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희연이 화들짝 놀라면서 재빨리 사과하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괜찮아.”그렇지 않아도 만나고 싶었다. 비록 이번에 잠깐 만났지만 그래도 거처를 알아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더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사실 이젠 더 얘기할 것도 없다는 걸 알지만 얘기하지 않으면 마음속의 집념을 지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최희연이 나에게 했던 질문의 답도 모르겠고...고현성과 고정재 중에 대체 누굴 사랑하냐는 질문 말이다.나의 사랑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이젠 나마저도 헷갈렸다.최희연과 전화를 끊은 후 고현성이 베이지색 목도리를 빤히 보면서 목소리를 내리깔고 물었다.“우리 이혼한 이유가 진짜 고정재 때문이야? 고정재를 그렇게 사랑해?”나는 고현성의 떨리는 마음을 알아채지 못하고 차분하게 설명했다.“몇 개월 전에 나랑 이혼하겠다고 한 사람은 현성 씨예요. 그땐 내가 아무리 빌어도 소용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기억을 잃었단 핑계로 날 몰아세우지 말아요.”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고현성이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나는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지만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민수 오빠가 그러는데 당신이 선양 그룹을 이용하여 대성 그룹을 공격하고 있다면서요? 선양 그룹은 내 것이고 되찾을 권리도 있어요. 그러니까 조용하게 살고 싶으면 이쯤에서 멈춰요.”고현성은 내 말을 듣기나 들었는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고씨 별장에 데려다준 후 재빨리 떠났다.잠시 후,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전에 내가 먼저 걸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던 그 전화였다. 고현성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난 대성 그룹을 계속 공격할 거야. 네가 선양 그룹을 다시 가져가면 모를까. 아니면 너한테 방법 하나 알려줄게. 나랑 재결합하면 대성 그룹 더는 건드리지 않을게. 그렇지 않으면 양쪽 모두 다치는 한이 있더라도 대성 그룹을 망가뜨릴 거야.”내가 큰소리로 호통쳤다.“고현성 씨, 억지 부리지 말아요.”선양 그룹을 되찾을 수는 있지만 되찾은 후
임지혜는 무척이나 속상한 듯했다. 전에 임지혜를 미칠 정도로 질투했었던 나 자신이 떠올랐다. 왜냐하면 고현성은 그녀에게만 다정했으니까.그때 나는 9년 전에 따라다녔던 남자와 나중에 만난 고현성이 다른 사람이라는 걸 몰랐기에 모든 사랑을 고현성에게만 쏟아부었다. 그러면서 이 결혼에는 사랑이 없어도 서로 존중하면서 살 줄 알았고 고현성이 남편의 도리를 다할 줄 알았다.그동안 짝사랑했던 기억만 생각하면 정말 어이가 없었다. 나는 허리를 굽혀 그녀에게 물었다.“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요?”계단 위에 서 있었던 터라 허리를 굽히고서야 임지혜와 시선이 맞춰졌다. 그런데 그녀가 뒷걸음질 쳤다.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내가 무서워요?”임지혜가 두 눈을 감았다.“너무 눈부셔요.”“네? 그게 연적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임지혜는 고현성의 마음을 흔들었던 여자였기에 당연히 얼굴도 예뻤고 스타일도 좋았다.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어서 청순가련미가 더욱 돋보였고 전혀 사람을 해칠 것 같지 않았다. 심지어 예전에 나쁜 일을 수도 없이 했어도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예뻐 봤자 여전히 나와는 비교가 되질 않았다.이건 과장이 아니라 나의 미모와 몸매는 거의 따라올 자가 없었고 내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면 사람들의 시선을 확 사로잡는 정도였다.이런 나만의 우세를 이용하여 고현성과 결혼하기 전에는 상업계에서 정말 물 만난 물고기였다. 선양 그룹이 부진하기 시작한 건 결혼 후였고 그 이유도 고현성이 사적으로 겨냥했기 때문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양 그룹은 여전히 끄떡없었다. 만약 휘청거렸더라면 고승철이 나와 고현성의 재결합을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선양 그룹을 손에 넣으면 진화 그룹은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진심이에요. 진짜 빛이 날 정도예요.”빗방울이 임지혜의 예쁜 꽃 우산에 뚝뚝 떨어졌다가 다시 마당 바닥에 떨어졌다.내가 웃으면서 아무 말이 없자 임지혜가 시선을 늘어뜨리고 말했다.“수아 씨가 3년 전에 현성이 앞에 나타난 순간 사실 내가 질 거
