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미쳤어요?”내가 아는 임지혜는 비록 3년 전에 잠시 운성시를 떠나긴 했지만 절대 쉽게 포기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포기했더라면 3년 후에 다시 운성시로 돌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나는 밤하늘을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그녀의 말에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내가 아무 말이 없자 임지혜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현성이 진짜 수아 씨를 사랑해요.”내가 직설적으로 물었다.“나중을 위해서 지금 잠시 물러서는 건가요? 내 앞에서는 고개를 숙이는 척하다가 또 현성 씨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내가 못되게 굴었다고 일러바칠 건가요? 지혜 씨는 항상 연약한 척하면서 위로해주길 바라는 캐릭터잖아요.”임지혜가 버럭 화를 냈다.“당신...”비가 내려서 그런지 임지혜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 보였다. 내가 싸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지혜 씨는 참 눈치가 없어요. 그러니까 몇 달 전에 그 많은 사람 앞에서 민수 오빠한테 굴욕을 당했죠.”나는 멈칫하다가 다시 수정했다.“아, 잘못 얘기했어요. 지혜 씨는 예전에 현성 씨를 믿고 함부로 했던 거죠. 근데 이젠 현성 씨가 싫다고 하니까 나한테 와서 화풀이하는 거고... 지혜 씨 속셈을 내가 모를 것 같아요? 어디 보자. 지금 주변에 나랑 지혜 씨가 대치하고 있는 모습을 찍는 사람이 숨어 있는 거 아니에요? 드라마 보면 그런 거 많던데.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척하면서 내가 지혜 씨를 때리면 인터넷에 올리려고 그러죠?”‘내가 진짜 멍청이인 줄 아나. 가만히 있었다고 함부로 괴롭혀도 된다고 생각해? 난 원한 같은 건 반드시 갚는 사람이라고.’속셈을 나에게 들켜서 그런지 임지혜의 얼굴이 벌게지더니 대놓고 욕설을 퍼부었다.“연수아 씨, 헛된 망상 따위 하지 말아요. 살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으면서. 현성이는 영원히 수아 씨를 좋아하지 않아요. 아, 고정재도 마찬가지고요. 당신은 평생 아무한테도 사랑을 받지 못하는 멍청한 여자예요.”나는 계단을 내려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물었다.“내가 고정재
고정재는 나의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계속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나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임지혜는 나에게 심한 괴롭힘이라도 당한 것처럼 계속 바닥에 앉아 있었다. 참으로 역겹기 그지없었다.결국 나는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나타난 순간 임지혜는 내가 이렇게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무척이나 놀란 얼굴이었다. 다행히 두 경찰의 설득 끝에 겨우 자리를 떠났다.나는 약을 먹은 다음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다가 한밤중에 경찰서로 오라는 경찰의 전화를 받았다.그 이유는 당연히 임지혜 때문이었다.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를 들고 있던 나는 갑자기 짜증이 확 밀려왔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경찰서로 향했다.저녁에 비를 맞은 탓인지 머리가 조금 무거웠다. 포르쉐를 타고 경찰서로 갔을 때 고현성도 그 자리에 있었다.그는 여전히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었고 경찰서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를 본 고현성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면서 싸늘하게 물었다.“연수아, 지혜가 널 건드렸어?”나는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왜요? 대신 복수라도 해주게요?”아무런 의미도 없는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임지혜가 무슨 사고를 치든 항상 고현성이 나서서 해결해줬으니까.비가 내린 뒤라 그런지 날씨가 유난히 쌀쌀했다. 고현성과 쓸데없는 얘기를 섞고 싶지 않아 코트를 여미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현성이 묵묵히 나의 뒤를 따랐다.임지혜는 나의 뒤에 있는 고현성을 보더니 무척이나 흥분했다가 이내 가여운 척했다.“현성아, 일부러 수아 씨 화나게 한 게 아니야. 그냥 네 얘기 좀 하려고 찾아갔을 뿐인데. 경찰에 신고해서 날 잡아가게 할 줄은 정말 몰랐어. 게다가 날 밀어서 바닥에 넘어지기까지 했어... 이것 봐, 몸에 상처가 가득해. 다 수아 씨가 이런 거야.”임지혜가 콕 집에서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손톱에 긁힌 자국조차 발견하지 못 할 뻔했다. 그녀의 모습에 나는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참 자기한테도 독한 여자야.’고현성은 임지혜의
