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은 윤아의 턱을 잡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뭔 상관인데.”윤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웃긴다. 내가 언제 상관했다고 그래? 마음대로 해.”그러자 아무 표정 없이 그녀에게 손을 내미는 수현.“그러면 통화기록이나 내주시던지.”“진수현, 너 돌았어?”“마음대로 해라며.”“네 마음대로 하라는 거지 나에게 그렇게 하라는 뜻은 아니잖아. 독해 능력이 이래서야 되겠어?”“왜 이렇게 흥분하는 거야. 연수 씨와 통화했다면서 기록도 못 내놓냐? 아니면 다른 사람과 통화했어?”“...”“설마 너의 그 잘난 찬영 오빠야?”“...”이제야 알 것 같았다. 수현이 왜 자신을 시험하려 했는지, 왜 이렇게 삐딱하게 말하는지.그냥 말하는 소리만 들었지 내용은 제대로 듣지 못한 거였다. 그래서 그녀가 당황한 모습만 보고 연수가 아닌 찬영과 통화했다고 오해했구나.강찬영...세번째였다. 수현이 찬영 때문에 화낸 게.이렇게 생각하자 윤아는 침묵했다. 동시에 불안에 벌렁벌렁 뛰고 있던 심장도 점차 진정되었다.이것 때문이라면 상관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윤아를 보자 수현의 표정은 썩을 대로 썩어있었다.“심윤아, 왜 아무 말도 안 해?”침묵은 묵인을 뜻한다. 설마 진짜 강찬영과 통화한 거야?비록 내용은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말투가 아주 부드러웠다는 것만은 똑똑히 들었다. 그에겐 한 번도 이런 말투를 써주지 않았다.심지어 어렴풋이 ‘자기’라는 단어와 ‘먹다’, ‘쉬다’ 도 들은 것 같았다. 결국 수현은 ‘아기’를 ‘자기’로 들은 것이다.조합해 보면 상대방을 자기라고 부르면서 뭘 먹은 후 쉬라고 했을 것이다.아직 자신과 한 침대에서 함께 자는 이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자기라고 한 것만 생각하면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더 화난 부분은 윤아의 대수롭지 않다는 담담한 태도였다. 그가 따지고 있는 와중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 올려 보이질 않겠는가,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말 할 필요 없으니까. 네
윤아는 작은 입으로 한마디에 한마디를 이어 말했는데 수현은 하나도 반박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는 윤아의 말재주가 참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처음 윤아를 비즈니스 협상에 데려갔을 때 그녀는 이런 수준의 업무를 접해본 적이 없는 데다가 나이까지 어리니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녀는 점점 더 잘해갔고 입만 열면 압도적인 아우라를 뿜어냈으며 논리나 사로도 아주 또렷했다.그래서 매번 상대방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지금도 그녀는 자신을 이런 식으로 대하고 있었고 수현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소영이 집에 왔던 건 사실이었고 확실히 그녀의 옷을 입었다.아무 말도 못 하는 수현을 보며 윤아는 입꼬리를 올리며 서늘한 웃음을 지었다.“이번엔 네가 침묵하네? 진수현, 바꿔서 생각해 봐. 내가 다른 남자를 데려와서 네 옷까지 입혔어. 어때?”“...”윤아가 한 말만 들어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게 만약 진짜 벌어진 일이라면...수현이 더는 입을 열지 않는 것을 본 윤아는 그 틈을 타 그를 밀어내고는 노트북을 가진 채 자리를 떴다.방에 돌아온 후, 윤아는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아까 그렇게 말해 놓았으니, 수현은 분명 머리가 흐릿했을 것이다. 그러니 다른 건 꼬치꼬치 캐묻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아무래도 좋으니, 그녀의 비밀만은 들키지 않으면 되었다.윤아는 노트북을 잘 챙겨두고 아래층에 내려가 주방에서 먹을 것을 찾아보았다.점심 재료를 준비하고 있던 요리사는 그녀가 온 것을 보자 얼른 인사했다.윤아는 주위를 한눈 둘러보고는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아저씨, 오늘은 간식 있어요?”“네, 그럼요.”요리사의 이름은 김성철이었다. 그는 재빨리 몸을 돌려 뒤쪽에 있는 궤짝을 열고는 그 안에서 예쁜 간식을 꺼내 윤아에게 건넸다.이걸 본 순간, 윤아의 두 눈은 반짝거렸다. 하얗고, 통통하며 동글동글한 찹쌀떡과 슈크림이었다.윤아의 눈빛을 본 성철은 이 간식을 만든 게 옳은 선택임을 깨닫고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어, 저도 그냥 아무렇게나 추측해 본 거예요. 