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민수는 며칠 동안 쭉 연씨 별장에 있으면서 나의 일상을 보살펴줬다. 그러는 사이 그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상주로 언제 돌아가려고?”그러자 조민수가 웃으며 물었다.“그렇게 날 내쫓고 싶어?”“새언니가 화낼까 봐 그러지.”내가 대답했다.“네 새언니는 어려서 자주 삐져.”새언니는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예전에 오빠에게서 들었는데 확실히 좀 제멋대로인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다 이유가 있었고 절대 아무 이유 없이 그러진 않았다.만약 임지혜 같은 스타일을 만나면 거두절미하고 바로 해결해버렸기에 조민수의 옆에는 이성이 매우 적었다. 그런 그녀와 달리 나는 신경 쓰기도 귀찮았다. 그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틈을 준 것이었다.내가 웃으면서 말했다.“새언니 아직 어리니까 오빠가 많이 양보해줘.”그러더니 뭔가 생각났는지 조민수가 피식 웃었다.“난 걔를 탓한 적이 한 번도 없어.”새언니에 대한 조민수의 마음은 진심 같았다.“두 사람 꼭 행복해야 해.”“응. 알았어. 그렇게 할게.”내가 말했다.“오빠, 빨리 상주로 돌아가. 새언니가 보고 싶어 하겠어.”“그럼 넌? 난 여기 남아있을 거야.”내가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나도 하고 싶은 일이 있어. 개인적인 시간을 줘야지.”그를 돌려보낸 건 그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새언니와 싸운 상태이기에 더더욱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되었다.조민수는 망설이다가 결국 타협했다.“그럼 오늘 저녁에 나랑 파티에 참석하자.”“갑자기 무슨 파티?”조민수가 히죽 웃더니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임지혜 말이야, 자기는 너보다 더 귀하다고 했지? 오늘 저녁에 대체 누가 파렴치한 건지 제대로 보여주겠어. 수아야, 거절하지 마.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두려움이란 걸 알아야 해. 고현성이 하도 오냐오냐해서 너한테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는 거라고.”“난 신경 쓰지 않아.”“내가 신경 쓰여서 그래.”...나는 컨디션이 매우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민수와 함께 파티에 가기로
조민수는 운성시를 떠나기 싫어했지만 내가 계속 다그쳤다. 나를 집에 데려다준 후에도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버티고 있자 한숨을 쉬면서 물었다.“꼭 날 내쫓아야겠어?”이제 내 옆에 남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유일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최희연마저 감옥에 있었다.솔직히 말해서 조민수를 보내기 아쉬웠다. 그런데 요즘 그에게 자주 전화가 오는 사람이 있었다. 조민수에게도 처리해야 하는 일이 많아 그의 시간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죽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내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혼자 있을 시간을 좀 줘.”“9년이나 혼자 있었는데 부족해?”나는 순간 멈칫했다. 부모님이 돌아간 지 올해도 9년이었다.9년이라는 시간을 바삐 보낸 탓에 날 위해서 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유일하게 했던 선택이 내 인생의 가장 잘못된 결정이 되고 말았다.만약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고현성과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그동안 챙겨줘서 고마워, 오빠.”나의 결정을 바꿀 수 없자 조민수가 알겠다고 했다. 그는 방으로 들어와 직접 메이크업을 지워주었다. 서툴긴 했지만 그래도 인내심 있고 꼼꼼하게 지워주었다. 얼굴에 생긴 옅은 흉터를 본 순간 조민수는 더 속상해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이건 또 무슨 흉터야?”나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고현성이 임지혜를 지키려고 날 밀어버린 바람에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고현성에게 나도 아프다고 분명히 얘기했었지만 그는 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그 후에도 이 상처에 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실수로 넘어진 거야.”“아무리 넘어져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넘어져?”조민수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지만 내가 말하길 꺼리자 더는 캐묻지 않았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고씨 가문과의 계약을 취소하면 조씨 가문에 손해가 커?”나도 줄곧 사업을 해온 사람이라 조민수는 나에게 숨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어
