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준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강서연이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내리깔자 기다란 속눈썹도 따라서 파르르 떨렸다.“나중에 알게 되었죠.”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신분과 이름은 그저 기호일 뿐이라는 걸 말이죠. 당신이 돈이 많든 돈이 없든, 최연준이든 구현수든 다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은 변한적 없이 그대로였고... 나도 마찬가지예요.”최연준은 그녀를 보며 손을 살며시 잡았다. 강서연은 씩하고 웃더니 그와 깍지를 끼었다.“서연아, 그럼 나 용서하는 거야?”“난 당신을 탓한 적이 없어요. 그냥 당신의 정체를 갑자기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이에요.”그녀가 입술을 삐죽거렸다.“하지만 나 시간이 더 필요한데... 기다려줄 수 있어요?”“그럼! 당연하지!”그는 평생 기다려야 한다고 해도 기다릴 수 있었다. 최연준은 지금 이 상황이 혹시라도 꿈일까 봐 두려워 그녀를 꽉 껴안았다.“서연아, 이젠 날 떠나지 않을 거지?”그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재차 확인했다. 그러자 강서연이 히죽 웃었다.“네. 안 떠나요.”“내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평생 안 떠날 거지?”강서연이 화들짝 놀랐다.‘왜 또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 거지? 지난번 성당에서도 이렇게 물었었는데!’“연준 씨, 그때 다 녹화했잖아요. 증거가 연준 씨 손에 있는데 또 물어요?”최연준은 휴대 전화를 꺼내고는 환하게 웃었다.그런데 그때 주변의 비둘기들이 뭔가에 놀랐는지 푸드덕 날아갔고 풀숲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쿵 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누군가가 풀숲에서 튀어나오면서 발을 헛디딘 바람에 마침 두 사람의 앞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최연준은 본능적으로 화들짝 놀란 강서연의 앞에 서며 그녀를 지켜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얼굴을 본 순간 두 사람 모두 경악했다.“배경원?”배경원이 무릎을 어루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머리에 나뭇잎이 묻은 채로 두 사람을 향해 어색하지만,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연준 형... 형수님, 비둘기 먹이를 주고 있었나 봐요?
“다시 알게 되었으니 제대로 소개할게.”최연준이 가볍게 웃었다.“유찬혁 변호사는 오성에서든 강주에서든 아주 유명한 변호사야. 자문 비용도 아주 초 단위로 계산해서 받는다니까. 그리고 배경원은...”그의 시선이 강서연에게 머물렀다.“그때 당신이 쟤에 관한 자료를 달달 외우고 교통사고까지 났으니 더 소개할 필요는 없겠지?”배경원이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왜요! 인터넷에 떠도는 자료는 다 잘못된 거예요! 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형수님, 제가 어떤 사람인지 다시 아셔야 해요! 제가 보기에는 바람둥이 같지만 사실 누구보다 일편단심이에요. 그리고 얼굴이 잘생기다 보니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는다고나 할까요. 연준 형도 포함... 아이고!”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찬혁이 그의 머리를 툭 쳤다. 고개를 든 배경원은 최연준의 싸늘한 눈빛과 딱 마주쳤다. 배경원은 억울하다는 생각밖에 없었다.‘어휴, 잘생긴 게 죄지.’...해원 별장에 온 임나연은 경호원이 말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안으로 쳐들어갔다.거실에 들어와 보니 옷들이 바닥에 잔뜩 널브러져 있었는데 빨간 옷에 걸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그녀는 하이힐을 신은 채 대리석 바닥을 또각또각 걸었다. 그런데 커다란 소파 위에서 최지한이 한 여자와 진한 키스를 나누고 있는 것이었다.순간 구역질이 난 임나연은 등을 돌리고 기침을 두어 번 했다. 인기척이 들리자 최지한이 고개를 들고 실눈을 뜬 채 그녀를 쳐다보았다.“도련님...”여자가 손을 내밀어 그를 잡았다. 최지한은 웃을 주워 그녀에게 던지고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임나연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때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됐어요?”임나연이 성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마침 옷을 다 입은 강유빈은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최지한이랑 뜨거운 시간을 보내자 했더니 이 년 때문에 다 망쳤잖아! 대체 누구이기에 최지한의 집에 마음대로 드나드는 거지?’강유빈이 입술을 깨
