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영과 석훈이 수현을 부축하며 술집에서 나갔고, 그들 뒤엔 담담한 얼굴을 한 김양훈이 따르고 있었다.”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왜 갑자기 이렇게 많이 마신 건데? 석훈 씨, 수현 씨 마실 때 좀 말리지 그랬어.”여신님에게 꾸지람을 들은 석훈은 조금 슬펐다.“말렸지. 근데 너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수현이가 우리 말 들을 리가 없잖아. 말리는 사람이 너라면 모를까.”소영은 이 말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참, 다 성인이 된 지가 언젠데 자기 몸 아낄 줄 몰라.”그들은 힘을 모아 수현을 차에 옮겼다.윤아는 어둠 속에 서서 그들의 모습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순간,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던 수현이 갑자기 뭘 느꼈다는 듯 소영의 가녀린 손목을 덥석 잡고는 잠꼬대했다.“가, 가지마...”소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금세 정신을 차리고 수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알겠어. 나 안 갈게, 수현 씨.”여기까지 본 윤아는 더는 이 자리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그녀는 이 늦은 시각에 이곳에 온 걸 뼈저리게 후회했다.그 전화를 받지 말았어야 했다. 이곳까지 달려와서 수모를 겪는 것이 아니라 그냥 침대에 누워 잠이나 잘 걸 그랬다.윤아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다. 왜 가슴 안쪽 깊숙한 부분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줘 그들이 함부로 짓밟고 다니게 하는 건지, 왜 이걸 허용했는지 잘 모르겠다. 꼭 짓밟히고 나서 피가 나고 망가져야 단념할 텐가!윤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몸을 돌려 자리를 뜨면서 더는 그들을 상관하지 않았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그 후의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다. 소영이 말을 끝내자마자 수현은 갑자기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비틀거리며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소영을 곁에 서 있던 석훈이 잽싸게 부축해 줬다.“소영아, 괜찮아?”소영은 머리가 멍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양이다.‘아까... 수현 씨가 날 밀친 거야?’‘아냐... 그냥 힘껏 뿌리쳤을 뿐이야.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을까? 아니면...’석훈의 힘
소영의 말을 듣고 석훈은 즉시 머리를 끄덕이며 긍정의 뜻을 표했다.“그래. 이렇게 취했는데 돌봐줄 사람이 없으면 안 되지. 그럼 우리...”“아니, 그냥 내 집에 데려갈게.”석훈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양훈이 갑자기 말을 가로챘다. 그의 목소리는 묵직했고 듣는 사람에게 믿음을 주는 것 같았다.“아까 들었잖아. 내 이름 부르는 거. 현이 뜻대로 하지 않으면 나중에 날 귀찮게 할 거야.”양훈은 수현의 오래된 친구였다. 그가 수현을 알고 지낸 세월은 석훈과 소영보다 훨씬 오래되었다.게다가 성격이 차분했고 또 평소에 쓸데없는 말 대신 늘 침묵을 유지해서 그런지 입을 열기만 해도 뭔가 중요하게 다가와 거절하기 힘들었다.지금도 그랬다.소영은 눈앞의 김양훈을 바라보았다. 비록 지금 그에겐 별 정서 기복이 보이지 않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자신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양훈은 수현의 친구였다.‘내 착각일지도 몰라.’소영은 이렇게 생각했다.석훈은 양훈의 말을 듣고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는 소영의 편을 들어 말했다.“수현이 지금 취했잖아. 내일 깨어나면 자기가 어제 뭘 말했는지 기억도 못할 텐데. 김양훈, 넌 또 그걸 믿냐?”석훈은 소영을 바라보며 빙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하물며 사내자식이 수현이 잘 돌볼 수 있겠냐. 역시 소영 집으로 보내는 게 훨 나아.”양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석훈을 뚫어질세라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내 말은 우선 우리 집으로 데려가고, 만약 너희들이 정 마음 놓이지 않는다면 남아서 돌보면 된다는 뜻이야.”석훈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반박했다.“김양훈 너...”“됐어, 석훈 씨. 우리 양훈 씨 말 따르자.”웃으며 석훈의 말을 끊는 소영.“양훈 씨는 늘 차분하고 세심했잖아. 나보다 더 잘 돌봐줄 거야. 내가 아까 잘못 생각했나 봐.”말을 마치고 소영은 또 양훈에게 선한 미소를 지었다. 비록 속은 이미 부글부글 끓어오른 지 오래됐지만 말이다.양훈은 수현의 보기 드문 친구 중 한 명이었다. 소영