‘아... 고정재... 9년 전의 고정재를 말하는 건가?’나는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다. 내가 대답하지 않을 거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오래 걸렸다.“네.”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최희연의 말이 맞았다. 3년 동안 내 옆에 있었던 사람은 고현성이었고 나와 3년을 투덕거린 사람도 고현성이었다.그러나 9년 전의 고정재는 그저 내가 어릴 적에 혼자 짝사랑했던 사람이었다.하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내키지 않았다.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찢어지듯이 아팠다. 나는 손을 가슴 위에 올려놓고 울먹거렸다.“맞아요. 난 그 사람 좋아해요. 그 사람은 내가 어렸을 적에 쫓아다녔던 유일한 빛이에요.”그런데 그 빛이 전남편의 형이었다. 속상함이 지나친 나머지 나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난 항상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그 사람 뒤를 몰래 쫓아다녔어요. 그 사람이 나를 어떤 태도로 대하든 예전에 나한테 줬던 따뜻함을 생각하면서 자신을 위로했죠. 근데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내가 그때 좋아했던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잘못 봤다고. 이보다 더 우스운 일이 있을까요?”몸이 아픈 탓인지 나는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까먹었다. 결국 그가 오늘 나에게 여러 번 물었던 질문에 대답했다.차 안에 한참 동안 침묵이 흘렀다. 갑자기 훌쩍이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 피곤한 바람에 참지 못하고 잠이 들고 말았다. 다시 깨어났을 땐 이미 이튿날 아침이었다.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눈을 비볐다. 그제야 나의 익숙한 방이 아니라는 걸 발견했다.이불을 들어보니 옷도 다 벗은 상태였다. 나는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집었다.그때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고현성이 컵과 약을 들고 서 있었다.내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내가 왜 여기 있어요?”고현성이 침착하게 대답했다.“어젯밤에 내 차에서 잠들었어.”“집에 데려다 달라고 했잖아요.”고현성이 여유롭게 눈썹을 치켜세웠다.“너희 집 키가 없어.”나는 그제야 키를 차에 뒀다는 게 생각
‘설마 지금 나한테 잘 보이려고 이러는 거야?’나는 고현성의 손을 밀어내고 다시 침대에 앉았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는데 조민수가 보낸 카톡이었다.[도와줄까?]아무래도 내가 경찰서에 갔다는 걸 안 모양이었다. 나는 빠르게 답장했다.[괜찮아.]임지혜를 해결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그때 휴대전화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을 봤는데 메이크업이 다 지워진 상태였다. 얼굴이 창백했고 흉터가 그대로 드러났다.나는 난감해하며 물었다.“현성 씨가 메이크업 지워줬어요?”고현성은 내 옆에 앉더니 나와 깍지를 끼고 목소리를 내리깔았다.“응. 잘 때 불편할까 봐.”깍지를 켜서 불쾌했던 나는 재빨리 손을 빼고 경고를 날렸다.“나는 누가 내 화장 건드리는 거 진짜 싫어해요. 특히 현성 씨가 건드리는 건 더더욱 싫고요. 왜냐하면 이 흉터도 현성 씨 때문에 생긴 거니까.”고현성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미안해. 예전에 일들은... 다 내가 잘못했어.”진심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사과에 나는 더욱 화가 나 일어나서 호통쳤다.“지금 어디서 가식을 떨어요? 고현성 씨, 내가 지금 이 꼴이 된 게 다 현성 씨 탓이라고요. 특히 이 빌어먹을 암. 고작 미안하다는 한마디로 내가 용서할 것 같아요? 꿈 깨요, 평생 용서하지 않을 거니까. 그리고 재결합?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지나 생각해보는 게 어때요? 내가 귀한 시간을 현성 씨한테 낭비할 것 같아요?”섣달그믐날 전, 거의 죽어가던 그때 나는 고현성을 탓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어쨌거나 날 사랑하게 하지 못했으니까. 게다가 죽을 때가 돼서 그런지 탓하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 결국에는 탓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었다. 왜냐하면 9년 동안 짝사랑한 남자라 생각했기 때문에.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고현성에게 끌려다닐 필요도 없었고 용서할 이유도 더더욱 없었다.고현성은 나와 말이 통하지 않자 바로 일어나 방을 나갔다. 그가 방을 나간 후 나도 재빨리 그 집에서 나왔다.나는 먼저 경찰서로 가서 차를 챙겼다. 그런
