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우정은 잠시 멈칫하며 딸과 조금 떨어져 함께 문 쪽을 바라보았다.육경섭이 문 앞에 서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그는 이미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임우정이 저녁 식사를 들고 오기 전부터 그는 딸의 방문 앞을 서성였다.육경섭도 혹시나 딸이 기분이 안 좋아서 밥을 안 먹을까 봐 걱정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어렵게 되찾은 딸이 다시 그들을 떠날까 봐 두려웠다.하지만 그는 들어가서 딸과 어떻게 대화를 나눠야 할지 몰랐다.육경섭은 아버지이자 남자였기에 어떤 말은 딸이 그와 말하기 싫어할 것 같았다.그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임우정이 위층으로 올라오는 것을 보고 그는 바로 옆에 숨었다가 임우정이 노크를 하자 몰래 고개를 내밀고서는 방안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귀를 기울였다.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했다. 두 사람이 왜 껴안고 울고 있는 걸까?육경섭은 너무 초조해져서 그제야 노크하며 문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티 나지 않게 하려고 그냥 지나가다 들린 것처럼 연기했다.“난 마침 서재를 지나가다가 들렀어.”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마침 여길 지나가는데 엄마와 딸이 울고 있길래. 아이고 임우정 네가 내 귀한 딸을 괴롭혔지?”육경섭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 연기에 맞장구를 쳐달라고 임우정을 향해 윙크를 날렸다. 하지만 그의 웃긴 모습에 아내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하나도 안 웃겨.”임우정은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입꼬리는 올라가고 있었다. 그녀는 강소아를 바라보며 말했다.“아빠는 무시해. 태어날 때부터 유머 세포라고는 없었으니까. 젊었을 때 최 아저씨와 강 아줌마 카페에서 얼마나 소란을 피웠는지 몰라. 네 아빠가 웃기면 손님들이 다 도망갔어.”“네가 잘못 기억한 거 아니야?”육경섭은 눈을 부릅뜨며 반박했다.“항상 무서운 표정을 하는 사람은 최연준이었어.”“그럼 넌 무슨 얼굴인데? 돼지 얼굴?”육경섭은 순간 말문이 막혀서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몰랐고 이내 가족 셋이 함께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강소아는 마치 어렸을 때
한편 유환은 병원에 도착하고 나서야 재크가 그녀를 위해 개인 주치의를 예약해 두었었고 의사가 그들을 오래 기다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문성원은 그녀를 안고 은밀하게 VIP 통로를 통해 진찰실에 도착했다.유환의 발목은 큰 문제가 없었다. 그저 며칠 잘 쉬면서 제때 약을 챙겨 먹으면 괜찮아질 정도였다.하지만 유환이 가장 처음 물은 것은 촬영 일정은 어떻게 하냐는 것이었다.간호사가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환자분 서서 하는 장면은 촬영할 수 없지만 앉아 있거나 누워서 대사만 하는 장면은 괜찮을 거예요.”의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발목이 이 지경이 됐는데 촬영은 무슨 촬영입니까? 완전히 나을 때까지 푹 쉬세요.”“하지만 저 때문에 촬영팀 전체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요.”유환은 다급하게 핸드폰을 꺼내 재크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평소 그녀를 보물처럼 여기던 매니저는 이번에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그게 유환아. 밴이 아직 정비가 안 됐어. 아니 밴을 크게 수리해야 하는 상황이라 최소 일주일은 걸릴 것 같아.”“뭐?”유환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그럼 날 어떻게 픽업하겠다는 거야?”“유환아 너도 날 좀 이해해 줘. 나도 다른 일을 해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너 혼자 촬영장에 가야 할 것 같아.”“뭐?”재크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전화를 끊었고 유환은 너무 화가 나서 핸드폰을 바닥에 던져버릴 뻔했다.“이 나쁜 놈. 이제는 감히 나한테 이런 말을 해? 내가 아주 가만두지 않을 거야.”“일단 진정해요.”문성원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동안 내가 촬영장에 데려다줄게요. 그런 다음 다시 픽업해서 집에 데려다주고요.”유환은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순간 그녀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지 의심하며 고개를 들어 맑고 선명한 그의 눈을 마주쳤다.그 순간 그녀는 얼어붙었다.유환은 그제야 자기가 한쪽 다리를 침대에 얹어놓고 팔을 그 위에 올린 채 다른 쪽 다리를 흔들며 털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게다가 큰 목소리로
