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성이 나를 보면서 끈질기게 답을 원했다. 가끔 그가 왜 이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혼까지 한 마당에 왜 이제 와서 걱정하는 척하는 건지...나는 그가 잡고 있던 손을 빼내고 최대한 진정하려 애를 썼다.“딱히 이유는 없어요. 그냥 애정 결핍이라 그런가 봐요. 그래서 돈을 줘서라도 사랑을 받고 싶은 거고. 어차피 이런 짓이 처음인 것도 아닌데요, 뭐.”잠시 후 나는 그의 눈을 빤히 보면서 말했다.“그때 연씨 가문으로 당신과의 결혼을 바꿨잖아요. 이젠 사랑을 바꾸는 거죠.”“그럼 나랑 연애하자.”나는 들고 있던 가방을 떨어뜨리면서 경악한 표정으로 물었다.“뭐라고요?”“너랑 연애하겠다고. 사랑하는 척, 아끼는 척하면서 행복을 느끼게 해줄게. 그리고 네 말에 거역하지도 않고 완벽한 남자 친구가 되어줄게.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그 한마디에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고현성은 다른 여자의 남편이었다. 내가 아무리 초라해도, 거리에서 아무 남자를 찾는 한이 있더라도 고현성과 연애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이혼 전에 이미 기회를 주기도 했었다. 게다가 지금 그의 말투는 나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나에 대한 연민처럼 느껴졌다.나는 그를 뼛속까지 사랑했지만 끝내는 거절했다. 아무래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나 보다.나는 초라한 모습으로 고씨 별장에서 나왔다. 집으로 돌아온 후 줄곧 방 안에만 갇혀 있었고 고현성이 문자를 보내도 못 본 척 무시해버렸다.[왜 도망쳤어?]이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고현성이 사랑하는 여자는 임지혜였고 임지혜의 남편이었다. 만약 이혼 전에 나에게 이런 얘기를 했더라면 나는 아주 기뻐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다 끝난 마당에 그의 동정과 은혜는 받고 싶지 않았다.죽을 때까지 외로운 한이 있더라도 필요가 없었다.그 후 일주일 동안 나는 연씨 별장에만 틀어박혀 어디도 가지 않았다. 병이 점점 악화되어 힘없는 날이 더 많았고 한 번 침대에 누우면 하루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그렇게 흐리멍덩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
나와 최희연은 고현성을 만나기 전부터 친구였다. 하여 내가 고현성을 좋아하는 마음도 알고 있었고 모든 비밀번호가 고현성을 만난 그날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바로 2009년 12월 27일, 첫눈이 내리던 그날이었다.“수아야, 안색이 너무 창백해. 억지로 웃지 않아도 돼.”“그래? 날씨가 추워서 그런가?”나는 카페에서 최희연과 잠깐 얘기를 나눈 후 나왔다. 별장으로 돌아가 계속 틀어박혀 있으려던 그때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전화를 받고 물었다.“누구세요?”“고씨 가문 사모님 임지혜입니다.”내가 피식 웃었다.“아직 결혼하지 않았잖아요.”임지혜는 잠깐 멈칫하다가 집념을 버리지 않고 말했다.“알아요. 근데 수아 씨한테 알려주고 싶었어요. 내가 바로 고현성의 아내고 당신 때문에 고씨 가문 사모님의 자리를 3년이나 놓친 임지혜라고요. 연수아 씨, 난 현성이를 3년 기다렸고 당신을 3년 참았어요. 지금은 그때 잘못된 걸 바로잡았을 뿐이에요. 난 드디어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고현성의 아내가 되었어요.”고현성의 아내 자리가 남들의 존경의 받아야 한다는 이유가 돼서는 안 되었다. 그녀가 자기 자신을 아끼면 모를까.나는 딱히 관심 없는 말투로 말했다.“네.”그런데 임지혜가 말하다가 갑자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사실 난 수아 씨를 탓한 적이 없어요. 그때 수아 씨가 아니었더라도 다른 재벌 집 딸이 사모님이 되었을 테니까요.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수아 씨처럼 착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런 사람을 상대하느라 몇 년 동안 편히 살지도 못했을 거예요. 어찌 보면 수아 씨한테 내가 고마워해야 해요.”나는 차분하게 물었다.“그래요?”‘난 착한 게 아니라 싸우기 싫었을 뿐인데.’“네. 내가 잘못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현성이랑 오래전부터 결혼하고 싶었거든요.”잠깐 멈칫하다가 임지혜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이제 난 현성이의 아내 임지혜예요.”나는 싸늘하게 그녀에게 귀띔했다.“아직 결혼하지 않았잖아요. 아버님이 허락하지도
