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전 대표님 장례식 날이에요.”운성시로 돌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고현성에게서 뭔가를 빼앗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일부러 선양 그룹을 이용하여 대성 그룹을 공격하고 있었다...그는 내가 선양 그룹과 대성 그룹이 싸우는 걸 가만히 볼 수가 없어 선양 그룹을 되찾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고 심지어 아직도 주식 양도 계약서를 가지지 않았다. 선양 그룹을 나에게 다시 돌려주기 위해 이러는 것 같았다.고씨 가문이 선양 그룹을 원한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런데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해버렸다.고현성이 이렇게 하는 목적이 과연 무엇일까?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떠오르지 않아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키를 챙기고 차에서 내린 다음 별장으로 들어갔다. 거실 소파에 엊저녁에 놓아뒀던 베이지색 목도리가 그대로 놓여있었다.몇 개월 전 눈이 내리던 밤, 그는 하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서 나에게 해주었다. 그때 그의 모습은 정말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집까지 데려다준 후 목도리를 나에게 주고 떠났다.나는 재빨리 위층으로 뛰어 올라가 아래층의 그를 내려다보았다. 가로등 아래 그의 표정은 한없이 부드러웠고 눈빛이 조금 차가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속상했던 순간이었다. 왜냐하면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가 고작 10m도 되지 않았지만 엄청 멀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그때의 나는 아무리 다가가도 가까이 다가가질 못했다. 그리고 그때의 그가 바로 내가 계속 잊지 못했던 고정재였다.나는 목도리를 품에 끌어안았다. 눈사람에게 해줬던 그 목도리가 고정재의 손에 들어갔다가 다시 수많은 고난을 겪고 나에게로 돌아왔다.고개를 숙여 냄새를 맡으니 상쾌한 냄새가 풍겨왔다. 고정재만이 가지고 있었던 매력이었다.나는 천천히 웃으면서 그의 이름을 가볍게 불렀다.“고정재.”이 이름이 아직은 낯설기만 했다.낮에 나는 계속 집에서 잠만 잤다. 저녁에 일어나 약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윤다은의 전화를 받았다. 같이 밥 먹으러 가자는 말에 나는 맥없는 목소리로
나는 현관 앞에서 하얀색 캐주얼 신발을 갈아신은 후 차고에서 검은색 스포츠카를 골라 회사로 갔다. 회사에 도착했을 때 강해온이 회사 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나는 손에 든 차 키를 그에게 건네며 물었다.“임지혜 씨 일은 해결했어요?”강해온이 차 키를 받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경찰서 그 일은 이미 해결했어요. 근데 여론이... 대표님, 지금 인터넷에 돌고 있는 이 영상 좀 보셔야겠어요.”강해온이 휴대전화를 건네자 나는 대충 보고 다시 돌려주었다. 내가 하찮아하며 말했다.“임지혜 씨가 할 줄 아는 수작이라곤 이런 것밖에 없어요.”어젯밤에 내가 임지혜의 팔을 잡던 그 영상이었다. 내가 그녀의 팔을 내려놓자 스스로 바닥에 넘어졌는데 촬영 각도에서 보면 내가 때린 것처럼 보였다.내가 했던 추측 그대로였다. 역시나 누가 뒤에서 몰래 찍고 있었다. 이젠 그녀의 수단 따위는 그냥 척 보면 알았다.강해온이 설명했다.“조잡한 수단이긴 하지만 지금 리트윗 횟수가 백만이 넘었고 밑에 댓글도 정말 가관이에요. 다들 대표님의 해명을 요구하고 있어요. 게다가 선양 그룹의 주가에도 영향을 미쳤고요.”나는 갑자기 그를 불렀다.“해온 씨.”강해온이 깍듯하게 물었다.“시키실 일 있으십니까?”“회사 사이트로 대응합시다.”강해온이 물었다.“어떤 내용을 올릴까요?”“때린 게 사실인데 이유가 필요해요?”그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대표님,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요?”이 세상에는 자기 주제를 모르고 이런 조잡한 수단을 쓰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렇게 하면 나에게 타격을 줘서 선양 그룹의 주가가 내려가고 또 날 협박할 수 있을 거라고 천진난만하게 생각했다. 심지어 내가 여론의 영향을 받아 임지혜에게 사과할 거라고 여겼다.‘허. 임지혜, 꿈은 야무져, 아주.’임지혜는 항상 대놓고 물어뜯거나 공격하는 게 아니라 옆에서 사람을 성가시게 만들었다.나는 가만히 놔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내가 시키는 대로 해요.”“알겠습니다, 대표님.”회사로 돌아온 나는 선양 그룹이 대
