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성이 샤워 가운을 당기는 순간 나는 얼굴이 파랗게 질리며 더욱 화가 났다.나는 서둘러 이불을 집어 내 몸에 감고 고현성에게 매섭게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의 노골적인 눈빛이 내 몸에 향하는 걸 보았다.나는 숨을 크게 내쉬면서 죽은 듯이 누워있는데 그 남자는 여전히 침대 반대편에 가만히 있었고 나는 그가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특히 지금은 내가 고양이 앞에 선 쥐가 된 기분이었다.나는 감히 눈을 감을 수가 없었고 손으로 이불 모서리를 단단히 잡았다. 겁에 질린 내 표정을 보고 고현성은 차가운 코웃음을 치며 경멸하듯 말했다.“한심하긴.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하겠어?”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고현성이 갑자기 내 몸을 덮쳐왔고 나는 애써 침착한 척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내려가요.”허, 뻔뻔한 남자!지금 내 마음은 그에게 향해 있지 않았고 그를 사랑하지도 않았다.게다가 이런 상황은 한번 일어나면 두 번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운성을 떠나지 않는 한 그는 늘 갖은 방법을 동원해 나를 침대로 끌어들일 것이다.나는 붉어진 눈으로 말했다.“싫어요.”나는 몸부림쳤고 고현성은 어두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손을 뻗는 순간 내 몸에서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미안, 참을 수가 없었어.”나는 말없이 가운을 주워 입었고 방은 유난히 조용했다.고현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고 나는 곧 통유리창 너머로 그가 수영장으로 건너가는 모습을 보았다.이 방은 마침 별장 대문의 풍경을 담고 있었는데 그는 수영장 라운지에 앉아 옆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고 몇 모금 피우고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담배를 껐다.유난히 작아 보이는 그의 등이 어젯밤과 겹쳐 보였다.나는 다시 뒤돌아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눈을 감고 뒤척이다가 갑자기 비서가 나에게 걸었던 전화가 생각났고 그는 고현성이 많은 돈을 써서 검색어를 삭제했다고 말했다. 사실 나를 도와줄 필요가 없는데 그는 여전히 그렇게 했다.게다가 갖은 수단을 써서 연씨 가문을 상대한 것
“아, 뒷마당에 어떤 물고기를 키워요?”지루한 질문이었지만 고현성과 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고 다행히 그가 참을성 있게 내 말에 대꾸했다.“다 조기야.”조기...임지혜를 위해서 키우는 건가?여기 임지혜를 자주 데려오나?나는 실망한 내 모습을 눈치채지 못하고 짧게 대꾸하며 무심하게 말했다.“임지혜 씨가 전에 굴비 좋아한다고 나한테 말한 적 있어요.”고양이를 쓰다듬던 고현성의 손이 멈췄고 그는 덤덤한 목소리로 설명했다.“여기 데려온 적 없어. 걔를 위해 키우는 것도 아니고.”나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그럼 누구를 위해 키우는 거예요?”고현성의 눈빛이 나를 향했고 나는 장난스럽게 웃었다.“나를 위한 거라고 하지 마요. 난 굴비 싫어해요.”고현성은 당황했다.“뭐?”나는 태연하게 말했다.“난 굴비 싫어해요. 비린내가 심하고 가시도 많은데 임지혜 씨 말로는 당신이 좋아한다길래 결혼하고 당신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매번 요리했죠. 비록 결혼생활 동안 당신은 내가 한 요리를 한 번도 먹지 않았지만.”3년간의 결혼 생활에 난 모든 걸 바쳐 헌신했고 그때의 나는 참 한심했다.고현성은 중얼거렸다.“그랬구나...”나는 의아하게 물었다.“뭐라고요?”고현성은 고개를 저으며 나를 보면서 말했다.“일찍 자. 내일 내려가자. 난 경찰서에 다은이 데리러 가야 해.”짧게 대꾸한 나는 창문을 닫으려고 손을 뻗었다.요즘 불면증이 심해서 눈을 뜬 채 주황빛으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봤고 밝은 빛이 오동나무에 드리우며 얼룩져갔다. 그리고 고현성이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러 다시 수영장으로 가는 모습도 보였다.고현성은 고양이에게 먹이를 준 후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나는 급히 눈을 감고 자는 척하다가 멀어지는 발소리에 눈을 떴고 이윽고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옷을 챙겨입고 나가자 고현성이 내 얼굴을 보며 물었다.“화장할래? 여기 화장품 있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고마워요.”고현성의 곁에 내가 연적으로 생각했던 여자는 딱 한 명만 나
