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오해요?”주한이 현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우리가 그런 사이라고 오해하죠. 시골에서 살아봤어요?”원래는 시골에서 안 살아봤으면 소문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고 말하려다가 주한도 자수성가했다는 게 떠올랐다. 자수성가란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하여 임시로 시골에서 살아봤냐고 말을 바꿨다.아니나 다를까 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럼 시골에서 소문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알겠네요.”시골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면 설명하기도 쉬워진다.“지금 여기서 걸어 나가면 내일은 우리가 이미 결혼했다고 소문날 거예요. 그러면 대표님 명예에도 금이 갈 거 아니에요.”이를 들은 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현아를 바라봤다.“원한다면 지금 당장 결혼할 수도 있어요. 그런 소문이 왜 내 명예에 영향 준다고 생각하죠?”“...”현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주한의 말에 너무 놀란 나머지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무, 무슨 소리예요!”“헛소리인지 아닌지는 곧 알게 될 거예요.”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만약에 소문이 두렵다면 다시 들어가요.”“근데 들어가면 또 이것저것 물어볼 텐데 괜찮아요?”“괜찮아요.”둘은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갔다. 집으로 들어가니 친척들은 또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냐며 이것저것 물었고 이에 현아는 점점 더 난감해졌다.점심이 되자 현아의 어머니 장은숙은 주한에게 남아서 같이 식사하자고 했다. 주한도 원래 그러려다가 중간에 전화를 받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주한이 가자마자 장은숙은 현아를 주방으로 불러갔다. 둘은 주방일을 하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아직 얘기 안 된 거야?”이렇게 말한 장은숙은 자기가 너무 조급하게 다그치는 게 아닌지 생각했다. 현아와 얘기한 게 어제인데 이렇게 짧은 시간에 주한과 입장 정리를 한다는 건 현실적이지 않았기에 말을 고쳤다.“발전 가능성 없으면 하루라도 빨리 입장 명확히 해. 애꿎은 사람 시간 낭비하지 말고.”현아는 머리를 숙인 채 대
“내가 너한테 그런 말을 한 건 앞으로를 위해서야. 너한테 어떤 방향이 어울릴지 제안해 줄 수는 있지만 네 인생을 내가 쥐고 흔들겠다는 건 아니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현아가 막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런 현아의 모습에 장은숙도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내 말은 그냥 건의일 뿐이야. 어떻게 할지는 네 마음에 따라 정해야지. 네 선택이 제일 중요하다는 거야. 알겠어?”이를 들은 현아가 멈칫하더니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그럼 엄마는 내가 그 사람 만나도 괜찮다는 거예요?”장은숙이 눈썹을 추켜세웠다.“이미 마음의 결정은 끝난 거야?”“아... 아니에요...”현아는 얼굴을 붉히며 삐져나온 속마음을 들킬까 봐 변명을 늘어놓았다.“엄마가 그렇게 말하니까 그냥 한번 물어본 거지...”빨개진 현아의 얼굴을 보고 장은숙은 장난기가 발동했다.“그래, 내 딸인데 무슨 생각하는지 내가 어떻게 몰라? 부끄러워하지 마. 정말 배주한 씨가 좋으면 시작해 보는 것도 좋지.”현아는 장은숙이 이렇게 쉽게 말을 바꿀 줄은 몰랐기에 많이 놀란 상태였다.“엄마, 근데 왜...”“왜 갑자기 생각을 바꿨냐고? 아니야. 전에도 이렇게 생각했어. 결혼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건 당사자의 마음 아니겠어? 전에 내가 말을 꺼냈을 때 그냥 듣기만 하길래 아무 감정이 없는 줄 알았지.”현아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사실 현아도 자신이 주한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와 알고 지낸 지도 몇 년인데 주한에게 품지 말아야 할 마음을 품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근데 지금 봐서는 너도 마음이 조금은 있는 것 같으니 엄마도 말릴 수는 없지. 내 딸 하고 싶은 대로 해.”이를 들은 현아는 몹시 감동이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는데 장은숙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그럼 정말 한번 만나봐도 돼요? 근데 우리는 너무 다른 세상 사람인데.”“정말 좋아한다면 다른 세상 사람은 아니야. 근데 앞으로 예측 불가한 일은 생기겠지. 그래도 후회하지 마.”“후
