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연이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최연준이 한창 어머니와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카드놀이 방법이 아주 신기하고 룰도 복잡했는데 사람의 논리성과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놀이였다. 어머니가 어릴 적에 그녀에게 가르쳤었지만 아무리 가르쳐도 그녀가 터득하지 못한 바람에 나중에는 더는 그 카드를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두 사람이 저렇게 재미나게 놀 줄은 생각지 못했다.거실에서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머리 좋은 최연준은 매번 티 나지 않게 그녀에게 져주었다. 기분이 좋아진 윤문희는 최 서방이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한 게임이 끝난 후 최연준이 카드를 섞으려다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강서연을 보고는 가볍게 웃었다.“왔어?”“오늘 일찍 퇴근했네?”윤문희가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최 서방이 온 오후 나랑 카드놀이를 했어. 피곤해 보이니까 얼른 가서 맛있는 것 좀 해줘.”강서연은 어이가 없었다.“엄마.”그녀는 피식 웃으며 일부러 떠보듯이 말했다.“저도 종일 출근하느라 힘들어요.”“최 서방보다 힘들었겠어?”윤문희가 목소리를 높였다.“이게 얼마나 머리를 써야 하는 건데. 네가 어렸을 적에 수백 번이나 가르쳤는데도 넌 터득하지 못했어. 그런데 최 서방한테 딱 한 번 가르치니까 바로 알더라!”최연준은 아무 말 없는 강서연을 뒤로 한 채 으쓱거렸다. 그러고는 강서연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쪼르르 안방으로 따라갔다.강서연은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최연준은 그녀 뒤로 다가가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평소에는 힘 있고 딱딱하던 손이 그녀의 어깨에 닿자마자 바로 부드러워졌다.강서연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딱 적당한 힘에 그녀도 시원한지 두 눈을 감고 마사지를 즐겼다.“좀 쉬고 있어. 밥하지 않아도 돼.”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호텔에 연락해서 저녁밥 가져오라고 할게.”“그럼 연준 씨는요?”“이따가 나가봐야 해.”화들짝 놀란 강서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어딘가 이
최연준이 순간 멈칫했다.“뭐라고?”“날 도와줄 거예요?”‘당연하지!’최연준은 속으로는 미친 듯이 외쳤지만 겉으로는 침착한 척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왜 갑자기 도와달라는 거야?”“그거야...”강서연이 말을 얼버무렸다.“뭔가를 성공하려면 자신의 노력 말고도 옆에 있는 모든 자원을 이용해야죠. 안 그래요?”최연준은 살짝 의외라는 눈치였다.예전에 경영 대학원을 다닐 때 첫 수업에서 교수도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한 사람이 성공하려면 시기상의 적절함과 지리상의 이로움, 그리고 사람들의 화합 이 세 가지를 다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강서연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히죽 웃었다.“내가 인터뷰해야 하는 상대는 나석진이에요. 지금 이 실력으로 나석진 씨의 매니저도 날 무시할걸요? 이건 내 힘으로는 절대 완성할 수 없는 임무예요. 다들 지금 내가 우스갯거리가 되길 기다리고 있어요. 하지만 내 옆에는 못 하는 게 없는 슈퍼맨이 있죠...”그녀는 최연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귀엽게 웃었다.“만약 슈퍼맨이 나한테 초능력을 빌려줘서 이 임무를 완성하게 도와준다면 아주 고마워할 거예요!”“어떻게 고마워할 건데?”“구두가 필요하다면서요?”그녀가 두 눈을 깜빡였다.“제일 좋은 구두 하나 사줄게요!”“그것뿐이야?”“그리고...”그녀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뜨리며 씩 웃었다.“평생 당신을 먹여 살릴게요.”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린 최연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알았어.”그러더니 대뜸 휴대 전화를 꺼내려 했다. 강서연은 그를 말리며 피식 웃었다.“지금 당장 연락하라는 게 아니에요. 일단 내가 스스로 해본 다음에 그래도 안 되면 그때 연준 씨한테 도움을 청할게요.”최연준은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점쟁이 할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점쟁이 할머니는 강서연에게 조선 시대였더라면 중전마마가 됐을 팔자라고 했고 부귀영화를 누릴 거라고 했다.사실 그녀의 총명한 지혜로 누구와 결혼하든 다 행복하게