안전벨트를 매주던 고현성의 움직임이 멈췄고 나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비서는 한숨을 쉬며 설명해 주었다.“진서준 씨가 어젯밤 호수에 빠졌는데 제때 구하지 못했어요. 진씨 가문에서 지금 장례식을 준비 중이고 대표님을 초대했어요.”나는 중얼거리며 물었다.“장례식이 언제죠?”“오늘이요.”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이렇게 급하게요?”“어쨌든 진씨 가문으로 돌아온 서자이고 외부 사람들은 아직 그분의 존재를 모르고 있으니 진씨 가문에서도 조용히 진행하려는...”나는 그의 말을 가로채며 지시했다.“강해온 씨, 지금 당장 진씨 가문과 상의해서 진서준 씨를 우리에게 넘겨준다면 기꺼이 1년 동안 진씨 가문과 협업하겠다고 전해요.”비서는 재빨리 대답했다.“네.”전화를 끊고 나서도 믿지 못하고 있는데 고현성이 내 볼을 살살 건드리며 말했다.“진서준은 진씨 가문의 두 아들과는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어. 눈빛이 맑고 사업에 대한 욕심도 별로 없지. 전에 왜 진씨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마음속에 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나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그 사람이 나는 아니에요.”만약 최희연이 진서준이 죽었다는 걸 알게 되면 무너지지 않을까?“알아, 나한테 미래에 관해 이야기할 때 너무 행복해했고 그 여자와 꼭 결혼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했어. 그 사람한테 설득당해서 진씨 가문 중에서 그 사람을 골랐고 계약을 따내지 못하더라도 진씨 가문과 협업해서 보상해 줄 생각이었어.”잠시 침묵이 흐른 뒤 고현성은 한숨을 내쉬었다.“네 마음도 얻어서 너도 연씨 가문 계약으로 도와주려 했으니 앞으로 순탄한 길을 걸을 텐데 인생이란 게 참 허무해. 결국...”고현성은 말을 이어가지 않았고 문득 최희연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사람은... 번듯한 겉모습 안에 산뜻한 바람과 밝은 달 같은 영혼이 있어. 그 사람의 연약함, 감수성, 자존심과 사랑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의지를 나는 잘 알고 있어.”최희연을 위해 기꺼이 목
차 안에서 주체할 수 없이 울었던 나는 눈물을 참으며 차에서 내렸고 고현성의 부축을 받으며 연씨 가문에 들어섰다.한가운데에는 진서준의 수정관이 있었고 그 안에서 진서준은 평온하게 누워 있었는데 최희연이 곁을 지키고 있었다.하지만 예상외로 최희연은 울지 않고 그저 눈가가 붉어진 채 그의 곁을 지키다가 나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고마워.”그런 최희연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나는 최희연과 오랫동안 알고 지냈는데 고등학교 시절부터 자매처럼 친하게 지냈고 가족보다 더 가까운 존재이자 이 세상에서 유일한 내 친구였다.우리는 서로를 잘 알았고 그녀는 9년 전 남자에 대한 내 사랑도 이해해 주었기 때문에 3개월 전에 특별히 묻기까지 했다.“수아야, 너 뭔가 슬퍼 보이는데?”그녀는 나를 껴안으며 울먹였다.“자꾸 이유 없이 울잖아. 이미 3년 전에 그 남자는 네 사람이 됐는데.”당시 최희연은 아직 진서준을 찾지 못했고 나는 남자를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사랑까지 얻지는 못했다.그녀는 나를 이해해 줬고 나도 당연히 그녀를 잘 알았다.진서준을 향한 그녀의 사랑은 그 당시 나의 사랑 못지않았다.내가 다가가서 최희연을 살며시 안아주자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녀는 내 품에서 소리 없이 흐느끼다가 목이 메어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사라졌어... 이젠 진짜 그 사람이 없어. 수아야, 난 왜 이렇게 불행한 걸까? 힘들게... 힘들게 찾은 지 3개월도 안 됐는데 이대로 사라졌어. 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마침 근처에 있던 고현성이 우리가 껴안고 있는 모습을 보고 눈치껏 돌아섰고 나는 최희연의 어깨를 토닥여주면서 슬픔에 잠긴 그녀의 말을 들었다.“내 남은 인생에 그가 없어.”최희연은 이제 조금의 희망도 갖지 못했다.나는 한참을 최희연 곁에 있다가 나가서 비서에게 지시했다.“강해온 씨, 나 대신 사람들에게 알려요. 연씨 가문 최희연의 이름으로 운성에서 가장 권위 있는 사람들을 장례식에 초대해요. 진씨 가문에서 치러주지 않는 장례
나는 서둘러 방을 나섰고 어느새 별장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왔다.모두 검은색 정장이나 검은색 드레스를 맞춰 입고 고인에 대한 예우를 다하고 있었다.내가 찾아갔을 때 최희연은 뒷마당에 있는 그네에 앉아 있었고 단정한 검은 치마에 머리를 질끈 올려 묶은 채 머리에는 흰색 리본을 달고 있었는데 지금 그녀는 막 피어난 나무 앞 복숭아꽃을 바라보고 있었다.산들바람이 불어오면서 꽃잎이 그녀의 몸에 떨어졌는데 그 색이 너무 선명해서 눈이 부셨다.그녀의 몸에 붙은 꽃잎을 떼어주러 다가간 나는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몰랐고 어떤 말도 부질없는 것 같았다. 평생 사랑했던 남자가 관에 누워있다.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최희연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장례는 네가 직접 치러야 해. 무엇보다 제대로 된 장례식을 치르게 해야지. 최희연, 진씨 가문에게 그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보여줘.”최희연은 의아해했다.“진씨 가문?”나는 진서준이 진씨 가문의 사생아라는 사실을 하나하나 설명했고 이 말을 듣자마자 최희연은 바로 추측했다.“서준이는 절대 사고로 호수에 빠져 죽은 게 아니야. 내가 조심스러운 사람이란 걸 누구보다 잘 알아. 절대 자기를 위험한 상황에 두지 않아. 너 가족 음모론이라고 알아?”최희연이 말하는 가족 음모론을 연씨 가문 외동딸인 나는 경험해 보지 못했지만 집안 자식들이 재산 경쟁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물었다.“진씨 가문 사람들을 의심하는 거야?”최희연은 눈이 붉어진 채 극도로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난 지금 누구든 의심스러워. 절대 사고로 죽을 사람이 아닌데 증거를 찾을 수가 없어. 일단 장례식부터 마치고 반드시 진실을 밝혀낼 거야.”나는 최희연의 어깨를 끌어안아 진정시키며 말했다.“그래, 네가 꼭 진실을 알아내.”최희연은 눈을 감았다.“그 사람 보러 갈래.”나는 떠나는 최희연을 바라보았다. 가녀린 그녀의 등이 비틀거렸다. 아름다운 그녀는 줄곧 순수한 사랑을 했고 전에 진
