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연은 눈썹이 흔들리더니 어떤 표정을 지을지를 몰라 했다.“아니, 아예 장을 봐왔다니까, 생선도 사고 채소도 사고. 이것저것 다 사 와서 냉장고가 터질 지경이야.”윤문희는 미간이 움직이더니 베란다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저 봐. 저기 저렇게 쌓아 뒀어. 마트를 통째로 들고 온 줄.”강서연은 어머니를 소파에 앉히고는 부엌에 들어가 보려는데 마침 최연준이 요리를 들고나왔다. 마주 선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 멈칫했다. 강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최연준의 시선을 피했고 곧장 주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주방은 상상 그 이상으로 어질러져 있었고 전쟁을 치른 것 같은 상태였다. 강서연은 결국엔 이 난장판을 본인이 거둬야 한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어서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처음 함께할 때를 떠올려 보면, 최연준은 양반집 자제처럼 누군가 시중을 드는 걸 당연시 했고 가끔 주방에 들어가면 지금보다 더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었다. 그때 강서연은 집안일이 뭐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싶어서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이제 와서 그 모습이 왠지 이해가 갔다. 최연준은 어려서부터 애지중지, 당연히 여러 사람의 시중을 받으면서 컸을 것이고, 집안일은 손 한 번도 대보지 못한 도련님이었을 것이다. 집안일이 상당히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최연준은 마지막 요리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뻣뻣하게 서서는 두 손은 어색하게 앞치마를 만지작거렸다.강서연은 땀 범벅이 된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마음이 약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장모님...”최연준은 나지막한 소리로 입을 뗐다.“보기엔 이래도 맛은 있을 거예요. 드셔 보세요!”윤문희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강서연을 의자에 끌어 앉혔고 강서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기 집에서 한 번이라도 이런 걸 해 봤을까? 자기 부모님께 밥 한 끼라도 지어 드려봤을까? 굳이 나를 위해서 이렇게 자세를 낮춰가며 비위를 맞출 일이 뭐가 있다고... 나랑은 태초부터 전혀 다른 세상 사람인데.’여기까지 생각이 든 강서연은 갑자기 마음이 괴로워졌
주문한 어묵탕이 곧 나왔고 강서연은 느긋하게 숟가락을 들고 어묵탕을 가볍게 저어줬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어묵탕의 시원하고 얼큰한 향이 최연준의 코끝을 파고들었다.최연준은 고개를 들어 강서연을 한 번 쳐다보았고, 강서연의 시선은 그에게 있지 않았다. 그는 마음이 또 바닥 치는 느낌이 들었다.그러다 강서연이 일어서더니 빈 그릇 하나를 가지고 다시 앉았다. 그녀는 당근을 골라내고는 어묵 한 꼬치와 국물을 거기에 담아냈다. 그러더니 어묵탕을 그의 앞으로 밀어 놓고는 한참 침묵 뒤에 겨우 한 마디를 뱉어냈다.“먹어요.”최연준은 또 흠칫 놀라더니 빙그레 웃어 보였다. 강서연이 병원에서 나온 뒤로 처음 그한테 한 말이어서 그런지 약간 울컥했다.갑자기 예전에, 제인 호텔로 데리고 가서 식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분명 손에 든 돈이 얼마 없었음에도 그의 부탁을 최대한 들어주던 그녀. 결국 비싼 랍스터 볶음밥을 주문해 주던 그녀. 그리고 거의 먹지 않은 채 다 구현수에게 나눠 주던 그녀. 최연준은 문득 본인이 거지가 돼도, 강서연이라면 자신을 떠나지 않고 곁을 지킬 것 같았다.‘아니, 감옥살이 신분의 구현수도 다 받아 줬으면서, 어떻게 나를 밀어내지?’최연준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서연아, 너한테 할 얘기가 있어.”강서연은 멈칫했고 눈만 살짝 움직이더니 한참 만에야 시선을 들어 최연준을 보았다. 최연준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강서연은 여전히 불편했고 뭔지 모르게 두려웠다.“현수...”그녀는 하마터면 이름을 잘못 부를 뻔했고, 입술을 깨물더니 한참 후에야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최 도련님... 할 말이 뭔데요. 해요.”최연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서연아, 설마 나랑 선을 긋겠다는 건 아니지?”강서연은 쓴웃음을 지었다.“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요. 일 년 동안 현수 씨라고 불렀는데. 지금 갑자기...”최연준은 마음이 급해서 답했다.“지금도 현수 씨라고 불러도 돼. 예전처럼
