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영은 곧바로 테이블 위의 술잔을 집어 들더니 단숨에 남은 술을 몽땅 마셔버렸다. 그리고 수현이 보는 앞에서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워 넣었다.소영은 술잔을 손에 들고 천천히 흔들었다.“예전에 너 살려준 걸 봐서라도 마지막으로 내 체면 좀 살려줘. 우리 웃으며 헤어지자. 응?”수현의 얇은 입술은 가로로 굳게 닫혀 있었고 눈빛은 서늘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의 부탁대로 다가가 앉았다.“같이 마셔줘야 웃으면서 헤어지는 거야? 네게 준 두 배의 주식으로는 안 돼?”소영은 처연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수현 씨가 그렇게 생각할 줄 알았어. 하지만 내 마음은 항상 진심이었어. 설령 수현 씨가 회사 대표가 아닌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대도 난 좋아했을 거야. 내가 왜 지분 50퍼센트를 달라고 한 줄 알아? 수현 씨는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인 걸 알아서야. 내가 그런 요구를 제기하지 않았으면 수현 씨는 내가 정말 이 관계를 끝낼 결심을 했다는 걸 믿지 않았을 거야. 차라리 잘 됐어. 내가 이 회사 지분을 가져가면 수현 씨도 이제 더 이상 나한테 갚을 거 없는 거야.”말을 마친 소영은 술잔을 들었다.“여기까지 오는 데 참 오래 걸렸네. 한잔 들어. 네 행복을 찾길 진심으로 응원해.”그녀는 짧은 축복과 함께 잔을 들어 올렸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갈수록 무겁게 느껴지는 술의 무게에 손이 저렸지만 팔을 내리지 않고 버텨냈다.그렇게 한참 동안의 정적과 함께 이렇게 계획이 실패하나 싶을 때 드디어 수현이 잔을 들어 그녀와 술잔을 부딪쳤다. 그는 내키지 않는 듯 몇 모금만 마신 후 말했다.“이 정도면 됐어?”잔이 다시 테이블에 놓이며 가벼운 소리를 냈다.소영은 술이 그의 목을 타고 내려가는 걸 확인하자 갑자기 미치게 떨려왔다. 심장 소리는 어느새 아찔하게 온몸에 울려 퍼졌고 잔을 쥔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마신 거지?드디어 성공이다!그저 몇 모금일 뿐이지만 그럴 것을 대비해 소영은 약을 충분히 챙겨왔다.한 모금만 마셔도 바로 약효가 발효되게 말
소영은 화장실에서 나왔는데 수현이 보이지 않아 심장이 철렁했다. 그녀는 수현이 다른 사람이라도 찾아간 줄 알고 기겁하며 여기저기 그를 찾아다녔다.물론 소영이 가장 걱정하는 상황은 그가 윤아를 찾아가는 거였다.만약 수현이 윤아를 찾아간다면 지금까지 그녀가 한 일은 결국 남 좋은 노릇이 아닌가.그 꼴은 절대 못 보지.소영은 수현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말했다.“밤바람이 찬데 옷도 얇게 입고 왜 나와 있어. 들어가자.”소영이 다가오자 수현은 의식적으로 뒤로 두 걸음 물러나며 그녀와 거리를 유지했다.수현의 짙은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소영이 자꾸 다가와서 그런 건지 민재가 한참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아서인진 모르지만 이상하게 짜증이 났다. 게다가 몸도 비정상적으로 점점 뜨거워 나는 것 같았다.서늘한 밤바람이 매섭게 불어와 그의 체온을 앗아갔지만 수현은 왜인지 이 추위가 오히려 기분 좋았다.그는 이상한 느낌에 신경을 곤두세웠다.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소영을 바라보던 수현은 문득 방금 먹었던 술이 떠올랐다.어지간해선 눈앞의 사람을, 그것도 생명의 은인을 의심하고 싶진 않았는데 온몸을 휘감는 뜨거운 기운이 그에게 오늘밤 있었던 모든 일들이 어딘가 심상치 않음을 말해주고 있었다.막무가내로 찾아와서 떠날 거라질 않나, 그러다 갑자기 주식을 달라질 않나, 술을 마시자고 하질 않나. 수현은 소영의 모든 행동이 께름칙했지만 했지만 결국 그녀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었다.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수현은 바깥으로 성큼성큼 나아갔다.그 모습에 소영도 깜짝 놀라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았다.“수현 씨, 왜 그래?”그러자 수현의 발걸음이 뚝 끊기더니 서늘한 눈빛으로 소영을 노려보며 말했다.“네 생각엔?”그녀의 모든 걸 꿰뚫어 보는듯한 싸늘한 눈빛에 소영은 순간 소름이 돋아 황급히 눈을 피하며 말했다.“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그러나 수현은 그녀를 향해 냉소를 터뜨린 후 그대로 몸을 돌려 떠나버렸다.소영은 다급히 그를 뒤쫓았으나 수현의 걸음이 너무 빨라 따
