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듣고 싶지 않다면 이만 들어가자.”윤아는 수현의 주시 하에 결국 안으로 들어가는 걸 선택했다.하지만 수현이 이때 윤아의 손목을 잡았다.“아니야.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봐.”결국 수현은 윤아에게 져주기로 하고 윤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려 했다.너무 듣기 싫긴 했지만 윤아가 하고 싶지 않은 말이라면 수현이 전화를 받고 있을 때 이렇게 따라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윤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듣고 싶지 않으면 나도 말 안 해도 돼.”윤아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수현은 윤아의 손목을 더 꼭 잡았다.“아니야. 할 말 있으면 해. 최대한 화내지 않고 들을게.”이를 들은 윤아가 가볍게 눈을 깜빡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윤아가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을 바라보자 수현도 그저 손을 들어 윤아의 볼을 꼬집을 뿐이었다.“됐어, 빨리 말해. 무슨 말을 하고 싶길래 네가 선우 편을 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건지 들어나 보자.”수현의 행동과 말에 윤아의 마음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분명 듣고 싶지 않으면서 분명 화가 나면서도 그녀가 말하고 싶어 하자 성질을 애써 꾹 참으며 듣겠다고 했고 어서 말해달라고 애원까지 하고 있다.수현이 이렇게까지 자기를 생각해 주자 윤아는 자기도 모르게 수현의 허리를 감쌌다.수현은 윤아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라 머뭇거리는데 윤아가 갑자기 다가와 품에 안겼다.사랑하는 여자가 순간 품에 쏙 안기자 차가웠던 수현의 마음도 순간 부드러워졌지만 동시에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윤아는 그렇게 머리를 수현의 머리에 기댄 채 입을 열었다.“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선우 편을 들고 싶어서도 아니고 그냥 사실을 얘기해주고 싶어서야.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네가 결정해. 나도 참견할 생각 없어.”“기억을 잃은 뒤로 선우가 계속 챙겨줬어. 그럼 너는 이렇게 말하겠지. 선우가 나를 협박하지만 않았다면 내가 기억을 잃을 일도 없었을 거라고. 그러니 나를 챙겨주는 것도 당연한 거라고 말이야.”“그럼 기억을 잃은 것 선우 탓으로 돌린다 치
이런 가능성이 떠오른 수현은 너무 무서운 나머지 식은땀이 등을 적셨다.수현의 얼굴이 파래지자 윤아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략 눈치채고 얼른 해명했다.“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자책하지 마. 조금 더 늦게 왔어도 아무 일 없었을 거야.”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윤아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진짜야, 진 비서님이 도와주셨거든.”이 얘기를 꺼내며 윤아는 웃음을 지었다.“난 그때 모든 게 다 재미없다고 느낄 때였고 몸이 음식을 거부할 때였는데 진 비서님이 내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어.”이에 수현이 멈칫했다.윤아의 입에서 우진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저번에도 우진의 도움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고 했는데 이번에도 그가 윤아를 도운 것이다.이제야 윤아가 처음 돌아왔을 때 왜 두 사람의 상황을 확인한 게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기억을 잃은 상황에서 자신의 이름과 사진을 찾아보고 아이들의 일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도 우진 덕분이었다.모든 퍼즐이 맞춰진 수현이 물었다.“그럼 나에 관한 일도 진 비서가 알려준 거야?”“응, 네가 다쳤다는 것도 네가 안전하다는 것도 다 진 비서님이 확인하고 알려주신 거야.”그러고 보니 우진은 정말 수현과 윤아의 은인과도 다름없는 사람이었다.우진이 없었다면 아마...“그래, 알겠어. 이번 일이 잘 해결되면 꼭 정중하게 사례할 거야.”사례라.윤아는 우진이 사례를 받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큰 도움을 줬으니 감사 인사를 전해야 하는 건 맞다.“내가 이런 말을 너에게 해주는 건 선우가 나를 해치지는 않았다는 걸 알려주려는 거야.”“그래, 너를 직접적으로 해치지는 않았지.”수현의 눈빛은 여전히 어두웠다.“하지만 간접적으로 너를 다치게 한 건 맞잖아.”이렇게 말하던 수현은 뭔가 생각난 듯 한마디 덧붙였다.“하긴, 내 잘못도 있지.”그때 마음이 약해져 이것저것 따지지만 않았다면, 윤아를 대신해 은혜를 갚을 생각만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수현은 이번 일로