갑자기 출몰한 최연준의 모습에 회의장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최재원의 차갑고 엄숙하던 표정이 약간 온화하게 누그러졌다.“돌아왔어?”최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할아버지.”최재원은 고개를 까딱하며 앉으라는 사인을 보냈다. 그러나 최연준은 회의실을 천천히 도보하더니 그 긴 회의실 테이블 끝자리 중앙에 곧게 서서는 매서운 눈빛으로 이사진의 얼굴을 자세히 한번 훑어보았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센 분위기에 다들 숨조차 함부로 쉬지 못했다.최진혁은 혼이 나간 듯이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실룩하더니 간신히 미소를 짜내면서 입을 열었다.“연준아, 어떻게 온 거야?”“제가 별로 반갑지 않은가 보네요, 삼촌?”최연준은 입꼬리를 쓱 올렸다.“그럴 리가! 그저 묻는 거야...”“제가 삼촌하고 지한 형의 걸림돌이 될까 봐 걱정하시는 건가 싶어서.”최진혁은 화가 난 얼굴로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간 채 최연준을 째려보았다. 그에 반해 최연준은 담담하게 최진혁의 자리로 걸어가서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삼촌, 여기 제자리였던 것 같은데요.”“연준이 너...”“제가 자금조달 능력이 부족할지 몰라도, 자금 문제는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최연준은 심오한 눈빛을 하고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얘기했다.“제가 자금 다 마련했거든요.”최진혁은 문득 의아했다. 이렇게 큰 액수의 자금을 그가 무슨 수로 마련했다는 건가 싶었다. 최연준이 외가 쪽에 손 벌리지 않고는 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사실 최재원이 제일 꺼리는 사태가 최상 가문의 일에 외부 세력이 개입되는 것이었다.이를 잘 아는 최진혁은 조손 둘 사이를 이간질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본인 앞에 주어졌다 생각되었고 씩 웃어 보였다.“허, 또 영국 측에 손을 벌렸나 보네? 연준아, 내가 삼촌으로서 한마디 하자면, 넌 최씨 집안 자손인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무엇을 하든, 최상 가문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거 명심해.”“그쪽이 연준이 너의 외할아버지가 맞기는 해도 최상하고는 남이야.
자료를 펼쳐 보던 회의실 사람들은 놀란 눈치였다. 상업기획서는 완벽하고 상세했고 충분한 자금 출처는 놀랍게도 동명과 레이안 두 회사가 적혀있었다.동명과 레이안은 상장 회사다. 원래는 조용하더니 갑자기 주식시장의 다크호스로 등장해서 연속 상한가를 친 최근 유명해진 회사였다. 모두가 이 두 회사의 배후에 최연준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최연준은 웃는 듯 아닌 듯 최진혁을 바라보며 말했다.“제 기억이 맞는다면, 삼촌, 동명하고 레이안 사장님을 만나려고 했다죠, 아마.”“너, 연준이 너...”최진혁은 말문이 막혀 제대로 말을 내뱉지도 못했다. 이 두 곳 외에도 투자 회사 하나가 더 있었다. 앞서 인수하려 했던 회사 이름들이 모두 자료에 기록되어 있었다. 눈부신 이력은 누가 봐도 멋있는 성적이었다.최연준이 정색해서 말했다.“입찰 자격을 얻었고 비딩도 그저 절차를 밟는 거라서. 서부 땅 이전 절차는 비밀리에 잘 처리되고 있어요. 삼 일 뒤, 공지가 뜰 겁니다. 낙찰자는 당연히 저 최연준이고요. 삼촌, 이제 서부 땅은 제 것입니다.”최연준은 냉소를 지었다.“삼촌이 지한 형 데리고 굳이 저의 밑으로 와서 일하길 원하신다면, 뭐, 제가 두 분 자리는 까짓거 마련해 드리죠!”“최연준!”최진혁은 얼굴이 붉그락푸르락 상기되었고 이를 갈며 최연준을 노려보았다. 최연준도 질세라 똑같이 차가운 시선으로 최진혁을 째려보았다. 그 표정은 마치 사나운 늑대같이 매서웠다.“연준.”최진혁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말했다.“허, 참 조용히도 숨어서 많은 일을 했네. 이런 일뿐만 아니라 신분도 숨기고 다니고. 그러니 너를 용서 못 한다고 아직도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이 있지...”최연준은 피식 웃었다.“그러는 삼촌은 시시각각 자신의 신분을 잘 드러내고 다니시나 봐요. 그래서 최상 가문의 명분을 내걸고 해외 불법 조직하고 결탁도 했나 보죠?”“뭐라는 거야!?”최재원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매서운 눈매로 최진혁을 바라보았다.“할아버지, 아니면 삼촌이 무슨 돈으로 저 땅
