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희연이 화들짝 놀라면서 재빨리 사과하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괜찮아.”그렇지 않아도 만나고 싶었다. 비록 이번에 잠깐 만났지만 그래도 거처를 알아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더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사실 이젠 더 얘기할 것도 없다는 걸 알지만 얘기하지 않으면 마음속의 집념을 지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최희연이 나에게 했던 질문의 답도 모르겠고...고현성과 고정재 중에 대체 누굴 사랑하냐는 질문 말이다.나의 사랑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이젠 나마저도 헷갈렸다.최희연과 전화를 끊은 후 고현성이 베이지색 목도리를 빤히 보면서 목소리를 내리깔고 물었다.“우리 이혼한 이유가 진짜 고정재 때문이야? 고정재를 그렇게 사랑해?”나는 고현성의 떨리는 마음을 알아채지 못하고 차분하게 설명했다.“몇 개월 전에 나랑 이혼하겠다고 한 사람은 현성 씨예요. 그땐 내가 아무리 빌어도 소용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기억을 잃었단 핑계로 날 몰아세우지 말아요.”고개를 옆으로 돌려보니 고현성이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나는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지만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민수 오빠가 그러는데 당신이 선양 그룹을 이용하여 대성 그룹을 공격하고 있다면서요? 선양 그룹은 내 것이고 되찾을 권리도 있어요. 그러니까 조용하게 살고 싶으면 이쯤에서 멈춰요.”고현성은 내 말을 듣기나 들었는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고씨 별장에 데려다준 후 재빨리 떠났다.잠시 후,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전에 내가 먼저 걸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던 그 전화였다. 고현성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난 대성 그룹을 계속 공격할 거야. 네가 선양 그룹을 다시 가져가면 모를까. 아니면 너한테 방법 하나 알려줄게. 나랑 재결합하면 대성 그룹 더는 건드리지 않을게. 그렇지 않으면 양쪽 모두 다치는 한이 있더라도 대성 그룹을 망가뜨릴 거야.”내가 큰소리로 호통쳤다.“고현성 씨, 억지 부리지 말아요.”선양 그룹을 되찾을 수는 있지만 되찾은 후
임지혜는 무척이나 속상한 듯했다. 전에 임지혜를 미칠 정도로 질투했었던 나 자신이 떠올랐다. 왜냐하면 고현성은 그녀에게만 다정했으니까.그때 나는 9년 전에 따라다녔던 남자와 나중에 만난 고현성이 다른 사람이라는 걸 몰랐기에 모든 사랑을 고현성에게만 쏟아부었다. 그러면서 이 결혼에는 사랑이 없어도 서로 존중하면서 살 줄 알았고 고현성이 남편의 도리를 다할 줄 알았다.그동안 짝사랑했던 기억만 생각하면 정말 어이가 없었다. 나는 허리를 굽혀 그녀에게 물었다.“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요?”계단 위에 서 있었던 터라 허리를 굽히고서야 임지혜와 시선이 맞춰졌다. 그런데 그녀가 뒷걸음질 쳤다.나는 의아해하며 물었다.“내가 무서워요?”임지혜가 두 눈을 감았다.“너무 눈부셔요.”“네? 그게 연적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요?”임지혜는 고현성의 마음을 흔들었던 여자였기에 당연히 얼굴도 예뻤고 스타일도 좋았다.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어서 청순가련미가 더욱 돋보였고 전혀 사람을 해칠 것 같지 않았다. 심지어 예전에 나쁜 일을 수도 없이 했어도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예뻐 봤자 여전히 나와는 비교가 되질 않았다.이건 과장이 아니라 나의 미모와 몸매는 거의 따라올 자가 없었고 내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면 사람들의 시선을 확 사로잡는 정도였다.이런 나만의 우세를 이용하여 고현성과 결혼하기 전에는 상업계에서 정말 물 만난 물고기였다. 선양 그룹이 부진하기 시작한 건 결혼 후였고 그 이유도 고현성이 사적으로 겨냥했기 때문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양 그룹은 여전히 끄떡없었다. 만약 휘청거렸더라면 고승철이 나와 고현성의 재결합을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선양 그룹을 손에 넣으면 진화 그룹은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진심이에요. 진짜 빛이 날 정도예요.”빗방울이 임지혜의 예쁜 꽃 우산에 뚝뚝 떨어졌다가 다시 마당 바닥에 떨어졌다.내가 웃으면서 아무 말이 없자 임지혜가 시선을 늘어뜨리고 말했다.“수아 씨가 3년 전에 현성이 앞에 나타난 순간 사실 내가 질 거
