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아는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왜 그래? 내 제안에 무슨 문제 있어?”"없다고 생각해?"수현의 말투는 좀 거칠었다."우리가 다시 만난 지 고작 시간이 얼마인데? 함께 있는 시간은 또 얼마나 되는데? 나는 단지 우리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을 뿐인데. 너는 뭐? 나보고 혼자 가라고? 양심도 없는 여자야 진짜.”말을 마치자 그는 아직도 화가 난 듯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세게 치려고 했지만, 닿을 즈음에는 때리기 아까워 결국 그녀의 하얀 이마에서 살짝 스치는 수밖에 없었다."양심 없어.”윤아는 그의 손이 자기 이마에 스치자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자신의 이마를 막으며 어색하게 말했다."난, 난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몰랐어, 넌 불편하다고만 했지, 나랑 단둘이 있고 싶다고는 말하지 않았잖아.”"바보.”그녀의 이마를 치는 것이 아까워서 그는 결국 그녀의 부드러운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그걸 말이라고. 내 뜻을 그렇게도 모르겠어?”사실 그는 세게 꼬집지 않았다. 단지 윤아는 볼을 이렇게 꼬집혀 있는 것이 좀 민망해서 손을 뻗어 그를 밀쳐냈다."다음에는 그냥 솔직히 말해, 뭐 또 말을 그렇게 돌려 해?”이 일이 대충 이렇게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수현이 갑자기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정말 할 말이 있으면 솔직히 해?”이 질문에 윤아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수현이 말했다. "그럼 나랑 나가서 살자.”수현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랑 같이, 응?"이 말을 할 때 수현의 말투는 부드러웠고, 눈도 그녀만 빤히 쳐다보았는데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웠다.이것에 윤아는 하마터면 그를 못 이겨 승낙할 뻔했다.하지만 막판에 두 아이의 귀여운 얼굴이 떠올랐다. 자기의 팔짱을 끼고 엄마 하며 부르는 모습을 말이다.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지금의 윤아는 남편과 아이 중 어느 쪽도 쉽게 선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즉시 고개를 가로저었다."안 돼.”안 된다는 말에 수현은 놀
“됐어.”수현의 품에 안긴 윤아는 그가 낮은 목소리로 됐다고 하자 기분이 착잡했다.뭐가 됐다는 거지? 설마 말이 많아서 귀찮다는 건가?“난 네가 한 말로 족해.”수현의 말에 윤아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적어도 너의 마음속에 나도 애들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거잖아.”수현은 윤아를 안고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늦었다. 얼른 자자.”수현은 윤아를 놓아주고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윤아는 옆으로 누워 수현을 바라봤다.“그럼 일단은 이사 안 해도 되는 거지? 계속 이렇게 다 같이 지내는 거지?”수현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지금으로써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일단 생각을 뒤로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응, 일단은 같이 지내자. 근데… 아이들이 크면 우리 나가서 살아도 되겠지?”아이들이 크면?윤아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올해 다섯 살, 곧 새해가 다가오긴 하지만 아이들이 클 때까지 기다리면 사실 아직 멀었다.윤아는 아직 머나먼 미래의 일로 수현이 기분 나빠하는 게 싫었다. 그래서 일단 말이 나왔으니 그러자고 했다.“그래.”수현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약속했다? 나 속이면 안 돼.”“응.”수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앞으로도 무르기 없기다. 그때가 되면 지금처럼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거야.”“알았어.”수현은 윤아의 말투가 어딘가 피곤해 보인다는 걸 눈치챘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윤아는 무거운 눈까풀을 이길 힘이 없어 끄덕끄덕 졸고 있었다.비몽사몽인 상태에서도 그와 대화하려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던 수현은 윤아의 볼을 만지작거리더니 부드럽게 말했다.“늦었다. 얼른 자.”“응, 잘자.”윤아가 코맹맹이 소리로 대답하며 잠에 들려다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너도 일찍 자. 밤새우지 말고.”졸려서 정신도 못 차리면서 그에게 빨리 자라고 당부하는 모습에 수현은 자기도 모르게 윤아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그래, 같이 자자.”“잘자, 심공주.”잘 자라는 말을 윤아가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대꾸하
