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곰이 생각하던 심윤아가 문득 진수현을 흘겨보았다.“다 네 탓이야.”“응?”“어제 돌아가자고 제안했을 때 들어줬으면 오늘 여기 안 갇혀도 됐잖아.”그녀의 말에 진수현이 한참 동안 묵묵히 바라보았다.“하늘의 뜻일 수도 있잖아.”“뭐?”“너희를 다시 만나보게 하려는.”그의 말이 심윤아를 침묵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한참 동안 말이 없던 심윤아가 입을 열었다.“왜 자꾸 만나보라고 부추겨?”질투 안 나? 기분 나빠야 하는 거 아니야?왜 자꾸 한번 만나보라고 권유하는 거지? 심윤아는 이해할 수 없었다.“둘이 만나봐야 내 마음이 개운해지니까.”그녀의 질문에 진수현이 내놓은 답이었다.그제야 심윤아는 진수현의 뜻을 이해했다.두 사람이 만나보지 않으면 심윤아가 돌아간 이후 계속 마음에 둘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 계속 마음에 두어 그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게 하는 것보다야 한 번 만나게 하여 괜찮다는 것을 확인토록 하는 것이 나은 것이다.물론 진수현은 이러한 생각이지만 이선우는 다른 속셈이었다.그가 심윤아를 보려 하지 않는 것은 그녀가 자신을 계속 마음속에 두길 바라기 때문이다.비록 진수현은 아직도 그가 타협한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는 결국 타협했고 다시는 심윤아에게 손을 대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이선우는 다른 속셈을 가지고 있었다.심윤아를 곁에 두지 못할 바에야 영원히 자신을 기억하고 마음에 두게 하는 것이다.앞으로 여생 동안 심윤아가 다른 남자를 마음에 둘 것을 생각한다면 이는 진수현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진수현의 뜻을 알아챈 심윤아는 더 이상 저항하지 않았다.“근데 그 사람이 날 만나고 싶지 않다잖아.”“한 번 더 시도해 봐. 정 싫어한다면 나중에 다시 기회 잡고.”심윤아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아, 어머님한테 연락해서 물어봐. 거기도 비가 오는지.”심윤아가 무언가 떠오른 듯 진수현에게 말했다.“그래.”진수현은 그녀의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이곳의 폭우가 이선희와 아이들에게 영향을 줄까 봐 걱
하지만 앞으로 그들이 잘살게 하려면 회사 일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상처도 나았고 심윤아도 잠들었으니 진수현은 이 기회를 틈타 얼른 회사 일을 처리해야만 했다.서재는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심윤아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비가 그치고 도로의 질서가 조금 나아진 뒤였다. 교통질서를 위해 많은 인원이 출동했음에도 일부 지역의 고인 물은 여전히 빠지지 않고 있었다.하지만 진수현과 이야기를 나눈 뒤 심윤아도 더 이상 서둘러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어쨌든 윤이한테는 늦어서 5일 안에 돌아가겠다고 약속했고 오늘은 고작 이튿날이었다. 만일 진수현이 여전히 걱정한다면 이 며칠 내에 무조건 한번은 이선우와 만나야 했다.심윤아는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휴대폰에는 적지 않은 채팅 기록이 있었는데 그중 양이 가장 많은 건 절친 주현아와 한 톡이었다.심윤아는 자신이 이전에 올린 게시물들을 구경하기도 했다.윤이와 훈이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았을 때는 저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짓게 되었다.지금 살아있어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이 이렇게 예쁜 아이들을 둘이나 낳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는가.거의 죽을 뻔했기 때문에 심윤아는 아이들에게 유난히 각별했다.그녀는 인스타 피드를 내려 계속 구경했다. 심윤아가 게시물을 올리는 빈도는 그리 높지는 않았다. 아이들과 함께 놀러 갈 때면 사진을 올리곤 했는데, 그 중 의아하게 사적인 내용이 보이자 심윤아는 얼른 클릭해 보았다.클릭한 후에야 심윤아는 이 게시물을 본인만 볼 수 있게 설정했다는 것을 발견했다.다시는 어리석게 굴지 말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그 내용을 지켜보던 그녀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사라지고 의문이 생겼다.더 이상 어리석게 굴지 말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고?이 게시물의 내용은 도대체 무슨 뜻이지?심윤아가 급히 날짜를 살펴보았는데 뜻밖에도 올해, 그러니까 몇 달 전이었다.그 촘촘한 타임라인을 본 심윤아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심윤아가 사색하는 사이 누군가 방문을 살짝 열고 들어왔다.진수현이었다.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진수현이 잠시 어리둥절했다. 아마 심윤아가 이렇게 일찍 깼을 줄은, 게다가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침대에서 핸드폰을 보고 있을 줄은 예상 못 했을 것이다.진수현이 방문을 닫고 다가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깼으면서 왜 말도 안 했어?”핸드폰을 손에 쥔 채로 안색이 흐려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진수현이 왠지 모르게 불안해졌다.“뭐 보고 있어?”“아무것도 아니야.”심윤아가 무의식중에 숨기며 베개 옆에 핸드폰을 두었다.“잠 많이 잔 것 같은데 그동안 돌아다니진 않았지?”