내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미쳤어요?”내가 아는 임지혜는 비록 3년 전에 잠시 운성시를 떠나긴 했지만 절대 쉽게 포기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포기했더라면 3년 후에 다시 운성시로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나는 밤하늘을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그녀의 말에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내가 아무 말이 없자 임지혜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현성이 진짜 수아 씨를 사랑해요.”내가 직설적으로 물었다.“나중을 위해서 지금 잠시 물러서는 건가요? 내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는 척하다가 또 현성 씨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내가 못되게 굴었다고 일러바칠 건가요? 지혜 씨는 항상 연약한 척하면서 위로해주길 바라는 캐릭터잖아요.”임지혜가 버럭 화를 냈다.“당신...”비가 내려서 그런지 임지혜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 보였다. 내가 싸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지혜 씨는 참 눈치가 없어요. 그러니까 몇 달 전에 그 많은 사람 앞에서 민수 오빠한테 굴욕을 당했죠.”나는 멈칫하다가 다시 수정했다.“아, 잘못 얘기했어요. 지혜 씨는 예전에 현성 씨를 믿고 함부로 했던 거죠. 근데 이젠 현성 씨가 싫다고 하니까 나한테 와서 화풀이하는 거고... 지혜 씨 속셈을 내가 모를 것 같아요? 어디 보자. 지금 주변에 나랑 지혜 씨가 대치하고 있는 모습을 찍는 사람이 숨어 있는 거 아니에요? 드라마 보면 그런 거 많던데.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척하면서 내가 지혜 씨를 때리면 인터넷에 올리려고 그러죠?”‘내가 진짜 멍청이인 줄 아나. 가만히 있었다고 함부로 괴롭혀도 된다고 생각해? 난 원한 같은 건 반드시 갚는 사람이라고.’속셈을 나에게 들켜서 그런지 임지혜의 얼굴이 벌게지더니 대놓고 욕설을 퍼부었다.“연수아 씨, 헛된 망상 따위 하지 말아요. 살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으면서. 현성이는 영원히 수아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 아, 고정재도 마찬가지고요. 당신은 평생 아무한테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멍청한 여자예요.”나는 계단을 내려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물었다.“내가 고정재
고정재는 나의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계속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임지혜는 나에게 심한 괴롭힘이라도 당한 것처럼 계속 바닥에 앉아 있었다. 참으로 역겹기 그지없었다.결국 나는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나타난 순간 임지혜는 내가 이렇게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무척이나 놀란 얼굴이었다. 다행히 두 경찰의 설득 끝에 겨우 자리를 떠났다.나는 약을 먹은 다음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다가 한밤중에 경찰서로 오라는 경찰의 전화를 받았다.그 이유는 당연히 임지혜 때문이었다.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를 들고 있던 나는 갑자기 짜증이 확 밀려왔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경찰서로 향했다.저녁에 비를 맞은 탓인지 머리가 조금 무거웠다. 포르쉐를 타고 경찰서로 갔을 때 고현성도 그 자리에 있었다.그는 여전히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고 경찰서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를 본 고현성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면서 싸늘하게 물었다.“연수아, 지혜가 널 건드렸어?”나는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왜요? 대신 복수라도 해주게요?”아무런 의미도 없는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임지혜가 무슨 사고를 치든 항상 고현성이 나서서 해결해줬으니까.비가 내린 뒤라 그런지 날씨가 유난히 쌀쌀했다. 고현성과 쓸데없는 얘기를 섞고 싶지 않아 코트를 여미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현성이 묵묵히 나의 뒤를 따랐다.임지혜는 나의 뒤에 있는 고현성을 보더니 무척이나 흥분했다가 이내 가여운 척했다.“현성아, 일부러 수아 씨 화나게 한 게 아니야. 그냥 네 얘기 좀 하려고 찾아갔을 뿐인데. 경찰에 신고해서 날 잡아가게 할 줄은 정말 몰랐어. 게다가 날 밀어서 바닥에 넘어지기까지 했어... 이것 봐, 몸에 상처가 가득해. 다 수아 씨가 이런 거야.”임지혜가 콕 집에서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손톱에 긁힌 자국조차 발견하지 못 할 뻔했다. 그녀의 모습에 나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참 자기한테도 독한 여자야.’고현성은 임지혜의
‘아... 고정재... 9년 전의 고정재를 말하는 건가?’나는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다. 내가 대답하지 않을 거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오래 걸렸다.“네.”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최희연의 말이 맞았다. 3년 동안 내 옆에 있었던 사람은 고현성이었고 나와 3년을 투덕거린 사람도 고현성이었다.그러나 9년 전의 고정재는 그저 내가 어릴 적에 혼자 짝사랑했던 사람이었다.하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찢어지듯이 아팠다. 나는 손을 가슴 위에 올려놓고 울먹거렸다.“맞아요. 난 그 사람 좋아해요. 그 사람은 내가 어렸을 적에 쫓아다녔던 유일한 빛이에요.”그런데 그 빛이 전남편의 형이었다. 