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열지 않아 고현성의 얼굴에 나타난 기대를 보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물었다.“그래서요?”“수아야, 나랑 다시 만나.”내가 거절하려던 그때 고현성은 전화 한 통을 받고 가버렸다. 나는 통유리 앞에 서서 고현성을 내려다보았다. 베이지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나를 등진 뒷모습은 몇 년 전에 좋아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그는 다급하게 차를 몰고 떠났다.나는 다시 돌아서서 침대에 앉았다. 그때 조민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고 걱정스럽게 물었다.“몸은 좀 어때?”“괜찮아. 그냥 예전이 그리워서 가끔 떠오르긴 해. 민수 오빠, 희연이 말고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은 게 있는데 오빠가 내 얘기 들어볼래?”조민수가 다정하게 말했다.“응. 말해주면 나야 좋지.”“현성 씨를 처음 만났을 때 난 14살이었어. 현성 씨가 연주한 첫 곡이 ‘바람이 사는 거리’였는데 그 곡은 엄마가 생전에 나한테 연주해준 마지막 곡이었거든. 그렇게 그 사람이 내 마음속에 들어왔고 지금까지 속상한 일이 있어도 다 괜찮다고 생각했어.”“수아야,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오빠, 나 때문에 고씨 가문과 맞서지 마.”조민수는 멈칫하다가 속상한 말투로 말했다.“그래. 네 마음이 어떤지 알겠어.”‘내 마음이라...’나는 한결같이 그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다.“고마워, 오빠.”“수아야, 며칠 후면 설이야.”내가 부탁했다.“운성에는 오지 마.”내가 죽는 모습을 조민수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수아야...”전화를 끊은 후 나는 침대에서 그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지금일 수도 있고 내일 혹은 모레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요 이틀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세 번째 날에 나는 고현성의 전화를 받았다.“미안해.”“괜찮아요. 지혜 씨랑 행복하게 살아요.”사흘 전 고현성이 다급하게 떠났던 이유가 임지혜의 자살 소동 때문이었다.비밀이 아니라서 기사만 찾아보면 알 수 있었다. 임지혜는 이런 방법을 써서라도 고현성을 옆에 두고 싶어 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든 이젠 중요
결혼식이 앞당겨졌다. 임지혜의 요구대로 섣달그믐날에 올리기로 했다. 고씨 가문에 새해 명절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임지혜는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안방에서 신랑이 데리러 오길 기다렸다. 그런데 정작 신랑은 우울한 표정으로 서재에 앉아 있었다.오늘은 결혼식 날이었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마치 오늘 결혼식의 주인공이 그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무슨 사명을 완성하듯 무감각했다.고현성은 결혼반지를 이리저리 만지다가 연수아와 결혼할 때 그녀가 직접 끼워준 반지라는 게 문득 떠올랐다. 연수아 생각에 그의 마음은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연수아만 그의 마음을 흔들 수 있었다.소파에 앉아 있던 그는 연수아에게 전화하고 싶었다. 휴대전화를 들자마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는데 연수아였다.그 이름을 본 순간 고현성은 잠깐 멍해졌다.‘왜 갑자기 나한테 전화했지?’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수아의 이름을 부르려는데 목놓아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고현성 씨, 수아가 집에서 숨을 거뒀어요...”고현성이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숨을 거두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집에서 숨을 거두다니?’휴대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고현성은 큰일이 났다는 예감이 밀려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수아가... 세상을 떠났어요.”휴대전화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고현성이 연씨 가문으로 달려갔을 때 여자 한 명이 있었는데 그도 아는 연수아의 절친 최희연이었다.‘연수아는?’연수아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생기라곤 없는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안색이 매우 창백했고 볼에 옅은 흉터가 있었다. 화장기 없는 그녀의 얼굴을 처음 봤는데 생각보다 앳됐고 아무 근심 걱정 없는 꼬마 아가씨 같았다.사실 연수아도 어린데...고현성은 부들부들 떨면서 그녀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는 품에 끌어안았다. 마치 소중한 뭔가를 잃은 것처럼 두려움이 밀려왔다.마침 그때 임지혜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고현성은 온몸을 떨면서 연수아를 안고 있었다.그 순간
