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문희는 창백한 얼굴로 몸을 떨었다.그녀는 두 눈이 빨갛게 된 채, 마치 귀신이라도 보듯 강명원을 매섭게 쳐다보았다.지난날 그가 그녀를 받아들인 것은 맞지만, 그는 그녀를 망치기도 했다. 그리고 강서연이 그의 친딸이라고 믿게 한 바람에 하마터면 이 딸을 버릴 뻔했다!윤문희의 머릿속에는 오랜 기억이 봇물 터지듯 밀려들었다.어두웠던 과거의 고통은 평생 다시는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상처였다...“허, 설마 아직도 그 남자를 생각해?”강명원이 코웃음 치며 말했다.“그 남자는 벌써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았으니, 진작에 너를 버렸어! 그 남자는 윤 씨 가문을 점령하고, 너를 이용해서 목적을 달성한 후, 너를 내팽개친 거야!”“그만 해요!”윤문희는 귀를 막고 비명을 질렀다.“이 세상에서 너에게 잘해주는 사람은 나뿐이야!”강명원의 이목구비가 거의 일그러졌다.“윤문희! 강진 그룹은 새로운 시장을 개발하려고 해, 새로운 약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말도 안 돼요!”윤문희가 악을 쓰며 소리쳤다.“생각도 하지 말아요! 그 물건은 내가 이미 망가뜨렸으니, 지금 내 손에 없어요. 강명원 씨가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윤씨 가문의 그 누구도... 손에 넣을 생각하지 말아요!”“너...”강명원이 손을 들자 강서연이 갑자기 앞을 막아 나섰다.“너랑 상관없는 일이니 비켜!”“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지만, 제발 우리 엄마를 자극하지 마세요!”강서연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여기는 우리 집이에요. 당장 나가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강서연, 너...”“아빠!”강유빈이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이 미친 여자한테 묻지 말아요, 아빠가 찾고 있는 물건은 분명히 이 방에 있을 거니 우리가 직접 뒤져요!”강명원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이 이렇게 뻔뻔스러울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강서연은 강유빈에게 달려들었다. 강명원은 강서연의 손목을 잡고 휘둘렀고, 그녀는 갑자기 균형을 잃고 벽에 그대로 부딪혔다!아픔을 참고 일어
“허, 강명원 씨, 감히 나랑 해보자는 거예요?”그는 가볍게 입꼬리를 올렸다.“오늘 강유빈과 당신이 여기서 죽었다고 해도 이 도시에서 실종 인구가 2명 늘 뿐 나는 살인범이 되지 않을 거예요.”“너...”“다른 사람을 괴롭힐 때 그 뒤에 누가 있는지부터 생각해봤어야죠!”최연준의 드센 기세에 강명원은 연신 뒷걸음질 쳤다.더는 지탱할 수 없었던 강유빈은 손발을 마구 허우적댔다.“강명원 씨.”최연준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앞으로 계속 나랑 해볼 건지, 아니면 생각도 없는 딸과 함께 꺼질 건지 잘 생각해봐요.”강명원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 딸을 내려놔... 우리가 갈게.”“간다고요?”최연준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강 회장님은 사람 말귀도 못 알아들어요? 나는 꺼지라고 했는데요!”그가 손을 풀자 강유빈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기어가다시피 밖으로 도망쳤다.강명원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모욕만 당했다. 문을 나설 때 손발이 말을 듣지 않아 개처럼 기어나갔다.집안이 드디어 조용해지자 강서연은 황급히 엄마를 위로하려 엄마의 어깨를 감싸고 자신에게 기대도록 했다.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윤문희의 창백한 얼굴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엄마...”강서연은 약을 가져와, 황급히 엄마의 입에 넣었다.“박스는?”윤문희는 긴장하며 물었다.“서연아... 서연아! 그 박스, 박스가 어디 있어!”“엄마, 걱정하지 마세요.”강서연은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박스는 저한테 있어요. 제가 잘 간직하고 있어요!”“잃어버리지 말아!”“안 잃어버려요, 엄마.”“서연아, 이건 엄마가 남겨주는 거야, 그리고 찬이도....”진정제를 먹은 윤문희는 차츰 조용해졌고, 의식이 점점 흐릿해지더니 천천히 눈을 감았다.그녀는 고마움에 그를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고마워요.”“우리 사이에 고맙다는 말이 필요해?”최연준이 한숨을 내쉬더니 눈살을 찌푸렸다.“강명원이 왜 왔어?”“나도 몰라요.”강서연