속상함이 지나친 나머지 나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난 항상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그 사람 뒤를 몰래 쫓아다녔어요. 그 사람이 나를 어떤 태도로 대하든 예전에 나한테 줬던 따뜻함을 생각하면서 자신을 위로했죠. 근데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내가 그때 좋아했던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잘못 봤다고. 이보다 더 우스운 일이 있을까요?”몸이 아픈 탓인지 나는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까먹었다. 결국 그가 오늘 나에게 여러 번 물었던 질문에 대답했다.차 안에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갑자기 훌쩍이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피곤한 바람에 참지 못하고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땐 이미 이튿날 아침이었다.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눈을 비볐다. 그제야 나의 익숙한 방이 아니라는 걸 발견했다.이불을 들어보니 옷도 다 벗은 상태였다. 나는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집었다.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고현성이 컵과 약을 들고 서 있었다.내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내가 왜 여기 있어요?”고현성이 침착하게 대답했다.“어젯밤에 내 차에서 잠들었어.”“집에 데려다 달라고 했잖아요.”고현성이 여유롭게 눈썹을 치켜세웠다.“너희 집 키가 없어.”나는 그제야 키를 차에 뒀다는 게 생각
‘설마 지금 나한테 잘 보이려고 이러는 거야?’나는 고현성의 손을 밀어내고 다시 침대에 앉았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는데 조민수가 보낸 카톡이었다.[도와줄까?]아무래도 내가 경찰서에 갔다는 걸 안 모양이었다. 나는 빠르게 답장했다.[괜찮아.]임지혜를 해결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그때 휴대전화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을 봤는데 메이크업이 다 지워진 상태였다. 얼굴이 창백했고 흉터가 그대로 드러났다.나는 난감해하며 물었다.“현성 씨가 메이크업 지워줬어요?”고현성은 내 옆에 앉더니 나와 깍지를 끼고 목소리를 내리깔았다.“응. 잘 때 불편할까 봐.”깍지를 켜서 불쾌했던 나는 재빨리 손을 빼고 경고를 날렸다.“나는 누가 내 화장 건드리는 거 진짜 싫어해요. 특히 현성 씨가 건드리는 건 더더욱 싫고요. 왜냐하면 이 흉터도 현성 씨 때문에 생긴 거니까.”고현성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미안해. 예전에 일들은... 다 내가 잘못했어.”진심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사과에 나는 더욱 화가 나 일어나서 호통쳤다.“지금 어디서 가식을 떨어요? 고현성 씨, 내가 지금 이 꼴이 된 게 다 현성 씨 탓이라고요. 특히 이 빌어먹을 암. 고작 미안하다는 한마디로 내가 용서할 것 같아요? 꿈 깨요, 평생 용서하지 않을 거니까. 그리고 재결합?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나 생각해보는 게 어때요? 내가 귀한 시간을 현성 씨한테 낭비할 것 같아요?”섣달그믐날 전, 거의 죽어가던 그때 나는 고현성을 탓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어쨌거나 날 사랑하게 하지 못했으니까. 게다가 죽을 때가 돼서 그런지 탓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 결국에는 탓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었다. 왜냐하면 9년 동안 짝사랑한 남자라 생각했기 때문에.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고현성에게 끌려다닐 필요도 없었고 용서할 이유도 더더욱 없었다.고현성은 나와 말이 통하지 않자 바로 일어나 방을 나갔다. 그가 방을 나간 후 나도 재빨리 그 집에서 나왔다.나는 먼저 경찰서로 가서 차를 챙겼다. 그런
“두 달 전 대표님 장례식 날이에요.”운성시로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고현성에게서 뭔가를 빼앗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일부러 선양 그룹을 이용하여 대성 그룹을 공격하고 있었다...그는 내가 선양 그룹과 대성 그룹이 싸우는 걸 가만히 볼 수가 없어 선양 그룹을 되찾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고 심지어 아직도 주식 양도 계약서를 가지지 않았다. 선양 그룹을 나에게 다시 돌려주기 위해 이러는 것 같았다.고씨 가문이 선양 그룹을 원한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런데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해버렸다.고현성이 이렇게 하는 목적이 과연 무엇일까?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아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키를 챙기고 차에서 내린 다음 별장으로 들어갔다. 거실 소파에 엊저녁에 놓아뒀던 베이지색 목도리가 그대로 놓여있었다.몇 개월 전 눈이 내리던 밤, 그는 하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서 나에게 해주었다. 