“두 달 전 대표님 장례식 날이에요.”운성시로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고현성에게서 뭔가를 빼앗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일부러 선양 그룹을 이용하여 대성 그룹을 공격하고 있었다...그는 내가 선양 그룹과 대성 그룹이 싸우는 걸 가만히 볼 수가 없어 선양 그룹을 되찾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고 심지어 아직도 주식 양도 계약서를 가지지 않았다. 선양 그룹을 나에게 다시 돌려주기 위해 이러는 것 같았다.고씨 가문이 선양 그룹을 원한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런데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해버렸다.고현성이 이렇게 하는 목적이 과연 무엇일까?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아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키를 챙기고 차에서 내린 다음 별장으로 들어갔다. 거실 소파에 엊저녁에 놓아뒀던 베이지색 목도리가 그대로 놓여있었다.몇 개월 전 눈이 내리던 밤, 그는 하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서 나에게 해주었다. 그때 그의 모습은 정말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집까지 데려다준 후 목도리를 나에게 주고 떠났다.나는 재빨리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 아래층의 그를 내려다보았다. 가로등 아래 그의 표정은 한없이 부드러웠고 눈빛이 조금 차가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속상했던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가 고작 10m도 되지 않았지만 엄청 멀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그때의 나는 아무리 다가가도 가까이 다가가질 못했다. 그리고 그때의 그가 바로 내가 계속 잊지 못했던 고정재였다.나는 목도리를 품에 끌어안았다. 눈사람에게 해줬던 그 목도리가 고정재의 손에 들어갔다가 다시 수많은 고난을 겪고 나에게로 돌아왔다.고개를 숙여 냄새를 맡으니 상쾌한 냄새가 풍겨왔다. 고정재만이 가지고 있었던 매력이었다.나는 천천히 웃으면서 그의 이름을 가볍게 불렀다.“고정재.”이 이름이 아직은 낯설기만 했다.낮에 나는 계속 집에서 잠만 잤다. 저녁에 일어나 약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윤다은의 전화를 받았다. 같이 밥 먹으러 가자는 말에 나는 맥없는 목소리로
나는 현관 앞에서 하얀색 캐주얼 신발을 갈아신은 후 차고에서 검은색 스포츠카를 골라 회사로 갔다. 회사에 도착했을 때 강해온이 회사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나는 손에 든 차 키를 그에게 건네며 물었다.“임지혜 씨 일은 해결했어요?”강해온이 차 키를 받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경찰서 그 일은 이미 해결했어요. 근데 여론이... 대표님, 지금 인터넷에 돌고 있는 이 영상 좀 보셔야겠어요.”강해온이 휴대전화를 건네자 나는 대충 보고 다시 돌려주었다. 내가 하찮아하며 말했다.“임지혜 씨가 할 줄 아는 수작이라곤 이런 것밖에 없어요.”어젯밤에 내가 임지혜의 팔을 잡던 그 영상이었다. 내가 그녀의 팔을 내려놓자 스스로 바닥에 넘어졌는데 촬영 각도에서 보면 내가 때린 것처럼 보였다.내가 했던 추측 그대로였다. 역시나 누가 뒤에서 몰래 찍고 있었다. 이젠 그녀의 수단 따위는 그냥 척 보면 알았다.강해온이 설명했다.“조잡한 수단이긴 하지만 지금 리트윗 횟수가 백만이 넘었고 밑에 댓글도 정말 가관이에요. 다들 대표님의 해명을 요구하고 있어요. 게다가 선양 그룹의 주가에도 영향을 미쳤고요.”나는 갑자기 그를 불렀다.“해온 씨.”강해온이 깍듯하게 물었다.“시키실 일 있으십니까?”“회사 사이트로 대응합시다.”강해온이 물었다.“어떤 내용을 올릴까요?”“때린 게 사실인데 이유가 필요해요?”그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대표님,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이 세상에는 자기 주제를 모르고 이런 조잡한 수단을 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렇게 하면 나에게 타격을 줘서 선양 그룹의 주가가 내려가고 또 날 협박할 수 있을 거라고 천진난만하게 생각했다. 심지어 내가 여론의 영향을 받아 임지혜에게 사과할 거라고 여겼다.‘허. 임지혜, 꿈은 야무져, 아주.’임지혜는 항상 대놓고 물어뜯거나 공격하는 게 아니라 옆에서 사람을 성가시게 만들었다.나는 가만히 놔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알겠습니다, 대표님.”회사로 돌아온 나는 선양 그룹이 대
