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군형은 완전히 술이 깼다.그는 반응할 틈도 없이 육경섭에게 끌려갔고 이어서 경섭 삼촌의 거친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그가 어떻게 이 빨래판을 제대로 사용했는지, 어떻게 우정 이모를 달래서 화를 내지 않게 했는지 등등 이야기했다.듣고 있는 동안 최군형의 손에는 또 술잔이 하나 더 생겼다.결국 그 자신도 얼마나 마셨는지 모를 정도로 술에 취해 있었고 혼미한 상태에서 부드러운 작은 손이 그의 팔을 끼며 누군가가 속삭였다.“이렇게 많이 마셔서 어떡하지?”“그냥 군형을 집에 두면 되지. 남도 아닌데 뭐.”“어느 방에서 재울까?”...최군형가 깨어났을 때는 예쁜 공주 방에 누워있었다.익숙한 향기가 공기 중에 떠돌았다. 그는 즉시 이곳이 강소아의 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머릿속에 한 가지 망상이 스쳤다.어제 그는 술을 마셨고 취한 상태였다.게다가 강소아가 그를 부축해 왔던 것 같았다.그래서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최군형은 절로 웃음이 나와 입꼬리를 올렸다. 무심코 옆자리를 더듬었으나, 누군가의 남아있는 체온은 없었다.그는 이불을 들춰보고 옷이 멀쩡한 것을 확인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그저 그의 망상일 뿐이었다.최군형은 한숨을 내쉬었다.알코올의 작용이 아직 남아있어 관자놀이가 은은하게 아팠다.하지만 베개에 남아 있는 그 향기는 그를 자꾸만 마음이 흔들리게 했다.그는 얼굴을 베개에 묻고 냄새를 맡고 이불에도 얼굴을 파묻은 채 두어 번 뒹굴며 만족스러운 낮은 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그는 이렇게 만족해도 되는가 싶어졌다. 아니다, 당연히 안 된다. 나쁜 생각을 하던 중 강소아가 해장국과 아침밥을 들고 들어와 침대 머리맡에 조심스럽게 놓았다.최군형은 급히 누워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강소아는 약간 걱정스러운 듯 그의 이마를 만졌다. 부드러운 손이 그의 이마에서 뺨을 따라 내려왔다. 최군형의 온몸에 불이 붙은 듯, 그녀의 손끝이 닿는 곳마다 뜨거운 열기가 일었다.비록 그 열기는 목에서 멈췄지만 최군형의 일부분은 큰 변화를 겪
“그런 건 아니지만...”강소아는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내가 막 이 집에 돌아왔는데 부모님과 함께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결혼하게 된다면, 비록 그들이 말하지는 않겠지만 마음속으로는 아쉬워할 거야.”“그리고 강주에 계신 엄마도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으셔서 좀 더 돌보고 싶어서 그래.”최군형은 그녀의 작은 머리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그래, 아무리 급해도 그녀의 효심을 먼저 배려해야지.“알겠어.”그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서두를 필요는 없어. 어차피 네가 유학 가면 나도 같이 갈 테니까.”강소아는 기쁜 웃음을 지으며 그의 얼굴에 뽀뽀했다.최군형은 순간 멍해졌다.순수한 강소아는 남자의 눈빛이 달라진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른 쪽 볼에도 뽀뽀하려다가 그의 손목에 붙잡혀 침대에 눕혀졌다.“아!”강소아는 놀라서 소리쳤다.두 사람의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그녀는 그의 점점 뜨거워지는 숨결과 체온, 그리고 다른 무언가를 분명히 느꼈다.강소아는 즉시 얼굴이 새빨개져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지 않았다.“왜 그래?”최군형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나랑 결혼하기 싫으면 보상이라도 받아야지 않겠어?”“당신... 뭘 하려고?”“내가...”그는 그녀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아침 운동을 하고 싶어...”“최군형!”강소아은 힘껏 밀어냈지만 최군형은 더 꽉 안아주고 깊은 키스로 그녀의 입술을 잡아먹었다. 그녀는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최군형이 그녀를 기진맥진하게 키스한 후, 강소아는 최군형의 품에 안겨 가볍게 숨을 헐떡였다. 그는 마침내 그녀를 놓아주었다.최군형은 그녀를 차지하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억제했다.그 순간은 신성하고 아름다우며 당연히 신혼 첫날밤에 남겨둬야 했다.최군형은 기다릴 수 있고 기다리겠다고 다짐했다.“소아...”“응?”소아의 얼굴은 잘 익은 복숭아 같았다.“사랑해.”강소아는 어리둥절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그녀는 최군형의 눈동자 속에 오로지 자신