하지만 이번에는 막은 손의 위치가 조금 예민한 곳이었다.유환이 고개를 숙이자 문성원은 그제야 자기 손이 그녀의 가슴 앞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서는 깜짝 놀랐다.“아 죄송합니다.”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전기 충격을 받은 것처럼 떨더니 급히 내렸다.‘끝났어. 정말 끝났어. 순간 너무 다급해서 그곳을 만진 건데 설마 유환 씨가 날 경험이 풍부한 변태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그는 고통스럽게 눈을 감았다. 몰려오는 민망함에 차라리 쥐구멍을 파고 들어가고 싶었다.“난 괜찮아요.”유환의 작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입가에 미소를 참을 수 없었다.그런데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한 여자가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온 그 여자를 자세히 보니 하수영이었다.‘방금 저 여자가 차를 막은 거야?’유환은 입술을 깨물며 문성원에게 가슴을 습격당해 행복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팔짱을 끼며 다시 차가운 얼굴로 돌아가 전투 준비를 끝냈다.그런데 그녀는 무슨 싸움을 준비해야 하는 것일까?‘내가 여자 친구도 아니고 도대체 무슨 명분으로 싸워?’유환은 어두워진 얼굴로 깊은 한숨을 쉬며 문성원을 바라보았다.“내가 뒤에 가서 앉을게요. 성원 씨 여자 친구 왔어요.”문성원은 너무 당황해서 순간 하수영은 자기 여자 친구가 아니라고 말할 뻔했다.하지만 최군형이 지시한 임무가 떠올라 그는 주먹을 꽉 쥐고서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유환은 한숨을 쉬며 안전벨트를 풀려고 했지만 갑자기 손마디가 굵은 손이 그녀를 붙잡았다. 따뜻한 그의 손에 유환은 또 한 번 마음이 흔들렸다.“문성원 씨. 성원 씨.”하수영은 차 창문을 두드리며 말했다.평소에 온화하던 문성원은 하수영을 째려보며 버튼을 불러 차 창문을 내렸다.하수영은 조수석에 앉아 있는 유환을 발견하자마자 화가 치밀었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왜 이 여자가 여기 있어요?”유환도 화가 났지만 지금 상황에서 보면 하수영이 조강지처였고 그녀가 뻔뻔한 세컨드 같았기에 참는 것이 최선이었다.하지만 그
“저...”하수영은 대답할 수 없었다. 때마침 호준성이 뒤에서 쫓아왔다.“그러니까, 너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냐? 내 머리에 이렇게 큰 상처가 있는데 오늘 실밥 풀어야 하는 날인 거 알잖아, 그런데 나를 여기다 내팽개쳐?”하수영은 당황해서 눈동자가 사방으로 흔들렸다.호준성은 아직도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말은 비교적 또렷했다. 그는 다리를 절며 차 앞으로 다가와 먼저 호화로운 지바겐을 살펴본 후, 고개를 들어 차 안을 들여다봤다.문성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유환 쪽 창문을 올려버렸다.그는 유환에게 선글라스와 모자를 잘 쓰라고 한 후, 직접 차에서 내렸다. 그가 호준성을 바라보는 눈빛에 조롱과 희롱의 기색이 담겨 있었다.“하수영, 소개 안 해줄 거야?” 문성원이 가볍게 웃었다.호준성도 하수영을 보며 말했다. “뭐야, 너희 둘이 아는 사이야?”하수영은 한참 망설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이분은 문성원이에요, 제 남자 친구. 성원 씨, 이쪽은 육자 그룹 영화 도시 프로젝트의 담당자, 호...”“호준성?” 문성원이 비웃는 듯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호 매니저님, 소문 많이 들었습니다!”호준성은 그를 힐끗 보며 마지못해 악수를 나눴다. 그는 하수영에게 변호사 남자 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훤칠하고 돈 많은 사람일 줄은 몰랐다.그는 이 여자가 제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남자 친구를 두고 자신과 잠자리를 가지려 하다니? 단지 돈을 좀 더 나누어 갖기 위해서? 육자 부동산 한 채를 소유하기 위해서?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호준성은 기침을 두 번 하고는 매니저의 태도를 잡았다. “저기, 성원아! 네 차 참 멋진데, 나를 집에 데려다 줄 수 있겠나? 우리 집은 남성에 있는데, 여기서 멀지 않아. 한 20킬로미터 정도 될 거야!”“흥!”문성원이 냉소하며 말했다. “호 매니저님, 오해하신 것 같은데요?”“오해할 게 뭐가 있어?” 호준성은 눈을 부릅뜨고 자기 머리를 가