나는 고개를 돌렸다가 그 남자의 두 눈과 마주쳤다. 자세히 보니 눈빛이 차갑기 그지없었다.고현성의 말이 맞았다. 그들은 모두 차갑고 무뚝뚝한 남자들이었다.내가 고개를 끄덕였다.“대충 먹으러 왔어.”윤다은이 웃으며 말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먹는 건데.”나는 입술을 깨물고 설명했다.“방금 회사에서 일 보고 나왔어. 진짜 일부러 약속 거절한 게 아니야.”사실은 일부러 거절한 것이었는데 이렇게 딱 마주치니 정말 민망했다. 나도 거절하고 싶진 않았다. 다만 고정재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라서 거절했을 뿐이었다.그때 윤다은이 나의 팔을 잡고 칭찬했다.“수아 언니 너무 예뻐요. 눈 밑에 반짝이를 그리니까 엄청 어려 보여요. 언니 올해 몇 살이에요?”윤다은의 칭찬에 나는 조용히 서 있는 고정재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는 나를 다정하게 보면서 말했다.“수아 씨 96년생이야.”내가 태어난 연도까지 알고 있었다. 나의 마음속에 삽시간에 잔잔한 물결이 일렁거렸다.윤다은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96년생? 그럼 나보다 더 어린데요?”내가 피식 웃자 윤다은이 입을 삐죽거렸다.“그럼 언니라고 부르지 않아도 되겠네요?”사실 언니라고 불러도 되었다. 예전에 새언니였으니까.나는 결국 솔직하게 말했다.“응. 근데 항렬로 따지면 내가 전에 새언니였어.”새언니라는 말을 듣고도 고정재의 표정이 아무런 흔들림이 없자 나는 실망감을 애써 감췄다.“다은 씨 오빠 고현성의 전처였어.”윤다은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끼고 있던 팔짱까지 풀었다.나는 웃으면서 말했다.“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 다음에 내가 식사 대접할게요.”식당을 나선 나는 고개를 들어 눈꽃을 바라보았다. 순간 슬픔이 밀려와 멈칫했다가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눈꽃이 내 몸에 떨어지려던 그때 누군가 검은 우산을 씌워주었다.나는 놀란 얼굴로 돌아서서 그에게 물었다.“왜 따라 나왔어요?”그의 중저음이 참으로 매력적이었다.“집에 데려다줄게.”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차 가지고 왔어요.”
백미러로 고정재의 외로운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나의 건강이 좋지 않아도 당신은 날 가여워할 자격이 없다고요.”다른 사람은 날 가여워해도 고정재와 고현성은 그럴 자격이 없었다.연씨 별장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늦은 밤이었다. 나는 씻은 후 침대에 앉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선양 그룹에서 올린 영상이 맨 위에 있었고 이런 댓글이 눈에 띄었다.[때린 게 사실인데 이유가 필요해요?]처음으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정면으로 맞섰다. 게다가 아주 강경한 태도로 말이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대성 그룹에서도 묵묵히 리트윗하고 있었고 같은 문구를 덧붙였다. 그리고 작은 기업들에서도 리트윗했다.선양 그룹과 대성 그룹에서 입장을 밝혔으니 다른 기업들도 우리에게 잘 보이려면 줄을 잘 서야 했다.그들은 전부 상업계에서 능구렁이 같은 사람들이라 머릿속엔 이익뿐이지 진실이 어떻든 중요하지 않았다. 이익을 가져다주는 사람이야말로 옳다고 생각했다.강해온에게 댓글을 쓰라고 할 때부터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다만 대성 그룹이 이 일의 성공에 박차를 가했을 뿐.여론이 한순간에 기울기 시작했다. 이젠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이 영상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기업들이 다 선양 그룹의 편을 들고 있어요. 영상 속 이 여자 연기한 거 아니겠죠?]의심의 목소리가 한 번 나타나자 뒤이어서 봇물 터지듯 터졌다. 임지혜는 아무런 이득도 보질 못했다. 그리고 놀라운 건 고현성이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그렇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고현성은 한 번도 임지혜를 위해 나서지 않았고 어젯밤에도 경찰서에서 나만 데리고 나갔다.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한가지 가설이 있긴 했는데 바로 고현성이 날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만약 이 가설이 성립된다면 고현성이 이젠 임지혜를 싫어하게 되었고 나를 사랑한다는 뜻이었다.섣달그믐날 전에 고현성이 날 찾아와 재결합하자고 했었다. 임지혜가 자살 소동만 벌이지 않았더라면 임지혜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하지도
석지훈이 나를 달래듯 말했다.“착하지.”나는 복잡한 마음을 안고 위층으로 올라가 휴대폰을 가져왔다.원태웅의 번호를 찾아내는 동안에도 마음속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다.나는 원태웅을 두려워했다. 그들 중에서 나에게 가장 적대적이었던 사람이 바로 그였고 그는 항상 나를 냉소적으로 대했었다.용기를 내어 그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통화 중이라는 알림이 떴다.그제야 그가 나를 차단했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아래층으로 내려가 이 사실을 석지훈에게 알렸다.그러나 그는 생각을 굽히지 않고 대신 주머니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비밀번호는 네 생일이야.”그의 비밀번호가 내 생일이라니!놀란 마음으로 물었다.“언제 바꾼 거예요?”그는 힐끗 나를 보며 말했다.“할 일 해.”나는 근심 어린 얼굴로 다시 물었다.“꼭 내가 셋째 오빠한테 말해야 해요?”“응, 상황이 긴박해.”긴박한 상황이라 해도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만큼 급하지는 않을 텐데.