많은 사람 앞에서 ‘바람이 사는 거리’를 연주한 적이 없었고 부모님이 돌아간 후에 이 곡을 건드린 적도 없었다. 용기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피하고 있었다.오늘이 어쩌면 마지막 수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곡을 가르치고 싶었다. 내 마음속에서 가장 소중했던 것을 학생들에게 주면서 앞으로도 날 기억하길 바랐다.바람이 사는 거리의 선율이 퍼져나갔다.악보가 기억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사람이 연주하는 걸 몇 번 듣기도 했다. 나는 과거와 얼마 전에 교실에서 듣던 연주곡, 그리고 꼬마 아가씨라 부르던 그 목소리를 추억하면서 연주했다. 피아노 소리가 전해졌고 심금을 울렸다.바람이 사는 거리... 사실 바람은 이곳에 살지도 남아있지도 않았고 그냥 스쳐 지나갔다. 우리가 어렸을 때 우리의 시간을 가져갔고 고현성은 바람이 지나간 뒤 이곳을 떠났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바람은 이미 지나갔고 거리에는 낙엽만이 가득했다. 어렴풋했던 화면들이 점점 희미해지다가 마지막에는 보이지 않았다. 뒷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한 사람의 추억만 남았다.모두 내 곁을 떠났고 이젠 나 혼자만 남았다...나는 웃고 있었지만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연주를 멈추자 학생들이 왜 우냐고 물었다.“그건 선생님의 비밀이야.”수업이 끝난 후 나는 가방을 챙기고 교실을 나가다가 멈칫하고 말았다.‘고현성이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내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에요?”고현성은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고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가 입술을 깨물면서 덤덤하게 물었다.“방금 왜 울었어?”내가 웃으며 물었다.“그게 현성 씨랑 무슨 상관이죠?”고현성은 말문이 막힌 나머지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계속 끈질기게 물었다.“비밀이 뭔데?”결국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말귀 못 알아들어요?”비밀이라는 게 바로 그해의 그 사람이었다. 눈앞의 고현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고현성과 이곳에서 싸우고 싶지 않아 이 말을 던지고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최희연이 고개를 내저으면서 이상한 소리를 했다.“이상하게 요즘 자꾸 수아 네가 보고 싶고 마음이 불안해. 갑자기 내 곁을 떠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서준이가 소리 없이 날 떠났던 것처럼.”나는 화들짝 놀랐다가 웃으며 말했다.“바보야, 난 계속 여기 있잖아.”“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아.”...감옥을 나온 후 나는 망설이다가 진서준이 사는 마을로 내려갔다. 마침 진서준의 할머니가 진서준과 바람 쐬러 나왔는데 나는 방해하지 않고 멀리서 따라갔다. 잠시 후 할머니가 잠깐 자리를 비웠다.진서준은 지금 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그 사람 요즘 어떻게 지내요?”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요?”그가 대답했다.“최희연이요.”“기억하고 있었어요?”“내가 바보도 아니고 당연히 기억하죠.”내가 물었다.“그럼 전에는 왜 모른 척했는데요?”나는 잠깐 멈칫하다가 웃었다.“혹시 열등감 때문이에요? 희연이랑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진서준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난 희연이랑 어울리지 않아요.”눈앞의 남자는 두 다리를 잃었지만 눈빛은 뚜렷했다. 만약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고 건강했더라면 건달이라고 해도 자신의 성과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 때문에 우린 모두 임지혜라는 여자를 만나고 말았다.“서준 씨, 희연이는 서준 씨가 필요해요.”“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에요, 이젠.”시골의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나는 차가운 하천을 보면서 슬픔에 잠겼다.“적어도 서준 씨는 살아있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을 가질 수 있는 능력도 있고. 근데... 난 암 말기예요. 살아봤자 한두 주일이나 더 살까요? 내일 갑자기 숨이 멎을지도 몰라요. 나한테는 미래라곤 없어요.”진서준의 충격받은 얼굴을 보며 나는 웃으면서 계속 말했다.“그러니까 자신한테 행복해질 기회를 줘요.”“수아 씨...”“알아서 잘해요. 희연이 실망하게 하지 말고.”나는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 이젠 다른 말