“이봐요, 정말 재밌는 얘기를 하시네요!” 전화기 너머 차가운 목소리에는 약간의 조롱이 담겨 있었다. “저희는 정식 외국 투자기업입니다. 어떻게 오성 도시에서 불법 행위를 할 수 있겠어요?”“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에요! 여보세요?”상대방은 이미 전화를 끊었다.전화기 반대편에서는 서지현이 밝은 블루 컬러의 사롱을 입고 게으르게 전화를 내려놓으며 최군형과 강소아에게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이 변성기 정말 효과가 좋네!” 서지현이 웃으며 말했다. “방금 내 목소리를 남자 목소리로 바꿔줬어!”“이모님 연기도 정말 뛰어나셨어요!” 최군형이 아첨하며 말했다. “역시 우리 삼촌이 가르쳐주신 대로네요!”서지현은 윙크하며 옆에 있던 강소아의 작은 손을 잡았다. 그녀는 이 예쁜 소녀를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강소아도 서지현을 매우 좋아했다. 처음 만난 것 같은 친근함을 느꼈다.지난번 대황궁에 갔을 때, 그녀는 적당한 옷이 없어서 서지현이 예전에 입었던 드레스를 입었었다.이번에 실제로 만나게 된 서지현은 강소아를 놀라게 했다. 그녀는 나이를 무색케 할 만큼 여전히 아름다웠다.혼혈인의 입체적인 얼굴선과 그녀가 지닌 천부적으로 고귀한 기품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어때?” 최군형이 강소아 옆에 앉아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웃었다. “내가 예쁜 이모가 있다고 했었지? 틀리지 않았지? 아쉽게도 이 며칠 우리 아빠가 배우 삼촌의 일정을 꽉 채워놓은 바람에 아쉽게도 삼촌은 못 뵙게 되었어. “ “그를 만나지 못해도 상관없어!” 서지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가장 중요한 건, 우리 소유를 만났다는 거야. 그게 이번 여행의 보람이지!”“이모?” 최군형이 놀라며 물었다. “우리 소유요?”“그렇지 않으면?”“그럼 저는 뭐예요?”“음...” 서지현이 생각하다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조카사위지!”마침 그때 최군성과 육연우가 손을 잡고 들어왔다. 이 말을 듣고 최군성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최군형은 ‘싸울래?’라는 눈
“왜 소리를 질러대는 거야?!” 호준성은 이제 그녀를 보는 것조차 거슬렸다. 그녀를 만나고 나서 한 번도 일이 제대로 풀린 적이 없다고 느꼈다.하수영은 마음속의 분노를 억누르며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저... 저 그저 건물을 지으려는 두 개의 땅에 관해 묻고 싶어서요. 구매자를 찾으셨나요?”“그 얘기 꺼내지도 마! 생각만 해도 열 받아!” 호준성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기성 산업이 나랑 협력하지 않겠대. 육자 그룹 이름을 꺼내도 소용없었어!”“기성 산업?” 하수영은 순간 멍해졌다. 최근에 외국 기업이 하나 들어와 세력이 강하다는 소문을 떠올렸다.하지만 직감적으로, 너무 화려한 버섯은 독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게다가 그 회사는 남양 쪽 자본이라는 소문이...남양을 떠올리자 그녀는 강소아가 생각났고, 그 생각에 마음속의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제가 보기에 협력하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어요!” 그녀는 소파에 앉아 투덜댔다. “사기꾼이면 어쩌려고요? 계약서에 사인하고 돈을 가져가 남양으로 도망치면 어디서 찾겠어요?”“네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호준성은 그녀를 소파에서 끌어 올려 밖으로 세게 밀쳤다.하수영은 비틀거리며 멀리 날아갔고, 등은 복도 벽에 부딪혀 머릿속이 멍했다.“호준성! 당신...”“내가 뭐? 내 판단이 틀릴 리가 없어!” 호준성은 경멸스럽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알기나 해? 그 재단 뒤에 남양 황실의 지원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 남양 왕도 사기꾼이라는 거야? 나를 속이려 한다고? 그 사람들이 뭘 노린다고!”“황실?” 하수영은 이 말을 듣고 더욱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급히 다가가 호준성의 손을 잡았다.호준성은 지금 그녀를 미친 듯이 피하고 있었다. 그녀가 다가오자 그는 힘껏 밀쳐냈다.두 사람은 한동안 밀고 당기며 사무실과 복도에 그들의 고함이 가득했다.“호준성, 당신 그들과 협력하면 안 돼요!” 하수영은 절규했다.“이 년아, 이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당신 나한테 집 한 채 주기로 했잖아요
