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의 행방은 나도 몰라. 걔는 나랑 연락이라는 걸 안 하거든.”고승철이 실망스러운 말투로 말하다가 갑자기 물었다.“그나저나 정재 행방은 왜?”문득 고현성이 금운의 마을에서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고정재는 성격이 무뚝뚝한 데다가 속으로 고씨 가문을 업신여기고 있어 고승철과 점점 연락을 끊었다고 했다.행방을 모른다는 고승철의 말에 나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드리워졌다. 조민수는 고정재가 아직 운성시에 있다는 것만 알아냈지, 구체적인 행방은 찾지 못했다.고승철이 나를 부르면서 또 물었다.“정재를 찾는 이유가...”나는 그의 말을 자르고 대충 둘러댔다.“우리 엄마가 생전에 피아노를 좋아하셨거든요. 예전에 고정재 씨 연주회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아주 진한 감동을 받았어요. 그래서 우리 엄마 9주년 제사에 고정재 씨를 초대하고 싶어서요.”아마 이보다 더 구차한 변명은 없을 것이다. 고승철은 내가 얘기하길 꺼리자 더는 캐묻지 않고 고정재의 행방을 알고 있는 사람을 알려주었다.“현성이는 무조건 형 소식 알고 있을 거야.”“그럼 아버님이 대신 물어봐 주실 수 있어요?”내가 망설이며 묻자 고승철이 난감해하며 거절했다.“정재 일은 지금까지 신경 쓴 적이 없었어. 그러니까 수아 네가 직접 현성이한테 물어봐. 정재 어디 있는지.”고승철의 교활한 속셈을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나더러 직접 고현성을 찾아가라고 한 건 우리에게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어서였다.그렇다. 그는 아직 우리가 다시 잘되길 바라고 있었다. 왜냐하면 연씨 가문이 아직 나의 손에 있으니까.그런데 문제는 고현성이 나를 잊어버렸다. 갑자기 찾아가서 고정재의 행방에 대해 묻는다면 절대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내가 고승철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자 고승철은 전화를 뚝 끊은 다음 고현성이 지금 지내고 있는 거처의 주소를 보냈다. 나는 그 문자를 보자마자 그냥 삭제해버렸다.다른 방법을 찾아서 고정재를 찾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고현성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우린 만나지 말았
나는 항상 메이크업을 했다. 하나는 깔끔하게 살고 싶어서였고 다른 하나는 얼굴의 옅은 흉터를 가리기 위해서였다.나는 입술에 팥색 립스틱을 바른 다음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웨이브를 넣었다. 그러고는 고급스러운 원피스를 입고 하이힐까지 신은 후 남자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고현성과 고정재의 얼굴이 똑같긴 했지만 고정재는 절대 우리 집 밑에서 기다리지 않았다. 하여 아까 차에서 내리자마자 자연스럽게 고현성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었다.고현성의 눈빛이 차갑고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나에게 궁금한 게 많으면서도 경계하는 듯했다.나는 입술을 깨물고 그에게 물었다.“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그가 아무 말이 없자 내가 계속 말했다.“여긴 우리 집이에요.”고현성이 물었다.“너희 집이라고?”막연한 그의 눈빛을 보며 내가 대답했다.“네. 우리 집이에요.”고현성이 갑자기 물었다.“누구야, 너?”바람이 나의 긴 머리를 스쳤다.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면서 물었다.“왜 그렇게 망부석처럼 서 있어요? 이 집에 사는 사람이 현성 씨한테 중요한 사람인가요?”가시 돋친 나의 말에 고현성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경고하듯 목소리를 내리깔았다.“말조심해.”나는 일단 한발 물러섰다.“알았어요. 그럼 대답해봐요. 왜 여기에 있는지? 아까 갔잖아요.”그는 나와 말을 섞고 싶지 않은지 입을 꾹 다물었다.고현성은 늘 이런 남자였다. 모르는 사람이거나 싫어하는 사람은 거들떠보지 않았고 심지어 무시하기도 했다.그의 이런 모습에 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거기에 예전에 나에게 못 해줬던 것까지 생각이 난 바람에 좋지 않은 태도로 말했다.“당장 가요. 그렇지 않으면 신고할 겁니다.”잠시 후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에게 알려주었다.“여긴 내 집이고 당신은 이곳에 있으면 안 돼요. 그러니까 당장 나가요.”내가 다시 별장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연수아 맞지?”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날 기억해요?”“사람들이 연수아라는 여자가
