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배주한의 눈에 비친 주현아의 모습은 화장기 없는 얼굴로 회사에 출근하던 때와 다를 바 없었다.그리고 확실히 그녀의 소개팅 상대의 말대로 민낯도 어여뻤다.“다 들으셨잖아요. 계속 붙잡고 있어도 저는 같은 말밖에 할 수 없어요. 돌아가세요.”“그럼 우리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면, 누가 현아 씨와 같은 세계의 사람입니까? 설마 조금 전의 소개팅 상대입니까?”배주한은 그녀에게 있어 항상 단정하고 엄숙한 상사였다. 그는 누구에게든 웃음기 없는 얼굴로 정색하여 말했다.하여 주현아는 그가 무슨 일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언제나 같은 표정이라 생각했다.그런데 뜻밖에도 비아냥거리며 기가 찬다는 듯 저를 아니꼽게 바라볼 줄이야.“이번엔 그저 사고였을 뿐이에요. 소개팅은 또 해도 되죠. 맞는 사람을 찾을 때까지.”배주한이 물었다.“그럼 전 어디가 안 맞는 겁니까?”그가 입술을 짓씹으며 집요하게 주현아를 응시했다.“현아 씨가 생각하는 미래의 배우자와 비교했을 때, 저는 어느 부분이 별로인 겁니까?”주현아가 대답했다.“대표님, 오해하셨어요. 저는 대표님이 별로라고 말한 적은 없어요. 단지 같은 세계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을 뿐. 대표님께서는 돈도 많고 훌륭하신데 제 집안은 가난하잖아요. 우리가 평생 놀지도 먹지도 못하며 모으는 돈이 대표님께는 계약서 한 장의 액수에 불과하잖아요. 맞죠?”“그래서요?”배주한이 무뚝뚝하게 물었다.“이런 것들이 우리가 연애하는 데에 영향을 줍니까? 왜요? 제가 돈이 많아서요?”끊임없이 들어오는 질문에 주현아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저는 그게 저에게 유리한 점 일 줄 알았죠.”배주한이 말을 덧붙였다.주현아는 입술을 말아 물며 반박하지 못했다.맞는 말이다. 돈이 많다는 건 당연히 유리한 점이겠지만 그것이 과하게 많을 때는 오히려 스트레스, 부담이 된다.주현아는 자신을 비웃듯 피식 웃었다.“물론 유리한 점이죠. 만일 제가 있는 집안의 딸이었다면 소비 습관이 대표님과 같겠죠. 그럼 당연히
주현아는 대표인 배주한보다 말발이 현저히 딸리는 사람이었다. 배주한의 몇 마디 물음에 주현아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결국 그녀는 논리를 벗어난 말인 줄 알면서도 태연 한 척 대뜸 입을 열었다.“저는 그저 평범한 사람을 만나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요.”“저와 함께하면 평범한 삶이 안 되는 겁니까?”배주한이 그녀를 응시하며 말을 덧붙였다.“저와 함께한다면 오히려 다른 선택지가 많아질 뿐입니다. 평범한 삶을 살 수도 있고, 그것이 지겹다면 사치스러운 삶을 살아도 되죠. 두 가지 인생을 경험할 수 있는데 더 좋은 것 아닙니까?”주현아는 그가 어떻게 자수성가한 건지 확실히 잘 알 수 있었다. 배주한은 임기응변 능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자신을 과시할 만한 점을 잘 드러내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뛰어난 사람이었다.주현아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배주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 말했다.“제 말이 틀렸나요? 현아 씨의 인생은 저의 재산 유무에 따라 바뀌지 않아요. 전적으로 주현아 씨의 선택과 계획에 달린 일이죠. 우리는 단지 함께 살게 될 뿐이죠. 그렇지 않나요?”주현아는 더 이상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주현아는 자리에 그대로 서서 배주한이 다가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그의 특유의 박하향이 코를 감쌌다.“어떤가요? 고려해 보실래요?”주현아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뒤로 물러설수록 배주한은 더 가까이 다가왔다.마침내 등이 차갑고 단단한 벽에 부딪혀 더 물러설 수 없게 되었을 때야 주현아는 물러서는 것을 그만두었다.그녀는 어리둥절하며 눈앞의 배주한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퇴사 직전까지 상사로 대했던 배주한이 어떻게 갑자기... 자신을 고려해 보겠느냐고는 말까지 하는 걸까.지금 이거 현실이 맞긴 한 걸까?아니면 혹시 퇴사 후에 정신에 이상이 생겨 환각이 생긴 건가?이리저리 생각하던 주현아는 배주한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그... 대표님, 혹시 갑자기 직원을 잃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심지어 이미 결혼해 놓고 밖에서는 상간녀를 두고 연애하는 사람도 많이 보아왔다.그들 사이에 연인 사이의 감정이란 종래로 없었으며 의리 같은 것도 없었기에 서로에 대해 신경도 쓰지 않았다.하여 그녀는 배주한도 비즈니스로 결혼할 거로 생각했다.