요즘은 운성시에 눈보다 비가 더 많이 내렸다. 휴대전화를 귓가에 대자 고현성의 원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아까 폭우가 쏟아져서 옷이 다 젖었는데 계속 문 열어주지 않을 거야?”말투에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운 속상함이 살짝 묻어있었다. 나는 시선을 거두고 물었다.“무슨 일로 왔어요?”“연수아, 내가 지금 네 남자 친구라는 거 잊은 건 아니지?”‘기억하고 있었구나...’“난 당신이 후회한 줄 알았어요.”내가 말했다.“며칠 동안 연락 안 해서?”나는 낮은 목소리로 그렇다고 했다. 말투에 속상함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이 바보야, 내가 말했잖아. 회사 일 처리해야 한다고. 앞으로 두 달 동안 회사에 급한 일이 없는 이상 쭉 네 옆에 있을 거야.”고현성은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다정하게 말했다.“무슨 일이 있더라도 널 옆에 데리고 다닐게.”그의 말에 나는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고현성이 나에게 이토록 다정하고 친절할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그에게 매달리기만 하는 여자라고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들었어?”내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자 고현성이 물었다.“현성 씨.”“응?”“문 열어줄게요.”나는 전화를 끊은 후 안방에 뒀던 진통제를 숨겼다. 그리고 전에 바닥에 넘어지면서 생긴 흉터를 가리려고 메이크업도 했다.얼굴에 상처가 났을 때 손톱으로 세게 긁은 적이 있었다. 분풀이이자 고현성이 나에게 준 상처라는 걸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부질없는 짓이었다. 자신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됐었는데...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문을 열어주었다. 문을 열자마자 고현성은 손가락으로 이마에 딱밤을 때리면서 장난을 쳤다. 화들짝 놀란 나를 보며 고현성이 덤덤하게 웃었다.“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얼어 죽을 뻔했다고.”나는 아무 거짓말이나 했다.“화장실 다녀왔어요.”고현성이 나를 힐끗 보더니 갑자기 물었다.“방금 화장했어?”나는 무심코 부인했다.“아니요.”그런데 고현성이 끈질기게 캐물었다.“날 위해 일
고현성도 참 웃긴 남자였다. 단 두 달만 연애하기로 했고 또 두 달 후면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될 텐데 지금 물어봤자 의미가 있을까?그리고 두 달의 연애는 그저 연기에 불과했고 그가 나에게 베푸는 은혜와 보상이었다.나는 고현성의 목을 끌어안고 웃었다.“사랑하죠, 당연히. 현성 씨도 알잖아요. 연씨 가문 딸인 내가 고씨 가문에 시집간 건 현성 씨를 사랑해서라는 거.”예전이든 지금이든 나는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나의 말에 고현성은 피식 웃더니 품에 꼭 끌어안고 따뜻한 손으로 등을 어루만졌다.“수아야, 사랑해.”그 순간 나는 경악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한참이 지난 후 정신을 차렸다. 나와 연애할 때 사랑하는 척, 아끼는 척해주겠다고 했었고 거역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심지어 행복을 느끼게 해주겠다고 했었다.지금 그는 그때의 약속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진심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진심인지 물어봐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내 옆에 딱 두 달만 있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아는 고현성은 절대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아니었다.임지혜와 결혼하기로 약속한 이상 무조건 그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마치 지금 날 싫어하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처럼.나는 머리를 그의 가슴팍에 기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현성이 나를 꽉 끌어안고 물었다.“넌 언제부터 날 사랑했어?”내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아주 오래전에. 하도 오래전이라 기억도 잘 안 나요.”...저녁에 고현성은 우리 집에서 잤다. 잠자리를 해선 안 된다는 나의 조건 때문에 그냥 품에 안기만 했다. 고현성이 내 침대에서 밤을 보낸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나는 일찍 일어나서 욕실로 들어갔다. 고현성이 깨기 전에 진통제를 먹었고 화장도 했다. 옅은 화장이었지만 창백한 안색은 가릴 수 있었다.화장을 마치자마자 고현성이 잠에서 깼다. 그는 비몽사몽 나를 보다가 한참 후에 말했다.“나 어젯밤에 여기서 잤어?”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
