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죽을 때가 되니까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는지 내가 웃으며 말했다.“네. 용서할게요.”“연수아, 너 왜 그래?”내가 눈살을 찌푸린 채 물었다.“네?”“너 뭔가 이상해.”“아무 일 없어요.”“집이야? 지금 너희 집 밑이야.”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은 다음 방바닥에 떨어진 진통제를 치웠다. 그러고는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메이크업까지 했다. 준비하는 사이 고현성이 전화가 와도 받질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고현성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얼마 전에 우리 집 비밀번호를 알았기 때문이었다.1227, 바로 12월 27일이었다.고현성과 연애하기로 한 날에 알려줬었다. 그때 고현성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었다.“왜 1227이야?”나는 대충 둘러댔다.“그냥 아무 번호나 설정한 거예요.”메이크업을 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립스틱을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고현성은 왠지 예전과 다른 모습이었고 상의는 흰 셔츠 하나만 입고 있었다.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 이렇게 얇게 입었어요?”그러자 고현성이 피식 웃었다.“지금 날 걱정하는 거야?”내가 흘겨보자 고현성은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그동안 계속 생각했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대체 누구인지...”내가 가볍게 물었다.“그래서 누군지 알았어요?”“응. 내가 예전에 역겨워했던 그 여자더라고.”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나라고 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억울했다. 전혀 기쁘지 않았고 억울하기만 했다.내가 덤덤하게 물었다.“그래요?”흔들림 없는 나와 달리 되레 고현성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는 나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듯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런데 배가 너무 아파서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고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수아야,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래?”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무슨 기회요?”“내 아내가 되어줘. 우리 재결합하자.”나는 정신이 흐리멍덩했다.
문을 열지 않아 고현성의 얼굴에 나타난 기대를 보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물었다.“그래서요?”“수아야, 나랑 다시 만나.”내가 거절하려던 그때 고현성은 전화 한 통을 받고 가버렸다. 나는 통유리 앞에 서서 고현성을 내려다보았다. 베이지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나를 등진 뒷모습은 몇 년 전에 좋아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그는 다급하게 차를 몰고 떠났다.나는 다시 돌아서서 침대에 앉았다. 그때 조민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고 걱정스럽게 물었다.“몸은 좀 어때?”“괜찮아. 그냥 예전이 그리워서 가끔 떠오르긴 해. 민수 오빠, 희연이 말고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은 게 있는데 오빠가 내 얘기 들어볼래?”조민수가 다정하게 말했다.“응. 말해주면 나야 좋지.”“현성 씨를 처음 만났을 때 난 14살이었어. 현성 씨가 연주한 첫 곡이 ‘바람이 사는 거리’였는데 그 곡은 엄마가 생전에 나한테 연주해준 마지막 곡이었거든. 그렇게 그 사람이 내 마음속에 들어왔고 지금까지 속상한 일이 있어도 다 괜찮다고 생각했어.”“수아야,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오빠, 나 때문에 고씨 가문과 맞서지 마.”조민수는 멈칫하다가 속상한 말투로 말했다.“그래. 네 마음이 어떤지 알겠어.”‘내 마음이라...’나는 한결같이 그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다.“고마워, 오빠.”“수아야, 며칠 후면 설이야.”내가 부탁했다.“운성에는 오지 마.”내가 죽는 모습을 조민수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수아야...”전화를 끊은 후 나는 침대에서 그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지금일 수도 있고 내일 혹은 모레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요 이틀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세 번째 날에 나는 고현성의 전화를 받았다.“미안해.”“괜찮아요. 지혜 씨랑 행복하게 살아요.”사흘 전 고현성이 다급하게 떠났던 이유가 임지혜의 자살 소동 때문이었다.비밀이 아니라서 기사만 찾아보면 알 수 있었다. 임지혜는 이런 방법을 써서라도 고현성을 옆에 두고 싶어 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든 이젠 중요