하지만 평소에 여자와 잘 어울리지 않는 성격으로 보아 바람을 피우지는 않을 것이며 적어도 결혼에 대해서는 충성할 거로 생각했다.당시 부하로서의 그녀는 배주한의 아내가 바람을 피우면 자존감이 강한 그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그러나 그 사람이 자신을 좋아할 줄은 몰랐다.“사업 발전에는 확실히 도움이 되겠죠.”배주한이 담담히 말했다.“하지만 전 필요 없어요. 배인그룹은 제가 혼자 일구어낸 회사이기 때문에 어떤 도움도 필요 없습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지 사업 때문에 통혼 같은 건 하지 않아요.”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주현아는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그의 말을 듣고 얼음장처럼 굳었다.“네? 뭐라고요?”배주한이 그녀를 힐끗 보았다.“못 들었어요? 다시 말할까요?”“아, 아니요!”다시 한번 들을 용기는 없었기에 주현아는 거절해 보였다.그녀의 하얀 볼에 핑크빛이 감돌더니 이내 귀와 목까지 빨개졌다.차분하고 다른 사람의 감정변화에 무딘 그일지라도 주현아가 얼굴을 붉히는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현아 씨 평소에는 카리스마 넘치더니, 고백을 들으면 부끄러워할 줄도 아는 사람이었네요?”그녀 의외의 모습에 배주한은 신기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그동안 상사로만 대하는 사무적인 태도를 보아왔기에 오랫동안 고민했었다.그는 직진남이었지만, 여자와 남자 사이에 설레는 기류나 기묘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여자가 저를 남자로 보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혹은 여자가 아직 깨닫지 못했다거나?배주한이 주현아의 이마를 톡 치며 중얼거렸다.“아, 이제 깨달은 거구나.”“뭐라고요? 부끄럽긴 누가요! 저, 전 이만 자러 가야겠어요.”이른 아침부터 맞선인지 뭔지 때문
주현아는 꼼꼼히 세수한 후에야 침대에 누웠다.이상한 소개팅 대상을 만나 생겼던 분노가 조금 전 배주한과의 대화로 모두 사라졌다.그 대화로부터 주현아는 배주한이라는 사람이 정서가 매우 안정된 사람임을 다시 상기할 수 있었다.주현아에게 있어 짝의 성격이 차분하다는 것은 큰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배주한과 오랫동안 일하면서 직장에서 어떤 불쾌하거나 최악의 상황이 닥쳐와도 그는 항상 냉정하고 차분했으며 분노한 적이 없었다.때때로 주현아가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할 때도 말리는 사람은 늘 그였다.“냉정해지세요.”배주한은 일을 해결하는데 능한 사람이었다.이런 사람과 함께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그리고 그의 말처럼 평범한 삶을 살 수도 있고, 질리면 사치스러운 삶으로 갈아타도 되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주현아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그녀는 침대에 누워 몸을 뒤척이며 또 고민하기 시작했다.‘하지만 배주한 같은 남자는 주변에 외모와 능력이 뛰어난 여자가 너무 많다. 언젠가 갑자기 바람피우게 될지도...’생각하면 할수록 주현아는 고민이 깊어졌고 결국 잠은 자지 못한 채 아예 몸을 일으켜 앉았다.그녀는 방문을 열고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발걸음은 조금 급해졌고 속으로는 이미 갔겠지? 라며 반신반의했다.그런데 막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 익숙한 뒷모습의 사내가 친척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친척들은 재잘재잘 이것저것 물어보았고, 배주한은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귀찮을 법한 질문들에 하나하나 대답하고 있었다.정말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예전에 회사에서의 배주한은 직원을 대할 때에도 말을 적게 하는 편이었다. 회의할 때도 거의 입을 열지 않았으며 가끔 하는 발언도 모두 회사의 명맥이 걸린 일이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뿐이었다.지금처럼 대답하기도 귀찮은 어린아이들의 지루한 질문에 일일이 대꾸해 줄 일은 드물다는 것이다.아이들이 묻는 말들은 이러했다.“아저씨, 이 정장 수작업으로 주문 제작한 거예요? 부자들의 정장은 디자이너가 직접 디자인한다고 들었는데