고현성이 밖에서 2분 정도 전화를 받고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고 달리 방법이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내가 가볍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고현성이 한숨을 내쉬었다.“이따가 나가야 하는데 너도 같이 갈래?”나는 알면서도 물었다.“임지혜 씨 때문이에요?”고현성이 두 눈을 감았다.“교통사고 당해서 다쳤대.”나는 계속하여 인내심 있게 물었다.“그래서 지금 보살펴주러 가려고요?”고현성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떠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떠나기 전 나는 그에게 귀띔했다.“우리 전에 했던 약속 기억해요? 연애하는 동안에는 임지혜 씨를 만나선 안 된다고 했었어요.”고현성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기억해. 그래서...”‘내 의견을 물으려고? 뭘 믿고 내가 보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현성 씨, 지금 가면 이 게임 중지할 겁니다.”나는 영화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현성 씨가 가겠다고 하면 막지는 않을게요. 가면 약속을 어긴 거로 생각하겠어요. 현성 씨, 사실 난 현성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해심 많은 여자가 아니에요.”고현성은 날 묵묵히 바라보다가 결국 나가버렸다. 창문 앞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내려다보았는데 아주 단호했다.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침대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초저녁쯤 고현성의 어머니가 밥 먹으러 내려오라고 하자 나는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캐리어를 끌면서 거실로 내려갔다. 마당에 눈이 소복이 쌓이기 시작했다.고현성의 어머니는 나를 보고 다정하게 물었다.“가려고?”“네. 비행기 시간이 곧 돼서요. 그동안 실례 많았습니다.”“실례는 무슨. 내 며느리인데 뭘 그런 예의를 차리고 그래.”“어머님, 저랑 현성 씨 이혼한 지 좀 됐어요.”고현성의 어머니가 아무 말이 없자 내가 웃으며 물었다.“눈사람 만들어도 돼요?”“당연하지. 내가 도와줄까?”“괜찮아요. 다 만들면 갈게요.”나는 눈이 두껍게 쌓인 곳을 찾아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릴 적에 부모님과 만들어본 적이 있어 그리
고현성은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2년 전 낙태 수술이 뭘 빼앗아 갔다고?”그가 정확히 들었다는 걸 알고 있기에 다시 반복할 이유가 없었다.“희연이 풀어줘요. 사랑하는 사람이 희연이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굳이 탓하겠다면 사고나 치고 다니는 임지혜 씨를 탓해요. 조사해보면 임지혜 씨가 8년 전에 뭔 짓을 했는지 알 거예요. 그 사람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쳤어요. 희연이는 지금 그때 당한 거 그대로 갚아줬을 뿐이고 차로 친 것도 임지혜 씨가 모진 말을 해서 홧김에 그런 거예요. 현성 씨 그 약혼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착한 사람이 아니라고요.”나는 말하다가 잠시 멈칫하고 비웃었다.“아, 내가 잘못 말했네요. 당신은 못 하는 게 없는 고현성이죠, 정말. 남이 무슨 짓을 하든 다 아는데. 지금은 단지 임지혜 씨의 잘못도 눈감아주고 있는 거고요.”고현성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이 일은 내가 제대로 조사할 거야. 근데 2년 전 그 일은 제대로 설명해. 아이를 지운 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무슨 일? 다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의사가 수술을 했지만 자궁 소파술이 제대로 되지 않아 자궁이 감염되고 말았다. 그리고 아직 완전히 회복되기도 전에 고현성과 관계를 가졌다.내가 싸늘하게 말했다.“별일 아니에요. 사람마다 체질이 달라서 아이를 지운 후에 몸이 제대로 회복하지 못했어요. 의사가 내가 앞으로 아이를 가지기 어려울 거라고 하더라고요. 안 그러면 내가 왜 선양 그룹을 현성 씨한테 줬겠어요? 그동안 선양 그룹을 혼자서 경영하느라 너무 힘들었고 후계자도 없어서 준 거죠.”한참이 지나서야 고현성이 말했다.“왜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어?”“현성아, 지금 누구랑 얘기하는 거야?”병실 안의 임지혜가 고현성을 부르자 나는 싸늘하게 웃고는 다시 경찰서로 갔다.최희연을 보석으로 나오게 하고 싶었지만 지금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권력을 내 손으로 직접 고현성에게 갖다 바쳤고 고현성은 그걸 이