“무슨 일인데요?”강서연은 어리둥절했다.최연준은 가볍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당장 구현수와의 혼인 관계를 청산해야 해.”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걱정하지 마. 방법이 있으니깐. 또 한 가지...”그가 웃었다.“강서연 씨가 오성의 서교 땅 프로젝트를 인수해 이 땅이 더 높은 상업적 가치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해줘!”“네?”강서연은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전 아무것도 몰라요!”“타고난 사람은 없어.”최연준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처음부터 배우면 빨리 성장할 거야.”“하지만...”“서연아.”그가 진지하게 말했다.“넌 할 수 있어.”강서연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깔았다.이런 느낌은 이상했다. 열등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가 하사하는 선물처럼 느껴졌다.하지만 예전에 그가 최연준이 아니었을 때,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들을 그녀에게 꺼내주고, 월급카드도 그녀에게 줬으며, 커피숍도 그녀에게 주었지만... 그녀는 전혀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묵묵히 그의 손바닥에서 손을 빼내는 강서연의 얼굴에 어둠이 스쳤다.“서연아, 다른 뜻은 없어...”최연준은 그녀의 안색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무언가를 설명하려는데 그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강서연은 그를 힐끗 보고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윤문희를 보살폈다.최연준이 전화를 받자 전화기 너머로 육경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얘기하신 사람을 다 데려왔는데 지금 나한테 있어요.”“알았어요, 고마워요.”최연준이 조용히 말했다.“그런데 이 사람들이 다 최연준 씨와 트러블이 있는 거예요?”육경섭이 씩 웃으며 물었다.“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고 싶어요? 얘기만 해봐요, 여기 10대 고문 같은 것이 잘 갖춰져 있는데, 대신 먼저 쓸까요?”“그럴 필요 없어요.”최연준이 전화를 끊었다.육경섭을 찾아가기 전에 그는 먼저 오피스텔로 가서 캐비닛에 있는 가족관계 증명서를 꺼냈다. 그가 가볍게 웃으며 손에 들고 막 떠나려 할 때, 옆에 있는 꽃 배나무 무늬의 작은 박스를 힐끗
육경섭은 그를 흘겨보며 가볍게 피식 웃더니 작은 방으로 데리고 갔다.사람들은 문 앞에 불빛이 비치는 것을 보자 저마다 문 쪽으로 달려갔다.“뭐 하는 거야!”육경섭이 호통쳤다.“형님 살려주세요... 전엔 어디서 뵌 적이 있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형님께 미움을 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얘기 좀 해 주시겠어요?”“형님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최연준이 앞으로 나아가 가족관계 증명서를 그들 앞에 내놓았다.“이건...”“이 증명서에 나와 있는 두 사람은 혼인 관계를 청산해야 해.”최연준은 그들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하지만 남자가 없으니, 나에게 가장 빠른 해결책을 줘야겠어!”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던 두 사람의 머리 위쪽으로 한 줄기 빛이 비쳐 가족관계 증명서의 내용을 엿볼 수 있었다.“구현수?”누군가 알아보고 떨리는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이분은... 강 씨네 그 사위예요...”“아는 사람이야?”최연준은 눈썹을 찡그렸다.“아니요, 몰라요...”그 사람은 식은땀을 흘리며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허둥대며 사실을 털어놓았다.“그런데 1년 전 강 회장님이 사람을 보내 딸이 혼인신고를 하겠다고 하면서 좀 봐 달라고 했어요...”최연준은 눈살을 찌푸리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아무렇지도 않게 집어넣었다.“어떻게 봐주는 건데?”“양쪽 모두 현장에 나오지 않고 주민등록 번호로 입력하는 거예요...”“이 자식이, 말을 한 번에 다 할 수 없어?!”육경섭은 책상을 내리쳤다.그 사람은 눈을 질끈 감고 간이 콩알만 해져 나머지 얘기를 다 했다.“저, 저, 저. 제가 그분들에게 등록해 줬어요! 하지만 인터넷으로 조회해보니 구현수의 주민등록증이 오래전에 말소됐더라고요. 실종자예요! 실종자가 어떻게 결혼할 수 있어요? 그리고 또, 두 사람이 함께 오지 않으면 등록할 수 없게 돼 있어요. 그래서 가짜 가족관계 증명서 두 장을 만들었어요...”“뭐라고?”육경섭은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이 가족