나는 고개를 돌렸다가 그 남자의 두 눈과 마주쳤다. 자세히 보니 눈빛이 차갑기 그지없었다.고현성의 말이 맞았다. 그들은 모두 차갑고 무뚝뚝한 남자들이었다.내가 고개를 끄덕였다.“대충 먹으러 왔어.”윤다은이 웃으며 말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같이 먹는 건데.”나는 입술을 깨물고 설명했다.“방금 회사에서 일 보고 나왔어. 진짜 일부러 약속 거절한 게 아니야.”사실은 일부러 거절한 것이었는데 이렇게 딱 마주치니 정말 민망했다. 나도 거절하고 싶진 않았다. 다만 고정재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라서 거절했을 뿐이었다.그때 윤다은이 나의 팔을 잡고 칭찬했다.“수아 언니 너무 예뻐요. 눈 밑에 반짝이를 그리니까 엄청 어려 보여요. 언니 올해 몇 살이에요?”윤다은의 칭찬에 나는 조용히 서 있는 고정재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는 나를 다정하게 보면서 말했다.“수아 씨 96년생이야.”내가 태어난 연도까지 알고 있었다. 나의 마음속에 삽시간에 잔잔한 물결이 일렁거렸다.윤다은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96년생? 그럼 나보다 더 어린데요?”내가 피식 웃자 윤다은이 입을 삐죽거렸다.“그럼 언니라고 부르지 않아도 되겠네요?”사실 언니라고 불러도 되었다. 예전에 새언니였으니까.나는 결국 솔직하게 말했다.“응. 근데 항렬로 따지면 내가 전에 새언니였어.”새언니라는 말을 듣고도 고정재의 표정이 아무런 흔들림이 없자 나는 실망감을 애써 감췄다.“다은 씨 오빠 고현성의 전처였어.”윤다은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끼고 있던 팔짱까지 풀었다.나는 웃으면서 말했다.“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 다음에 내가 식사 대접할게요.”식당을 나선 나는 고개를 들어 눈꽃을 바라보았다. 순간 슬픔이 밀려와 멈칫했다가 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눈꽃이 내 몸에 떨어지려던 그때 누군가 검은 우산을 씌워주었다.나는 놀란 얼굴로 돌아서서 그에게 물었다.“왜 따라 나왔어요?”그의 중저음이 참으로 매력적이었다.“집에 데려다줄게.”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차 가지고 왔어요.”
백미러로 고정재의 외로운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나의 건강이 좋지 않아도 당신은 날 가여워할 자격이 없다고요.”다른 사람은 날 가여워해도 고정재와 고현성은 그럴 자격이 없었다.연씨 별장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늦은 밤이었다. 나는 씻은 후 침대에 앉아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선양 그룹에서 올린 영상이 맨 위에 있었고 이런 댓글이 눈에 띄었다.[때린 게 사실인데 이유가 필요해요?]처음으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정면으로 맞섰다. 게다가 아주 강경한 태도로 말이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대성 그룹에서도 묵묵히 리트윗하고 있었고 같은 문구를 덧붙였다. 그리고 작은 기업들에서도 리트윗했다.선양 그룹과 대성 그룹에서 입장을 밝혔으니 다른 기업들도 우리에게 잘 보이려면 줄을 잘 서야 했다.그들은 전부 상업계에서 능구렁이 같은 사람들이라 머릿속엔 이익뿐이지 진실이 어떻든 중요하지 않았다. 이익을 가져다주는 사람이야말로 옳다고 생각했다.강해온에게 댓글을 쓰라고 할 때부터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다만 대성 그룹이 이 일의 성공에 박차를 가했을 뿐.여론이 한순간에 기울기 시작했다. 이젠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이 영상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기업들이 다 선양 그룹의 편을 들고 있어요. 영상 속 이 여자 연기한 거 아니겠죠?]의심의 목소리가 한 번 나타나자 뒤이어서 봇물 터지듯 터졌다. 임지혜는 아무런 이득도 보질 못했다. 그리고 놀라운 건 고현성이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그렇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고현성은 한 번도 임지혜를 위해 나서지 않았고 어젯밤에도 경찰서에서 나만 데리고 나갔다.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한가지 가설이 있긴 했는데 바로 고현성이 날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만약 이 가설이 성립된다면 고현성이 이젠 임지혜를 싫어하게 되었고 나를 사랑한다는 뜻이었다.섣달그믐날 전에 고현성이 날 찾아와 재결합하자고 했었다. 임지혜가 자살 소동만 벌이지 않았더라면 임지혜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하지도