최연준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반격하려던 그때 최연희가 다시 다가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이따가 자리에 앉으면 절대 흥분하지 마.”“왜?”“아무튼...”최연희는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다는 듯 피식 웃었다.“이따가 밥이 안 넘어갈 수도 있어.”최연준은 살짝 움찔했다가 이내 자신만만하게 걸어갔다. 그런데 최연희의 말이 사실이었다.최재원이 메인 자리에 앉아 서늘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둘러보고 있었고 원래 최연준의 자리였던 그의 옆자리에 임나연이 앉아있는 것이었다.“연준아, 멍하니 서서 뭐 해?”최재원이 먼저 말을 건넸다.“얼른 자리에 앉아.”최연준은 굳은 얼굴로 주먹을 꽉 쥔 채 임나연 옆으로 걸어갔다.도우미는 의자를 빼낸 후 최연준에게 깍듯하게 자리를 안내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최연준에게 쏠렸다.그와 강서연의 일이 최씨 가문 전체에 퍼지면서 그가 강주에서 요양할 때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최연준이 강서연 때문에 최재원과 정면으로 여러 번 맞섰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런 와중에 최재원이 가족 모임에 임나연을 초대했다는 건... 그의 손주며느리는 임나연뿐이라는 걸 공개적으로 발표한 거나 다름없었다.“임씨 가문과 사돈을 맺으면 나쁠 게 없죠.”누군가가 수군거렸다.“우리 셋째 도련님은 왜 그걸 모를까요...”“어릴 적부터 떵떵거리며 살아온 도련님이 가족의 이익을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는 걸 알 리가 있겠어요?”“그나저나 저건 무슨 양복이에요? 너무 형편없어 보이는데요?”임나연이 최연준을 힐끗 보았다.‘평소 패션위크의 디자이너들이 만든 옷만 고집하던 연준이었는데 오늘은 왜... 딱 봐도 길거리 싸구려 옷이잖아.’“연준 씨.”임나연은 참하고 얌전한 척했다.“이 양복이 좀 낡은 것 같은데 다른 걸로 갈아입을래요?”최연준은 잠깐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싸늘하게 째려보았다. 임나연은 더는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수프만 마셨다. 다른 사람들도 더 이상 수군거리지 않았다.최연준이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사람들은 그저 자기 앞의 반찬만 내려다볼 뿐 누구 하나 젓가락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저마다 곧 있을 재미난 구경거리를 기대했다.아니나 다를까 최재원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최진혁을 째려보았다. 최연준은 옆에서 피식 웃었다.최재원은 자기 가족이 외부 사람과 가까이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최진혁은 예전에 이 점을 이용하여 최연준이 최연준의 외할아버지와 더 가깝게 지낸다고 이간질하면서 최재원의 불만을 자아낸 적이 있었다.최연준은 그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예전에 그가 했던 짓을 그대로 갚아주는 것뿐이었다.“최... 최연준!”화가 난 최진혁은 말까지 더듬었다.“이 많은 사람 앞에서 지금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아버지, 연준이 말 믿지 마세요. 얘가 지금 저한테 불만이 있어서 화풀이하려고 이러는 거예요.”“삼촌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억울하죠.”최연준이 느긋하게 말했다.“제가 어렸을 적부터 할아버지는 웃어른을 존경해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저도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지금까지 새겨듣고 있고요. 제가 삼촌한테 화풀이한다는 건 할아버지가 절 웃어른도 존경할 줄 모르는 안하무인으로 잘못 가르쳤다는 말이에요?”“너!”말문이 막힌 최진혁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친척들의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최재원이 잔뜩 굳은 얼굴로 젓가락을 확 던지자 쨍그랑하고 그릇과 부딪혔다.임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안한 얼굴로 최연준을 보며 말했다.“오늘 이 자리에 오는 게 아닌데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최씨 가문의 가족 모임인 걸 몰랐어요. 실례 많았습니다.”“그래요.”최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젠 최씨 가문의 가족 모임인 걸 알았겠네요?”“최연준 씨...”“연준이가 아직 젊어서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다 하네!”최진혁은 물을 한잔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혔다.“아무리 그래도 나연이는 손님인데 손님을 이런 식으로 대접하는 게 어디 있어.”“대접이라면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임나연은 저도 모르게 소름이 쫙 돋았다.“연... 연준 씨.”임나연이 웃으며 말했다.“하도 급해 보여서 걱정돼서 물은 거예요...”“별일 아니에요.”최연준이 싸늘하게 말했다.“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내가 그렇게 귀찮아요?”임나연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앞으로 임우 그룹하고 최상 그룹이 업무적으로 자주 손을 잡을 텐데 우리...”“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공과 사는 분명히 할 테니까.”그의 말투는 무척이나 담담했다.“그리고 업무상에 문제가 있으면 사무실로 찾아와요.”“알았어요!”임나연은 그의 태도가 조금은 좋아진 줄 알고 신난 얼굴로 대답했다.방한서가 차를 가져오자 최연준이 차에 올라타려 했다. 그런데 임나연도 함께 따라오는 걸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임나연 씨, 방금 공과 사를 분명히 할 거라고 얘기했잖아요.”임나연은 순간 멈칫했다.“지금 사적인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해요.”그가 입술을 앙다물었다.