“정말 나를 어린애 취급하는 거야?”그가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심윤아의 오똑한 코끝을 쓰다듬었다.코끝의 따뜻한 감촉에 심윤아가 얼떨떨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진수현의 끔찍하리만치 잘생긴 얼굴을 보며 그녀는 하마터면 저도 모르게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물을 뻔했다.하지만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고 말을 삼켜버렸다.왠지 일이 더 복잡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윤아에겐 거의 모든 기억을 잊었으니 물어본다 해도 그녀에겐 단편적인 것이었다.이런 편면적인 일에 대해 어떻게 확실히 이렇다저렇다 할 결정을 내릴 수 있겠는가.됐다. 묻지 말자. 그냥 추억을 되찾는 데나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다.심윤아는 그렇게 마음을 굳혔고 이 일이 해결되면 주현아를 만나 도움을 청하기로 생각했다.말하려다 멈추는 그녀의 모습에 진수현은 궁금했지만 다시 묻지 않았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이라면 언젠가 반드시 할 것으로 생각했다.“배 안 고파? 호텔에 음식 배달해 달라고 할까?”그제야 심윤아는 자신이 고민하느라 배고픈 것도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최근 심윤아는 입맛도 돌아왔고 먹는 음식의 양도 점차 증가하고 있었다.“가자.”심윤아가 손을 잡고 일어나려 하자 진수현이 대신하여 핸드폰을 들어주려고 했다. 그런데 진수현의 손이 아직 핸드폰에 닿지도 않았는데 심윤아가
방에 들어가기 전 분명 서재의 불이 꺼져있는 것을 확인했었는데 지금은 환히 밝혀져 있다.이는 진수현이 서재를 사용했다는 것을 의미했다.아니나 다를까 앞서가던 진수현이 문득 걸음을 멈추더니 대답했다.“어, 잠깐 썼어.”이미 들킨 마당에 부인하면 오히려 의심을 사게 된다.“잠깐?”심윤아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훑어보았다.“네가 말한 잠깐이 설마 내가 방에 들어가서 잠에서 깰 때까지의 시간은 아니겠지?”진수현: “...”몸에 도청 장치를 달았나, 어떻게 다 맞추는 거야.“일했어?”“...”진수현은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일했어. 그래도 계속 앉아서 노트북만 두드렸다 보니 안정을 취한 거랑 다를 바 없어.”그가 잠시 멈추더니 무언가 떠올리곤 말을 보탰다.“막 돌아다니지 않았어.”심윤아는 말없이 입술을 짓씹더니 갑자기 앞으로 걸어가 그의 옷자락을 걷어 올리려 했다.“상처 좀 볼...”“심윤아.”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을 예상하지 못한 진수현이 몸이 굳은 채 자리에 서 있었다. 아직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심윤아는 이미 옷을 걷어 올렸다.무엇을 하려는지 의식했지만 제지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얌전히 서서 심윤아가 관찰하도록 내버려두었다.심윤아는 옷을 들춘 후 상처를 유심히 살폈고, 상처를 감싼 붕대에 핏자국이 번지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야 안도했다.그녀의 모습에 진수현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그렇게 걱정돼?”그러나 심윤아는 농담을 던질 기분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그를 언짢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이 와중에 농담해? 다치고 며칠만 더 가만히 있으면 낫겠는데 그 며칠을 참는 게 그렇게 어려워?”그녀의 질문에 진수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그냥 일 좀 한 거야. 막 움직인 것도 아니잖아.”“휴식할 때랑 일할 때랑 같냐고.”“아, 알았어. 알았어.”진수현은 끝내 심윤아를 말로 이기지 못했다. 그는 심윤아가 화를 낼까 봐 더 잔소리 하기 전에 패배를 인정했다.“내가 잘못했어. 앞으론 다시는
현재 두 사람의 관계는 결코 흔한 커플의 만남과 헤어짐처럼 단순하지 않았다.두 사람 사이에 두 아이와 부모님이 끼어 있으니까.“왜 그래?”진수현의 목소리가 그녀를 정신 차리게 했다.진수현이 심윤아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배불러?”아직 많이 먹진 않았지만 오늘은 입맛이 별로 없었다.마침 타이밍 맞게 진수현이 물었기에 심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배불러.”그러나 많이 먹지 않은 것이 보였으므로 진수현은 조금 걱정되었다.“두 입만 더 먹어볼래?”토할 것 같은 느낌은 없었으므로 심윤아는 그의 말대로 두 입만 더 먹었다.“오케이.”다 먹은 뒤 심윤아는 아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진수현도 이를 발견하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오늘 왜 그래? 기분이 안 좋아? 아니면 혹시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었어?”심윤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그건 아니고 그냥...”심윤아는 마음속의 생각을 말해야 할지 망설였다.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결국 그저 자신이 올린 하나의 게시물일 뿐이었으니까.그녀는 기억을 잃었고 지금 보는 것들은 모두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만약 이 이야기를 정말 꺼낸다면 진수현이 어떻게 설명한다 해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할 것이다.