내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미쳤어요?”내가 아는 임지혜는 비록 3년 전에 잠시 운성시를 떠나긴 했지만 절대 쉽게 포기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포기했더라면 3년 후에 다시 운성시로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나는 밤하늘을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그녀의 말에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내가 아무 말이 없자 임지혜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현성이 진짜 수아 씨를 사랑해요.”내가 직설적으로 물었다.“나중을 위해서 지금 잠시 물러서는 건가요? 내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는 척하다가 또 현성 씨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내가 못되게 굴었다고 일러바칠 건가요? 지혜 씨는 항상 연약한 척하면서 위로해주길 바라는 캐릭터잖아요.”임지혜가 버럭 화를 냈다.“당신...”비가 내려서 그런지 임지혜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 보였다. 내가 싸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지혜 씨는 참 눈치가 없어요. 그러니까 몇 달 전에 그 많은 사람 앞에서 민수 오빠한테 굴욕을 당했죠.”나는 멈칫하다가 다시 수정했다.“아, 잘못 얘기했어요. 지혜 씨는 예전에 현성 씨를 믿고 함부로 했던 거죠. 근데 이젠 현성 씨가 싫다고 하니까 나한테 와서 화풀이하는 거고... 지혜 씨 속셈을 내가 모를 것 같아요? 어디 보자. 지금 주변에 나랑 지혜 씨가 대치하고 있는 모습을 찍는 사람이 숨어 있는 거 아니에요? 드라마 보면 그런 거 많던데.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척하면서 내가 지혜 씨를 때리면 인터넷에 올리려고 그러죠?”‘내가 진짜 멍청이인 줄 아나. 가만히 있었다고 함부로 괴롭혀도 된다고 생각해? 난 원한 같은 건 반드시 갚는 사람이라고.’속셈을 나에게 들켜서 그런지 임지혜의 얼굴이 벌게지더니 대놓고 욕설을 퍼부었다.“연수아 씨, 헛된 망상 따위 하지 말아요. 살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으면서. 현성이는 영원히 수아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 아, 고정재도 마찬가지고요. 당신은 평생 아무한테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멍청한 여자예요.”나는 계단을 내려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물었다.“내가 고정재
고정재는 나의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계속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임지혜는 나에게 심한 괴롭힘이라도 당한 것처럼 계속 바닥에 앉아 있었다. 참으로 역겹기 그지없었다.결국 나는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나타난 순간 임지혜는 내가 이렇게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무척이나 놀란 얼굴이었다. 다행히 두 경찰의 설득 끝에 겨우 자리를 떠났다.나는 약을 먹은 다음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다가 한밤중에 경찰서로 오라는 경찰의 전화를 받았다.그 이유는 당연히 임지혜 때문이었다.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를 들고 있던 나는 갑자기 짜증이 확 밀려왔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경찰서로 향했다.저녁에 비를 맞은 탓인지 머리가 조금 무거웠다. 포르쉐를 타고 경찰서로 갔을 때 고현성도 그 자리에 있었다.그는 여전히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고 경찰서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를 본 고현성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면서 싸늘하게 물었다.“연수아, 지혜가 널 건드렸어?”나는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왜요? 대신 복수라도 해주게요?”아무런 의미도 없는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임지혜가 무슨 사고를 치든 항상 고현성이 나서서 해결해줬으니까.비가 내린 뒤라 그런지 날씨가 유난히 쌀쌀했다. 고현성과 쓸데없는 얘기를 섞고 싶지 않아 코트를 여미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현성이 묵묵히 나의 뒤를 따랐다.임지혜는 나의 뒤에 있는 고현성을 보더니 무척이나 흥분했다가 이내 가여운 척했다.“현성아, 일부러 수아 씨 화나게 한 게 아니야. 그냥 네 얘기 좀 하려고 찾아갔을 뿐인데. 경찰에 신고해서 날 잡아가게 할 줄은 정말 몰랐어. 게다가 날 밀어서 바닥에 넘어지기까지 했어... 이것 봐, 몸에 상처가 가득해. 다 수아 씨가 이런 거야.”임지혜가 콕 집에서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손톱에 긁힌 자국조차 발견하지 못 할 뻔했다. 그녀의 모습에 나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참 자기한테도 독한 여자야.’고현성은 임지혜의
