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죽을 거라니... 저주와 같은 말이었다.나는 강해온에게 번호를 보내서 조사해 달라고 했다. 10분도 채 안 돼서 강해온은 전화가 왔다.“조사 결과 나왔어요?”나는 긴장한 채로 물었다.“대표님, 이거 대포폰입니다. 조사 결과에 의하면 3일 전에 개통되었고, 대표님에게 걸려 온 전화 외의 다른 사용 기록은 없습니다.”“다른 정보는 찾을 수 없어요?”“어디에서 구한 번호인지는 알 수 있지만 중간에 다른 사람이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시간을 좀 써서 조사해 봐야 합니다.”“그럼 계속 신경 써 줘요. 방금 나한테 전화 와서 자기가 누군지 맞춰보라고 했어요. 처음에는 장난 전화인 줄 알았는데, 내 이름을 부르며 곧 죽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분명히 내가 아픈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혹시... 연시혁 씨는 아닐까요?”나는 강해온이 이 이름을 꺼낸 다음에야 연시혁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떠올랐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굳이 연락할 필요도 없었다.연시혁은 큰아버지가 거리에서 입양한 양자였다. 그다지 정직한 사람은 아니었다. 큰아버지가 연씨 가문에서 마련해 준 일자리도 마다하고 거리에서 불량배들과 어울렸으니 말이다.큰아버지는 그를 한심하게 여겨 성인이 된 이후로는 관계를 끊어버렸다. 그 이후 나는 그를 본 적 없었다. 9년 전 큰아버지가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는 장례식에 오지 않았다. 자신을 연씨 집안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강해온의 추측은 근거가 없었다. 나는 연시혁과 원한 관계가 있을 리 없고, 전화 속 목소리도 그와 일치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내 병에 대해 알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나는 강해온의 생각을 부정했다. 그도 금방 말을 바꿨다.“그리고 대표님, 최희연 씨가 아직 병원에 있습니다.”“정신 상태는 어때요?”“어제 포도당 링거를 맞았고, 깨어난 뒤에 죽고 조금 드셨습니다. 지금은 그냥 병상에 앉아서 아무 말도 안 하고 계십니다.”“내가 이따가 병문안 갈게요.”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귀를 의심하게 되는 말이었다. 나는 최희연에게 왜 갑자기 이런 결정을 했는지 물었다.그녀의 빨간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눈을 감은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난 진실을 밝히고 싶어. 서준이 단순 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사실 진서준의 일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꽤 많았다. 멀쩡하던 사람이 어떻게 쉽게 죽을 리가 있겠는가? 내가 강해온에게서 들은 말을 생각하면 의심할 만도 했다.나는 최희연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방법을 쓸 줄은 몰랐다.진씨 가문의 두 아들은 전부 결혼하지 않았다. 외모가 평범하고 능력도 없으니 말이다. 나이도 벌써 30대 중반이었다.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누구랑 결혼하려고?”“진유겸.”나는 어제 봤던 고고한 남자를 떠올랐어.“네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알았어...?”“강해온이 어제 말해줬어. 진유겸 씨가 진씨 가문에 돌아갔다고. 그래서 진씨 가문에 큰 변화가 있을 거래. 내가 진유겸이 누구냐고 물어보니까 다 설명해 줬어. 그래서 그 남자랑 결혼하고 싶어졌어.”진유겸은 결코 쉬운 사람이 아니다. 결혼 역시 최희연이 원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나는 최희연의 능력을 인정했다. 그녀가 굉장히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유겸 앞에서는 그녀의 능력도 무색할 정도였다.그런 남자가 왜 그녀와 결혼을 하겠는가?진유겸도 장례식에 참석했으니 최희연과 마주쳤을 것이다. 조금만 더 알아보면 그녀와 진서준의 관계도 알 수 있다. 자신의 조카와 연관이 있는 여자를 아내로 들일 사람은 없다.최희연의 생각은 너무 터무니없었다. 실현될 가능성은 제로였다. 하지만 나는 직설적인 말로 그녀의 약한 멘탈을 흔들고 싶지 않았다.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이 문제를 더 이상 깊이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난 네 결정 응원해. 대신 결과를 충분히 생각하고 선택했으면 좋겠어.”“고마워, 수아야.”나는 최희연을 집에 데려다준 뒤 회사로 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전화가
정말이지 기쁘면서도 부끄러웠다.고현성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보고 싶어.”출혈은 심하지 않아서 욕조 물이 살짝 붉어진 정도였다. 나는 몸을 일으켜 출혈 부위를 닦으며 화제를 돌렸다.“아주머니 몸은 어때요? 일기 예보를 보니까 금운은 아직도 눈이 온다면서요.”“응, 손바닥만 한 곳이 전부 눈으로 뒤덮였어.”나는 핸드폰을 스피커 모드로 전환하고 침대에 놓아뒀다. 그리고 가운을 입으며 되도록 차분한 척 말했다.“정말 예쁘겠네요.”“정말 예쁘지.”나는 문득 미소를 지으며 그를 불렀다.“현성 씨.”“응?”“저도 현성 씨가 보고 싶어요.”고현성은 침묵에 잠겼다. 말을 안 하면서도 전화는 끊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내가 먼저 전화를 끊고 운성에 있는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었다.