“연애 말이야. 없었던 거로 하자.”이젠 사랑하는 척도 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내가 피식 웃었다.“그래요. 내가 바라던 바예요.”“수아야, 그때 너랑 이혼한 건 지혜한테 해주지 못한 결혼식을 돌려주기 위해서였어. 진짜 너한테 상처 주고 싶지 않았어. 미안해.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도 좋아.”“전처한테 미련이 남았어요?”나는 싸늘하게 웃었다.“미안할 거 없어요. 현성 씨는 날 사랑하지 않을 뿐이고 나도 아쉬울 게 없어요. 이혼을 후회하고 있다는 둥, 이젠 날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둥, 임지혜 씨에 대한 마음이 진짜 사랑인지 모르겠다는 이딴 어이없는 소리만 하지 말아요. 만약 그런 소리 했다간 현성 씨가 너무 역겨울 것 같아요.”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고현성이 대답했다.“이렇게까지 날을 세울 거 없어. 너한테 죄책감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함부로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야.”“이 전화를 한 목적이 뭐예요?”“아이 일은 정말 미안해...”“그만 해요. 사과받을 생각 없으니까. 아이 일은 아이한테 사과해야죠, 내가 아니라. 현성 씨가 뭔 생각인지 잘 알아요. 나한테 사과해서 양심의 가책이라도 덜어낸 다음에 임지혜 씨랑 결혼하겠다는 말이잖아요.”고현성은 아무 말이 없었다.나는 전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끄고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다시 휴대전화를 켜고 고현성에게 문자를 보냈다.[됐어요. 현성 씨 탓하지 않을게요. 이제부턴 각자 살아요. 현성 씨는 임지혜 씨와 행복하게 살고 난 새로운 삶을 살 거예요.]참으로 가식적인 말이었다. 아마 고현성도 내가 탓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최희연의 일 말고는 정말 탓할 게 없었다.사실 따지고 보면 다 내 탓이었다. 모든 게 다 자업자득이었고 고생을 사서 했다.몸이 점점 추워져 나는 숨을 내뱉었다. 두 다리에 갑자기 힘이 풀린 바람에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먼 곳의 파도가 밀려오면서 내 몸을 적시려던 그때 누군가 힘 있는 팔
조민수는 며칠 동안 쭉 연씨 별장에 있으면서 나의 일상을 보살펴줬다. 그러는 사이 그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상주로 언제 돌아가려고?”그러자 조민수가 웃으며 물었다.“그렇게 날 내쫓고 싶어?”“새언니가 화낼까 봐 그러지.”내가 대답했다.“네 새언니는 어려서 자주 삐져.”새언니는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예전에 오빠에게서 들었는데 확실히 좀 제멋대로인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다 이유가 있었고 절대 아무 이유 없이 그러진 않았다.만약 임지혜 같은 스타일을 만나면 거두절미하고 바로 해결해버렸기에 조민수의 옆에는 이성이 매우 적었다. 그런 그녀와 달리 나는 신경 쓰기도 귀찮았다. 그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틈을 준 것이었다.내가 웃으면서 말했다.“새언니 아직 어리니까 오빠가 많이 양보해줘.”그러더니 뭔가 생각났는지 조민수가 피식 웃었다.“난 걔를 탓한 적이 한 번도 없어.”새언니에 대한 조민수의 마음은 진심 같았다.“두 사람 꼭 행복해야 해.”“응. 알았어. 그렇게 할게.”내가 말했다.“오빠, 빨리 상주로 돌아가. 새언니가 보고 싶어 하겠어.”“그럼 넌? 난 여기 남아있을 거야.”내가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나도 하고 싶은 일이 있어. 개인적인 시간을 줘야지.”그를 돌려보낸 건 그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새언니와 싸운 상태이기에 더더욱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되었다.조민수는 망설이다가 결국 타협했다.“그럼 오늘 저녁에 나랑 파티에 참석하자.”“갑자기 무슨 파티?”조민수가 히죽 웃더니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임지혜 말이야, 자기는 너보다 더 귀하다고 했지? 오늘 저녁에 대체 누가 파렴치한 건지 제대로 보여주겠어. 수아야, 거절하지 마.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두려움이란 걸 알아야 해. 고현성이 하도 오냐오냐해서 너한테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는 거라고.”“난 신경 쓰지 않아.”“내가 신경 쓰여서 그래.”...나는 컨디션이 매우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민수와 함께 파티에 가기로