윤아는 확실히 입맛이 없긴 했다. 음식이 식어서가 아니라 원래도 입맛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게다가 아까 이명인이 윤아의 접시에 자꾸만 음식을 집어준 것도 있었다. 비록 그 음식 중 대부분은 다 수현의 입으로 들어갔지만 말이다.하지만 그 양이 워낙에 많았던지라 윤아는 그중 20퍼센트만 먹었는데도 더는 먹을 자리가 없었다.윤아는 혹시 모두가 보는 앞에서 토하기라도 할까 봐 먼저 일어날 핑계를 찾고 있었다. 그래도 다이어트가 다른 원인보다는 나은 것 같았다.이때 수현이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올 때 입구에서 괜찮은 맛집 하나 봐둔 게 있어서 저녁은 많이 먹지 않기로 했어요. 거기 가서 맛이 어떤지 보려고요.”윤아는 수현이 이런 핑계를 찾았다는 것에 살짝 놀랐다.“네가 말한 그 맛집 김씨 할아버지네 가게 아니야? 맛은 확실히 있어. 너희가 끌릴 만도 하지.”“그래요?”수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할아버지도 극찬하는데 한번 가봐야겠어요.”하지만 이명인은 약간 기분이 상한 듯한 표정이었다.“집에서 밥해 먹으면 되지, 왜 굳이 밖에 나가서 먹겠다고 그래?”이명인은 밖에서 하는 음식이 맛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집보다는 깔끔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서 그랬다. 어떤 사람이 운영하는지도 모르는데 혹시나 손도 씻지 않고 재료를 취급하는 건 아닌지, 썩은 재료와 신선한 재료를 섞어서 만드는 건 아닌지 걱정했다.올라올 땐 향긋한 요리지만 그 요리를 만드는 과정을 보지 못하니 어떻게 시름 놓고 먹을까?하여 이명인은 젊을 때 차문섭과 연애를 하면서도 밖에서 먹는 걸 매우 꺼렸다. 그러니 차문섭도 매우 골머리를 앓았다. 다른 커플들은 데이트하면서 산책하다가 좋은 맛집이 있으면 들어가서 먹기도 하면서 감정을 쌓아가는데 이명인은 밖에서 먹는 걸 일절 거절했다. 차문섭은 처음에 이명인이 자신과 있는 게 싫어서 그러는 줄 알았다.그러다 차문섭은 뒤에 이명인이 결벽증이 있어서 밖에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러는
이명인은 그러다 문득 뭔가 생각났다. 수현이 윤아를 데리고 나가서 먹겠다는 게 진짜 나가서 뭘 먹으려는 게 아니라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다는 걸 말이다.두 사람의 호사를 그르칠 뻔했다는 생각에 이명인은 얼른 난감한 표정으로 만회할 길을 찾았다.“사실 내가 나가서 먹는 걸 반대하는 데는 이유가 있어. 전에 우연히 그 가게를 지나치는데 그 장씨 할아버지가 먹다 남은 찌꺼기를 정리하더니 자기 손주 엉덩이를 닦아주러 가는 거야. 와서는 손도 잘 안 씻고 밥하는 걸 본 적이 있어서 그러는 거야. 밥상에서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아 그냥 가지 말라고만 했지. 산책... 하고 싶은 거면 갔다 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너희 할아버지한테 말하면 돼. 그럼 산책 갔다 오면 바로 먹을 수 있지 않겠어?”이명인이 자기 때문에 딱딱해진 분위기를 만회하려는 노력을 다들 보았다. 윤아도 눈치 빠르게 얼른 맞장구를 쳤다.“좋아요. 할머님이 말씀해 줘서 다행이에요. 아니면 먹고 배탈 나서 고생할 뻔했네요.”이렇게 말하며 윤아는 테이블 아래로 수현의 옷깃을 다시 한번 힘껏 당겼다.수현은 그제야 이명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윤아 말이 맞아요. 고마워요 할머니.”“그럼 우린 나가서 좀 걸을게요. 저녁이라 공기도 꽤 좋을 것 같은데.”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하윤도 따라서 일어나려는데 옆에 있던 이명인이 이를 막았다.“조금 있다 할머니, 할아버지 일손 거들어야지?”두 녀석은 눈을 끔뻑거리더니 알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수현과 윤아는 겨우 정원에서 나올 수 있었다. 조금 지체하는 사이 밖은 이미 어두워졌고 집마다 불을 켜고 있었다. 윤아는 약간은 난감한 표정으로 수현에게 물었다.“너 아까 태도가 왜 그래?”“태도가 왜?”수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되물었다. 마치 자기 태도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자각하지 못한 듯했다.“태도가 안 좋았어. 할머님 그래도 어른인데 그렇게 입 꾹 다물고 있으면 안 되지.”이에 수현이 가볍게 웃었다.“입 꾹