“나연 씨는 그만 따라와도 될 것 같아요.”그러고는 차를 타고 휙 가버렸다.그에게 버림받은 임나연은 점점 사라지는 차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두 눈에 원망과 분노가 가득 섞여 있었다.‘아까 그 전화는 강서연 그년이 걸어온 거겠지?’그녀는 잠깐 마음을 가라앉히다가 휴대 전화를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큰아버지, 저예요... 네, 윤찬의 일은 어떻게 됐어요?”임나연은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 하하, 진짜 입학 자격을 취소했어요? 너무 잘됐어요!”“진짜지, 그럼.”휴대 전화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이제부턴 네가 나서서 그 애를 다시 입학시키면 최연준도 너한테 아주 고마워할 거야.”임나연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최연준은 곧장 강서연의 집으로 달려갔다.윤찬은 축 처진 얼굴로 짐을 정리했다. 책을 정리하던 그때 입학 통지서가 툭 떨어졌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내려다보던 그의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처남이 전화에서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어.”최
최연준이 그 번호를 보니 오성대에서 걸려온 것은 맞았다. 그의 기억이 맞는다면 아마 학교 이사회의 전화번호인 것 같았다.오성대의 이사회에서 3분의 1이 임씨 가문과 관계가 있는 자들이었다.입꼬리를 씩 올리던 그는 단번에 어찌 된 일인지 알아챘다.“왜 그래요?”강서연이 그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이 번호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아니야. 잠깐만 기다려.”최연준은 베란다로 향했다. 강서연은 거실에서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는 연거푸 전화를 여러 통 걸었다. 목소리는 진지하게 내리깔았고 표정은 무뚝뚝하기만 했다.‘이게 바로 리더의 기품이겠지?’가슴이 움찔한 그녀는 볼이 화끈 달아올라 고개를 살짝 숙였다.“누나.”윤찬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매형한테 진짜 방법이 있을까요?”“응, 있을 거야.”그녀의 목소리가 거의 기어들어 갔다.“알았어요...”윤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누나, 매형이 구현수가 아니라 최연준이라서 정말 다행이에요. 역시 권력이 있고 돈 많은 매형이 있으니까 좋네요.”강서연은 윤찬을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베란다에 있던 최연준이 홀가분하게 웃으며 다가왔다.“어떻게 된 일인지는 대충 알아냈어. 이틀 뒤에 학교 이사회에 다녀올게.”그는 윤찬을 보며 어깨를 토닥였다.“요 이틀 집에 있어요. 잠깐 휴식한다고 생각해요.”“네, 알았어요.”윤찬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이는 것 같았다. 강서연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이 큰일을 벌써 해결했다고? 만약 연준 씨의 신분으로 학교에 압력을 가한 거라면 찬이한테도 좋을 게 없는데.’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그녀는 윤찬이 조용히 공부하기만을 바랐다. 일이 시끌벅적해지면 어찌 가만히 연구할 수 있겠는가?최연준은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당신이 싫어할까 봐 나랑 당신 관계는 누구한테도 얘기하지 않았어. 당신이 어느 날... 나한테 명분이라도 주면 모를까.”그의 말에 강서연은 멈칫하다가 이내 웃음을 터
최연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인 채 웃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서연아, 시간도 늦었는데...”“그래서요?”“안 가면 안 될까?”최연준이 떠보듯이 물었다.“날이 이렇게 어두운데 밤길이 위험하잖아. 내가 혼자 가면 마음이 놓여?”강서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그를 아파트 밖으로 힘껏 밀어냈다. 그런데 최연준의 덩치가 하도 커서 그녀가 젖 먹던 힘까지 다 써도 최연준은 꿈쩍도 하질 않았다. 게다가 힘을 너무 준 탓에 중심을 잃어 그의 품속에 넘어지고 말았다.최연준은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잡고는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잡았다. 그의 눈빛 속에 이글거리는 욕망을 본 순간 강서연은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그녀는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고 볼도 빨갛게 달아올랐다.“이... 이러지 말아요.”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자 뜨거운 기운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다행히 밖이라서 최연준은 야릇한 생각을 그나마 거두어들일 수 있었다.“서연아.”최연준이 갈라진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일으켜 세웠다.“당신이 싫다면 난 절대 강요하지 않아. 하지만... 가끔 나한테 응원이라도 해주면 안 돼? 적어도 당신이 날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게 말이야.”강서연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연준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걱정하지 마.”