오늘 아침에 만든 물고기 국이 얼마나 맛있었다고요. 비린내가 조금도 없었어요. 그런데 사모님께서는 맡기만 했을 뿐인데 그렇게 심하게 토하지 않으셨어요. 제 새언니도 임신했을 때 그랬거든요. 비린내는 절대 못 맡아요. 그냥 일반인보다 예민해져서요. 그리고 입맛도 많이 바뀌었어요.”성철은 들으면 들을수록 더 놀라웠다.이 도우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었다.만약 윤아가 정말 임신하기라고 했다면 그는 반드시 식단을 조절해야 했다.성철은 재빨리 머릿속에서 이 포인트에 동그라미를 쳤다.-윤아는 두 개의 찹쌀떡과 여러 개 슈크림을 먹고는 아주 만족한 마음에 배를 가볍게 두드렸다.예전엔 왜 맛있는 줄 모르고 살았지?배 속에 아기가 먹기를 참 좋아하는 것 같았다.“벌써 식탐 많은 거 봐.”배를 톡톡 치며 낮은 소리로 사랑스럽다는 듯 말했다.임신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윤아의 배는 아직 평평했고 임신한 티가 나지 않았다. 그러니 아기가 그녀의 말에 반응하는 것은 불가능했다.하지만 그렇다 해도 윤아는 아기에게 혼잣말하며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얼마 지나지 않아 졸음기가 몰려온 윤아는 이를 닦고 침대에 누워 잠을 잤다.조금만 자려고 했으나 오후 두 시가 다 되어서야 눈을 떴다. 시간을 보고 벌떡 몸을 일으킨 윤아.벌써 두시라고? 늦잠을 자버리다니!방안은 제법 조용했다. 옷을 갈아입고 급히 아래층에 내려갔더니 거기도 무척 조용했다. 도우미 한 명이 윤아가 내려온 것을 보고는 그녀에게 인사했다.“사모님, 깨셨어요?”“네.”윤아는 도우미를 보며 물었다.“할머님께서는 깨셨나요?”“네. 이미 점심 식사까지 하셨어요.”선월이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려 했을 때 도우미는 말을 이었다.“지금은 대표님께서 어르신 모시고 밖에 나가셨어요.”“어딜요?”“그건... 저희도 잘 모릅니다.”윤아는 사실 남자인 수현이 선월을 꼼꼼하게 보살피지 못할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전화를 쳐서 어디 갔냐고 물어
성철이 방금 한 말에 담긴 메시지는 너무 많았다. 그래서 윤아는 약간 도둑이 제 발 저린 느낌이 들었다.설마 성철이 바뀐 자신의 입맛으로부터 뭔가 눈치채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성철은 깜짝 놀라는 윤아를 보자 왜 그러는지 잘 모르겠다는 듯 손을 비비며 점잖게 웃었다."사모님 입맛이 갑자기 달라지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저도 식단을 조금 조절해 보았어요. 왜 그러세요, 사모님?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입맛이 바뀌다라...다른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분명 의심할 게 뻔했다.윤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엄숙한 얼굴로 성철을 보면서 조용히 말했다."아저씨 제 입맛이 어디가 달라졌다는 거예요. 전 그냥 간식 좀 먹었을 뿐인데."윤아의 말에 성철은 조금 어리둥절해 있었다. 그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일리가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윤아는 그저 간식을 조금 먹었을 뿐인데 왜 입맛이 바뀌었다고 생각했을까. 성철은 조금 머쓱해졌다."죄송합니다, 사모님. 제가 넘겨짚었네요."윤아는 눈썹을 살짝 추켜올리며 말했다."괜찮아요. 아저씨는 그저 본분을 다했을 뿐이에요. 얼마 전에 너무 기름진 음식만 먹어서 그런 가, 입맛을 좀 바꾸고 싶네요. 그리고 이젠 할머님께서도 본가에서 요양하시잖아요. 수술도 해야 하시고요.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담백한 식단으로 만들어주세요."한마디 한마디마다 성철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물론이죠. 앞으로는 담백한 음식으로 준비할게요. 역시 사모님께서 세심하게 생각하시는군요."윤아는 그저 웃기만 하며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아, 사모님. 점심 후에 간식을 드시겠습니까? 특별히 사모님을 위해 과일 찹쌀떡을 만들었습니다."과일 모찌 찹쌀떡.윤아는 이런 음식을 먹어보지 못했지만 입이 머리보다 빨리 대답을 해버렸다."좋아요."정신이 들었을 때는 성철이 빙그레 웃으며 알겠다고 하며 멀리 가버렸다."..."윤아는 제 아랫배를 보며 속으로 궁시렁거렸다.식탐 많은 녀석!'이건 절대 내가 먹고 싶은 게 아니야!'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과 소영의 관계가 결백하지 못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전화를 치면서 부르려는지 이해가 안 됐다.