내 최근 상황을 알리자, 주치의는 잠시 생각하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사모님, 최근 혹시 무슨 일 있었나요?”그는 내가 고현성의 아내일 때 주치의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나를 사모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나는 굳이 정정하지 않고 자세히 말했다.“친구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요즘 혼란스러울 일이 많아요. 제가 누굴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오늘 이상한 전화도 걸려 와서... 좀 그러네요.”나는 전화의 내용까지 전해줬다.“수술을 받자마자 재발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사모님은 심적 스트레스가 심한 경우인 것 같네요. 일단 생리 기간을 확인해 보세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이맘때였던 것 같거든요? 그리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큰 감정 기복을 피하세요. 약까지 규칙적으로 드시면 큰 문제 없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주치의는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두 달 전의 수술은 정말 성공적이었습니다. 감염됐던 부분이 상당 부분 회복했고, 약만 잘 드시면 완치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알겠습니다.”“밤새는 건 절대 안 되니까 푹 주무셔야 해요.”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곧장 화장실로 갔다. 생리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돼서 우선 생리대를
나는 오래전부터 고현성의 기억상실을 의심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밝혀낼 방법이 없었다. 그가 말실수하기 전까지는 말이다.“지금까지 저를 속이고 있었던 거예요?”고현성은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창문을 통해 그의 표정을 똑똑히 봤다. 너무나도 당당해서 이를 악물게 되었다.그가 기억을 잃은 척 연기한 것이 밝혔다고 한들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국 그에게 놀아난 것뿐이었다.진실을 알고 나니 내려가서 문을 열어줄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때 고현성이 차분한 어조로 나를 협박하듯 말했다.“네가 나한테 보고 싶다고 한 말 녹음했어. 내려오지 않으면 고정재한테 보낼 거야.”“...”‘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치사할 수 있지?’나는 화가 나는 데도 어쩔 수 없이 내려가서 문을 열어줬다. 문을 열자 잔디밭에 있는 헬리콥터가 보였다.얇은 옷만 입고 나가자 봄바람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추운 와중에 비꼬듯이 말했다.“누가 재벌 아니랄까 봐. 등장 하나 화려하네요.”고현성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돈이 많은 걸 어쩌겠어.”나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뻔뻔해.”“넌 귀여워.”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물었다.“널 속이지 않고는 내가 어떻게 해야 했을까?”그의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나를 끌어안더니 약간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너한테 얼마나 큰 상처를 줬는데. 전부 잊은 척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다가갈 수 없었어. 네 방어벽을 뚫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만 했어.”고현성이 내 장례식에서 대성통곡했다는 말을 최희연에게서 들었을 때, 나는 그의 마음이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알았다.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서 나에게 다가오려고 할 줄은 몰랐다. 기억상실이라고 하면 내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넘겨줄 줄 알았던 걸까?사실 나에게는 그를 원망할 기운도 남지 않았다. 가끔 독설을 하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그다지 탓하지 않았다.“근데 왜 갑자기 실토한 거예요?”나는
오늘의 고현성은 유난히 감성적이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나는 문득 임지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만약 현성이 수아 씨를 사랑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것 같았을 거예요. 그만큼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니까요. 반대로 그렇지 않다면...”반대쪽은 내가 잘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것이다.나는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물었다.“지혜 씨한테도 이렇게 다정하게 말했어요?”임지혜가 언급되자, 고현성은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우린 그런 사이 아니었어.”“그렇게 오래 사귀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요?”나는 진심 어린 사랑을 말하는 것이었다.그리고 나는 단지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다. 