“소아가 군형과 약혼하려고 하잖아요.”소정애이 웃으며 말했다.“오래된 집과 슈퍼마켓, 모두 소아에게 혼수로 주려고 해요.”“정애 언니...”“알아요, 당신네 집에서 준비한 혼수품과는 비교도 안 될 거예요.”소정애가 부드럽게 말했다.“하지만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이에요. 소아는 제가 귀하게 키운 아이예요. 이제 그녀가 결혼하려고 하니 당연히 가장 좋은 걸 줘야죠.”임우정은 마음이 떨렸고 소정애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이게 바로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인가...*최군형와 강소아의 약혼식은 오성 전체를 들썩이게 했다.그날 약혼식 현장에 온 사람들은 모두 부유하거나 귀한 사람들이었다. 손님들은 화려하게 차려입고 이리저리 다니며 술잔을 부딪쳤다. 주인공인 두 사람은 마치 비경 속의 인물처럼 기품이 넘쳐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했다.최군형은 약혼식의 모든 세부 사항에 만족했다. 단 하나만 빼고...바로 최군성의 수다였다!최군성과 육연우은 최군형과 강소아 곁에서 결혼식의 들러리 역할을 했다. 원래 그들은 술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야 했지만 최군성에게는 이 자리가 대형 연예 가십 현장이 되어버렸다.“형, 들었는데 청혼하러 갔던 날 경섭 삼촌한테 술 먹고 완전히 취했다면서?”“형, 괜찮아? 어릴 때부터 술 잘 마신다고 하지 않았어? 설마 그동안 마신 게 다 가짜 술이었어?”“형, 들었는데 마지막에 소아 방에서 잤다며? 그러면 둘이 같이 잔 거야?”“형...”“최군성!”최군형는 너무 큰 소리로 말할 수 없어서 낮은 목소리로 단어마다 이를 악물고 말했다.“너 한마디만 더 하면 여기서 쫓아낼 거야!”최군성은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육연우은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손수건을 꺼내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가볍게 닦아주었다.약혼식에 온 사람들은 고위 관료나 최고급 연예인들이었다.다른 연예인들은 자원을 찾으러 온 반면 유환은 구석에 앉아 아무 일도 상관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재크를 초조하게 만들었다.“베이비, 환아! 인사라도 좀 해, 응
앨린은 문성원의 질문에 어리둥절했다.“어, 지금 세무 조사가... 변호사의 책임이 된 건가요?”문성원의 표정은 더욱 엄숙해졌다.“세무 조사는 모두의 책임이에요.”앨린은 몸을 곧게 펴고 대변호사 특유의 위엄에 압도되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유환은 참지 못하고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앨린에게 눈짓을 보냈다. 앨린은 가볍게 기침하고 말했다.“어, 문 변호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항상 법을 지키는 연예인이에요.”“정말인가요.”문성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아직 미혼이죠? 열애 중인 여자 친구는 없나요? 혹시나 연애 스캔들이 터져서 우리 유환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걱정이네요.”“문성원 변호사님, 그게...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앨린은 웃음을 지으며 땀을 흘렸다.문성원의 목소리는 더욱 엄격해졌다.“조심하라는 거예요.”그는 목을 가다듬고 유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며 자기 몸으로 그녀를 가로막았다.그의 얼굴에는 낯선 사람이 다가오지 말라는 표정이 가득했다.유환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까이에서 문성원의 신선한 애프터쉐이브 향이 느껴졌고 그가 다림질된 정장과 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만약 아침마다 문성원에게 정장을 입혀주고 서류 가방을 건네주며 그를 배웅할 수 있다면...그녀는 자연스럽게 웃음을 지었고 문성원의 모습과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문성원 변호사님,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앨린이 웃으며 말했다.“저는...”“제가 유환 씨의 개인 변호사라는 거예요.”문성원은 특히 개인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다.“만약 네가 어떤 불법적이거나 도덕적으로 타락한 일을 한다면 유환 씨와 멀리 떨어져 있기를 바라요.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널 법정에 세워서 철창 속에 가두겠어요.”“어, 저는...”앨린이 아무리 둔감하더라도 현재 상황을 이해하고 울상 같은 웃음을 지으며 발밑에 기름칠하듯 빠져나가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문성원은 그가 떠나는 방향을 지켜보며 여전히 정직한 모습으로 서 있
“무슨 상황이지? 아예 말을 안 하네?”“유환씨,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뒤에 따라온 앨린의 매니저가 말했다.“우리 앨린이 일부러 당신을 무시한 게 아닙니다.”유환은 순간 얼어붙었다.“그럼 그게 무슨 뜻이죠?”물론 대면할 용기가 없었던 거죠. 매니저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일이 있어서... 작업실에서 세금포탈 여부를 확인하러 갔어요.”유환은 잠시 멍해지며 제자리에 굳어버릴 뻔했다.“이렇게 지켜주고도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나요?”갑자기 뒤에서 강소아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유환은 급히 뒤를 돌았다.강소아는 또 다른 중식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붉은색 바탕의 치파오, 정교한 재단과 고급 자수로 그녀를 고귀하고 우아하게 보이게 했다.