나는 그의 하얗고 긴 손가락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가 일부러 나에게 원태웅에게 전화를 하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사실을.그는 우리가 화해하기를 바랐던 것이다.사실 이건 오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문제였다. 본래 내 잘못이었고 원태웅은 나에게 오랫동안 앙금을 품고 있었다.석지훈은 우리가 화해하기를 원했고 그의 의도를 이해한 나는 곧바로 그의 휴대폰을 열고 원태웅의 번호를 찾았다.한민수는 예전에 나에게 말했었다.“원태웅이 끝내 널 용서하지 않는다 해도 네가 스스로 굽힐 필요는 없어.”하지만 그는 석지훈의 형제였고 석지훈은 나의 남자였다.나는 그가 우리 사이에서 곤란한 상황에 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게다가 지금 석지훈은 나에게 화해의 기회를 준 것이다.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원태웅에게 전화를 걸었다.아마 석지훈의 번호라서 그런지 그는 전화를 굉장히 빠르게 받았다.“형!”그의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는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셋째 오빠.”원태웅이 놀
좋았던 기분은 석지훈 어머니의 메시지를 본 뒤 한순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나는 석지훈이 눈치채는 것이 두려워 화면이 꺼질 때까지 휴대폰을 내려놓지 않고 기다렸다.그는 나를 말없이 한참 안고 있다가 조용히 일어나 나를 내려놓고 서재를 나섰다.나는 순순히 그의 뒤를 따랐고 그가 갑자기 멈춰서서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나도 멈춰 서며 물었다.“왜 그래요?”그가 부드럽게 말했다.“고양이처럼 따라다니지 말고.”나는 무심코 대꾸했다.“고양이는 도도해요. 오빠가 말하는 건 아마 강아지겠죠.”말을 하고 나서 순간적으로 입을 막았다. 석지훈은 싱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억울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오빠 못됐어요.”그는 대답하지 않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서 있었다.그가 계단 끝에 다다르자 뒤돌아서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똥강아지, 빨리 따라오지 않고 뭐해?”맙소사. 이 말은 정말 심쿵이었다.내 마음을 정확히 저격한 이 말에 나는 활짝 웃으며 달려가 그의 허리를 안았다.“오빠.”그는 단단한 팔로 내 허리를 감싸안으며 낮게 대답했다.나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나 오빠 좋아해요.”석지훈은 얇은 입술을 살짝 다물고 웃음 띤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나는 그의 턱 밑에 얼굴을 기대며 물었다.“그럼 오빠는 나 좋아해요?”그가 차분하게 말했다.“응.”나는 물러서지 않고 물었다.“응이라니, 좋아한다는 뜻이에요? 아니에요?”내가 계속 물으니,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그만 좀 해.”그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어서 좋아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이 쉽지 않았다.하지만 드물게 보이는 그의 어색한 표정이 너무 귀여워 나는 장난스럽게 계속 물었다.“그럼 정말 좋아하는 거예요, 아니에요?”결국 석지훈은 말없이 나를 안은 채 계단을 내려갔다.나는 그에게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해 살짝 서운했지만 그의 성격을 알기에 더 이상 집요하게 묻지는 않았다.계단을
고정재는 누군가를 쉽게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그가 담현아와 잘 되길 바랐다.잠시 후, 고정재에게서 답장이 왔다.[고마워, 꼬마 아가씨.]나는 휴대폰을 넣고 눈을 감고 쉬었다. 차 안은 내내 조용했다.석지훈은 대화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이어서 내가 말을 걸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 어려웠다.동성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정오가 되어 있었다.아침을 먹지 않아 배가 너무 고팠기에 석지훈은 곧바로 차를 몰아 석씨 가문 저택으로 향했다.멀리서 저택 문 앞에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과거에 자신을 석씨 가문의 미래 안주인이라 칭했던 여자였다.석지훈도 그 여자를 발견한 듯했고 그는 차를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세운 후 안전벨트를 풀며 나에게 말했다.“저 여자가 날 찾은 건 어머니와 관련된 일일 거야. 차에서 기다리고 있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 안에서 얌전히 기다렸다.석지훈은 차에서 내려 안정된 발걸음으로 석나은에게 다가갔다.두 사람의 표정은 모두 담담했지만 석나은의 눈에는 생기가 돌았고 반면 석지훈의 깊고 차가운 눈동자에서는 냉랭함만이 느껴졌다.석나은은 석지훈에게 몇 마디 말을 건네자 석지훈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두어 마디로 응답했다.