고현성은 왜 이혼해야 하냐고 물었다. 왜 이혼했냐가 아니라.전자는 이혼한 것이 아쉽다는 뜻이 담겨있었고 후자는 그저 이혼한 이유가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내 착각이야?’순간 고현성이 기억을 잃은 게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만약 진짜 기억을 잃었다면 이렇게 묻지 말았어야 했다. 게다가 참 어이없는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계속 내 옆을 떠나고 싶었던 사람이 그였고 또 이혼하려 했던 사람도 그였으니까.그때 내가 이혼 합의서와 연씨 가문의 권력으로 연애하자고 유혹했을 때도 고현성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토록 나를 싫어했었다.나는 나의 손목을 잡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웃으며 물었다.“이유 알고 싶어요? 현성 씨 질문에 대답할 테니까 현성 씨도 내 질문에 대답해요. 어때요?”나의 미소는 진심 어린 미소가 아니었다. 고현성이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물었다.“뭐가 알고 싶은데?”“현성 씨 형 고정재 어디 있어요?”“사람들이 우리 이혼한 이유가 네가 줄곧 좋아한 사람이 형이어서래. 그리고 난 그냥 대체품일 뿐이고. 맞아?”고현성이 잔뜩 굳은 얼굴로 물었다. 내가 당황하거나 미안해하거나 후회하는지 보려고 나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나는 다른 사람에게서 내가 고정재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는 게 두려워 도망치듯 별장으로 들어갔다.다시 통유리 앞으로 왔을 때 고현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번에도 고정재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했다.무릎으로 머리를 받치고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조민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운성으로 왔어?”“응. 그 사람 만났어.”조민수가 또 물었다.“고현성을?”“응. 고현성.”조민수가 머뭇거리면서 내 이름을 불렀다.“수아야.”내가 물었다.“왜?”“너 선양 그룹 꼭 되찾아야 해...”“오빠,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조민수가 무슨 계획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고씨 가문이 지금 선양 그룹의 자원을 이용하여 대성 그룹을 공격하고 있어. 근데 내가 어떻게 선양 그룹을 공격
“아, 그럼 됐어요.”헛걸음했다는 생각에 내가 한숨을 쉬면서 그냥 가려는데 안에서 한 소녀가 달려 나왔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하얀 피부, 그리고 허리도 아주 잘록했다.그녀는 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혼자 있는 나를 보고는 달려와서 팔을 잡고 물었다.“혹시 연수아 언니?”내가 고개를 끄덕였다.“누구...”“희연 언니 후배 윤다은입니다. 오늘 저녁에 제가 잘못을 저질러서 잡혀 왔는데 희연 언니가 보석해주겠다고 했거든요. 언니는 마을에 있어서 오지 못하니까 친구한테 부탁했다고 했어요. 근데 우리 오빠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어요.”참으로 밝고 활기가 넘치는 소녀였다. 사람들과의 소통이 서툴렀던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정하게 물었다.“오빠는요? 나 운전하고 왔는데 데려다줄까요?”그때 복도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베이지색 코트에 안에는 옅은 색 스웨터를 매치했고 목에는 그 베이지색 목도리를 하고 있었다.그의 그윽한 눈빛에 나는 삽시간에 빠져들었다. 그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똑똑하게 들었다.“꼬마 아가씨.”목소리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내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가만히 있자 윤다은이 나의 팔을 잡고 그에게로 다가갔다.“오빠, 이분이 바로 희연 언니 친구 연수아 언니야. 날 보석해주러 왔어.”그러고는 나에게 소개해주었다.“수아 언니, 우리 오빠 고정재예요. 나한테 고현성이라고 오빠가 더 있어요. 그리고 난 두 오빠의 엄마가 입양한 딸 윤다은이에요.”고정재라는 이름을 듣기만 해도 미칠 것만 같은데 내 앞에 떡하니 서 있으니 오죽하겠는가.내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아무 말 없이 고정재를 빤히 쳐다보자 윤다은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언니, 왜 아무 말이 없어요?”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그러자 윤다은도 히죽 웃었다.“수아 언니가 우릴 집까지 데려다주겠대.”고정재는 길고 하얀 손을 내밀면서 정중하게 인사했다.“고정재입니다.”나는 그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면서 그때 나에게 했었던 질문을 떠올렸다.