누구에게나 과거가 있기 마련이고, 모든 것을 집요하게 추궁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뒤늦게 무례한 질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빠르게 말을 바꿨다.“제가 괜한 질문을 했네요.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줘요.”나는 이 주제를 빨리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고현성은 오히려 진지하게 설명을 이어갔다.“내가 지혜를 만난 건 대학교 졸업 직후였어. 그때 내 친구들은 모두 여자친구가 있었고, 나도 지기 싫어서 선택한 사람이었지. 근데 우리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어. 내가 금욕적이어서가 아니라 애초에 아무런 감정도 없었거든. 우린 그냥 몇 년 동안 겉으로만 연인 관계를 유지했어.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사랑이 뭔지도 몰랐어. 괜히 오해하게 해서 미안해.”고현성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지혜한테 마음이 없으면서도, 강제로 헤어지게 하니까 기분이 나빴어. 그래서 너를 원망하게 된 거야. 3년 동안 속으로는 원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뭘 원했다는 거예요?”잠시 기억을 되새겨 보니, 결혼한 3년 동안 고현성은 집에 굉장히 자주 돌아왔다.고현성은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3년 후 지혜가 다시 나타났을 때... 나는 한 번도 제대로 된 결혼식을 해준 적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결
전화는 아주 신속하게 끊겼다. 갑자기 남자 목소리가 들려서 그런 건지, 아니면 고현성이 정답을 말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나는 고현성이 대뜸 임지혜의 이름을 말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는 이 장난 전화에 관해 무언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현성은 전화를 돌려주며 나를 껴안았다.“내가 아직 지혜랑 만나고 있을 때, 일이 바빠서 데이트도 별로 못 하고 그랬어. 대부분 시간은 나한테 여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지. 지혜는 기분이 나쁠 때마다 이런 식으로 장난을 치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맞혀보라고 했어. 물론 난 상대해 주지 않았지만.”잠시 말을 멈춘 그는 훨씬 어두워진 눈빛으로 말했다.“이 일은 내가 조사할게. 임지혜가 한 짓이라고 해도... 내가 확실하게 답을 줄 거야.”2달 전 최희연이 임지혜에게 단단히 화가 나서 차로 들이받은 적 있다. 그때의 고현성은 임지혜에게 답을 주겠다고 했다.“난 지혜를 위해 진실을 밝힐 거야. 네가 다쳤어도 똑같아. 그리고 내가 가만히 있으면 지혜가 시끄럽게 굴 거야. 남자친구가 돼서 아무것도 안 한다고.”고현성은 정말 좋은 남자다. 단 사랑하는 사람에 한해서 말이다.나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네, 믿을게요.”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그의 품에 기대어 몸을 더 가까이 밀착시켰다. 그러나 그가 팔을 벌려 더 가까이 끌어안을 때, 나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찔했다.“움직이지 마, 그냥 가만히 있어 줘.”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거부의 뜻을 알아챈 그는 더 이상 강요하지도, 어떤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았다.잠시 후 그는 나를 내려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침대에 편하게 엎어져 있었다.머리를 말리고 난 고현성은 어젯밤 입었던 정장을 다시 입었다. 구겨진 셔츠를 본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나에게 말했다.“선양그룹은 내 집이랑 더 가까워. 괜찮으면 거기서 살아도 돼.”나는 그의 집에서 보낸 3년을 기억했다. 혼자 텅 빈 별장에서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지내던 시절을 말이다.다시 돌아가고 싶
“응, 안 먹었으면 내가 데리러 갈게.”진화그룹에서 집까지 거리가 꽤 되었다. 오가려면 두 시간은 걸릴 것이라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막 먹었어요.”고현성은 항상 바빴다. 어디에 있냐고 물어보면 언제나 회사였다.나는 그가 두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그는 의심 없이 약을 잊지 말고 챙겨 먹으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이때 강해온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대표님, 그 사람을 찾았습니다.”나는 강해온을 바라보며 물었다.“누구예요?”“유서정입니다.”나는 유씨 가문과 아무런 원한이 없었다. 심지어 현재는 협력 관계에 있다.유서정은 그런 짓을 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존심이 강한 여자였기 때문이다.나는 의아한 기분으로 물었다.“확실해요?”“최근 임지혜 씨와 접촉한 사람 중 한 명이 유서정 씨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서당에서 걸려 온 전화라...”“그것 말로 다른 단서는 있어요?”“없습니다. 그냥 제 추측일 뿐이라서요. 확실하게 하려면 서당에 직접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대포폰은 유씨 가문에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장난 전화는 사소한 문제였다. 하지만 곧 죽을 거라는 저주가 내 마음속에서 불안감을 유발했다.