에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해직한 후로 우리가 이사회에서 별 힘이 없어요.”“그럼 내 일을 도와줄 수 없다는 거예요?”최지한이 차갑게 웃었다.“지금 연준이가 강서연 옆에 딱 붙어있어서 강서연을 없애는 건 아마 불가능할 것 같아요.”임나연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다.“하지만...”최지한이 그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