핀란드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도로는 여전히 미끄러웠다. 차가 급하게 멈추며 흔들렸지만 담현아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그러자 운전하던 예유진이 갑자기 물었다.“방금 예하나라고 했어요?”나는 원태웅이 예전에 예유진이 자신의 여동생을 좋아했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의 여동생이 예씨 가문의 실권자라고도 했다. 하지만 실권자는 예지한이었고 고양이 카페의 직원인 예하나가 아니었다.게다가 예하나는 자신이 제당 출신이라고 했다.이렇게 우연이 겹칠 수 있을까?“네, 예하나.”그는 깊게 숨을 내쉰 뒤 다시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형수님, 그분은 잘 지내고 있나요?”그는 예하나를 예지한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나는 그에게 뭔가를 더 물어보려 했지만 담현아 갑자기 자신의 핸드폰을 내게 건넸다.화면에는 짧은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예지한의 어릴 적 이름이 하나예요. 고양이 카페의 그 사람, 아마 예지한 일 거예요.”나는 속으로 놀랐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꽤나 여유롭게 살고 있어요.”내 말을 듣고 예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그는 나를 에르크 저택 앞까지 데려다준 뒤 예하나의 연락처를 물었다.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하나 씨는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아요. 전자기기를 일절 쓰지 않더군요.”그는 순간 멍해진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니 아무리 찾아도 못 찾았던 거네요.”그는 담현아와 함께 떠났고 나는 한동안 저택 문 앞에 서 있다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그곳에서 자고 있던 저먼 셰퍼드 두 마리가 갑자기 놀라 깨더니 나를 향해 낮게 짖었다. 그러나 곧 나를 알아보고는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한밤중이라 조금 무서웠지만 녀석들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나 보고 싶었어?”녀석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는지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덮쳐 바닥에 넘어뜨렸다. 나는 한참을 몸부림친 끝에 겨우 일어났다.다시 쓰러
“급한 일이에요. 얼른 넘겨줘요.”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서둘러 핸드폰을 석지훈에게 건넸다.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차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먼저 유진이랑 함께 에르크로 돌아가 있어.”곧이어 뒤따라오던 차도 멈춰 섰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렸다.뒤차로 향하려던 순간 석지훈이 나를 불렀다.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아가.”나는 허리를 숙여 차 안의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엔 걱정이 가득했다.“무슨 일이에요?”그는 미안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집까지 데려다주지 못해서.”집...에르크에 있는 그곳.석지훈에게는 그곳이 진짜 집이었다.운성시에 정착한 것이 어쩌면 그에게는 큰 희생이었을지도 모른다.예유진이 나를 에르크로 데려가는 동안, 나는 줄곧 말이 없었다. 어쩌면 이곳에서 정착해야 되는 게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더 이상 그와 떨어져 지내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다.하지만 국내에는 내가 결코 놓을 수 없는 석씨 가문이 있었다.고정재가 말했듯, 나는 그것을 반드시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더 이상 과거처럼 무관심한 태도로 있다가 모든 걸 빼앗길 수는 없었다.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를 들은 담현아가 물었다.“언니, 뭔 일 있어요?”“아니, 그냥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나는 깊은 고민에 빠진 채 예유진에게 물었다.“유진 씨, 둘째 오빠랑 민수 씨가 떠난 이유가 뭐예요? 혹시 위험한 일이에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자세한 건 저도 말해줄 수 없어요. 아직 형수님이랑 결혼한 사이도 아니다 보니 사업적으로나 사적으로도 공유할 수 없는 일이에요.”나는 늘 우리가 부부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왔다. 자연스럽게 함께했고 이미 충분히 깊은 관계라고 여겼다.당연히 법적으로 그의 아내가 된다면 더욱 행복할 것이다.하지만 지금,