‘아... 고정재... 9년 전의 고정재를 말하는 건가?’나는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다. 내가 대답하지 않을 거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오래 걸렸다.“네.”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최희연의 말이 맞았다. 3년 동안 내 옆에 있었던 사람은 고현성이었고 나와 3년을 투덕거린 사람도 고현성이었다.그러나 9년 전의 고정재는 그저 내가 어릴 적에 혼자 짝사랑했던 사람이었다.하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찢어지듯이 아팠다. 나는 손을 가슴 위에 올려놓고 울먹거렸다.“맞아요. 난 그 사람 좋아해요. 그 사람은 내가 어렸을 적에 쫓아다녔던 유일한 빛이에요.”그런데 그 빛이 전남편의 형이었다. 속상함이 지나친 나머지 나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난 항상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그 사람 뒤를 몰래 쫓아다녔어요. 그 사람이 나를 어떤 태도로 대하든 예전에 나한테 줬던 따뜻함을 생각하면서 자신을 위로했죠. 근데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내가 그때 좋아했던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잘못 봤다고. 이보다 더 우스운 일이 있을까요?”몸이 아픈 탓인지 나는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까먹었다. 결국 그가 오늘 나에게 여러 번 물었던 질문에 대답했다.차 안에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갑자기 훌쩍이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피곤한 바람에 참지 못하고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땐 이미 이튿날 아침이었다.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눈을 비볐다. 그제야 나의 익숙한 방이 아니라는 걸 발견했다.이불을 들어보니 옷도 다 벗은 상태였다. 나는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집었다.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고현성이 컵과 약을 들고 서 있었다.내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내가 왜 여기 있어요?”고현성이 침착하게 대답했다.“어젯밤에 내 차에서 잠들었어.”“집에 데려다 달라고 했잖아요.”고현성이 여유롭게 눈썹을 치켜세웠다.“너희 집 키가 없어.”나는 그제야 키를 차에 뒀다는 게 생각
‘설마 지금 나한테 잘 보이려고 이러는 거야?’나는 고현성의 손을 밀어내고 다시 침대에 앉았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는데 조민수가 보낸 카톡이었다.[도와줄까?]아무래도 내가 경찰서에 갔다는 걸 안 모양이었다. 나는 빠르게 답장했다.[괜찮아.]임지혜를 해결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그때 휴대전화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을 봤는데 메이크업이 다 지워진 상태였다. 얼굴이 창백했고 흉터가 그대로 드러났다.나는 난감해하며 물었다.“현성 씨가 메이크업 지워줬어요?”고현성은 내 옆에 앉더니 나와 깍지를 끼고 목소리를 내리깔았다.“응. 잘 때 불편할까 봐.”깍지를 켜서 불쾌했던 나는 재빨리 손을 빼고 경고를 날렸다.“나는 누가 내 화장 건드리는 거 진짜 싫어해요. 특히 현성 씨가 건드리는 건 더더욱 싫고요. 왜냐하면 이 흉터도 현성 씨 때문에 생긴 거니까.”고현성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미안해. 예전에 일들은... 다 내가 잘못했어.”진심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사과에 나는 더욱 화가 나 일어나서 호통쳤다.“지금 어디서 가식을 떨어요? 고현성 씨, 내가 지금 이 꼴이 된 게 다 현성 씨 탓이라고요. 특히 이 빌어먹을 암. 고작 미안하다는 한마디로 내가 용서할 것 같아요? 꿈 깨요, 평생 용서하지 않을 거니까. 그리고 재결합?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나 생각해보는 게 어때요? 내가 귀한 시간을 현성 씨한테 낭비할 것 같아요?”섣달그믐날 전, 거의 죽어가던 그때 나는 고현성을 탓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어쨌거나 날 사랑하게 하지 못했으니까. 게다가 죽을 때가 돼서 그런지 탓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 결국에는 탓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었다. 왜냐하면 9년 동안 짝사랑한 남자라 생각했기 때문에.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고현성에게 끌려다닐 필요도 없었고 용서할 이유도 더더욱 없었다.고현성은 나와 말이 통하지 않자 바로 일어나 방을 나갔다. 그가 방을 나간 후 나도 재빨리 그 집에서 나왔다.나는 먼저 경찰서로 가서 차를 챙겼다. 그런