어젯밤 진서준은 분명 연씨 가문의 주목을 받았고 그 전에 고현성도 진서준을 도와줬으니 다른 진씨 가문 사람들 눈에 그는 고씨, 연씨 두 집안의 힘을 업은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이에 진씨 가문에서 누군가 진서준에게 살기를 품었을 거라는 대담한 짐작을 했지만 그건 내 추측일 뿐 증거는 없었다.나는 비서에게 진씨 가문 사람들을 다 조사한 뒤 시간이 지난 후 최희연에게 넘기라고 말했고 잠시 고민하다가 덧붙여 지시했다.“앞으로 진희연은 나와 똑같아요. 희연이가 도와달라고 하면 최선을 다해 도와주세요. 강해온 씨, 저한테는 특히 중요한 가족이에요.”“네, 대표님.”비서는 끝없이 밀려드는 조문객을 맞이하러 나갔고 이 사람들을 보며 몇 달 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다만 내가 관속에 누워있었고 사람들은 그런 나를 조문하러 왔었다.고현성이 방금 말했다.“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몰라. 소중히 여겨.”나한테 뭘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한숨을 쉬고 방으로 돌아갔더니 고현성은 더 이상 없었지만 침대 옆에 작은 쪽지가 남아 있었다.“일이 생겼어. 어머니가 아주 편찮으시대. 이따가 비행기 타고 금운으로 가.”나는 쪽지를 옆에 두고 신발을 벗은 뒤 침대로 올라갔다.어제 밤새도록 잠을 설친 나는 베개를 베자마자 잠이 들었다.다시 일어나 보니 밤이 되었고 배가 고파서 아플 지경인 나는 일어나서 옷을 챙겨입고 내려갔다. 거실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진서준을 추모하는 하얀 화환과 추도사가 가득했다.최희연은 고개를 숙인 채 관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그녀의 대각선 맞은편에는 차가운 얼굴을 가진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유난히 잘 생겼고 반듯한 검은 정장을 입어 더욱 훤칠해 보이는 데다 온몸에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었다. 손목에 비싼 롤렉스를 차고 있는 걸 보아 신분이 높은 사람임이 분명했다.나는 중얼거리듯 물었다.“누구지?”그 남자도 나를 보고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돌아 홀을 나섰다. 그가 이곳을 나갈 때까지 내 시선은 줄곧 그를 쫓았고 그의 발걸음은
“진유겸이요.”‘진씨 집안사람인가? 진씨 집안에 언제 이런 사람이 있었지?’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진서준의 묘비를 바라봤다. 그의 흑백 사진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얼마 전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저랑 희연이 사이에는 너무 큰 간극이 있어요. 이런 제가 희연이 발목을 잡을 수는 없어요. 그래서 잠깐 떠난 거예요. 안정된 다음 다시 찾아가고 싶어요. 희연이가 계속 기다려준다면요.”그때 진서준은 진씨 집안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다. 한창 프로젝트에 실패해서 상황이 안 좋을 때 말이다.하지만 그는 계획이 있었다. 노력만 하면 최희연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장례식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최희연도 생각보다 덤덤해 보였다. 하지만 관뚜껑을 닫는 순간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손은 있는 힘껏 묘비를 붙잡았다.나는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위로해 주려고 했다.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나 이제 어떡해? 서준이를 영원히 못 보는 거야?”그녀의 모습을 보고 나도 눈물을 참지 못했다.“널 사랑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어. 너희들 사이의 사랑도 계속 존재해, 알지?”“근데 서준 씨를 못 보면 무슨 소용이야.”맞는 말이다. 두 사람은 이제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나는 말을 잃었다. 최희연은 장례식이 끝난 다음에도 이곳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고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최희연은 여전히 묘비 앞에 앉아 있었다. 비서 강해온은 사람들을 마중하고 나서 패딩을 가져다줬다.3월의 저녁은 아직 추웠다. 최희연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강해온은 그녀를 부축하면서 말했다.“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으셔서 버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최희연 씨는 제가 병원에 보내드리겠습니다. 