결국 강유빈은 임나연의 상대가 아니었다. 강유빈의 얼굴에 임나연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나타났다.그때 최지한이 눈짓을 보내자 경호원들은 재빨리 나서서 두 사람을 말리고는 강유빈을 데리고 나갔다.강유빈은 발버둥 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도련님, 왜 절 안 도와주세요! 도련님...”그녀의 목소리가 해원 별장에서 빠르게 사라졌다.임나연은 강유빈의 뒷모습을 보며 침을 퉤 하고 뱉었다. 그러고는 도우미의 손에서 깨끗한 수건을 건네받고 소파에 앉아있는 최지한을 흘겨보았다.“당신 눈멀었어요?”임나연은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저년이 날 때리는 데 왜 가만히 있어요?”“나연 씨.”최지한이 잇몸을 드러내고 웃었다.“나연 씨 신분에 왜 저런 애랑 싸우고 그래요.”“최지한 씨!”“됐어요, 그만 화 풀어요.”최지한이 도우미에게 차를 내오라고 했다.“차 좀 마시면서 마음을 가라앉혀요.”임나연은 그를 째려보았다. 오늘 그를 찾아온 건 그가 대체 어쩌려는 생각인지 정확히 들어보기 위해서였다.최지한은 줄곧 그녀에게 강서연을 없애고 최연준을 되찾게 도와주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꽤 지났지만, 강서연을 없애기는커녕 오성에 왔는데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이러니 임나연이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그녀는 최지한을 매섭게 째려보며 이를 꽉 깨물었다.“도련님, 우리 임씨 가문이 그동안 당신네 부자한테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줬는데 이러기예요? 돈만 챙기고 입 싹 닫겠다는 건 아니죠?”“나연 씨 무슨 말을 그리 섭섭하게 해요?”최지한은 기지개를 켜고는 소파에 기댔다.“그런데 지난번에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해직한 후로 우리가 이사회에서 별 힘이 없어요.”“그럼 내 일을 도와줄 수 없다는 거예요?”최지한이 차갑게 웃었다.“지금 연준이가 강서연 옆에 딱 붙어있어서 강서연을 없애는 건 아마 불가능할 것 같아요.”임나연의 낯빛이 사색이 되었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다.“하지만...”최지한이 그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
강서연이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최연준이 한창 어머니와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카드놀이 방법이 아주 신기하고 룰도 복잡했는데 사람의 논리성과 인내심을 테스트하는 놀이였다. 어머니가 어릴 적에 그녀에게 가르쳤었지만 아무리 가르쳐도 그녀가 터득하지 못한 바람에 나중에는 더는 그 카드를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두 사람이 저렇게 재미나게 놀 줄은 생각지 못했다.거실에서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머리 좋은 최연준은 매번 티 나지 않게 그녀에게 져주었다. 기분이 좋아진 윤문희는 최 서방이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한 게임이 끝난 후 최연준이 카드를 섞으려다가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강서연을 보고는 가볍게 웃었다.“왔어?”“오늘 일찍 퇴근했네?”윤문희가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웃었다.“최 서방이 온 오후 나랑 카드놀이를 했어. 피곤해 보이니까 얼른 가서 맛있는 것 좀 해줘.”강서연은 어이가 없었다.“엄마.”그녀는 피식 웃으며 일부러 떠보듯이 말했다.“저도 종일 출근하느라 힘들어요.”“최 서방보다 힘들었겠어?”윤문희가 목소리를 높였다.“이게 얼마나 머리를 써야 하는 건데. 네가 어렸을 적에 수백 번이나 가르쳤는데도 넌 터득하지 못했어. 그런데 최 서방한테 딱 한 번 가르치니까 바로 알더라!”최연준은 아무 말 없는 강서연을 뒤로 한 채 으쓱거렸다. 그러고는 강서연의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쪼르르 안방으로 따라갔다.강서연은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최연준은 그녀 뒤로 다가가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평소에는 힘 있고 딱딱하던 손이 그녀의 어깨에 닿자마자 바로 부드러워졌다.강서연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딱 적당한 힘에 그녀도 시원한지 두 눈을 감고 마사지를 즐겼다.“좀 쉬고 있어. 밥하지 않아도 돼.”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호텔에 연락해서 저녁밥 가져오라고 할게.”“그럼 연준 씨는요?”“이따가 나가봐야 해.”화들짝 놀란 강서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어딘가 이