“두 달 전 대표님 장례식 날이에요.”운성시로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고현성에게서 뭔가를 빼앗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일부러 선양 그룹을 이용하여 대성 그룹을 공격하고 있었다...그는 내가 선양 그룹과 대성 그룹이 싸우는 걸 가만히 볼 수가 없어 선양 그룹을 되찾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고 심지어 아직도 주식 양도 계약서를 가지지 않았다. 선양 그룹을 나에게 다시 돌려주기 위해 이러는 것 같았다.고씨 가문이 선양 그룹을 원한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런데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해버렸다.고현성이 이렇게 하는 목적이 과연 무엇일까?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아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키를 챙기고 차에서 내린 다음 별장으로 들어갔다. 거실 소파에 엊저녁에 놓아뒀던 베이지색 목도리가 그대로 놓여있었다.몇 개월 전 눈이 내리던 밤, 그는 하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서 나에게 해주었다. 그때 그의 모습은 정말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집까지 데려다준 후 목도리를 나에게 주고 떠났다.나는 재빨리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 아래층의 그를 내려다보았다. 가로등 아래 그의 표정은 한없이 부드러웠고 눈빛이 조금 차가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속상했던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가 고작 10m도 되지 않았지만 엄청 멀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그때의 나는 아무리 다가가도 가까이 다가가질 못했다. 그리고 그때의 그가 바로 내가 계속 잊지 못했던 고정재였다.나는 목도리를 품에 끌어안았다. 눈사람에게 해줬던 그 목도리가 고정재의 손에 들어갔다가 다시 수많은 고난을 겪고 나에게로 돌아왔다.고개를 숙여 냄새를 맡으니 상쾌한 냄새가 풍겨왔다. 고정재만이 가지고 있었던 매력이었다.나는 천천히 웃으면서 그의 이름을 가볍게 불렀다.“고정재.”이 이름이 아직은 낯설기만 했다.낮에 나는 계속 집에서 잠만 잤다. 저녁에 일어나 약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윤다은의 전화를 받았다. 같이 밥 먹으러 가자는 말에 나는 맥없는 목소리로
나는 현관 앞에서 하얀색 캐주얼 신발을 갈아신은 후 차고에서 검은색 스포츠카를 골라 회사로 갔다. 회사에 도착했을 때 강해온이 회사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나는 손에 든 차 키를 그에게 건네며 물었다.“임지혜 씨 일은 해결했어요?”강해온이 차 키를 받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경찰서 그 일은 이미 해결했어요. 근데 여론이... 대표님, 지금 인터넷에 돌고 있는 이 영상 좀 보셔야겠어요.”강해온이 휴대전화를 건네자 나는 대충 보고 다시 돌려주었다. 내가 하찮아하며 말했다.“임지혜 씨가 할 줄 아는 수작이라곤 이런 것밖에 없어요.”어젯밤에 내가 임지혜의 팔을 잡던 그 영상이었다. 내가 그녀의 팔을 내려놓자 스스로 바닥에 넘어졌는데 촬영 각도에서 보면 내가 때린 것처럼 보였다.내가 했던 추측 그대로였다. 역시나 누가 뒤에서 몰래 찍고 있었다. 이젠 그녀의 수단 따위는 그냥 척 보면 알았다.강해온이 설명했다.“조잡한 수단이긴 하지만 지금 리트윗 횟수가 백만이 넘었고 밑에 댓글도 정말 가관이에요. 다들 대표님의 해명을 요구하고 있어요. 게다가 선양 그룹의 주가에도 영향을 미쳤고요.”나는 갑자기 그를 불렀다.“해온 씨.”강해온이 깍듯하게 물었다.“시키실 일 있으십니까?”“회사 사이트로 대응합시다.”강해온이 물었다.“어떤 내용을 올릴까요?”“때린 게 사실인데 이유가 필요해요?”그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대표님,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이 세상에는 자기 주제를 모르고 이런 조잡한 수단을 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렇게 하면 나에게 타격을 줘서 선양 그룹의 주가가 내려가고 또 날 협박할 수 있을 거라고 천진난만하게 생각했다. 심지어 내가 여론의 영향을 받아 임지혜에게 사과할 거라고 여겼다.‘허. 임지혜, 꿈은 야무져, 아주.’임지혜는 항상 대놓고 물어뜯거나 공격하는 게 아니라 옆에서 사람을 성가시게 만들었다.나는 가만히 놔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알겠습니다, 대표님.”회사로 돌아온 나는 선양 그룹이 대
석지훈: “...”고현성이 나를 말하고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고현성의 이 말은 석지훈의 마음을 깊이 찔렀다.석지훈을 화나게 하기 딱 좋은 말들이었다.고현성은 나지막이 말했다.“난 예전엔 걔가 내 평생 마누라가 될 거라고 확신했었어. 날 사랑했으니까. 비록 그때 그녀는 자신이 엉뚱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걸 몰랐지만 난 그녀를 되찾을 수 있다고 확신했지! 그런데 나중에... 난 그녀를 계속해서 실망시켰고 바로 그때 네가 그녀 옆에 나타나서 그녀가 원하는 따뜻함을 줬어. 난 그녀가 왜 널 선택했는지 항상 이해할 수 있었어.그녀라는 사람을 내가 너무 잘 아니까. 그녀는 따뜻함이 엄청 부족해서 조금이라도 따스하면 꼭 붙잡으려고 했어!”“그래. 그녀는 연씨 가문의 대표로 다른 사람들 눈에는 어린 나이에 유명하고 권력이 대단했지만 결국은 애에 불과했지.”이렇게 말한 건 석지훈이었다.나는 그가 고현성의 말에 대답할 줄은 몰랐다.그의 성격답지 않았다고현성은 후회와 억울함이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그때 난 그녀를 살리고 싶었어. 그녀가 잘 살기를 바랐기에 서정과 결혼했던 거지. 근데 그게 오히려 그녀를 무너뜨리는 마지막 계기가 돼서 그녀를 너한테 보내버렸어. 