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입만 살아서는... 분명히 화났으면서.’심윤아는 애써 웃음을 참고 설명하려고 했다. 이때 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 사람이 코너에서 나타났다.“대표님.”그녀는 상대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봤다. 상대는 아무래도 진수현이 언급했던 매니저인 것 같았다.그녀의 추측이 맞았다. 상대는 오민우가 맞았고, 심윤아와 진수현이 왔다는 말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왔다. 그것도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이다.오민우는 심윤아와 만나지 못한지 한참 되었다. 그녀가 실종한 것처럼 갑자기 사라진 탓에 걱정도 되었다. 그녀가 사고라도 당했을까 봐서 말이다.하지만 심윤아가 멀쩡히 눈앞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드디어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그에게 최고의 조건을 제공할 수 있는 회사가 무사할 수 있다는 확신도 생겼다.먼저 심윤아와 인사한 다음 그는 진수현에게도 인사했다.“오셨어요, 진 대표님.”조금 전의 일 때문에 진수현의 안색은 여전히 어두웠다. 하지만 오민우는 중요한 사람이기에 기분이 나쁘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줬다.오민우는 예민하게 무언가 눈치챘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심윤아는 사무실로 데려갔다. 일 얘기를 해주면서 말이다.심윤아는 회사에 안 나온 지 한참 되었다. 그래서 일로 할 얘기가 아주 많았다. 처음에는 막연한 표정으로 듣기만 하던 그녀는 점점 집중하기 시작했다.그녀가 일 처리를 하는 동안 진수현은 사무실에서 잠깐 방황하다가 소파에 앉아 기다렸다. 오민우는 그녀와 얘기하다가도 가끔 고개를 들어서 진수현을 힐끗 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대표님, 진 대표님은 어떻게 같이 오셨어요?”이렇게 물은 오민우는 또 무언가 생각난 듯 말을 보탰다.“그리고 저한테는 두 분이 그런 사이라는 건 한 번도 언급한 적 없잖아요.”오민우의 질문에 심윤아는 멈칫했다. 조금 전 진수현이 했던 말을 생각하면 추측 가는 바도 있었다.“제가 말 안 했던가요?”“네.”심윤아가 티를 내지 않은 탓에 오민우는 그녀가 기억을 잃은 일에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몰라도 아주 복잡한 것 같았다. 기억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던 심윤아는 입술을 깨문 채 생각에 잠겼다.“대표님? 대표님.”오민우가 그녀를 부르며 손을 휘적일 때가 되어서야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왜 그래요?”오민우는 걱정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원래는 그녀가 대답을 회피하기 위해 입사 날 얘기를 꺼낸 줄 알았지만, 그녀의 반응을 보니 마냥 회피 같지는 않았다.그녀는 아주 진지하게 그의 입사 날짜를 물었다. 그의 입사 날짜를 통해 무언가 떠올리려는 것 같았다.‘역시 회사를 이끄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라. 남다른 감이 있단 말이지.’찝찝한 기분이 들었던 오민우는 이렇게 생각하며 소파에 앉아 있는 진수현을 힐끗 봤다. 그는 아주 차가운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오민우는 손에 들고 있는 서류와 돈줄을 잡은 진수현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대표님, 회사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일을 시작할 건 없어요. 이 정도 일은 제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어요. 그러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쉬는 게 어떠세요?”“...”심윤아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힐끗 봤다.“저 지금 금방 들어왔는데 돌려보내려는 거예요?”오민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진수현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안색이 훨씬 풀어진 것을 봐서는 올바른 선택을 한 듯했다.그래서 오민우는 용기를 내서 말했다.“대표님 안색을 보니 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요. 전보다 훨씬 야윈 것 같은데 그동안 많이 아프셨어요?”오민우의 말을 듣고 심윤아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야윈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잘 모르던 사람도 한눈에 보아낼 정도였다.심윤아가 입술을 깨문 채 아무 말도 없는 것을 보고 오민우가 말을 이었다.“오늘은 일단 돌아가세요. 시름이 안 놓으면 다음에 다시 오셔도 되잖아요. 중요한 일이 있으면 제가 다 보고드릴게요. 그리고 처리는 제가 할 수 있어요.”오민우가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심윤아는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잠깐 고민하다