곧 수현의 머릿속엔 고집만 센 윤아가 이걸로 자신이 열받았으면 하는 속셈으로 이렇게 말한다는 생각이 스쳤다.어제 이 문제를 두고 다퉜기 때문에 오늘 또다시 이걸로 자신에게 보복하려는 것이다.이렇게 여긴 수현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걔를 왜 불러?”직접 나서서 소영이 오기를 막는 수현을 보며 윤아는 살짝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그에겐 유리한 일이었다. 앞으로 자신과 이혼한 후 분명 소영과 만날 테니까 말이다. 그때 가서 만약 소영이 선월과 사이가 좋다면 그도 덜 혼날 것이라고 생각 되었다.“할머님과 되게 잘 지내는 것 같고 또 할머님을 즐겁게 해드리잖아. 그래서 부르려는 거야.”수현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부르면 와? 남은 출근 안 하는 줄 아나 봐?”선월은 아침부터 둘 사이 분위기가 조금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부부끼리 다투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감정이 좋아야 여러 가지로 투정도 부리기 때문에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지금 두 사람이 의논하는 것을 듣자, 선월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그러게, 윤아야. 소영 씨도 출근해야 할 텐데. 그리고 어제 이 할미와 하루 동안 함께 있어 줬잖니. 오늘까지 오라는 건 곤란할지 싶구나.”여기까지 말한 후, 선월은 손을 뻗어 윤아를 툭툭 치면서 말을 이었다.“그러니 됐다, 윤아야.”어제 소영과 그녀를 초대할 거라고 약속했었다. 이 정도까지 했으니, 약속을 어긴 셈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반대한 사람이 수현이었으니 말이다.이렇게 생각한 윤아는 수현을 힐끔 보고는 선월을 향해 머리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소영 씨에게 민폐 끼치지 않을게요. 그저 할머님을 아주 좋아하길래 부르려고 했어요. 아마 거절하지 않을 거예요.”선월은 그저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 대화가 끝난 후, 다들 계속 아침을 먹었다. 하지만 수현의 표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갈 때 윤아의 머릿속엔 단 한 가지 생각만 들었다.삼 초라며? 삼은 어디 갔는데?키도 크고 다리도 길었는지라 수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방에 도착했다.윤아는 방에 돌아오면 수현이 자신을 내려줄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안고 꼿꼿이 서서 버티고 있었는데 마치 급소라도 맞은 것 같았다.“나 내려줘.”전혀 듣지 못한 것처럼 고개를 숙여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는 수현.“소영에겐 내가 잘 말해둘게.”심윤아: “?”뭔 뜻인 거야? 뭘 말해둔다는 거지?“네가 말했잖아. 나와 강소영 사이가 결백하지 않다며. 그래서 소영이 오늘부터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야. 회사도, 집도 오게 하지 않을 거고 네 옷을 입는 일도 없도록 할게.”여기까지 듣자, 윤아는 가슴이 철렁했다.수현이 이 말을 한 의도를 잘 몰랐다.강소영더러 회사도, 집도 오게 하지 않겠다니, 왜 갑자기 이러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왜?”윤아는 더 이상 심술부리지 않고 차분하게 물었다.그러자 진지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수현.이 시선에 윤아는 조금 놀랐다. 왜 갑자기 이러는 건지 잘 모르겠으니까.“다음부턴 그 사람에게 전화 걸지 마.”갑자기 앞뒤 없는 말을 내뱉는 수현에 윤아는 어리둥절했다.윤아: “?”뭐라고?“그 사람에게 자기라고 하지도 말고 걱정해 주지도 마.”수현은 거의 어금니를 깨물며 마지막으로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전화를 걸지도 말고 자기라고 하지도 말라니, 뭔 소리인지 도통 모르겠다. 잠시만...‘어제 일 때문에 이러는 거야? 내가 언제 자기라고 했다고... 자기? 설마... 아기!”이렇게 생각한 윤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제야 드디어 알 것 같았다. 어제 수현이 왜 그렇게 화냈는지 말이다.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몇몇 단어는 어렴풋이 들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찬영을 자기라고 불렀다고 여긴 것이었다. 결국 그는 아기를 자기라고 잘못 들었었다. ‘이렇게 오해해서 소영 씨 일로 나와 상의하던 거