운성시의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주룩주룩 내렸다. 고정재는 베이지색 목도리로 비를 막아주었다. 그의 다정함에 나의 마음은 뒤죽박죽이 돼버린 동시에 속상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런데 그날 왜 나를 속였는지 물으려고 입을 떼자마자 고현성이 갑자기 튀어나와 나의 말을 가로챘다. 나는 경악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고현성이 온몸이 홀딱 젖은 채로 비를 맞고 있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고정재가 나서서 설명했다.“다은이가 잘못한 일이 있었는데 연수아 씨가 우릴 데려다줬어.”나를 꼬마 아가씨라고 부른 것 외에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건 예의상 부른 것이었다.내가 잠깐 멈칫한 그때 치명적인 문제 하나가 떠올랐다. 바로 고정재에게 있어서 나는 남동생의 전처라는 것. 그것도 한때 고현성의 합법적인 아내...갑자기 그날 밤 왜 자신이 고정재라고 말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내가 누구인지 알고 나와 일정한 거리를 뒀을 수도 있었다.나는 그렁그렁한 두 눈으로 고정재를 쳐다보았다.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기고 싶었으나 고현성이 옆에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그때의 꼬마 아가씨처럼 고정재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면서 뒤에 숨고 싶었지만 이젠 나는 어른이 되었다. 꼬마 아가씨가 어엿한 성인 여성이 되었다.마음이 저릿해진 나는 이 자리를 떠나고 싶어 고개를 숙이고 차에 올라탔다. 나는 차에 시동을 걸고 똑같게 생긴 두 남자를 쳐다보았다.한 사람은 친절하고 다정하기 그지없었지만 한 사람은 인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차갑기만 했다.내가 베이지색 목도리를 옆에 내려놓고 가려는데 고현성이 갑자기 조수석 차 문을 열었다. 나는 싫은 티를 내면서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봄이긴 해도 온몸이 흠뻑 젖으면 불편하기만 했다. 고현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수석에 올라타더니 차갑게 물었다.“전 남편을 집까지 데려다주는 건 괜찮겠지?”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데려다주고 싶지 않았지만 낮에 조민수의 전화가 생각나 잠시 망설이다가 태워주기로 했다.차가
최희연이 화들짝 놀라면서 재빨리 사과하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괜찮아.”그렇지 않아도 만나고 싶었다. 비록 이번에 잠깐 만났지만 그래도 거처를 알아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더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사실 이젠 더 얘기할 것도 없다는 걸 알지만 얘기하지 않으면 마음속의 집념을 지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최희연이 나에게 했던 질문의 답도 모르겠고...고현성과 고정재 중에 대체 누굴 사랑하냐는 질문 말이다.나의 사랑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이젠 나마저도 헷갈렸다.최희연과 전화를 끊은 후 고현성이 베이지색 목도리를 빤히 보면서 목소리를 내리깔고 물었다.“우리 이혼한 이유가 진짜 고정재 때문이야? 고정재를 그렇게 사랑해?”나는 고현성의 떨리는 마음을 알아채지 못하고 차분하게 설명했다.“몇 개월 전에 나랑 이혼하겠다고 한 사람은 현성 씨예요. 그땐 내가 아무리 빌어도 소용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기억을 잃었단 핑계로 날 몰아세우지 말아요.”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고현성이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나는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지만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민수 오빠가 그러는데 당신이 선양 그룹을 이용하여 대성 그룹을 공격하고 있다면서요? 선양 그룹은 내 것이고 되찾을 권리도 있어요. 그러니까 조용하게 살고 싶으면 이쯤에서 멈춰요.”고현성은 내 말을 듣기나 들었는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고씨 별장에 데려다준 후 재빨리 떠났다.잠시 후,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전에 내가 먼저 걸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던 그 전화였다. 고현성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난 대성 그룹을 계속 공격할 거야. 네가 선양 그룹을 다시 가져가면 모를까. 아니면 너한테 방법 하나 알려줄게. 나랑 재결합하면 대성 그룹 더는 건드리지 않을게. 그렇지 않으면 양쪽 모두 다치는 한이 있더라도 대성 그룹을 망가뜨릴 거야.”내가 큰소리로 호통쳤다.“고현성 씨, 억지 부리지 말아요.”선양 그룹을 되찾을 수는 있지만 되찾은 후