윤아는 어쩔 수 없이 펜을 내려놓고 현관 쪽으로 갔다.혼자 사는 집이라 늘 조심했고, 입구에도 CCTV와 도어 뷰어를 설치했다.현관에 도착한 그녀는 먼저 인터폰으로 누구인지 확인했다.그리고 화면에 비친 사람을 보고 윤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진수현?’‘저 사람이 왜?’‘한밤중에 왜 여기까지 온 거지?’낯선 사람은 아니지만 윤아는 수현이 무슨 짓을 할지 걱정되었고, 지금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면 문을 열어주고 싶지 않았다.만약 정말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다면 전화하면 되는데.하지만...곧 합의하겠다고 약속했던 일과 앞으로도 두 아이와 만날 기회가 많은 걸 고려해 보았다.이미 결정을 내렸으니 더 이상...윤아는 고민 끝에 한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문을 열어줬다.수현은 윤아네 집 문 앞에서 오랫동안 기다렸고 문을 열어주기 전에 그는 자기 발을 내려다보았다.이미 늦은 시간이기도 했고 여기에 올 때도 그녀가 문을 열어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하여 그저 벨을 한번 눌러보고 그 뒤에 일은 운에 맡겨보기로 했다.만약 소리를 못 들었다고 해도 상관없다.수현은 한참 동안 기다렸지만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 실망감을 안고 떠나려고 하던 그때, 갑자기 문이 열렸다.문이 열린 순간, 수현은 믿어지지 않다는 눈빛으로 윤아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는데 윤아는 수현의 몰골을 보고 깜짝 놀랐다.인터폰에서는 그의 반쪽 얼굴밖에 비치지 않아 똑똑히 볼 수 없었다.하여 이제야 그의 정면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마치 술에 취한 듯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그리고 눈빛도 조금 이상했다.‘설마 취해서 지금 술주정 부리러 온 건 아니겠지?’윤아는 생각하다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있어?”수현이 입술을 살짝 다셨다.‘그러네, 이미 밤도 깊었는데 뭐 하러 여기까지 왔지? 이 상태로 대체 저 여자한테 뭐 하려고?’오지 말았어야 했다. 아무리 그녀와 다시 잘해보려고 왔다고 해도 지금 상황에서는 더욱 오면 안
그는 더 이상 여기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았고 더 있다가는 무슨 일이 터질 것 같았다.만약 다른 사람이었으면 아마 자기 자신을 컨트롤할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눈앞에는 자신이 뜨겁게 사랑하는 여자라 마치 불난 집에 기름이라도 부은 듯 욕망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잠깐.”그가 자리를 뜨려고 몸을 막 돌리던 순간 뒤에서 윤이가 그를 불러세웠다.이로인해 수현의 발걸음이 그 자리에 멈춰졌다.그가 움직이기 싫어서가 아니라 몸이 전혀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여지지 않았다.육체와 의식의 힘겨루기 끝에 수현은 자리에 그대로 서있었고 앞으로 움직이지도, 뒤를 돌아보지도 않게 된 것이다.이상하게 여기던 윤아가 그의 앞에 다가왔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수현의 이마를 짚어보았다.한참 그의 이마를 어루만지던 윤아는 뜨거운 열기를 느끼고 깜짝 놀라 물었다.“왜... 왜 이렇게 뜨거워?”문을 열자마자 그의 빨개진 얼굴을 보고 분명 취했다고 예상했고 그 때문에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와서 벨을 눌렀다고 생각했다.하지만 방금 잠깐 나눈 대화에서 이상하게 아무런 술 냄새도 나지 않았다.근데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고 말투도 어눌한 데다가 지금 잘못 찾아왔다고 얼버무렸다.윤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이마를 짚어보니 역시나 열이 펄펄 나고 있었다.“아까 저녁에 돌아갈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잖아? 왜 갑자기 열이 나는 거야? 가서 뭐 했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이 늦은 시각에 열이 이렇게 세게 나는데, 어쩔 수 없다, 내가 구급차 부를게.”말을 마치고 보니 윤아는 어딘가 이상해서 다시 말을 이었다.“아니다, 넌 지금 의식은 있는 상태라 구급차를 불러도 오지 않을 수 있어. 그리고 불러도 기다리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 좋기는 지금 바로 병원에 가는 게 좋은데...”하지만 그녀가 병원에 같이 가게 되면 두 아이만 남게 되는데, 그것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그래도...윤아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열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는 수현