강서연은 줄곧 침대 옆에서 윤문희를 보살폈다. 하지만 윤문희의 상태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강명원과 강유빈이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간 바람에 그전에 했던 치료가 물거품이 돼버리고 말았다.강서연은 넋이 나간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지만, 그녀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다.신석훈이 전에 윤문희를 치료했던 주치의와 정신과 전문의에게 문의한 결과 다들 환경을 한번 바꿔보라고 했다.“서연 씨, 환경 좀 바꾸면 아주머니의 병세가 호전되는 데 도움이 될 거예요.”신석훈이 계속하여 말했다.“제가 아주머니의 증상과 비슷한 여러 케이스를 연구해봤는데 환경이 바뀌니까 다들 회복되더라고요. 회복되는 정도는 다르긴 하지만. 아주머니는 강주에서 안 좋은 일을 겪었잖아요. 그럼 계속 이곳에서 지내게 하지 말고 환경을 바꾸거나 생활 방식을 바꾸면 아주머니한테 도움이 될 거예요.”한숨을 내쉬던 강서연은 최연준이 그날 했던 말이 떠올랐다.‘정말 함께 오성으로 가야 하나?’“서연아...”윤문희가 두 눈을 떴다. 허약한 몸을 이끌고 일어나 앉으려 애를 썼다. 강서연은 재빨리 그녀를 부축하고는 등받이를 가져다주었다.“엄마, 좀 어때요?”“가슴이 답답해.”윤문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 더 이상 여기 있고 싶지 않아. 이곳에만 있으면 강명원이 나한테 했던 짓들이 자꾸만 떠올라...”그녀의 손을 잡은 강서연은 코끝이 찡해져 하마터면 눈물을 쏟을 뻔했다.만약 구현수에게 협박당하지 않았더라면 이 기분을 절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번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그녀는 윤문희의 기분이 어떨지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그 일이 지난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그녀는 여전히 트라우마 때문에 커피숍에 가지 못했다. 마당에 들어설 때마다 구현수에게 몹쓸 짓을 당할 뻔했던 그날이 떠올랐다.“엄마.”그녀가 잠깐 멈칫하더니 떠보듯이 물었다.“우리가 다른 도시로 가서 사는 건 어떨 것 같아요?”“다른 도시?”윤문희가 화들짝 놀랐다.“찬이가 다니는 대학교
강서연은 마음이 복잡해져 잡고 있던 이불을 더 꽉 쥐었다.그동안 그녀는 최연준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하다가 리조트 밖에서 만났던 점쟁이 할머니의 말을 떠올렸다.가까이 있을 땐 남편이고 멀리 있을 땐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었다. 그녀는 갑자기 울컥한 마음이 들어 눈가가 촉촉해졌다. 점쟁이 할머니가 두 사람이 언젠가는 헤어질 것이라고 했었다...그녀는 최연준을 힐끗 보았다. 희미한 불빛 사이로 그의 손목에 낀 빨간 팔찌가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그런 소리를 왜 믿냐고 했었다. 사실 그도 그런 걸 쉽게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빨간 팔찌까지 낀 건 그녀를 잃는 게 두려워서였다.강서연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사실 그녀도 그를 잃을까 봐 두려운 건 마찬가지였다.만약 운명이 그들을 갈라놓으려고 한다면 헤어지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내밀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연준 씨.”최연준은 가슴이 움찔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귀는 쫑긋했지만, 감히 돌아보지 못하고 계속 딱딱하게 앉아있었다.“며칠 뒤에... 아마 오성으로 갈 거예요.”“뭐?”강서연이 가볍게 웃었다.“귀가 잘 안 들려요?”최연준은 꿈꾸는 건 아닌지 확인하려고 볼을 꼬집었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바라보았다.“정말이야?”“네.”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찬이도 대학교에 가야 하고 엄마도 다른 곳에서 지내고 싶대요. 그래서 오성에 가려고요.”최연준은 모든 걸 그에게 맡기라고 얘기할 참이었다. 그런데 강서연이 그의 마음을 알아챈 듯 먼저 말을 가로챘다.“이 일은 연준 씨가 신경 쓰지 말아요. 지낼 집도 알아놓았고 이력서도 몇 군데 넣었어요. 저한테 면접 보러 오라고 회사에서 연락이 올 거예요.”“서연아...”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우린 오성에 그냥 생활하러 갈 뿐이에요.”최연준은 그녀의 뜻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엄마와 함께 환경을 바꿀 생각이었는데 마침 윤찬이 오성대에 붙었다. 그녀가 최연준 때문에 오