결국 난 아무것도 못 하고 그녀를 잃었던 거야! 그때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다 내가 그때 너무 쉽게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은탓에 그녀랑 남이 돼버린 거야!”멀리서 석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마워.”고현성은 약간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뭐가?”“그녀를 내 곁으로 보내줘서.”두 사람의 대화에서 석지훈은 먼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고현성이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넌 그저 줍줍남일 뿐이야! 너희 사랑이 순탄할 거 같아? 지금 그녀는...”석지훈은 담담하게 경고했다.“뒷말은 닥쳐.”고현성은 겁 없는 남자였고 제일 싫어하는 게 위협이었다. 그는 갑자기 차갑게 웃으며 석지훈에게 물었다.“내가 길들인 여자, 만족스러워?”석지훈은 몸을 돌려 고현성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고현성
내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원태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동성으로 돌아온 후 형이 말하더라. 널 칼로 찔렀다고. 너도 알잖아. 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혼자 꾹 참고 말 안 하는 성격이라는걸. 그런데 이번에는... 네가 오해할까 봐 엄청 걱정하더라.”석지훈은 원태웅에게 말했고 원태웅은 내게 설명해주러 온 것이었다. 나는 그날 송 어르신이 석지훈에게 나를 찌르라고 시켰던 게 떠올랐다. 그 얘기를 하자 원태웅은 잠시 침묵하더니 음침한 표정으로 말했다.“그 사람은 타이탄의 새 두목인데 형한테 기술은 많이 가르쳤지만 질투가 심하고 잔인해서 누구도 형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꼴을 못 봐. 그 상황에서 형은 너한테 관심 없는 척해야 널 살릴 수 있었어. 송 어르신의 질투심 달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지.”잠시 말을 멈춘 후, 원태웅은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송 어르신은 네가 석씨 가문 사람이라는 게 좀 껄끄러웠겠지만 형이 너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드러냈다면 그는 석씨 가문과 척질 각오였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 상황에선 형이 너한테 차가운 척해야 송 어르신의 질투심이 약해지고 네가 석씨 가문 사람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널 보내줄 수 있었던 거라고.”그럼 석지훈이 날 찌른 건 날 살리기 위해서였던 건가?그럼 내가 그동안 힘들어했던 건 다 부질없는 짓이었단 말인가?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나를 위한답시고 날 구했다.그야말로 따귀를 때리고 사탕을 주는 격이었다.이게 그 당시 고현성이랑 뭐가 다르단 말인가?원태웅은 내가 멍하니 있는 것을 보고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아직도 속으로 형을 원망해? 그런 상황에서, 네 생사가 걸린 선택 앞에서 형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비록 칼은 네게 꽂혔지만 형 가슴에 꽂힌 거나 마찬가지지! 형도 똑같이 아프고 괴로웠다고. 윤아야, 형이 널 얼마나 아끼는지 우린 다 알아. 넌 형이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고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야! 형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네가 다치거나 그로
고 씨 저택은 환한 불빛에 잠겨 있었고 2층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다니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석지훈은 너무나 낯설었다. 낯설고 차가워서 온몸에서 음침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이다.석지훈은 진유겸을 무시했다. 나는 진유겸을 흘끗 쳐다보고는 정중한 말투로 말했다.“본인 일이나 신경 쓰시죠.”“허, 협박하는 거예요?”나는 협박이 아니라 정중한 충고를 한 것이었다.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 순간, 나는 진유겸이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묻는 소리를 희미하게 들었다.“또 저 여자를 화나게 한 거야?”석지훈은 대답하지 않았고 진유겸은 계속해서 말했다. “여자는 정말 귀찮아.”그의 말투를 들으니 어젯밤 최희연이 그를 괴롭혔던 것 같았다.하지만 최희연의 성격상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돌아서서 방에 있는 생수를 찾아 한 모금 마시고 한참 후에 가방에서 항암제를 꺼내 두 알을 먹었다.내 병세는 확실히 악화됐다. 지금 내 상태로는... 그저 이 상태에서 더 나빠지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의사는 자궁 적출을 권유했다.