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가능성을 알아본 수현은 더는 웃을 수가 없었다.아빠로서 와이프와 딸을 잃어버렸다 되찾았고 그들과 함께 잠에 들 수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만약 자기가 누울 자리가 없다면...이렇게 생각한 수현은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만약 집에 있었다면 바로 새 침대를 들이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새 침대에는 유해 물질이 있어서 건강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전에는 이런 생각을 해본 적 없던 수현도 아이가 생기고 나서 이런 안전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정말 새로운 침대를 마련한다 해도 바로 사용할 수 없었고 사려면 예약해야 하는 것도 모자라 깨끗하게 소독해야만 방에 들일 수 있다.이렇게 생각한 수현은 몰래 속으로 다짐했다. 두 녀석이 잠에 들면 바로 전화를 걸어 집에서 쓸 침대를 예약해야겠다고 말이다.침대에 누워있는 세 사람은 수현의 생각을 알 길이 없었다. 윤아는 수현이 들어오자 아이들에게 자리를 조금 내주라고 했다.그렇게 세 사람이 노력한 덕에 작게나마 자리가 났다.수현이 그 자리를 힐끔 쳐다봤다. 누울 수는 있었지만 몸을 움직이기는 어려웠다.윤아는 그 자리를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침대가 조금 작네, 아니면...”윤아는 수현에게 옆방에 가서 자거나 아니면 바닥에서 자는 게 어떻겠냐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윤아가 입을 열기도 전에 수현이 그 자리로 가서 누웠다.“딱 좋네.”윤아가 그를 다른 곳에 가서 자라고 할까 봐 수현은 눕자마자 이렇게 말했다.“...”윤아는 침대를 짚고 몸을 일으켜 그가 누운 자리를 바라봤다. 분명 누워서 움직이지도 못하면서 좋다니.눈치가 느린 편인 하윤도 이를 발견하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수현이 누운 자리를 가리켰다.“아빠, 자리가 너무 좁은 거 아니에요?”모자의 ‘관심’ 어린 눈빛에 수현이 억지웃음을 지었다.“아니, 나는 좋은데?”“아빠.”하윤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자리가 너무 좁아요!”“...”수현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혹시나 하윤이 침대가 너
하지만 지금 보면 쫓아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 가깝게 누워도 괜찮을 것 같았다.이렇게 생각한 수현은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하윤을 안고 있는 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여 수현은 안쪽으로 조금 더 옮겼다.샤워를 금방하고 나온 탓인지 윤아는 수현에게서 습기를 느끼고는 미간을 찌푸렸다.“안으로 더 들어오면 좁아.”윤아가 반대하지 않는 걸 보고 안으로 더 옮기려던 수현이 순간 동작을 멈추었다. 두 손을 가슴에 가지런히 놓은 채 최대한 그들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동작과 표정이 비굴하기 그지 없었다.수현이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됐어. 시간도 늦었는데 자자.”어른 둘이 있을 때는 한두 시간 밤을 새워도 괜찮은데 아이들이 있으니 무조건 제때 잠들어야 했다. 하여 윤아도 오늘 저녁엔 별다른 말 없이 아이들을 재우려고 수현에게 불을 끄라고 했다. 그러고는 두 아이를 안고 잠을 청했다.서훈은 얌전히 안쪽에 누운 채 눈을 감고 잠에 들었다. 하지만 하윤은 작은 동작이 많았다. 처음에는 윤아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만지작거리다가 윤아의 잠옷에 달린 단추들을 만지작거리며 재잘거리기까지 했다.“엄마, 오늘 처음 아빠랑 같이 자요.”아이라 말할 때 생각을 별로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아직 윤아가 기억을 잃은 사실을 몰랐고 어른들도 이를 아이들에게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하윤이 뜬금없이 이런 말을 한 것이다.이 말이 나오자 불을 끄고 누운 수현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창문에서 비쳐 드는 약한 불빛으로 딱딱하게 굳은 수현의 몸이 보였고 그가 숨을 참고 듣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윤아는 이런 수현을 보며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윤아는 인스타의 비공개 글에서부터 수현과의 관계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걸 눈치채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 하윤의 한마디에 들키고 만 것이다.어둠 속, 수현의 모습이 잠깐 굳었다가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세 사람 옆에 누워 있었다. 처음엔 윤아도 그의 숨결이 고르지 않
