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진서준이 작은 마을의 다리 없는 백수였다면 그는 무척 따분한 나날을 보낼 것이다. 단순히 먹고 사는 걸로 현실을 버틸 수 없고 최희연은 항상 속으로 고상한 것들을 바라왔으니까.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을 바꾸는 것뿐이다.그 과정이 고통스럽더라도 말이다.하지만 인생은 쉬운 게 없었다.진서준과 헤어지고 다시 호텔로 돌아오니 아래층에서 비서가 날 기다리고 있었는데 유지영도 자리에 있었고 내가 다가가자 비서가 설명했다.“대표님, 이쪽에 사인해 주세요.”내가 받아 사인을 하자 비서가 계약서 사본 하나를 유지영에게 주었고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당신은 고현성 못 뺏어.”그 말에 나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누가 뺏는다고 했어요?”유지영은 여전히 콧방귀만 뀌면서 아무 말 없이 오만하기 그지없는 못난 표정을 지었다.나는 웃으며 물었다.“그쪽 유서정 씨가 그 사람 좋아해요?”유지영은 콧방귀를 뀌며 뒤돌아 가버렸고 나는 한숨을 쉬며 비서에게 말했다.“저런 여자가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 있어요? 주제도 모르고 사람 미움이나 사는 저런 사람은 정말 상대하기 싫어요.”비서가 웃으면서 말했다.“아까는 질문하시던데요.”나는 저도 모르게 설명했다.“고현성을 좋아하는 게 저 여자인지 유서정인지 궁금하잖아요.”말이 나오자마자 내 뒤에서 한 남자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강해온 씨, 먼저 회사로 돌아가세요.”비서가 뒤돌며 고 대표에게 인사를 건네더니 눈을 깜박이며 나를 바라보았다.그런 그의 모습에 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먼저 가서 유씨 가문과의 뒷일을 처리해요.”그 말에 비서는 망설임 없이 자리를 떠났고 내 차까지 끌고 가자 나는 어이없다는 듯 한 마디했다.“겁이 참 많아.”고현성이 내게 다가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린 채 물었다.“연수아, 질투해?”나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뭐라고요?”그가 담담하게 대꾸했다.“누가 날 좋아하는지 궁금해했잖아.”“...”맹세코 그냥 해본 말이었다.나는 그를 상대
난 한때 고현성이 연씨 가문을 이어받을 적임자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그가 나에게 돌려주니 속수무책으로 어쩔 수 없이 연씨 가문이라는 성가신 물건을 이어받았다.그래, 나에겐 아주 성가신 것이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치료받으러 가려고요.”잠시 침묵이 흐른 후 나는 호기심에 물었다.“언제 따라왔어요?”그러자 고현성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네가 날 신경 쓰지 않은 거야.”“...”더 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아 돌아섰는데 갑자기 뒤에서 그가 나를 안아 들었고 놀란 내가 무의식적으로 팔로 그의 목을 감싸자 이런 나를 보고 그가 웃었다.“겁이 참 많아.”조금 전 내 비서에게 했던 말이라 나는 눈을 흘기며 퉁명스럽게 말했다.“내려줘요.”고현성은 요즘 나를 아무 때나 껴안고 뽀뽀하는 등 제멋대로 대하고 있었다.요 며칠만 해도 여러 번 키스했는데 그와의 키스는 반경우와 사뭇 느낌이 달랐다.하나는 아무런 잡생각이 들지 않고 다른 하나는 뜨겁고 격정적이었다.그를 원망한다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키스할 때도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나는 한숨을 쉬며 이런 내가 너무 미웠다.두 형제에게 깊이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꼴이란.고현성은 내 말을 무시했고 나는 한층 더 단호하게 말했다.“내려달라고요!”이번에 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싫어.”“계속 이러며 소리 질러요?”번화한 도심이고 거리에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기에 그가 이렇게 나를 안고 있는 모습은 시선을 끌 만했고 선남선녀인 우리가 다소 사무적인 차림을 하고 있으니 내가 크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주위에는 어느 정도 사람이 몰려들었다.그런데 고현성은 겁도 없이 도발했다.“질러봐.”차라리 나쁜 짓을 하면 모를까 짓궂게 나오니 어쩔 수 없이 나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말했다.“빨리 가요.”그는 웃고 있는지 가슴에서 움직임이 전해졌다.고현성은 나를 안고 차가 주차된 곳까지 50미터 남짓 걸어가더니 조수석 문을 열고 나를 태운 다음 발목을 잡고 진흙이 묻은 하이힐