하수영이 잠시 정신이 멍해진 사이, 호준성은 그녀의 뺨을 세게 때렸다.이 순간 호준성은 이성을 잃은 상태였고, 그 땅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그저 빨리 아무도 모르게 그 땅을 팔아 돈을 챙기고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다.호준성은 핏발 선 눈으로 이를 갈며 외쳤다. “누가 내 돈줄을 막으면, 그놈을 끝장내 버릴 거야!”바로 그때 그의 전화가 울렸다. 낯선 번호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상대방은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였다. “호준성 매니저님이시죠?”호준성은 순간적으로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방금 전의 사나운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헤헤... 네, 접니다! 실례지만, 누구신가요?”“저는 기성 산업의 수서 비서 안나입니다. 그냥 안나라고 부르시면 돼요.”호준성의 눈이 반짝였다. 정신을 가다듬고 물었다. “안나요? 무슨 일인가요?”안나는 은방울 같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한참을 웃고 나서야 말했다. “호 매니저님, 농담이죠? 왜 제가 연락드렸는지 모르시겠어요? 며칠 전에 무슨 문의를 하셨죠?”“혹시... 당신네 대표님이 제 땅에 관심이 있다는 건가요?”“그렇습니다.”안나는 계속 말했다. “호 매니저님, 저희 두 분의 대표님께서 말씀하시길, 육자 그룹은 오성에서도 명문가로 알려져 있으며, 비록 4대 가문보다는 못 하지만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고 들었어요. 최근에는 영화 촬영지도 개발 중이라던데요...”“맞아요 맞아요!” 호준성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 땅은 바로 영화 촬영지 옆에 있어요! 당신네 귀한 대표님께 전하세요. 그 땅을 사면 손해 볼 일은 없을 거라고!”“알겠습니다, 매니저님.” 안나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대표님께서 직접 만나 뵙고 싶다고 하시는데, 언제 시간이 되시나요?”*전화를 끊고 나서, 강소아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유환은 자신의 잡지 화보를 고르면서 고개를 돌려 그녀를 한 번 보더니 혀를 차며 말했다. “어머나, 이러다 연예계에 나와 경쟁할 사람 하나 더 생기겠네요!”“아니에요! 전부 변성
차는 곧 강주에 도착했다.강소우는 자신이 자라난 곳을 바라보며, 익숙한 풍경들에 마음이 복잡해졌다.이곳의 작은 골목마다, 거리마다, 카페와 놀이공원마다 그녀의 발자취가 남아 있었다.그리고 그 골목 입구에는 강씨 집안의 오래된 집이 있었다.골목의 생활감,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맛있는 음식, 우미자와 소정애의 플라스틱 같은 우정...모두 강소우만의 독특한 기억이었다.지금 생각해 보니, 마치 다른 세상 같았다. 유환은 ‘완전 무장’을 하고 그녀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만개한 장미꽃 길을 손을 잡고 걸었다.“저기 앞으로 가면 제가 다닌 대학교가 있어요.” 강소우가 살짝 미소 지었다.“소우 씨 학교를 좋아하세요?”“싫어하지는 않아요.” 강소우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곳은 귀족 학교예요. 부모님이 더 나은 교육을 위해 큰돈을 들여 저를 보냈어요. 하지만 거기 아이들은 모두 부유한 가정 출신이어서 저는 그들과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래서...”“그래서 친구가 없으셨나요?” 유환이 그녀의 팔을 살짝 치며 말했다. “저도 연예계 처음 들어왔을 때 그런 외로움을 느꼈어요.”강소우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사실 친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그때는 하수영이 그녀와 함께 있었다.그때 그녀들은 지금처럼 장미꽃이 만발한 길을 손을 잡고 걸었고, 하얀 드레스를 입고 바람이 불면 꽃가루가 그녀들의 드레스 위에 떨어지곤 했다. 그녀들의 웃음은 손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만큼 달콤했다.하지만 걷다 보니 결국 길이 갈라지고 말았다.강소우는 한숨을 쉬었다. 허리에서 느껴지는 은근한 통증이 점점 더 심해졌다.“소우 씨, 이거 보세요!” 유환이 휴대전화를 건네주었다.함께 온 여배우는 먼저 출발해 이미 성형외과에 도착해 있었다.병원이라기보다는 위치가 은밀한 작은 진료소였다. 하지만 주치의의 기술이 좋다고 알려져 많은 대형 스타가 찾았다.이 진료소는 연예계에서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녀가 도착하면 몰래 사진을 몇 장 찍어 보내달라고 했어요.