나는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내가 어떤 명분으로 방문하는 게 좋을까요?”강해온은 우물쭈물하며 쉽게 말하지 못했다.“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이제야 강해온은 말했다.“사실 유서정 씨는 고 대표님이 잘 압니다. 고 대표님한테 부탁하시면 쉽겠지만...”강해온은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고 대표님이 연루되면 상황이 복잡해질 겁니다.”‘현성 씨가 잘 안다고?’나는 고현성을 바라보던 유서정의 눈빛을 바라봤다. 유서정은 그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궁금한 마음에 계속 물었다.“왜요?”“유서정 씨의 새어머니가 고 대표님의 고모입니다. 두 집안은 항상 가까웠어요. 만약 유서정 씨가 이번 일의 배후라면, 고 대표님은 처리하기 곤란할 겁니다
내가 진유겸의 연락처를 조사하는 일까지 고현성이 알고 있을 줄 몰랐다. 이렇게 되면 연씨 가문에 그의 내통자가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설마 내가 하는 모든 일을 알고 있는 건 아닌지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사생활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고현성은 내 복잡한 감정을 눈치챘는지 담담하게 설명했다.“오늘 아침 네 비서가 말해줬어.”나는 말문이 막혔다.서당으로 가는 길, 나는 차 안에서 강해온에게 물었다.“희연이가 진유겸의 연락처를 알아보라고 부탁했죠?”강해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네.”“찾았어요?”그는 고개를 흔들었다.“회사 연락처만 찾고, 개인 연락처는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고 대표님한테 문의했더니 네트워크 데이터를 통해 찾았다고 합니다.”내가 왜 고현성에게 연락했는지 묻기 전에, 그는 이미 솔직하게 털어놨다.“현성 씨가 이유도 묻지 않고 바로 연락처를 알려줬어?”강해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고 대표님은 대표님의 일에 전혀 간섭하지 않습니다.”그렇다면 고현성은 나한테 진유겸을 조사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전화번호를 알려준 것이다. 정말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었다.서당은 운성과 달리 해가 강하다. 아직 3월밖에 안 됐는데도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내가 외투를 벗자 강해온이 받아 들며 말했다.“혹시 일을 망칠까 봐 유씨 가문에는 미리 알리지 않았습니다.”“그럼 찾기 쉽지 않겠네요. 이미 번호를 폐기했을지도 몰라요. 다시 전화하지 않는 한 말이에요.”강해온은 웃으며 물었다.“서당에 직접 오신 이유가 전화 오길 기다렸다가 현장에서 잡으려는 거 아닙니까?”지금까지 전화를 걸어 온 패턴을 보면 오후에 또 장난 전화가 올 것이다. 만약 유서정이 맞다면 절대 피할 수 없게 된다.나는 웃으며 말했다.“우선 유씨 가문 밖에서 기다려 봐요.”전화가 오기만 하면, 나는 강해온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전화를 걸었다는 건 유심이 아직 삽입된 상태로 있다는 것이니 증거를 확보할 수
담현아는 오두막으로 올라가 달빛 아래에서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석나은에게 물었다.“나은 씨, 전화한 이유가 단지 이런 얘기 때문은 아니겠죠?”“수아 씨,”그녀의 쉰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려왔다.“그이는 항상 조용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이번엔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고 수아 씨를 약혼녀라고 발표했잖아요. 게다가 결혼 날짜까지 약속했어요.”그녀는 말을 이어갔다.“나는 수아 씨가 너무 부러워요. 당신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잖아요. 나는 뭐가 부족했던 걸까요? 당신보다 훨씬 일찍 그의 삶에 나타났고 석씨 가문의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는데. 수아 씨는 어떻게 내 자리를 빼앗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나는 그이를 사랑해요. 만약 지훈 씨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내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을 거예요. 어릴 때부터 나는 오직 그를 위한 아내가 되기 위해 교육받았으니까요. 그를 잃으면, 나는 도대체 뭔가요?”그녀의 울적한 한탄은 이어졌지만 석지훈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실 따지고 보면 그녀도 불쌍한 사람이다.석씨 가문에서 봉건적인 사고방식을 주입받으며 살아온 여자일 뿐이니까.나는 고개를 들어 멀리서 다가오는 석만호를 발견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석나은을 달래듯 말했다.“나은 씨의 가치는 지훈 오빠로 증명되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사랑은 먼저 나타났다고 해서 이뤄지는 것도 아니죠. 솔직히 지훈 오빠가 왜 나를 선택했는지 나도 몰라요. 하지만 지훈 오빠는 나를 사랑하고 나도 그를 사랑해요. 우리는 평생 함께할 거예요.”“나은 씨는 아직 젊고 충분히 훌륭한 사람이니 때가 되면 더 좋은 사람을 만날 거예요. 가끔은 손을 놓을 줄 알아야 더 나은 미래가 찾아올 수 있어요.”내 말을 들은 석나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수아 씨, 지훈 씨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나는 모르는 척 물었다.“언제요?”“방금 전에요. 두 분의 약혼 소식에 충격을 받아서...