날짜가 1년 전으로 바뀌어있었다.“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다면서요?”강서연이 다정하게 말했다.“작년 이날에 우리가 결혼했어요.”그날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이었다. 강서연이 폭풍우를 뚫고 흙투성이인 흰색 드레스를 입은 채 마을의 작은 집으로 들어왔다.마을의 어르신들은 이런 날씨에 결혼하면 행복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두 사람은 누구보다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최연준은 천천히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흐릿한 달빛이 이불 밖에 내민 그녀의 부드러운 손을 환하게 비췄다.최연준이 손을 잡자 강서연이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남자의 힘을 당해낼 수 없어 발버둥 치다가 결국 그냥 잡게 내버려 두었다. 그의 손바닥이 어찌나 따뜻하고 두꺼운지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중저음 목소리가 들려왔다.“1년 전으로 돌아갔으니 다시 서로를 알아가는 게 좋겠어. 난 최연준이라고 해. 집에 돈이 많긴 하지만 그리 대단한 사람은 아니야. 난 그저 내 와이프가 주는 용돈을 받아 쓰면서 와이프 옆에 평생 있고 싶어.”“여보.”최연준이 사랑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난 나가서 일하고 싶지 않아. 오성에 오면 당신이 날 먹여 살리면 안 돼?”강서연은 아무 말이 없었다. 마음이 먹먹해지면서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그래요, 내가 평생 먹여 살릴게요. 당신이 돈을 벌지 못해도 내가 벌게요.’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수도 없이 이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볼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강서연을 배웅하러 나온 임우정은 아쉬움에 강서연의 손을 놓지 못했다.두 사람은 학교 때부터 함께한 사이라 친자매보다도 더 가까웠다. 강서연이 떠난다고 하니 임우정은 가슴이 먹먹했고 공항에 도착해서도 눈시울이 여전히 붉었다.“거기 가서도 몸 잘 챙겨!”임우정이 그녀의 손을 잡고 귓가에 속삭였다.“도움이 필요하면 연준 씨한테 얘기해. 어쨌거나 1년이나 함께 산 부부잖아. 그리고 연준 씨도 널 엄청나게
강서연은 오성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회사에서 면접 연락을 받았다.면접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그녀는 새 회사에 출근하게 되었다. 퇴근 후에는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챙겼고 주말에는 윤찬을 보러 학교에 가면서 필요한 생필품도 가져다주곤 했다.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 다시 단순하고 조용하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최연준은 묵묵히 그녀 옆을 지키기만 할 뿐 그녀의 생활은 방해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 집에 자주 가서 집안일을 도와주곤 했다.솔직히 말해서 도와줬다고 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한 집안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 강서연이 다시 한번 해야 했기 때문이다.그녀가 기분이 좋으면 뭐라 하지 않았지만, 업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야근하거나 혹은 생리할 때면... 아무리 다정하던 그녀도 까칠해졌다.강서연이 그에게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를 때마다 윤문희가 나서서 말렸다.“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우리 최 서방한테 말을 좀 예쁘게 하면 안 돼?”“소리 지를 시간에 네가 직접 하면 되잖아. 왜 우리 최 서방한테 그리 무섭게 굴어?”혹은 또 이런 말로 그의 편을 들었다.“우리 최 서방이 아무리 널 좋아한다고 해도 함부로 해서는 안 돼! 계속 이렇게 최 서방한테 소리를 지르면 엄마 화낸다?”강서연은 이런 상황이 어이없기만 했다.‘대체 엄마는 누구 친엄마야?’그리고 최연준이 장모님이라고 어찌나 친근하게 부르는지, 두 모녀보다도 더 가까워 보였다.강서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피식 웃었다....그녀가 출근하는 회사는 한 신문사였다. 출근 첫날 상사가 그녀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젊은 사람은 자신을 많이 단련해야 해요. 힘든 일을 잘 참고 견디고 남을 위해 헌신하는 정신이 있어야 해요.”다들 사실 상사의 얘기를 귓등으로 들었지만 강서연만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열심히 일에 몰두했다.그 결과 동료들이 그녀를 만만하게 여기면서 일이 점점 쌓여만 갔다. 기사 원고를 써야 할 뿐만 아니라 편집, 그리고 사무실의 잡다한 일까지 전부 그녀의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