집주인이 강서연에게 전화를 걸어 작은 방을 계속 임대할지 말지를 물어왔다. 강서연은 마음이 조여왔다. 그곳은 최연준과의 추억이 많이 담긴 곳이어서, 아직 최연준에 대한 화가 다 풀린 건 아니지만, 둘의 추억들이 사라지는 건 또 싫었다.집주인이 큰 소리로 물었다.“구 씨 새댁, 기면 기다 말 좀 해요! 계속 임대를 안 할 거면 다른 사람한테 세를 내놓게!”강서연은 주저 없이 말했다.“안 돼요. 저희 분명 일 년 계약했어요. 아직 만료일도 아닌데 왜 이러세요!”“그래요. 구 씨 새댁, 일 년은 안 됐죠. 그런데 월세를 내야지, 안 그래요.”강서연은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밀리지 않을게요! 있다가 바로 계좌 입금해 드릴게요! 그리고요. 저 구 씨 새댁이 아니에요!”그녀는 목소리를 한층 더 높여 집주인에게 또박또박 말했다. “저희 남편 최 씨예요!”“아... 그래요. 그래, 최 씨 새댁!”집주인 입장에서는 방세만 제때 받으면 되는 거라 새댁이 최 씨든, 구 씨든 예수님이든 아무 상관 없었다.강서연은 전화를 끊고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윤문희는 웃으며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눈썹을 꿈틀하며 강서연에게 물었다. “딸, 방금 뭐라 했어?”강서연은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나 방금 뭐라고 했지? 남편... 남편이 최 씨라고?’주먹만 한 강서연의 얼굴이 갑자기 붉어졌고, 눈꺼풀은 한참 내려앉은 채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윤문희는 자애롭게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서연아, 엄마가 가끔 내 정신이 아니긴 해도, 내가 볼 때, 너 최 서방을 좋아하는 것 같아. 많이.”“엄마...”“여자가 보통 ‘남편’ 이란 단어를 함부로 남발하지 않지.”윤문희는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이미 내뱉은 이상, 마음속 깊이 자리한 것이고, 그 위상 또한 흔들림 없을 거야. 그게, 평생을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해. 딸, 내가 볼 때 최연준은 네가 기댈 수 있는 사람 같아.”강서연은 고개를
울리는 핸드폰을 본 강서연은 약간 멍을 때리더니 통화버튼을 눌렀다. 핸드폰 너머로 부드러운 미소의 최연준이 보였다. “뭐예요?”강서연은 말없이 본인의 카메라를 꺼버렸다. 최연준은 개의치 않고 여전히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중저음에 낮게 깔린 목소리는 마성의 음성이었다.“난 지금 마당에서 산책하고 있어.”강서연이 흠칫하고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한눈에 봐도 꽤 큰 정원이 비쳤다. 어둠 속에서도 아름답게 가꿔진 정원임을 알 수 있었다. 최연준의 등 뒤 배경은 우뚝 솟은 산들과 크고 웅장한 건물이었다. 잠깐씩 분수 소리도 같이 들렸다. ‘어릴 때부터 이런 곳에서 자랐구나... 나와는 진짜 천지 차이.’강서연은 갑자기 열등감이 들었고, 창가에 앉아서 불안한지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다.한참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핸드폰도 칠흑 같은 블랙 화면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마음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아직 전화를 끊지 않고 듣고 있었기에. 핸드폰 너머로 최연준은 강서연의 호흡과 심장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그걸로도 이미 충분했다.“서연아.”최연준은 나지막이 물었다. “강주의 날씨는 어때? 별 보여?”강서연은 고개를 들어 봤고, 강주는 날이 흐려서 그런지 밤하늘이 먹먹하게 안개가 자욱해서 뭐가 보이지 않았다.“여기 하늘 봐 봐.”최연준은 핸드폰을 들어 별빛이 흘러내리듯 별들로 가득한 밤하늘을 비췄다. 바다처럼 넓고 너무 예쁜 밤하늘이었다. “밤하늘이 너무 예뻐서. 별도 많고.”하지만 강서연의 핸드폰에서는 잘 보이지 않았고 그녀는 조용히 웃음을 참았다.‘최연준, 좀 유치하네.’“거긴... 안 추워요?”강서연이 조용히 물어왔고 최연준은 어리둥절하다가 이어서 웃으며 답했다.“응. 별로. 아침저녁만 좀 쌀쌀하네.”“옷이 얇아 보이네요. 감기 안 들게 몸 잘 챙겨요.”“그래!”그는 핸드폰 화면에다 힘껏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거기 별들 영상으로는 안 보여요.”