진수현은 고개를 숙여 눈을 꼭 감은 채 자신의 품에 기댄 심윤아를 바라봤다.“오래간만에 일해서 그런가? 약간 피곤하네.”이 말을 듣고 진수현은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피곤해? 어디 아픈 데는 없고?”눈에 띄게 긴장한 진수현을 보고 심윤아는 피식 웃었다.“내가 피곤하댔지, 언제 아프다고 했어? 왜 긴장하고 그래?”“내... 내가 언제...”“지금 긴장한 게 아니라고?”“응. 난 그냥 물어봤을 뿐이야. 물어보는 것도 안 돼?”걱정했으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걸 보면 조금 전의 일 때문에 적지 않게 섭섭한 듯했다.심윤아는 잠깐 고민하다가 먼저 손을 뻗어 그의 손과 맞잡았다. 그것도 힘껏 말이다. 그 순간 진수현은 몸을 흠칫 떨었다.몰래 웃음을 참던 그녀가 고개를 든 순간 그도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두 사람의 시선은 허공에서 딱 마주치게 되었다.“이따가 너희 회사에 가 봐도 돼?”심윤아의 맑은 눈빛은 깨끗한 호수와 같았다. 사무실의 조명 아래에서는 유난히 밝게 빛나서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다.“왜?”그는 걸걸한 목소리로 되물으며 심윤아의 허리를 더욱 꽉 잡았다. 다른 손은 그녀에게 잡혀 있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그녀의 온기를 느끼기만 했다.그녀의 온기 때문인지 그는 마음도 사르르 풀렸다. 그래도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 섭섭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아까는 안 간다고 했잖아.”“그래, 안 간다고 했었지.”심윤아가 곧바로 대답하는 것을 보고 진수현의 안색은 완전히 어두워졌다.“역시 넌 나한테 관심 없지.”심윤아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내가 왜 너한테 관심 없어? 난 관심이 있으니까 안 가려고 하는 거야.”“응? 그게 무슨 뜻인데?”“너 아직 환자거든? 환자가 무리해서 되겠어? 너 오늘 이미 충분히 무리한 것 같은데.”말을 마친 심윤아는 넋이 나간 진수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너 설마 그사이에 다친 걸 까먹었어? 아니면 하루에 약 한 번 바르는 것으로 멀쩡한 사람이 됐다고 생각한 건가?”조금 전까지만
뜨거운 열기에 놀란 것도 잠시 진수현은 입술을 겹쳐왔다.“읍!”갑작스러운 키스에 심윤아는 넋이 나가버렸다. 그가 사무실에서 이럴 줄은 몰랐던 것이다.입술에 닿은 따듯한 감촉과 진수현 특유의 숨결은 그녀를 마구 범했다. 뒤늦게 정신 차린 심윤아는 손을 뻗어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읍... 안 돼... 여기 사무실이야...”이때 누가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정말 어색해진다. 그래서 심윤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히며 키스를 피하려고 했다.그녀가 자꾸 피하려고 하자 진수현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잡았다. 그리고 약간 흥분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왜 피해?”심윤아는 그의 눈빛에 깜짝 놀랐다. 적어도 그녀의 기억 속에는 이런 눈빛을 한 진수현이 없었기 때문이다.그의 눈빛은 블랙홀처럼 사람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었다. 조금 전의 키스를 떠올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심윤아의 얼굴은 점점 붉어지기 시작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서 그의 눈을 피했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얼버무렸다.“호... 혹시 누가 들어오기라도 한다면...”진수현은 걸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무도 안 들어와.”“...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오 매니저를 제외하고 누가 감히 네 사무실에 들이닥치겠어? 찾아왔다고 해도 노크 정도는 하겠지.”“그, 그래?”기억이 없었던 심윤아는 아무것도 몰랐다.“응.”진수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마치 이 회사, 이 사무실이 자신의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이렇게 대답한 그는 천천히 몸을 숙이더니 다시 입을 맞추려고 했다. 하지만 점점 가까워지는 그를 바라보던 심윤아는 또다시 피해버리고 말았다.진수현의 입술은 제대로 허탕 치게 되었다. 처음에는 심윤아가 넋을 잃은 덕에 잠깐의 달콤함을 맛볼 수 있었다. 원래는 그것으로 만족할 생각이었지만 너무나도 달콤해서 자꾸만 탐하게 되었다.그는 더 원했다. 하지만 심윤아는 계속 피하려고만 했다. 구구절절 설명하고 나서도 실패하자 그는 심윤아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난 기다리기 싫어.”말을 마친 진수현은 손을 놓고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그걸 바라보던 심윤아는 그가 화난 줄 알았다. 그의 손길이 갑자기 사라지자 괜히 썰렁한 기분도 들었다.‘갑자기 어딜 가는 거지?’심윤아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진수현은 이미 문 앞으로 가서 문을 잠가버렸다. 