고현성이 주는 상처를 수도 없이 받으면서 떠날 때는 축복을 건넸다. 차라리 그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렇게 용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진규만이 또 말했다.“연수아 씨가 바라던 게 하나 있었습니다.”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고현성을 보며 진규만은 한숨을 내쉬었다.“연수아 씨가 떠날 때 직접 보내 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바람이 사는 거리’를 연주해달라고 했습니다.”고현성은 고개를 들어 놀란 눈으로 진규만을 쳐다보았다.“뭐라고요?”“고현성 씨가 연주하는 ‘바람이 사는 거리’를 듣고 싶다고 했어요.”‘난 피아노 칠 줄 모르는데...’고현성의 시선이 옆에 있던 고정재에게 향했다. 그는 검은 코트를 입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고 그의 옆에 비싼 피아노가 있었다.고현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진작 알고 있었어?”“응. 쟤가 좋아했던 사람은 나였어.”고정재는 절반 정도 닫힌 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연수아의 목 아랫부분만 보였는데 몸이 매우 말라 있었고 발목에 점 하나가 있었다. 왠지 연수아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 본 적이 있었는데 이 모습이 아니었고 게다가 피부도 더 거칠어 보였다. 연수아는 늘 예쁘게 보이길 원했었는데 지금은...고정재의 의혹이 점점 더 커졌다. 하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아 결국 그 의혹을 잠재웠다. 그제야 연수아가 하얀 옷을 입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연수아의 존재를 처음 알았을 때 연수아가 입고 있었던 옷이었다. 뜻밖에도 그는 다 기억하고 있었고 이런 작을 일까지도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다.마치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어떻게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했을까?고정재는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 그때 이름을 알려줬더라면 이런 오해가 생기지 않았을 텐데.연수아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고정재의 성격이라면 절대 상처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연수아도 매일 평온하게 환하게 웃으면서 지냈을 것이다.‘꼬마 아가씨...’고현성은 연수아가 죽기 전 옆에 두었던 카
“수아야, 금방 수술했으니까 푹 쉬어야 해.”나는 죽지 않았다. 조민수는 나를 데리고 운성시를 떠나 수술을 시켜줬다. 성공률이 단 1%밖에 안 되는 그 수술을.그날 밤 조민수가 연씨 별장에 도착했을 때 내가 숨이 거의 넘어가기 직전이라고 했다. 그때 나는 하얀색 치마를 입고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얼굴에 핏기라곤 전혀 없었다.수술이 완전히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실패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나에게 시간을 더 벌어주었다.최희연이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힘겹게 입을 벌리자 다급하게 말렸다.“의식이 금방 돌아왔고 아직 기계를 꽂고 있어서 잠시 말하기 어려울 거야.”나는 알겠다고 눈을 깜빡였다. 최희연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며칠 전에 조민수 씨의 제안대로 고현성한테 전화했어. 그 사람이 와서 보더니 네가 죽은 줄 알고 얼마나 슬프게 울던지. 널 위해 장례식까지 치러줬고 변호사더러 네 유언장까지 읽게 했어.”‘장례식이라... 운성에 이젠 연수아라는 사람이 없겠네?’그 생각에 나의 두 눈에 슬픔에 가득 차올랐다.최희연은 계속 누워있어서 굳어버린 나의 팔을 주물러주며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민수 씨가 널 죽은 사람으로 위장해서 고현성을 벌하려 했어. 속상하고 후회하면서 평생 죄책감 갖고 살라고. 근데 장례식에서 가슴이 찢어질 듯이 우는 거 보고 내가 마음이 약해져서 그냥 사실을 얘기해줬어.”‘가슴이 찢어질 듯이?’내가 정신을 잃기 전에 고현성이 집으로 날 찾아와서 이런 얘기를 했었다.“그동안 계속 생각했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대체 누구인지... 내가 예전에 역겨워했던 그 여자더라고.”그리고 이런 말도 했었다.“내 아내가 되어줘. 우리 재결합하자.”그때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고현성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결국 임지혜와 결혼하기로 했다.나는 입술을 적시면서 힘겹게 물었다.“넌 그 사람 밉지 않아?”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졌다.전에 고현성은 임지혜를 위해서 최희연을 감옥에 보냈다. 감옥에서의 하루는 마치 1년 같았다. 그