강서연은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최연준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좋은 소식?”“저 예외적으로 대학에 붙었어요!”“예외적으로?”“네! 오성대! 저 의학원에 붙었어요.”강서연은 웃으며 핸드폰을 돌려받았다.“윤찬이 정말 오성대에 붙었어?”최연준은 조금 많이 의외였다. 겨우 열여섯, 열일곱 살의 처남이 고등학교 졸업하기도 전이라서.“네, 합격 통지서를 받았어요.”강서연은 은근히 동생이 자랑스러운지 말했다. “오성대 교수님이 직접 뽑아주셨어요. 찬이가 모두 다섯 번의 시험을 치렀고 모두 좋은 성적으로 시험도 통과하고 대학도 합격했어요!”“축하해요!”자신을 닮은 어린 처남이 더 특별한 느낌이어서 최연준은 입꼬리가 올라갔다. 성적이 출중해서 어린 나이에 명문대 입학을 한다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처남이 오성으로 와서 학교 다녀야겠네. 이참에 처남을 핑계 대고 강서연과 장모님 다 오성으로 모시고 올라오는 것도...’최연준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흥분했다.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처남. 학교 첫등교하는 날에 나한테 말해요. 내가 픽업 갈게요.”강서연이 앞질러 거절했다.“아니에요! 찬이도... 이젠 다 큰 사람인데 혼자 일어서는 법을 배워야죠. 굳이 필요 없어요. 진짜! 스스로 알아서 학교로 가서 잘할 거예요.”“서연아...”강서연은 시선을 피하며 급히 전화를 끊었다. “늦었어요. 먼저 끊을게요. 일찍 쉬어요.”최연준이 인사도 하기 전에 핸드폰 통화는 끊겼고, 화면에서 그녀의 모습도 사라졌다.그는 한참 멍하니 핸드폰을 보았고, 텅 빈 것 같은 마음에 괴로웠다.“도련님.”방한서는 좋은 마음에 최연준을 위로했다. “강서연 씨 시간이 필요하니 인내심을 가져야 합니다!”“그래, 알지.”최연준의 목소리는 보기보다 차분했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좋아. 적어도 서연이가 지금 나를 무작정 피하는 건 아니라서!”방한서는 최상 가문 도련님 최연준이 이렇게 누구한테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하지만 세상만사 마음이 통해야 순리에 맞
윤문희는 창백한 얼굴로 몸을 떨었다.그녀는 두 눈이 빨갛게 된 채, 마치 귀신이라도 보듯 강명원을 매섭게 쳐다보았다.지난날 그가 그녀를 받아들인 것은 맞지만, 그는 그녀를 망치기도 했다. 그리고 강서연이 그의 친딸이라고 믿게 한 바람에 하마터면 이 딸을 버릴 뻔했다!윤문희의 머릿속에는 오랜 기억이 봇물 터지듯 밀려들었다.어두웠던 과거의 고통은 평생 다시는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상처였다...“허, 설마 아직도 그 남자를 생각해?”강명원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그 남자는 벌써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았으니, 진작에 너를 버렸어! 그 남자는 윤 씨 가문을 점령하고, 너를 이용해서 목적을 달성한 후, 너를 내팽개친 거야!”“그만 해요!”윤문희는 귀를 막고 비명을 질렀다.“이 세상에서 너에게 잘해주는 사람은 나뿐이야!”강명원의 이목구비가 거의 일그러졌다.“윤문희! 강진 그룹은 새로운 시장을 개발하려고 해, 새로운 약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말도 안 돼요!”윤문희가 악을 쓰며 소리쳤다.“생각도 하지 말아요! 그 물건은 내가 이미 망가뜨렸으니, 지금 내 손에 없어요. 강명원 씨가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윤씨 가문의 그 누구도... 손에 넣을 생각하지 말아요!”“너...”강명원이 손을 들자 강서연이 갑자기 앞을 막아 나섰다.“너랑 상관없는 일이니 비켜!”“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지만, 제발 우리 엄마를 자극하지 마세요!”강서연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여기는 우리 집이에요. 당장 나가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강서연, 너...”“아빠!”강유빈이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이 미친 여자한테 묻지 말아요, 아빠가 찾고 있는 물건은 분명히 이 방에 있을 거니 우리가 직접 뒤져요!”강명원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이 이렇게 뻔뻔스러울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강서연은 강유빈에게 달려들었다. 강명원은 강서연의 손목을 잡고 휘둘렀고, 그녀는 갑자기 균형을 잃고 벽에 그대로 부딪혔다!아픔을 참고 일어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