하지만 날 신경 쓰고 있다는 것도 표현해주었다. 사실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만약 그때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고 고정재와 결혼하고 이렇게 다정한 시아버지까지 만났더라면... 내 결혼 생활은 무척이나 행복했을 것이다.하지만 안타깝게도 만약이라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괜찮아요. 다 해결할 수 있어요.”나는 다른 사람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고승철도 내 성격을 알고 있어 더는 묻지 않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화제를 돌렸다.“현성이 오늘 심리 상담받고 왔어.”나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네?”“개인적으로 의사 선생님한테 물어봤는데 현성이 지금 상태가 매우 불안정하대. 그러니까 기억 속엔 네가 없는데 사람들이 자꾸만 현성이 과거에 수아 너뿐이라고 하니까... 방황하고 있는 것 같아. 기억을 되찾으려고 애를 쓰긴 하지만 좋은 방법이 없어.”또 고현성의 좋은 얘기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한숨을 내쉬면서 말을 이었다.“현성이 너보다 8살 많아. 널 당연히 엄청 예뻐했었어야 했는데... 그동안 상처 주게 해서 미안해... 수아야, 만약 가능하다면 편견을 내려놓고 현성이를 다시 알아가는 건 어떨까? 현성이 참을성 있고 쉽게 뜻을 굽히지 않는 남자야. 걔 사랑을 받은 여자는 행복할 거야. 너한테도 많은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어.”나는 임지혜가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수아 씨 앞으로 알게 될 텐데 사실 현성이 정이 깊은 사람이에요. 현성이의 마음에 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어요. 근데 눈 밖에 나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자가 될 거고요. 왜냐하면 수아 씨가 사랑하는 그 남자는 아주 매정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요.”이젠 고승철도 비슷한 말을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필요하지 않았고 게다가 고현성은 나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조금 전의 가설은 정말 말 그대로 가설이었다.내가 진지하게 말했다.“아버님, 우린 이미 이혼했어요.”“그래도 두 사람이 다시...”고승철의 목소리에 기대가 가득
나는 재빨리 일어나 잠옷을 입고 침대 옆에 여유롭게 앉아 있는 남자 앞에 섰다. 이렇게 뻔뻔한 사람은 고현성뿐이었다. 고정재는 절대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고현성이 눈썹을 치켜세웠다.“내가 온 게 싫어?”당연하다는 듯한 그의 말투에 나는 불쾌함을 참으면서 되물었다.“날 잊었다면서 우리 집 비밀번호를 기억해요?”그는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로 걸어왔다. 나는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선을 그었다.“본론만 얘기해요.”고현성이 가만히 서서 말했다.“난 숫자에 예민해. 머릿속에 들어온 숫자는 잊지 않았을 가능성이 커. 그리고 내가 잊은 건 너지, 너희 집 비밀번호가 아니야. 게다가 1227은 정재 형 생일인 것 같은데.”아무렇지 않게 고정재 얘기를 꺼내자 내가 불쾌함을 드러냈다.“함부로 추측하지 말아요. 고정재 씨와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그러자 그가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다시 물었다.“관계가 없다고?”나는 침착하게 되물었다.“무슨 관계이길 바라는데요?”고현성이 어두운 얼굴로 나의 손목을 잡고 차갑게 말했다.“둘이 무슨 관계든 예전에 무슨 일이 있었든 넌 앞으로 내 사람이야. 아무도 널 빼앗아가지 못해.”“허.”내가 코웃음을 쳤다.“어디서 잘난 척이에요? 고현성 씨, 우린 아무 사이 아니에요. 무슨 사이라고 해도 당신은 날 단속할 자격이 없어요. 차라리 가서 임지혜 씨나 단속하지, 그래요?”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입술이 나의 입술에 닿았다.방안의 불빛이 어두웠다. 고현성이 나를 벽에 힘껏 밀어버린 바람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제야 남녀 사이의 힘 차이를 제대로 느꼈다.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였다.“난 진심으로 널 사랑해.”운성시로 돌아와서 사랑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나는 비아냥거리며 웃었다.“날 잊었다면서요.”고현성의 숨결이 나의 얼굴에 고스란히 닿아 간질거렸다. 그는 나의 입술을 깨물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응, 잊었어. 