이렇게 말하면 결국 윤아를 위한 것이다.“그럼 내가 좋아서 좋은 줄 몰랐던 건가?”“아니야.”아직 눈치가 남아있는 수현이 얼른 부정했다.“나도 네 생각, 너도 내 생각, 우리가 서로서로를 생각해 주는데, 내가 그것도 몰라줄까 봐?”윤아가 고개를 저었다.“나도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겠어. 난 그냥 네가 할머님한테 안 좋은 인상을 남기거나 노인네 화나게 하면 어쩌나 했지. 나이도 많으신데.”“그래, 네 말에도 일리 있어. 다음부터 주의할게.”바로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와 그녀의 화를 풀어주는 모습에 조금 언짢았던 윤아의 마음도 바로 사그라들었다.“알면 됐어.”수현이 낮은 소리로 웃으며 그녀를 데리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우리 전에도 이렇게 산책한 적 있어?”윤아의 질문에 수현이 고민에 잠겼다. 수현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윤아가 수현을 바라봤다.“우리 만난 지 꽤 되는데 이렇게 나와서 산책한 적이 없다고?”윤아는 일반적인 부부라면 산책은 제일 기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했었지.”수현이 입을 열었다.“근데 아마 되게 오래전일걸. 우리 어릴 때.”그때 윤아는 낮이든 밤이든 막론하고 수현의 뒤를 따라다녔다. 엄격히 말하면 그것도 일종의 산책이다.“어릴 때?”윤아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싶은 욕구가 그렇게 크지 않았는데 수현이 과거 얘기를 꺼내자 갑자기 흥미가 생겼다.“응.”“우리 어릴 때 또 무슨 일들이 있었어? 혹시 얘기해줄 수 있어?”수현이 윤아를 힐끔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당연하지.”그렇게 두 사람은 조용한 시골길을 걸었다. 수현이 옛날얘기를 해주는 걸 윤아는 조용히 들으면서 가끔 몇 마디 질문하곤 했다.얼마나 지났을까, 수현이 걸음이 우뚝 멈췄다. 윤아는 수현이 그 자리에 멈춰서자 이렇게 물었다.“왜 그래?”수현은 한참을 침묵하더니 이렇게 말했다.“아니야.”수현의 목소리는 마치 뭔가 참고 있는 듯했다. 이상하게 생각한 윤아가 원인을 추측하고 있다가 이내 여기로 온 뒤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수현이 미간을 찌푸렸다.“네 걱정은 안 해?”이 말에 윤아는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난 그것보다 네가 더 걱정돼.”이 말에 수현이 멈칫했다.“뭐라고?”“미안해.”윤아가 죄책감에 찬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여기 오고 나서 네가 다쳤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어.”아이들만 신경 쓰느라 수현은 아예 뒷전이었다.만약 윤아가 수현이었다면 많이 서운했을지도 모른다.윤아가 이 일로 사과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수현이 난감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고작 이걸로? 난 무슨 큰일인 줄 알았네.”이 말에 윤아의 미간도 따라서 찌푸려졌다.“많이 다쳤는데 큰일이 아니라니. 이제 돌아가자. 상처 처치 다시 해야지.”이렇게 말한 윤아는 문득 뭐가 생각난 듯 이렇게 물었다.“아참, 상처에 바를 약은 가져왔어?”걱정에 찬 윤아의 표정에 수현도 더는 그녀를 걱정시키기 싫어 이렇게 대답했다.“가져왔지. 트렁크에 있어. 내가 이따가 직접 하면 돼.”“잘할 수 있겠어?”윤아는 수현에게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지금 바로 돌아가자. 내가 처치해 줄게.”수현이 입을 앙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윤아는 수현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난감한 수현의 표정을 보고 윤아가 이렇게 말했다.“어차피 네가 있는데 뭐. 혹시나 내 입에 안 맞는 음식 올라오면 다 너 주면 되지. 안 그래?”수현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윤아는 하는 수 없이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됐어. 사실 나도 뭐 좀 먹고 싶어서 그래. 이렇게 말랐으니 나도 많이 먹어야 할 거 아니야. 걱정하지 마. 양 조절 알아서 잘할게. 더는 못 먹겠다 싶으면 억지로 먹지는 않을 거야.”윤아는 수현이 지금 돌아가고 싶지 않아 하는 원인을 잘 알고 있었다. 혹시나 그녀가 어른들 앞에서 억지로 먹고 싶지 않은 것들을 먹을까 봐 걱정해서였다.아니나 다를까 윤아가 부드럽게 타이르자 수현도 조금 동한 것 같았다.하지만 수현은 아직도 그 자리에 선 채 뭔가 내키지