그는 다시 윤찬의 일을 꺼냈다.“처남의 일은 큰일이 아니야. 내가 자세히 알아본 다음에 깔끔하게 해결해줄게.”고개를 든 강서연은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천천히 말을 꺼냈다.“나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 많이 당황했어요... 처음 그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일을 다른 사람들도 알게 널리 퍼뜨리는 거였어요. 지금 신문사에서 일하니까 그 정도는 쉽게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잘 생각해 보니까 정말로 그렇게 했더라면 오히려 일을 망칠 수도 있겠더라고요.”“응.”최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나연이 강서연을 보는 눈은 독기를 품고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바로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걸어가 대범하게 인사했다.“셋째 도련님.”강서연은 마음이 조여지면서 무의식적으로 최연준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촉이란 항상 무서운 법이다. “셋째 도련님.”임나연은 두 사람 앞에 다가서서 강서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분이 말로만 듣던 서연 씨죠?”강서연은 예의상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최연준은 안색이 좋지 않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차갑게 물었다.“무슨 일로 왔어요?”“할아버지께서 도련님을 집으로 모시라고 했어요.”임나연은 일부러 심각하게 말했다.“방 비서님도 도련님을 설득 못 한다고 하시길래 할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어요.”강서연은 생각에 잠겼다. 방한서는 최연준의 비서이자 그의 심복이다.‘방한서도 할 수 없는 걸 네가 나선다고 되겠어? 그리고 영감님께서 왜 굳이 너를 보내겠어?’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기가 최상 가문 심지어 최연준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아닌가?강서연은 이 모습이 너무 웃겼다. 사실 임나연이 차에서 내릴 때부터 자기에게 좋은 마음을 품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연준 씨.” 임나연은 최연준 곁으로 다가갔다.“빨리 출발해요. 할아버지께서 기다리겠어요. 아, 맞다.”또 강서연을 보면서 웃으며 물었다.“서연 씨께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아니면 연준 씨가 왜 가족 모임도 안 가고 급하게 뛰쳐나왔겠어요!”“그랬어요?” 강서연은 최연준을 한 번 보고는 슬쩍 그의 소매를 잡고 힘을 써 자신의 곁으로 끌어당겼다. “미안해요. 빨리 돌아가요.”임나연이 또 입을 열었다.“서연 씨께서 만약 난처한 일에 부딪혔다면 사실 연준 씨를 여기까지 달려오게 할 필요는 없어요. 저한테 말해도 제가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릴 수 있어요.”강서연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요, 고마워요.”“괜찮아요. 저랑 연준 씨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란 사이인데 연준 씨의 친구는 당연히
병원 응급실 밖.배경원은 의자에 주저앉아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충혈된 눈으로 응급실 문을 응시하며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한때 당당했던 그의 어깨는 지금 축 처져 있었다. 뒷모습만으로도 절망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배경원은 주먹을 단단히 쥐었지만, 온몸은 떨리고 있었다.적막이 흐르는 복도는 불길한 정적마저 감돌았다.결국,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와 눈물이 조용히 뺨을 적셨다.“경원아!”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배경원이 고개를 들자, 최연준과 강서연이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힘이 풀려 바닥에 쓰러질 뻔한 배경원을 최연준이 재빨리 부축했다.강서연은 응급실 문을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치료는 연희 씨와 신석훈 씨의 제자들이 맡고 있어요. 모두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에요. 수정 씨는 평소 건강을 잘 관리하셨으니 금방 회복될 겁니다.”“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최연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 갑자기 병세가 심각해진 거야? 그리고 윤아는...”배경원은 떨리는 손으로 최연준의 팔을 붙잡으며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셋째 형님, 제발 윤아를 찾아주세요. 딸은 사라지고 아내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어요. 둘 다 잃으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습니다...”“그런 바보 같은 말 하지 마세요. 둘 다 무사할 겁니다.”강서연이 단호히 말했다.“윤아는 우리 집안의 며느리예요. 누가 윤아를 해치려 한다면 최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어요. 그 결과가 어떤 건지 모를 리도 없고요. 그리고...”강서연은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을 이어가려다 복도 끝에서 배현진이 소피아와 함께 급히 다가오는 모습을 보고는 말을 삼키고 배현진을 노려보았다.“연준 아저씨, 서연 이모...”배현진은 어딘가 죄책감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배현진은 배경원에게 다가가 팔을 살며시 부축하며 조심스레 말했다.“아버지...”그 순간, 배경원이 배현진의 뺨을 내려쳤다.배경원은 분노로 가득 찬 눈빛으로 배현진을 노려보며