“연수아, 뭐로 날 거절할래?”그래, 난 그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입술을 깨물며 내가 말했다.“당신은 날 괴롭히지 않을 거예요.”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일단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고현성은 이 말을 무시했다.차가 산까지 올라가는 동안 고현성은 다시 말을 걸지 않았다. 아마 눈치 없이 구는 내 말에 할 말을 잃은 걸 수도 있지만 어차피 나도 그와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나는 고개를 기울여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았고 희미한 구름 속에 숨어 있는 구불구불한 산들이 아른거리는 착각을 일으켰다. 시선을 돌려 고현성을 바라보자 그의 잘생긴 옆태와 멀리 보이는 산들이 조화를 이루어 사람 마음을 홀렸다.이 순간 나는 과거의 모든 원망을 잊고 모든 것이 3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나는 그와 결혼할 날만 고대하고 있었다.그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나는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었는데 비록 그가 극도로 꺼리긴 했어도 나는 그날 내 꿈이 현실이 된다고 생각했다.꿈이 현실이 되다니... 그것은 모두 환상이었다.나는 시선을 거두어 휴대폰을 꺼내 SNS를 확인했고 나와 반경우의 스캔들 열기는 사그라들었다.어제의 그 영상은 어디에도 없었다.하루도 안 돼서 영상이 사라졌다는 건 누군가 손을 썼다는 뜻이고... 지금 옆에 있는 남자가 유력했다.나는 망설이다가 고현성에게 묻지 않고 비서에게 문자를 보냈다.[인터넷에 있는 내 스캔들 누가 해결했어요?]비서는 답장을 보냈다.[바로 알아볼게요.]휴대폰을 도로 넣은 나는 눈을 감았다. 어제 너무 늦게 잔 탓에 지금 정신이 혼미한 상태라 눈을 감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잠이 들었고 깨어났을 때 차 안에는 고현성이 보이지 않았다.순간 당황해서 고개를 돌렸더니 차창 밖에 반듯한 체격의 한 남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고 그를 보는 순간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고현성은 정장 재킷을 벗은 채 흰 셔츠만 입고 있었고 그의 정장은 지금 내 몸 위에 있었다.산속의 바람이 거세서 그의 셔츠가 부풀어 올랐고 나는
“그래, 그럼 조금 쉬었다가 내가 요리해 줄게.” 멈칫하던 고현성이 부드러운 어투로 물었다.“뭐 먹고 싶어?”나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요리할 줄 알아요?”질문이 입 밖에 나오고 나서야 불필요한 질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전에도 그가 나를 위해 요리해 준 적이 있었으니까.임지혜가 좋아하는 굴비 요리였지만.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못 먹어봤어?”“먹어봤죠. 그냥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이에요.”“뭐 좋아해, 굴비?”고현성은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확신에 차서 말했다.“전에 네가 굴비 요리 자주 해주던 게 생각나네. 제일 좋아하는 거지? 이따가 한 마리 구워줄게.”나는 호기심이 발동해 물었다.“지금 이 시간에 어디서 생선을 구해요?”“있어. 비서가 전에 가져왔어.”짧게 대꾸한 나는 굴비를 싫어한다고 말하지 않았다.이제 와서 정정하기도 싫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그런데 무척 신기했다. 나와 고현성은 지금 아주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나도 무차별적으로 그에게 쏘아붙이지 않았다.바로 그때 비서가 내게 전화를 걸었고 나는 고현성이 보는 앞에서 전화를 들고 그의 설명을 들었다.“대표님, 인터넷에 떠도는 그 기사는 고 대표님께서 막았어요. 영상도 지우는데 큰돈을 들인 것 같아요.”나는 고현성을 힐끗 쳐다보았고 그는 덤덤한 표정이었다.대꾸한 나는 문득 진서준이 떠올랐고 유씨 가문과의 계약을 잃고 진씨 가문에서 분명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잠시 고민하던 내가 말했다.“연씨 가문에 요즘 어떤 계약이 있지?”비서가 의아하게 물었다.“무슨 뜻이에요, 대표님?”“진씨 가문에 큰 계약 두 개를 골라서 진서준에게 맡겨요. 이건 강 비서가 알아서 하고 나 대신 그 사람 챙겨줘요.”전화를 끊자 고현성이 의아한 어투로 물었다.“진서준한테 잘해주네. 전에 알던 사이야?”나는 대답하지 않고 호기심에 물었다.“그런데 왜 진씨 가문을 도와준 거예요? 단지 연씨 가문과 맞서기 위해서?”그가 단호하게 대답했
다들 내가 엉뚱한 사람을 사랑해서 연씨 가문을 고현성에게 준 거고 원래는 고정재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그런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3개월 전 연씨 가문을 고현성에게 줬을 때 그는 나와 이혼하고 싶어 했고 나는 그를 뼛속까지 이가 갈릴 정도로 미워했지만 그래도 연씨 가문을 넘겨줬다.그를 사랑한다는 것 말고도 그가 제일 적절한 사람이었으니까.그는 야망이 있는 사람이고 진화그룹을 작은 기술 회사에서 이렇게 큰 규모로 키울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능력이 있다는 뜻인데 야망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야말로 연씨 가문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했다.고정재였다면 난 아마 연씨 가문을 주지 않았을 거다.그는 예술가였고 재계는 뜻이 없었기에 내가 아무리 그를 사랑해도 연씨 가문이 우선이었다.그러니 고현성이 어부지리로 가진 건 절대 아니었고 상황이 이렇게 된 지금도 나는 연씨 가문을 그에게 넘겨주고 싶었다.