그렇게, 윤아는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이대로 수현이 윤이를 재우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역시 윤이는 쉽게 넘어가 줄 아이가 아니었다.“어... 조금 전까지도 나랑 말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빨리 잠든다고요? 엄마...”윤이는 윤아의 얼굴을 만져보며 정말 잠든 건지 확인까지 하려 했다.암흑 속에서 아이의 손짓을 어렴풋이 본 수현이 얼른 아이를 안아 제 쪽으로 옮기며 말했다.“윤이, 그만. 엄마 자니까 방해하지 말자. 그러다 엄마 깨겠어.”수현의 곁으로 옮겨진 윤이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무언가 깨달은 듯 대답했다.“그러니까요! 오늘 낮에 엄마가 많이 걸었으니 분명 피곤할 거예요. 그럼 쉬어야 하니까 깨면 안 되죠.”어머니는 저나 오빠처럼 장바구니에 앉아 있지 않았다.“응. 피곤할 테니까 푹 쉬라 그러자. 우리 윤이 낮에 말도 잘 들었지? 이제 얼른 자자.”이미 제 곁으로 데려왔으므로, 아이가 다시 윤아의 잠을 방해하도록 둘 수 없었다. 수현은 팔을 내밀어 베게 했다.“오늘은 아빠랑 자자.”아직 아빠와 함께 잠을 잔 적이 없었으므로, 그의 말을 들은 윤이는 큰 눈을 두 번 깜박이더니 작게 물었다.“아빠 팔도 말랑말랑해요?”“...”수현은 몸이 마른 데다 팔뚝에 살이라고는 없었다. 그런데 말랑말랑할 리가.그의 팔은 윤이에게 베개가 될 수 없었다.잠시 침묵을 지키던 수현이 겨우 입을 열었다.“그럼... 아빠가 베개 가져올까?”그러나 윤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전 엄마 옆에서 자고 싶어요.”“그런데 엄마 이미 잠들었잖아. 네가 가면 깰 수도 있어.”이에 윤이는 고민을 시작했다. 수현의 억센 팔과 어머니를 깨우게 될 거라는 선택지 사이 한참을 고민하다 윤이는 결국 순순히 수현의 팔을 베개 삼아 눕게 되었다. 그러나 머리를 뉘자마자 그 작고 귀여운 얼굴이 찡그려졌다.“아빠. 그냥 베개 나눠서 베요.”“알겠어.”수현은 결국 반쪽 베개를 아이에게 내어주었다.그러나 성인 남성의 베개가 아이에게 편할 리가.그
자리에 누워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이것저것 생각하던 윤아는 언제인지도 모르게 스르륵 잠에 들어버렸다.다음날 깼을 때, 침대에 그녀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누워서 멍하니 몇 초간 천장을 바라보던 윤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오늘은 설 전날이다.홀의 대부분 사람은 모두 바쁘게 돌아치고 있었다.윤아가 기상한 것을 본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집안을 한 바퀴 돌아본 그녀는 낯익은 사람을 보고 인사를 건넸다.“아주머니, 다른 사람들은요?”윤아를 확인한 차화연이 환히 웃어 보였다.“이제 깼어? 다른 사람들은 다 일이 있어서 나갔지.”일이 있어서 나갔다고?단지 조금 늦게 깼을 뿐인데 모두 사라졌을 줄이야.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윤아는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라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아주머니 아드님은 올해에 여기서 설 쇠나요?”이에 차화연의 표정이 살짝 굳더니 이내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안 올 거야. 듣기로 친구와 베네치아에서 설을 쇤다던데. 아주 미친 듯이 노는 것 같더라고.”윤아는 기억은 없지만 전에 했던 몇 마디 말로 아주머니에게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요즘 젊은 사람들은 보통 집에 가서 설을 쇠는 것보다 친구와 약속하고 여행하러 다니기를 좋아했다. 그녀는 충분히 그들의 마음이 이해되었다.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한 뒤 자리를 떴다.차화연은 그 자리에 서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는 혼자기에 무료하기도 하고 집안일도 할 필요가 없었기에 아예 방에서 좀 더 자려고 했다.그러나 금방 침대에 누웠을 때 무언가 떠올라 얼른 주현아에게 영상통화를 걸었다.주현아는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흥분한 채로 외국에 가더니 자기를 잊은 거냐며, 설이 지나고서야 연락할 줄 알았다며 너스레를 떨었다.“그럴 리가. 당연히 설이 되기 전에 전화해야지! 지금이 아니더라도 오늘 저녁에 전화하려던 참이었어!”“그럼 오늘 아침에 전