임수정은 갑작스러운 기침을 하며 침대 옆 경보 벨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소피아에 의해 단호히 막혔다.“사모님, 제 말을 듣는 게 좋으실 겁니다.”소피아는 부드럽지만 섬뜩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제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형편없지도 않고 독을 넣을 만큼 제가 어리석지도 않아요. 안심하세요. 이 모든 재료는 사모님의 건강을 생각하며 준비한 겁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온 이유는 진심으로 사모님을 돌보고 싶어서예요.”임수정은 가슴을 움켜쥔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임수정의 눈엔 불신과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요즘 배경원은 외출이 잦아졌고 이유를 묻자, 회사 일 때문이라며 안심하라는 대답뿐이었다.그럼에도 임수정의 마음속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커져만 갔다.깊게 숨을 들이마신 임수정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겉으론 소피아의 말을 따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사모님, 잘 생각하셨어요.”소피아는 임수정에게 쿠션을 건네며 은은하게 웃었다.“우리 결국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될 사이잖아요. 지금부터 제 존재에 익숙해지시는 게 좋을 겁니다.”“흥! 내 아들이 눈이 먼 게 분명해.”임수정은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떻게 너 같은 사람에게 속을 수 있는지...”“저를 깔보지 마세요. 저는 이혼하고 아이도 데리고 있지만, 현진 씨를 향한 제 진심은 변하지 않아요. 저는 현진 씨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누구와는 달리 겉으론 순수한 척하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짓은 안 한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해요.”“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임수정은 언성을 높이며 노려보았다.소피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더욱 날카롭게 말했다.“사모님, 제가 말하는 사람은 바로 사모님의 그 옛날 며느리가 될 뻔했던 그 사람이에요.”“헛소리하지 마!”임수정은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그 일은 우리 배씨 가문이 송윤지에게 잘못한 일이야. 그 애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사모님,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에요.”소피아는 태연한
“너와 상관없다고?”임우정은 다급하게 외쳤다.“네 형부가 이미 윤아의 통화 기록을 조사했어. 윤아가 실종되기 전에 조 회장이랑 통화했던 게 드러났다고! 지강아, 너와 조 회장이 어떤 관계인지 나한테도 숨길 작정이었어?”임지강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그래요. 저와 조 회장이 가까운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저와 배윤아 사이엔 원한이라곤 없잖아요... 누나, 왜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지강아!”임우정의 목소리가 더욱 절박해졌다.“너, 송윤지 일 때문에 배현진을 미워하는 건 알아. 하지만... 네 말대로라면 윤아한테까지 증오를 전가하면 안 되잖아!”“누나, 정신 좀 차리세요!”임지강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어둠이 깃든 그의 얼굴은 단호함을 더했다.“무슨 근거로 저를 의심하시는 건데요?”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임지강의 강경한 태도에 임우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한참 후, 임우정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렇다면... 배씨 가문을 좀 도와줄 순 없겠니?”임지강은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맑고 투명한 송윤지의 눈빛과 마주쳤다.“배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요양원 병실 문 앞.소피아의 하이힐 소리가 텅 빈 복도를 울리며 퍼져 나갔다. 소피아의 손엔 보온 도시락이 들려 있었고 문 앞을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제가 사모님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경호원들은 서로 눈치만 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이건 도련님께서 지시하신 거예요.”소피아는 휴대전화를 꺼내 그들에게 일부러 화면을 보여주며 말했다.“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실래요? 