그냥 없던 일로 하고 기억부터 되찾는 게 나을 것 같았다.“그냥 뭐?”심윤아의 대답을 더 기다리지 못하고 진수현이 조마조마한 마음을 다잡으며 물었다.심윤아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마 진수현 역시 그녀의 이상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만약 심윤아가 지금 다시 부인한다면 그는 헛된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여 심윤아는 솔직하게 대답했다.“미안. 아직 말하고 싶지 않아.”진수현에게는 의외의 대답이었다.진수현은 그녀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 아무 일 아니다, 괜찮다고 말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심윤아는 직설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이렇게까지 말했는데 계속 묻는 것은 오히려 실례이며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었다.하여 진수현은 입술을 짓씹으며 납득할 수밖에
그러나 이선우는 그의 말에 냉소해 버렸다.“보낸다고요? 심윤아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고 보내요? 정말 핸드폰을 돌려주고 싶었으면 왜 어제 보내주지 않았어요?”진우진은 그의 마지막 한 마디를 무시한 채 대답했다.“근처 이곳과 멀지 않은 호텔에 묵고 있어서 안 계신다면 알 수 있을 겁니다.”그 말에 이선우가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그 후 부하가 핸드폰을 가지고 나갔으나 오랫동안 회신이 없었다. 하도 오래 걸려 이선우가 핸드폰이 배달되지 않았나 의심하고 있을 무렵, 진우진이 연락을 받았다.“듣기로 핸드폰은 전달되었고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잠시 쉰다고 합니다.”이선우는 입술을 짓씹으며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해서 제가 이해한 건 비가 많이 와서 윤아 씨도 잠시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이에 이선우의 입술이 조롱 어린 호선을 그렸다.“그게 저랑 무슨 상관입니까? 그런 작은 일도 제가 알아야겠어요?”말을 마친 그가 곧장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그러나 퉁명스러운 말투에서 진우진은 이선우의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는 것이 느껴졌다.그는 한숨을 쉬며 깊은 비애를 느꼈다.오늘은 비가 오지 않았기에 그들이 정말 만나고 싶었다면 진작 왔을 것이다. 그런데 오전 10시가 되도록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진우진은 이미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그러나 그와 다르게 이선우는 잘 참아내고 있었다. 아무리 초조해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핸드폰은 이미 보냈고 진우진은 이제 더 보낼 것도 없었으므로 그저 이선우와 함께 그들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한참 뒤 이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려 하자 진우진이 그를 불러세웠다.“대표님.”이선우가 발걸음을 멈추고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돌아보았다.원망이 가득 담긴 차가운 눈빛이었다.“왜요?”“윤아 씨 기다리는 거예요?”“...아닙니다.”“누가 그래요? 내가 기다린다고?”진우진은 반박할 거리를 찾지 않고 되물었다.“윤아 씨가 찾아오면 만날 거예요? 안 만날 거예요?”이선우가 미간을 찌푸
진우진은 그녀를 자세히 훑어보았다. 평온한 표정에 예상한 결과인 듯 놀라워하지도 않았다.그런 심윤아를 보며 진우진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과연 그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으니 저도 더 강요하지 않을게요.”심윤아가 빙긋 웃으며 말을 붙였다.“저 대신 잘 지내라고 전해주세요.”진우진: “...”“참, 전에 도와주신 건 항상 기억하고 있어요. 앞으로 제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으면 꼭 말씀해 주세요.”계속 이선우에 대해 얘기할 줄 알았건만 이렇게 빨리 화제를 넘길 줄은 몰랐다.“윤아 씨, 제가 도와드린 일은 마음에 담아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 사심이었으니까요.”만약 이선우가 무너진다면 그는 어디서 이런 사장을 찾을 수 있겠는가.이선우가 무너지지 않아야만 그의 밑에서 계속 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심윤아는 그의 겸손한 모습에 빙긋 웃으며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진우진이 자신에게 너무 큰 압력을 주지 않기 위해 한 말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사심은 안위에 비하면 사심이 아니었으니까.그는 두 번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선우에게 미움을 샀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 수포가 되었다.이는 심윤아에게 있어 매우 소중한 것이었다.“어쨌든, 도움이 필요하면 절 찾아요. 꼭이요. 오늘 제 말은 영원히 유효한 거예요.”진우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겠습니다. 고마워요.”“그럼 먼저 가볼게요.”진우진이 심윤아의 눈을 바라보며 머뭇거렸다.“간다고요?”“네. 돌아갈 거예요. 이번엔 오래 있을 생각도 없었고 두 아이가 절 기다리고 있어서요.”“우릴 기다리는 거지.”곁에 있던 누군가의 심기 불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손을 내밀어 심윤아를 품에 안았다.줄곧 뒤따라왔으면서 갑자기 이 타이밍에 질투할 줄은 몰랐다. 그는 심지어 과시를 위해 심윤아를 껴안았다.심윤아가 조금 놀라며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렸다.“그렇지.”이런 광경을 보게 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진우진은 속으로 은