강소아가 걸어가면서 유환이 파손된 케이크를 보자 웃음을 터뜨렸다.“당신들 이런 생각은 외부인들도 다 알 수 있는데 왜 둘만 숨기려고 해요?”“그런 거 아니에요...”유환은 얼굴이 붉어졌다.“문성원이 그런 생각 없어요...”“문성원이 당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요?”강소아는 무심하게 말했다.“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앨린에게 그렇게 적대감을 느끼겠어요? 그 둘은 서로 잘 알지도 않는데요.”유환은 머리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그녀도 걱정이 있었다. 연예계라는 곳은 아무리 쉽게 연애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니까.만약 그녀와 문성원의 관계가 드러난다면 문성원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줄 것이다. 두 사람이 확고히 함께 하기로 해도 팬들과 기자들이 그들을 놓아주겠는가?일반 사람들은 손을 잡고 햇볕 아래에서 아무 걱정 없이 걸을 수 있지만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까?그녀의 연애는 모든 세부 사항이 확대되고 모든 사람이 검토하며 수없이 이별과 재결합을 반복하게 된다.문성원의 성격이 아무리 좋더라도 아마 이런 것들에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조용한 생활이지, 매일 조명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다.유환은 깊게 숨을 쉬고 입꼬리를 비틀어 무력한 웃음을 지었다.“괜찮아요.”그녀
1년 후, 강소아는 학업을 마치고 오성으로 돌아와 인생의 새로운 단계를 시작했다. 이 1년 동안 큰 일은 없었지만 좋은 일들만 일어났다. 소정애의 병세는 안정되어 집에서 조용히 회복 중이었다. 정해진 약을 먹고 좋은 감정을 유지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강우재는 매일 아내를 돌보며 꽃을 기르고 집안을 정리하며 바쁘게 지냈다. 그러나 그는 그 일들을 즐기며 인생의 풍파를 겪고 나니 함께 지내는 사람이 여전히 그 사람이라는 것은 세월의 축복으로 여겼다. 그는 늘 강소아에게 젊은 시절의 부부가 나이 들어서 함께하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모두 이해하고 소중히 여긴다고 말했다.강소준은 오성대에 순조롭게 진학하였고 성적이 우수하고 성격도 밝아 많은 여학생이 그를 추구하게 되었다.그러나 그는 연애보다는 학업에 집중하기로 했다.임우정의 정신 상태도 점점 좋아졌다. 가끔 수면제는 필요하지만 항우울제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최근 강서연이 그녀를 봤을 때 그녀는 얼굴에 건강한 홍조를 띠고 있었고 살이 많이 쪘다는 말을 들었다. “서연아, 예전에 너가 데려다준 이 드레스의 지퍼가 올라가지 않아... 에이구, 이제 허리가 두 배로 늘어서 아무 이미지도 없어."강서연은 웃으며 말했다.“살이 찌는 건 복이 있다는 거예요. 이제 딸이 있으니 모든 게 다 좋죠, 조금 뚱뚱해도 괜찮아요.”딸에 대한 이야기하면 임우정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하다.육경섭과 최연준은 자주 골프를 치거나 말을 타거나 펜싱을 하지만 운동은 5분이고 휴식 시간은 2시간이었다.요즘은 온천에 가거나 체스, 낚시 등 큰 움직임이 필요 없는 활동을 더 선호한다.최연준은 가끔 세월이 자신을 간과한다고 느끼며 젊었을 때는 용감한 권투 소년이었고 육경섭도 사회에서 대인물이었지만 지금은 낚싯대 하나 들고 연못가에서 하루 종일 앉아 있으며 집에 돌아오면 아내에게 혼나기도 한다고 했다. 그러나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모이면 안돈을 모으는 방법에 대해 논의
최군성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듯이 말했다.김중 그룹과 호일 그룹은 조상 대대로 인연이 깊었는데, 지난 세기 초 두 가문이 함께 맨체스터에 와서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전쟁 중 호일 그룹의 선조가 김중 그룹의 선조를 대신해 총알을 맞고 목숨을 구해주었다.훗날 김중 그룹의 선조가 성공을 이루자, 그는 호일 그룹의 선조도 성공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도왔다.그래서 이 우정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그것만 있는 게 아니야.” 최군성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할머니 집안의 친척들도 호일 그룹과 혼인을 맺어 강력한 연합을 이루었지. 맨체스터의 벤처 캐피탈 업계에서는 정말 무적이었어!”그는 두 팔을 벌려 천하를 휩쓰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며 말했다. 강소아는 웃음을 터트렸지만, 최군형은 여전히 차분하고 냉정한 얼굴로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아, 소유야!” 최군성이 다시 농담을 던졌다. “이번에 할머니와 함께 온 김중 그룹의 남성분들이 많은데, 모두 훤칠하고 지능과 외모도 뛰어나. 너도 한번...”“아야!”말을 마치기도 전에 머리에 또 한 대 맞았다.최군형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먹어 치울 듯한 표정을 했다. “음... 