석지훈이 곧 전 세계였다.그는 다른 이들의 전부이기도 했다.그리고 나에게도, 그는 전부였다.“그래요. 오빠가 있으면 그게 곧 전 세계죠.”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석지훈은 슬며시 내 손을 잡고 한민수 일행을 뒤따라갔다.앞서가던 한민수는 계속 담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아마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겠지만 그 역시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이었다.마치 한씨 가문에서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알고 물러난 것처럼 이번에도 과감히 포기했다.예유진도 마찬가지였다.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문의 혈통이라는 거대한 산에 짓눌려 있었다.마치 과거에 내 아버지에게 발각된 석지훈처럼...아버지는 갖은 술수를 동원해 석지훈의 손에서 석씨 가문을 빼앗아 내게 넘겼다.몇십 년 동안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었고 늘 곁에 두고 가르친 사람이었지만 결국엔 나라는 낯선 존재가 더 중요했다.정해진 현실 속에서 운명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노력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한민수는 자신이 너무 오래 담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예유진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유진아, 넌 어떤 순간에 여자한테 가장 설레?”그는 걸음을 멈추고 무언가를 떠올리며 다소 아련하게 말했다.“내 셔츠를 입고 있을 때.”한민수는 흥미를 느낀 듯 되물었다.“사모님도 네 셔츠를 입은 적 있어?”그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나는 곁눈질로 석지훈을 바라보았더니 그의 귓불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문득, 내가 그의 셔츠를 입고 발코니에 서 있던 게 떠올랐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마 그때 그의 마음은 크게 요동쳤을 것이다. 그저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그 생각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새어 나왔다.한민수는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향해 물었다.“왜 혼자 웃어요?”나는 입술을 오므리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재밌는 거 있으면 좀 공유해줘요.”나는 웃기만 했고 그는 시시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공항 밖으로 나와 그들은 한차에 탔고 나는
“지훈 오빠도 핀란드에 있어요. 언니도 나랑 같이 가요.”담현아의 제안은 꽤나 솔깃했다.하지만 아직 귀국하지 않은 석윤민이 마음에 걸렸다.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석지훈이 너무도 그리웠기 때문이다.그와 떨어진 지 고작 이틀이었지만 그 시간이 유난히 길게만 느껴졌다.우리는 많은 사람을 데리고 가지 않기로 했다. 공항에 도착하면 한민수와 예유진이 마중을 나올 예정이었기에 우리 둘만 비행기를 타고 핀란드로 향하기로 했다.나는 한참을 설득한 끝에 경호원들을 돌려보냈다. 어쩌면 그들에게도 짧은 휴가를 주는 셈이었다.우리는 오후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비행기를 타기 전, 담현아는 고정재에게 짧은 문자를 남겼다.[저 당분간 핀란드에 다녀올게요.]나는 그녀의 핸드폰 화면을 보며 물었다.“이게 다야?”그러자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뭐가 더 있어야 해요?”나는 그녀의 핸드폰을 받아 들고 잠시 생각한 후 타자하기 시작했다.[일 때문에 가는 거예요. 도착하면 전화할게요. 그때쯤이면 정재 씨도 막 일어났겠죠. 잘 자요, 정재 씨.”담현아는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황급히 말했다.“나, 한 번도 그 사람을 정재 씨라고 불러본 적 없어요!”나는 웃으며 핸드폰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잘 자요, 정재 씨를 잘 자요, 아저씨로 바꿨고, 마지막에 한 마디를 더 추가했다.“보고 싶을 거예요.”나는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오, 꽤나 달콤한데?”그러자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그럼요. 다만 입 밖에 쉽게 내뱉지 못할 뿐이에요.”그녀는 핸드폰을 넣으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말했다.“현아야, 여자한테 애교는 곧 무기야!”나는 석지훈에게 애교 부리는 걸 좋아했다.특히 내가 잘못했을 때.그러자 담현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저도 알아요. 근데 유독 아저씨 앞에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그런 혼란스러움이야말로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증거였다.