“둘 사이에 뭔 일 있었지?”윤아가 의심되는 구석을 딱 짚어 물었다.그녀의 맥을 짚는 질문에 주현아는 귀뿐만이 아니라 이제 볼까지 발개졌다.“윤아 너!”그녀의 어쩔 줄 모르는 모습에 윤아는 자신의 추측에 대해 점차 확신하게 되었다. 윤아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진짜 뭐가 있긴 있었나 보네? 왜, 올해 휴가 내고 네 집이라도 갔어?”“...”주현아의 표정 변화를 살피던 심윤아가 말을 덧붙였다.“집에 간 것뿐만 아니라 선물까지 챙겨갔구나?”주현아는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윤아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그런 그녀의 모습에 윤아는 장난스레 농담 한마디를 던졌다.“결혼하자고 한 건 아니지?”그런데 그녀를 바라보는 주현아의 눈빛이 수상해졌다.이제는 윤아가 침묵할 차례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휴대폰 너머로 서로를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한참 후에야 윤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그래서... 마지막 말이 진짜라는 거야?”“너, 너... 너!”주현아는 이 일을 어떻게 윤아에게 설명할지 생각하지 못해 말을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윤아가 던진 농담 한마디로 들통날 줄이야.“그래. 진짜야.”“...”한참 침묵을 지키던 윤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럼 너랑 그분이랑 상황은 어떤데?”“몰라.”주현아가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아빠가 엄청나게 좋아해. 대표님을.”윤아에게는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모든 부모님은 자식이 좋은 연인을 찾기를 바란다. 배주한같이 은 남자가 자수성가하여 회사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것에는 분명 그만한 지혜와 결단력,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이내 윤아는 그녀의 말 속에 어머니는 언급되지 않았음을 눈치챘다.“아주머니께서는?”“우리 엄마? 우리 엄만 별로 안 좋아해. 남자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는 엄청나게 좋아하셨는데, 신분을 알게 된 후에는 안 좋아하셨어.”주현아가 얕게 한숨을 내쉬었다.“어머니께서는 우리가 다른 세상 사람이라고 전혀 행복하지 않을 거로 생각해. 우리는 집안이 평범한
윤아는 침묵을 지켰다.“그런 사람이 갑자기 우리 집에 와서 혼담을 꺼낸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 돼. 대체 무슨 속셈일까?”주현아는 말할수록 점점 격앙되었다. 그녀는 또 갑자기 무언가 깨달은 듯 속사포로 이상한 생각을 내리 읊기 시작했다.“혹시 내가 회사를 그만둔 후로 일하는 것이 힘들어져서 결혼으로 묶어두려는 거 아니야? 옆에서 일이나 하게?”“...”그녀의 기발한 생각은 심윤아가 할 말을 잃게 했다.“자, 들어봐. 만약 내가 그 사람의 직원이야. 대표로서 그 사람은 매년 많은 월급과 보너스를 줘야 하겠지. 그런데 내가 부인이 되면 돈은 줄 필요도 없고 공짜로 일 시킬 수 있는 거잖아.”윤아는 그녀의 월급과 보너스를 상세히 물었다. 그리고 합해서 2억 정도임을 알게 된 후 입을 열었다.“확실히 네 월급은 많은 사람들이 탐낼 만한 액수야. 심지어 네 이후의 소개팅 상대들이 모두 너보다 못할 수도 있어. 그런데... 내가 보기에 자수성가로 배인그룹 전체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얼마 되지도 않는 액수일 것 같아.”상장된 회사가 매년 남기는 이유는 얼마일까?윤아는 구체적인 액수는 잘 몰랐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주현아의 월급이 그 대표의 눈에는 아주 작은 돈일 것 같았다.“그래. 그 사람은 확실히 돈이 많아. 하지만 장사꾼은 항상 이익을 가장 중시하고 보답 없는 은 절대 하지 않아. 그런데 지금 나한테 혼담을 꺼내는 것이 정말 내 월급과 보너스를 고려하지 않은 것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한참을 말없이 있던 윤아가 입을 열었다.“그러니까 네 말은, 그 사람이 고작 그만한 돈을 아끼려고 너랑 결혼하려 한다는 거지?”“아니야? 그럼 대체 왜 나랑 결혼하려는 거지?”“네가 잘 모르는 것일 수 있는데. 그 사람의 신분으로 집안 배경이 비슷한 여자는 충분히 만날 수 있어. 그렇게 회사와 회사가 협력하게 된다면 얼마나 큰 이익이 될 것 같아?”거의 10년 가까이 회사에서 일한 주현아가 어떻게 이를 모를 수 있겠는가.윤아가 이런 식으로 분석한
