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유겸이요.”‘진씨 집안사람인가? 진씨 집안에 언제 이런 사람이 있었지?’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진서준의 묘비를 바라봤다. 그의 흑백 사진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얼마 전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저랑 희연이 사이에는 너무 큰 간극이 있어요. 이런 제가 희연이 발목을 잡을 수는 없어요. 그래서 잠깐 떠난 거예요. 안정된 다음 다시 찾아가고 싶어요. 희연이가 계속 기다려준다면요.”그때 진서준은 진씨 집안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됐다. 한창 프로젝트에 실패해서 상황이 안 좋을 때 말이다.하지만 그는 계획이 있었다. 노력만 하면 최희연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장례식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최희연도 생각보다 덤덤해 보였다. 하지만 관뚜껑을 닫는 순간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렸다. 손은 있는 힘껏 묘비를 붙잡았다.나는 그녀를 꼭 끌어안으며 위로해 주려고 했다.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나 이제 어떡해? 서준이를 영원히 못 보는 거야?”그녀의 모습을 보고 나도 눈물을 참지 못했다.“널 사랑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어. 너희들 사이의 사랑도 계속 존재해, 알지?”“근데 서준 씨를 못 보면 무슨 소용이야.”맞는 말이다. 두 사람은 이제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나는 말을 잃었다. 최희연은 장례식이 끝난 다음에도 이곳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고 어느덧 저녁이 되었다. 최희연은 여전히 묘비 앞에 앉아 있었다. 비서 강해온은 사람들을 마중하고 나서 패딩을 가져다줬다.3월의 저녁은 아직 추웠다. 최희연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강해온은 그녀를 부축하면서 말했다.“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으셔서 버티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최희연 씨는 제가 병원에 보내드리겠습니다. 대표님께는 다른 기사를 불러드리겠습니다.”“아니에요. 나도 같이 병원에 가요.”“대표님 이만 쉬셔야 할 텐데요. 최희연 씨한테 혼자 있는 시간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그냥... 금방 장례식에 다녀오니 기분이 이상하네.”나는 결국 건강 상태를 숨기기로 했다. 조민수는 이제야 한시름 놓았다.“괜찮으면 됐어.”“언니는? 내가 쉬는 걸 방해한 거 아니지?”“아니야, 친구랑 놀러 나갔어. 근데 고현성이 얼마 전 연락이 왔더라? 연구팀을 보낸다고 하는데 다들 암 치료 전문가래. 너 그때까지 잘 버티고 있어야 한다?”나는 잠깐 멈칫했다. 고현성이 아직 나에게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이다.‘예전의 나는 기억하는 거야, 못 하는 거야.’“알았어. 조심할게.”“그래, 난 할 일이 있어서 먼저 끊을게.”조민수가 전화를 끊었다. 나는 멍하니 침대에 앉아서 고현성을 떠올렸다.마음은 아직도 갈팡질팡했다. 그가 말했던 것처럼 선택하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했다.너무 어려운 문제가 아니던가? 나는 자신이 누구를 좋아하는지 몰랐다. 그저 묘하게 고현성에게 이끌린다는 것만 알았다. 물론 고정재와 마주친 순간 그런 이끌림도 망각하게 되지만 말이다.나는 한숨을 쉬며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만 핸드폰을 내려놓고 자려고 했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또다시 고현성이 떠올랐다.고현성은 나에게 너무 다정했다. 모든 힘을 다해 나를 도우려고 하는 것도 보였다. 그날 나를 위해 억지로 참아내지도 않았는가?하지만 고정재는... 내 9년간의 집념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상 우리는 별로 엮인 적이 없다. 정적 나와 끈질기게 엮긴 건 고현성이었다.지금도 내 머릿속에는 온통 고현성뿐이다. 하필이면 이때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다소 찝찝한 기분으로 물었다.“안 잤어요? 왜 갑자기 전화해요?”“보고 싶어서.”그의 목소리는 아주 부드러웠다. 다정한 말도 입만 열면 나왔다.“아... 네.”나는 심장이 크게 한 번 두근댔다. 하지만 들키기 싫어서 애써 덤덤하게 대답했다.“장례식은 잘 끝났어?”“네, 아침에요.”“희연 씨는 어때?”“많이 힘들어해요. 괜찮아지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최희연은 당분간 진서준을 잊지 못