대표님께는 다른 기사를 불러드리겠습니다.”“아니에요. 나도 같이 병원에 가요.”“대표님 이만 쉬셔야 할 텐데요. 최희연 씨한테 혼자 있는 시간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그냥... 금방 장례식에 다녀오니 기분이 이상하네.”나는 결국 건강 상태를 숨기기로 했다. 조민수는 이제야 한시름 놓았다.“괜찮으면 됐어.”“언니는? 내가 쉬는 걸 방해한 거 아니지?”“아니야, 친구랑 놀러 나갔어. 근데 고현성이 얼마 전 연락이 왔더라? 연구팀을 보낸다고 하는데 다들 암 치료 전문가래. 너 그때까지 잘 버티고 있어야 한다?”나는 잠깐 멈칫했다. 고현성이 아직 나에게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이다.‘예전의 나는 기억하는 거야, 못 하는 거야.’“알았어. 조심할게.”“그래, 난 할 일이 있어서 먼저 끊을게.”조민수가 전화를 끊었다. 나는 멍하니 침대에 앉아서 고현성을 떠올렸다.마음은 아직도 갈팡질팡했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선택하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너무 어려운 문제가 아니던가? 나는 자신이 누구를 좋아하는지 몰랐다. 그저 묘하게 고현성에게 이끌린다는 것만 알았다. 물론 고정재와 마주친 순간 그런 이끌림도 망각하게 되지만 말이다.나는 한숨을 쉬며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만 핸드폰을 내려놓고 자려고 했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또다시 고현성이 떠올랐다.고현성은 나에게 너무 다정했다. 모든 힘을 다해 나를 도우려고 하는 것도 보였다. 그날 나를 위해 억지로 참아내지도 않았는가?하지만 고정재는... 내 9년간의 집념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상 우리는 별로 엮인 적이 없다. 정적 나와 끈질기게 엮긴 건 고현성이었다.지금도 내 머릿속에는 온통 고현성뿐이다. 하필이면 이때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다소 찝찝한 기분으로 물었다.“안 잤어요? 왜 갑자기 전화해요?”“보고 싶어서.”그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다. 다정한 말도 입만 열면 나왔다.“아... 네.”나는 심장이 크게 한 번 두근댔다. 하지만 들키기 싫어서 애써 덤덤하게 대답했다.“장례식은 잘 끝났어?”“네, 아침에요.”“희연 씨는 어때?”“많이 힘들어해요. 괜찮아지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최희연은 당분간 진서준을 잊지 못
나는 몇몇 의사들과 함께 별장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렸지만 석지훈 일행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한민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통화 중이었다.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불안한 마음에 단톡방에서 예유진의 카톡을 추가하고 음성 통화를 걸었다.석지훈에 대해 묻자 예유진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그는 통화를 끊기 전에 말했다.“3분만 기다려요.”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지만 그 3분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나는 방안을 초조하게 서성거렸다.3분도 채 되지 않아 예유진에게서 전화가 왔다.“형과 민수는 별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습격을 당했어요. 민수는 중상을 입고 지금 중환자실에 있고 형은 아직까지 행방불명이에요.”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행방불명이라니요?”“우리 사람들 모두 형을 못 찾았대요.”나는 곧바로 함승윤에게 연락해 전 세계 위치 추적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그러고는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사방이 피투성이였지만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함승윤에게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시간이 흐를수록 그에 대한 걱정은 커져만 갔다. 나는 마치 중심을 잃은 사람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함승윤이 핀란드에 도착했을 때, 나는 별장 입구에 앉아 있었다. 그때 핀란드에는 이미 차가운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아직 석지훈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그에게 병원에 같이 가자고 했다.나는 마음속으로 매우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우선 병원에 가서 한민수를 만나야 했다.한민수는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민영이 병원에 도착했지만 나를 보고 눈을 흘기더니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그 후 의사에게 한민수의 상태를 물어본 함승윤이 내 옆으로 와서 말했다.“한민수 씨의 상태는 매우 심각해서 오늘은 의식을 되찾기 어려울 것 같답니다. 가주님께서는 계속 여기서 기다리실 건가요?”“기다릴 거예요. 깨어날 때까지.”석지훈의 행방을 알고 있는 건 한민수뿐이었다. 나는 참을성 있
