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 들어서자, 주시언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멍을 때리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내가 서프라이즈로 준비한 꽃이 조용히 누워 있었는데, 지금 이미 형편없을 정도로 시들어졌다. 그리고 탁자 위에는 텅 빈 술병이 여러 개 놓여있었다.주시언은 나에게 여러 번 전화를 했지만, 여전히 차가운 안내음이 울릴 뿐이었다.그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지민아, 너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왜 내 전화를 받지 않는 거지? 넌 남이 전화를 씹는 거 제일 싫어했잖아. 난 네 약까지 사왔단 말이야...”난 그의 곁에 앉아 씁쓸하게 웃었다.“시언아, 나 지금 네 곁에 있잖아. 하지만 넌 영원히 날 볼 수 없을 거야.”...한밤중에 주시언의 전화벨이 갑자기 울렸는데, 유정연이었다. 난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돌렸다.그는 전화를 받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야?”[지민 씨 화난 거야? 내가 너 대신 설명해 줄까?]“그럴 필요 없어. 나 혼자 해결하면 돼.”[그래, 그럼 너도 일찍 쉬어.]전화를 끊은 뒤, 주시언은 다시 잠들었다.난 옆에서 줄곧 묵묵히 그를 지켜보았다.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기에, 난 마지막으로 내가 사랑하는 이 남자를 바라보며, 그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싶었다.설령 내가 절망을 느낄 때, 그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었더라도.그러던 사이, 주시언의 전화가 또다시 울렸다. 그는 확인도 하지 않고 바로 받았다.“지민아, 왜 이제야 나한테 전화하는 거야? 지금 어딘데? 내가 데리러 갈게.”[사장님, 접니다.]이 사람은 주시언의 비서였는데, 회사 일로 그를 찾는 게 분명했다.이날 밤, 난 집안 곳곳을 둘러보았다. 이곳에는 나와 주시언의 추억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그러나 난 곧 사라질 것이다....이튿날, 주시언은 아침 일찍 외출했다. 난 그가 회사로 갈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여주로 찾아갈 줄이야.난 흠칫 놀랐다. 여주는 우리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이었다. 주시언은 왜 갑자기 그곳에 간 것일까?3일 동안
주시언은 떨리는 두 손으로 내 팔을 흔들었다.“지민아, 눈 좀 떠봐, 응? 왜 이런 모습으로 여기에 누워있는 거야? 이곳에 꽃이 많으니 많이 불편하지? 우리 같이 집에 돌아가자, 응?”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붉어진 두 눈으로 계속 내 팔을 흔들었다.난 이토록 당황해 하는 주시언을 본 적이 없어 일시에 넋을 잃고 멍해졌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이때 오빠도 달려오더니 주시언을 한쪽으로 끌고 가려 했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 박힌 큰 바위처럼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주시언, 이제 그만 좀 하지 그래? 지민이 편히 떠나게 할 순 없는 거야? 굳이 와서 소란을 피워야 하는 거냐고?”주시언도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그럴 리가 없어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지민은 약을 사오라고 저에게 전화를 했었는데. 멀쩡한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죽을 리가 없잖아요?”이 말을 듣자, 오빠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주시언의 멱살을 잡으며 호통을 쳤다.“그 입 닥쳐. 지금 뻔뻔스럽게 그 일을 언급하다니. 네가 그날 네 첫사랑과 함께 있지만 않았어도, 지민은 천식 때문에 외롭고 비참하게 집에서 죽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까 다신 내 앞에서 그 얘기 꺼내지 마!”주시언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고개를 돌려 멍하니 나의 시체를 바라보았다.“어떻게 이럴 수가. 지민은 그저 약을 사달라고 말했을 뿐, 병이 발작했다고 알려주지 않았어요. 만약 이 사실을 알았다면, 저는...”그는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고, 고개를 드리웠다.난 저도 모르게 허리를 굽히며 주시언에게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손을 내밀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그렇게 난 그가 고통스럽게 우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결혼한 지 1년이 됐지만, 난 처음으로 주시언이 우는 것을 보았다.난 가볍게 웃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네가 날 위해서 눈물을 흘리다니, 그래도 나에게 감정이 조금 있는 거구나? 나도 이제 한이 없어.”옆에