원태웅의 말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고 문득 낮에 받은 협박 문자가 떠올랐다.그 여자가 정말로 그런 엄청난 용기를 낼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석지훈이 약혼 소식을 발표한 후, 그의 어머니는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황급히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어둡고, 짙은 안개에 갇힌 듯했다.원태웅은 눈가가 붉어진 채 말했다.“사모님이 석씨 가문 본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대.”석지훈은 곧바로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향했고 나도 그의 뒤를 따라 서둘러 내려갔다.그는 별장을 나와 검은 벤틀리에 올랐다. 원태웅과 한민수도 그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나는 문가에 서서 불안한 마음으로 석지훈을 불렀다.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눈에 핏줄이 섞여 있었다.“집에서 기다리고 있어.”그의 말은 단호했다.비록 친어머니는 아니었지만 석지훈에게 그녀는 여전히 애정을 주었던 존재였다.나도 곁에서 위로하고 싶었지만 그는 따라오지 말라고 했다.나는 한 발 물러서며 말했다.“알겠어요. 집에서 기다릴게요.”한민수가 옆에서 거들었다.“지훈아, 수아 씨도 이제 네 약혼녀야.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마주해야지. 수아 씨도 본가로 가는 게 맞아.”한민수는 그들 중 가장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그러나 석지훈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원태웅에게 말했다.“네가 운전해. 최대한 빨리 본가로 돌아가자.”멍하니 서 있는 나에게 담현아가 다가와 위로했다.“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거예요.”사실 나는 석지훈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나를 싫어했으니 말이다.그리고 우리의 약혼 소식 때문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으로 석지훈에게 큰 압박을 남겼다.그리고 그녀의 목적은 성공했다.나와 석지훈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벽이 생겨버렸다. 하지만 그에게는 두 명의 어머니가 있었다. 문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사람이 누구였을까?내가 혼란에 빠져
석지훈은 그 반지를 간직했고 오늘 밤 나의 손가락에 결혼반지로 끼워주었다.그는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고 나는 그의 몸을 꼭 안은 채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었다.“윤아야, 시간이 되면 너와 함께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일부러 나를 데려가려는 걸 보면 분명 중요한 사람이겠지.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좋아요. 누구예요?”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나를 살아있게 한 사람.”그는 그렇게 말하고 내 허리를 감싸안으며 발코니로 나갔다.아래에서는 한민수와 원태웅이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담현아는 오동나무 위의 작은 오두막에 올라가 엎드려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나는 감회에 젖어 석지훈에게 말했다.“매일 집이 이렇게 시끌벅적하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담현아도...놀기 좋아하지만 사실 굉장히 조용한 사람이잖아요.”석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 아이는 외로워.”나는 호기심이 생겨 물었다.“담현아가 외롭다고요?”“그녀는 어릴 때부터 똑똑했어. 똑똑한 아이들은 일찍 철이 들기 마련이지. 그래서 제대로 된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을 거야.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북적이는 걸 더 좋아하게 되지.”나는 그 말을 듣고 석지훈과 담현아가 비슷한 부류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물었다.“그럼 오빠는요?”“응?”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오빠도 외로워요?”“아니. 네가 내 곁에 있으니까.”석지훈은 이제 달콤한 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한다.나는 일부러 그에게 물었다.“오빠는 내가 시끄럽다고 생각하죠? 시끌벅적하다는 말은 곧 말이 많다는 뜻이잖아요?”그는 진지하게 대답했다.“스스로 잘 알고 있네.”“...”나는 손을 들어 그의 볼을 꼬집었지만 그의 몸이 살짝 굳는 것을 보고 웃으며 손을 거두며 말했다.“됐어요. 이번엔 봐줄게요.”나는 그의 팔을 끌어안고 아래쪽을 바라보았다.원태웅이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그때 담현아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전화 왔어요!”원태