거의 죽을 때가 되니까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는지 내가 웃으며 말했다.“네. 용서할게요.”“연수아, 너 왜 그래?”내가 눈살을 찌푸린 채 물었다.“네?”“너 뭔가 이상해.”“아무 일 없어요.”“집이야? 지금 너희 집 밑이야.”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은 다음 방바닥에 떨어진 진통제를 치웠다. 그러고는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메이크업까지 했다. 준비하는 사이 고현성이 전화가 와도 받질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고현성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얼마 전에 우리 집 비밀번호를 알았기 때문이었다.1227, 바로 12월 27일이었다.고현성과 연애하기로 한 날에 알려줬었다. 그때 고현성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었다.“왜 1227이야?”나는 대충 둘러댔다.“그냥 아무 번호나 설정한 거예요.”메이크업을 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립스틱을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고현성은 왠지 예전과 다른 모습이었고 상의는 흰 셔츠 하나만 입고 있었다.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 이렇게 얇게 입었어요?”그러자 고현성이 피식 웃었다.“지금 날 걱정하는 거야?”내가 흘겨보자 고현성은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그동안 계속 생각했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대체 누구인지...”내가 가볍게 물었다.“그래서 누군지 알았어요?”“응. 내가 예전에 역겨워했던 그 여자더라고.”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나라고 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억울했다. 전혀 기쁘지 않았고 억울하기만 했다.내가 덤덤하게 물었다.“그래요?”흔들림 없는 나와 달리 되레 고현성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는 나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듯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런데 배가 너무 아파서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고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수아야,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래?”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무슨 기회요?”“내 아내가 되어줘. 우리 재결합하자.”나는 정신이 흐리멍덩했다.
문을 열지 않아 고현성의 얼굴에 나타난 기대를 보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물었다.“그래서요?”“수아야, 나랑 다시 만나.”내가 거절하려던 그때 고현성은 전화 한 통을 받고 가버렸다. 나는 통유리 앞에 서서 고현성을 내려다보았다. 베이지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나를 등진 뒷모습은 몇 년 전에 좋아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그는 다급하게 차를 몰고 떠났다.나는 다시 돌아서서 침대에 앉았다. 그때 조민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고 걱정스럽게 물었다.“몸은 좀 어때?”“괜찮아. 그냥 예전이 그리워서 가끔 떠오르긴 해. 민수 오빠, 희연이 말고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은 게 있는데 오빠가 내 얘기 들어볼래?”조민수가 다정하게 말했다.“응. 말해주면 나야 좋지.”“현성 씨를 처음 만났을 때 난 14살이었어. 현성 씨가 연주한 첫 곡이 ‘바람이 사는 거리’였는데 그 곡은 엄마가 생전에 나한테 연주해준 마지막 곡이었거든. 그렇게 그 사람이 내 마음속에 들어왔고 지금까지 속상한 일이 있어도 다 괜찮다고 생각했어.”“수아야,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오빠, 나 때문에 고씨 가문과 맞서지 마.”조민수는 멈칫하다가 속상한 말투로 말했다.“그래. 네 마음이 어떤지 알겠어.”‘내 마음이라...’나는 한결같이 그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다.“고마워, 오빠.”“수아야, 며칠 후면 설이야.”내가 부탁했다.“운성에는 오지 마.”내가 죽는 모습을 조민수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수아야...”전화를 끊은 후 나는 침대에서 그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지금일 수도 있고 내일 혹은 모레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요 이틀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세 번째 날에 나는 고현성의 전화를 받았다.“미안해.”“괜찮아요. 지혜 씨랑 행복하게 살아요.”사흘 전 고현성이 다급하게 떠났던 이유가 임지혜의 자살 소동 때문이었다.비밀이 아니라서 기사만 찾아보면 알 수 있었다. 임지혜는 이런 방법을 써서라도 고현성을 옆에 두고 싶어 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든 이젠 중요