배현진은 마치 자신의 영혼이 몸을 떠나 허공을 떠도는 듯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혔다.그는 허공에 떠 있는 듯 응급실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사들이 급히 자신을 응급처치하는 모습과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로 누워 있는 자기 육체를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도 모든 것에서 해방된 듯한 감각이 그를 감쌌다.의식은 또렷했지만, 살아남겠다는 의지는 조금도 없었다.그날, 배현진은 오강호와 싸웠다.송윤희와 이혼 후 더 나락으로 떨어진 오강호는 그날 술집에서 술에 취해 있던 배현진과 우연히 마주쳤다.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졌고 오강호는 배현진이 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자, 송윤지를 언급하며 조롱을 쏟아냈다.배현진은 격분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먼저 손을 댄 쪽이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오강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배현진은 오강호에게 몇 대 얻어맞고는 응급실로 실려 가고 말았다.지금도 배현진의 귀에는 오강호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고 있었다.“배씨 가문의 아들이라더니 별수 없군. 여자를 제대로 붙잡지도 못하고 결국 임지강에게 뺏겼다지? 하하하...”“배 도련님, 혹시 속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임지강이 송윤지에게 접근한 건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을 거야!”“너 같은 쓰레기가 무슨 남자야. 약혼녀도 남에게 빼앗기고 말이야.”배현진의 가슴 한구석이 세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강한 힘이 그의 영혼을 다시 육체로 끌어당겼다.옆에서 심전도가 삐 울리더니 직선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의사들은 제세동기를 정리하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환자가 심장박동을 회복했습니다. 약물을 투여하세요.”배현진의 꼭 감겼던 두 눈이 살짝 떨렸다.그를 때린 사람이 임지강과 송윤지의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 걸까?혹시, 그 둘 사이에 정말로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은 아닐까?그는 알아내야 했다.죽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자신이 겪은 모든 수모를 반드시 임지강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겠다고 다짐했다....
임지강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제가 누나랑 형부께 누를 끼쳤네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임우정은 부드럽게 말했다.“사람 사이의 만남과 헤어짐은 결국 운명 같은 거야.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원인은 나야. 내가 처음에 송윤지를 현진이에게 소개하지 말아야 했어.”“저 때문에 누나가 곤란해진 거예요.”임지강은 진지하게 말했다.“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제가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썼어요. 누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배씨 가문을 어떻게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배현진이 은행에 진 빚은...”임지강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임우정이 임지강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경원이와 수정이는 모두 사리 분별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빚진 돈은 은행에 분할해서 납부할 거야.”“그럼 이자는 받지 않을게요.”임우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안도와 약간의 무력감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배현진에 대해서는.”임지강은 계속해서 말했다.“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그가 윤지를 괴롭힐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상했어야죠.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심지어 정말로 정신이 나갔다 해도 그건 자업자득이에요.”“됐어, 봐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잖아...”임지강은 고개를 들어 임우정을 바라봤고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친 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이게 무슨 냄새예요?”갑자기 집 안에서 송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임지강은 놀라며 황급히 돌아섰다. 잠옷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송윤지가 급히 주방으로 달려 들어왔다.임지강도 곧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아이고, 이거 다 태웠네요!”송윤지는 놀라 외치며 불을 껐다. 그런 다음 행주로 냄비 뚜껑을 열었다.“이건 뭐예요?”“제가 만든 당근 소고기 스튜예요...”임지강은 난감하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송윤지에서 한번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했는데 결과는 역시나 이 모양이었다.“물 안 넣었어요?”송윤지는 코를 찡그리며 물었다.“당근