이런 오해가 마음속에 남아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 한참을 생각하다가 해명했다.“고현성 씨, 어부지리 아니에요. 내가 생각이 있어서 그 쪽한테 넘겨준 거예요. 주위를 둘러봐도 운성에 제일 능력 있고 제일 잘 아는 사람은 당신이니까.”그는 3년 동안 연씨 가문과 대적했으니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이 말을 들은 고현성은 잠시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다가 내 팔을 잡고 물었다.“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해?”“오빠가 나보고 상주로 오라고 재촉하고 있어요.”“연씨 가문을 내게 준다는 거야?”“네. 나는 먹고 살 걱정 없고 자식도 없는데 남은 시간도 장담 못하니까 연씨 가문에만 매달리고 싶지 않아요. 현성 씨가 제일 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여전히 연씨 가문을 넘기고 싶어요.”“나를 원망하지 않아?”그가 불안한 기색으로 물었다.“하죠. 예전에 나한테 얼마나 잔인하게 굴었는데.”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원망할만해.”“연씨 가문은 원하면 언제든 가져가요.”“그럼 고정재는?”나는 인상을 찌푸렸다.“왜 갑자기 그 사람 얘기를...”그는 무
나는 머리를 말린 후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가지고 놀았고 우리 둘은 누구도 방해하지 않고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하지만 고요한 분위기도 결국 깨져버렸고 적막을 깬 건 윤다은의 전화였다.왜 나한테 전화했을까... 나는 의아했다.내가 받을지 말지 망설이고 있을 때 고현성이 고개를 내밀며 위에 뜨는 이름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불쾌한 듯 말했다.“다은이 눈에는 고정재밖에 없어.”고현성은 고정재를 형이라고 부른 적이 거의 없었고 두 사람은 가까워 보이지 않았다.고현성이 옆에 있어서 전화를 받지 않자 윤다은은 아예 카톡으로 영상통화를 걸었다.짜증이 난 고현성이 내 손에서 전화기를 빼앗아 통화버튼을 누르고 물었다.“다은아, 무슨 일이야?”짜증스러운 고현성의 목소리와 윤다은도 그가 받을 줄 몰라 잠시 당황하며 말했다.“작은오빠, 수아 언니는?”“네 새언니는 왜 찾는데?”그는 뻔뻔하게도 윤다은에게 새언니라고 부른 것을 요구했고 윤다은도 제꺽 반응하며 물었다.“새언니는?”고현성은 대답 대신 되물었다.“뭐 때문에 찾는 건데?”라고 물었다.“나 또 경찰서에 갇혔어.”“...”윤다은은 애처롭게 설명했다.“큰오빠를 찾을 엄두는 안 나고 오빠도 날 욕할 것 같아서 수아 언니한테 연락했어.”고현성이 차갑게 말했다.“쌤통이다.”“...”“작은오빠, 나 좀 구해줘.”“알아서 해.”고현성은 잔인하게 거절하고 바로 통화를 끊었고 나는 망설이며 말했다.“이러면 안 되지 않나요?”고현성은 나에게 휴대폰을 다시 건네며 말했다.“사고 칠 땐 이렇게 될 거라는 생각 안 한대? 하루 동안 가둬서 혼 좀 내야 해. 내일 시간 나면 데리러 가야지.”고현성은 잠시 망설이다가 갑자기 한숨을 쉬며 말했다.“다은이도 좀 불쌍해. 너 못지않게 고정재를 좋아하고 어렸을 때부터 고정재랑 같이 자랐으니 몇십년은 됐네.”그는 자주 고정재를 언급했는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가라앉았다.나는 짜증스럽게 물었다.“고정재 씨 얘기 그만
고현성이 샤워 가운을 당기는 순간 나는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더욱 화가 났다.나는 서둘러 이불을 집어 내 몸에 감고 고현성에게 매섭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의 노골적인 눈빛이 내 몸에 향하는 걸 보았다.나는 숨을 크게 내쉬면서 죽은 듯이 누워있는데 그 남자는 여전히 침대 반대편에 가만히 있었고 나는 그가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특히 지금은 내가 고양이 앞에 선 쥐가 된 기분이었다.나는 감히 눈을 감을 수가 없었고 손으로 이불 모서리를 단단히 잡았다. 겁에 질린 내 표정을 보고 고현성은 차가운 코웃음을 치며 경멸하듯 말했다.“한심하긴.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하겠어?”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고현성이 갑자기 내 몸을 덮쳐왔고 나는 애써 침착한 척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내려가요.”허, 뻔뻔한 남자!지금 내 마음은 그에게 향해 있지 않았고 그를 사랑하지도 않았다.게다가 이런 상황은 한번 일어나면 두 번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운성을 떠나지 않는 한 그는 늘 갖은 방법을 동원해 나를 침대로 끌어들일 것이다.나는 붉어진 눈으로 말했다.“싫어요.”나는 몸부림쳤고 고현성은 어두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손을 뻗는 순간 내 몸에서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미안, 참을 수가 없었어.”나는 말없이 가운을 주워 입었고 방은 유난히 조용했다.고현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나는 곧 통유리창 너머로 그가 수영장으로 건너가는 모습을 보았다.이 방은 마침 별장 대문의 풍경을 담고 있었는데 그는 수영장 라운지에 앉아 옆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몇 모금 피우고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담배를 껐다.유난히 작아 보이는 그의 등이 어젯밤과 겹쳐 보였다.나는 다시 뒤돌아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눈을 감고 뒤척이다가 갑자기 비서가 나에게 걸었던 전화가 생각났고 그는 고현성이 많은 돈을 써서 검색어를 삭제했다고 말했다. 사실 나를 도와줄 필요가 없는데 그는 여전히 그렇게 했다.게다가 갖은 수단을 써서 연씨 가문을 상대한 것