잠시 놀란 이후, 심윤아도 뭔가를 알아차린 듯싶었다.그녀는 입술을 말아 물고는 입을 열었다.“그럼 다행이네요.”두 사람 모두 침묵을 유지했다.심윤아가 고개를 돌려 진수현을 힐끗 보았다. 눈이 마주친 진수현은 말 없이 눈썹을 치켜올렸다.그의 모습을 보니 완전히 심윤아의 뜻을 따르려는 것 같았다.그와 몇초 간 눈을 마주친 심윤아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이제 돌아갈까?”진수현이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더 꼭 껴안았다.“네가 결정해.”“응.”심윤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고민 없이 입을 열었다.“만나지 않겠다고 하니 저흰 먼저 가볼게요.”말을 마친 심윤아가 위층의 방향으로 눈을 옮겼다.그곳엔 초소형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심윤아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카메라 뒤에 서 있는 이선우는 그녀가 이쪽을 향해 바라볼 때 저도 모르게 숨을 참게 되었다.순간 심윤아의 눈은 카메라 렌즈를 통과한 듯 그와 똑바로 마주쳐졌다.하얗게 질린 입술이 달싹였고, 한쪽으로 처진 손이 저도 모르게 주먹 쥐어졌다.심윤아를 만나고 싶은 순간은 끝도 없이 많았지만...자신을 만나게 되면 곧 모든 마음의 짐을 풀고 자신은 기억도 못 한 채 잘 살아갈 그를 생각하니...이선우는 차라리 현재 이대로 있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가 자신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영원히 자신을 놓지 못하도록.힘껏 주먹 쥐었던 손을 천천히 풀었다.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아.위층을 바라보는 심윤아의 표정과 눈빛은 평온하기에 그지없었다. 몇 번 바라본 그녀는 이내 시선을 돌렸다.그리고 곁에 서 있는 남성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이제 가자.”“응.”진수현이 고개를 끄덕였고 곧이어 함께 자리를 떴다.조금의 망설임도 고민도 없이 깔끔하게, 두 사람은 이내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자리에 서서 동태를 살피던 진우진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결국 직접 위층으로 올라갔다.계단을 올라가면서 그는 카메라가 있는 곳을 무심코 훑어보았다.문을 열어보니 이선우는 이
-며칠 후. 현아는 해외로 떠났다. 떠나기 전 그녀는 윤아에게 내뱉은 말을 주워 담아야겠다고 했다. 현아는 남자친구가 너무 보고 싶었고 그래서 결국 남자친구와 함께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고 있었던 윤아는 그런 현아가 전혀 이상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현아가 출발하기 전 윤아는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윤아는 생각했다. ‘주한 씨 추진력이라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에게서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겠네.’역시나, 윤아의 예상대로 6월 1일쯤. 윤아가 곧 무대에 오를 두 아이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주한이 프러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8월로 정해졌다. 1월에 고백하고 4월부터 연인으로 발전, 6월엔 프러포즈, 8월엔 결혼식. 그 놀라운 진행 속도에 윤아는 입이 떡 벌어졌다. 특히나 현아는 처음엔 그렇게 거부감을 드러내더니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결혼까지 골인할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주한이 적극적으로 현아에게 다가간 덕분이었다. 주한이 현아의 마음을 얻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시기에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이미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그 철저한 준비성을 당해낼 사람은 없었다. 다만 윤아가 놀란 것은 주한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공세를 퍼부으면서도 아직 잠자리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윤아에게 그 일을 털어놓는 현아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아줬는데 아직도 예전처럼 자제한다는 건 혹시 날 아예 안 좋아했던 거 아냐?”윤아는 현아의 사유 방식에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주한 씨가 널 안 좋아하면 결혼하려고 했겠어? 주한 씨가 얻는 게 뭔데?”“그건 그래. 그럼 대체 왜?”“그거야 모르지. 그건 너희 연인 사이의 일이잖아. 난 끼고 싶지 않아. 궁금하면 네가 직접 알아봐.”‘알아보라고?