그가 화나서 떠나는 줄 알았던 심윤아는 그대로 말을 잃었다.심윤아는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진수현이 위험한 눈빛으로 돌아오는 모습도 그냥 바라보기만 했다. 아니, 정확히는 하도 흥분해서 위험해 보이는 것이었다.늑대에게 노려지면 딱 이런 기분일 것이다. 늑대는 강하고도 포악했다.전에는 다쳤다는 핑계로 진수현을 거절했다. 하지만 지금은 거절하지 못하리라는 위기감이 본능적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심윤아는 그가 가까이 다가오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책상 뒤로 가버렸다.그녀가 자신을 피하는 것을 보고 진수현은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화나면서도 웃긴 듯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공주야, 이번에는 왜 또 피해? 누가 들어올까 봐 불안한 거면 문을 잠갔잖아.”심윤아는 진수현이 문은 잠근 탓에 더 겁이 났다. 적어도 문이 열려있으면 다른 사람이 들어올 것을 생각해서 절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특히 그의 위험한 눈빛을 보니 이대로 꿀꺽 삼켜질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게 싫은 것은 아니지만 사무실에서는 선을 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만약 이상한 소리를 냈다가 옆 사무실 사람이 들으면...? 또 만약 지나가는 사람이 들으면...’심윤아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찌 됐든 사무실에서 선을 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녀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진수현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확히는 욕구불만이었다.그는 앞으로 다가가 손으로 책상을 짚더니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공주야, 이쪽으로 와.”“...”심윤아는 잠깐 넋이 빠졌다가 단호하게 거절했다.“싫어.”그의 말을 따른 다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녀는
사무실을 떠난 오민우는 자신이 사장님께서 만족할 만한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돌아가는 길에 조금 전 사무실에서 일어난 일을 줄곧 회상했다.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무실에 있을 때 사장님께서 물어본 그 몇 가지 질문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처음엔 심윤아가 화제를 돌리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되었으나 사무실을 나서면서부터 뭔가 수상쩍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주의를 딴 데로 돌리기 위해서라면 이야깃거리는 많고도 많았다. 그런데 그중에서 하필이면 그런 질문을 했다.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하고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는 자신의 사무실로 가서 서명할 서류를 찾았다. 대표님의 사무실에 들러 엿들어볼 심산이었다.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걸음을 재빠르게 옮긴 오민우는 몇 분 지나지 않아 사무실 앞에 도착했다.노크했으나 응답은 없었다.오민우는 서두르지 않고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1분간 기다렸으나 여전히 소리가 나지 않자 오민우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대표님.”잠시 후 안에서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문밖에서 듣는 것만으로도 소리가 작지 않은 듯했다. 오민우는 두 사람이 부딪힌 것은 아닌지 조금 걱정이 되었다.어쨌거나 어딘가 이상했던 소리에 다급해진 오민우는 문을 힘껏 두드리기 시작했다.“대표님, 괜찮으세요? 무슨 일이에요?”그러나 사무실 내부는 조용했고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대표님?”잠시 머뭇거리던 오민우는 결국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찰칵”문고리를 내려보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그는 멍하니 문고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문이... 잠겼어?때마침 문 안에서 누군가의 잠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무슨 일입니까?”오민우는 진 대표의 목소리임을 금방 알아차렸고, 무언가를 느낀 것 같긴 했지만 마치 뇌가 마비된 듯 일시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오히려 그의 입이 뇌보다 반응이 빨랐다. 수현의 말을 들은 후 그는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었다.“대표님께서 서명하셔야 할 서류가 있습니다.”내부가 또다시 조용해졌다.“거기서 기다려요.”