‘사랑해. 진짜 많이 사랑해.’이건 내가 고현성에게서 들은 적 있는 가장 달콤한 말이다.그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나는 핸드폰을 꽉 잡은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그는 조용히 나를 기다렸다. 내 마음속에는 혼란으로 가득 찼다. 다행히 그 혼란은 금방 사라졌다.나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말했다.“현성 씨 웃기네요.”내가 원래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게 아니었다. 하지만 입을 벌리면 듣기 싫은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고현성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일찍 쉬어. 난 어머니가 안정된 다음 운성에 돌아갈 거야.”“아주머니가 왜요?”“위암 초기래. 수술해야 해.”암... 또 암이다.나는 배를 감싸며 오래간만에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초기 치료는 어렵지 않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요.”“응, 너도 몸조리 잘...”고현성은 잠시 멈칫하더니, 한참 후에야 다시 말을 이었다.“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여자가 아프다는데, 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네.”나도 고현성의 말투에 담긴 무기력감을 드러낼 수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현성 씨는 저를 왜 사랑해요?”“...”고현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되물었다.“전에 있었던 일 기억 못하잖아요. 지금의 저희는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왜 저를 사랑한다고 생각한 거예요?”‘혹시 기억을 잃은 게 아닌가?’고현성의 기억 상실에 관해서는 수상한 점이 너무 많았다.이때 고현성이 대뜸 물었다.“넌 날 사랑해?”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아뇨.”“그런 질문은 날 사랑할 때 다시 해.”“...”고현성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는 핸드폰을 침대로 휙 던져버렸다. 이제야 조금 전에 먹은 약을 전부 토해 냈다는 것이 떠올랐다.나는 다시 약을 먹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어찌 됐든 약은 끊을 수 없었다. 나는 하루라도 더 살아야 했으니까.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다. 요즘 들어 점점 잠을 이루는 것이 어려워진다. 나는 억지로 눈을
곧 죽을 거라니... 저주와 같은 말이었다.나는 강해온에게 번호를 보내서 조사해 달라고 했다. 10분도 채 안 돼서 강해온은 전화가 왔다.“조사 결과 나왔어요?”나는 긴장한 채로 물었다.“대표님, 이거 대포폰입니다. 조사 결과에 의하면 3일 전에 개통되었고, 대표님에게 걸려 온 전화 외의 다른 사용 기록은 없습니다.”“다른 정보는 찾을 수 없어요?”“어디에서 구한 번호인지는 알 수 있지만 중간에 다른 사람이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시간을 좀 써서 조사해 봐야 합니다.”“그럼 계속 신경 써 줘요. 방금 나한테 전화 와서 자기가 누군지 맞춰보라고 했어요. 처음에는 장난 전화인 줄 알았는데, 내 이름을 부르며 곧 죽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분명히 내가 아픈 걸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혹시... 연시혁 씨는 아닐까요?”나는 강해온이 이 이름을 꺼낸 다음에야 연시혁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떠올랐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굳이 연락할 필요도 없었다.연시혁은 큰아버지가 거리에서 입양한 양자였다. 그다지 정직한 사람은 아니었다. 큰아버지가 연씨 가문에서 마련해 준 일자리도 마다하고 거리에서 불량배들과 어울렸으니 말이다.큰아버지는 그를 한심하게 여겨 성인이 된 이후로는 관계를 끊어버렸다. 그 이후 나는 그를 본 적 없었다. 9년 전 큰아버지가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는 장례식에 오지 않았다. 자신을 연씨 집안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강해온의 추측은 근거가 없었다. 나는 연시혁과 원한 관계가 있을 리 없고, 전화 속 목소리도 그와 일치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내 병에 대해 알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나는 강해온의 생각을 부정했다. 그도 금방 말을 바꿨다.“그리고 대표님, 최희연 씨가 아직 병원에 있습니다.”“정신 상태는 어때요?”“어제 포도당 링거를 맞았고, 깨어난 뒤에 죽고 조금 드셨습니다. 지금은 그냥 병상에 앉아서 아무 말도 안 하고 계십니다.”“내가 이따가 병문안 갈게요.”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귀를 의심하게 되는 말이었다. 나는 최희연에게 왜 갑자기 이런 결정을 했는지 물었다.그녀의 빨간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눈을 감은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난 진실을 밝히고 싶어. 서준이 단순 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사실 진서준의 일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꽤 많았다. 