석훈이 이 말을 꺼내자, 양훈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양훈이 애초에 윤아에게 이 제안을 했을 때, 그녀의 태도는 결코 나오기 싫다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그런데 사실, 석훈이 소영을 집으로 데려가고 있을 때, 양훈은 윤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세 번 건 후에야 윤아가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에요?”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차가웠고, 전에 전화할 때의 상태와는 전혀 달랐다.윤아의 앞뒤 태도의 바뀜에 의아해하고 있을 때, 양훈은 갑자기 뭔가가 떠올랐다. 그는 물었다.“왔었죠? 설마 본 겁니까?”핸드폰 저편에서는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목소리가 들려왔다.“안 나갔어요. 그 사람과 같이 있다니 잘 돌봐줘요.”이 말을 마치자마자 그쪽에서 전화를 끊었다.처음엔 양훈은 윤아가 참 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뭔가 짚이는 데가 있었다.만약 정말 오지 않았다면 봤냐고 물었을 때 그게 뭐냐고 되물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침묵했고 조금 지나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안 나갔다 답했다.양훈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석훈이 아직도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저렇게 독한 여자가 어딜 봐서 소영이보다 낫냐? 소영은 수현이의 생명의 은인이야. 그때 수현이를 구하려 자기 목숨도 마다하지 않았잖아. 손까지 다치는 바람에 지금까지 흉터 남았고. 내가 진수현이라면 반드시 강소영과 결혼한다.”석훈의 말에 양훈은 반박했다.“은혜와 사랑이 같냐?”“안돼? 소영이 또 얼마나 예쁜데. 남자라면 다 좋아할 스타일이야. 그리고 네 목숨까지 구해줬다고 생각해 봐. 그때면 같다고 여겨도 되지 않냐?”양훈은 소영에게 눈이 먼 석훈과 상대하기 싫어 방으로 들어갔다.-기나긴 밤이 지나갔다.이튿날 아침, 잠에서 깬 수현은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그래서인지 머리도 느리게 돌아갔다. 그는 주위 낯선 환경을 둘러보며 몸을 일으켰다.“깼어?”양훈이 따뜻한 물을 수현의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글쎄?”양훈이 되물었다.두 사람의 시선은 공중에서 맞물렸고 잠시 눈을 맞추다 양훈이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왜? 네가 바라던 사람이 아니라서 실망했냐?”누굴 말하는지 두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뻔히 알고 있었다.잠시 침묵하다 수현이 갑자기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실망하긴. 오든 말든 실망할 게 뭐가 있다고. 너도 참, 헛다리 짚기는.”“그래?” 양훈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네가 신경 쓰지 않는다니 그만 말할게.”그리고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수현의 미간은 점점 좁아지며 불쾌하다는 듯 양훈을 째려보았다.“알고 있는 거 다 말해봐. 뜸 들이지 말고.”“내가 언제 뜸을 들였다고.”의아해하는 양훈.“난 또 네가 알고 싶지 않은 줄 알았지. 듣기도 싫은 걸 말했다가 짜증이라도 내면 어떡할까 해서. 왜, 알고 싶냐?”진수현: “......”‘아 제길, 난 어쩌다가 김양훈 이 자식을 친구로 둬서는... 어우 진짜 못 살아.’수현은 더는 상대하기 싫어 이불을 걷어차고는 침대에서 내려와 슬리퍼를 신었다. 동작이 영 난폭했지만 말이다. 표정도 여간 굳어있는 게 아니었다.수현이 옷매무시를 정리한 뒤, 방문이 열리면서 석훈이 걸어들어왔다. 석훈은 수현이 깬 것을 보자 금방 달려가 인사했다. 그리고 어젯밤, 소영이 술집까지 달려와 수현이를 걱정했다는 사실도 전했다.소영이 이름을 듣자, 수현의 얼굴색은 그나마 나아졌다.“현아, 아까 소영이가 전화해서 물어봤어, 너 어떠냐고. 깼으면 알려달라고 그랬어. 어찌나 네 걱정을 하던지.”“알겠어.”수현은 핸드폰을 꺼내 주소록을 뒤지면서 소영의 연락처를 찾았다. 바로 이때, 그는 윤아와의 통화 기록을 발견했다.수현의 눈동자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목소리마저 살짝 잠긴 채 급히 물었다.“어젯밤, 소영이 빼고 또 누구에게 전화했어? 아니면 전화 왔었냐?”“누군데?”석훈은 수현의 핸드폰을 화면을 힐끗 보더니 금세 알아챘다.“아, 심윤아 말해? 양훈이가 전화 걸어서 말했거든, 너