그때 그의 모습은 정말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집까지 데려다준 후 목도리를 나에게 주고 떠났다.나는 재빨리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 아래층의 그를 내려다보았다. 가로등 아래 그의 표정은 한없이 부드러웠고 눈빛이 조금 차가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속상했던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가 고작 10m도 되지 않았지만 엄청 멀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그때의 나는 아무리 다가가도 가까이 다가가질 못했다. 그리고 그때의 그가 바로 내가 계속 잊지 못했던 고정재였다.나는 목도리를 품에 끌어안았다. 눈사람에게 해줬던 그 목도리가 고정재의 손에 들어갔다가 다시 수많은 고난을 겪고 나에게로 돌아왔다.고개를 숙여 냄새를 맡으니 상쾌한 냄새가 풍겨왔다. 고정재만이 가지고 있었던 매력이었다.나는 천천히 웃으면서 그의 이름을 가볍게 불렀다.“고정재.”이 이름이 아직은 낯설기만 했다.낮에 나는 계속 집에서 잠만 잤다. 저녁에 일어나 약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윤다은의 전화를 받았다. 같이 밥 먹으러 가자는 말에 나는 맥없는 목소리로
나는 현관 앞에서 하얀색 캐주얼 신발을 갈아신은 후 차고에서 검은색 스포츠카를 골라 회사로 갔다. 회사에 도착했을 때 강해온이 회사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나는 손에 든 차 키를 그에게 건네며 물었다.“임지혜 씨 일은 해결했어요?”강해온이 차 키를 받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경찰서 그 일은 이미 해결했어요. 근데 여론이... 대표님, 지금 인터넷에 돌고 있는 이 영상 좀 보셔야겠어요.”강해온이 휴대전화를 건네자 나는 대충 보고 다시 돌려주었다. 내가 하찮아하며 말했다.“임지혜 씨가 할 줄 아는 수작이라곤 이런 것밖에 없어요.”어젯밤에 내가 임지혜의 팔을 잡던 그 영상이었다. 내가 그녀의 팔을 내려놓자 스스로 바닥에 넘어졌는데 촬영 각도에서 보면 내가 때린 것처럼 보였다.내가 했던 추측 그대로였다. 역시나 누가 뒤에서 몰래 찍고 있었다. 이젠 그녀의 수단 따위는 그냥 척 보면 알았다.강해온이 설명했다.“조잡한 수단이긴 하지만 지금 리트윗 횟수가 백만이 넘었고 밑에 댓글도 정말 가관이에요. 다들 대표님의 해명을 요구하고 있어요. 게다가 선양 그룹의 주가에도 영향을 미쳤고요.”나는 갑자기 그를 불렀다.“해온 씨.”강해온이 깍듯하게 물었다.“시키실 일 있으십니까?”“회사 사이트로 대응합시다.”강해온이 물었다.“어떤 내용을 올릴까요?”“때린 게 사실인데 이유가 필요해요?”그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대표님,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이 세상에는 자기 주제를 모르고 이런 조잡한 수단을 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렇게 하면 나에게 타격을 줘서 선양 그룹의 주가가 내려가고 또 날 협박할 수 있을 거라고 천진난만하게 생각했다. 심지어 내가 여론의 영향을 받아 임지혜에게 사과할 거라고 여겼다.‘허. 임지혜, 꿈은 야무져, 아주.’임지혜는 항상 대놓고 물어뜯거나 공격하는 게 아니라 옆에서 사람을 성가시게 만들었다.나는 가만히 놔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알겠습니다, 대표님.”회사로 돌아온 나는 선양 그룹이 대
나는 몇몇 의사들과 함께 별장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렸지만 석지훈 일행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한민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통화 중이었다.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불안한 마음에 단톡방에서 예유진의 카톡을 추가하고 음성 통화를 걸었다.석지훈에 대해 묻자 예유진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그는 통화를 끊기 전에 말했다.“3분만 기다려요.”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지만 그 3분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나는 방안을 초조하게 서성거렸다.3분도 채 되지 않아 예유진에게서 전화가 왔다.“형과 민수는 별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습격을 당했어요. 민수는 중상을 입고 지금 중환자실에 있고 형은 아직까지 행방불명이에요.”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행방불명이라니요?”“우리 사람들 모두 형을 못 찾았대요.”나는 곧바로 함승윤에게 연락해 전 세계 위치 추적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그러고는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사방이 피투성이였지만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함승윤에게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시간이 흐를수록 그에 대한 걱정은 커져만 갔다. 나는 마치 중심을 잃은 사람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함승윤이 핀란드에 도착했을 때, 나는 별장 입구에 앉아 있었다. 그때 핀란드에는 이미 차가운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아직 석지훈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그에게 병원에 같이 가자고 했다.나는 마음속으로 매우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우선 병원에 가서 한민수를 만나야 했다.한민수는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민영이 병원에 도착했지만 나를 보고 눈을 흘기더니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그 후 의사에게 한민수의 상태를 물어본 함승윤이 내 옆으로 와서 말했다.“한민수 씨의 상태는 매우 심각해서 오늘은 의식을 되찾기 어려울 것 같답니다. 가주님께서는 계속 여기서 기다리실 건가요?”“기다릴 거예요. 깨어날 때까지.”석지훈의 행방을 알고 있는 건 한민수뿐이었다. 나는 참을성 있