아무튼 할 말은 전했어!” 최군성은 머리를 만지며 도망치듯 밖으로 나갔다. “할머니 모레 오성에 도착한대요! 군형 씨, 당신이 모셔요!”*김자옥의 환영 연회는 명황 호텔에서 열렸다.그녀가 오성에 온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졌고, 많은 부유한 사업가와 정치인들이 연회 입장권을 얻기 위해 수소문을 했다.그러나 최연준은 일찌감치 4대 가문과 육자 그룹 외에는 아무도 초대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김자옥은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당당한 기세를 보였다. 김자옥이 대강당에 들어서자 사람들은 은근한 압박감을 느꼈다.“어머님!”강서연은 기쁘게 다가가 친근하게 김자옥을 불렀다. 김자옥은 그녀를 큰 포옹으로 맞이했다. 두 사람은 친모녀처럼 손을 잡고
강소아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디디며, 김자옥이 데려온 가문의 자제분들을 한 분씩 소개받을 때마다 잊지 않으려 애썼다. “그들 중 몇몇은 김중 그룹의 먼 친척이지만,” 김자옥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상당히 유능한 사람들이야!”“나는 사람을 쓸 때 다른 걸 보지 않아. 출신도 묻지 않고, 인품이 좋고 성실하기만 하면 돕고 싶어져!”강소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김자옥에게 미소 지었다.김중 그룹의 아이들은 남녀 할 것 없이 젊은이들끼리 모이면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최군형과 최군성과 친숙했기에, 강소아도 곧 그들 사이에 녹아들었다.모두가 즐겁게 이야기하는 동안, 한 소녀가 대강당으로 들어왔다.잠시 분위기가 멈췄고, 소녀는 먼저 김자옥에게 달려가 큰 포옹을 하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연신 사과하며 말을 이어갔다. “할머니, 죄송해요! 제가 오성에 처음 와서 구경하고 싶어서 호텔에서 몰래 빠져나갔거든요... 그래서 길을 잃고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렸어요!”“늦게 와서 정말 죄송해요!” 소녀는 모두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제가 사과하는 마음으로 조금 후에 자진해서 술 세 잔을 마시도록 하겠습니다!”강소아는 소녀를 유심히 바라보았다.소녀는 당당한 아름다움과 독특한 패션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긴 머리를 높게 묶은 포니테일로 하고, 연회에 참석할 때조차 드레스를 입지 않고 타이트한 짧은 청치마와 롱부츠를 착용해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띄었다.김자옥은 미소를 지으며 말없이 그녀를 강소아에게 데려왔다.“이 아이는 호세연, 호일 그룹의 딸이야.” 김자옥이 호세연을 보며 말했다. “너희 둘은 나이가 비슷하니까... 아마도 통하는 게 많을 거야.”말을 마친 김자옥은 강서연과 최연준의 안내를 받아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러 갔다.어른들이 떠나자, 젊은이들은 한층 편안해졌고, 음악을 들으며 웃고 떠들어 분위기가 더욱 활기차졌다. 호세연은 자진해서 술 세 잔을 마신 후, 곧바로 최군형과 최군성을 발견하고 반갑게 손을 흔
최군형은 다가가 동생의 뒤통수를 가볍게 튕겼다. 손끝에서 딱 소리가 났다.“아야!”최군성은 고통스러워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눈과 손은 여전히 휴대전화 화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형, 너무한 거 아니야? 이렇게 때려서 내 머리가 망가지면 나중에 형이 내 인생 책임질 거야?”“나중에 배씨 가문이 널 책임질 거야. 난 그럴 능력 없어.”“뭐라고?”그때 최군성의 표정이 바뀌더니 갑자기 낮게 소리치며 소파를 주먹으로 쳤다.게임 클리어를 바로 앞두고 실패한 것이었다.“게임만 하지 말고.”최군형은 동생 옆에 앉으며 진지하게 말을 꺼냈다.“오늘 내내 배윤아랑 같이 다니면서 어떻게 됐어? 내 딸을 이렇게 피곤하게 해놓고 아무 성과도 없었다고 하면 안 된다?”“그게...”최군성은 머뭇거리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2년 전까지만 해도 최군성은 과거의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신하고 있었다. 마음은 완전히 정리됐고 새로운 감정을 받아들일 용기도 생겼다. 그런데 문제는, 배윤아가 여전히 자신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지금 두 사람은 함께 일하며 훌륭한 파트너로서 호흡을 맞췄지만 그림을 제외한 사적인 대화는 거의 나누지 않았다.“군성아? 대답 좀 해!”최군형은 미간을 찡그리고 동생의 얼굴 앞에서 손을 흔들며 말했다.“내가 물어보잖아, 또 딴생각해?”최군성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급히 화제를 돌렸다.“아, 맞다! 형, 오늘 놀이공원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났어.”“뭐?”최군성은 놀이공장에서 만났던 중년 남자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했다.“그 사람이 가원이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관심을 보이더라고. 형, 요즘 가원이를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아. 혹시 이상한 사람이면 어떡해!”최군형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최가원이 태어난 이후, 최군형과 강소아는 딸을 철저히 보호하며 키웠다.다른 가정에서는 아이를 재산처럼 여겨 어린 나이에 각종 방송이나 행사에 데리고 나가기도 했다. 심지어 몇몇