설 연휴 후. 윤아는 우진에게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선우가 드디어 생각을 바꿔 더 이상 방에 갇혀 있고 싶지 않다고 이곳을 떠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윤아는 가슴 한편을 꽉 막고 있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진 비서님은요? 제가 뭘...”윤아는 우진을 자기 곁에 두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이미 선우 곁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터라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편하다며 계속 선우 옆에 남겠다고 했다. 모두 자기만의 귀속이 있는 법이었기에 윤아는 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우진에게 만약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그날 밤, 윤아는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예전에 엄청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어. 하지만 난 그 애에게 많은 폐를 끼쳤지. 심지어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 애를 다치게 하기도 했어.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럼에도 난 여전히 걔를 사랑해. 그리고 앞으로 행복하기를 바라.][안녕.]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그 문자를 작성하기까지 이선우는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다. 메시지를 전송한 후 선우는 윤아의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에겐 그녀의 답장을 볼 용기도 없었다. 선우는 U-SIM을 뽑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렸다. 더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이젠 뒤돌아볼 기회조차도 없었지만. 윤아는 지금 그녀가 사랑하고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 곁에서 앞으로도 행복한 나날을 보낼 것이었으니까. -4월 1일쯤, 현아와 주한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현아가 투자한 과일 가게가 아파트 단지에 오픈했다. 오픈 날 윤아는 현아에게 선물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주한 씨 회사로 안 돌아가려고?”현아가 입술을 짓이겼다. “내가 없으면 주한 씨 회사가 안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주한 씨 회사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네가 만약 집에서 과일 가게를
안 그래도 현아에게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이렇게 훌륭한 남자를 만났으니 선희도 당연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주한은 인품이 좋아 보였기에 선희는 가운데서 두 사람을 팍팍 밀어줄 의향이 있었다. 선희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주한아, 이 절에서 인연을 빌면 신통하게 들어주신대. 도착하면 성심을 들여 절을 올리렴.”말을 마친 선희는 일부러 현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현아 너도. 왔던 김에 같이 가서 기도드려.”잘 걱도 있다 갑자기 이름을 불린 현아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차마 말을 내뱉지 못했다. 주한은 시선을 내린 채 빨개진 현아의 볼과 귓불을 보며 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전혀 헛된 걸음은 아닌 듯했다. 수현의 가족은 정말 따뜻한 분들이었다. 만약 나중에 결혼을 하게 되어 이런 가정을 꾸릴 수만 있다면 정말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네. 제가 간절히 기도를 드려 볼게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선희가 손을 내저으며 유쾌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 일행은 10여 분 후 산꼬대기에 도착했다. 날씨가 퍽 좋았던 지라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서니 구름도 더 가까이 느껴졌다. 발아래엔 산봉우리가 첩첩이 이어져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 풍경까지 더해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은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풍경 사진을 찍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풍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기도 했다. 윤아를 포함한 그들도 사진을 여러 장 찍고 나서야 기도를 드리러 절로 향했다.워낙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절이라 사람으로 붐비었고 기도를 드리는 것도 줄을 서야만 했다. 주한이 자리한 곳은 마침 현아의 맞은 편이었다. 주한이 그저 예의상 하는 얘기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아는 그가 진지하게 기도를 드리러 눈까지 꼭 감고 절을 올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현아는 조금 놀라기도, 또 조금 감동적이기도 했다. 뒤에서 누군가 현아에게 말했다. “넌 안 가?”윤아의 목소리