결혼식이 앞당겨졌다. 임지혜의 요구대로 섣달그믐날에 올리기로 했다. 고씨 가문에 새해 명절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임지혜는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안방에서 신랑이 데리러 오길 기다렸다. 그런데 정작 신랑은 우울한 표정으로 서재에 앉아 있었다.오늘은 결혼식 날이었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마치 오늘 결혼식의 주인공이 그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무슨 사명을 완성하듯 무감각했다.고현성은 결혼반지를 이리저리 만지다가 연수아와 결혼할 때 그녀가 직접 끼워준 반지라는 게 문득 떠올랐다. 연수아 생각에 그의 마음은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연수아만 그의 마음을 흔들 수 있었다.소파에 앉아 있던 그는 연수아에게 전화하고 싶었다. 휴대전화를 들자마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는데 연수아였다.그 이름을 본 순간 고현성은 잠깐 멍해졌다.‘왜 갑자기 나한테 전화했지?’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수아의 이름을 부르려는데 목놓아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고현성 씨, 수아가 집에서 숨을 거뒀어요...”고현성이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숨을 거두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집에서 숨을 거두다니?’휴대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고현성은 큰일이 났다는 예감이 밀려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수아가... 세상을 떠났어요.”휴대전화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고현성이 연씨 가문으로 달려갔을 때 여자 한 명이 있었는데 그도 아는 연수아의 절친 최희연이었다.‘연수아는?’연수아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생기라곤 없는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안색이 매우 창백했고 볼에 옅은 흉터가 있었다. 화장기 없는 그녀의 얼굴을 처음 봤는데 생각보다 앳됐고 아무 근심 걱정 없는 꼬마 아가씨 같았다.사실 연수아도 어린데...고현성은 부들부들 떨면서 그녀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는 품에 끌어안았다. 마치 소중한 뭔가를 잃은 것처럼 두려움이 밀려왔다.마침 그때 임지혜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고현성은 온몸을 떨면서 연수아를 안고 있었다.그 순간
고현성이 주는 상처를 수도 없이 받으면서 떠날 때는 축복을 건넸다. 차라리 그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렇게 용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진규만이 또 말했다.“연수아 씨가 바라던 게 하나 있었습니다.”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고현성을 보며 진규만은 한숨을 내쉬었다.“연수아 씨가 떠날 때 직접 보내 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바람이 사는 거리’를 연주해달라고 했습니다.”고현성은 고개를 들어 놀란 눈으로 진규만을 쳐다보았다.“뭐라고요?”“고현성 씨가 연주하는 ‘바람이 사는 거리’를 듣고 싶다고 했어요.”‘난 피아노 칠 줄 모르는데...’고현성의 시선이 옆에 있던 고정재에게 향했다. 그는 검은 코트를 입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고 그의 옆에 비싼 피아노가 있었다.고현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진작 알고 있었어?”“응. 쟤가 좋아했던 사람은 나였어.”고정재는 절반 정도 닫힌 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연수아의 목 아랫부분만 보였는데 몸이 매우 말라 있었고 발목에 점 하나가 있었다. 왠지 연수아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 본 적이 있었는데 이 모습이 아니었고 게다가 피부도 더 거칠어 보였다. 연수아는 늘 예쁘게 보이길 원했었는데 지금은...고정재의 의혹이 점점 더 커졌다. 하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아 결국 그 의혹을 잠재웠다. 그제야 연수아가 하얀 옷을 입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연수아의 존재를 처음 알았을 때 연수아가 입고 있었던 옷이었다. 뜻밖에도 그는 다 기억하고 있었고 이런 작을 일까지도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다.마치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어떻게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했을까?고정재는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 그때 이름을 알려줬더라면 이런 오해가 생기지 않았을 텐데.연수아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고정재의 성격이라면 절대 상처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연수아도 매일 평온하게 환하게 웃으면서 지냈을 것이다.‘꼬마 아가씨...’고현성은 연수아가 죽기 전 옆에 두었던 카