한민영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나는 단단히 제압당한 채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바로 그때, 별장 주변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났다.처음에는 그들 편인 줄 알았지만 의료 가방을 든 사람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창백해지는 것을 눈치챘다. 아마 그들은 별장 주변에 경호원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었다.순간 내 머리에 총구가 겨눠졌다.“비켜! 우리를 보내 줘!”한민영은 다가와 냉소적으로 비웃으며 말했다.“멍청하긴.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고 왔냐? 여긴 석지훈의 본거지다. 과연 석지훈이 아무 대비를 안 해놨을 것 같아? 너희가 어느 세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어리석은 걸 보면 대단한 조직은 아닌 것 같네.”나는 등 뒤에 있던 사람이 완전히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리고 침착하게 영어로 그를 설득했다.“날 놔줘. 그러면 널 보내 줄게. 걱정 마. 너와 네 동료의 목숨에는 관심 없어.”그는 이미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나를 풀어 주었다. 나는 빠르게 몇 걸음 달려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곁으로 몸을 피했다.그때 한민영이 차갑게 명령했다.“저놈들 처리해.”처리...그 말은 죽이라는 뜻이었다.나는 재빨리 막아섰다.“보내줘.”그녀는 충격받은 듯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너도 저놈들처럼 멍청한 거야? 네 목숨을 노린 놈들을 살려 준다고?”그녀는 언제나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나는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너보다야 덜 멍청하지.”“내가 보내 준다고 했으니 보내 줘야지. 다음번엔 쉽게 봐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원래 있던 의사들은?”그들은 분명 한민수가 보낸 의사들을 납치한 뒤 신분을 위장했을 것이다. 예상대로 저 뒤쪽에 서 있던 검은색 승용차를 가리키더니 재빨리 도망쳤다.나는 곧바로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에게 의사들을 구출하라고 지시했다.경호원 몇 명이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한민영은 검은 가죽 라이더 재킷을 걸친 채 비웃듯 말
하지만 그는 한 가지 맞는 말을 했다. 고현성은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든 그것은 그들의 일이었다.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원태웅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다만 답답한 마음에 석지훈에 대한 걱정까지 겹쳐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석지훈이 돌아오지 않으니, 나도 편히 잠들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승철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현성이 갑자기 바보가 됐다.]나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솔직히 걱정되고 죄책감도 들었지만 이제 그는 나와 무관한 사람이었다.나는 그를 신경 쓸 수 없었다.내가 조금이라도 그를 신경 쓰는 순간, 석지훈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과 다름없었다.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무관심, 모른 척하는 것뿐이었다.내가 답장을 보내지 않자 고승철이 다시 메시지를 보내왔다.[수아야, 네 곁에 지금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우리 현성이를 친구처럼 대해 줬으면 한다. 기회가 되면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해 줘라.]그는 내가 고현성에게 온기를 주길 바랐다.하지만 고현성은 오직 수아라는 이름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할수록 그는 나에게 더욱 의지하게 될 것이다.우리 사이의 선이 어디까지인지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벼랑 끝에 서 있는 나에게 도대체 어떤 선택이 옳은 걸까?그렇다고 고현성에게 너무 잔인하게 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석지훈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나는 여전히 고승철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도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내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민수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그때 에르크의 하늘은 이미 밝아오고 있었고 아침 햇살이 구름을 뚫고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날씨 예보에서는 오늘 눈이 올 거라고 했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눈이 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나는 창가에 서서 물었다.“일은 다 처리했어요?”“네, 근데 지훈이가 조금 다쳤어요. 잠시 후에 의사가 집으