최가원은 겁먹은 듯 남자를 올려다보았다.작은 머릿속이 순식간에 수많은 질문으로 가득 찼다. 엄마가 항상 예의를 지키라고 했으니, 이분을 ‘아저씨'라고 불러야 할까?하지만 나이가 삼촌보다 훨씬 많아 보이는데... 그러면 ‘할아버지’라고 해야 하나?내가 먹던 아이스크림이 이 남자의 외투에 잔뜩 묻었는데, 먼저 사과를 해야 하는 걸까?이건 내가 좋아하는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이고 아직 몇 입 먹지도 못했는데...“꼬마야.”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마치 첼로 소리처럼 깊었다.“네가 최가원이지?”최가원은 깜짝 놀라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남자는 신비로운 미소를 띠며 자신의 외투에 묻은 아이스크림 자국을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그때, 뒤에서 다급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원아! 괜찮아?”최군성과 배윤아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두 사람은 가원이가 다치지 않았는지 확인한 뒤, 남자의 검은 외투에 묻은 하얀 아이스크림을 발견했다.“정말 죄송합니다!”최군성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옷을 더럽혔네요. 혹시 연락처를 남겨 주시면 제가 새 옷을 사서 보내드리겠습니다.”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깊은 눈빛은 무언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했다.최군성은 남자를 자세히 살폈다.비록 중년이지만 여전히 강인한 체격과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세월의 흔적이 있었지만 그만큼 중후한 매력이 풍겨 나왔다.최군성은 만화가로서 젊고 화려한 미소년들만 그려왔고 이런 중년 멋쟁이 스타일은 늘 시도하고 싶었었다. 하지만 늘 도전하지 못했었다.이 멋진 중년 남자는 계속해서 최가원만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아까 물었던 질문, 내가 맞췄지?”최가원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속으로 생각했다.삼촌도 이 남자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그런데 이 이상한 아저씨는 가원이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엄마는 낯선 사람에게 함부로 말하지 말고 항상 조심하라고 했다.최가원은 턱을 당당히 들어 올리고 힘 있는 목소리로 단
결정적인 순간에 배윤아가 나서서 둘 사이를 중재했다.“뭐 어때? 가원이가 그렇게 타고 싶다잖아. 그냥 타게 하자!”배윤아는 웃으며 가방에서 미리 준비해 온 작은 바지를 꺼냈다.“이것 봐, 역시 소아는 다 알고 있었어. 자기 딸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나한테 바지를 챙겨가라고 한 거였어!”최가원은 기뻐하며 환하게 웃었다. 최가원은 배윤아와 함께 여자 화장실로 향했고 잠시 후 당당하고 씩씩한 모습으로 뛰어나왔다. 즐겁게 말을 타며 음악에 맞춰 손을 흔들고 흥겨운 몸짓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삼촌! 나중에는 진짜 말을 타보고 싶어요!”“그래, 그래!”최군성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다른 집 공주님들은 다 얌전하고 우아하던데, 넌 정말...”“저 공주라고 부르는 거 싫어요! 앞으로는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그럼, 뭐라고 불러줄까?”“음... 여자 전사로 불러주세요!”최군성과 배윤아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한참을 웃었다.이 성격으로 보아 정말 친할머니를 쏙 빼닮았다.보아하니 가원이는 앞으로도 여리고 약한 소녀보다는 할머니처럼 강렬한 존재감을 가진 멋진 여성이 될 것 같았다.회전목마를 다 타고 난 뒤, 최가원은 큰 아이스크림콘을 사서 맛있게 먹고 있었다.최군성과 배윤아는 최가원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세 사람은 놀이공원 속 조용한 숲길을 따라 산책하며 햇볕을 만끽하고 있었다.“여기 정말 예쁘다!”배윤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작은 자갈이 깔린 길은 운치가 있었고 작은 숲에는 오동나무와 은행나무가 가득했다. 가을이 되면 황금빛으로 물드는 곳이었다.“그러게. 좋은 곳이긴 한데 운영이 예전 같지는 않네.”최군성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시설이 낡고 첨단 기술도 없는 걸 보면 오래 유지되긴 힘들겠네.”“그건 몰라!”배윤아가 최군성을 쳐다보며 말했다.“보기엔 이 놀이공원, 만화적인 매력이 있어. 그렇지 않아?”“음, 확실히 그렇네.”최군성은 고개를 끄덕였다.“만약 만화 영화의 촬영지로 쓰인다면 정말 괜