두 사람은 그렇게 반 시간 얘기를 더 나누었다. 전화를 끊기 전 현아는 윤아에게 언제 돌아오는지 확인했다.“이틀 뒤면 돌아갈 거야.”윤아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현아가 바로 이렇게 대꾸했다.“그럼 내가 데리러 갈게. 너도 보고 애들도 보고.”“그래.”전화를 끊고 현아는 바로 핸드폰을 뚜드리기 시작했다. 하윤과 서훈에게 새해 선물을 사주기로 했는데 돌아오니 까먹고 말았다. 게다가 그들은 아직 외국에 있었기에 현아는 다시 살 생각을 못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돌아온다고 하니 마중 나가는 길에 가져갈 셈이었다.핸드폰을 확인한 현아는 새해라 많은 가게가 잠시 장사를 중단했고 연휴라 택배도 많이 밀려있는 상태였다.현아는 온라인으로 아이들에게 선물을 사주려던 생각을 접고 시내로 나가보려 했다. 혼자 시내로 나가려던 현아는 갑자기 주한이 떠올랐다.주한과 만나볼 생각이었던 현아는 일단 그의 생활에 젖어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한에게 같이 아이들 선물 사러 가자고 하는 건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고 여겼다. 만약 이런 요구도 들어주기 싫어한다면 만나볼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이렇게 결정한 현아는 주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아가 먼저 전화한 것에 주한은 퍽 의외였다.“나한테 전화를 다 해주고.”듣기 좋은 주한의 목소리에 현아는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안... 안 돼요?”수화기 너머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되죠. 당연히 되죠. 나랑 만나준다면 앞으로 매일 전화해도 돼요.”이 말을 듣고 반항심이 발동한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만나주지 않으면 전화도 못 해요?”“만나주지도 않으면서 왜 전화해요? 나 그럼 오해할 수밖에 없는데?”현아가 입을 삐쭉거리며 대답하지 않았다.이때 주한이 이렇게 물었다.“지금 이거, 대답이라고 생각해도 돼요?”이를 들은 현아가 멈칫했다.“뭐가요?”“나한테 먼저 전화한 거요.”주한의 말뜻을 알아챈 현아가 얼른 부정했다.“아니요. 그냥 먼저 전화한 거예요. 이게 대답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래요?”“음
현아가 되물었다.“뭐하게요?”주한이 낮은 소리로 웃었다.“뭐 안 해요. 그냥 보고 싶어서 그래요.”“...”“그래도 돼요?”“뭐... 그래요.”먼저 온다고 하니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네, 잠깐만 기다려요.”전화를 끊은 현아는 그제야 입고 있는 옷이 너무 수수하다는 걸 발견했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화장대로 가서 화장했다.립스틱을 바르던 현아는 너무 힘을 줬다는 생각에 빨간 컬러를 지우고 연한 로즈 컬러로 바꿨다.립스틱을 바꾸고 나서야 현아는 화장이 적당하게 잘 먹힌 것 같다고 생각했다.약 반 시간이 지나 주한이 도착했다.잠깐 고민하던 현아가 뒷좌석 차 문을 열었는데 주한이 이렇게 말했다.“내가 현아 씨 기사는 아니잖아요. 앞에 앉아요.”이 말에 민망해진 현아는 조수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착석하자마자 주한은 몸을 그녀에게로 기울여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갑자기 코끝을 메운 남자의 향기에 현아는 너무 긴장해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주한은 느긋하게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잔뜩 긴장한 현아와 눈이 마주쳤다. 현아는 주한의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안전벨트 매주는데 왜 이렇게 긴장해요? 설마 내가 무슨 짓 할까 봐 그래요?”주한의 말에 반응한 현아가 자기도 모르게 반박했다.“아니요. 대표님이 그럴 리가 없잖아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현아가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두 사람의 거리는 더 가까워졌다. 좁은 공간에서 두 사람의 숨결이 뒤엉키자 분위기가 순간 달아올랐다.“그래요?”늘 점잖기만 하던 주한이 순간 매혹적인 목소리로 말했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현아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렇게 몇초간 시선을 맞추다가 현아가 먼저 고개를 돌리며 어색하게 말했다.“어, 얼른 운전이나 해요.”이런 현아의 모습에 주한이 가볍게 웃었다.“걱정하지 마요. 만나주겠다고 확답을 주기 전에는 아무리 하고 싶어도 존중할 테니까.”이렇게 말하더니 주한은 자세를 고쳐 운전대