“아, 뒷마당에 어떤 물고기를 키워요?”지루한 질문이었지만 고현성과 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고 다행히 그가 참을성 있게 내 말에 대꾸했다.“다 조기야.”조기...임지혜를 위해서 키우는 건가?여기 임지혜를 자주 데려오나?나는 실망한 내 모습을 눈치채지 못하고 짧게 대꾸하며 무심하게 말했다.“임지혜 씨가 전에 굴비 좋아한다고 나한테 말한 적 있어요.”고양이를 쓰다듬던 고현성의 손이 멈췄고 그는 덤덤한 목소리로 설명했다.“여기 데려온 적 없어. 걔를 위해 키우는 것도 아니고.”나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그럼 누구를 위해 키우는 거예요?”고현성의 눈빛이 나를 향했고 나는 장난스럽게 웃었다.“나를 위한 거라고 하지 마요. 난 굴비 싫어해요.”고현성은 당황했다.“뭐?”나는 태연하게 말했다.“난 굴비 싫어해요. 비린내가 심하고 가시도 많은데 임지혜 씨 말로는 당신이 좋아한다길래 결혼하고 당신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매번 요리했죠. 비록 결혼생활 동안 당신은 내가 한 요리를 한 번도 먹지 않았지만.”3년간의 결혼 생활에 난 모든 걸 바쳐 헌신했고 그때의 나는 참 한심했다.고현성은 중얼거렸다.“그랬구나...”나는 의아하게 물었다.“뭐라고요?”고현성은 고개를 저으며 나를 보면서 말했다.“일찍 자. 내일 내려가자. 난 경찰서에 다은이 데리러 가야 해.”짧게 대꾸한 나는 창문을 닫으려고 손을 뻗었다.요즘 불면증이 심해서 눈을 뜬 채 주황빛으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봤고 밝은 빛이 오동나무에 드리우며 얼룩져갔다. 그리고 고현성이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러 다시 수영장으로 가는 모습도 보였다.고현성은 고양이에게 먹이를 준 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나는 급히 눈을 감고 자는 척하다가 멀어지는 발소리에 눈을 떴고 이윽고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옷을 챙겨입고 나가자 고현성이 내 얼굴을 보며 물었다.“화장할래? 여기 화장품 있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고마워요.”고현성의 곁에 내가 연적으로 생각했던 여자는 딱 한 명만 나
이 경악하는 목소리는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석지훈의 머리에서 악마 머리띠를 벗겨내고 돌아서며 웃었다.“하! 태웅 오빠도 여기서 놀고 있었어요?”원태웅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맨날 정색하고 차가운 지훈이 형이 악마 뿔 머리띠라니, 진짜 귀엽다.”석지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점점 버릇없어지는구나.”말에 담긴 협박을 알아챈 원태웅은 재빨리 잘못을 빌었다.“잘못했어. 난 태림이 그 녀석한테 가봐야겠다. 두 사람 데이트 방해 안 할게. 근데 형 이런 모습 보니까 진짜 인간적이야.”석지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뭐야? 아직도 손에 못 넣었어?”원태웅은 그 말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아이고, 형.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봐!”원태웅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나는 흰 셔츠를 입은 문태림이 심각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잔뜩 짜증 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 같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두 사람은 뭐예요?”두 남자가 놀이공원에 있는 게 좀 수상했다.석지훈은 원태웅의 비밀을 바로 털어놓았다.“둘이 썸씽 같은 건데, 몇 년째 아웅다웅하면서도 관계를 정확히 안 정했어.”나는 놀라서 말했다.“태웅 오빠가 게이!”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호기심에 재빨리 물었다.“다른 비밀은 없어요? 오빠는 완전 정보통 같아요. 두 사람 일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요?”“말했잖아. 다들 나한테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고.”그들의 속마음이 석지훈에게는 그저 쓰레기 같은 존재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혹시 창피해서 화났어요?”남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의아하게 물었다.“어?”“태웅 오빠에게 냉정한 모습 말고 다른 모습 들켜서요.”“상관없어. 우리 관람차 타러 가자.”석지훈은 내 손을 꼭 잡고 사건 현장을 벗어났다. 우리는 표를 사고 관람차에 올라탔다. 이 높이에서 바라보는 운성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워 기분이 좋아졌다.내가 석지훈의 어깨에 기대어 그의 뺨에 얼굴을