최연준이 순간 멈칫했다.“뭐라고?”“날 도와줄 거예요?”‘당연하지!’최연준은 속으로는 미친 듯이 외쳤지만 겉으로는 침착한 척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왜 갑자기 도와달라는 거야?”“그거야...”강서연이 말을 얼버무렸다.“뭔가를 성공하려면 자신의 노력 말고도 옆에 있는 모든 자원을 이용해야죠. 안 그래요?”최연준은 살짝 의외라는 눈치였다.예전에 경영 대학원을 다닐 때 첫 수업에서 교수도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한 사람이 성공하려면 시기상의 적절함과 지리상의 이로움, 그리고 사람들의 화합 이 세 가지를 다 갖추어야 한다고 했다.강서연이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히죽 웃었다.“내가 인터뷰해야 하는 상대는 나석진이에요. 지금 이 실력으로 나석진 씨의 매니저도 날 무시할걸요? 이건 내 힘으로는 절대 완성할 수 없는 임무예요. 다들 지금 내가 우스갯거리가 되길 기다리고 있어요. 하지만 내 옆에는 못 하는 게 없는 슈퍼맨이 있죠...”그녀는 최연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귀엽게 웃었다.“만약 슈퍼맨이 나한테 초능력을 빌려줘서 이 임무를 완성하게 도와준다면 아주 고마워할 거예요!”“어떻게 고마워할 건데?”“구두가 필요하다면서요?”그녀가 두 눈을 깜빡였다.“제일 좋은 구두 하나 사줄게요!”“그것뿐이야?”“그리고...”그녀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뜨리며 씩 웃었다.“평생 당신을 먹여 살릴게요.”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린 최연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알았어.”그러더니 대뜸 휴대 전화를 꺼내려 했다. 강서연은 그를 말리며 피식 웃었다.“지금 당장 연락하라는 게 아니에요. 일단 내가 스스로 해본 다음에 그래도 안 되면 그때 연준 씨한테 도움을 청할게요.”최연준은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점쟁이 할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점쟁이 할머니는 강서연에게 조선 시대였더라면 중전마마가 됐을 팔자라고 했고 부귀영화를 누릴 거라고 했다.사실 그녀의 총명한 지혜로 누구와 결혼하든 다 행복하게
최연준이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반격하려던 그때 최연희가 다시 다가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이따가 자리에 앉으면 절대 흥분하지 마.”“왜?”“아무튼...”최연희는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다는 듯 피식 웃었다.“이따가 밥이 안 넘어갈 수도 있어.”최연준은 살짝 움찔했다가 이내 자신만만하게 걸어갔다. 그런데 최연희의 말이 사실이었다.최재원이 메인 자리에 앉아 서늘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둘러보고 있었고 원래 최연준의 자리였던 그의 옆자리에 임나연이 앉아있는 것이었다.“연준아, 멍하니 서서 뭐 해?”최재원이 먼저 말을 건넸다.“얼른 자리에 앉아.”최연준은 굳은 얼굴로 주먹을 꽉 쥔 채 임나연 옆으로 걸어갔다.도우미는 의자를 빼낸 후 최연준에게 깍듯하게 자리를 안내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최연준에게 쏠렸다.그와 강서연의 일이 최씨 가문 전체에 퍼지면서 그가 강주에서 요양할 때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그리고 최연준이 강서연 때문에 최재원과 정면으로 여러 번 맞섰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런 와중에 최재원이 가족 모임에 임나연을 초대했다는 건... 그의 손주며느리는 임나연뿐이라는 걸 공개적으로 발표한 거나 다름없었다.“임씨 가문과 사돈을 맺으면 나쁠 게 없죠.”누군가가 수군거렸다.“우리 셋째 도련님은 왜 그걸 모를까요...”“어릴 적부터 떵떵거리며 살아온 도련님이 가족의 이익을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는 걸 알 리가 있겠어요?”“그나저나 저건 무슨 양복이에요? 너무 형편없어 보이는데요?”임나연이 최연준을 힐끗 보았다.‘평소 패션위크의 디자이너들이 만든 옷만 고집하던 연준이었는데 오늘은 왜... 딱 봐도 길거리 싸구려 옷이잖아.’“연준 씨.”임나연은 참하고 얌전한 척했다.“이 양복이 좀 낡은 것 같은데 다른 걸로 갈아입을래요?”최연준은 잠깐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싸늘하게 째려보았다. 임나연은 더는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수프만 마셨다. 다른 사람들도 더 이상 수군거리지 않았다.최연준이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사람들은 그저 자기 앞의 반찬만 내려다볼 뿐 누구 하나 젓가락을 드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저마다 곧 있을 재미난 구경거리를 기대했다.