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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고현성이 화를 내면서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

내가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 나가려던 그때 가장 만나기 싫었던 그 사람을 만났다. 바로 고현성이 지금까지 사랑하고 있는 여자 임지혜.

나는 임지혜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고 그냥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임지혜가 나지막하게 나를 불렀다.

“고씨 가문 사모님 맞죠?”

순간 멈칫한 나는 그녀를 흘겨보았다.

“왜 그러시죠?”

“사모님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좋아요?”

임지혜의 도발에 나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옅은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지만 립스틱은 진한 레드색을 발랐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에도 얇은 롱원피스에 하얀색 코트로 가녀린 몸을 가리고 있었다.

‘예쁘긴 하네. 이러니까 현성 씨가 그렇게 좋아하지.’

연적끼리 만나봤자 좋을 일이 없었다. 나는 임지혜를 무시하고 그냥 가려 했지만 그녀가 나를 비웃었다.

“내 자리를 빼앗아 갔는데 편할 리가 없겠죠. 현성이가 수아 씨를 사랑해요? 귓가에 대고 달콤한 얘기를 해주던가요? 밥도 해준 적 없죠? 특별한 날에 선물 사주던가요? 한 번도 그런 적 없죠? 현성이는 절대 수아 씨한테 해주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그저 선양 그룹 대표라는 이유로 사모님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에요.”

임지혜의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그녀가 한 말들은 전부 고현성이 그녀에게 해줬던 것들이었다. 질투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질투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모님 자리도 지키지 못하게 생겼는데...

나는 덤덤하게 웃으며 맞받아쳤다.

“그럼 지혜 씨는요? 3년 전에 난 지혜 씨한테 기회를 줬었어요. 지금 인정하든 안 하든 현성 씨 와이프는 나예요. 그리고 지혜 씨 말이 맞아요. 난 선양 그룹 대표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현성 씨한테 결혼을 강요했어요. 근데 당신은...”

절대 남에게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내가 아니었다. 상대가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가만히 있지만 건드린다면 그대로 갚아주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고현성은 이런 나를 3년이나 모욕했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난 돈이 많아서 고씨 가문에 많은 돈을 줄 수 있지만 지혜 씨는요? 돈도 없고 권력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면서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나의 말에 임지혜의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어찌나 가여운지 남자들이 봤더라면 아마 무척이나 마음 아파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되레 싸늘하게 웃었다.

“내 앞에서는 가여운 척하지 말아요. 현성 씨한테는 먹히겠지만 나한테는 전혀 통하지 않아요.”

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누군가 임지혜를 뒤로 감쌌다. 고현성이 널찍한 어깨로 그녀를 지켜주었고 검은색 코트가 오늘따라 더 차갑게 느껴졌다.

고현성은 눈살을 찌푸린 채 나를 냉랭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임지혜를 괴롭히기라도 할까 봐 잔뜩 경계한 모습이었다.

내가 조금 전에 한 얘기를 분명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현성은 화를 잘 내는 성격이 아니었다. 고현성이 실눈을 뜨면서 덤덤하게 물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친구랑 만나기로 했는데 왜요?”

나는 뒤에 있는 임지혜를 보며 말했다.

“현성 씨, 나 몰래 옛 애인을 만나고 있었어요?”

임지혜를 옛 애인이라고 말하자 고현성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별장에 돌아가서 기다려. 저녁에 들어갈게.”

말투가 어딘가 이상했다. 마치 집으로 돌아오는 게 나에게 베푸는 엄청난 은혜인 것처럼 말이다.

‘내 신세가 이 정도로 가여워졌나? 게다가 전 여자 친구의 앞에서...’

나는 자신을 비웃었다.

“집에 갈 겁니다. 근데 한마디만 할게요. 난 지혜 씨 존재를 신경 쓰지 않지만 아버님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고현성이 아무 말이 없자 임지혜가 앞으로 나와서 내 손목을 잡더니 가여운 척하며 설명했다.

“수아 씨, 오해하지 말아요...”

남이 내 몸에 손을 대는 걸 싫어했던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뿌리쳤다. 고현성은 내가 임지혜를 때리는 줄로 착각하고 임지혜를 잡아당겨 품에 끌어안았다.

그의 힘이 어찌나 센지 나는 미처 손 쓸 새도 없이 바닥에 넘어지면서 차가운 바닥에 얼굴을 부딪치고 말았다.

나는 경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고현성이 임지혜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다정하게 다독이고 있었다.

“지혜야, 괜찮아.”

‘지혜야, 괜찮아? 저 여자가 무슨 일이 있겠어?’

나는 따끔거리는 얼굴을 부여잡고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했었던 나를 비웃었다.

내가 웃음을 터트리자 고현성이 싸늘하게 물었다.

“왜 웃어?”

나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현성 씨, 나 다쳤어요.”

나약한 말투에 고현성은 잠깐 흠칫하더니 비서에게 날 병원에 데려다주라고 한 다음 임지혜와 함께 떠나버렸다.

떠나기 전에 임지혜는 나를 보면서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고현성의 비서가 나를 부축하고 병원에 데려다주려 하자 나는 거절하고 직접 운전하여 별장으로 돌아온 다음 뜨거운 물로 샤워했다.

얼굴이 계속 따끔거렸지만 마음은 아무 느낌이 없었다. 심지어 뾰족한 손톱으로 상처를 꽉 꼬집기도 했다.

고현성이 임지혜에게 잘해줄수록 나만 더 가여워 보였다.

나는 잠시 두 눈을 감았다가 일어나서 이혼 합의서를 작성한 후 진지하게 사인까지 마치고 서랍에 넣었다.

그러고는 주방에 가서 한상 가득 요리를 한 다음 거실에서 고현성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고현성은 저녁에 집으로 들어오겠다고 했었고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다.

...

새벽 3시,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현관문 쪽을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고현성이 더듬거리며 불을 켰다. 소파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더니 웬일로 먼저 물었다.

“아직 안 잤어?”

나는 그에게 다가가 겉옷을 받았다. 위에 차가운 눈꽃이 묻어있었고 낮에 임지혜를 안다가 배인 옅은 향수 냄새까지 남아있었다.

내가 옆에 가만히 서 있자 고현성은 나를 확 잡아당겼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내 몸을 만지려 했다. 차가운 손바닥이 내 몸에 닿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내 몸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현성 씨, 나 아직 저녁 안 먹었어요.”

나는 그에게 화를 낸 적이 없었다. 늘 다정하게 말했던 이유는 예전의 따뜻했던 고현성에게 차마 심한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설령 지금의 그가 예전의 고현성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고현성은 잠깐 멈칫하더니 손을 내려놓고 빤히 쳐다보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연수아, 너 어제부터 좀 이상했어.”

“현성 씨한테 할 얘기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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