윤아는 사실 지금 현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사귀게 된다면 그건 신분 상승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주한 씨가 너에게 그런 얘기까지 했다는 건 그만큼 진심이라는 말일 거야. 주한 씨는 네가 그런 것들에 얽매여 두 사람 사이에 걸림돌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거야.”사실 주한 같은 남자를 만난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것은 물론 부모도, 친척도 없어 가족관계가 이보다 간단할 수 없었다. 이런 사람은 본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가 걸어갈 미래는 전부 스스로 계획한 것이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주한이 지금 현아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그는 이미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나도 알아.”현아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사실 전엔 난 믿지 않았어. 난 그저 주한 씨가 내가 갑자기 퇴사한 걸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윤이네 선물을 사러 갔을 때, 주한 씨가 내가 할인받아 사준 만년필을 몇 년 동안이나 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별일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조 단위의 자산을 갖고 있는 주한에겐 소중한 물건이라는 얘기였다. 최소한 현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현아의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윤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사실 그렇게 많이 고민할 필요 없어. 만약 너도 주한 씨가 좋다면 용기 내서 한 번 만나봐. 어차피 사귄다고 해도 당장 결혼할 것도 아니잖아. 혹시 알아? 사귀고 나서 네 생각이 바뀔지?”“네 말도 맞아. 그럼 나 더 이상 고민 안 할래. 일단 연애만 해보면 되잖아. 어차피 그저 연애만 하는 것뿐이야.”깊은 고민에 빠졌던 현아는 윤아의 도움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 “그래. 인생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 있고 그런 거지. 실수해도 괜찮아. 처음부터 선택한 모든 길이 정확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공주야, 넌 좋은 친구야. 넌 내 인생의 구원자라고.”고민이 해결
그 말은 어느 정도 강압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의상 건넨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주한을 집으로 초대한 것임이 느껴졌다. 선희가 이렇게까지 얘기를 꺼냈으니 주한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몸을 숙였다. “그럼 신세 좀 지겠습니다.”“신세는 무슨. 가요.”주한과 현아는 선희를 따라 차로 돌아갔다. 그들은 앞에 있는 차를 뒤따라가고 있었다. 운전하며 현아가 참지 못하고 주한에게 말했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어요.”주한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나중에도 오랫동안 봐야 할 사이 같아서요. 가면 얘기도 나눌 수 있고요.”현아는 순간 주한의 말 속에 담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진씨 그룹과 얘기 중인 프로젝트가 있어요?”“지금은 없어요.”“그럼 왜...”순간 현아는 뭔가를 인지한 듯 얼굴빛이 변하더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또 저 희롱하는 거죠.”“제가 언제요? 그리고 그게 어떻게 제가 현아 씨를 희롱하는 거예요? 전 지금까지 현아 씨에게 아무 짓도 한 적 없잖아요.”“네, 저에게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지만 언어적인 희롱도 희롱이잖아요?”“그건 실제로 그런 게 아니니까 희롱이라고 할 수 없어요.”“쳇, 왜 아니에요.”현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와중에 주한은 이미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모두 현아 씨를 친절하게 대해주시네요.”“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윤아와 같이 두 분 댁에 자주 갔었거든요. 그래도 절 잘 아세요.”현아가 무언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주한 씨는 어렸을 때 어떻게 지냈어요?”질문을 던진 후 현아는 살며시 주한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얼굴에서 작은 표정이라도 캐치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주한은 여전히 평온함을 유지했다. 자신의 불행했던 유년 시절의 얘기를 꺼내도 큰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다. “저 어렸을 때요? 거의 혼자 지냈죠.”비록 주한은 평온하게 얘기했지만 현아는 그가 사실은 비참했었던 과거