석지훈은 가볍게 웃었다.“정말 자기애가 너무 심하다니까.”나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또 물었다.“나한테 주는 게 아니에요?”석지훈은 대답하지 않고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얼른 뒤따라가서 물었다.“뭐하려고요?”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글쎄? 우리 사모님은 뭐가 먹고 싶을까?”나는 주방에 들어가 석지훈의 팔을 안고 애교를 부렸다.“배 안 고파요. 얼른 나랑 얘기 좀 해요.”석지훈이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데이트하고 싶다면서.”“지금 데이트 아니에요?”“우리 사모님 눈에는 이게 데이트인가 보네...”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우리 이따가 어디 가요?”“밥 먹고 놀이공원에 갈 거야.”나는 기뻐하면서 물었다.“오빠, 놀이공원 가봤어요?”석지훈은 꿀 떨어지는 눈으로 날 보면서 얘기했다.“장난치지 마.”나는 석지훈의 팔을 놓아주었다.석지훈은 얼른 요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집중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석지훈의 부상 때문에 우리는 간이 적게 된 요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나는 석지훈이 만드는 모든 음식을 좋아했다. 음식의 맛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음식을 만들어준 사람이 중요한 거니까 말이다.전에는 항상 내가 고현성을 위해 요리하는 거였다.그래서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밥을 먹은 후 석지훈은 운전대를 잡고 나를 데리고 시 중심에 있는 놀이공원으로 갔다.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가득했다. 대부분이 젊은 커플들이었다. 나와 석지훈은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누볐다.어두운 녹색 코트를 입은 석지훈은 오늘따라 더욱 부드러워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반짝이는 악마 머리띠를 샀다.머리띠를 한 후, 내가 물었다.“예뻐요?”석지훈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응.”나는 손을 들고 물었다.“오빠도 같이할 거죠?”석지훈이 악마 머리띠를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다.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석지훈의 입에서 나온 건 긍정의 대답이었다.나는 석지훈에게 악마
“나도 진실은 잘 몰라. 그래서 함부로 얘기할 수 없어. 하지만 진서준의 죽음이 왕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건 확실해. 진유겸이 알아냈거든. 하지만 그걸 최희연이 알면 버티지 못할까 봐 알려주지 않은 거야.”만약 왕자현이 최희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밝혀지면 최희연은 유일한 희망을 잃고 그대로 사라지려고 할 것이다.나는 그것을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그럼 어떡해요?”“사람을 시켜서 이 일의 진실을 알아보게 할 거야. 하지만 진실을 알아내기 전에는 꼭 비밀을 지켜야 해. 희연 씨가 이 일을 발견하게 해서는 안 돼.”“만약 진실이...”석지훈이 되물었다.“그게 중요한가?”나는 멍해졌다. 그럼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석지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얘기했다.“윤아야, 만약 정말 진유겸의 말대로 왕자현이 이 모든 것을 저질렀다고 해도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거야. 희연 씨에게는 왕자현이 진실보다 더욱 중요하니까.”최희연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왕자현이다.왕자현은 최희연의 유일한 희망이다.그래서 진유겸이 이 비밀을 까밝히지 않은 것이었다.진유겸이 이것까지 생각해 주다니.나는 머릿속이 복잡했다.“알겠어요.”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대충 감이 잡혔다.하지만 왕자현은... 왜 최희연을 속인 거지?“그래, 배고파?”석지훈이 수영장에서 나왔다. 나는 익숙한 듯 석지훈의 팔을 안고 얘기했다.“아니요. 오늘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석지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는데?”“서오가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제가 담현아한테 부탁했거든요. 하지만 이걸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요. 아, 그리고 오늘 시혁 오빠한테 이연 씨의 병에 대해 알려줬어요. 하지만 한민수의 전여친 일은 처리하기 어렵네요.”석지훈은 서오의 일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그저 나를 별장 안의 방으로 데려가면서 넌지시 물을 뿐이었다.“한민수의 전여친? 혹시 엄슬기라는 사람 말이야?”석지훈이 한민수의 전여친에 대해서 알고 있다니.나