그때, 배윤아가 멀리서 허둥지둥 달려왔다.“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배윤아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검은 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가원아, 정말 미안해! 정신없이 그림을 그리다가 시간을 놓쳐버렸어... 그래서 이제야 오게 됐어. 나 용서해줄 수 있을까?”배윤아는 숨을 헐떡이며 허겁지겁 사과했다. 손끝에 묻은 물감 자국도 미처 닦아내지 못한 모습이었다.하지만 최가원은 환하게 웃으며 작은 새처럼 배윤아의 품에 뛰어들었다.최군성도 배윤아 옆으로 다가가며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가원아.”체육 선생님이 배윤아를 가리키며 물었다.“이분도 네 가족이니?”“네!”최가원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배윤아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고 무심결에 최군성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내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그 순간, 최가원은 갑자기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윤아 이모를 오게 한 이유가 선생님에게 소개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최가원은 둘째 삼촌이 더 좋았다.평소 삼촌이 자신을 자주 놀리곤 했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언제나 든든히 곁을 지켜주는 사람이었다.최가원은 작은 이마를 찌푸리며 잠시 고민하다 부모님의 말씀을 어기고 체육 선생님에게 이모를 소개하지 않기로 결심했다.체육 선생님은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지만 세상에 단 하나뿐인 둘째 삼촌만큼은 절대 바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최가원은 한 손으로 최군성의 손을, 다른 손으로 배윤아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고는 뽐내듯 고개를 들고 귀여운 목소리로 외쳤다.“선생님, 잘 보세요! 이쪽은 우리 둘째 삼촌이고요, 이쪽은... 우리 둘째 이모예요! 앞으로 둘이 저를 자주 데리러 올 거예요!”체육 선생님은 가볍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하지만 최군성과 배윤아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고 얼굴은 동시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애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네?”최가원은 어리둥절했다.두 사람은 말투부터 표정까지 완벽히 똑같았다.“그만하고 빨리 집에 가자!”최군성은
“저는 이 아이의 둘째 삼촌입니다!”체육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무릎을 굽혀 부드럽게 최가원에게 물었다.“가원아, 이 사람 알아?”최군성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불만스럽게 말했다.“아니, 선생님! 저를 못 믿으시겠단 건가요?”“정말 죄송합니다.”체육 선생님은 예의 바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건 유치원 규정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저희는 모든 아이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거든요. 평소에 가원이는 보모나 경호원, 때론 부모님이나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데리러 오셨죠. 가끔은 지용 삼촌이나 인서 이모도 오셨는데, 둘째 삼촌이라는 분은 없었던 것 같아서요... 그래서 다시 확인한 겁니다. 아이를 모르는 분께 맡길 순 없잖아요.”최군성은 말문이 막혔다.사실 최군성이 유치원을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만약 ‘경쟁자’를 확인할 일이 아니었다면 이곳에 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가원아, 이 사람 알아?”체육 선생님은 다시 물었다.최군성은 조카에게 눈짓을 보내며 도움을 요청했다.하지만 최가원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최군성은 조카를 놀리듯 평소처럼 귀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면서 목을 조르는 시늉을 했다.평소에도 삼촌과 조카는 이런 유치한 장난으로 서로를 놀리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서로 장난감을 뺏거나 간식을 두고 자주 다퉜다. 심지어 그림 도구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다 서로 몸싸움까지 하는 모습은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었다.최가원은 늘 삼촌에게 밀려 속상해하며 발을 동동 굴렀었다.오늘, 드디어 복수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최가원은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장난스럽게 미소 짓더니 천천히 말했다.“모르는 사람이에요!”“뭐?”최군성은 당황한 나머지 거의 뛰어오를 뻔했다.“이 꼬맹아!”최군성은 조카의 머리끈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체육 선생님은 아이를 납치하려는 줄로 오해해 재빨리 최군성의 손목을 붙잡아 힘껏 비틀었다.“아!”최군성은 고통을 느끼며 몇