한민영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나는 단단히 제압당한 채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바로 그때, 별장 주변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났다.처음에는 그들 편인 줄 알았지만 의료 가방을 든 사람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창백해지는 것을 눈치챘다. 아마 그들은 별장 주변에 경호원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었다.순간 내 머리에 총구가 겨눠졌다.“비켜! 우리를 보내 줘!”한민영은 다가와 냉소적으로 비웃으며 말했다.“멍청하긴.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고 왔냐? 여긴 석지훈의 본거지다. 과연 석지훈이 아무 대비를 안 해놨을 것 같아? 너희가 어느 세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어리석은 걸 보면 대단한 조직은 아닌 것 같네.”나는 등 뒤에 있던 사람이 완전히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리고 침착하게 영어로 그를 설득했다.“날 놔줘. 그러면 널 보내 줄게. 걱정 마. 너와 네 동료의 목숨에는 관심 없어.”그는 이미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나를 풀어 주었다. 나는 빠르게 몇 걸음 달려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곁으로 몸을 피했다.그때 한민영이 차갑게 명령했다.“저놈들 처리해.”처리...그 말은 죽이라는 뜻이었다.나는 재빨리 막아섰다.“보내줘.”그녀는 충격받은 듯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너도 저놈들처럼 멍청한 거야? 네 목숨을 노린 놈들을 살려 준다고?”그녀는 언제나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나는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너보다야 덜 멍청하지.”“내가 보내 준다고 했으니 보내 줘야지. 다음번엔 쉽게 봐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원래 있던 의사들은?”그들은 분명 한민수가 보낸 의사들을 납치한 뒤 신분을 위장했을 것이다. 예상대로 저 뒤쪽에 서 있던 검은색 승용차를 가리키더니 재빨리 도망쳤다.나는 곧바로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에게 의사들을 구출하라고 지시했다.경호원 몇 명이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한민영은 검은 가죽 라이더 재킷을 걸친 채 비웃듯 말
하지만 그는 한 가지 맞는 말을 했다. 고현성은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든 그것은 그들의 일이었다.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원태웅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다만 답답한 마음에 석지훈에 대한 걱정까지 겹쳐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석지훈이 돌아오지 않으니, 나도 편히 잠들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승철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현성이 갑자기 바보가 됐다.]나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솔직히 걱정되고 죄책감도 들었지만 이제 그는 나와 무관한 사람이었다.나는 그를 신경 쓸 수 없었다.내가 조금이라도 그를 신경 쓰는 순간, 석지훈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과 다름없었다.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무관심, 모른 척하는 것뿐이었다.내가 답장을 보내지 않자 고승철이 다시 메시지를 보내왔다.[수아야, 네 곁에 지금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우리 현성이를 친구처럼 대해 줬으면 한다. 기회가 되면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해 줘라.]그는 내가 고현성에게 온기를 주길 바랐다.하지만 고현성은 오직 수아라는 이름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할수록 그는 나에게 더욱 의지하게 될 것이다.우리 사이의 선이 어디까지인지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벼랑 끝에 서 있는 나에게 도대체 어떤 선택이 옳은 걸까?그렇다고 고현성에게 너무 잔인하게 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석지훈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나는 여전히 고승철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도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내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민수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그때 에르크의 하늘은 이미 밝아오고 있었고 아침 햇살이 구름을 뚫고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날씨 예보에서는 오늘 눈이 올 거라고 했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눈이 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나는 창가에 서서 물었다.“일은 다 처리했어요?”“네, 근데 지훈이가 조금 다쳤어요. 잠시 후에 의사가 집으