“수아야, 금방 수술했으니까 푹 쉬어야 해.”나는 죽지 않았다. 조민수는 나를 데리고 운성시를 떠나 수술을 시켜줬다. 성공률이 단 1%밖에 안 되는 그 수술을.그날 밤 조민수가 연씨 별장에 도착했을 때 내가 숨이 거의 넘어가기 직전이라고 했다. 그때 나는 하얀색 치마를 입고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얼굴에 핏기라곤 전혀 없었다.수술이 완전히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실패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나에게 시간을 더 벌어주었다.최희연이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힘겹게 입을 벌리자 다급하게 말렸다.“의식이 금방 돌아왔고 아직 기계를 꽂고 있어서 잠시 말하기 어려울 거야.”나는 알겠다고 눈을 깜빡였다. 최희연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며칠 전에 조민수 씨의 제안대로 고현성한테 전화했어. 그 사람이 와서 보더니 네가 죽은 줄 알고 얼마나 슬프게 울던지. 널 위해 장례식까지 치러줬고 변호사더러 네 유언장까지 읽게 했어.”‘장례식이라... 운성에 이젠 연수아라는 사람이 없겠네?’그 생각에 나의 두 눈에 슬픔에 가득 차올랐다.최희연은 계속 누워있어서 굳어버린 나의 팔을 주물러주며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민수 씨가 널 죽은 사람으로 위장해서 고현성을 벌하려 했어. 속상하고 후회하면서 평생 죄책감 갖고 살라고. 근데 장례식에서 가슴이 찢어질 듯이 우는 거 보고 내가 마음이 약해져서 그냥 사실을 얘기해줬어.”‘가슴이 찢어질 듯이?’내가 정신을 잃기 전에 고현성이 집으로 날 찾아와서 이런 얘기를 했었다.“그동안 계속 생각했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대체 누구인지... 내가 예전에 역겨워했던 그 여자더라고.”그리고 이런 말도 했었다.“내 아내가 되어줘. 우리 재결합하자.”그때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고현성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결국 임지혜와 결혼하기로 했다.나는 입술을 적시면서 힘겹게 물었다.“넌 그 사람 밉지 않아?”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졌다.전에 고현성은 임지혜를 위해서 최희연을 감옥에 보냈다. 감옥에서의 하루는 마치 1년 같았다. 그
나는 경악하며 물었다.“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9년 전에 네가 만났던 사람은 고현성이 아니야.”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고 내 이름을 부르는 최희연의 목소리만 들렸다. 순간 머릿속이 텅 비더니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최희연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그 뜻을 이해했다.나에게는 마음속 깊이 간직한 비밀이 있었다. 바로 고현성을 9년이나 짝사랑했다는 것이었다.어렸을 적엔 항상 그의 뒤를 쫓아다녔고 성인이 된 후에는 바라고 바라던 그의 아내가 되었다.9년, 나는 9년이나 그 남자만을 바라보았고 조심스럽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짝사랑을 지켜왔었다.그 사람이 나에게 그 어떤 사랑도, 동정도 주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그의 옆을 지켰다. 왜냐하면 나의 사랑은 순수했고 평생 고현성 하나뿐이었으니까.그런데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가 고현성이 아니라는 소리를 들었다.모든 추억과 감정들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그 생각에 가슴이 갑자기 저리기 시작했다.결국 나는 다시 응급실로 실려 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조민수가 병실에 있었다. 내가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며 머리를 쓰다듬더니 나지막하게 물었다.“수아야, 왜 울어?”‘내가 울었다고?’처음으로 ‘고현성’을 봤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훤했고 다정한 목소리로 꼬마 아가씨라고 부르던 모습, 교실에서 날 위해 ‘바람이 사는 거리’를 연주해주던 모습이 또렷하게 기억났다.우리 둘의 추억이 얼마 없어서 그런지 나는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겼다. 마치 귀한 보물처럼 마음속에 간직했다.그런데 지금 최희연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9년 전에 네가 만났던 사람은 고현성이 아니야.”만약 그때 날 꼬마 아가씨라 부르던 남자가 고현성이 아니라면... 3년 동안 고씨 가문 사모님으로서 받았던 고통이 다 우스워지는 게 아닌가?그리고 나의 사랑도 나를 기만했던 거고?마음속의 고통이 가시지 않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를 내저었다. 칼로 가슴을 도려낸 듯 피가 뚝뚝 흐르는 것 같았다.