자궁 적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남겨둬도 별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임신할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이번에는 완전히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나는 내 몸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난 이번 생에 엄마가 되긴 글렀다.한숨을 쉬며 소파에 앉아 있는데,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나지막이 물었다.“정우 씨, 누구세요?”“가주님, 원태웅 씨입니다.”원태웅?맨발로 일어나 문을 열어보니 원태웅이 품에 붉은 장미꽃다발을 안고 있었다. 내가 나오자 그는 꽃다발을 내 품에 안겨주며 즐겁게 웃으며 말했다.“오랜만이야. 이건 형이 너에게 주는 거야.”“오빠가 주는 거면 오빠가 준 거라고 해요.”원태웅은 웃으며 말했다.“형에게 점수 따주려고 그러는 거잖아.”나와 석지훈은 헤어졌지만 원태웅과의 관계가 나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항상
[핀란드예요. 석지훈의 지시를 받고 일하러 왔어요.]나는 이 페이지를 캡처해서 고정재에게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정재의 답장이 왔다.[고마워. 꼬마 아가씨.]그와 한민수 사이에서, 결국 난 고정재 편을 들었다.나는 그가 행복하기를 바랐다.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욕실로 가서 세수하고 나와 주방에서 컵라면 하나를 끓였다. 혼자 있을 때는 항상 컵라면을 먹었다.식사 후 고현성에게서 전화가 왔다. 조금은 의외였다. 그는 기본적으로 나에게 전화를 거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고씨 가문 경축 행사에 나를 초대하려는 걸까?어젯밤 나는 최희연에게 저녁에 그녀를 따라 경축 행사에 참석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주인의 초대 없이 함부로 가는 건 곤란했다.나는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세요?”“오늘 밤은 고씨 가문 20주년 기념행사인데 널 초대하고 싶어. 수아야, 고씨 가문은 결국 네가 발전시킨 곳이잖아.”역시 그랬다.나는 대답했다.“알겠어요. 저녁에 갈게요.”내가 이렇게 흔쾌히 승낙하자 고현성은 조금 놀란 듯 말했다.“너...”“희연이랑 같이 갈게요.”전화를 끊고 손목시계를 보니 지금 화장하고 가면 시간이 딱 맞을 것 같았다. 이때 마침 최희연에게서 문자가 왔다.고 씨 저택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그래. 이따 봐.]나도 답장했다.나는 화장대 앞에 앉아 느긋하게 화장을 했다. 진한 화장이 아니라 창백한 얼굴을 가리려고 볼 터치만 살짝 한 뒤, 어제 최희연이 선물해 준 흰색 드레스를 입었다.코트를 들고 집을 나서니 현정우 일행이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 타면서 나는 현정우에게 제안했다.“함 집사에게 내 옆집 아파트 두 채를 사두라고 하세요. 내가 외출하지 않을 때는 거기서 쉬시고요.”현정우는 감격하며 말했다.“알겠습니다, 가주님.”그들도 온종일 나를 지키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씨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나는 현정우만 데리고 고 씨 저택으로 들어가 익숙하게 뒤뜰로 가서 사람들을 기다렸다.몇 분 지나
그 여자는 진유겸 앞에서 매우 무리하게 굴었지만 진유겸의 표정에는 조금도 화난 기색이 없었고 오히려 부드럽게 해명했다.“이 일은 나중에 설명할게. 일단 너를 서위스로 돌려보내야겠다.”“이렇게 빨리 날 내쫓고 싶어?”진유겸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솔아, 날 이해해 줘.”진유겸은 그녀의 이해를 바랐다.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바로 코앞에 최희연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최희연은 조용히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네가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돌아갈 거니까.”출입구가 조용해졌다. 그들이 나가고 나서 최희연은 테이블에 엎드려 억울함에 목놓아 울었다.나는 그녀 맞은편에 앉아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오해가 있는 거 아닐까?”진유겸은 석지훈과 비슷한 남자였다. 솔직하고 스캔들이라곤 없었으니까. 그러니 어쩌면 다른 오해가 있을지도 몰랐다.최희연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며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유겸 씨가 여자한테 저렇게까지 하는 건 처음 봤어. 누가 감히 그 사람을 발로 차겠어?”최희연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나는 그녀의 옆에 앉아 팔로 감싸 안으며 위로했다.“나중에 집에 가서 물어봐. 어쩌면 상황이 다를 수도 있잖아.”나는 마음속으로 진유겸이 그런 남자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최희연은 눈물을 닦으며 흐느끼며 말했다.“나중에 얘기해. 이런 짜증 나는 일은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아. 나랑 드레스 사러 가자.”나는 의아하게 물었다.“드레스는 왜 사?”“내일 고씨 가문 창립 20주년 기념식이야. 각 도시의 많은 가문을 초대했는데 고현성이 나도 특별히 초대했어.”고씨 가문이 벌써 20주년이라니.처음에는 작은 IT 기업이었는데 이렇게 큰 기업으로 성장시키다니, 고현성이라는 그 남자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기회를 잘 활용하는 사람이었다.나는 최희연과 함께 백화점에 가서 적당한 가격의 드레스를 골랐다. 그녀는 내일 나도 고씨 가문에 같이 가기를 바랐는지 나에게도 드레스를 골라 주었다. 그런데 가격은 정말 말도 안