돌아가는 길에도 수현은 윤아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아직 윤아의 걸음은 살짝 붕 뜬 상태였다.분명 조금 전까지 분위기가 끈적했고 윤아에게 그런 이상한 말을 하던 수현이었는데 말이다.하여 윤아는 정말 뭔가 일어날 줄 알았는데 수현은 그저 그녀의 이마에 뽀뽀만 하고는 그녀를 데리고 오던 길로 다시 돌아갔다.윤아가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비록 뭔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 허전했다.윤아는 가슴 쪽을 문지르며 그런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왜 그래?”수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슴 쪽이 아파?”이에 정신을 차린 윤아가 켕기는 게 있는 듯한 표정으로 수현의 걱정에 찬 눈빛을 피하더니 낮은 소리로 말했다.“아니.”분명 뭔가 피하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윤아가 말하지 않으니 수현도 알 길이 없었다. 그래도 보기에 별문제 없어 보이고 정신도 멀쩡해 보이니 수현은 더 묻지 않았다.집에 들어왔을 땐 마침 8시 좌우였다.차문섭은 돌아온 두 사람을 보고 다가가 이렇게 물었다.“산책 잘하고 왔어? 어때? 시골은 처음이라 아직 낯설지?”“아니요, 시골이라 공기도 좋고 좋았어요.”차문섭이 껄껄 웃었다.“다행이네. 잘 때 모기장은 절대 열어두면 안 돼. 그러다 모기 들어온다.”“네, 알겠습니다.”“아참, 너희 할머니가 그러는데 오늘은 너무 늦어서 남은 식자재는 내일 요리할 거란다. 너무 늦게 먹으면 소화에도 안 좋고 잠도 잘 안 오잖니.”윤아에게는 좋은 소식이었다.“시간도 늦었으니 얼른 정리하고 자. 내일 아침에 시장에 나갈 건데 같이 나가서 구경하면 좋을 것 같은데.”윤아와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방에 돌아온 윤아가 이렇게 말했다.“미리 들어오자고 한 거 정말 잘한 일인 거 같아.”“그러게.”수현은 윤아가 기뻐하자 자기도 모르게 윤아의 뽀얀 얼굴을 꼬집었다. 하지만 손에서 전해지는 촉감에 약간 마음이 아팠다. 전에 윤아의 얼굴을 꼬집어보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그때는 그래도 말캉한 촉감이었
하지만 커다란 키에 다리까지 긴 수현이 있으니 혼자 누워도 거의 침대 하나를 점할 판인데 아이들이 누울 자리가 어디 있겠는가?그러니 아이들을 데려와 같이 잔다는 꿈은 깨진 거나 마찬가지였다.“됐어. 일단은 생각하지 말아야지.”윤아는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일단 상처부터 확인하자. 약 어디 넣어놨어?”윤아는 이렇게 말하더니 수현의 트렁크를 뒤지려 했다.“내가 할게.”수현은 트렁크를 내리더니 안에서 약과 붕대를 꺼냈다.이를 본 윤아가 얼른 그것들을 받아오더니 침대로 걸어가며 말했다.“여기서 바꿀 거지?”수현은 옆에 놓인 소파를 힐끔 보더니 아무 말 없이 침대로 가서 앉았다.입고 있던 코트는 이미 벗었고 지금은 회색의 니트에 안에 하얀 셔츠를 받쳐 입고 있었다.“일단 니트 먼저 벗을래? 할 수 있겠어?”“응.”수현은 대수롭지 않게 니트를 벗어던졌다. 깔끔한 동작이 마치 다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회색 니트를 벗어던지자 보이는 하얀 셔츠에 피가 새어 나오지만 않았으면 윤아는 수현이 다치지 않은 게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윤아는 새어 나온 피를 보며 오는 내내 아무렇지 않은 듯한 수현의 모습이 사실은 그가 억지로 버티고 있어서 그런 것임을 깨달았다.피를 봐서 그런지 윤아가 수현을 바라봤을 땐 얼굴이 어딘가 창백해 보였다.윤아는 꼼꼼하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생각났다면 더 휴식을 취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빨리 치료하고 쉬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윤아의 행동도 다소 과격해졌다. 허리를 숙이자마자 수현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열심히 단추를 푸는 윤아는 다른 생각을 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니 그녀가 단추를 풀 때 수현이 어떤 표정인지도 확인하지 못했다.재빨리 단추를 풀어낸 윤아는 얼른 수현의 셔츠를 벗겼다.셔츠를 벗겨낸 후에 보이는 붕대에 윤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윤아가 단추를 풀 때 부드럽고 섬세한 손길에 살짝 타올랐던 수현의 욕망이 걱정에 찬 얼굴로 미간을 찌푸린 윤아를 보자마자 말끔하게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