멀쩡하던 사람이 어떻게 쉽게 죽을 리가 있겠는가? 내가 강해온에게서 들은 말을 생각하면 의심할 만도 했다.나는 최희연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방법을 쓸 줄은 몰랐다.진씨 가문의 두 아들은 전부 결혼하지 않았다. 외모가 평범하고 능력도 없으니 말이다. 나이도 벌써 30대 중반이었다.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누구랑 결혼하려고?”“진유겸.”나는 어제 봤던 고고한 남자를 떠올랐어.“네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알았어...?”“강해온이 어제 말해줬어. 진유겸 씨가 진씨 가문에 돌아갔다고. 그래서 진씨 가문에 큰 변화가 있을 거래. 내가 진유겸이 누구냐고 물어보니까 다 설명해 줬어. 그래서 그 남자랑 결혼하고 싶어졌어.”진유겸은 결코 쉬운 사람이 아니다. 결혼 역시 최희연이 원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나는 최희연의 능력을 인정했다. 그녀가 굉장히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유겸 앞에서는 그녀의 능력도 무색할 정도였다.그런 남자가 왜 그녀와 결혼을 하겠는가?진유겸도 장례식에 참석했으니 최희연과 마주쳤을 것이다. 조금만 더 알아보면 그녀와 진서준의 관계도 알 수 있다. 자신의 조카와 연관이 있는 여자를 아내로 들일 사람은 없다.최희연의 생각은 너무 터무니없었다. 실현될 가능성은 제로였다. 하지만 나는 직설적인 말로 그녀의 약한 멘탈을 흔들고 싶지 않았다.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이 문제를 더 이상 깊이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난 네 결정 응원해. 대신 결과를 충분히 생각하고 선택했으면 좋겠어.”“고마워, 수아야.”나는 최희연을 집에 데려다준 뒤 회사로 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전화가
정말이지 기쁘면서도 부끄러웠다.고현성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보고 싶어.”출혈은 심하지 않아서 욕조 물이 살짝 붉어진 정도였다. 나는 몸을 일으켜 출혈 부위를 닦으며 화제를 돌렸다.“아주머니 몸은 어때요? 일기 예보를 보니까 금운은 아직도 눈이 온다면서요.”“응, 손바닥만 한 곳이 전부 눈으로 뒤덮였어.”나는 핸드폰을 스피커 모드로 전환하고 침대에 놓아뒀다. 그리고 가운을 입으며 되도록 차분한 척 말했다.“정말 예쁘겠네요.”“정말 예쁘지.”나는 문득 미소를 지으며 그를 불렀다.“현성 씨.”“응?”“저도 현성 씨가 보고 싶어요.”고현성은 침묵에 잠겼다. 말을 안 하면서도 전화는 끊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내가 먼저 전화를 끊고 운성에 있는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었다.내 최근 상황을 알리자, 주치의는 잠시 생각하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사모님, 최근 혹시 무슨 일 있었나요?”그는 내가 고현성의 아내일 때 주치의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나를 사모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나는 굳이 정정하지 않고 자세히 말했다.“친구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어요. 그리고 요즘 혼란스러울 일이 많아요. 제가 누굴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오늘 이상한 전화도 걸려 와서... 좀 그러네요.”나는 전화의 내용까지 전해줬다.“수술을 받자마자 재발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사모님은 심적 스트레스가 심한 경우인 것 같네요. 일단 생리 기간을 확인해 보세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이맘때였던 것 같거든요? 그리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큰 감정 기복을 피하세요. 약까지 규칙적으로 드시면 큰 문제 없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주치의는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두 달 전의 수술은 정말 성공적이었습니다. 감염됐던 부분이 상당 부분 회복했고, 약만 잘 드시면 완치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알겠습니다.”“밤새는 건 절대 안 되니까 푹 주무셔야 해요.”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곧장 화장실로 갔다. 생리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돼서 우선 생리대를