곧이어 문이 열렸다.문이 열림과 동시에 오민우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비즈니스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미소는 소용이 없었다. 문을 열러 온 사람은 윤아가 아닌 흐린 표정의 수현이었다.“서류는요?”오민우는 그의 안색이 칙칙한 데다 옷깃이 지저분하고 셔츠 단추 두 개가 풀려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넥타이는 진작부터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이를 본 오민우는 자신이 정말로 두 사람의 행복한 시간을 방해했음을 알아차렸다.“...여기요.”오민우는 그저 무감각하게 손에 쥔 서류를 건넬 수밖에 없었다.“확인하시고 사인만 하면 됩니다.”사실은 윤아가 사인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는 그저 대표님 사무실에 들르기 위해 핑계를 댄 것일 뿐이니까.수현은 서류를 받은 후 여기서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사무실 문을 닫아버렸다.“쾅”문밖에 서 있던 오민우는 하마터면 문에 맞을 뻔했다.하지만 어쩔 수 없다. 같은 남자로서 그런 일을 할 때 방해받는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너무 잘 아니까. 방해한 장본인을 죽이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을 것이다.그랬기에 수현이 아무리 그를 아니꼽게 보고 건방지게 굴더라도 그저 머쓱하게 그 자리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사무실 내부.수현은 오민우가 준 서류를 윤아에게 건넸다.“사인하래.”윤아가 자신의 옷을 단정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에서 목까지, 목에서 귀까지 모두 울긋불긋했으므로 옷에 가려진 곳만 보이지 않을 뿐이지 훤히 드러나 있었다.그녀는 황급히 단추를 채운 다음 수현이 들고 있던 서류를 받아 펜을 들었다.“어디?”그녀의 다급하고 황망한 모습과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보니, 조금 전 노크 소리가 들렸을 때 힘껏 밀쳐낸 그녀가 생각나며 화를 참을 수 없어졌다.이 망할 놈의 오민우.아침에도 저녁에도 오지 않더니, 하필이면 그때 와서 좋은 일을 다 망쳐버렸다.요즘 수현의 부상 때문에 윤아는 상처가 벌어진다는 것을 이유로 스킨십을 꺼렸었다.결국 어렵게 기회를 찾아 마음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현이 또 한 페이지를 넘겼다.윤아가 무언가 말하려다가, 찡그린 그의 미간을 보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삼켰다.됐다, 됐어. 읽는 것도 빠른데 두 사람이 사는 것이 아무래도 혼자인 것보다는 나을 테지.윤아는 그를 방해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그가 다 훑어볼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약 몇 분 만에 계약서를 다 훑은 그가 마지막 장의 윤아가 서명한 글씨체를 보고 웃음을 금치 못했다.그가 서류를 덮자 윤아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이렇게 빨리 읽는다고? 자기도 자세히 읽어보진 못했으면서, 날 뭐라 해.”그 말을 들은 수현이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세 번째 페이지 다섯 번째 줄 내용이 뭐였게? 기억해?”“뭐?”수현의 느닷없는 질문에 윤아가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수현이 느릿느릿하지만 조리 정연하게 알려주었다.윤아가 한바탕 투덜대며 서류를 펼쳐보았으나 내용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대로였다.윤아가 수현을 힐끗 바라보자, 수현이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물었다.“남편 좀 대단한 것 같지 않아?”윤아는 침묵했다.수현이 그녀의 머리를 문질러주며 입을 열었다.“내가 갖다줄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말을 마친 수현이 서류를 건네주기 위해 몸을 돌렸다. 이때 윤아를 향하던 웃음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문을 열고 오민우에게 서류를 건네는 그의 모습은 차갑기에 그지없었다.오민우는 어색하게 서류를 받아서 들었다.“다시는 오지 마세요.”수현이 차갑게 말 한마디를 뱉었다.말을 안 했으면 오히려 나을 뻔했다. 그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오민우는 더 난처해져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저도 이제 별일 없으니 폐 끼치지 않을 겁니다.”말을 마친 오민우는 빠르게 자리를 떴다.모퉁이를 지난 후에야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자리에 서 있었다.전에 아무리 대기업 경영진에 익숙하더라도 수현처럼 카리스마가 강한 남자는 거의 본 적이 없었다.역시 진씨 그룹의 진 대표님은 카리스마나 아우라가 다른 사람과는 다른 것 같다.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