나는 석지훈과의 결혼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지금 내 가장 큰 소망은 그와 결혼해 그의 아내가 되는 것이다.나는 그의 손을 꼭 잡고 간절히 말했다.“오빠랑 결혼하고 싶어요.”석지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바보.”“너희 둘, 뭐 하고 있어?”한민수가 와인 잔을 들고 우리 대화를 방해하며 말했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 그리고 내 솔로 탈출도 좀 빌어줘.”한민수의 시선은 담현아를 향하고 있었다.하지만 담현아는 스테이크 요리를 여유롭게 먹으며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 보였고 그녀는 이 요리를 특히 좋아하는 것 같았다.나는 잔을 들어 한민수와 부딪치며 말했다.“고마워요.”석지훈도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넌 평생 솔로일 거야.”한민수가 순간 멈칫하며 말했다.“지금 나를 저주하는 거야?”석지훈은 그를 힐끗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억울한 표정의 한민수가 담현아에게 다가가 말했다.“쟤가 나를 괴롭혀!”담현아는 그를 흘긋 쳐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내가 저 사람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담현아는 석지훈을 이길 수 없었고 한민수도 진심으로 복수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그저 담현아에게서 조금이라도 존재감을 느끼고 싶었을 뿐이었다.하지만 담현아는 그런 한민수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담현아의 무미건조한 반응에 실망한 한민수는 결국 식사에 흥미를 잃었다.그는 원태웅에게 물었다.“여기 노래방 기계 있어?”원태웅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있지. 내가 먼저 한 곡 부를게.”원태웅의 목소리는 매우 청아했고 그가 부른 두 곡 모두 훌륭했다.한민수는 마이크를 넘겨받으며 나에게 물었다.“듣고 싶은 노래 있어요?”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노래를 하나 말했고 한민수는 노래를 찾아 부르기 시작했다.그의 목소리는 매력적이었다.잘생긴 외모와 재력에 재능까지 겸비한 한민수는 정말 뛰어난 남자였다.한민수가 몇 곡을 연달아 부르는 사이 석지훈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을 떠났다.나는 따라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사람들이 없는
나는 놀라며 물었다.“운산이요?”혹시 석지훈이 그 별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한민수가 대답했다.“네. 원태웅 대신 유진이가 유럽에 가기로 했어요. 그래서 지금 원태웅과 석지훈이 별장에서 요리하고 있어요. 덕분에 저도 석지훈 요리를 처음 맛보게 생겼네요!”나는 살짝 질투를 자극하려는 듯 말했다.“오늘 점심도 오빠가 나한테 해줬거든요.”한민수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자랑은 그만하시죠!”나는 그의 반응을 무시하고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열어 기사를 확인했다.석지훈의 게시물은 이미 ‘좋아요’가 백만 개 가까이 달렸고 내 팔로워 수는 10만을 넘어섰다.내 계정 아래에는 ‘원 대인’이라는 사용자가 댓글을 남겼다.“흑흑, 연수아 양이 제 댓글을 따라 하다니 감격이에요!”나는 낮게 웃으며 답을 남겼다.“셋째 오빠, 재밌어요?”잠시 후, 그는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윤아야, 그렇게 대놓고 밝히면 어떡해!”그가 나를 ‘윤아’라고 부르는 걸 보니 이제 완전히 나를 용서한 것 같았다.나는 답장을 보냈다.“셋째 오빠, 이렇게 하면 팔로워 늘릴 수 있어요.”그는 요리하느라 바쁜 것 같았고 더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사실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었다.혹시 석지훈이 오늘 나에게 프러포즈하려는 걸까?그런 사람이 대중 앞에서 화려한 프러포즈를 할 것 같진 않았다.아마도 파티를 여는 것 자체도 큰 결심이었을 테고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준비한 거라고 생각했다.사실 이 정도로만 해줘도 나는 이미 충분히 만족했고 그가 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했다.운산 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9시였다. 그곳에서는 석만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내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가주님.”그는 나를 별장 정원안으로 아내한 후 다시 밖으로 나갔다.어디로 가는지는 몰랐지만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북적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듯했다.별장 정원은 화려한 네온 조명으로 가득했다.네온 불빛 아래에는 하