나는 오래전부터 고현성의 기억상실을 의심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밝혀낼 방법이 없었다. 그가 말실수하기 전까지는 말이다.“지금까지 저를 속이고 있었던 거예요?”고현성은 웃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창문을 통해 그의 표정을 똑똑히 봤다. 너무나도 당당해서 이를 악물게 되었다.그가 기억을 잃은 척 연기한 것이 밝혔다고 한들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국 그에게 놀아난 것뿐이었다.진실을 알고 나니 내려가서 문을 열어줄 마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때 고현성이 차분한 어조로 나를 협박하듯 말했다.“네가 나한테 보고 싶다고 한 말 녹음했어. 내려오지 않으면 고정재한테 보낼 거야.”“...”‘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치사할 수 있지?’나는 화가 나는 데도 어쩔 수 없이 내려가서 문을 열어줬다. 문을 열자 잔디밭에 있는 헬리콥터가 보였다.얇은 옷만 입고 나가자 봄바람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나는 추운 와중에 비꼬듯이 말했다.“누가 재벌 아니랄까 봐. 등장 하나 화려하네요.”고현성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돈이 많은 걸 어쩌겠어.”나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뻔뻔해.”“넌 귀여워.”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물었다.“널 속이지 않고는 내가 어떻게 해야 했을까?”그의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나를 끌어안더니 약간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너한테 얼마나 큰 상처를 줬는데. 전부 잊은 척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다가갈 수 없었어. 네 방어벽을 뚫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만 했어.”고현성이 내 장례식에서 대성통곡했다는 말을 최희연에게서 들었을 때, 나는 그의 마음이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알았다.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서 나에게 다가오려고 할 줄은 몰랐다. 기억상실이라고 하면 내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넘겨줄 줄 알았던 걸까?사실 나에게는 그를 원망할 기운도 남지 않았다. 가끔 독설을 하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그다지 탓하지 않았다.“근데 왜 갑자기 실토한 거예요?”나는
오늘의 고현성은 유난히 감성적이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나는 문득 임지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만약 현성이 수아 씨를 사랑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것 같았을 거예요. 그만큼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니까요. 반대로 그렇지 않다면...”반대쪽은 내가 잘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될 것이다.나는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물었다.“지혜 씨한테도 이렇게 다정하게 말했어요?”임지혜가 언급되자, 고현성은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우린 그런 사이 아니었어.”“그렇게 오래 사귀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요?”나는 진심 어린 사랑을 말하는 것이었다.그리고 나는 단지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이다. 누구에게나 과거가 있기 마련이고, 모든 것을 집요하게 추궁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뒤늦게 무례한 질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빠르게 말을 바꿨다.“제가 괜한 질문을 했네요.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줘요.”나는 이 주제를 빨리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고현성은 오히려 진지하게 설명을 이어갔다.“내가 지혜를 만난 건 대학교 졸업 직후였어. 그때 내 친구들은 모두 여자친구가 있었고, 나도 지기 싫어서 선택한 사람이었지. 근데 우리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어. 내가 금욕적이어서가 아니라 애초에 아무런 감정도 없었거든. 우린 그냥 몇 년 동안 겉으로만 연인 관계를 유지했어.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사랑이 뭔지도 몰랐어. 괜히 오해하게 해서 미안해.”고현성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지혜한테 마음이 없으면서도, 강제로 헤어지게 하니까 기분이 나빴어. 그래서 너를 원망하게 된 거야. 3년 동안 속으로는 원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뭘 원했다는 거예요?”잠시 기억을 되새겨 보니, 결혼한 3년 동안 고현성은 집에 굉장히 자주 돌아왔다.고현성은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3년 후 지혜가 다시 나타났을 때... 나는 한 번도 제대로 된 결혼식을 해준 적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