만약 고정재가 9년 전에 피아노곡을 연주하고 날 꼬마 아가씨라 부르던 그 남자라면 최희연의 고양이 카페에서 봤던 익숙한 모습이 아마 그 사람일 것이다.수년 전처럼 인상이 깊었고 기억 속의 따뜻했던 그 남자의 모습과 완전히 겹쳤다.그때 최희연이 나에게 물었었다.“수아야, 왜 울어?”나도 울고 싶지 않았지만 그 뒷모습은 내가 9년이나 따라다녔던 뒷모습이었고 뼛속까지 그리워했던 남자였으며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부렸던 욕심이었다.그날 밤 음악 콘서트가 끝난 후 나는 그 사람을 찾으러 무대 뒤로 갔었다. 그런데 아무 수확이 없어 실망감을 드러낸 채 음악 센터를 나왔었다.그러다가 하이힐을 신고 길거리를 거닐고 있던 그때 바닥에 비스듬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나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고 그가 눈웃음을 지으면서 나에게 말했다.“꼬마 아가씨, 왜 또 따라와?”그때의 ‘고현성’이야말로 내가 진심으로 사랑한 남자였다. 그날 밤 그는 일부러 그곳에서 나를 기다렸고 나는 그 사람을 고현성이라 불렀다.내가 사람을 착각했다는 걸 분명 알면서도 바로잡지 않았고 계속 기다리고 있는 걸 알면서도 설명하지 않았다. 사실 그도 다정하면서 잔인하고 매정한 사람이었다....요즘 운성시는 비가 그치질 않았다. 내가 돌아왔을 때도 하늘은 어둡고 칙칙했다. 내가 운성시로 돌아오기 전에 조민수는 나의 사망 신고를 철수했다. 다시 말해 유언장이 아직 효력을 발생하지 않았다.고현성이 선양 그룹을 관리하긴 했지만 명의상으로는 여전히 내 회사였다.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고현성과 선양 그룹을 빼앗으려고 돌아온 게 아니었으니까.나는 고정재를 만나서 대답을 듣고 싶었고 그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9년 동안 간직해온 마음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나는 캐리어를 끌고 공항 밖으로 걸어 나갔다. 택시에 타자마자 최희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내가 수술을 마치고 상태가 안정되고 나서야 최희연은 마음을 놓고 진서준을 만나러 갔다. 두 사람이 지금 어떻게
최희연의 말은 나의 심장을 쿡쿡 찔렀다. 나는 단 한 번도 이런 문제들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까.만약 진짜 최희연의 말대로 그런 거라면 내가 운성시로 돌아온 목적이 무엇일까?그런데 나의 마음은 나더러 운성시로 돌아가라고 했다.나는 두 눈을 감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나한테 다 생각이 있어.”잠시 후 나는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그나저나 넌 왜 계속 현성 씨의 편을 들어?”아무리 원수에게 은혜를 베푼다고 해도 이건 너무 지나친 거 아닌가?나의 질문에 최희연이 멋쩍게 대답했다.“난 네가 걱정돼서 그러지.”내가 또 다른 걸 물을까 봐 최희연은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후 내 머릿속에는 최희연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그녀가 했던 질문들은 전부 피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까지도 아직 정확한 답을 찾지 못했고 대답해주는 사람도 없었다.한 시간 후 차가 연씨 별장 문 앞에 멈춰 섰다. 캐리어를 끌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본 순간 나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현성 씨가 왜 여기에 있어요?”그는 흰 셔츠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하얀 손목에는 매끄러운 염주를 하고 있었다. 전에는 이런 걸 하고 다니는 습관이 없었는데.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소용돌이처럼 깊이 빠질 것만 같았다.잠시 후 그가 눈살을 찌푸리고 낯선 사람을 대하듯 물었다.“날 알아?”나는 경악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당신은 날 몰라요?”그는 나를 싸늘하게 본 후 휙 가버렸다.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재빨리 고승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승철이 전화를 받고 무척이나 놀란 듯했다.“수아야, 네가 나한테 전화할 줄은 몰랐어...”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고승철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어쨌거나 내가 운성시로 돌아오기 전에 조민수가 내 소식을 알렸으니까. 고씨 가문은 이런 소식에 아주 예민했다. 그리고 선양 그룹도 아직 그들의 손에 완전히 들어간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