윤아는 꽤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정확한 법이었으니까. 서로 생각하는 것이 같을 테니 많은 행동들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난 알 만날게. 수현 씨가 나 대신 봐줘. 하지만 진지하게 봐줘야 해. 대충하지 말고.”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수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겠어.”수현은 자기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한 남자를 관찰해야 하는 이유가 윤아 때문일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까이 다가간 윤아와 현아는 서로를 꽉 껴안았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계신 관계로 짧은 포옹을 한 후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전에 만난 적이 있던 지라 현아는 또 수현의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는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현아 이모.”아무래도 몇 년간 함께 지냈던 터라 하윤과 서훈은 현아와 사이가 좋았다. 두 아이에게 현아는 곁에 있는 제일 가까운 가족을 제외하고 제일 친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두 아이는 전혀 거리낌 없이 현아가 건네는 선물을 받고는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현아의 볼에 가볍게 뽀뽀했다. 그러더니 하윤은 고개를 들어 주현아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더니 맑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먼저 입을 열었다. “현아 이모, 저 삼촌은 누구예요?”하윤이 주한을 가리키자 하얗던 현아의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분은... 이모 친구야. 주한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하윤은 무슨 생각인 건지 현아가 분명 설명해 줬음에 불구하고 또 갑자기 질문했다. “이모, 저 삼촌 이모 남자친구예요?”남자친구라는 말에 현아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녀가 막 부인하려는데 주한의 웃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마 아가씨, 아직 남자친구는 아니지만 삼촌이 여전히 노력하고 있어.”집안 어른들은 주한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수현의 부모님도 주한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족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니 설사 함께 협업한 적이 없다고 해도 일면
“그건 아닌데...”현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면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현아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뭐 걱정할 게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는 건...이렇게 생각한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됐어요. 아직 정식으로 만나기 전인데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요.”현아가 이렇게 말하더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현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늦었어요. 이미 봤어요.”“네?”이 말에 현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참 동안 지나서야 현아는 주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현아는 주한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윤아가 수현을 데리고 도는 게 보였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도 뒤따라 걸어오고 있었다.윤아는 현아를 발견하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얼른 주한의 품에서 벗어났다.“왜 미리 알려주지 않고 지금 와서 말해주는 거예요?”주한이 덧붙였다.“나도 그럴 겨를이 없었어요. 현아 씨와 얘기하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더라고요.”“거짓말, 일부러 그런 거잖아요.”주한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나도 일부러 그러고 싶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아까 현아 씨 안으면서 신경이 온통 현아 씨 몸에 쏠려 있다 보니 두 사람이 다가오는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결과는 뭐 별반 다를 거 없네요.”현아가 무슨 말을 더 하려는데 윤아가 지척까지 다가오자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랬다가 주한이 무슨 놀라운 말을 내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주한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최근 주한이 친 돌직구가 너무 많았기에 현아는 걱정되기 마련이었다....윤아는 멀리서 친구인 현아가 남자 코트로 숨어드는 걸 볼 수 있었다.원래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주한이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고 이미지도 현아가 말해준 게 전부였다.그러다 옆에 있던 수현이 주한을