임지강은 송윤지의 세계에 다시 한번 깊숙이 들어가게 되었다.임지강은 이제 송윤지의 아파트에서 종종 머물렀다. 겉으로는 송윤지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라 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은 간절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윤지는 몇 번 거절하려 했지만, 임지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결국 그냥 놔두기로 했다.임지강은 비록 소파에서 자야 했지만, 그것조차도 행복했다.임지강은 언젠가는 송윤지의 곁에서 함께 아침을 맞이할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임지강은 대부분의 시간을 송윤지와 함께 보내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그는 세 끼를 직접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송윤지가 과거에 자신을 위해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들고 정성이 담긴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과거 송윤지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가늠해 볼 수 있었다.가끔 송윤지는 집 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임지강의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꿈이 자꾸 송윤지를 괴롭혔지만, 송윤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임조강이 곁에 있으면 훨씬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임지강은 배현진과는 완전히 달랐다.배현진은 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앞으로’ 같은 말로 막연한 미래를 약속하곤 했다.반면, 임지강은 ‘내가 있잖아’, ‘나한테 맡겨’, ‘두려워하지 마’ 같은 말로 송윤지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임지강의 말 속에는 사랑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었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송윤지를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느껴졌다.그날은 송윤지가 쉬는 날이었다. 임지강은 주방에서 당근과 소고기를 넣은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이 요리는 임지강이 새로 배운 것이었다. 임지강은 요리의 모든 과정을 조심스럽게 진행했고 조미료를 넣는 것도 마치 화학 실험을 하듯 정밀하게 측정했다.잠시 후, 요리의 향기가 퍼져 나갔고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냄비 뚜껑을 덮고 불을 약하게 조절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그가 문을 열자, 임우정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임우정은 복잡한 표정으로 임지강을 바라보았다.“누나?”
배현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임지강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소중히 여겨야 할 때 외면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임지강은 손가락으로 배현진의 코앞을 가리키며 차갑게 말했다.“다시 내 여자를 건드리면, 소피아와 함께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야.”임지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없이 송윤지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갔다.방 안에는 이제 배현진과 배윤아 두 남매만 남아 있었다.배현진은 멍하니 바닥에 앉아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후회와 절망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배현진의 모습을 보며 배윤아는 가슴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오빠...”배윤아는 조심스럽게 배현진을 부축하며 말했다.“사실, 오빠는 소피아가 어떤 사람인지 진작에 알아봐야 했어. 소피아가 없었다면,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거야.”배현진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는 벽에 기대어 머리를 부딪치며 자신을책망했다.“오빠.”배윤아는 애써 배현진의 마음을 다독이며 말했다.“내 생각엔 임지강 씨는 오빠에게 교훈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야. 진심으로 오빠를 망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닐 거야. 이미 송윤지의 복수를 한 거나 다름없으니, 더는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게다가 다행히도 오빠가 진 빚은 임지강 씨의 은행에서 대출받은 거니까, 그에게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부탁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봐준다고?”백약곡의 쓴웃음은 공허하고 힘이 없었다.“지금 나는 아무것도 없어. 완전히 끝났어...”“오빠에겐 아직 나랑 부모님이 있잖아!”배윤아는 울먹이며 말했다.“우리는 여전히 가족이야! 오빠,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잘못했다고 해. 오빠가 진 빚은 부모님이 분명 해결하려고 하실 거야.”“내가 은행에 진 빚은 수천억이라고.”배현진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게다가 이 모든 걸 뒤에서 조종한 사람은 임지강이야. 그 사람은 절대 날 그냥 놔두지 않을 거야.”“오빠...”배윤아가 더 말을 이어가려 했