석지훈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진유겸은 석지훈의 말을 듣고 더욱 골치 아파했다.깊은 한숨을 내뱉은 진유겸이 얘기했다.“최희연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 정신이 불안정해. 몇 번이나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몰라. 그런 최희연이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왕자현인데, 내가 진실을 알려줬다가 최희연이 정말... 정말 무너지면 어떡해.”최희연은 정신 상태가 건강하지 않았다.자살까지 생각한 사람이니까 말이다.석지훈이 옆에서 얘기했다.“왕자현에게 의지하는 사람이니, 네가 만약 왕자현을 빼돌린다면 희연 씨 상황도 악화될 거야.”“그냥 거짓말 속에서 살라고 해.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 왕자현은 정말 최희연을 사랑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석지훈이 물었다.“너는?”“응?”“너는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어?”진유겸은 석지훈의 질문에 피식 웃고 대답했다.“나를 뼛속까지 싫어하는 사람이야. 이번 생에는 절대 용서받지 못할 거야. 내가 잘못해서 그래.”“내가 예전에 너한테 경고했잖아.”한층 더 차가워진 봄바람이 불었다.진유겸은 몸을 일으키면서 얘기했다.“지금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어. 지훈아. 난 운성을 떠날 거야. 왕자현과 마주치면 또 피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거니까 말이야.”진유겸의 말을 들어보면 왕자현은 여전히 운성에 있는 것 같았다.최희연은 왕자현이 아이스랜드에 있다고 했는데...석지훈은 진유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진유겸을 석지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얘기했다.“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도 꽤 오래됐지? 서로 죽고 죽이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가 드디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는데... 너라도 성공해서 다행이다. 나는... 완전히 실패야. 네 말을 잘 들을 걸 그랬어.”석지훈은 몸을 약간 틀어 진유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얘기했다.“내가 말릴 때 넌 한 번도 듣지 않았어. 사실 우리는 많이 닮았어. 하지만 시작점이 달랐지. 나는 항상 내가 석씨 가
나는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문자를 보냈다.연시혁은 바로 답장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별장으로 가고 있을 때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어디야.”나는 밤바람을 맞으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송이연의 일로 전화를 건 것이 분명했다.나는 문자 속에서 똑똑히 얘기했다.송이연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고 말이다.“지금 운성에 도착했어.”그렇게 말하는 연시혁의 목소리는 약간 젖어있는 것 같았다.“수아야, 이제 어떡해?”하지만 그렇게 물어도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없었다.“오빠, 그냥 옆에 같이 있어줘.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부담스러워 할 거야.”연시혁의 울먹임을 들으면서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수아야, 나 죽을 것 같아.”차는 바닷가에 멈춰 섰다. 나는 연시혁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절벽 위의 호화로운 별장이 눈에 들어왔다.석지훈이 아침에 별장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이 별장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서늘한 밤바람을 맞으며, 나는 별장 근처로 걸어갔다.300미터쯤 남았을 때, 나는 별장의 수영장에 두 남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은 수영장 끝에 앉아있었고 한 명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서 있었다.서 있는 사람은 바로 석지훈이었다.나는 단번에 그의 뒷모습을 알아보았다.하지만 앉아있는 건...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돌이킬 수 없어. 모든 걸 버리고 여길 떠날 거야.”진유겸의 목소리였다.“희연 씨는 네가 준 것들에 대해 흥미가 없을걸?”진유겸이 최희연에게 뭘 준다고?나는 갑자기 진유겸이 나한테 준 서류가 생각났다.“희연이가 원하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물었다.“상처는 좀 어때?”“왕자현이 미친개처럼 내 뒤를 쫓고 있어. 상처는 장난 아니지. 그래도 왕자현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야.”왕자현이 진유겸에게 복수하고 있는 건가?“왕자현은 보기엔 부드러워도 사실을 아