핀란드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도로는 여전히 미끄러웠다. 차가 급하게 멈추며 흔들렸지만 담현아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그러자 운전하던 예유진이 갑자기 물었다.“방금 예하나라고 했어요?”나는 원태웅이 예전에 예유진이 자신의 여동생을 좋아했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의 여동생이 예씨 가문의 실권자라고도 했다. 하지만 실권자는 예지한이었고 고양이 카페의 직원인 예하나가 아니었다.게다가 예하나는 자신이 제당 출신이라고 했다.이렇게 우연이 겹칠 수 있을까?“네, 예하나.”그는 깊게 숨을 내쉰 뒤 다시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형수님, 그분은 잘 지내고 있나요?”그는 예하나를 예지한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나는 그에게 뭔가를 더 물어보려 했지만 담현아 갑자기 자신의 핸드폰을 내게 건넸다.화면에는 짧은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예지한의 어릴 적 이름이 하나예요. 고양이 카페의 그 사람, 아마 예지한 일 거예요.”나는 속으로 놀랐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꽤나 여유롭게 살고 있어요.”내 말을 듣고 예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그는 나를 에르크 저택 앞까지 데려다준 뒤 예하나의 연락처를 물었다.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하나 씨는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아요. 전자기기를 일절 쓰지 않더군요.”그는 순간 멍해진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니 아무리 찾아도 못 찾았던 거네요.”그는 담현아와 함께 떠났고 나는 한동안 저택 문 앞에 서 있다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그곳에서 자고 있던 저먼 셰퍼드 두 마리가 갑자기 놀라 깨더니 나를 향해 낮게 짖었다. 그러나 곧 나를 알아보고는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한밤중이라 조금 무서웠지만 녀석들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나 보고 싶었어?”녀석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는지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덮쳐 바닥에 넘어뜨렸다. 나는 한참을 몸부림친 끝에 겨우 일어났다.다시 쓰러
“급한 일이에요. 얼른 넘겨줘요.”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서둘러 핸드폰을 석지훈에게 건넸다.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차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먼저 유진이랑 함께 에르크로 돌아가 있어.”곧이어 뒤따라오던 차도 멈춰 섰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렸다.뒤차로 향하려던 순간 석지훈이 나를 불렀다.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아가.”나는 허리를 숙여 차 안의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엔 걱정이 가득했다.“무슨 일이에요?”그는 미안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집까지 데려다주지 못해서.”집...에르크에 있는 그곳.석지훈에게는 그곳이 진짜 집이었다.운성시에 정착한 것이 어쩌면 그에게는 큰 희생이었을지도 모른다.예유진이 나를 에르크로 데려가는 동안, 나는 줄곧 말이 없었다. 어쩌면 이곳에서 정착해야 되는 게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더 이상 그와 떨어져 지내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다.하지만 국내에는 내가 결코 놓을 수 없는 석씨 가문이 있었다.고정재가 말했듯, 나는 그것을 반드시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더 이상 과거처럼 무관심한 태도로 있다가 모든 걸 빼앗길 수는 없었다.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를 들은 담현아가 물었다.“언니, 뭔 일 있어요?”“아니, 그냥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나는 깊은 고민에 빠진 채 예유진에게 물었다.“유진 씨, 둘째 오빠랑 민수 씨가 떠난 이유가 뭐예요? 혹시 위험한 일이에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자세한 건 저도 말해줄 수 없어요. 아직 형수님이랑 결혼한 사이도 아니다 보니 사업적으로나 사적으로도 공유할 수 없는 일이에요.”나는 늘 우리가 부부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왔다. 자연스럽게 함께했고 이미 충분히 깊은 관계라고 여겼다.당연히 법적으로 그의 아내가 된다면 더욱 행복할 것이다.하지만 지금,