근데 널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 왜냐하면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고승철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의 말대로 3년 동안 내 옆에 있었던 사람은 고현성이었고 고현성은 내 마음속에서 지울 수 없는 존재가 돼버렸다.이제 두 남자 모두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었다.꼬마 아가씨라고 부르던 그 추억을 가슴속에 묻고 다시는 꺼내지도, 기대하지도 않겠다고 마음먹었다.나는 갑자기 운성시에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운성시로 돌아오고 나서 나를 더 힘든 상황으로 몰아넣기만 했을 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기분이 우울해져 두 눈을 꼭 감았다.‘왜 이렇게 뒤죽박죽이 됐지? 고정재를 좋아하는 상황에서 왜 머릿속에는 고현성만 떠오르냐고...’나는 입술을 깨물고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운성시에 한시도 있을 수가 없었다.‘일단 나가서 피해있자.’이튿날 아침 나는 짐을 챙기고 공항으로 갔다. 상주시로 간 게 아니라 어머니의 고향인 동성시로 갔다.동성은 운성의 옆 도시라 날씨가 비슷했다. 오늘도 구름이 많은 흐린 날씨였다. 나는 호텔을 잡고 반경우에게 전화를 걸었다.반경우는 나의 친구였는데 너무 친한 사이는 아니어도 그래도 나름 가까웠다. 예전에 나에게 동성으로 오면 연락하라고 했었다.나의 전화를 받은 그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동성에 왔어?”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응. 그래서 연락했어.”반경우도 나처럼 팔자가 별로 좋지 않았다. 우리 부모님은 항공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어머니도 그때 그 비행기에 탑승해 있었다...우리 둘은 그해 서로를 알게 되었고 그 후 몇 번 만났었다.“잠깐만 기다려. 데리러 갈게.”“아니야. 먼저 둘러보고 있다가 저녁에 찾으러 갈게.”나는 전화를 끊은 다음 코트를 챙기고 근처 오래된 마을로 향했다. 아침에 비가 내려서 마을 전체에 안개비가 자욱했다. 그런데 금운의 오래된 마을보다 예쁘진 않았다.금운의 오래된 마을은 지금까지 본 중에서 가장 예뻤다. 그곳은 나에게 있어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예를 들어 눈사람도 그곳에서 만들었고 고현성의 따뜻함도 그곳에서 느꼈
[난 더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이 문자를 보낸 후 나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더는 복잡한 일들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고 과거로 자신을 가두지 않기로 했다. 나는 다른 남자를 만나 짧은 연애를 하고 싶었다.설령 나를 가여워한다고 해도 상관이 없었다. 날 예뻐해 준다면, 사랑을 받는 느낌이 어떤 건지 알게만 해준다면 다 괜찮았다.나는 휴대전화를 넣고 오래된 마을에 저녁까지 있었다. 외곽이라 그런지 저녁이 되니 칠흑같이 어두웠고 거리에도 사람이 별로 없었다. 여자 혼자서 다니려고 하니까 조금 무섭기도 했다.나는 재빨리 택시를 잡았고 가는 길에 반경우의 전화를 받았다. 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자기야, 어디야?”평소 반경우와 연락을 자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여자 마음을 참 잘 달래주었다. 그는 나와 함께 있을 때면 항상 나의 기분을 생각해주었다. 이 또한 내가 동성에 오자마자 그에게 가장 먼저 연락한 이유였다. 반경우는 나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었고 마침 나에게 가장 부족했던 것도 사랑이었다.어차피 살날이 제한되어 있으니 마음대로 하고 싶었다. 나는 창밖의 풍경을 보면서 대답했다.“택시 안이야.”“그래? 위치 보내봐봐.”반경우는 할 얘기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때 최희연이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어디야? 오늘 운성에 왔거든. 만나자.]나는 바로 답장했다.[나 지금 동성이야.]나는 택시 운전 기사에게 차를 세우라고 한 후 돈을 낸 다음 길옆에서 반경우를 기다렸다.동성의 날씨가 조금 쌀쌀하여 코트를 입고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최희연이 캐물었다.[동성 어딘데?]나는 웃는 이모티콘을 보내면서 물었다.[자세한 위치는 알아서 뭐 하려고?][너 혼자 있는 게 걱정돼서 그러지.]최희연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는 호텔 주소를 그녀에게 보냈다.잠시 후 반경우가 도착했다. 검은색 벤틀리를 타고 왔는데 라이트 때문에 눈이 다 부셔 손으로 눈을 가렸다. 차에서 내린 반경우가 나의 어깨를 잡고 장난쳤다.“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