하지만 배윤아와 최군성은 지금의 관계에 매우 만족스러워 보였다.지난 2년 동안, 두 사람은 함께 그림을 그리고 저작권을 판매하며 작품을 각색했다. 나아가 함께 애니메이션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두 사람은 함께 바쁘게 뛰어다니며 서로를 의지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일상의 소소한 기쁨을 함께 나누며 예술적 영감도 서로 나눴다.두 예술인이 함께 지내는 만큼, 각자의 예술적 견해를 두고 종종 불꽃 튀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최군형과 강소아는 몇 번이나 두 사람의 관계가 정말 끝나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그러나 방금까지 싸움닭처럼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화해했고 화실 안은 금세 따스한 온기로 가득 찼다.강소아가 딸에게 물었다.“엄마가 알려준 말, 다 전했어?”최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대답했다.“삼촌 반응은 어땠어?”“음...”최가원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삼촌한테는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아요!”“뭐라고?”강소아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옆에서 듣고 있던 최군형은 강소아를 끌어안으며 웃었다.“찮아, 천천히 풀어가자. 군성이는 생각보다 고집이 센 편은 아니니까.”“그래도 이렇게 질질 끌고 있으니까...”강소아는 여전히 답답한 표정이었다.“걱정하지 마.”최군형은 딸을 바라보며 물었다.“가원아, 내일 유치원 끝나면 누구 손잡고 나올 거야?”최가원은 크림 케이크를 한입 먹던 중 아빠의 말에 신이 나서 고양이 같은 얼굴로 대답했다.“체육 선생님!”“정답이야!”부녀는 힘차게 손뼉을 마주쳤다.다음 날, 최군성은 유치원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유치원 정문에 나타났다.최군성은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늘 폴로셔츠와 청바지 같은 편한 옷만 입던 그가 오늘은 세련된 정장을 입고 머리까지 깔끔하게 손질했다.평소 화실에서의 부스스한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최군성의 외모와 체격은 최씨 가문의 젊은 세대 중에서도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외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남양 제일 미남’의
최군형은 방금 다 먹은 닭 날개 꼬치를 들고 최군성을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꼬치를 던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엄마가 항상 옳다니까. 넌 정말...”최군성은 당황스러워하며 물었다.“뭐가?”최군형은 이를 악물며 한 마디로 대답했다.“유난이야!”그 말을 내뱉고는 최지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최군성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어리둥절했다. 멀찍이서 바라보니 저쪽은 꽤 북적거리고 있었다. 최군성의 내면 깊은 곳에서 ‘흥겨운 분위기를 즐기는 본능’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최군성은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스케치북을 펴고 빠르게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다른 사람들은 대충 윤곽만 그린 반면, 특정 인물을 그릴 때만큼은 세심하게 한 획 한 획 공들여 그려내어 풍경 속에서도 돋보이게 했다....모든 일이 마무리되었고 이제 남은 건 최지용과 백인서의 결혼식이었다.최군형도 두 사람의 결혼을 돕고 싶어 최근 며칠 동안 집에 머물며 부모님과 함께 세심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지용이와 인서는 둘 다 조용한 걸 좋아하니, 웅장한 것보다는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결혼식이 더 잘 어울릴 것 같구나.”최연준은 상자에서 온갖 보물들을 꺼내며 결혼 선물로 줄 것을 고르고 있었다. 그중 강서연은 분홍빛 진주 세트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이게 딱이겠네! 인서에게 정말 잘 어울릴 거야.”“엄마.”최군형은 살짝 놀라며 말했다.“그건 외할아버지께서 엄마에게 주신 거잖아요. 남양 주변 해역에서만 나는 진주라면서요.”“맞아, 그런데...”강서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분홍색은 젊고 사랑스러운 느낌이잖아. 이제는 엄마한테 조금 안 어울릴지도 모르겠어.”“누가 그래!”최연준은 즉각 반박하며 손을 뻗어 진주 세트를 집어 들려 했다. 그러자 강서연은 그의 손등을 톡 치며 진주를 되찾아왔다.“인서에게 줄 거니까 당신은 끼어들지 말아요!”“우리 다른 선물을 하자고! 이건 당신이 간직해야 할 물건이야!”두 사람은 한동안 실랑이를 벌였