“오늘 그 맞선 상대 너무 민망하긴 했어요. 그래도 같은 마을 사는 사람인데 너무 척지는 건 아닌 것 같아 배웅해 주러 갔죠.”잔뜩 약이 오른 남자의 모습과 자기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얼굴이 떠오르자 현아는 진절머리 났다. 그런 사람까지 배웅해 줘야 하는 건가?근데 아까 맞선 상대에게 욕을 퍼부을 때 주한도 있었던 거 같은데? 너무 사납다고 생각하는 거 아닌가?큰일 났다. 어느새 현아는 주한 앞에서 이미지를 챙기기 시작했다. 분명 전에는 신경 쓰지 않았는데 말이다.현아가 난감한 표정으로 주한을 바라봤다. 주한이 덤덤한 얼굴로 물었다.“졸린다면서 더 자지 왜 내려왔어요?”현아가 머리를 긁적였다.“자려고 했는데 아침에 하도 많은 일이 일어나서 잠이 안 올 거 같아요.”주한과 많은 얘기를 나눈 뒤로 현아는 머리도 마음도 뒤숭숭했기에 잠이 올 리가 없었다.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그럼 마을에 마실이라도 나갈까요?”“네?”마실을 가자고?주한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영양가 없는 질문만 받던 게 떠오른 현아는 그가 지금 구조 요청을 보낸 거라고 생각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주한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에게 인사하고는 현아와 자리를 떠났다.현아가 나가기 전 친척들은 눈을 찡긋거리며 이렇게 말했다.“현아 언니, 화이팅!”“대표님을 손에 넣으면 맞선 볼 필요가 없지!”그들은 자기 목소리가 작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현아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고 주한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귀가 멀지 않았다면 말이다.현아가 물건을 들어 뿌리려는 시늉을 보이자 그들은 자리를 떴다. 이를 확인한 현아는 그제야 손에 들었던 물건을 내려놓으며 난감한 표정으로 주한을 향해 웃었다.“아하하, 다들 무슨 이런 농담을, 새겨듣지 마요.”하지만 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그래요? 나는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는데.”“...”현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아침에 일어난 일만으로도 충분히 난감했던 현아는 주한이 오글거리는 말이라도 할까 봐 그가 입을
“무슨 오해요?”주한이 현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우리가 그런 사이라고 오해하죠. 시골에서 살아봤어요?”원래는 시골에서 안 살아봤으면 소문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고 말하려다가 주한도 자수성가했다는 게 떠올랐다. 자수성가란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하여 임시로 시골에서 살아봤냐고 말을 바꿨다.아니나 다를까 주한이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럼 시골에서 소문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알겠네요.”시골에서 생활한 적이 있다면 설명하기도 쉬워진다.“지금 여기서 걸어 나가면 내일은 우리가 이미 결혼했다고 소문날 거예요. 그러면 대표님 명예에도 금이 갈 거 아니에요.”이를 들은 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현아를 바라봤다.“원한다면 지금 당장 결혼할 수도 있어요. 그런 소문이 왜 내 명예에 영향 준다고 생각하죠?”“...”현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주한의 말에 너무 놀란 나머지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무, 무슨 소리예요!”“헛소리인지 아닌지는 곧 알게 될 거예요.”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만약에 소문이 두렵다면 다시 들어가요.”“근데 들어가면 또 이것저것 물어볼 텐데 괜찮아요?”“괜찮아요.”둘은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갔다. 집으로 들어가니 친척들은 또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냐며 이것저것 물었고 이에 현아는 점점 더 난감해졌다.점심이 되자 현아의 어머니 장은숙은 주한에게 남아서 같이 식사하자고 했다. 주한도 원래 그러려다가 중간에 전화를 받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주한이 가자마자 장은숙은 현아를 주방으로 불러갔다. 둘은 주방일을 하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아직 얘기 안 된 거야?”이렇게 말한 장은숙은 자기가 너무 조급하게 다그치는 게 아닌지 생각했다. 현아와 얘기한 게 어제인데 이렇게 짧은 시간에 주한과 입장 정리를 한다는 건 현실적이지 않았기에 말을 고쳤다.“발전 가능성 없으면 하루라도 빨리 입장 명확히 해. 애꿎은 사람 시간 낭비하지 말고.”현아는 머리를 숙인 채 대