아시다시피 사모님 건강이 좋지 않으세요. 세 끼 제대로 챙겨 드시지 못하면 여러분들이 책임지실 겁니까?”경호원들은 난처한 얼굴로 머뭇거리다 결국 길을 내주었다.“이제야 말이 통하네.”소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송윤지는 겨우 한 모금을 마시고 사레가 들어 술을 뱉을 뻔했다. 마신 술이 얼굴에 스며든 듯 송윤지의 뽀얀 볼은 어느새 매혹적인 와인빛으로 물들었다.임지강은 그런 송윤지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임지강은 송윤지에게 다가가 가볍게 등을 두드리며 입가에 묻은 술자국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임 대표님...”송윤지는 조심스럽게 임지강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썼다.하지만 임지강은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아 통유리창 앞까지 데려갔다.송윤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 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깊고 짙은 밤하늘에 수많은 불꽃이 터지기 시작했다. 잘게 부서진 불빛들이 반짝거렸다.불꽃은 색과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며 꿈같은 광경을 만들어냈다.송윤지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마음에 들어요?”임지강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송윤지의 귀에 스며들었다.“잠깐 눈 좀 감아 봐요.”“네?”임지강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제가 별을 따다 줄게요.”마지막 불꽃이 빛의 궤적을 남기며 밤하늘로 사라지고 다시 평온한 고요가 찾아왔다.송윤지는 미소를 지으며 임지강의 말을 따라 눈을 감았다. 그러자 따뜻하면서도 약간 서늘한 남자의 손길이 송윤지의 손을 잡더니 손바닥 위에 무언가가 놓이는 느낌이 들었다.송윤지는 깜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손에는 정말로 ‘별’이 있었다.“이건...”그것은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별 모양으로 깎아낸 다이아몬드로, 완벽하게 다듬어져 찬란한 빛이 퍼지고 있었다.“제가 해줄게요.”임지강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안 돼요. 이건 너무 비싼 거라서 제가...”“받아줘요.”임지강의 눈빛은 따스하고도 단호했다.“그리고...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송윤지는 고개를 숙였다. 귀 끝까지 붉어진 송윤지의 얼굴은 마치 열이 오른 듯했다.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의 귓가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살짝 정리해 주었다.“사실,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저 윤지 씨 좋아
소피아는 약속한 시간에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창가에 앉아 있는 낚시 모자를 쓴 중년 여성을 발견했다.소피아는 조용히 걸어가 밝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 혹시... 허운주 선생님이신가요?”허운주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초췌한 기색이 역력했다.소피아는 직원에게 뜨거운 우유 한 잔을 주문하고 허운주 앞에 놓인 진한 커피를 치우며 부드럽게 말했다.“허 선생님, 이 나이에 이렇게 진한 커피는 드시면 안 돼요. 건강을 꼭 챙기셔야죠.”“고맙습니다...”허운주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절 찾아오신 이유가 뭘까요?”허운주는 천천히 눈을 들어 소피아를 바라봤다.소문에 따르면, 소피아는 현재 배현진의 연인이며 이혼 후에 아이를 키우면서도 배현진의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사람이었다.허운주는 소피아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직감했고 소피아가 도움을 준다면 송윤지 같은 사람을 무너뜨리는 건 쉬운 일이라고 확신했다.“제가...”허운주는 입술을 핥으며 머뭇거렸다.“어떻게 말씀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네요.”소피아는 잠시 멈칫하더니 곧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허 선생님은 현진 씨의 선생님이시잖아요. 그 특별한 인연은 현진 씨도 평생 기억할 거고 저 또한 마찬가지예요. 저희는 모두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어요. 그러니 무슨 일이든 편하게 말씀하세요.”“저는 국제 유치원에서 어쩔 수 없이 사직하게 됐어요.”허운주는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깊이 찡그렸다.소피아는 놀란 듯했지만, 최근 일어난 상황을 대략 알고는 있었다. 우수 교사 선발에서 허운주가 송윤지에게 패했다는 소식은 소피아에게도 전해졌다. 자존심 강한 허운주로서는 그 일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하지만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소피라는 눈을 굴리며 허운주를 어떻게 이용할지 계획하고 있었다.“허 선생님,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소피아는 부드럽게 허운주의 손등을 토닥이며 말했다.“저를 딸이라고 생각하시고 속상한 일 있으면 다 털어놓으세요. 제가 도울 수 있