“현진 씨, 제발 내 말 좀 들어봐!”소피아는 두려움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이렇게 한 건... 다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은 모든 걸 여동생에게 넘겼잖아.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랑 제임스는? 당신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여기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다면, 제임스를 어떻게 키우겠어?”“그만해!”배현진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소피아는 오직 자신과 제임스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었다.소피아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배현진이 제임스를 친아들처럼 대하려 했던 건 소피아를 사랑해서지, 빚진 마음 때문이 아니었다.“현진 씨...”소피아는 눈물을 흘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내가 잘못한 거 알아. 하지만 정말 우리 미래를 위해서였어. 당신 부모님이 나를 인정해 주길 바랐고 우리가 순조롭게 결혼하길 원했을 뿐이야. 그래서 내가...”“네가 원하는 건, 배씨 가문을 차지하는 거잖아?”“당신...”“윤아는 내 친동생이야!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내 등 뒤에서 이런 짓을 벌일 수 있어?”배현진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소피아는 배현진의 외침에 놀라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소리쳤다.“배현진! 앞으로 네 여동생이랑 살 거야? 아니면 나랑 살 거야?”그 말에 배현진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배현진은 소피아의 뺨을 세게 때리며 속에 쌓여 있던 모든 후회와 분노를 폭발시켰다.소피아는 비명을 지르며 배현진의 얼굴을 긁으려 달려들었다. 두 사람은 몸싸움을 벌이며 뒤엉켰고 배현진의 얼굴에는 소피아에게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남았다.그때, 경찰이 방으로 들이닥쳐 두 사람을 강제로 떼어놓았다. 차가운 수갑이 소피아의 손목에 채워졌다.배현진은 그 자리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소피아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감정도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듯, 그의 존재는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온몸이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다시는 하나로
임지강은 대출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 선명한 배현진의 서명과 붉게 찍힌 도장은 마치 피로 얼룩진 조롱처럼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했다.“제 생각엔,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조 회장이 말했다.“지강아, 빨리 돈을 배 도련님 계좌로 송금하고 그 두 광산을 사들여라. 그리고 배 도련님, 빚을 갚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임 선생님이 이렇게까지 너그럽게 대해주고 있는데, 도련님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건 말도 안 되죠. 흥! 약속을 어기는 일은 배씨 가문의 품격에도 맞지 않잖아요, 안 그래요?”배현진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후회와 절망이 그의 마음을 홍수처럼 휩쓸고 있었다.“배씨 가문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임지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오늘 제가 데려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마 배 도련님도 보고 싶었을 겁니다.”임지강이 손뼉을 두 번 치자 룸의 문이 열리며 배윤아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배현진은 배윤아를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놀라움은 곧 걱정과 초조함으로 변했다. 배현진은 재빨리 배윤아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으며 물었다.“윤아야, 괜찮아?”“나 괜찮아.”배윤아는 눈가가 붉어졌다. 가족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그 시간은 마치 몇 세기가 흐른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그러나 배윤아의 시선이 소피아를 향하는 순간, 증오가 담긴 눈빛이 소피아를 사로잡았다. 배윤아는 이를 악물며 소피아를 가리켰다.“오빠, 바로 저 여자가 사람을 시켜 날 해친 거야!”“뭐라고?”배현진은 몸을 떨며 경악했다.소피아는 그제야 충격에서 벗어나 발악하듯 배현진 곁으로 뛰어들며 변명했다.“아니야! 내가 아니야! 윤아야,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네가 사라진 동안, 난 네 소식을 찾으려고 정말 애를 썼어. 난 정말로...”“거짓말하지 마세요!”배윤아는 울부짖으며 소리쳤다.“소피아 씨가 사람을 시켜 날 폭행하고 내 물건을 훔쳐 간 건 분명해요! 그리고 소피아 씨가 가장 원했던 게 배씨
“조 회장님, 이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요!”소피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항의했다.“우리가 그 광산을 사느라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 대박을 기대했는데, 지금 헐값에 팔면 원금도 못 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다고요. 게다가 그 돈은 전부 은행 대출입니다.”“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나요?”조 회장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그런데 이건 아가씨가 주도한 일 아닌가요? 제 기억으로는 배 도련님이 처음엔 그 두 광산에 별 관심이 없으셨던 걸로 압니다만.”“조 회장님...”“배 도련님.”조 회장은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했다.“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오히려 추악한 수단으로 올라선 여자의 말을 믿었으니, 그 손해는 당연히 본인이 책임져야죠.”“지금 말 다했어요?”소피아는 벌떡 일어나며 격분해 외쳤다.조 회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짓누르듯 바라보았다. 그때 주변에 있던 부하들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섰고 소피아의 기세는 단숨에 꺾였다.“배 도련님, 매입자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배현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조 회장은 부하에게 매입자를 데려오라고 지시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을 본 배현진은 그만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임지강과 송윤지였다.