“내가 너한테 그런 말을 한 건 앞으로를 위해서야. 너한테 어떤 방향이 어울릴지 제안해 줄 수는 있지만 네 인생을 내가 쥐고 흔들겠다는 건 아니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현아가 막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런 현아의 모습에 장은숙도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내 말은 그냥 건의일 뿐이야. 어떻게 할지는 네 마음에 따라 정해야지. 네 선택이 제일 중요하다는 거야. 알겠어?”이를 들은 현아가 멈칫하더니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그럼 엄마는 내가 그 사람 만나도 괜찮다는 거예요?”장은숙이 눈썹을 추켜세웠다.“이미 마음의 결정은 끝난 거야?”“아... 아니에요...”현아는 얼굴을 붉히며 삐져나온 속마음을 들킬까 봐 변명을 늘어놓았다.“엄마가 그렇게 말하니까 그냥 한번 물어본 거지...”빨개진 현아의 얼굴을 보고 장은숙은 장난기가 발동했다.“그래, 내 딸인데 무슨 생각하는지 내가 어떻게 몰라? 부끄러워하지 마. 정말 배주한 씨가 좋으면 시작해 보는 것도 좋지.”현아는 장은숙이 이렇게 쉽게 말을 바꿀 줄은 몰랐기에 많이 놀란 상태였다.“엄마, 근데 왜...”“왜 갑자기 생각을 바꿨냐고? 아니야. 전에도 이렇게 생각했어. 결혼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건 당사자의 마음 아니겠어? 전에 내가 말을 꺼냈을 때 그냥 듣기만 하길래 아무 감정이 없는 줄 알았지.”현아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사실 현아도 자신이 주한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와 알고 지낸 지도 몇 년인데 주한에게 품지 말아야 할 마음을 품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근데 지금 봐서는 너도 마음이 조금은 있는 것 같으니 엄마도 말릴 수는 없지. 내 딸 하고 싶은 대로 해.”이를 들은 현아는 몹시 감동이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는데 장은숙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그럼 정말 한번 만나봐도 돼요? 근데 우리는 너무 다른 세상 사람인데.”“정말 좋아한다면 다른 세상 사람은 아니야. 근데 앞으로 예측 불가한 일은 생기겠지. 그래도 후회하지 마.”“후
두 사람은 그렇게 반 시간 얘기를 더 나누었다. 전화를 끊기 전 현아는 윤아에게 언제 돌아오는지 확인했다.“이틀 뒤면 돌아갈 거야.”윤아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현아가 바로 이렇게 대꾸했다.“그럼 내가 데리러 갈게. 너도 보고 애들도 보고.”“그래.”전화를 끊고 현아는 바로 핸드폰을 뚜드리기 시작했다. 하윤과 서훈에게 새해 선물을 사주기로 했는데 돌아오니 까먹고 말았다. 게다가 그들은 아직 외국에 있었기에 현아는 다시 살 생각을 못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돌아온다고 하니 마중 나가는 길에 가져갈 셈이었다.핸드폰을 확인한 현아는 새해라 많은 가게가 잠시 장사를 중단했고 연휴라 택배도 많이 밀려있는 상태였다.현아는 온라인으로 아이들에게 선물을 사주려던 생각을 접고 시내로 나가보려 했다. 혼자 시내로 나가려던 현아는 갑자기 주한이 떠올랐다.주한과 만나볼 생각이었던 현아는 일단 그의 생활에 젖어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한에게 같이 아이들 선물 사러 가자고 하는 건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고 여겼다. 만약 이런 요구도 들어주기 싫어한다면 만나볼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이렇게 결정한 현아는 주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아가 먼저 전화한 것에 주한은 퍽 의외였다.“나한테 전화를 다 해주고.”듣기 좋은 주한의 목소리에 현아는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안... 안 돼요?”수화기 너머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되죠. 당연히 되죠. 나랑 만나준다면 앞으로 매일 전화해도 돼요.”이 말을 듣고 반항심이 발동한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되물었다.“만나주지 않으면 전화도 못 해요?”“만나주지도 않으면서 왜 전화해요? 나 그럼 오해할 수밖에 없는데?”현아가 입을 삐쭉거리며 대답하지 않았다.이때 주한이 이렇게 물었다.“지금 이거, 대답이라고 생각해도 돼요?”이를 들은 현아가 멈칫했다.“뭐가요?”“나한테 먼저 전화한 거요.”주한의 말뜻을 알아챈 현아가 얼른 부정했다.“아니요. 그냥 먼저 전화한 거예요. 이게 대답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래요?”“음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