다소 친하지 않은 오빠 말이다.예지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좋은 남자가 있다면 소개해줘요. 난 결혼하고 싶어요.”나는 웃으면서 얘기했다.“이제 나이가 몇이라고 그래요.”“빨리 결혼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예지한은 그저 담현아보다 한 살 정도 많아 보였다.나는 일부러 예지한을 떠보려 말했다.“피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맞아요. 그러니까 얼른 남자친구를 찾아야겠어요.”예지한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면서 물었다.“소개해줄 사람 있어요?”“소개해줄 사람이 있을 리가 없죠.”예지한이 실망한 듯 얘기했다.“그렇게 어려워요?”그리고 묵묵히 계속 일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있는 최희연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왜 그래?”“아무것도 아니야. 자현 씨가 아이스랜드로 갔어.”왕자현이 갑자기 아이스랜드로 갔다니?지금 아이스랜드로 가는 게 최희연에게 얼마나 큰 상처인지 알 텐데...최희연은 왕자현이 자기를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다.나는 애써 담담하게 물었다.“급한 일이 있으셨나 봐?”“잘 모르겠어. 자세히 얘기하지는 않아서. 아마 처리할 일이 있는 모양이야. 어젯밤에 떠났는데 여태까지 아무 소식도 없어.”“쓸데없는 생각 하지마.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최희연은 내 말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쓸데없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자현 씨가 떠나니까 마음이 복잡하고 기분이 이상해.”담현아가 물었다.“왜 복잡해요?”“요즘 꿈에서 자꾸만 진유경이 나와.”“...”카페에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원래는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엄마, 무슨 일이에요?”“서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게 생겼어. 좀 도와줄...”나는 어머니의 말을 끊고 얘기했다.“그 일에 대해서 이미 들었어요. 민수 오빠가 연락했거든요. 아까 사람을 시켜서 알아보게 했는데 서오를 노리고 있는 건 현성 씨와 유희진 검사예요. 한 명
유희진이 고현성의 약혼녀라니.나는 어젯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리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시윤을 때리고 있었다.그럼 그때 이미 날 알아봤을 텐데...게다가 그 여자는 그때도 고현성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 여자는 악의 하나 없이 이 사건을 받겠다고 했다.하지만 유희진은 유씨 가문 사람 같지 않았다.오히려 유서정보다 더욱 고급스러웠다.하지만 유서정이 더 예쁘긴 했다.유희진에게서는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흘러내렸다.그런 카리스마는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아마 오랜 시간 검사를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담현아가 설명했다.“고현성 씨는 정신을 차려보니 약혼녀가 생긴 상황이었어요. 그러니 너무 뭐라고 하지 마요.”나는 담현아를 보면서 물었다.“무슨 뜻이야?”“고현성 씨는 이 결혼을 수긍하지 않았지만 또 혼약을 깨트리지도 않았어요. 그냥 유희진 검사를 방패막이로 쓰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럼 유희진 검사는 어떻게 생각하는데?”“아무렇지 않아 하더라고요. 그 사람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그날 밤 골목에서 한시윤을 때린 이유는 분명 고현성 씨 때문인데, 고현성 씨 앞에서는 차갑게 구니까 말이에요.”“차갑게 군다고?”“아저씨가 알려줬는데 두 사람은 거의 연락하지 않는대요. 오늘도 서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결국 서오의 일로 엮인 거래요.”유희진이 서오를 주시하고 있는 건 분명 고현성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유희진이 어떻게 우리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신비스러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알다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유희진은 본인 신념이 뚜렷한 사람이에요. 유서경처럼 멍청한 사람이 아니라요.”“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가자. 일단 희연이를 만나러 가자. 아마 카페에 있을 거야. 아마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걸?”최희연을 떠올리면 저번의 일이 생각났다.마음속 상처가 잘 치유됐을련지. 걱정되었다.그 사건이 일어난 후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나는 담현아와