담현아의 나이는 확실히 어렸지만 내 아이가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기엔 애매했다. “그냥 작은고모라고 부르는 게 어때?”그러자 담현아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그럼 아저씨는 고모부가 되는 거예요?”나는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갑자기 정재 씨랑 친척이 된 거야?”그러다 생각이 바뀌어 말했다.“사실 삼촌이라고 부르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정재 씨는 삼촌, 넌 작은숙모?”이 친척 관계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그래요, 언니가 아저씨랑 더 오래 알고 지냈으니까, 그쪽 기준으로 부르면 되겠네요. 사실 나도 작은숙모라는 호칭이 더 맘에 들어요!”고정재가 한 말이 맞았다. 우리가 아무리 가까워도, 그가 예전부터 우리의 피아노 곡을 계속 연주한다 해도 담현아는 결코 우리를 오해하지 않을 사람이었다.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떳떳한 사이니까.“그럼 그렇게 하자! 아까 경찰이 그러던데, 너 최근 2년 동안 경찰서만 5번이라며? 핀란드에 있는 애가 어떻게 국내에서 이렇게 사고를 치고 다니는 거야?”그녀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별일 아니에요.”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해서 나도 더 묻지 않았다.집에 도착했을 땐 거의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밤새 클럽에서 놀다가 경찰서와 병원을 오가느라 그녀는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소파에 털썩 눕더니 아예 꼼짝도 안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이 잠들었다. 나는 옷장에서 담요를 꺼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마침 고정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현아는 자?”그는 담현아가 내 집에 있는 걸 알고 있었다. 정말 모르는 게 없는 남자였다.“네, 방금 잠들었어요.”나는 침대에 기댄 채 대답했다. 곧이어 전화 너머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많이 다쳤어? 민영이가 꽤 심하다고 그러던데.”고민영이 그에게 말한 모양이었다.“병원에서 치료받았어요. 괜찮아요.”“그래. 현아 신경 써줘서 고마워.”나는 낮게 말했다.“별말씀을, 친구잖아요.”나는 전화를 끊고 다시 잠을 청했다.그리
고민영이 놀라며 물었다.“형수님, 무슨 일이에요?”나는 조용히 앉아 있는 담현아를 가리키며 설명했다.“이분은 민영 씨 오빠의 와이프예요. 두 사람은 이제 막 혼인 신고를 마쳤고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어요. 민영 씨가 작은형수랑 싸우면 오빠가 곤란해지지 않겠어요?”고민영은 깜짝 놀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누구요?”나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누구겠어요? 정재 씨죠.”그 말을 듣자마자 고민영은 당황하며 담현아에게 급히 사과했다.“죄송해요, 작은 형수님. 저는 두 분이 그런 관계인지 전혀 몰랐어요... 아까 일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제가 형수님을 알지도 못했잖아요. 저도 당연히 제 친구를 도와야 했고요. 그냥 오해였던 거예요. 우리 합의할까요?”담현아는 원래 쿨한 성격이라 작은 일로 꽁해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고정재가 곤란해지는 것도 원치 않았기에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요. 애초에 제 잘못이었어요.”고민영도 성격이 꽤 시원시원했지만 문제는 그녀의 친구였다. 그 친구는 여전히 담현아를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며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나는 그녀에게 말했다.“얼른 병원 갈까? 상처 치료해야지.”“네, 치료는 해야죠.”담현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고민영의 친구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굳이 병원에 갈 필요도 없겠는데? 얼굴이 그 모양인데 흉터가 남든 말든 똑같지 않을까? 괜히 의료 자원을 낭비하지 말고.”담현아는 성질이 급한 편이었다. 그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대놓고 비웃으며 말했다.“수아 언니, 무식한 년이랑 말싸움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그런 년보다 몸매 좋고 예쁘고 돈 많고 남자 친구도 더 잘생기면 그만이죠. 굳이 입 아프게 싸울 필요가 없잖아요.”고민영의 친구는 화가 나서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이 벌떡 일어났지만 고민영은 급히 그녀를 붙잡으며 말했다.“내 형수님이야. 좀 참아!”담현아는 그 친구를 향해 가볍게 침을 뱉고는 경찰서를 나섰다. 나는 철없는
나는 방 안에 계속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다 고정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현성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아. 계속 널 찾고 있어. 며칠 후에 심리 상담을 받아보게 하려고 해.”나는 힘겹게 대답했다.“현성이가 절 기억하지 못해요.”그런데 어떻게 나를 찾고 있다는 거지?“계속 수아를 찾고 있어.”그는 나를 잊었으면서도 내 이름만은 기억하고 있었다.그 말을 듣자 마음이 저려 왔다.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내가 아무 말 없이 침묵하자 고정재는 다시 말을 이었다.“그냥 현성이 정신 상태랑 내 계획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야. 넌 부담 가질 필요 없어. 그리고 굳이 책임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 어차피 지금 네 곁에는 지훈 씨가 있잖아. 현성이한테 더 이상 마음을 쏟을 이유는 없어.”고정재는 언제나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말을 했다.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저도 선은 지킬 줄 알아요.”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더 이상 고현성과 엮여서는 안 된다는 걸.