수현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금방 깨서 그런지 나른한 게 퍽 섹시했다.윤아는 수현의 목소리에 매혹되어 한참 멍해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응.”수현이 반쯤 감은 눈으로 핸드폰을 꺼내 한번 확인하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그러더니 윤아를 당겨 품에 꼭 끌어안았다.“아직 일러. 조금 더 자도 돼.”윤아도 더 자고 싶어서 자세를 바꾸려했다. 한 자세로 너무 오래 있으니 손이 다 저렸다.하여 수현이 끌어안자 자기도 모르게 소리 내 말했다.“나 자세 좀 바꾸자. 일단 이거 풀어줘.”눈을 감고 다시 잠에 들려던 수현이 다시 눈을 뜨고는 윤아의 허리에 감은 손을 풀어줬다.윤아가 자세를 바꾸자 수현은 다시 윤아에게 바짝 붙어 꼭 끌어안았다.“됐어? 자자.”“응.”윤아는 눈을 감고 다시 잠을 청했다.아까는 되게 졸렸는데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니 정신이 말짱해졌다.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다시 눈을 뜨고 가만히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잠이 오지 않을 때 침에 누워있는 게 더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 수현이 허리까지 감싸고 있자 순간 그 팔이 천근만근으로 느껴졌다. 너무 무거웠다.이렇게 생각할수록 윤아는 점점 불편해져서 몰래 손을 내밀어 허리에 올려놓은 수현의 손을 밀어내려 했다.수현이 자고 있었길래 깨우기 싫어 아주 살금살금 행동했다. 손을 밀어내고 몰래 아래층으로 내려가 무슨 일로 이렇게 복작복작한지 확인해보고 싶었다.하지만 수현의 팔은 생각보다 단단했고 밀어낼 수가 없었다.“…”윤아는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밀어내려 했다. 그러다 결국 팔을 밀어내기는커녕 수현을 잠에서 깨우고 말았다. 윤아는 거칠어진 수현의 숨소리를 들으며 그가 잠에서 깼음을 눈치챘다.“다 잤어?”아니나 다를까 수현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수현이 깼으니 윤아는 더 눈치 볼 것도 없이 이렇게 말했다.“응, 깨니까 다시 잠들기 힘드네. 시끄럽길래 혹시나 무슨 일이 있나…”윤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현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정신을 차려보
윤아는 수현의 저돌적인 키스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숨이 가빠졌다. 숨을 고르고 있는데 수현이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왜 밀어?”툴툴대는 모습이 마치 큰 억울함이라도 당한 것 같았다.윤아가 그런 수현을 속으로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우리 아직 양치하기 전이잖아. 그래서 밀어낸 거야.”그러면서 작은 소리로 불평했다.“양치도 안 하고 키스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이를 들은 수현이 위험한 눈빛을 내뿜으며 윤아의 허리를 꼬집었다.“왜 없어? 전에는 계속 그래 왔잖아.”이 얘기만 꺼내면 윤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걸 지금 자랑이라고? 누가 너한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키스하래?”“싫어?”“그건 아닌데…”수현은 입냄새가 없었고 자기 전에도 양치했기에 아침에 일어나 키스를 해도 싫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하지만 그래도 이런 행위가 내키지는 않았다. 양치도 하지 않고 키스하는 행위가 윤아는 계속 마음에 걸렸다.윤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수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심공주, 너는 눈치챘는지 모르겠는데, 너 지금 나 엄청 거부하고 있다?”“내가 언제?”“아니라고?”수현이 목소리를 낮게 깔며 진지하게 말했다.“너 돌아오고 나서 지금까지 우리 한 번도 사랑을 나눈 적이 없잖아.”윤아의 얼굴이 순간 화끈 달아올랐다.“그건 전에 네가 다쳐서 그런 거지.”윤아가 또 상처 핑계를 대며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했지만 수현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또 그 소리야? 그게 언제 일인데. 뒤에 하라는 대로 다 하면서 말끔하게 나았잖아.”수현은 말끔하게 나았다는 말에 힘을 실었다. 윤아가 어떻게 변명하는지 지켜보려 했다.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수현은 윤아의 반박 능력을 너무 얕잡아봤다.윤아는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말끔하게 다 낫긴. 다친 지 얼마나 됐다고. 상처가 아물고 아프지 않다고 해서 몸을 막 다루면 안 돼. 상처가 얼마나 깊었는데, 말끔하게 나으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해. 의사 선생님께서 몇 달 동안은 격렬한 운동