주한의 말을 들은 현아는 창문을 다시 내리기에 민망했다. 차에 혼자만 타고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더워요?”“아니요...”현아가 입꼬리를 당기며 말했다.“그냥 바람 좀 쐬고 싶어서요.”정말 덥다고 해도 현아는 주한에게 사실대로 말할 생각이 없었다. 이런 날씨에 더워하는 게 이상했다. 만약 사실대로 말했다간 뭔가 들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주한은 딱히 의심하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답답하면 외투 벗어요.”이를 들은 현아는 멈칫하더니 자기도 모르게 반박했다.“답답한데 왜 외투를 벗어요? 더운 것도 아닌데.”주한이 가볍게 웃었다.“알아요. 그냥 외투를 벗으면 좀 편안해지지 않을까 해서요.”“...”현아는 주한이 말로는 반박하지 않지만 일부러 웃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그녀의 생각을 꿰뚫고 일부러 비웃는 것처럼 말이다.주한과 더 입씨름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주한은 항상 자기 속내를 들키지 않는 상황에서 느긋하게 현아가 민망해하는 걸 지켜보는 쪽이었다. 그러니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좋다.주한이 이때 입을 열었다.“어디 갈까요?”현아는 가고 싶은 곳이 있긴 했지만 일단 눈을 질끈 감고 이렇게 말했다.“찾아온 건 대표님이잖아요. 어디 가는지 나한테 물어보면 어떡해요?”주한이 입꼬리를 당기며 말했다.“그럼 내가 알아서 할까요?”“어디 가요?”“시내 갈 건데 갈 거예요?”원래도 시내에 가려던 참이었던 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나올 때 부모님께 말씀드렸어요?”“아니요...”집에서 나올 때 부모님은 외출하고 없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따가 전화해서 말씀드려요. 아니면 걱정하실 수도 있으니까.”주한은 마치 선도부처럼 현아에게 당부했다.“아, 네.”현아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바로 핸드폰을 꺼내 엄마에게 문자를 보내 행방을 알렸다.“보냈어요.”“네.”문자를 보내고 두 사람 사이는 정적이 흘렀다. 현아는 창밖을 내다보다 머리를 숙여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현아는 끝내 이 어색한 분위기를 참
이렇게 생각한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혹시 괜찮으면 앞으로 우리 집에서 같이 설 연휴 보내요.”주한의 상황에 마음이 아파 얼떨결에 한 말이었지 별다른 뜻은 없었다고 현아는 맹세할 수 있었다.하지만 주한이 멈칫하더니 현아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현아 씨, 이걸 확답이라고 생각해도 돼요?”현아가 멍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주한이 되물었다.“맞아요?”현아는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주한의 상황이 너무 딱해 마음이 아팠는지 딱히 부인하지는 않았고 그저 고개를 숙이고는 이렇게 말했다.“뭐 그렇다고 해도 되고 아니라고 해도 되고. 이렇게 빨리 받아줄 수는 없잖아요?”이를 들은 배주한이 가볍게 웃었다.“네.”주한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현아가 편하게 있을 수 있게 해주었다.역시 자수성가한 사람은 달라도 뭐가 달랐다. 통찰력이 대단하고 총명했기에 현아는 주한 앞에서 속내를 감추기가 너무 어려웠다.하여 차가 시내에 도착하자 현아도 더는 척하지 않고 용감하게 하고 싶은 걸 털어놓았다.“며칠 뒤면 윤아랑 아이들이 귀국하거든요. 선물 좀 사주려고요.”아니나 다를까 주한은 현아의 말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어디서 사려고요?”현아가 주소를 말하자 주한이 차를 돌렸다. 현아는 길을 알아도 너무 잘 아는 주한이 약간 놀라웠다.“어떻게 길을 이렇게 잘 알아요?”“전에 여기서 몇 년 일한 적 있어요. 와서 며칠 지도를 연구하기도 했고요.”그래서 내비게이션도 안 본 거구나.“그럼 전에는 쭉 혼자 지낸 거예요?”“네, 열 살쯤부터는 늘 혼자 지냈어요.”열 살, 어린 나이었다. 만약 현아에게 그 나이에 혼자 지내라고 한다면 생활에 풀이 꺾여버려 자수성가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현아는 주한의 멘탈이 강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현아의 마음도 점점 확고해졌다.주한은 멘탈이 강했기에 현아와 만났다가 헤어지더라도 슬프거나 힘들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는 너무 이성적이었고