석지훈이 곧 전 세계였다.그는 다른 이들의 전부이기도 했다.그리고 나에게도, 그는 전부였다.“그래요. 오빠가 있으면 그게 곧 전 세계죠.”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석지훈은 슬며시 내 손을 잡고 한민수 일행을 뒤따라갔다.앞서가던 한민수는 계속 담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아마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겠지만 그 역시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이었다.마치 한씨 가문에서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알고 물러난 것처럼 이번에도 과감히 포기했다.예유진도 마찬가지였다.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문의 혈통이라는 거대한 산에 짓눌려 있었다.마치 과거에 내 아버지에게 발각된 석지훈처럼...아버지는 갖은 술수를 동원해 석지훈의 손에서 석씨 가문을 빼앗아 내게 넘겼다.몇십 년 동안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었고 늘 곁에 두고 가르친 사람이었지만 결국엔 나라는 낯선 존재가 더 중요했다.정해진 현실 속에서 운명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노력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한민수는 자신이 너무 오래 담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예유진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유진아, 넌 어떤 순간에 여자한테 가장 설레?”그는 걸음을 멈추고 무언가를 떠올리며 다소 아련하게 말했다.“내 셔츠를 입고 있을 때.”한민수는 흥미를 느낀 듯 되물었다.“사모님도 네 셔츠를 입은 적 있어?”그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나는 곁눈질로 석지훈을 바라보았더니 그의 귓불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문득, 내가 그의 셔츠를 입고 발코니에 서 있던 게 떠올랐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마 그때 그의 마음은 크게 요동쳤을 것이다. 그저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그 생각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새어 나왔다.한민수는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향해 물었다.“왜 혼자 웃어요?”나는 입술을 오므리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재밌는 거 있으면 좀 공유해줘요.”나는 웃기만 했고 그는 시시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공항 밖으로 나와 그들은 한차에 탔고 나는
“지훈 오빠도 핀란드에 있어요. 언니도 나랑 같이 가요.”담현아의 제안은 꽤나 솔깃했다.하지만 아직 귀국하지 않은 석윤민이 마음에 걸렸다.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석지훈이 너무도 그리웠기 때문이다.그와 떨어진 지 고작 이틀이었지만 그 시간이 유난히 길게만 느껴졌다.우리는 많은 사람을 데리고 가지 않기로 했다. 공항에 도착하면 한민수와 예유진이 마중을 나올 예정이었기에 우리 둘만 비행기를 타고 핀란드로 향하기로 했다.나는 한참을 설득한 끝에 경호원들을 돌려보냈다. 어쩌면 그들에게도 짧은 휴가를 주는 셈이었다.우리는 오후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비행기를 타기 전, 담현아는 고정재에게 짧은 문자를 남겼다.[저 당분간 핀란드에 다녀올게요.]나는 그녀의 핸드폰 화면을 보며 물었다.“이게 다야?”그러자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뭐가 더 있어야 해요?”나는 그녀의 핸드폰을 받아 들고 잠시 생각한 후 타자하기 시작했다.[일 때문에 가는 거예요. 도착하면 전화할게요. 그때쯤이면 정재 씨도 막 일어났겠죠. 잘 자요, 정재 씨.”담현아는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황급히 말했다.“나, 한 번도 그 사람을 정재 씨라고 불러본 적 없어요!”나는 웃으며 핸드폰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잘 자요, 정재 씨를 잘 자요, 아저씨로 바꿨고, 마지막에 한 마디를 더 추가했다.“보고 싶을 거예요.”나는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오, 꽤나 달콤한데?”그러자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그럼요. 다만 입 밖에 쉽게 내뱉지 못할 뿐이에요.”그녀는 핸드폰을 넣으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말했다.“현아야, 여자한테 애교는 곧 무기야!”나는 석지훈에게 애교 부리는 걸 좋아했다.특히 내가 잘못했을 때.그러자 담현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저도 알아요. 근데 유독 아저씨 앞에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그런 혼란스러움이야말로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증거였다.