수현에게 다른 사람을 찾으라고 한 것이다.원래도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기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금방 잊어버릴 것이다.하지만 이 말에 수현은 기분이 잡쳐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 말을 매우 신경 쓰는 것 같았다.윤아는 그제야 자기가 말실수했음을 눈치챘다. 남편에게 다른 여자를 찾으러 가라고 하는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있을까? 정신을 차린 윤아가 얼른 만회하려 했다.“그런 말이 아니라…”“그럼 무슨 말인데? 다른 사람 찾아도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는 소리야?”수현은 윤아가 그와 함께 있는 걸 거부한다고 생각했다. 그 원인은 윤아가 기억을 잃은 것도 있겠지만 수현이 다친 것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제일 큰 원인이라면 아마 거부감이 들고 싫어서였겠지?늘 수현이 어르고 달래야만 단맛을 좀 볼 수 있었다. 얼마 없는 달콤함이라도 느끼기 위해 수현은 늘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렸는데 결국 다른 사람을 찾으라는 말이 돌아왔다.이게 진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수현은 이렇게 민감해져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남자로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아를 마주할 때마다 수현은 초조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절대 아니야!”수현의 정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윤아가 얼른 다독였다.“그냥 무심코 한 말이야. 그런 생각한 적 없어.”윤아는 이렇게 해명하면서 먼저 수현에게로 다가갔다. 그러자 윤아의 달콤한 체취가 수현의 숨결에 파고들었다. 수현은 우울한 표정으로 윤아를 바라봤다.“가끔은 무심코 던진 말이 너의 가장 진실한 생각을 대변하기도 하지.“아니야!”윤아가 힘껏 고개를 저었다.“오해하지 마. 정말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말이야!”말하면 할수록 윤아는 점점 다급해졌다.“다른 건 의심해도 되는데 이건 진짜 아니야.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내가 어떻게 좋아하는 남자를 다른 사람에게 보내?”기분이 우울하긴 했지만 윤아의 흔들림 없는 태도와 그를 좋아한다는 말에 그래도 많은 위안을
이렇게 말한 윤아는 수현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수현의 이마에는 핏줄이 튀어 올랐고 실눈을 뜨고 있었다.“?”윤아는 어리둥절했다. 그냥 말만 했을 뿐인데 이 정도로 흥분한다고? 이런 패티시가 있나?윤아가 이런 가능성을 떠올리는데 수현이 진지하게 말했다.“나 언제 묶어?”“?”윤아는 어이가 없었다.하지만 수현은 마치 구미가 확 당긴 듯 윤아의 하얗고 가는 손목을 잡으며 이렇게 말했다.“다음에 한 번 해볼까?”이 말에 윤아는 얼른 수현의 손을 뿌리치며 얼굴을 붉힌 채 쏘아붙였다.“너 지금 약간 변태 같은 거 알아?”“부부 사이에 변태가 어디 있어?”수현이 반박했다.윤아는 인내심을 잃었다. 이제 더는 듣기 좋은 말도 나오지 않았다.“나 내려가 볼 거야. 넌 더 잘 거야?”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수현도 정신이 말짱해졌다.“아니야, 같이 내려가자.”두 사람은 함께 씻고 아래로 내려갔다.아래층으로 내려온 윤아는 아까 왜 그렇게 시끄러웠는지 알 것 같았다. 어른들이 아이를 데리고 불꽃놀이를 하고 있었다.이 근처는 다 심인철의 땅이었다. 게다가 이웃집과 거리가 꽤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불꽃놀이를 한다 해도 이웃에 방해가 될 일은 없었다.윤아가 내려오자 심인철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시끄러워서 깬 거야?”윤아는 이 말에 대꾸하지 않고 되물었다.“왜 이렇게 일찍 깨셨어요?”“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저녁에도 일찍 자지. 요즘 젊은이들은 저녁에 잠을 안 자서 문제야. 그러니 아침에 못 깨어나지. 그렇게 악순환이 되는 거야.”익숙한 잔소리에 윤아는 머리가 지끈거려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반박했다.“아빠, 우리가 언제 밤새웠다 그래요? 나랑 그이는 그래도 꽤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편이에요. 평소에 야근도 별로 없고 오락 활동도 없고. 잠도 되게 잘 잔다니까요?”“맞아요.”이선희가 윤아의 편을 들었다.“국내에서 같이 지낼 때 보니까 일찍 잠에 들더라고요. 생활 패턴이 아주 규칙적이에요.”심인철도 윤아가 와서 지내는 동안 꽤 규칙적이