결혼식이 앞당겨졌다. 임지혜의 요구대로 섣달그믐날에 올리기로 했다. 고씨 가문에 새해 명절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임지혜는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안방에서 신랑이 데리러 오길 기다렸다. 그런데 정작 신랑은 우울한 표정으로 서재에 앉아 있었다.오늘은 결혼식 날이었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마치 오늘 결혼식의 주인공이 그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무슨 사명을 완성하듯 무감각했다.고현성은 결혼반지를 이리저리 만지다가 연수아와 결혼할 때 그녀가 직접 끼워준 반지라는 게 문득 떠올랐다. 연수아 생각에 그의 마음은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연수아만 그의 마음을 흔들 수 있었다.소파에 앉아 있던 그는 연수아에게 전화하고 싶었다. 휴대전화를 들자마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는데 연수아였다.그 이름을 본 순간 고현성은 잠깐 멍해졌다.‘왜 갑자기 나한테 전화했지?’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수아의 이름을 부르려는데 목놓아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고현성 씨, 수아가 집에서 숨을 거뒀어요...”고현성이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숨을 거두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집에서 숨을 거두다니?’휴대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고현성은 큰일이 났다는 예감이 밀려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수아가... 세상을 떠났어요.”휴대전화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고현성이 연씨 가문으로 달려갔을 때 여자 한 명이 있었는데 그도 아는 연수아의 절친 최희연이었다.‘연수아는?’연수아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생기라곤 없는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안색이 매우 창백했고 볼에 옅은 흉터가 있었다. 화장기 없는 그녀의 얼굴을 처음 봤는데 생각보다 앳됐고 아무 근심 걱정 없는 꼬마 아가씨 같았다.사실 연수아도 어린데...고현성은 부들부들 떨면서 그녀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는 품에 끌어안았다. 마치 소중한 뭔가를 잃은 것처럼 두려움이 밀려왔다.마침 그때 임지혜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고현성은 온몸을 떨면서 연수아를 안고 있었다.그 순간
고현성이 주는 상처를 수도 없이 받으면서 떠날 때는 축복을 건넸다. 차라리 그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렇게 용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진규만이 또 말했다.“연수아 씨가 바라던 게 하나 있었습니다.”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고현성을 보며 진규만은 한숨을 내쉬었다.“연수아 씨가 떠날 때 직접 보내 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바람이 사는 거리’를 연주해달라고 했습니다.”고현성은 고개를 들어 놀란 눈으로 진규만을 쳐다보았다.“뭐라고요?”“고현성 씨가 연주하는 ‘바람이 사는 거리’를 듣고 싶다고 했어요.”‘난 피아노 칠 줄 모르는데...’고현성의 시선이 옆에 있던 고정재에게 향했다. 그는 검은 코트를 입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고 그의 옆에 비싼 피아노가 있었다.고현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진작 알고 있었어?”“응. 쟤가 좋아했던 사람은 나였어.”고정재는 절반 정도 닫힌 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연수아의 목 아랫부분만 보였는데 몸이 매우 말라 있었고 발목에 점 하나가 있었다. 왠지 연수아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 본 적이 있었는데 이 모습이 아니었고 게다가 피부도 더 거칠어 보였다. 연수아는 늘 예쁘게 보이길 원했었는데 지금은...고정재의 의혹이 점점 더 커졌다. 하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아 결국 그 의혹을 잠재웠다. 그제야 연수아가 하얀 옷을 입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연수아의 존재를 처음 알았을 때 연수아가 입고 있었던 옷이었다. 뜻밖에도 그는 다 기억하고 있었고 이런 작을 일까지도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다.마치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어떻게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했을까?고정재는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 그때 이름을 알려줬더라면 이런 오해가 생기지 않았을 텐데.연수아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고정재의 성격이라면 절대 상처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연수아도 매일 평온하게 환하게 웃으면서 지냈을 것이다.‘꼬마 아가씨...’고현성은 연수아가 죽기 전 옆에 두었던 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