나는 바로 최희연 옆에 앉지 않고 그들 옆 테이블에 앉아 따뜻한 그린 마운틴 커피를 주문했다.최희연은 나를 발견하고는 눈을 깜빡였다. 나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읽지 않은 문자 메시지를 훑어보다가 새해 밤 고정재가 보낸 문자를 발견했다.[현아가 한민수를 따라 말도 없이 핀란드로 떠났어.]그가 사랑하는 여자가 그녀를 좋아하는 남자를 따라 그 남자의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은 고정재에게 치명적인 타격이었을 것이다.나는 답장을 보냈다.[미안해요. 이제 봤어요.]나는 생각하다가 담현아에게 어디 있는지 카톡을 보냈지만 바로 답장은 없었다. 이때 최희연이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오늘 나를 만난 건 유겸 씨한테서 떠나 달라고 하려는 거죠?”최희연의 맞은편 여자는 정말 아름다웠다. 복고풍의 영국 스타일 체크 무늬 원피스는 그녀의 우아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고 한눈에 봐도 예전에 내가 만났던 석나은처럼 명문가 출신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태연하게 말했다.“나는 유겸이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어요. 그는 어렸을 때 나중에 나랑 결혼할 거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약혼녀라고 소개하기도 했죠. 그때 나는 그 말을 믿었고 그를 따랐어요. 그 후 그는 귀국했고 나는 계속 해외에서 생활했죠. 그러다 그의 소식을 다시 들었을 땐, 이미 다른 여자가 있더군요. 물론 마음이 아팠지만 남자들은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늘 새로운 자극을 원하잖아요.”최희연은 놀라서 되물었다.“그럼 내가 내연녀라는 거예요?”여자는 다시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굳이 뭔가를 쟁취하려는 스타일은 아니에요. 유겸이가 그쪽을 좋아한다면 나는 기꺼이 물러날 거예요. 오해 말아요. 사실 내가 멀리 운성까지 온 건 이런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에요. 제 목적은 따로 있어요.”최희연은 차분히 물었다.“그럼 목적이 뭔데요?”여자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유겸이랑 잤어요?”최희연: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다.하지만
석 씨 저택은 석씨 가문의 부패한 냄새로 가득했고 이 방에는 특히 석지훈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계속되는 불안한 마음에 결국 나는 얼마 눕지도 못하고 일어났다.휴대폰을 들고 정원 입구로 가보니 현정우가 계속 지키고 서 있었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운성으로 돌아가요.”예전에 고현성이 있는 곳을 떠나고 싶어서 연 씨 가문을 동성으로 옮겼다. 비록 나중에 연 씨 가문은 동성에서 몰락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적어도 노력은 했으니까.그런데 이젠 석지훈을 떠나고 싶어서 다시 운성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돌고 돌아, 나는 역시 운성의 습한 기후가 더 좋았다.현정우는 순순히 대답했다.“바로 준비하겠습니다.”현정우가 정원을 나섰다. 예전에 이렇게 큰 석 씨 저택에 왔을 때, 석지훈은 나에게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다. 내가 괴롭힘을 당할까 봐 염려됐던 것이다.그럼에도 결국엔 이미연에게 당하고 말았다.하지만 이제는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석씨 가문 전체가 내 것이니까.나는 자갈길을 따라 걸어 나갔다.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뒤에 경호원들이 따라오고 있었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그들을 부르면 되었다.게다가 길을 잃지도 않았다. 20분도 채 되지 않아 나는 저택 입구에 도착했고 석지훈이 문 앞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저 멀리 하늘은 안개가 자욱했고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발밑의 눈도 아직 녹지 않았는데 말이다.몇 분 후 현정우가 나를 찾아왔고 나는 그를 따라 석지훈을 지나쳐 차에 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내가 떠나는 것을 막지 않았다.이번에는 정말 작별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았다.운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 질 무렵이었다. 나는 산꼭대기 별장으로 가지 않고 시내에 있는 내 아파트로 향했다.아파트는 매우 썰렁했다. 현정우는 차에 있던 책을 나에게 건네주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나는 책을 들고 현관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갔다.책을 침대에 놓은 뒤, 욕조에 몸을