나도 그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몰랐지만, 무슨 일 생길까 봐 얼른 따라갔다.길가의 사람들은 저마다 비를 피하고 있었고, 오직 주시언 만이 빗속에서 달리고 있었다. 그런 남자를 보며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하며 수군거렸다.난 미간을 찌푸렸다. 주시언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기억 속의 그는 항상 부드럽고 겸손하며 종래로 이렇게 이성을 잃은 적이 없었다. 이런 주시언은 나에게 있어 무척 낯설었다.주시언은 곧장 집으로 달려가더니, 베란다에 놓인 그 화분을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위에 묻은 진흙을 닦았다.난 그 화분을 바라보며 멈칫했다.이것은 내가 주시언과 금방 결혼했을 때 산 화분이었고, 안에는 붉은 장미의 씨앗이 묻혀 있었다.그때의 그는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난 널 좋아할 리가 없어. 너도 내가 너와 결혼한 이유를 잘 알고 있을 테고.”난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난 안 믿어. 우린 이 붉은 장미처럼 뜨거운 사랑을 하게 될 거야.”다시 정신을 차리며, 난 주시언이 아직도 이 일을 기억하고 있단 것에 놀라움을 느꼈다.그는 마치 무슨 보물이라도 안고 있는 듯, 조심스럽게 화분을 들고 거실에 돌아왔다. 난 고개를 드리우며 마음속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주시언은 이미 잊었을지도 모른다. 이 장미는 싹을 튼 적이 없으니 꽃을 필 리가 더욱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화분 속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난 널 좋아할 리가 없어.”그때 주시언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지만, 그의 말은 마치 바늘처럼 내 마음을 찔렀다. 난 화분을 안고 애써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들어 그와 내기를 했다.그러나 주시언이 돌아설 때, 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내 얼굴을 타고 내려와 화분 속 미처 싹트지 않은 씨앗에 떨어졌다.그리고 난 씨앗을 파낸 다음, 바깥의 풀밭에 묻었다.“넌 꽃을 필 리가 없으니 여기에 있어도 시간 낭비일 뿐이야. 이제 넌 자유야.”난 화분을 원래의 자리로 가져갔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방에 돌아갔다
난 오빠가 차갑게 코웃음 치는 것을 들었다.[지민이 남긴 물건은 우리가 잘 알아서 보관할 테니 너와 아무런 관계도 없어.]주시언은 말을 하지 않고 직접 차를 운전하며 내 집으로 달려갔다. 나도 묵묵히 조수석에 앉은 다음,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주시언은 가속페달을 밟으며 신호등까지 무시했는데, 예전 같으면 난 벌써 위험하다고 그를 경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난 그 사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다행히 주시언은 무사히 내 집 앞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내 어머니가 문을 열어주었다.어머니는 많이 초췌해 보였고, 낭패하기 그지없는 주시언을 바라보며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문이 닫히자, 주시언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어머니, 지민이가 이렇게 된 건 다 제 잘못입니다. 만약 지민이 뭐라도 남겼다면 제발 저에게 알려주세요.”이 말을 듣고, 눈이 부은 어머니는 또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원래는 남기고 싶었겠지, 하지만...”주시언은 영문을 몰라 계속 무릎을 꿇고 있었다.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따라와.”주시언은 내 어머니를 따라 내 방으로 들어갔다. 탁자 위에는 검사 보고서와 내 핸드폰이 놓여 있었다. 보고서에 적힌 검사 결과를 바라보며, 주시언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바라보았다.어머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민이는 이미 임신을 했어. 우리도 지민이가 떠난 후에야 이 사실을 안 거야. 그 아이만 불쌍하지...”주시언은 검사 보고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오랫동안 통곡을 했다.이런 그의 모습을 보며, 나도 마음이 답답했다. 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애써 슬픔을 참으려고 눈을 감았다.주시언은 또 내 핸드폰을 들어, 안의 메모를 확인했다.마지막은 산부인과 의사가 신신당부한 임신 주의사항인데, 난 열심히 들으며 전부 적어두었다.아래로 훑으면 내 일기였다.[5월 20일. 이번 달 생리가 아직 오지 않아서 오후에 병원에 갔는데, 글쎄 내가 임신을 했다니.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이건 너와 상관이 없는 일이야. 지민도 널 보고 싶어하지 않을 테니까 당장 꺼져.”주시언은 말문이 막혔고, 잠시 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하긴, 지민은 지금 내가 제일 꼴 보기 싫겠지. 난 살인범이야. 우리의 아이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랑까지 죽였어.”그는 미친 듯이 오빠의 앞으로 달려갔다.“형님, 지민에게 돌아오라고 전화하세요. 저는 다신 지민의 앞에 나타나지 않을 테니까, 빨리 돌아오라고 하세요!”말하면서 주시언은 핸드폰을 꺼내 오빠에게 보여주었다.“제가 전화를 이렇게 많이 했지만, 지민은 하나도 받지 않았어요. 저 때문에 화가 엄청 나고 있는 게 분명해요. 