강소아가 손짓하자 최지용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백인서에게로 달려갔다.“이제 딸을 보러 가야겠네요!”강소아가 웃으며 말했다.“저 대신... 인서 좀 돌봐줄 수 있을까요?”최지용은 그 말에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아까는 주저하며 다가가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 바로 주변에 권욱과 강소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사람은 백인서의 오빠였고 다른 한 사람은 그녀의 절친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섣불리 다가가면 괜히 이상하게 보일까 봐 망설였다.최지용이 어깨를 펴고 당당히 백인서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뭐 해요?”최지용은 깜짝 놀랐다.“너야 말고 뭐해?”권욱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감히 내 눈앞에서 내 동생한테 손대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어?”“...”최지용은 당황해서 말을 잃었다.생각해 보면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뭔가 삐걱거렸던 것 같았다. 서로 영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땐 권욱이 백인서의 오빠라는 사실을 몰랐기에 오히려 잠재적 경쟁 상대로 여기기도 했었다.그리고 지금...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되어버렸다.“쓸데없이 귀찮게 하지 말고 물러나!”권욱은 두 사람 사이에 서서 최지용을 흘겨보며 말했다.“동생과 나에겐 나눌 얘기가 산더미처럼 쌓였으니 방해하지 마!”“할 얘기가 뭐가 그렇게 많은데요?”“예를 들면... 인서가 권씨 가문에서 맡게 될 직책 같은 거?”“그나저나!”최지용은 그제야 떠오른 듯 고개를 치며 말했다.“아까 권욱 씨 입으로 직접 말했어요. 최상 그룹과 권오 그룹이 협력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권씨 가문이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동생을 우리 최씨 집안에 시집보내겠다고요!”“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권욱은 태연하게 모른 척하며 말을 돌렸다.“내가 무슨 말을 했었는지 기억이 안 나네.”“저기요, 권욱 씨!”두 남자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백인서는 살짝 뒤로 물러나 두 사람의 시야에서 벗어났다.백인서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잔잔히 미소 지었다. 과거에는
손님들이 웅성거리며 비명이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백인서?”배윤아가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말했다.“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큰 소리를 질러?”“아니야... 난 백인서가 아니야!”백시연은 목이 쉬도록 외치며 갑자기 강소아를 돌아보았다.“말해봐! 아까 다 알고 있었던 거잖아? 내가 백인서가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 수 있게 똑똑히 말하라고!”“인서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강소아는 담담하면서도 비웃는 표정을 지으며 차분히 백시연의 손을 밀어냈다.“혹시 술이라도 마신 거야? 취한 것 같아.”“강소아 씨!”백시연은 분노에 치를 떨며 외쳤다.강소아는 백시연의 손을 잡고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인서야, 우린 자매잖아. 여기서 소란스러운 모습 보이지 말자. 오늘은 어쨌든 육씨 가문의 중요한 날이기도 하고 내 딸도 여기 있어... 그러니까, 제발 진정해 줘.”“아니야...”“인서야!”“아니라고! 아니라고!”백시연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한 발짝씩 뒤로 물러섰다.“난 백인서가 아니야! 몇 번을 말해야 믿을 거야?”배윤아는 피식 웃으며 백시연의 팔짱을 끼고 태연히 말했다.“어머, 백인서. 왜 그래? 백인서가 아니면, 왜 백인서 얼굴을 하고 있는 건데? 그런데... 굳이 너와 백인서의 다른 점을 꼽으라면... 손목에 그림이 있다는 거?”“비켜!”백시연은 배윤아를 거칠게 밀어내고 다급히 무대를 향해 뛰어갔다.백인서는 고요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마침내 기다리던 이 순간이 왔다.백인서는 천천히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눈앞의 백시연을 바라보았지만,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의 이 사람은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백인서는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백시연은 진짜 악마일지도 모른다고.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 얼굴을 지니고 있다. 한쪽은 천사, 다른 한쪽은 악마. 그리고 자신과 백시연 같은 쌍둥이의 운명은 그런 인간의 본성을 극대화해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