양훈은 어젯밤 일을 수현에게 알려줬다.자초지종을 전부 전해 들은 수현은 한참 동안 침묵했다.양훈은 그런 수현을 잠시 지켜보다가 말을 이었다.“그런데 말이야. 윤아 씨가 술집 밖에 서 있는 우리를 보고, 특히 강소영을 보고 나타나지 않았던 건 아닐까.”양훈의 이 한마디는 수현의 정곡을 찔렀다.수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생각하다가 양훈의 가설을 금세 부정했다.“아닐 거야.”양훈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그래?”“심윤아 걔 소영이와 원수 진 적도 없는데 왜 소영이를 본다고 나타나지 않았겠어.”수현은 여기까지 말하고 자조 섞인 웃음을 흘렸다.“그냥 단순히 날 만나고 싶지 않아서겠지.”양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깊은 사색에 잠겼다.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두 사람은 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수현의 핸드폰이 울리면서 이 침묵을 깼다. 발신인은 강소영이었다.곁에 서 있던 양훈도 이걸 보고는 수현이 전화를 받으러 나가기 전 한숨 쉬며 물었다.“넌 아직도 자기가 뭘 원하는 지 모르는구나.”이 말을 들은 수현은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돌렸을 땐, 양훈은 이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수현 혼자 덩그러니 그 자리에 남아 아직도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정말 제대로 결정한 거 맞아?”어제까지 윤아를 걱정하던 주현아는 오늘 새로운 소식을 들을 줄 꿈에도 몰랐었다.“응.” 윤아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시커먼 밤하늘의 구름이 걷히고 환한 달을 맞이한 듯, 자금의 그녀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어 보였다.역시, 목표가 있어야 방황하지 않는다.예전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했을 땐 앞날이 막막했고 끝이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결정했더니 예전엔 캄캄했던 앞날이 훤히 보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앞으로 해야 하는 것들을 제대로 정할 수 있었다. 목표를 향해 열심히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에.“와, 진짜 너무 잘됐다.”현아는 환하게 웃으며 소영의 두 손을
“데리고 놀아?”데리고 논다는 말에 윤아는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반면 현아는 잔뜩 들떠 턱까지 괴고 말했다.“그래그래. 아기와 노는 게 얼마나 재밌는지 모르지? 예를 들어줄게. 만약 여자아이라면 넌 매일 아이를 예쁘게 단장시킬 수 있어. 살아 있는 인형이 따로 없다니까? 너 어릴 때 슈 옷 입히기 게임 놀아봤지? 그 게임 속 캐릭터를 단장시키는 것처럼 말이야.”윤아는 침묵했다. 게임에는 손도 안 대본 그녀는 잔뜩 심각해져서는 현아를 바라보았다. 현아가 이런 생각까지 했다니.“아 참, 그때가 되면 내가 아이를 돌봐줄게.”현아는 두 손을 비비며 눈을 반짝였다.“네가 일이 바쁘면 내가 네 집으로 들어가 같이 사는 건 어때? 흐흐. 확실히 해두는데 나 절대 아이와 놀고 싶어서 너랑 같이 살겠다는 거 아니다?” 윤아는 말문이 막혔다. 현아가 왜 나더러 아이를 낳자 했었는지 알 것 같았다.“아 참.”그때 현아가 갑자기 심각해지며 물었다.“잊을 뻔했네, 강소영 말이야. 어제 널 찾아왔어?”“응.”“뭐? 너한테 뭐라 했는데?”윤아는 어제 있었던 일을 현아에게 모두 말해줬다. 어제의 자초지종을 들은 현아는 이번에도 감정을 표정으로 다 드러내며 천불을 냈다.“내가 정말 못살아. 그 여자는 대체 무슨 낯짝으로 너한테 돈을 주는 건데? 자기가 뭐라고 되는 줄 아나 봐? 널 첩으로 여긴다 이거야? 아니면 뭐 진수현과 사귀는 사이라도 돼? 어디서 안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현아가 강소영 욕을 신명 나게 하고 있을 때 윤아는 이제 현아를 말리기도 귀찮은 듯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현아는 태생이 이런 성격이라 분노를 쏟아낼 때 말린다면 속에서 천불이 나 화병으로 앓아누울지도 모른다.윤아는 현아가 하고 싶은 말들을 마음껏 쏟아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녀에게 휴지를 건네주며 말했다.“이번 한 번만이야. 다음부턴 소영 씨 뭐라 하지 마.”“뭐?”현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그 여자는 지금 너를 그렇게 막 대했는데 넌 지금 그 여자 편들어주는 거