핀란드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도로는 여전히 미끄러웠다. 차가 급하게 멈추며 흔들렸지만 담현아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그러자 운전하던 예유진이 갑자기 물었다.“방금 예하나라고 했어요?”나는 원태웅이 예전에 예유진이 자신의 여동생을 좋아했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의 여동생이 예씨 가문의 실권자라고도 했다. 하지만 실권자는 예지한이었고 고양이 카페의 직원인 예하나가 아니었다.게다가 예하나는 자신이 제당 출신이라고 했다.이렇게 우연이 겹칠 수 있을까?“네, 예하나.”그는 깊게 숨을 내쉰 뒤 다시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형수님, 그분은 잘 지내고 있나요?”그는 예하나를 예지한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나는 그에게 뭔가를 더 물어보려 했지만 담현아 갑자기 자신의 핸드폰을 내게 건넸다.화면에는 짧은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예지한의 어릴 적 이름이 하나예요. 고양이 카페의 그 사람, 아마 예지한 일 거예요.”나는 속으로 놀랐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꽤나 여유롭게 살고 있어요.”내 말을 듣고 예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그는 나를 에르크 저택 앞까지 데려다준 뒤 예하나의 연락처를 물었다.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하나 씨는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아요. 전자기기를 일절 쓰지 않더군요.”그는 순간 멍해진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니 아무리 찾아도 못 찾았던 거네요.”그는 담현아와 함께 떠났고 나는 한동안 저택 문 앞에 서 있다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그곳에서 자고 있던 저먼 셰퍼드 두 마리가 갑자기 놀라 깨더니 나를 향해 낮게 짖었다. 그러나 곧 나를 알아보고는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한밤중이라 조금 무서웠지만 녀석들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나 보고 싶었어?”녀석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는지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덮쳐 바닥에 넘어뜨렸다. 나는 한참을 몸부림친 끝에 겨우 일어났다.다시 쓰러
“급한 일이에요. 얼른 넘겨줘요.”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서둘러 핸드폰을 석지훈에게 건넸다.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차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먼저 유진이랑 함께 에르크로 돌아가 있어.”곧이어 뒤따라오던 차도 멈춰 섰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렸다.뒤차로 향하려던 순간 석지훈이 나를 불렀다.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아가.”나는 허리를 숙여 차 안의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엔 걱정이 가득했다.“무슨 일이에요?”그는 미안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집까지 데려다주지 못해서.”집...에르크에 있는 그곳.석지훈에게는 그곳이 진짜 집이었다.운성시에 정착한 것이 어쩌면 그에게는 큰 희생이었을지도 모른다.예유진이 나를 에르크로 데려가는 동안, 나는 줄곧 말이 없었다. 어쩌면 이곳에서 정착해야 되는 게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더 이상 그와 떨어져 지내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다.하지만 국내에는 내가 결코 놓을 수 없는 석씨 가문이 있었다.고정재가 말했듯, 나는 그것을 반드시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더 이상 과거처럼 무관심한 태도로 있다가 모든 걸 빼앗길 수는 없었다.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를 들은 담현아가 물었다.“언니, 뭔 일 있어요?”“아니, 그냥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나는 깊은 고민에 빠진 채 예유진에게 물었다.“유진 씨, 둘째 오빠랑 민수 씨가 떠난 이유가 뭐예요? 혹시 위험한 일이에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자세한 건 저도 말해줄 수 없어요. 아직 형수님이랑 결혼한 사이도 아니다 보니 사업적으로나 사적으로도 공유할 수 없는 일이에요.”나는 늘 우리가 부부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왔다. 자연스럽게 함께했고 이미 충분히 깊은 관계라고 여겼다.당연히 법적으로 그의 아내가 된다면 더욱 행복할 것이다.하지만 지금,