형님이 전화하시면, 지민은 꼭 받을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지민은 형님을 가장 믿었잖아요. 제발 도와주세요!”오빠는 눈썹을 찌푸렸다.“마지막으로 말하지만, 지민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났어. 발광할 거면 나가서 해!”주시언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그 보고서를 꽉 쥐며 의기소침하게 떠났다.다만 그는 여전히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절 도와주려 하지 않은 이상, 저는 혼자 지민을 찾으러 갈 거예요. 그리고 우리의 아이까지. 제가 지민을 찾으면 다시 돌려드릴게요. 저는 지민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으니까.”난 저도 모르게 따라가고 싶었지만, 결국 발걸음을 멈추었다. 난 내가 언제 진정으로 이 세상을 떠날지 몰랐다. 내일일 수도, 모레일 수도, 하지만 난 마지막 시간을 나 자신에게 남겨주고 싶었다.그동안 난 오직 주시언을 바라보며 살았으니 이제 나 자신을 위해서 살 때가 되었다.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내 방을 둘러본 다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셨고, 오빠 방의 불이 아직 켜져 있었다. 오빠 방으로 들어가자, 희미한 달빛을 통해 난 오빠의 얼굴에 눈물 자국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베란다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주위에는 담배 연기가 가득하여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어머니는 조용히 침대에 누워 계시며 곁에는 내가 어릴 적 좋아하던
이때 주시언도 일어서더니 묘비 위의 사진을 어루만지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 나도 얼른 그를 따라갔다.주시언의 차는 묘지 밖에 세워져 있었지만, 놀랍게도 그는 오히려 정반대의 방향으로 향했다.난 눈을 부릅뜨며 그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집이 하나 있었고, 내가 키우던 그 화분은 지금 그 집 창가에 놓여 있었다.난 저도 모르게 멍해졌다. 이 집은 묘지기가 지내는 곳이었다.전에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에게 제사를 지내러 올 때, 난 이곳에서 지내는 할아버지와 인사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주시언은 왜 여기에 온 것일까?이때 귓가에서 갑자기 그가 한 말이 울렸다.“난 줄곧 너와 우리의 붉은 장미를 지킬 거야...”난 얼른 안으로 달려갔다. 비록 질서정연한 방안에 물건이 많지 않았지만, 난 여전히 그것이 주시언의 물건이란 것을 알아차렸다.난 멍하니 침대 옆에 있는 화분을 바라보았다. 안의 흙은 이미 새로운 흙으로 바뀌었고, 물도 다시 주었으며, 심지어 비료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주시언은 정말로 붉은 장미의 씨앗을 심었고, 날 향한 그의 사랑을 심었던 것이다...이때, 주시언도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그 화분을 들고 자세히 살폈는데.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왜 아직도 싹이 안 트는 거지? 햇빛이 부족해서 그런가?”그는 생각하다가 다시 나의 산소 앞으로 돌아왔다.햇빛 좋은 곳에 화분을 놓은 다음, 주시언이 말했다.“지민아, 아직 날 원망하고 있겠지? 괜찮아, 난 이 붉은 장미와 함께 계속 네 곁에 있어줄 거야. 전에는 비록 네 곁에 자주 있어주지 못하고, 너의 사랑에 응답을 하지 않았지만, 이제 조금씩 돌려줄게, 응?”주시언은 집에 돌아가서 한참 바삐 돌아쳤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난 마음이 씁쓸했다. 비록 이런 그를 보고 싶지 않았지만, 나도 이렇게 알려줄 수가 없었다.오후가 될 때, 밖에서 또다시 큰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주시언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재빨리 내 산소 앞으로 달려갔다. 그는 외투로 화분을 덮어준 다음, 또
병원에서 나오자, 난 임신 진단서를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은 다음, 배를 어루만지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지금 머릿속에는 의사가 방금 한 말이 계속 메아리치고 있었다.“심지민님 맞죠? 축하드려요, 임신하네요.”주시언과 결혼한 1년 만에 내가 드디어 임신을 했다.꽃집을 지나갈 때, 난 발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임신한 것을 축하하는 기념으로 꽃 하나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마스키를 잘 쓴 다음, 난 특별히 화분이 적은 꽃을 골랐고, 또 점원에게 꽁꽁 포장하라고 부탁한 후에야 꽃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난 천식을 앓고 있었기에 집에 꽃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물론 주시언도 나에게 꽃을 선물한 적이 없었다. 그때 난 일방적으로 그와 결혼하겠다고 말했고, 그 남자는 날 사랑하지 않았다.만약 주시언의 회사에 문제가 생겨 자금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도 나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결혼한 이 1년 동안, 난 주시언의 태도가 점차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더 이상 예전처럼 쌀쌀하지 않았다. 