임지혜는 무척이나 속상한 듯했다. 전에 임지혜를 미칠 정도로 질투했었던 나 자신이 떠올랐다. 왜냐하면 고현성은 그녀에게만 다정했으니까.그때 나는 9년 전에 따라다녔던 남자와 나중에 만난 고현성이 다른 사람이라는 걸 몰랐기에 모든 사랑을 고현성에게만 쏟아부었다. 그러면서 이 결혼에는 사랑이 없어도 서로 존중하면서 살 줄 알았고 고현성이 남편의 도리를 다할 줄 알았다.그동안 짝사랑했던 기억만 생각하면 정말 어이가 없었다. 나는 허리를 굽혀 그녀에게 물었다.“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요?”계단 위에 서 있었던 터라 허리를 굽히고서야 임지혜와 시선이 맞춰졌다. 그런데 그녀가 뒷걸음질 쳤다.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내가 무서워요?”임지혜가 두 눈을 감았다.“너무 눈부셔요.”“네? 그게 연적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임지혜는 고현성의 마음을 흔들었던 여자였기에 당연히 얼굴도 예뻤고 스타일도 좋았다.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어서 청순가련미가 더욱 돋보였고 전혀 사람을 해칠 것 같지 않았다. 심지어 예전에 나쁜 일을 수도 없이 했어도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예뻐 봤자 여전히 나와는 비교가 되질 않았다.이건 과장이 아니라 나의 미모와 몸매는 거의 따라올 자가 없었고 내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면 사람들의 시선을 확 사로잡는 정도였다.이런 나만의 우세를 이용하여 고현성과 결혼하기 전에는 상업계에서 정말 물 만난 물고기였다. 선양 그룹이 부진하기 시작한 건 결혼 후였고 그 이유도 고현성이 사적으로 겨냥했기 때문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양 그룹은 여전히 끄떡없었다. 만약 휘청거렸더라면 고승철이 나와 고현성의 재결합을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선양 그룹을 손에 넣으면 진화 그룹은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진심이에요. 진짜 빛이 날 정도예요.”빗방울이 임지혜의 예쁜 꽃 우산에 뚝뚝 떨어졌다가 다시 마당 바닥에 떨어졌다.내가 웃으면서 아무 말이 없자 임지혜가 시선을 늘어뜨리고 말했다.“수아 씨가 3년 전에 현성이 앞에 나타난 순간 사실 내가 질 거
내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미쳤어요?”내가 아는 임지혜는 비록 3년 전에 잠시 운성시를 떠나긴 했지만 절대 쉽게 포기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포기했더라면 3년 후에 다시 운성시로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나는 밤하늘을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그녀의 말에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내가 아무 말이 없자 임지혜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현성이 진짜 수아 씨를 사랑해요.”내가 직설적으로 물었다.“나중을 위해서 지금 잠시 물러서는 건가요? 내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는 척하다가 또 현성 씨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내가 못되게 굴었다고 일러바칠 건가요? 지혜 씨는 항상 연약한 척하면서 위로해주길 바라는 캐릭터잖아요.”임지혜가 버럭 화를 냈다.“당신...”비가 내려서 그런지 임지혜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 보였다. 내가 싸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지혜 씨는 참 눈치가 없어요. 그러니까 몇 달 전에 그 많은 사람 앞에서 민수 오빠한테 굴욕을 당했죠.”나는 멈칫하다가 다시 수정했다.“아, 잘못 얘기했어요. 지혜 씨는 예전에 현성 씨를 믿고 함부로 했던 거죠. 근데 이젠 현성 씨가 싫다고 하니까 나한테 와서 화풀이하는 거고... 지혜 씨 속셈을 내가 모를 것 같아요? 어디 보자. 지금 주변에 나랑 지혜 씨가 대치하고 있는 모습을 찍는 사람이 숨어 있는 거 아니에요? 드라마 보면 그런 거 많던데.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척하면서 내가 지혜 씨를 때리면 인터넷에 올리려고 그러죠?”‘내가 진짜 멍청이인 줄 아나. 가만히 있었다고 함부로 괴롭혀도 된다고 생각해? 난 원한 같은 건 반드시 갚는 사람이라고.’속셈을 나에게 들켜서 그런지 임지혜의 얼굴이 벌게지더니 대놓고 욕설을 퍼부었다.“연수아 씨, 헛된 망상 따위 하지 말아요. 살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으면서. 현성이는 영원히 수아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 아, 고정재도 마찬가지고요. 당신은 평생 아무한테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멍청한 여자예요.”나는 계단을 내려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물었다.“내가 고정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