석지훈이 곧 전 세계였다.그는 다른 이들의 전부이기도 했다.그리고 나에게도, 그는 전부였다.“그래요. 오빠가 있으면 그게 곧 전 세계죠.”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석지훈은 슬며시 내 손을 잡고 한민수 일행을 뒤따라갔다.앞서가던 한민수는 계속 담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아마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겠지만 그 역시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이었다.마치 한씨 가문에서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알고 물러난 것처럼 이번에도 과감히 포기했다.예유진도 마찬가지였다.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문의 혈통이라는 거대한 산에 짓눌려 있었다.마치 과거에 내 아버지에게 발각된 석지훈처럼...아버지는 갖은 술수를 동원해 석지훈의 손에서 석씨 가문을 빼앗아 내게 넘겼다.몇십 년 동안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었고 늘 곁에 두고 가르친 사람이었지만 결국엔 나라는 낯선 존재가 더 중요했다.정해진 현실 속에서 운명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노력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한민수는 자신이 너무 오래 담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예유진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유진아, 넌 어떤 순간에 여자한테 가장 설레?”그는 걸음을 멈추고 무언가를 떠올리며 다소 아련하게 말했다.“내 셔츠를 입고 있을 때.”한민수는 흥미를 느낀 듯 되물었다.“사모님도 네 셔츠를 입은 적 있어?”그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나는 곁눈질로 석지훈을 바라보았더니 그의 귓불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문득, 내가 그의 셔츠를 입고 발코니에 서 있던 게 떠올랐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마 그때 그의 마음은 크게 요동쳤을 것이다. 그저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그 생각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새어 나왔다.한민수는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향해 물었다.“왜 혼자 웃어요?”나는 입술을 오므리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재밌는 거 있으면 좀 공유해줘요.”나는 웃기만 했고 그는 시시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공항 밖으로 나와 그들은 한차에 탔고 나는
“지훈 오빠도 핀란드에 있어요. 언니도 나랑 같이 가요.”담현아의 제안은 꽤나 솔깃했다.하지만 아직 귀국하지 않은 석윤민이 마음에 걸렸다.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석지훈이 너무도 그리웠기 때문이다.그와 떨어진 지 고작 이틀이었지만 그 시간이 유난히 길게만 느껴졌다.우리는 많은 사람을 데리고 가지 않기로 했다. 공항에 도착하면 한민수와 예유진이 마중을 나올 예정이었기에 우리 둘만 비행기를 타고 핀란드로 향하기로 했다.나는 한참을 설득한 끝에 경호원들을 돌려보냈다. 어쩌면 그들에게도 짧은 휴가를 주는 셈이었다.우리는 오후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비행기를 타기 전, 담현아는 고정재에게 짧은 문자를 남겼다.[저 당분간 핀란드에 다녀올게요.]나는 그녀의 핸드폰 화면을 보며 물었다.“이게 다야?”그러자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뭐가 더 있어야 해요?”나는 그녀의 핸드폰을 받아 들고 잠시 생각한 후 타자하기 시작했다.[일 때문에 가는 거예요. 도착하면 전화할게요. 그때쯤이면 정재 씨도 막 일어났겠죠. 잘 자요, 정재 씨.”담현아는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황급히 말했다.“나, 한 번도 그 사람을 정재 씨라고 불러본 적 없어요!”나는 웃으며 핸드폰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잘 자요, 정재 씨를 잘 자요, 아저씨로 바꿨고, 마지막에 한 마디를 더 추가했다.“보고 싶을 거예요.”나는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오, 꽤나 달콤한데?”그러자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그럼요. 다만 입 밖에 쉽게 내뱉지 못할 뿐이에요.”그녀는 핸드폰을 넣으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말했다.“현아야, 여자한테 애교는 곧 무기야!”나는 석지훈에게 애교 부리는 걸 좋아했다.특히 내가 잘못했을 때.그러자 담현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저도 알아요. 근데 유독 아저씨 앞에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그런 혼란스러움이야말로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증거였다.