내가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결국 석나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세워둔 차를 타고 떠났다.나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려 석지훈에게 다가갔다.그의 표정은 여전히 냉랭하고 어두웠고 나는 그의 손바닥을 살며시 잡으며 물었다.“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데 무슨 일이 있었어요?”“어머니가 나보고 다시 운성시로 오라고 하셨어.”‘우리는 방금 돌아왔는데.’나는 그에게 물었다.“그럼 갈 거예요?”그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당분간은 가지 않을 거야.”석지훈은 나를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갔다.저택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서재로 들어갔고 나는 아래층에서 차를 한 잔 우려 그의 서재로 가져갔다.문 앞에 도착했을 때 그의 차가운
윤다은은 과거에 고정재를 깊이 사랑했다. 몇 년간 그를 쫓아다니는 것만으로 행복해했지만 얼마 전 어렵게 고정재를 포기하고 자신을 돌봐줄 수 있는 남자를 찾았다. 그런데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결혼을 결심하다니, 너무 성급한 건 아닐까?내가 메시지에 답하지 않자 윤다은이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나 임신한 지 거의 두 달 됐어요.”그녀가 결혼하려는 이유였다.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그 남자를 사랑해?]며칠 전 그녀가 의사와 통화하던 모습을 보며 그녀가 그 남자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확실했다.하지만 그 마음이 정말 사랑일까?[네. 사랑해요.]윤다은의 대답이었다.나는 그녀가 사랑으로 결혼하길 바랐고 진정한 사랑을 찾기를 진심으로 바랐다.[축하해, 다은 씨.]윤다은은 곧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수아 언니, 내 들러리 좀 해줄래요? 희연 선배도 부르려고요. 아, 맞다. 담현아도 초대하려고 해요.]윤다은이 담현아까지 초대할 생각이라니.그 둘이 그렇게 친했었나?[좋아, 어디에서 결혼할 거야?][금운시요. 우리 둘 다 거기에 가족이 있거든요.][알았어. 희연이랑 같이 갈게.][고마워요, 수아 언니.]나는 더 이상 답장을 보내지 않고 곧바로 최희연에게 윤다은의 결혼 소식을 알고 있는지 물었다.최희연이 바로 답장했다.[나도 방금 알았어. 한 달도 안 남았더라. 그런데 우리 둘이 누군가의 들러리를 서는 건 처음 아닌가? 너는 축의금을 얼마나 할 생각이야?][윤다은은 돈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서 적당한 금액이 얼마인지 모르겠어. 그때 가서 정해야지. 고씨 가문의 형제들도 참석할 거야.]나는 지금 고현성과 마주치는 게 가장 싫었다.최희연이 물었다.[석지훈 씨도 너와 함께 가는 거야?]나는 옆에서 운전 중인 석지훈을 흘깃 바라보고 다시 시선을 돌리며 답장했다.[잘 모르겠어.]그때 가서 결정하면 되겠지.산 아래로 거의 다 내려왔을 때 담현아가 메시지를 보냈다.[고정재 씨의 여동생이 나를 들러리로 초대했어요. 그런데 나랑 그렇게 친
“친어머니를 원망하냐고요?”전에 나 자신에게도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내가 석씨 가문을 맡은 이후로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그 당시 나는 석지훈의 어머니에게 한동안 괴롭힘을 당했었고 그녀가 아들만을 위한다고 느껴질 때마다 마음이 괴로웠다.그러나 내가 그 여자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오히려 안도했으며 그 이후로는 더 이상 그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존재를 마음에서 내려놓은 것처럼.나는 고개를 저었다.“사람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분이 저를 포기한 것도 그분의 선택이었던 것처럼요. 게다가 저는 그분을 본 적도 없기 때문에 원망한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더군다나 저에게 신장을 주셨으니 제가 살아가는 매 순간은 그분 덕분이잖아요.”그렇다면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분을 원망할 수 있을까?이 나이가 되고 나서야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내가 아이를 낳아보니 그 여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아무리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해도, 나는 그 여자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는 지금까지도 나를 찾으려 하지 않았으니까.그녀의 마음속에서 나는 결코 그녀의 딸이 아니었다.‘그 여자가 신장을 기증해 나를 구한 것도 아마 죄책감 때문이겠지. 어찌 됐든 지금은 상관없어.’석지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잘 알고 있구나.”나는 말없이 웃었다. 해는 이미 완전히 떠올랐고 나는 그의 팔짱을 끼고 흔들의자에 앉아 운성시에서 보기 드문 아침 햇살을 감상했다.나는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여기 좋아해요?”이곳은 곳곳이 정성스럽게 꾸며져 있었고 석지훈이 많은 신경을 쓴 것이 분명했다.“응, 조용한 곳이니까.”그것뿐일까? 왠지 그게 전부는 아닐 것 같았다.나는 그의 어깨에 기대며 어젯밤 꾼 꿈을 떠올렸다.“나 어젯밤 꿈을 꿨어요. 꿈속에서 두 아이와 승아랑 함께 석씨 가문 저택에서 살고 있었어