지금 난 또 임신을 했으니, 그는 이제부터 날 아껴줄지도 모른다.생각하면서 난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주시언에게 내 임신 진단서를 보여주고 싶었다.주시언이 곧 집에 돌아오기 전, 난 옷을 갈아입고 소파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나의 가슴은 저도 모르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심심한 사이, 난 베란다에 엎드려서 텅 빈 꽃병을 바라보며 시간을 때웠다. 이때 문득 오후에 산 꽃이 거실에 있단 것을 떠올렸고, 난 얼른 꽃을 안고 나와 주시언이 집에 들어올 때 주려고 했다.그러나 꽃은 뜻밖에도 탁자에서 떨어져 온 바닥에 흩어졌다. 난 허둥지둥 꽃을 주워서 품에 안았고, 자신이 천식을 앓고 있단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렸다.“에취!”정신을 차리자, 난 얼른 자신의 코와 입을 막으며 화장실에 달려가서 손을 씻고 세수를 했다. 뱃속에 아이가 있단 생각에, 난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올라가서 약을 먹으려 했다.그러나 서랍을 열어
난 얼른 입을 열었다.“시언아, 지금 어디야? 나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아. 좀 빨리 돌아올 수 있어?”맞은편은 잠시 침묵했고, 곧이어 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시언이 지금 바쁘니까 좀 이따가 다시 연락할게요.]난 놀라서 멍해졌다. 이 목소리는 그리 낯설지 않았는데, 주시언의 첫사랑이자 그가 줄곧 결혼하고 싶었던 여자였다.전화가 아직 연결되어 있어, 수화기 너머로 안내방송이 들려왔다.[유정연님, 지금 산부인과 진료실로 들어오세요.]내가 미처 묻기도 전에, 유정연은 전화를 끊었다.이 순간, 난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고, 머릿속은 온통 방금 들은 안내 방송이었다.유정연? 산부인과? 주시언이 왜 유정연과 함께 산부인과에 갔을까? 천식 발작하면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왜 내 약을 들고 자신의 첫사랑을 찾으러 갔을까?난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고, 힘없이 땅에 주저앉았다. 눈물은 볼을 타고 소리 없이 흘러내리며 내 손등에 뚝뚝 떨어졌다.충격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화분을 너무 많이 흡입해서인지, 이번의 증상은 전보다 훨씬 심각했으며 사지는 감각이 없을 정도로 마비되었다.이때 문득 내 뱃속에 아이가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난 애써 핸드폰으로 구급차를 부른 다음, 땅에 웅크리며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살려줘, 제발 내 아이를 살려줘...”“나와 시언의 아이를 살려줘...”난 눈빛에 초점을 잃고 중얼거렸고, 두 눈은 자꾸만 감겨졌다. 잠시 후 눈앞이 캄캄해지자, 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것을 들었고, 곧이어 오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민아! 정신 좀 차려! 오빠가 바로 병원에 데려다줄게!”누군가 날 안은 다음 허둥지둥 차에 올라탔고, 덜컹거리는 과정에서 난 완전히 기절을 했다.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은 온통 새하얬고, 소독수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난 한참 멍하니 있다가 그제야 자신이 병원에 있단 것을 알아차렸다.별일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난 아이를 잃을지도 모른다.난 억지로 몸을 받치
이때 주시언도 일어서더니 묘비 위의 사진을 어루만지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 나도 얼른 그를 따라갔다.주시언의 차는 묘지 밖에 세워져 있었지만, 놀랍게도 그는 오히려 정반대의 방향으로 향했다.난 눈을 부릅뜨며 그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집이 하나 있었고, 내가 키우던 그 화분은 지금 그 집 창가에 놓여 있었다.난 저도 모르게 멍해졌다. 이 집은 묘지기가 지내는 곳이었다.전에 어머니를 따라 아버지에게 제사를 지내러 올 때, 난 이곳에서 지내는 할아버지와 인사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주시언은 왜 여기에 온 것일까?이때 귓가에서 갑자기 그가 한 말이 울렸다.“난 줄곧 너와 우리의 붉은 장미를 지킬 거야...”난 얼른 안으로 달려갔다. 비록 질서정연한 방안에 물건이 많지 않았지만, 난 여전히 그것이 주시언의 물건이란 것을 알아차렸다.난 멍하니 침대 옆에 있는 화분을 바라보았다. 안의 흙은 이미 새로운 흙으로 바뀌었고, 물도 다시 주었으며, 심지어 비료 찌꺼기가 남아 있었다.주시언은 정말로 붉은 장미의 씨앗을 심었고, 날 향한 그의 사랑을 심었던 것이다...이때, 주시언도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그 화분을 들고 자세히 살폈는데.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왜 아직도 싹이 안 트는 거지? 햇빛이 부족해서 그런가?”그는 생각하다가 다시 나의 산소 앞으로 돌아왔다.햇빛 좋은 곳에 화분을 놓은 다음, 주시언이 말했다.“지민아, 아직 날 원망하고 있겠지? 괜찮아, 난 이 붉은 장미와 함께 계속 네 곁에 있어줄 거야. 전에는 비록 네 곁에 자주 있어주지 못하고, 너의 사랑에 응답을 하지 않았지만, 이제 조금씩 돌려줄게, 응?”