배현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다 테이블을 건드렸고 접시와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임지강은 송윤지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으며 송윤지를 위해 의자를 빼주고 임지강도 옆에 나란히 앉았다.“배 도련님, 아는 분이시죠?”조 회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제가 따로 소개해 드려야 할까요?”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했다.“배 도련님.”임지강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제가 듣기론 도련님이 투자하신 두 광산이 이제 3200억밖에 안 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3400억에 사들이겠습니다. 도련님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도
화면에 띄워진 데이터는 충격 그 자체였다.두 사람은 멍하니 눈을 크게 뜬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머릿속에 벼락이 내리친 듯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배현진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소피아 역시 어찌 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소피아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된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우리가 1조를 들여 산 두 광산이라고! 무려 1조라고!”배현진이 소리쳤다.“가격이 분명 오를 거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3200억으로 폭락한 거냐고!”“나도... 나도 모르겠어...”소피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럴 리가 없어! 광산의 시장 가격을 철저히 조사했었단 말이야. 그 두 광산은 운산시에 있는데, 지금 운산시 광산 가격이 상승세잖아. 분명 손해 볼 투자가 아니었어.”“하지만 지금 상황 좀 봐.”배현진은 입술을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는 굵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소피아, 그 1조는 전부 은행 대출금이야. 지금 난 은행에 수천억 빚을 졌고 이자도 엄청나다고.”“현진 씨, 진정해.”소피아는 급히 배현진을 달래며 말했다.“이 일은 조 회장이 중간에서 소개한 거래잖아. 조 회장에게 물어보면 모든 게 밝혀질 거야. 내가 직접 물어볼게.”...배현진과 소피아는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일찍 호텔 룸에서 조 회장을 기다리고 있었다.배현진은 오늘의 만남을 위해 호텔 매니저에게 최고의 음식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부탁했다. 테이블 위에는 호텔의 대표 메뉴들이 가지런히 차려져 있었다.조 회장이 방에 들어서자, 배현진은 그가 풍기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조 회장의 눈빛은 마치 코너에 몰린 쥐를 노리는 고양이 같았고 배현진과 소피아는 그 쥐가 된 듯한 압박감에 사로잡혔다.“두 분이 너무 과하게 준비하셨네요.”조 회장은 자리에 앉으며 테이블 위의 술잔을 힐끗 보더니 살짝 미소를 지었다.“이렇게까지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어요. 나이
이른 아침, 소피아는 천천히 눈을 뜨며 옆에 누운 남자의 맨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배현진의 입술에 살며시 입맞춤했다.배현진은 그녀의 키스에 미소로 답하며 부드럽게 눈을 떴다.하룻밤의 열정에 지친 두 사람의 얼굴에는 희미한 피곤함이 배어 있었다.“제임스는 아직 안 깨어났어?”“이 시간엔 절대 안 일어나요.”소피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그럼... 우리 한 번 더?”“아니.”배현진은 소피아의 손을 잡아 입술에 가져다 댄 뒤 가볍게 입맞춤하며 말했다.그는 정말로 피곤했다. 소피아는 도대체 어떻게 매일 밤 이렇게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뿜어낼 수 있는 걸까?소피아는 송윤지와 완전히 달랐다. 송윤지는 늘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그가 바라볼 때만 순수한 미소를 띠곤 했다.배현진은 문득 송윤지를 떠올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다.그는 고개를 저으며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자기야, 무슨 일이야?”“아, 별거 아니야.”배현진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맞다, 나 현진 씨랑 상의할 게 있어.”소피아는 배현진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돌리며 말했다.“제임스도 점점 크고 있어. 가정교사를 불러서 집에서만 공부시키는 건 이제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아. 또래 아이들과 학교에서 어울리는 게 필요하지 않겠어? 어쨌든 앞으로는 제임스가 배씨 가문의 사업을 물려받을 사람이 될 테니까, 그렇지?”“음...”배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소피아를 바라보았다.“그런데 장래의 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 부모님이 이미 가업을 전부 윤아에게 넘겼잖아.”소피아는 미소를 띠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흡족해했다.배윤아 같은 풋내기는 소피아와 겨룰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윤아를 기절시켜 조 회장의 카지노 앞에 던져 놓았기 때문이다.조 회장이 배윤아를 데려갔으니, 모두가 배씨 가문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조 회장과 임지강이라고 믿을 것이다.혹시 조 회장이 색욕에 휘둘리는 사람이라면 더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