그런데도...그 오만했던 남자가 이렇게까지 망가졌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슴 한구석이 답답해났다.전화를 끊고 나서도 계속 방안에 틀어박힌 채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도 석지훈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그는 늘 그랬다. 밖에 있을 때면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었다.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것처럼 말이다.그때 원태웅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만나서 한잔 하자고 했지만 나는 거절하고 약을 먹고 그대로 잠들었다.한밤중, 담현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수아 언니, 나 맞았어요. 물론 나도 한 대 때리긴 했지만.”나는 반쯤 잠이 든 상태로 물었다.“누구한테?”“고민영.”나는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어쩌다 싸운 거야?”“태웅 오빠랑 클럽에서 놀다가 새벽에 나가려는데 우연히 고민영이랑 부딪혔어요. 처음엔 쿨하게 괜찮다고 했는데, 옆에 있던 친구가 끝까지 깐죽거리면서 날 모욕했어요. 그래서 나도 못 참고 한마디 했죠. 솔직히 싸울
아이스랜드의 눈보라는 점점 더 매서워졌다. 최희연은 몸을 움츠리며 조용히 말했다.“전... 자격이 없어요.”눈앞에 서 있는 이 순수한 남자를, 마치 풍경화에서 걸어 나온 듯한 이 남자를...그녀는 감히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나는 열등감이었다. 전에 그가 말했던 한마디로 결코 해결되지 않는 문제였다.“희연 씨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마세요.” 게다가 지금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복수뿐이었다.왕자현은 그녀의 말을 듣고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 단기간에 그녀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굳이 강요하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어차피 앞으로의 시간은 많았다. 남은 시간은 수십 년이나 되지 않는가.수십 년의 세월이라니, 그는 그것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설레었다.이전처럼 혼자가 아니라 그의 곁에는 아내가 있었다.그와 평생을 함께할 유일한 사람.부인.그는 이 단어를 되뇌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내일 병원에 함께 가서 흉터를 치료하죠.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사들을 초빙했습니다. 희연 씨의 얼굴을 완벽하게 회복시켜 줄 거라고 약속하더군요.”그 말을 듣자 그녀의 어두운 눈동자가 한순간 빛났다.왕자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미소를 지었다.“혹시 후회하진 않나요? 그때 저와 함께 운성시를 떠나지 않았던 것, 그리고... 그분을 기다리겠다고 했던 선택을.”5년 전.왕자현은 우연히 운성시에 들렀다가 그녀를 만났다.그때 그는 심한 부상을 입은 채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고 그를 숨겨주고 돌봐준 사람이 바로 최희연이었다.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약속했다.두 달 동안 함께 지내며 최희연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진서준이 살아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왕자현이 떠나던 날,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물었다.“희연 씨, 저랑 함께 아이스랜드에서 살겠어요? 평생을 약속할게요.”그때 그녀는 어떻게 대답했었지?그녀
“미쳤거나 바보가 됐거나 아니면 사람도 귀신도 아닌 존재가 됐다고 할까요? 저도 모르겠어요. 근데 제가 갖지 못하는 남자가 잘되는 건 절대 못 보죠.”나는 소리쳤다.“미친년.”나는 그녀의 전화를 끊어버리고 곧바로 함승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빠르게 고현성의 행방을 찾아내 병원으로 이송시켰고 나는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병실에 도착했을 때 고현성은 이미 의식을 잃었다.그리고 온몸에는 상처가 가득했다.심지어 얼굴에는 깊게 베인 흉터까지 남아 있었다.나는 병실 밖으로 나와 분노에 차서 물었다.“임지혜는?”“가주님께서 처리하시도록 잡아뒀습니다.”나는 눈이 붉어질 만큼 화가 치밀어 오른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데려오세요.”그 순간, 병실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고현성이 깨어났다.나는 급히 병실로 들어갔다.그는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나를 보자 몸을 움츠리며 뒷걸음질쳤다.낯선 환경이 불안한 듯 늘 강하던 그가 이토록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나는 화가 났다.아니, 화를 낼 기력조차 없이 가슴이 무너졌다. 그리고 결국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그가 과거에 내게 했던 일들을 떠올리면 우리가 이미 끝난 사이라는 걸 생각하면 분명 난 그에게 아무런 감정을 가져선 안 된다.그런데도 이 순간만큼은 그가 무사하기를 간절히 바랐다.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고현성.”그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고현성이... 누구예요?”순간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네 이름이야”그는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제가... 고현성이에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네가 기억하는 건 뭐야?”그는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불안한 눈빛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그쪽은 누구예요?”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난... 네 친구 수아야, 연수아.”그렇게 부르는 게 맞겠지.나는 그의 얼굴에 난 상처를 살펴보려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