주시언은 집에 돌아가서 한참 바삐 돌아쳤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난 마음이 씁쓸했다. 비록 이런 그를 보고 싶지 않았지만, 나도 이렇게 알려줄 수가 없었다.오후가 될 때, 밖에서 또다시 큰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주시언은 하던 일을 멈추고 재빨리 내 산소 앞으로 달려갔다. 그는 외투로 화분을 덮어준 다음, 또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이건 너와 상관이 없는 일이야. 지민도 널 보고 싶어하지 않을 테니까 당장 꺼져.”주시언은 말문이 막혔고, 잠시 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하긴, 지민은 지금 내가 제일 꼴 보기 싫겠지. 난 살인범이야. 우리의 아이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랑까지 죽였어.”그는 미친 듯이 오빠의 앞으로 달려갔다.“형님, 지민에게 돌아오라고 전화하세요. 저는 다신 지민의 앞에 나타나지 않을 테니까, 빨리 돌아오라고 하세요!”말하면서 주시언은 핸드폰을 꺼내 오빠에게 보여주었다.“제가 전화를 이렇게 많이 했지만, 지민은 하나도 받지 않았어요. 저 때문에 화가 엄청 나고 있는 게 분명해요. 형님이 전화하시면, 지민은 꼭 받을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지민은 형님을 가장 믿었잖아요. 제발 도와주세요!”오빠는 눈썹을 찌푸렸다.“마지막으로 말하지만, 지민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났어. 발광할 거면 나가서 해!”주시언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그 보고서를 꽉 쥐며 의기소침하게 떠났다.다만 그는 여전히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절 도와주려 하지 않은 이상, 저는 혼자 지민을 찾으러 갈 거예요. 그리고 우리의 아이까지. 제가 지민을 찾으면 다시 돌려드릴게요. 저는 지민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으니까.”난 저도 모르게 따라가고 싶었지만, 결국 발걸음을 멈추었다. 난 내가 언제 진정으로 이 세상을 떠날지 몰랐다. 내일일 수도, 모레일 수도, 하지만 난 마지막 시간을 나 자신에게 남겨주고 싶었다.그동안 난 오직 주시언을 바라보며 살았으니 이제 나 자신을 위해서 살 때가 되었다.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내 방을 둘러본 다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셨고, 오빠 방의 불이 아직 켜져 있었다. 오빠 방으로 들어가자, 희미한 달빛을 통해 난 오빠의 얼굴에 눈물 자국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베란다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주위에는 담배 연기가 가득하여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어머니는 조용히 침대에 누워 계시며 곁에는 내가 어릴 적 좋아하던
난 오빠가 차갑게 코웃음 치는 것을 들었다.[지민이 남긴 물건은 우리가 잘 알아서 보관할 테니 너와 아무런 관계도 없어.]주시언은 말을 하지 않고 직접 차를 운전하며 내 집으로 달려갔다. 나도 묵묵히 조수석에 앉은 다음,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주시언은 가속페달을 밟으며 신호등까지 무시했는데, 예전 같으면 난 벌써 위험하다고 그를 경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난 그 사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다행히 주시언은 무사히 내 집 앞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내 어머니가 문을 열어주었다.어머니는 많이 초췌해 보였고, 낭패하기 그지없는 주시언을 바라보며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문이 닫히자, 주시언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어머니, 지민이가 이렇게 된 건 다 제 잘못입니다. 만약 지민이 뭐라도 남겼다면 제발 저에게 알려주세요.”이 말을 듣고, 눈이 부은 어머니는 또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원래는 남기고 싶었겠지, 하지만...”주시언은 영문을 몰라 계속 무릎을 꿇고 있었다.어머니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따라와.”주시언은 내 어머니를 따라 내 방으로 들어갔다. 탁자 위에는 검사 보고서와 내 핸드폰이 놓여 있었다. 보고서에 적힌 검사 결과를 바라보며, 주시언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바라보았다.어머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지민이는 이미 임신을 했어. 우리도 지민이가 떠난 후에야 이 사실을 안 거야. 그 아이만 불쌍하지...”주시언은 검사 보고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오랫동안 통곡을 했다.이런 그의 모습을 보며, 나도 마음이 답답했다. 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애써 슬픔을 참으려고 눈을 감았다.주시언은 또 내 핸드폰을 들어, 안의 메모를 확인했다.마지막은 산부인과 의사가 신신당부한 임신 주의사항인데, 난 열심히 들으며 전부 적어두었다.아래로 훑으면 내 일기였다.[5월 20일. 이번 달 생리가 아직 오지 않아서 오후에 병원에 갔는데, 글쎄 내가 임신을 했다니.