담현아의 나이는 확실히 어렸지만 내 아이가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기엔 애매했다. “그냥 작은고모라고 부르는 게 어때?”그러자 담현아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그럼 아저씨는 고모부가 되는 거예요?”나는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갑자기 정재 씨랑 친척이 된 거야?”그러다 생각이 바뀌어 말했다.“사실 삼촌이라고 부르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정재 씨는 삼촌, 넌 작은숙모?”이 친척 관계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그래요, 언니가 아저씨랑 더 오래 알고 지냈으니까, 그쪽 기준으로 부르면 되겠네요. 사실 나도 작은숙모라는 호칭이 더 맘에 들어요!”고정재가 한 말이 맞았다. 우리가 아무리 가까워도, 그가 예전부터 우리의 피아노 곡을 계속 연주한다 해도 담현아는 결코 우리를 오해하지 않을 사람이었다.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떳떳한 사이니까.“그럼 그렇게 하자! 아까 경찰이 그러던데, 너 최근 2년 동안 경찰서만 5번이라며? 핀란드에 있는 애가 어떻게 국내에서 이렇게 사고를 치고 다니는 거야?”그녀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별일 아니에요.”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해서 나도 더 묻지 않았다.집에 도착했을 땐 거의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밤새 클럽에서 놀다가 경찰서와 병원을 오가느라 그녀는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소파에 털썩 눕더니 아예 꼼짝도 안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이 잠들었다. 나는 옷장에서 담요를 꺼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마침 고정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현아는 자?”그는 담현아가 내 집에 있는 걸 알고 있었다. 정말 모르는 게 없는 남자였다.“네, 방금 잠들었어요.”나는 침대에 기댄 채 대답했다. 곧이어 전화 너머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많이 다쳤어? 민영이가 꽤 심하다고 그러던데.”고민영이 그에게 말한 모양이었다.“병원에서 치료받았어요. 괜찮아요.”“그래. 현아 신경 써줘서 고마워.”나는 낮게 말했다.“별말씀을, 친구잖아요.”나는 전화를 끊고 다시 잠을 청했다.그리
고민영이 놀라며 물었다.“형수님, 무슨 일이에요?”나는 조용히 앉아 있는 담현아를 가리키며 설명했다.“이분은 민영 씨 오빠의 와이프예요. 두 사람은 이제 막 혼인 신고를 마쳤고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어요. 민영 씨가 작은형수랑 싸우면 오빠가 곤란해지지 않겠어요?”고민영은 깜짝 놀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누구요?”나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누구겠어요? 정재 씨죠.”그 말을 듣자마자 고민영은 당황하며 담현아에게 급히 사과했다.“죄송해요, 작은 형수님. 저는 두 분이 그런 관계인지 전혀 몰랐어요... 아까 일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제가 형수님을 알지도 못했잖아요. 저도 당연히 제 친구를 도와야 했고요. 그냥 오해였던 거예요. 우리 합의할까요?”담현아는 원래 쿨한 성격이라 작은 일로 꽁해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고정재가 곤란해지는 것도 원치 않았기에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요. 애초에 제 잘못이었어요.”고민영도 성격이 꽤 시원시원했지만 문제는 그녀의 친구였다. 그 친구는 여전히 담현아를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며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나는 그녀에게 말했다.“얼른 병원 갈까? 상처 치료해야지.”“네, 치료는 해야죠.”담현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고민영의 친구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굳이 병원에 갈 필요도 없겠는데? 얼굴이 그 모양인데 흉터가 남든 말든 똑같지 않을까? 괜히 의료 자원을 낭비하지 말고.”담현아는 성질이 급한 편이었다. 그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대놓고 비웃으며 말했다.“수아 언니, 무식한 년이랑 말싸움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그런 년보다 몸매 좋고 예쁘고 돈 많고 남자 친구도 더 잘생기면 그만이죠. 굳이 입 아프게 싸울 필요가 없잖아요.”고민영의 친구는 화가 나서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이 벌떡 일어났지만 고민영은 급히 그녀를 붙잡으며 말했다.“내 형수님이야. 좀 참아!”담현아는 그 친구를 향해 가볍게 침을 뱉고는 경찰서를 나섰다. 나는 철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