회의실은 단숨에 고요 속에 잠겼다. 강렬한 존재감의 인물이 문턱을 넘어서자, 방 안은 서늘하면서도 압도적인 기운으로 가득 찼다.원장은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단숨에 그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툭 치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왜 이제야 온 거야?”임지강의 눈가에는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그러나 그의 시선이 허운주에게 닿는 순간, 그 미소는 천천히 사라지고 대신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이 자리 잡았다.“으흠!”원장은 자세를 가다듬으며 목소리를 높였다.“오늘 이 자리에서는 투표 결과를 발표하는 것뿐만 아니라 매우 중요한 소식을 전하려고 합니다.”원장은 한 장의 서류를 꺼내 들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유치원의 공식 도장과 함께 임지강의 힘찬 서명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임 대표님께서 우리 유치원에 10억을 투자해 주셨고 국제 유치원의 최대 주주가 되셨습니다. 유아 교육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해 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초심을 잃지 않고 임 대표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송윤지는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얼굴에 붉은 기운이 번지자 뜨거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입가에 번진 미소는 감추기 어려웠다.임지강은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제가 이 유치원의 주주가 된 이상, 앞으로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우리 국제 유치원의 이익을 위해서일 것입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허운주를 똑바로 바라보며 덧붙였다. “그래서 오늘, 교사 팀을 정비하려고 합니다.”허운주는 본능적으로 두 걸음 물러나며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이곳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임지강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자신의 가치관조차 바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아이들을 올바르게 이끌 수 있겠습니까?”허운주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인가요?”“여기 있는 사람 중
원장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졌다.“허 선생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오늘 표 집계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투명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조작이라니, 그 말은 제가 개입했다는 뜻인가요?”“원장님, 제가 어떻게 감히 원장님을 의심하겠습니까?”허운주는 억지 미소를 띠며 비꼬듯 말했다.“하지만 표 차이가 이렇게 크게 나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설령 원장님께서 관여하지 않으셨더라도, 누군가 뒤에서 무슨 일을 꾸몄을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허 선생님...”원장은 화나 치밀어 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 막무가내인 사람들과 대화하는데 익숙하지 않았다.“허 선생님, 하신 말씀에 대해 책임지셔야 합니다.”송윤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송윤지는 허운주를 담담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저는 단 한 번도 허 선생님께 폐를 끼친 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우수 교사 선발 역시 모든 과정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제가 정말 무슨 일을 꾸몄다면, 이렇게 공개적으로 표를 집계했겠습니까?”허운주는 송윤지를 노려보며 속으로 분노를 억눌렀다.평소 조용하고 소극적인 송윤지를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의 송윤지는 논리 정연한 주장으로 상대의 도발에도 굴하지 않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송윤지를 새롭게 보게 되었고 문밖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임지강의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임지강은 회의실 밖에서 모든 상황을 눈여겨보고 있었다.특히 송윤지의 표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임지강은 마치 자신이 상을 받은 것처럼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곁에 있던 부하 직원조차 그의 변화를 놀라워하며 말했다.“송 선생님은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전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었다. 송윤지는 변하지 않았다. 그저 예전에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너무 조심스러워 본래의 자신을 숨겼을 뿐이었다.