이 일은 아주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저 잠시 잊고 잊었을 뿐이었다. 아마 남자로서 특유의 자존심에 이성을 잃은 게 분명했다.하지만 웃긴 건 그녀가 아직도 수현에게 희망을 품고 있다는 점이었다.정말 너무 황당했다.강소영이 귀국한 그날, 자신과 깊은 입맞춤을 하다 말고 핸드폰 벨 소리에 바람처럼 사라진 수현. 그리고 자신의 옆자리에 누워 이혼하자고 제안했을 그 시각부터 두 사람 사이는 마치 금 간 도자기처럼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었고 더 이상 불가능했다.결국, 윤아는 수현을 밀치고 땅바닥에 착지한 후,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고, 수현도 더는 쫓아오지 않았다.이상한 점이라면 그날 소영이 자신에게 전화를 걸지도, 메시지를 보내지도 않으면서 조용히 있었다는 거였다. 윤아라고 먼저 연락할 이유도 없었다.이튿날.젊은이들의 일을 방해할까 봐 걱정되던 선월이 집에서 자신을 보살피지 않아도 된다고 화내는 시늉 하며 말하는 바람에 윤아도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는 회사에 출근했다.며칠 동안 수현과 거의 절반쯤은 집에서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일이 지체된 건 사실이었다. 집에 있을 때는 괜찮았는데 이렇게 회사에 있으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중간에 쉴 시간도 없었다.이렇게 오후까지 일하고 나서야 윤아는 잠시 책상에 엎드려 쉬게 되었는데 눈을 아예 뜰 수가 없을 정도로 힘들었다.예전엔 이렇게 빡센 업무를 하루 이틀 정도 계속해도 괜찮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너무 무리였다. 이렇게 힘들어하는 윤아를 안타까워한 연수는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포장해 윤아에게 건넸다.구내식당의 음식은 솔직히 별로였다. 게다가 연수가 배고플 그녀를 위해 고기가 들어간 메뉴만 포장해 왔는데 지금은 보기만 해도 속이 메슥거려서 결국 뚜껑을 다시 닫고 말았다.“윤아 님, 안 드세요?” 설마 제가 가져온 음식이 입맛에 안 맞으세요?”“아뇨.”윤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냥 힘들어서 밥이 잘 안 넘어가네요. 저 내려가서 죽 좀 사 와야겠어요.”그러자 발 벗고 나서는 연
사색에 잠겨있을 때 죽집 사장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윤아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아가씨, 주문하신 야채죽과 크림 빵 나왔어요.”사장이 포장해 놓은 물건을 건네자, 윤아는 손을 내밀어 받았다.“고마워요.”“네. 살펴 가시고 다음에도 또 오세요.”윤아는 봉지를 들고 몸을 돌려 죽집을 떠났다.회사에 돌아가는 길에서도 여전히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이상한 느낌은 회사 로비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사라졌다.아까 그 검은색 차 안에 사람이 있었던 거야, 없었던 거야.사실 회사로 걸어갈 때 어차피 사람도 없을 텐데 한번 가서 봐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소름 끼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점심때에 주차장에 세운 거라면 사람이 없을 가능성이 컸다. ‘너무 넘겨짚었나 봐.”윤아는 눈을 비비며 이렇게 생각했다.띵-엘리베이터가 일 층에 도착한 후, 윤아는 걸어 들어갔다.오후에 바쁘기 시작하니 점심의 이 에피소드는 새까맣게 잊어졌다.거의 퇴근 시간에 가까울 무렵, 연수가 윤아를 찾아왔다.“윤, 윤아 님, YM그룹 쪽에서 저희와 저녁 약속을 잡았어요.”연수는 잔뜩 긴장한 채 손을 꼭 맞잡았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한참 동안 뒤에 말을 잇지 못했다.“혼자 가기 무서워요?”윤아는 연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쉽게 알아차렸다.이 말을 듣자, 연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낮은 소리로 말했다.“죄송해요, 윤아 님. 제가 지나치게 겁먹은 것 같아요. 그냥 저 혼자 갈게요. 아까 말한 거는 그저 못 들은 거로 해주세요.”“거기 서봐요.”윤아는 연수를 부르며 몸을 일으켰다.“연수 님, 준비하세요. 제가 같이 가줄게요.”아마 마지막일 것이다.“어어! 진짜요? 고마워요, 윤아 님. 저 빨리 준비하고 올게요.”연수와 함께 저녁 식사에 참석해야 하므로 윤아는 수현에게 야근하니까 먼저 퇴근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진수현: 「?」진수현: 「야근? 오늘 회사에서 야근 안배 없었던 거로 기억하는데.」심윤아: 「비서 일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