나도 그가 무엇을 하려는 건지 몰랐지만, 무슨 일 생길까 봐 얼른 따라갔다.길가의 사람들은 저마다 비를 피하고 있었고, 오직 주시언 만이 빗속에서 달리고 있었다. 그런 남자를 보며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하며 수군거렸다.난 미간을 찌푸렸다. 주시언은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기억 속의 그는 항상 부드럽고 겸손하며 종래로 이렇게 이성을 잃은 적이 없었다. 이런 주시언은 나에게 있어 무척 낯설었다.주시언은 곧장 집으로 달려가더니, 베란다에 놓인 그 화분을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위에 묻은 진흙을 닦았다.난 그 화분을 바라보며 멈칫했다.이것은 내가 주시언과 금방 결혼했을 때 산 화분이었고, 안에는 붉은 장미의 씨앗이 묻혀 있었다.그때의 그는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난 널 좋아할 리가 없어. 너도 내가 너와 결혼한 이유를 잘 알고 있을 테고.”난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난 안 믿어. 우린 이 붉은 장미처럼 뜨거운 사랑을 하게 될 거야.”다시 정신을 차리며, 난 주시언이 아직도 이 일을 기억하고 있단 것에 놀라움을 느꼈다.그는 마치 무슨 보물이라도 안고 있는 듯, 조심스럽게 화분을 들고 거실에 돌아왔다. 난 고개를 드리우며 마음속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주시언은 이미 잊었을지도 모른다. 이 장미는 싹을 튼 적이 없으니 꽃을 필 리가 더욱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화분 속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난 널 좋아할 리가 없어.”그때 주시언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지만, 그의 말은 마치 바늘처럼 내 마음을 찔렀다. 난 화분을 안고 애써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들어 그와 내기를 했다.그러나 주시언이 돌아설 때, 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내 얼굴을 타고 내려와 화분 속 미처 싹트지 않은 씨앗에 떨어졌다.그리고 난 씨앗을 파낸 다음, 바깥의 풀밭에 묻었다.“넌 꽃을 필 리가 없으니 여기에 있어도 시간 낭비일 뿐이야. 이제 넌 자유야.”난 화분을 원래의 자리로 가져갔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방에 돌아갔다
주시언은 떨리는 두 손으로 내 팔을 흔들었다.“지민아, 눈 좀 떠봐, 응? 왜 이런 모습으로 여기에 누워있는 거야? 이곳에 꽃이 많으니 많이 불편하지? 우리 같이 집에 돌아가자, 응?”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붉어진 두 눈으로 계속 내 팔을 흔들었다.난 이토록 당황해 하는 주시언을 본 적이 없어 일시에 넋을 잃고 멍해졌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이때 오빠도 달려오더니 주시언을 한쪽으로 끌고 가려 했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 박힌 큰 바위처럼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주시언, 이제 그만 좀 하지 그래? 지민이 편히 떠나게 할 순 없는 거야? 굳이 와서 소란을 피워야 하는 거냐고?”주시언도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그럴 리가 없어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지민은 약을 사오라고 저에게 전화를 했었는데. 멀쩡한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죽을 리가 없잖아요?”이 말을 듣자, 오빠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주시언의 멱살을 잡으며 호통을 쳤다.“그 입 닥쳐. 지금 뻔뻔스럽게 그 일을 언급하다니. 네가 그날 네 첫사랑과 함께 있지만 않았어도, 지민은 천식 때문에 외롭고 비참하게 집에서 죽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까 다신 내 앞에서 그 얘기 꺼내지 마!”주시언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고개를 돌려 멍하니 나의 시체를 바라보았다.“어떻게 이럴 수가. 지민은 그저 약을 사달라고 말했을 뿐, 병이 발작했다고 알려주지 않았어요. 만약 이 사실을 알았다면, 저는...”그는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고, 고개를 드리웠다.난 저도 모르게 허리를 굽히며 주시언에게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그러나 손을 내밀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그렇게 난 그가 고통스럽게 우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결혼한 지 1년이 됐지만, 난 처음으로 주시언이 우는 것을 보았다.난 가볍게 웃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네가 날 위해서 눈물을 흘리다니, 그래도 나에게 감정이 조금 있는 거구나? 나도 이제 한이 없어.”옆에