“임 대표님, 허 선생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지난번에 내가 해외 시장을 축소하라고 했지만, 당신 아들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임수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결국 문제는 그 여자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거야... 그 여자는 현진이를 부추겨 또 다른 일을 꾸밀 거고 현진이는 분명히 그 여자의 말을 들을 거야.”“그러니까 그들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임수정은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윤아야, 네가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회사들을 꽉 잡고 있어야 해! 너 혼자 힘들면 군성이랑 의논해도 되고 군형이나 소유의 도움을 받아도 돼. 네가 동의하지 않는 한, 네 오빠는 너한테서 단 한 푼도 가져갈 수 없어. 이해했지?”“윤아야.”임수정은 딸의 손을 꼭 잡았다.“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이 모든 재산은 우리 조상들이 쌓아온 거야. 절대 우리 세대에서 무너져선 안 된다!”“네, 저 이해했어요.”배윤아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말했다.“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오빠가 하루빨리 제정신을 차려서 우리가 예전처럼 가족으로 지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임수정은 힘없이 눈을 감았다. 기침하며 숨을 고르는 임수정의 모습이 안쓰럽기만 했다.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소피아가 복도 모퉁이에 숨어 임수정의 방을 노려보고 있었다. 벽을 짚고 있던 소피아는 주먹을 꽉 쥐었고 마치 벽을 뚫을 듯 힘을 주고 있었다.방 안에서 나눈 대화는 모두 소피아의 귀에 생생히 들렸다.오늘 소피아가 임수정을 찾아온 건, 회사 본사에서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을지 알아보려는 목적이었다. 만약 가능하다면 은행 대출을 받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졌다.지금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재산 전부가 이 어린 소녀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여보세요, 소피아!”그때, 배현진이 전화를 걸어왔다.“지금 엄마 집에 있어? 나 일이 아직 안 끝나서 조금 있다가 가려고. 엄마한테 전해줘.”“그럴 필요 없어.”소피아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임수정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배경원은 막 씻은 딸기를 가져왔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딸기의 끝부분을 잘라 임수정의 입에 넣어주었다.결혼한 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도, 두 사람의 애정과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는 여전히 처음과 같았다. 그들의 관계는 많은 사람의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배윤아는 방으로 들어오기 전에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엄마를 위해 영양제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새로 그린 그림도 품에 안고 있었다.“엄마, 아빠, 저랑 군성이가 이번에 현실적인 내용을 담은 만화를 하나 출간하려고 해요. 내용은 한 부부가 젊었을 때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을 다룬 거예요... 사실 주인공 부부가 바로 엄마, 아빠예요! 보세요, 이렇게 그렸는데 괜찮죠?”임수정과 배경원은 딸이 그린 그림을 보며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했다.부부는 원래 대부분의 기대를 아들에게 걸고 있었다. 이는 남녀 차별 때문이 아니라 배윤아의 성격이 어릴 적부터 세상일에 무심하고 경쟁을 피하는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계승자로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딸이 오히려 아들보다 더 믿음직스럽다.“윤아야.”임수정은 딸의 손을 잡으며 눈빛에 깊은 의미를 담아 말했다.“엄마가 너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게 있어.”“뭔데요?”배윤아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임수정은 베개 밑에서 갈색 서류봉투를 꺼냈다. 그 안에는 배씨 가문과 임씨 가문의 핵심 자료들이 들어 있었다.“이것뿐만 아니라, 본사의 도장도 있어.”배경원은 도장까지 꺼내 배윤아에게 건넸다. 배윤아는 깜짝 놀라 귀중한 물건들을 손에 들고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아빠, 엄마, 이건 도대체...”“우리도 이제 나이가 들었고 몸 상태도 좋지 않아. 요양원에 머무는 동안은 회사로 돌아가 직접 관리할 수도 없을 거야.”배경원은 평소 장난스러웠던 모습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배윤아를 바라보았다.“윤아야, 엄마, 아빠는 이 모든 것을 너에게 맡기기로 했다. 네가 책임을 져야 해.”배윤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