윤아는 수현이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도 지금 온몸이 뜨거운 원인을 알아챘다.그러고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놀라서 그런 건지, 윤아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가 다시 꽉 깨물었다.“그래서? 이미 어떤 상황인 걸 알면서도 왜 날 찾아온 건데?”수현은 그녀를 한참 동안 안고 있다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나... 도 모르겠어.”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너 말고는.... 누구한테 가야 할지 모르겠어.”말을 마치고 얼마간 더 안고 있다가 얼굴을 그대로 그녀의 어깨에 묻었다.지금 참기 힘들 정도로 괴로운데 이렇게라도 그녀를 안고 그녀의 숨결을 느끼면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최소한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윤아라는 사실만으로도 말이다.“누구한테 갈지 몰라서 나한테 왔다고?”“아니...”그의 목소리는 마치 의식을 잃은 사람마냥 더듬거리며 겨우 말을 내뱉었다.“난... 그저... 널 만나러... 오고 싶었어. ”윤아는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이없었다.“나를 찾아와도 무슨 소용이 있어? 내가 너를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어?”말을 마치고 윤아는 힘껏 그를 밀어내면서 그의 품 안에서 벗어났다.수현은 뒤로 두 발짝 밀려나면서 벽에 부딪혔다. 눈은 반쯤 풀린 상태에 얼굴은 여전히 불타는 고구마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지금 죽을힘을 다해 참고 있는데 처량한 모습이 마치 버려진 강아지 같았다.단순히 열만 나는 상황인 줄 알았으나...윤아는 지금 당장 그를 몽둥이로 정신 차릴 때까지 때려서 내쫓고 싶었다. 그도 이번이 처음으로 여자의 속임수에 당했다.“어디 가든 난 상관 안 해. 여자한테 속아서 이 모양 이 꼴이 되다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윤아는 모진 말을 내뱉은 뒤 문을 닫았다.쾅!문을 닫는 소리가 너무 큰 나머지 메아리가 쳤다. 그리고 잠시 후 메아리가 사라지고 나니 복도는 삽시에 조용해졌다.남은 건 오직 지금 애써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수현이었다.남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윤아는 또박또박 자세하게 설명했고 수현은 원래 태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내 말 듣고 있어?”수현이 고개를 들었다.“응.”윤아는 할말을 잃었다.“...”됐다, 그의 꼴을 보아하니 윤아의 말을 전혀 듣지 않은 것 같았다. 아예 정신을 잃기 일보직전인 사람한테 무슨 말을 하겠는가?“들어와.”윤아는 뒤로 두 발짝 물러나면서 수현을 안으로 맞이했다.하지만 수현은 방안을 들여다볼 뿐 발을 떼지 않았다.“왜? 들어오기 싫어? 난 그럼 들어갈게...”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현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쾅!윤아는 그를 데리고 먼저 거실 소파로 향했다. 그리고 얌전히 앉아있으라고 한 뒤 물을 따라주겠다고 말했다.“얼음물 줘.”수현이 갑자기 말했다.“뭐?”윤아는 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다.“얼음물 마시겠다고?”“얼음.... 물 마시고 싶어, 아니면 그냥 찬 물도 돼.”“한 겨울인데...”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아는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주방에 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지금은 겨울이기 때문에 냉장고에는 얼려둔 물이 없었고 그저 차가운 맥주뿐이었다.‘차가운 맥주도 괜찮나?’‘지금 상태로는 급속으로 온도를 낮추는 게 시급해 보이는데?’고민 끝에 윤아는 차가운 맥주 두 병을 꺼내 수현에게 가져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얼마 전 그가 위출혈 때문에 병원에 갔었던 일이 떠올랐다.이 상태에서 차가운 맥주라...잠시 고민하다가 윤아는 맥주 두 병을 다시 냉장고 안에 넣었다. 그리고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왔다.그녀한테서 컵을 건네받던 수현이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얼음물은?”“없어.”“그럼... 아무 찬 거라도?”윤아는 참다못해 그에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마시든지 말든지.”그녀의 호통에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결국에는 들고 있던 따뜻한 물을 천천히 들이마셨다.그는 물을 아주 천천히 마셨는데 지금 상태를 보아하니 물 한 잔 마시는