윤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아 핸드폰을 꼭 움켜쥐고 물었다.“왜 절 도와주는 거예요?”윤아와 강소영의 사이는 좋다고 하기도 모호한 정도였다. 둘은 진수현의 친구를 통해 알게 된 사이다. 그렇다고 평소에 그다지 친하게 지내진 않았다. 후에 진수현이 강소영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더더욱. 윤아는 그때부터 되도록 소영과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그녀는 자신을 한 번도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이라 생각한 적이 없기에 강소영을 증오하진 않을 수 있지만 절대로 그녀와 친구는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을 도울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소영은 윤아의 말에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윤아 씨는 수현 씨 친구잖아요. 그러면 나한테도 친구예요. 당연히 도와줘야죠. 윤아 씨도 너무 부담 갖지 말아요. 제가 도운 것도 말하지 말고요. 그냥 수현 씨가 도운 거로 생각해요.”윤아는 소영의 말을 듣고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그녀는 진수현 때문에 날 도운 거다. 윤아의 핏기 없는 입술은 뭔갈 얘기하려는 듯 한참을 달싹이다 멈췄다. 그때, 아버지의 심한 기침 소리와 함께 주변 사용인들의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심인철 회장님, 괜찮으세요? 아가씨, 어서 병원으로 가야 해요!”소영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아버님 괜찮으세요? 윤아 씨, 그럼 얘기는 이만하고 어서 아버지 모시고 병원으로 가요. 기사님도 곧 도착할 거예요.”윤아의 시선은 아버지를 향했다. 그는 낯빛이 창백하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주먹을 쥔 그의 손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듯 힘이 잔뜩 들어가 더욱 애처로워 보였다. 그러다 결국, 그의 주먹이 스르륵 풀리더니 그대로 맥없이 손을 툭 떨궜다. 마치 꼭 잡고 있던 희망을 버리고 차디찬 현실에 몸을 맡기듯.윤아는 수화기 너머의 소영에게 말했다.“소영 씨에게 신세 진 거로 할게요. 고마워요.”“네? 아니에요. 그냥 수현 씨가 도운 거로 생각하고 어서 아버지 보살피
신세는 바로 그때 졌었다.그 후에도 윤아는 이리저리 도움을 요청하고 다니며 알게 됐다. 그때 강소영의 그 전화 한 통이 얼마나 적절했는지 말이다. 심씨 가문이 망하면서 모든 자산을 잃었지만 오직 그 집 한 채만 지킬 수 있었다. 이후에 다시 사업을 시작할 때도 윤아는 그 집을 아버지의 명의로 돌려 아버지가 다시 시작할 발판으로 삼으려 했었지만 그가 거절했다. 심인철은 그늘진 얼굴로 말했다.“이 집은 네가 알아서 처리하렴. 네 아버지 예전에도 아무것도 없이 시작해 이 집을 일궈냈었다. 이번에도 꼭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다. 이 집은 그 사람들에게 담보로 맡기고 강소영 씨에게 밥 한 끼 사주면서 뭐라도 도울 일이 없는지 알아봐. 신세 진 건 빨리 갚아야지.”“아빠...”그 신세가 어떻게 그리 쉽게 갚아질 수 있겠는가.심인철은 윤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아빠가 가진게 아무것도 없다 해도 절대 우리 공주님 연적한테는 머리 숙이지 않아. 걱정하지 마, 아빠 꼭 다시 일어날게. 아빠가 친구한테 이미 말해놨어. 그 친구가 우릴 도와줄 거야.”아니, 거짓말이다.윤아는 아버지가 통화할 때 그 사람에게 거절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다. 아버지가 말한 그 친구는 오래전 우리 집의 도움을 많이 받았던 분이다. 하지만 우리 집안이 도움이 필요한 지금, 그 사람은 발을 빼고 우리를 배신했다.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다 윤아의 걱정을 덜기 위함이었다. 더우기는 윤아가 강소영의 도움을 더는 받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였다.윤아는 머리를 떨구고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녀의 모습은 초라했고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아빠.우리 진천명 아저씨를 찾아가는 건 어때요...”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심인철은 낯빛이 어두워져서는 말했다.“안돼!”“그가 지금은 이 일들을 모르고 있다지만 만약 알게 된다면 우리가 도움을 구하지 않아도 주동적으로 우릴 도우려 할 거다. 하지만 윤아야, 그의 도움을 받는다면 넌 이제 어떡하니? 우리 공주님... 내가 널 정말 공주님처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