석지훈은 공적인 자리에서 애정을 과시한 적이 없었다.게다가 그의 이름으로 개설된 SNS라니.나는 태블릿을 들고 팔로워가 100명도 안 되던 그의 계정이 순식간에 20만 명으로 늘어나는 광경을 보며 감탄했다.“오빠의 인기가 정말 대단하네요!”함 집사는 내 감탄하는 표정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대표님의 명성은 항상 높았습니다. 그를 좋아하는 여자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고 그의 연락처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도 셀 수 없었죠. 하지만 그 누구도 대표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으며, 그의 연락처를 얻는 것은 더욱 불가능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SNS 계정을 개설하셨으니 팬들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하지만 곧바로 약혼 소식을 발표했으니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이겠지요.”함 집사는 잠시 말을 멈추고 드물게 자신의 직책을 넘어선 말을 덧붙였다.“대표님 눈에 들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가주님 한 분뿐일 겁니다. 가주님, 제가 몇 년 동안 대표님과 함께 일하며 그분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가주님께서는 평생 믿으셔도 될 사람입니다.”나는 미소를 지으며 동의했다.“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는 제가 평생을 맡길 만한 사람이에요.”나는 태블릿을 함 집사에게 건네고 휴대폰을 꺼내 계정 이름을 ‘연수아’로 변경했다.그리고 계정과 비밀번호를 함 집사에게 알려주며 인증을 부탁했다.함 집사는 빠르게 나를 석씨 가문의 대표로 인증했다.나는 이 계정으로 석지훈의 게시글을 다시 리트윗하려 했지만 인기 댓글 중 하나를 보고 놀랐다.어떤 사용자가 ‘원대인’이라는 이름으로 댓글을 남긴 것이었다.[흑흑, 드디어 석 대표님과 연수아 씨가 인연을 맺다니 감격스러운 순간이네요! 팬으로서 축하드립니다. 두 분 행복하세요!]이 귀여운 댓글을 보니 원태웅이 떠올랐다.우리가 사이가 틀어지기 전 그는 이런 성격이었다. 게다가 오늘 낮에 우리가 화해하지 않았던가.댓글 아래에는 나와 석지훈의 사진도 많이 올라와 있었다. 그는 여전히 잘생겼고, 나도 여전히 아름답
고정재도 예전에 나에게 경고했었다.함 집사는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 나를 회사의 여러 부서를 둘러보도록 안내했다.석씨 가문의 산업망은 매우 광범위했으며 저녁이 되어서야 모든 부서와 핵심 부서를 둘러볼 수 있었다.석씨 가문의 핵심 부서는 굉장히 특별했다.이 부서는 석씨 가문이 전 세계적으로 가지고 있는 권력의 분포를 관리하며 세계에 대한 인식과 분석을 담당하고 있었다.또한 내가 처음 들어본 최씨 가문에 대한 정보도 이곳에 있었다.최씨 가문은 과거 정치 가문이었으며 상업적 활동은 크지 않았다.그러나 석지훈이 반년 전 쇠퇴한 이후 그들은 그의 유럽 세력을 신속히 흡수하며 부상했고 이제는 진유겸 다음가는 상업 거물이 되었다.나는 이 부서의 존재를 이제야 알게 되어 함 집사에게 물었다.“왜 전에 석씨 가문에 이런 핵심 부서가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때 준 자료에도 없었잖아요.”함 집사는 침착하게 설명했다.“가주님, 석씨 가문의 핵심 부서는 수백 년간 쌓아온 석씨 가문의 권력 기반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리지 않은 것은 가주님께서 가문에 대해 충분히 숙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석 집사님이 떠나시기 전 가주님을 점진적으로 교육하라는 지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야 말씀드리는 겁니다.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그래도 시간이 많으니 천천히 배우실 수 있습니다.”나는 그가 숨긴 것에 대해 나무라지 않고 호기심을 담아 물었다.“최씨 가문의 자료는 여기 있던데 지훈 오빠에 대한 자료는 없어요?”“아직 수집하지 못했습니다.”나는 의아하게 물었다.“최씨 가문의 자료는 그렇게 빠르게 업데이트되는데 왜 지훈 오빠 자료는 그렇지 않나요? 무슨 사정이라도 있는 건가요?”“아닙니다. 다만 석 대표님 측의 보안이 매우 철저합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다면 더 이상 조사할 필요 없어요.”함 집사는 놀라며 말했다.“그건 규정에 맞지 않습니다.”나는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함 집사님, 이건 내가 그에게 줄 수 있