한참 만에야 여기가 석씨 가문의 저택인 석지훈의 정원이라는 걸 깨달았다. 피곤한 몸을 일으켜 침대 옆 옷을 걸치고 문을 열자 남자의 훤칠한 등이 나를 향해 있었다.등을 보인 남자는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고 검은색은 그의 고독한 분위기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도망치는 게 답이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문턱을 나서며 그에게 물었다.“내가 왜 여기에 있어요?”마치 눈앞의 사람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처럼 내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마음속의 답답함과 슬픔은 너무나도 뚜렷했다.그때 문득 머릿속에 한마디 말이 떠올랐다. 나는 내 세상에서 혼란스럽지만 그는 그의 세상에서 바위처럼 굳건하다.바위처럼 굳건하다니...석지훈은 언제나 바위처럼 굳건했다.정원에는 가랑눈이 내리고 있었고 복도의 등불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남자는 담담한 목소리로 설명했다.“네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아. 의사가 요양이 필요하다고 해서 조용하고 경치 좋은 석 씨 저택으로 데려온 거야.”나는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모든 감정과 그에 대한 증오를 억누르고 가볍게 말했다.“아. 그럼 이젠 가셔도 돼요.”석지훈은 움직이지 않았다. 긴 침묵 끝에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물었다.“만약 그날 내가...”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그에게 줄 인내심은 조금도 없었다. 나는 짜증스럽게 그의 말을 끊었다.“갈 거예요, 말 거예요?”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윤아야, 나를 원망해?”“지훈 씨, 우리 사이는 이미 끝났어요! 이 말 당신 입으로 직접 한 거잖아요. 난 그 말, 평생 못 잊어요!”석지훈은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무언가 말하려다 결국 침묵했고 그 차가운 눈빛은 마치 나를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일단 좀 쉬어.”석지훈이 떠나자 나는 온몸에 힘이 풀려 문틀을 잡고 간신히 침대로 돌아가 누웠다.잘못한 건 그였고 헤어지자고 한 것도 그였다.내가 잘못한 건 없었다....석지
‘내가 천벌 받는 게 두려울까? 잘못은 내가 한 게 아니잖아. 그때 그 칼, 내가 스스로 찌른 것도 아니잖아?’나는 그 칼을 석지훈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지만 막상 이 순간이 되니 두렵고 마음이 약해졌다.나는 그의 앞으로 가서 불렀다.“지훈 씨.”내 눈앞의 남자는 더 이상 내 오빠가 아니었다.그는 너무 키가 커서 내가 올려다봐야 했다.석지훈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담담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지금 무슨 말을 해도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머리가 멍한 상태였다. 나는 그의 앞에 다가가 칼끝을 그의 배에 겨누었지만 그는 피하지 않았다. 마치 내가 그를 해치지 못할 거라는 걸 확신하는 듯한 당당한 모습이 오히려 내 마음을 더 괴롭혔다.“윤아야, 이 칼은 내가 받아 마땅해.”그 자신도 이 칼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나는 그에게 되갚아주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가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게 하고 싶었다.내 의식은 점점 흐릿해졌고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나는 뒤로 물러나 함승윤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몸이 먼저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석지훈은 재빨리 나를 품에 안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석지훈이 동성을 떠나 핀란드로 간 후, 그는 나에게 거의 연락하지 않았고 내 문자에도 거의 답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항상 내가 잘 자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그땐 정말 행복했고 이 남자가 내 운명이라고 확신했다.하지만 한 달 전, 모든 환상이 깨졌다.나는 마치 넓은 바다의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얼음이 산산이 조각나 차가운 바닷속으로 추락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결국 나는 차디찬 바다에 빠져 차가운 물에 휩싸여 숨 막혀 죽고 말았다.나는 힘없이 턱을 석지훈의 어깨에 기댔다. 함승윤이 다급하게 나를 불렀고 석지훈은 차갑게 물었다.“왜 이래?”나의 몸 상태에 대해 나는 함승윤에게 함구령을 내렸기에 그는 대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