아니나 다를까 최재원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최진혁을 째려보았다. 최연준은 옆에서 피식 웃었다.최재원은 자기 가족이 외부 사람과 가까이하는 걸 가장 싫어했다. 최진혁은 예전에 이 점을 이용하여 최연준이 최연준의 외할아버지와 더 가깝게 지낸다고 이간질하면서 최재원의 불만을 자아낸 적이 있었다.최연준은 그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예전에 그가 했던 짓을 그대로 갚아주는 것뿐이었다.“최... 최연준!”화가 난 최진혁은 말까지 더듬었다.“이 많은 사람 앞에서 지금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아버지, 연준이 말 믿지 마세요. 얘가 지금 저한테 불만이 있어서 화풀이하려고 이러는 거예요.”“삼촌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억울하죠.”최연준이 느긋하게 말했다.“제가 어렸을 적부터 할아버지는 웃어른을 존경해야 한다고 가르쳤어요. 저도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지금까지 새겨듣고 있고요. 제가 삼촌한테 화풀이한다는 건 할아버지가 절 웃어른도 존경할 줄 모르는 안하무인으로 잘못 가르쳤다는 말이에요?”“너!”말문이 막힌 최진혁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친척들의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최재원이 잔뜩 굳은 얼굴로 젓가락을 확 던지자 쨍그랑하고 그릇과 부딪혔다.임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안한 얼굴로 최연준을 보며 말했다.“오늘 이 자리에 오는 게 아닌데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최씨 가문의 가족 모임인 걸 몰랐어요. 실례 많았습니다.”“그래요.”최연준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젠 최씨 가문의 가족 모임인 걸 알았겠네요?”“최연준 씨...”“연준이가 아직 젊어서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다 하네!”최진혁은 물을 한잔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혔다.“아무리 그래도 나연이는 손님인데 손님을 이런 식으로 대접하는 게 어디 있어.”“대접이라면
그의 날카로운 눈빛에 임나연은 저도 모르게 소름이 쫙 돋았다.“연... 연준 씨.”임나연이 웃으며 말했다.“하도 급해 보여서 걱정돼서 물은 거예요...”“별일 아니에요.”최연준이 싸늘하게 말했다.“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내가 그렇게 귀찮아요?”임나연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앞으로 임우 그룹하고 최상 그룹이 업무적으로 자주 손을 잡을 텐데 우리...”“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공과 사는 분명히 할 테니까.”그의 말투는 무척이나 담담했다.“그리고 업무상에 문제가 있으면 사무실로 찾아와요.”“알았어요!”임나연은 그의 태도가 조금은 좋아진 줄 알고 신난 얼굴로 대답했다.방한서가 차를 가져오자 최연준이 차에 올라타려 했다. 그런데 임나연도 함께 따라오는 걸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임나연 씨, 방금 공과 사를 분명히 할 거라고 얘기했잖아요.”임나연은 순간 멈칫했다.“지금 사적인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해요.”그가 입술을 앙다물었다.“나연 씨는 그만 따라와도 될 것 같아요.”그러고는 차를 타고 휙 가버렸다.그에게 버림받은 임나연은 점점 사라지는 차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의 두 눈에 원망과 분노가 가득 섞여 있었다.‘아까 그 전화는 강서연 그년이 걸어온 거겠지?’그녀는 잠깐 마음을 가라앉히다가 휴대 전화를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큰아버지, 저예요... 네, 윤찬의 일은 어떻게 됐어요?”임나연은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네? 하하, 진짜 입학 자격을 취소했어요? 너무 잘됐어요!”“진짜지, 그럼.”휴대 전화 너머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이제부턴 네가 나서서 그 애를 다시 입학시키면 최연준도 너한테 아주 고마워할 거야.”임나연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최연준은 곧장 강서연의 집으로 달려갔다.윤찬은 축 처진 얼굴로 짐을 정리했다. 책을 정리하던 그때 입학 통지서가 툭 떨어졌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내려다보던 그의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처남이 전화에서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어.”최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