현아는 주한의 돌직구를 당해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다른데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지금 몇 시예요? 올 때 되지 않았어요?”현아의 화제 전환이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주한은 이를 캐묻지 않았다. 그저 팔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했다.“10분 남았어요.”“10분이요?”현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으로 턱을 받쳤다. 이렇게 오래 잤을 줄은 몰랐다.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현아는 외투를 벗어 주한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외투 돌려줄게요. 고마워요...”“괜찮아요.”주한이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걸치고 있어요.”“그럼 이따 내릴 때 추울 텐데.”“몸이 좋다고 했잖아요.”“나도 나쁘진 않아요. 그리고 나도 외투 챙겨 와서 더 입으면 안 예뻐요.”현아는 이렇게 말하며 외투를 주한에게 욱여넣었다.주한은 현아가 잠도 깨고 진심으로 외투를 돌려주는 걸 보자 외투를 받아 입었다.비행기가 착륙하기까지 10분이 필요했지만 내려서 짐도 찾아야 하니 주한과 현아는 차에서 15분을 더 기다리다가 내렸다.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현아는 너무 추워 계속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에 주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몸 좋다면서 이렇게 떨어요?”현아가 말했다.“내가 언제 떨었다 그래요?”현아가 고집을 부리며 반박하는데 주한이 다시 외투를 벗었고 현아가 얼른 이를 막았다.“벗지 마요. 더 벗으면 화낼 거예요.”이를 들은 주한의 동작이 멈칫하더니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현아가 얼굴을 굳히고 엄숙하게 말했다.“벗지 말라고요!”“춥다면서요?”“그래도 벗지 마요! 벗으면 정말 화낼 거예요.”주한은 그런 현아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작은 소리로 웃으며 지퍼를 열었다.“그래요. 안 벗을게요. 대신 들어와서 몸 좀 녹일래요?”현아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마 주한이 갑자기 이렇게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대표님...”주한이 덤덤하게 말했다.“들어와서 숨든지 아니면 내가 벗어서 주든지, 하나만 선택해요.”한참 생각하
현아의 말에 주한이 그녀를 힐끔 쳐다봤다.“나 먼저 들어가고 현아 씨 여기 혼자 남겨두라고요?”그러더니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덧붙였다.“현아 씨, 나는 지금 현아 씨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에요. 잊은 거 아니죠?”현아가 입술을 앙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이럴 때일수록 상대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잘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한밤중에 여기까지 데려다줬는데 지금은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너무 대표님 시간 잡아먹는 것 같아서요.”“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주한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벗어 현아에게 건네주었다. 현아가 손에 들린 외투를 들고 멍한 표정으로 주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왜, 왜요?”“걸쳐요.”주한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직 한 시간이나 더 있으니까 일단 눈 좀 붙여요.”“졸리지는 않는데...”“그럼 눈 감고 명상하든지.”주한은 마치 반장처럼 그녀를 챙겨줬다.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한은 혼자 자랐으니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애들과는 다르다고 말이다. 하지만 주한이 사람을 챙기는 방법은 어딘가 강압적이었다.현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굴을 붉힌 채 주한이 건네준 외투를 주섬주섬 몸에 걸치고는 자리에 기대 눈을 감았다.눈을 감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아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눈을 떴다.“옷을 이렇게 다 주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안 추워요?”“나는 몸이 워낙 좋아서.”주한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아, 네.”현아는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몸이 안 좋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에 잠겼던 현아는 어느새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때 창밖의 어둠은 더 짙어졌고 현아는 아직도 온몸을 웅크리고 있었다.깨어나 보니 아직도 조금 추웠고 현아는 자기도 모르게 주한의 외투 속으로 점점 숨어들었다. 외투를 받았으니 다행이지 아니면 정말 자다가 추워서 깼을 것이다.하지만 현아는 이내 뭔가 생각났다. 자기는 외투를 입고 있어서 따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