하지만 윤아가 부드러운 손으로 셔츠 첫 번째 단추를 풀자마자 수현이 갑자기 차가운 손으로 그녀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힘도 엄청난데 꽤 폭력적이었다.윤아가 고개를 드니 수현의 검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리 밝지 않은 거실에서 수현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는데 눈빛이 마치 한 마리의 늑대 같았다.그리고 단번에 그녀를 덮칠 것 같았다.그의 모습에 윤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깨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어쩌면 깨어난 것도 다행이다. 자기 절로 알코올로 몸을 닦으면 된다. 단지... 그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설마 이성을 잃어버린 건 아니겠지?’비록 그녀가 직접 당해본 건 아니지만 만약 그 물건에 취하게 되면 자기 몸을 컨트롤하기 매우 어렵다고 듣기는 했으나 만약...윤아는 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녀의 팔목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더욱 세지고 수현의 호흡도 아까보다 더 거칠어졌기 때문이다.윤아의 얼굴빛이 살짝 변하더니 애써 손을 뿌리치려 했다.“알코올과 물수건은 여기에 둘게. 이미 깼으면 혼자서 닦.... 악!”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비명을 지르면서 수현에게 끌려갔고 곧 하늘과 땅이 뒤집히더니 단번에 그녀를 소파 위에 깔아 눕혔다. 청초했던 남자의 숨결이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그녀의 온몸을 간지럽혔다. 윤아의 손은 또다시 결박된 채 머리 위로 올려졌고 남자는 몸을 천천히 숙였다.윤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순간에도 방안에 두 아이가 곤히 잠들고 있다는 생각에 목소리를 낮추고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진수현, 지금 뭐 하는 거야?”하지만 남자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윤아가 그를 정신 차리도록 세게 걷어찰까 말까 망설이던 찰나 수현이 갑자기 모든 동작을 멈춘 채 그녀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두 사람은 아주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윤아는 그가 지금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을 죽을힘을 다해 애써 참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여 그의 미간은 아까부터 찌푸려져 있었고 뱉어내는 숨도 뜨
“들어오지 마.”수현은 애써 자제하는 듯했지만 숨은 여전히 거칠게 몰아쉬었다. 또한...그것에 중독된 상태이기에 지금 안에서 말로 묘사하기 힘든 짓을 할 것이다. 윤아는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당장 그를 안에서 꺼내주고 싶었다.참다못해 그녀는 문밖에서 그에게 말했다.“너... 찬물 샤워만 해. 다른 이상한 짓은 하지 말고.”하지만 안쪽에서 들리는 건 물소리를 동반한 낮은 숨소리였다.윤아는 살짝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수현 씨, 내 말 듣고 있어?”“수현 씨!”윤아가 아무리 수현을 불러도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말을 상대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사람처럼 말이다. 그리고 지금 아주 바쁜 상태라 그녀의 말에 대답할 시간이 없다.윤아는 화가 났지만 여기서 더 이상 소리쳐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포기했다.하여 다시 몸을 돌려 거실로 가서는 그가 마셨던 물컵을 부엌에 가져가서 씻은 뒤 다시 돌아와서 두 아이의 상태를 살펴보았다.다행히 두 아이는 여전히 곤히 자고 있어 윤아는 조금이나마 안심되었다.몇 분 기다렸다가 그녀는 다시 화장실 쪽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안에서 물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수현은 마치 화장실에서 잠들었는지 그녀가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하지만 그녀는 문 앞에서 여전히 이상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이 나쁜 자식!’윤아는 속으로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지만 결국에는 거실에 와서 이불을 껴안은 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기다리다 못해 그녀는 졸리기 시작했지만 수현은 여전히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아 이제는 아예 소파에 기대 살짝 눈을 감았다.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윤아가 갑자기 잠에서 깼다. 거실은 여전히 조용했으나 이상하게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수현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설마 욕실에서 너무 추운 나머지 쓰러진 건 아니겠지?’윤아는 냉큼 이불을 가지고 욕실로 향했다. 이번에는 더 이상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욕실 안은 고요했다.그녀는 문고리를 잡고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