현아는 꽤 긴 시간 공을 들여 윤아와 애들에게 줄 선물을 골랐다. 계산할 때 주한이 대신 계산하려는데 현아가 거절했다.“아니에요. 내가 주려고 사는 선물인데 다른 사람이 계산하게 둘 수는 없죠.”주한이 잠깐 생각하더니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고는 다른 결정을 내렸다.“그럼 나도 내 명의로 하나 선물할게요.”“왜요? 내 선물에는 명분이 있는데 대표님은 무슨 명분으로 주실 건데요? 그리고 잘 아는 사이도 아니잖아요...”주한이 현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네. 근데 나도 명분 있어요. 현아 씨는 아이들과 어떤 사이죠?”“이모죠. 근데 내겐 친자식이나 다름없어요.”말을 이어가던 현아가 얼굴을 붉혔다. 이미 주한이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한 듯한 눈치였다.“음, 그러면 앞으로 이모부 될 사람이라는 명분으로 주면 되죠.”현아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아직 확답 안 줬는데.”“알아요. 그냥 제멋대로 주는 거예요.”주한은 현아가 고민할 새도 없이 선물을 고르러 갔다. 현아는 하는 수 없이 뒤를 따라 참고할 만한 의견을 내주었다.주한은 선물을 사고 카드를 긁었다. 직원이 명세서에 사인을 해달라고 하자 주한은 별생각 없이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자기 이름을 적어넣었다.직원은 주한이 쓰는 볼펜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렇게 제안했다.“고객님, 지금 쓰시는 볼펜이 많이 닳은 것 같네요. 마침 매장에 볼펜이 새로 들어왔는데 한번 보실래요?”선물을 고르던 현아가 이를 듣고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이 든 볼펜으로 시선을 돌렸다.그 볼펜을 본 순간 현아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 볼펜은 분명 현아가 선물한 것이었다.현아가 그 볼펜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건 할인을 받아서 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할인 상품을 사면서 별다른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디자이너가 설계한 제품은 살 능력이 못 되었고 비싼 물건이라 해서 주한의 마음에 든다는 보장도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딘가 처박아두겠지 하는 마음으로 차라리 돈이라도 아껴야 하겠다는 마음에 할인 상품을 샀다.현아는
눈치가 빠른 점원이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아, 이 볼펜은 사랑하는 사람이 선물로 주신 거구나. 왜 그렇게 아끼시나 했어요.”점원은 두 사람이 오늘 여기서 이렇게 많은 물건을 샀는데 볼펜을 더 사지 않더라도 칭찬을 늘어놓고 싶었다. 그렇게 좋은 인연을 이어줘도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아니나 다를까 주한이 점원을 힐끔 쳐다봤다. 아까보다는 많이 부드러워진 눈빛이었다.점원이 박차를 가하며 현아에게 말했다.“고객님, 너무 행복하겠어요. 남자분이 많이 좋아하시는 거 같은데.”현아는 원래도 수줍음이 많은데 점원이 이렇게 말하자 더 수줍을 수밖에 없었다. 하여 퍽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런 거 아니에요.”현아가 고개를 돌려 주한을 바라봤다.“아무튼 내가 다시 하나 선물해 줄 테니까 이건 버려요.”현아가 점원에게 물었다.“볼펜 어디서 볼 수 있나요? 한번 보여주실래요?”“당연하죠.”점원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더니 볼펜이 있는 쪽으로 안내했다. 현아가 얼른 그 뒤를 따랐고 주한만 덩그러니 그 자리에 버려뒀다.점원이 새로 들어온 볼펜을 현아에게 보여주었다. 현아가 열심히 고르고 있는데 주한이 그쪽으로 걸어갔다.“너무 좋은 거 고를 필요 없어요!”주한이 현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뜨거운 숨결이 현아의 귀를 덮쳤고 너무 간지러운 나머지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누, 누가 비싼 거 골라준대요? 그냥 원래 쓰던 게 너무 낡아 보여서 새 걸로 바꿔주려는 거지.”주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고마워요.”현아는 제일 예쁜 볼펜으로 골랐다. 가격은 전에 샀던 볼펜보다 몇 배나 더 비쌌다. 계산할 때도 주한은 먼저 계산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현아가 계산하고 포장된 볼펜을 가져다주는 걸 그저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여기요. 새 볼펜. 낡은 건 버려요. 신분에 안 맞아요.”현아는 주한 같은 남자가 여러 중요한 장소를 드나들며 해진 볼펜으로 여기저기 사인하는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엘리트인 주한에겐 너무 이질적인 물건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