“저는 몰라요. 셋째 오빠는 알고 있어요?”내 말에 전화 너머에서 원태웅이 설명했다.“나와 한민수는 지훈이 형이 감옥에 갇혀 있던 시기에 그가 석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나중에 윤 비서에게 들으니 형이 예전에 친부모를 찾으려 했었다고 하더라. 하지만 그때는 제대로 찾지 못했고 단서 몇 가지만 알았던 모양이야.”“이후 유럽 세력 재건으로 바빠서 그 일을 잠시 접어둔 것 같아. 나는 그 일에 마음이 쓰이다가 그를 대신해 조사를 했고 얼마 전 그의 친부모를 찾았어. 그런데 아주 평범한 한인 가정이더라고...”석지훈이 나웨이에서 친부모를 찾으려 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된 일이었다. 그때 나는 한민수의 속임수로 나웨이에 끌려가기도 했다.그곳의 작은 나무 오두막이 바로 석지훈이 태어난 곳이었다.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물었다.“둘째 오빠도 알아요?”원태웅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에게 차마 말할 수가 없었어.”나는 긴장된 마음으로 다시 물었다.“왜요?”“그 부부는 지훈이 형 외에 세 아들과 두 딸이 더 있어. 막내는 겨우 아홉 살이고.내가 그냥 손님 신분으로 그 집에 가봤는데 그들은 정말 화목하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조심스럽게 과거에 대해 물어봤어. 그들은 확실히 갓 태어난 아들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고 했어...”“내가 그 아이가 돌아오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그들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고 하더라. 그 아이는 그들이 결혼하기 전에 태어난 아이였고 그들에게 짐이었을 수도 있거든.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아무런 감정도 없을 거라고 했어. 아마 그들은 지금의 평화로운 일상을 방해받는 걸 두려워할 거야.”원태웅은 석지훈이 실망할까 봐 이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나는 순간적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원태웅은 내게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며 말했다.“과거 일은 더 이상 너와 따지지 않을게. 둘째 형이 이런 기회를 준 덕분에 나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거든.”
석지훈이 나를 달래듯 말했다.“착하지.”나는 복잡한 마음을 안고 위층으로 올라가 휴대폰을 가져왔다.원태웅의 번호를 찾아내는 동안에도 마음속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나는 원태웅을 두려워했다. 그들 중에서 나에게 가장 적대적이었던 사람이 바로 그였고 그는 항상 나를 냉소적으로 대했었다.용기를 내어 그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통화 중이라는 알림이 떴다.그제야 그가 나를 차단했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아래층으로 내려가 이 사실을 석지훈에게 알렸다.그러나 그는 생각을 굽히지 않고 대신 주머니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비밀번호는 네 생일이야.”그의 비밀번호가 내 생일이라니!놀란 마음으로 물었다.“언제 바꾼 거예요?”그는 힐끗 나를 보며 말했다.“할 일 해.”나는 근심 어린 얼굴로 다시 물었다.“꼭 내가 셋째 오빠한테 말해야 해요?”“응, 상황이 긴박해.”긴박한 상황이라 해도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만큼 급하지는 않을 텐데.나는 그의 하얗고 긴 손가락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가 일부러 나에게 원태웅에게 전화를 하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사실을.그는 우리가 화해하기를 바랐던 것이다.사실 이건 오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문제였다. 본래 내 잘못이었고 원태웅은 나에게 오랫동안 앙금을 품고 있었다.석지훈은 우리가 화해하기를 원했고 그의 의도를 이해한 나는 곧바로 그의 휴대폰을 열고 원태웅의 번호를 찾았다.한민수는 예전에 나에게 말했었다.“원태웅이 끝내 널 용서하지 않는다 해도 네가 스스로 굽힐 필요는 없어.”하지만 그는 석지훈의 형제였고 석지훈은 나의 남자였다.나는 그가 우리 사이에서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게다가 지금 석지훈은 나에게 화해의 기회를 준 것이다.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원태웅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마 석지훈의 번호라서 그런지 그는 전화를 굉장히 빠르게 받았다.“형!”그의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셋째 오빠.”원태웅이 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