거실에 들어서자, 주시언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멍을 때리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내가 서프라이즈로 준비한 꽃이 조용히 누워 있었는데, 지금 이미 형편없을 정도로 시들어졌다. 그리고 탁자 위에는 텅 빈 술병이 여러 개 놓여있었다.주시언은 나에게 여러 번 전화를 했지만, 여전히 차가운 안내음이 울릴 뿐이었다.그는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지민아, 너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왜 내 전화를 받지 않는 거지? 넌 남이 전화를 씹는 거 제일 싫어했잖아. 난 네 약까지 사왔단 말이야...”난 그의 곁에 앉아 씁쓸하게 웃었다.“시언아, 나 지금 네 곁에 있잖아. 하지만 넌 영원히 날 볼 수 없을 거야.”...한밤중에 주시언의 전화벨이 갑자기 울렸는데, 유정연이었다. 난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돌렸다.그는 전화를 받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야?”[지민 씨 화난 거야? 내가 너 대신 설명해 줄까?]“그럴 필요 없어. 나 혼자 해결하면 돼.”[그래, 그럼 너도 일찍 쉬어.]전화를 끊은 뒤, 주시언은 다시 잠들었다.난 옆에서 줄곧 묵묵히 그를 지켜보았다. 이곳에 머물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기에, 난 마지막으로 내가 사랑하는 이 남자를 바라보며, 그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싶었다.설령 내가 절망을 느낄 때, 그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었더라도.그러던 사이, 주시언의 전화가 또다시 울렸다. 그는 확인도 하지 않고 바로 받았다.“지민아, 왜 이제야 나한테 전화하는 거야? 지금 어딘데? 내가 데리러 갈게.”[사장님, 접니다.]이 사람은 주시언의 비서였는데, 회사 일로 그를 찾는 게 분명했다.이날 밤, 난 집안 곳곳을 둘러보았다. 이곳에는 나와 주시언의 추억이 가득 담겨져 있었다.그러나 난 곧 사라질 것이다....이튿날, 주시언은 아침 일찍 외출했다. 난 그가 회사로 갈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여주로 찾아갈 줄이야.난 흠칫 놀랐다. 여주는 우리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이었다. 주시언은 왜 갑자기 그곳에 간 것일까?3일 동안
[지민아, 임시로 일이 좀 생겨서 늦게 돌아갈 거야. 약은 이미 샀으니 집에서 기다려.][정연은 지금 절박유산 진단을 받았거든. 곁에 친척이 하나도 없으니 나도 가만히 지켜볼 수가 없어서. 병원 쪽의 일을 끝내면 바로 돌아갈 테니까,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마지막 문자를 보며 오빠는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고, 나 또한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유정연이 절박유산이라고? 곁에 친척이 없어? 하지만 내 천식이 발작할 때, 곁에 아무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의 아이까지 잃었다...슬픔에 고개를 드리울 때, 주시언에게서 전화가 왔다.오빠는 전화를 받으려 하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아예 핸드폰 전원을 꺼버렸다. 난 오빠가 왜 이러는 건지 몰랐지만, 이 순간 무력감에 휩싸여 묵묵히 오빠를 따라 집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주시언이 지금 유정연과 함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난 그저 1년 넘게 주시언의 사랑을 기대한 나 자신이 웃기다고 느낄 뿐이었다.만약 나에게 다시 기회를 준다면, 난 절대로 주시언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어머니는 이 잔혹한 사실을 알게 된 후, 울음을 그치지 못하셨고 심지어 기절하실 뻔했다. 다행히 오빠가 곁에 있어줘서 쓰러지지 않으셨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도 눈물을 참지 못했지만, 이미 늦었다.이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고, 밖에서 주시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머니, 지민이가 찾아오지 않았나요? 지금 여기에 있는 거 맞죠?”오빠는 멈칫하더니 문을 열었다. 그리고 주시언을 끌고 들어와서 주저하지 않고 그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주시언은 영문을 몰랐지만 반항을 하지 않고, 땅에 누워 묵묵히 오빠의 분노를 감수했다.옆에 있던 난 안달이 났지만 좀처럼 힘을 쓸 수 없었기에, 그냥 주시언이 심하게 얻어맞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형님! 지민이 대체 어디에 간 거죠? 제발 알려주세요!”내 이름을 듣자, 오빠는 주먹을 거두어들였고, 주시언을 한쪽에 던진 다음, 싸늘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잠시 후, 오빠는 고개를 홱