이른 아침에 깨어났을 때 밖은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멀리 산의 경계선에는 아침 햇살이 어렴풋이 비치고 있었고 곧 해가 떠오를 것 같았다.문득 석지훈을 보니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고 마치 무언가 근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나는 손을 뻗어 그의 미간을 부드럽게 펴주었다. 내가 그의 곁에 있다는 것을 느꼈는지 그의 표정이 조금씩 편안해졌다.“평소 같았으면 벌써 깨어났을 텐데.”나는 조용히 일어나 옷을 입고 작은 오두막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는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쪼그려 앉아 엄지손가락으로 꽃잎을 살며시 문지르며 혼잣말로 말했다.’“참 예쁘네.”귓가에 갑자기 새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몸을 일으켜 그 소리를 따라갔다. 몇 마리 참새가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고 있었다.잠시 후, 한 마리 크고 튼튼한 까마귀가 날아왔다.“정말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구나.”기지개를 켜며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멀리 풀밭에 오래된 비석 하나가 보였다.호기심에 그곳으로 달려가 보니 비석에는 정자체로 빼곡히 글이 새겨져 있었고 맨 아래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석민기, 안혜인’석민기는 내 친부의 이름이었고 안혜인은 내 친모의 이름일 것이다.그리고 운산에서 두 사람이 사랑을 약속했을 것이다.내 아버지는 돌아가시던 날 밤까지도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고백했었다. 하지만 수많은 첩을 거느린 남자가 어떻게 진정한 사랑을 논할 수 있을까?단지 자기 연민일 뿐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대해 내가 알 수 있는 건 없으니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었다.나는 풀밭에 쪼그려 앉아 비석에 새겨진 글을 찬찬히 읽어보았다.‘우리의 인연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았다. 당신은 이미 가정을 이루었고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없는 처지이다. 내 사랑의 고통이 끝날 날이 오길 바라며 그때쯤 당신이 이미 이 세상에 없기를 소망한다.’비석에 적힌 글은 간단하지만 나의 어머니가 그의 가족 상황을 알고서 얼마나 단호했는지를
“그는 어릴 때부터 백혈병을 앓았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발달한 의학 덕분이야. 그래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기에 행동이 극단적일 수밖에 없어.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네가 그의 허상에 속지 않기를 바라서야.”석지훈의 말투는 마치 내가 앞으로도 최욱현을 만날 것을 확신하는 듯했다.‘그토록 매력적이고 유혹적인 남자가 어떻게 불치병을...’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다시는 그 사람이랑 만나지 않을 거예요.”석지훈이 손바닥을 내밀며 말했다.“다 쉬었으면 이제 일어나자.”나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서며 걸음을 옮겼지만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불치병을 앓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단순히 두 상자의 금을 위해 우리를 납치했을 리는 없었다.최현욱...아니, 이제는 그의 본명인 최욱현이라고 불러야겠지.그는 우리를 납치한 후 빠르게 도망쳤다가 이내 뻔뻔하게 별장으로 들어갔다. 마치 그 별장이 그의 소유인 것처럼.갑자기 내 머릿속에 대담한 생각이 떠올랐다.‘혹시 별장에 있는 사람들도 그의 사람들일까?’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들이 석지훈과 원한이 있었다면 나를 납치한 후 옷을 갈아입으라고 고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그런 독특한 장난을 할 사람은 최욱현밖에 없었다.나는 몰래 휴대폰을 꺼내 한민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최욱현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요?]산 정상에 거의 다다랐을 때 한민수의 답장이 도착했다.[F국 교포에요.]교포라...순간 윤 비서가 말했던 그 귀족 드레스가 떠올랐다. 그것은 F국왕실의 것이었다!나는 곧바로 별장에 있던 사람들 역시 최욱현의 사람들임을 깨달았다.처음부터 모든 게 그의 자작극이었고 그 함정에 빠지고도 나는 그에게 감격하며 고마워하고 있었다.마음속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덕분에 그의 신분이 매우 고귀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왕실 드레스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귀족이거나 권력을 가진 사람임이 틀림없었다.나는 휴대폰을 집어넣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몇 분이 지나지 않아 우리는 산