어머니한테는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 들키면 어머니는 마음 아파할 게 분명하니까. 나를 탓하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 앓으시겠지.내 머릿속에서 문득 한 단어가 스쳐 갔다.“경찰서에 간 거야?”“선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가 본 거예요. 선배의 사건이 엄청 어려운가 봐요. 무죄판결이 나기 어려울 정도래요.”“유희진 씨는 뭐라고 하셨어?”“아직 조사 중이래요.”담현아는 말을 마친 후 나한테 또 물었다.“수아 언니, 처음은 피가 나요?”“갑자기 그건 왜?”“어젯밤에... 그런데 피가 안 났어요.”“피가 안 날 수도 있어.”아니, 잠깐만담현아와 고정재가...?나는 속으로 기뻐했다.“그럼 다행이네요. 어제 피가 안 나서 아저씨가 저를 엄청 위로해줬거든요. 이것 때문에 기분도 안 좋았어요.”나는 고정재가 이런 일로 다른 사람을 위로해주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마치 모든 사람들이 나한테 사랑을 속삭이는 석지훈을 상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남자는 참 신기한 동물이다. 평소에는 차갑고 도도해 보여도 운명적인 그 상대를 만나면 입안의 사탕처럼 달달하게 구니까 말이다.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좋네.”담현아가 의아해하면서 물었다.“뭐가요?”“우리 모두 사랑받고 있잖아.”전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던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적어도 지금은 사랑받고 있으니까 말이다.그리고 건강하고 귀여운 아들과 딸도 있고.“나는 인생이 그냥 다 쉬웠어요.”담현아가 만족한 듯 얘기했다.“사업도 문제없었고 모든 일에 걸림돌이 없었어요. 만난 남자도... 너무 좋은 사람이고요. 태어나서부터 유복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부럽네.”“하하,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이런 삶에 감사하다는 거지. 이제 경찰서로 갈까요?”“지금 경찰서로 가면 내 어머니랑 마주치는 거 아니야?”“그러면 먼저 어머님께 연락해봐요.”내가 어머니한테 연락하려는데 조민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서오가 죄를 지어서 경찰서에 있다고 말이다. “까다로운 일이야.”난 아무것도 모르는
“그저 물어본 거예요. 거기 외전에 썼잖아요. 날 예쁘다고 생각한다고. 그래서 오빠의 의견이 궁금했어요.”나는 석지훈의 반응이 궁금했다.석지훈은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누워서 얘기했다.“이제 좀 졸리네. 너도 얼른 자. 내일 다시 얘기하자.”“...”석지훈이 새벽에 먼저 일어났다. 나는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다. 눈앞에서는 두 의사가 석지훈을 치료해주고 있었다.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석지훈의 상처를 확인했다.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치료를 받은 후 석지훈은 나더러 물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송이연이 아래층에 있었기에 석지훈은 아래층에 내려가려 하지 않았다.하긴 익숙하지 않으니 그럴 법도 하다.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 한 잔을 따랐다. 이때 마침 원태웅이 전화 와서 억울한 목소리로 얘기했다.“내 트위터 계정, 결국 사라졌어!”난 의아해하면서 물었다.“해결한 거 아니었어요?”“형이 아침에 트위터를 다운 받았나봐. 그리고 내 계정이 있는 걸 보고 또 윤승민한테 전화를 걸었다. 윤승민도 놀라서 얼른 처리하겠다고 했지. 그래서 결국... 심지어 윤승민은 근무 태도 불량으로 월급까지 깎였다. 하지만 공식계정은 아직 남아있어!”“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그러게. 내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생각은 했지만 공식계정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나 봐.”석지훈은 그저 원태웅에게 겁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었나?나는 윤승민에게 문자를 보내 물었다. 그러자 윤승민이 대답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아직 공식계정이 있다는 걸 발견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대감 트위터만 먼저 삭제했습니다.]윤승민이 일부러 공식계정을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고마워요, 윤 비서님.]그리고 생각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깎인 월급은 함승윤 씨한테 얘기해서 더 얹어드리라고 할게요. 그리고 3개월 치 보너스도 드릴게요.]나는 기쁜 마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가 석지훈에게 물 한 잔을 건네주었다.그리고 물을 마시는 석지훈의 모습을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