식사할 때 심인철은 진태범과 이선희가 담백한 요리가 입에 맞지 않을까 봐 걱정했다.하지만 이선희가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입에 안 맞을 건 또 뭐예요. 저희도 요즘 이렇게 간단하고 담백하게 먹는 걸 좋아해요. 건강을 챙기기 시작하면서 보니까 이런 음식이 제일 좋더라고요.”이선희는 사실 음식을 늘 절제했다. 외모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너무 달거나 칼로리가 높은 음식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깔끔하고 친환경적인 음식만 고수했기에 피부도 그렇고 몸매도 그렇고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었다.하지만 최근에 이 규칙에 금이 가고 있다.이선희는 요즘 윤이와 서훈과 지내면서 아이들이 너무 예뻐 밥을 풀 때 항상 넘쳐나게 펐다.아이들이 배부르게 먹고 포동포동하게 잘 자랐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런 것이다.하윤과 서훈은 윤아의 가르침 아래 항상 먹을 수 있는 만큼만 받아 갔고 절대 낭비하지 않았다. 윤아도 과하게 먹기보단 적게 먹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이선희가 퍼준 밥은 아이들이 다 먹어 치우기에 너무 많았다. 먹다가 배가 부른 아이들을 이선희는 흐뭇하게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괜찮아. 절대 낭비 안 해. 남기면 할머니가 먹으면 되지.”자기관리가 철저했던 이선희는 그렇게 활짝 웃으며 손주들이 남긴 잔반을 먹어 치웠다.칼로리 계산도, 당도 계산도 더는 하지 않았다.하여 이선희는 최근에 거의 음식을 가리지 않았다. 그저 손주들이 좋아하면 된다고 생각했다.이선희가 아이를 돌보는 걸 옆에서 지켜봐 온 윤아는 이선희가 그녀보다 아이를 더 잘 보살핀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장을 바꿔 윤아가 이선희라면 그렇게 시시각각 아이들의 행동을 살피지는 못했을 것이다.아이들을 어찌나 아끼는지 만약 윤아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살겠다고 한다면 이선희 성격에 아마 별말은 하지 않겠지만 무조건 자주 아이들을 보러 올 것이고 아이들을 보고 나면 떠나기 아쉬워질 수도 있다.지금까지의 관찰로 봤을 때 남아 있겠다고 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러니 이사 가는 건 생각도 하지 말
서훈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를 까밝히지는 않았다. 어른에게도 어른의 세상이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이선희는 이미 진태범의 계략을 눈치챈 것 같았다.진태범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선희가 눈을 찌푸리며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진태범을 바라봤다. 이에 진태범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워졌고 코를 긁으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왜 그래?”물어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이선희가 아예 이렇게 말했다.“이따 애들이 남긴 거 당신이 해결해요.”“…”진태범은 묵묵부답이었다.“들었죠?”진태범이 코를 긁적거리며 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진태범이 대답하고 나서야 이선희는 흡족한 듯 고개를 돌렸다.더 먹으려던 진태범은 이선희의 말에 조용히 젓가락질을 멈췄다.이미 먹을 만큼 먹었는데 하윤과 서훈이 남긴 음식까지 먹으면 평소에 먹던 양을 초과하게 되니 천천히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이따가 더 먹기가 힘들어진다.두 사람의 사랑싸움을 일렬로 직관하고 있던 윤아가 수현의 귓가에 속삭였다.“아버님 원래 어머님 앞에서 이러시는 편이야?”이를 들은 수현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아빠가 엄마한테 밀리는 거?”“음, 그렇지?”“우리 집은 다 그래.”“잉?”수현이 입꼬리를 올리며 애정 가득한 말투로 말했다.“내 말은 우리 진씨 집안 남자들이 다 그렇다고. 사랑꾼이야. 결혼하면 와이프밖에 모르지.”“…”이 말에 윤아는 놀라면서도 어이없다는 듯 수현을 힐끔 쳐다봤다. 얼굴이 두꺼운 건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분명 진태범을 칭찬했는데 그 칭찬을 자기에게 돌린 것이다.휘둥그레진 윤아의 눈을 보며 수현은 그런 윤아가 너무 귀여워 자기도 모르게 윤아의 코를 쓸어내렸다.“갑자기 왜 그런 표정으로 봐? 내 말 틀려?”“아니.”윤아가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거두었다.“셀프 칭찬을 이렇게 할 줄은 몰랐지.”수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내 장점은 이거 말고도 많아. 천천히 알아가게 될 거야.”자기 자리에 앉아 있던 심인철은 사위와 딸이 꽁냥거리는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