“네 생각이 맞아.”그의 가벼운 대답은 내 마음속 추측을 확인시켜 주었다. 나는 별장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며 물었다.“석 집사, 이미 석씨 가문에서 은퇴한 거 아니었어요?”“그 사람은 자식도 없고 친척도 없어. 일생을 석씨 가문에 바쳤기 때문에 어디 갈 곳도 없었지. 그래서 결국 여기 남기로 한 거야.”석만호는 석지훈을 망가뜨린 장본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석지훈이 나를 데리고 석만호가 있는 곳에 온 이유는 그 역시 이 모든 일이 석만호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석만호는 단지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다. 결국 명령을 내린 사람은 석지훈이 존경하고 경외했던 그의 아버지였다.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오빠는 석씨 가문을 원망하지 않아요?”차는 천천히 산 정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석지훈은 내가 무슨 뜻으로 물었는지 알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원망할 필요는 없어. 왜냐하면 나를 받아준 것도 석씨 가문이었으니까. 내가 친부모한테 버려졌을 때 나에게 안식처를 준 곳이 바로 석씨 가문이야. 이번에 그 사람들이 내게 한 일은 그동안 받은 수십 년의 은혜를 갚은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내 어머니는... 영원히 나의 어머니야.”석지훈은 아기 시절, 석씨 가문의 안주인이 그를 데려와 키운 것이었다. 안주인은 그에게 새 생명을 주었고 석씨 가문은 그에게 부와 권력을 쥐여주었다.이렇게 보면, 나의 친아버지는 확실히 그에게 은혜를 베푼 셈이었다.하지만 가장 존경하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건 그에게 가장 큰 상처였다.권력을 잃은 것보다 자신이 믿었던 사람이 한 발 한 발 집요하게 몰아붙였다는 사실이 가장 고통스러웠을 것이다.그 시절의 석지훈이 얼마나 약하고 고통스러웠을지 상상하니 내 마음이 쿡쿡 쑤셨다.나는 안쓰러운 마음을 누르며 그에게 말했다.“오빠 덕분에 내가 지금의 모든 것을 누리고 있어요. 하지만 오빠, 석씨 가문은 내 것이고 나는 오빠 사람이잖아. 우리 사이에는 네 것, 내 것이 없어야 해요!”석지
“윤아야, 네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시든 그건 어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당부야. 더군다나 네가 어떤 모습이든 네 아버지 눈에는 언제나 소중한 딸이고 나한테도 네 과거가 어떻든 간에 너는 내 인생에서 단 하나, 존중하고 소중히 여길 가치가 있는 여자야.”석지훈이 이렇게 따뜻한 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내가 멍하니 웃고 있을 동안 그의 진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해. 과거는 중요하지 않아. 가문이나 외모는 더더욱. 사랑은 네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거야.”‘네가 나를 사랑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석지훈이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다.나는 마음이 벅차올라 그의 새끼손가락을 살짝 잡으며 다급히 물었다.“오빠는 사랑을 잘 모르잖아요? 그런데 나를 사랑한다니! 언제부터 사랑하게 된 거예요? 혹시 우리 아버지랑 무슨 약속이라도 한 거예요? 오빠는 결혼 얘기는 했으면서 왜 아직도 나한테 청혼하지 않는 거죠?”석지훈이 다정하게 나를 불렀다.“윤아야.”나는 싱긋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는 내 코끝을 살짝 만지며 물었다.“결혼하고 싶어?”나는 결혼하고 싶었지만, 초조한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이제 뭐가 중요해!’‘내가 부인해도 내 마음을 꿰뚫어 볼 텐데!’나는 솔직하게 말했다.“네. 오빠랑 결혼해서 아내가 되고 싶어요.”그는 가볍게 웃으며 약속했다.“우리 동성시로 돌아가면 약혼하자.”그 약속은 현실감 있는 것이었다. 나는 기쁨에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 있던 장미꽃을 그의 품에 안겨주며 달콤하게 말했다.“자, 이 장미는 오빠한테 줄게!”석지훈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고마워.”그는 장미를 손에 쥐고 내 손을 꼭 잡고 별장으로 돌아갔다.나는 그의 곁을 따라가며 물었다.“오늘 내게 편한 옷을 입으라고 한 건 여기 데려오려고 했던 거야?”“이따 운산에 같이 가려고.”‘운산이라...’나는 이 지명이 낯익었고 적어도 처음 듣는 건 아니어서 망설이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