담현아의 나이는 확실히 어렸지만 내 아이가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기엔 애매했다. “그냥 작은고모라고 부르는 게 어때?”그러자 담현아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그럼 아저씨는 고모부가 되는 거예요?”나는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갑자기 정재 씨랑 친척이 된 거야?”그러다 생각이 바뀌어 말했다.“사실 삼촌이라고 부르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정재 씨는 삼촌, 넌 작은숙모?”이 친척 관계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그래요, 언니가 아저씨랑 더 오래 알고 지냈으니까, 그쪽 기준으로 부르면 되겠네요. 사실 나도 작은숙모라는 호칭이 더 맘에 들어요!”고정재가 한 말이 맞았다. 우리가 아무리 가까워도, 그가 예전부터 우리의 피아노 곡을 계속 연주한다 해도 담현아는 결코 우리를 오해하지 않을 사람이었다.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떳떳한 사이니까.“그럼 그렇게 하자! 아까 경찰이 그러던데, 너 최근 2년 동안 경찰서만 5번이라며? 핀란드에 있는 애가 어떻게 국내에서 이렇게 사고를 치고 다니는 거야?”그녀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별일 아니에요.”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해서 나도 더 묻지 않았다.집에 도착했을 땐 거의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밤새 클럽에서 놀다가 경찰서와 병원을 오가느라 그녀는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소파에 털썩 눕더니 아예 꼼짝도 안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이 잠들었다. 나는 옷장에서 담요를 꺼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마침 고정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현아는 자?”그는 담현아가 내 집에 있는 걸 알고 있었다. 정말 모르는 게 없는 남자였다.“네, 방금 잠들었어요.”나는 침대에 기댄 채 대답했다. 곧이어 전화 너머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많이 다쳤어? 민영이가 꽤 심하다고 그러던데.”고민영이 그에게 말한 모양이었다.“병원에서 치료받았어요. 괜찮아요.”“그래. 현아 신경 써줘서 고마워.”나는 낮게 말했다.“별말씀을, 친구잖아요.”나는 전화를 끊고 다시 잠을 청했다.그리
고민영이 놀라며 물었다.“형수님, 무슨 일이에요?”나는 조용히 앉아 있는 담현아를 가리키며 설명했다.“이분은 민영 씨 오빠의 와이프예요. 두 사람은 이제 막 혼인 신고를 마쳤고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어요. 민영 씨가 작은형수랑 싸우면 오빠가 곤란해지지 않겠어요?”고민영은 깜짝 놀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누구요?”나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누구겠어요? 정재 씨죠.”그 말을 듣자마자 고민영은 당황하며 담현아에게 급히 사과했다.“죄송해요, 작은 형수님. 저는 두 분이 그런 관계인지 전혀 몰랐어요... 아까 일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제가 형수님을 알지도 못했잖아요. 저도 당연히 제 친구를 도와야 했고요. 그냥 오해였던 거예요. 우리 합의할까요?”담현아는 원래 쿨한 성격이라 작은 일로 꽁해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고정재가 곤란해지는 것도 원치 않았기에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요. 애초에 제 잘못이었어요.”고민영도 성격이 꽤 시원시원했지만 문제는 그녀의 친구였다. 그 친구는 여전히 담현아를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며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나는 그녀에게 말했다.“얼른 병원 갈까? 상처 치료해야지.”“네, 치료는 해야죠.”담현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고민영의 친구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굳이 병원에 갈 필요도 없겠는데? 얼굴이 그 모양인데 흉터가 남든 말든 똑같지 않을까? 괜히 의료 자원을 낭비하지 말고.”담현아는 성질이 급한 편이었다. 그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대놓고 비웃으며 말했다.“수아 언니, 무식한 년이랑 말싸움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그런 년보다 몸매 좋고 예쁘고 돈 많고 남자 친구도 더 잘생기면 그만이죠. 굳이 입 아프게 싸울 필요가 없잖아요.”고민영의 친구는 화가 나서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이 벌떡 일어났지만 고민영은 급히 그녀를 붙잡으며 말했다.“내 형수님이야. 좀 참아!”담현아는 그 친구를 향해 가볍게 침을 뱉고는 경찰서를 나섰다. 나는 철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