윤아와 전화하기 전까지 그녀는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던 상태였다.왜 갑자기 배주한이 자신에게 혼담을 꺼냈을까. 분명 월급을 아끼기 위해서일 것이다!얼마나 부려 먹고 싶었으면, 오죽하면 혼담까지 꺼냈겠는가?그건 너무 비정상적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집안 배경도 차이가 큰,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그렇게 다른 가능성을 모두 배제하고 나니 배주한이 저에게 주는 월급을 아까워해서일 것이라는 황당한 생각까지 이르렀다.조금 전 윤아가 알려준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었다.배주한이 저를 좋아한다고? 그녀가 정신을 잃지 않고서는 절대 생각해 낼 수 없는 답이었다.생각하면 할수록 주현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그런데 바로 이때 누군가 방문을 노크했다.“누구세요?”금방 윤아와 통화한 주현아는 마치 놀란 새처럼 푸드덕 자리에서 일어났다.“나다.”장은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쉰 주현아가 문을 열러 나갔다.“엄마, 왜요?”장은숙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방에서 혼자 뭐 하는 거냐?”“아무것도 안 했는데요.”“그래? 방금 무슨 말소리를 들은 것 같았는데.”그러나 두 사람의 통화 소리를 어머니께서 들은 건지 추측하기도 전에 장은숙이 먼저 입을 열었다.“네 대표라는 사람이 전화한 거니?”어머니가 이렇게 묻자, 그제야 주현아는 안도했다. 아마 윤아와의 통화 내용은 제대로 듣지 못한 듯했다.“아니요. 넘겨짚지 말아요. 윤아랑 통화한 거예요.”“뭐? 윤아?”윤아 얘기가 나오자 장은숙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그래, 윤아 말이지? 너무 오래 못 봤어. 올해는 우리 집 안 온다니?”“안 와요.”주현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지금 해외에 있거든요. 언제 돌아올지도 잘 몰라요.”이에 장은숙이 한숨을 내쉬었다.“이제 윤아도 그립네. 전에는 우리 집에 자주 왔었는데, 설날이면 내가 항상 너랑 윤아에게 줄 용돈도 준비
그 말은 주현아의 어머니에 대한 편견을 완전히 깨뜨렸다.그녀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원래는 집안 배경이 맞지 않아 반대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다른 세상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나중에 단순한 배주한의 변심으로 그녀를 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까 걱정하여 반대한 것으로 생각했다.그러나 뜻밖에도 남자 때문에 속을 썩일 딸이 걱정되어서가 이유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엄마...”“현아야, 물론 엄마는 네가 될수록 빨리 결혼하길 바라. 하지만 결혼 상대는 하나하나 따져가며 잘 골라야 해.”장은숙이 주현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게 말했다.“알았지?”“네.”주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시름 놓으세요. 저는 남자 때문에 그럴 일 없어요.”딸의 씩씩한 말에 장은숙은 그제야 마음을 살짝 놓았다.“그럼 됐어.”장은숙은 딸이 그 남자에게 마음을 사로잡힌 건 아닐까 걱정했었다. 얼굴이 반반한 남자가 조금 아첨하기만 하면 넘어가는 여자가 대다수였으니까.게다가 집안도 좋으니 넘어가긴 더 쉬울 것이었다.그러나 딸이 그럴 의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장은숙은 흐뭇했다.“그럼 엄마가 나중에 선 자리 알아봐 줄게.”“선 자리요?”선 자리라는 말에 주현아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구겨졌다.“선은 갑자기 왜요?”“바보야. 네가 지금 나이가 몇인데 선 자리 없이 뭘 어떡하려고? 그리고 소개팅이 제일 빨라. 집안 배경이며 성격이며 알 거 다 알고 만나보는 거니 마음이 맞으면 바로 혼담이 오가는 거지.”주현아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 들었다.“아무리 소개로 만나는 거라 해도 혼담은 함부로 꺼내선 안 되죠.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고요.”“엄마도 다 알아. 그럼 얼른 시간 정해. 내일? 아니면 모레?”“내일 설인데, 설도 안 쉰대요?”“설이니까 보는 거지. 나중에 집안 사람들이 다 봐줄 거야. 그럼 이렇게 하는 거로. 내일 바로 오라고 한다?”말을 마친 장은숙은 주현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방을 나가버렸다.주현아는 황당하고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