난 얼른 입을 열었다.“시언아, 지금 어디야? 나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아. 좀 빨리 돌아올 수 있어?”맞은편은 잠시 침묵했고, 곧이어 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시언이 지금 바쁘니까 좀 이따가 다시 연락할게요.]난 놀라서 멍해졌다. 이 목소리는 그리 낯설지 않았는데, 주시언의 첫사랑이자 그가 줄곧 결혼하고 싶었던 여자였다.전화가 아직 연결되어 있어, 수화기 너머로 안내방송이 들려왔다.[유정연님, 지금 산부인과 진료실로 들어오세요.]내가 미처 묻기도 전에, 유정연은 전화를 끊었다.이 순간, 난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고, 머릿속은 온통 방금 들은 안내 방송이었다.유정연? 산부인과? 주시언이 왜 유정연과 함께 산부인과에 갔을까? 천식 발작하면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왜 내 약을 들고 자신의 첫사랑을 찾으러 갔을까?난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고, 힘없이 땅에 주저앉았다. 눈물은 볼을 타고 소리 없이 흘러내리며 내 손등에 뚝뚝 떨어졌다.충격을 받아서인지, 아니면 화분을 너무 많이 흡입해서인지, 이번의 증상은 전보다 훨씬 심각했으며 사지는 감각이 없을 정도로 마비되었다.이때 문득 내 뱃속에 아이가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난 애써 핸드폰으로 구급차를 부른 다음, 땅에 웅크리며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살려줘, 제발 내 아이를 살려줘...”“나와 시언의 아이를 살려줘...”난 눈빛에 초점을 잃고 중얼거렸고, 두 눈은 자꾸만 감겨졌다. 잠시 후 눈앞이 캄캄해지자, 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것을 들었고, 곧이어 오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민아! 정신 좀 차려! 오빠가 바로 병원에 데려다줄게!”누군가 날 안은 다음 허둥지둥 차에 올라탔고, 덜컹거리는 과정에서 난 완전히 기절을 했다.다시 눈을 떴을 때, 눈앞은 온통 새하얬고, 소독수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난 한참 멍하니 있다가 그제야 자신이 병원에 있단 것을 알아차렸다.별일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난 아이를 잃을지도 모른다.난 억지로 몸을 받치
병원에서 나오자, 난 임신 진단서를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은 다음, 배를 어루만지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지금 머릿속에는 의사가 방금 한 말이 계속 메아리치고 있었다.“심지민님 맞죠? 축하드려요, 임신하네요.”주시언과 결혼한 1년 만에 내가 드디어 임신을 했다.꽃집을 지나갈 때, 난 발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임신한 것을 축하하는 기념으로 꽃 하나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마스키를 잘 쓴 다음, 난 특별히 화분이 적은 꽃을 골랐고, 또 점원에게 꽁꽁 포장하라고 부탁한 후에야 꽃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난 천식을 앓고 있었기에 집에 꽃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물론 주시언도 나에게 꽃을 선물한 적이 없었다. 그때 난 일방적으로 그와 결혼하겠다고 말했고, 그 남자는 날 사랑하지 않았다.만약 주시언의 회사에 문제가 생겨 자금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도 나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결혼한 이 1년 동안, 난 주시언의 태도가 점차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더 이상 예전처럼 쌀쌀하지 않았다. 지금 난 또 임신을 했으니, 그는 이제부터 날 아껴줄지도 모른다.생각하면서 난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주시언에게 내 임신 진단서를 보여주고 싶었다.주시언이 곧 집에 돌아오기 전, 난 옷을 갈아입고 소파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나의 가슴은 저도 모르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심심한 사이, 난 베란다에 엎드려서 텅 빈 꽃병을 바라보며 시간을 때웠다. 이때 문득 오후에 산 꽃이 거실에 있단 것을 떠올렸고, 난 얼른 꽃을 안고 나와 주시언이 집에 들어올 때 주려고 했다.그러나 꽃은 뜻밖에도 탁자에서 떨어져 온 바닥에 흩어졌다. 난 허둥지둥 꽃을 주워서 품에 안았고, 자신이 천식을 앓고 있단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렸다.“에취!”정신을 차리자, 난 얼른 자신의 코와 입을 막으며 화장실에 달려가서 손을 씻고 세수를 했다. 뱃속에 아이가 있단 생각에, 난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아 올라가서 약을 먹으려 했다.그러나 서랍을 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