나는 경악하며 물었다.“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9년 전에 네가 만났던 사람은 고현성이 아니야.”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고 내 이름을 부르는 최희연의 목소리만 들렸다. 순간 머릿속이 텅 비더니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최희연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그 뜻을 이해했다.나에게는 마음속 깊이 간직한 비밀이 있었다. 바로 고현성을 9년이나 짝사랑했다는 것이었다.어렸을 적엔 항상 그의 뒤를 쫓아다녔고 성인이 된 후에는 바라고 바라던 그의 아내가 되었다.9년, 나는 9년이나 그 남자만을 바라보았고 조심스럽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짝사랑을 지켜왔었다.그 사람이 나에게 그 어떤 사랑도, 동정도 주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그의 옆을 지켰다. 왜냐하면 나의 사랑은 순수했고 평생 고현성 하나뿐이었으니까.그런데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가 고현성이 아니라는 소리를 들었다.모든 추억과 감정들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그 생각에 가슴이 갑자기 저리기 시작했다.결국 나는 다시 응급실로 실려 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조민수가 병실에 있었다. 내가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며 머리를 쓰다듬더니 나지막하게 물었다.“수아야, 왜 울어?”‘내가 울었다고?’처음으로 ‘고현성’을 봤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훤했고 다정한 목소리로 꼬마 아가씨라고 부르던 모습, 교실에서 날 위해 ‘바람이 사는 거리’를 연주해주던 모습이 또렷하게 기억났다.우리 둘의 추억이 얼마 없어서 그런지 나는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겼다. 마치 귀한 보물처럼 마음속에 간직했다.그런데 지금 최희연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9년 전에 네가 만났던 사람은 고현성이 아니야.”만약 그때 날 꼬마 아가씨라 부르던 남자가 고현성이 아니라면... 3년 동안 고씨 가문 사모님으로서 받았던 고통이 다 우스워지는 게 아닌가?그리고 나의 사랑도 나를 기만했던 거고?마음속의 고통이 가시지 않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를 내저었다. 칼로 가슴을 도려낸 듯 피가 뚝뚝 흐르는 것 같았다.
만약 고정재가 9년 전에 피아노곡을 연주하고 날 꼬마 아가씨라 부르던 그 남자라면 최희연의 고양이 카페에서 봤던 익숙한 모습이 아마 그 사람일 것이다.수년 전처럼 인상이 깊었고 기억 속의 따뜻했던 그 남자의 모습과 완전히 겹쳤다.그때 최희연이 나에게 물었었다.“수아야, 왜 울어?”나도 울고 싶지 않았지만 그 뒷모습은 내가 9년이나 따라다녔던 뒷모습이었고 뼛속까지 그리워했던 남자였으며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부렸던 욕심이었다.그날 밤 음악 콘서트가 끝난 후 나는 그 사람을 찾으러 무대 뒤로 갔었다. 그런데 아무 수확이 없어 실망감을 드러낸 채 음악 센터를 나왔었다.그러다가 하이힐을 신고 길거리를 거닐고 있던 그때 바닥에 비스듬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나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고 그가 눈웃음을 지으면서 나에게 말했다.“꼬마 아가씨, 왜 또 따라와?”그때의 ‘고현성’이야말로 내가 진심으로 사랑한 남자였다. 그날 밤 그는 일부러 그곳에서 나를 기다렸고 나는 그 사람을 고현성이라 불렀다.내가 사람을 착각했다는 걸 분명 알면서도 바로잡지 않았고 계속 기다리고 있는 걸 알면서도 설명하지 않았다. 사실 그도 다정하면서 잔인하고 매정한 사람이었다....요즘 운성시는 비가 그치질 않았다. 내가 돌아왔을 때도 하늘은 어둡고 칙칙했다. 내가 운성시로 돌아오기 전에 조민수는 나의 사망 신고를 철수했다. 다시 말해 유언장이 아직 효력을 발생하지 않았다.고현성이 선양 그룹을 관리하긴 했지만 명의상으로는 여전히 내 회사였다.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고현성과 선양 그룹을 빼앗으려고 돌아온 게 아니었으니까.나는 고정재를 만나서 대답을 듣고 싶었고 그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9년 동안 간직해온 마음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나는 캐리어를 끌고 공항 밖으로 걸어 나갔다. 택시에 타자마자 최희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내가 수술을 마치고 상태가 안정되고 나서야 최희연은 마음을 놓고 진서준을 만나러 갔다. 두 사람이 지금 어떻게
최희연의 말은 나의 심장을 쿡쿡 찔렀다. 나는 단 한 번도 이런 문제들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까.만약 진짜 최희연의 말대로 그런 거라면 내가 운성시로 돌아온 목적이 무엇일까?그런데 나의 마음은 나더러 운성시로 돌아가라고 했다.나는 두 눈을 감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나한테 다 생각이 있어.”잠시 후 나는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그나저나 넌 왜 계속 현성 씨의 편을 들어?”아무리 원수에게 은혜를 베푼다고 해도 이건 너무 지나친 거 아닌가?나의 질문에 최희연이 멋쩍게 대답했다.“난 네가 걱정돼서 그러지.”내가 또 다른 걸 물을까 봐 최희연은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후 내 머릿속에는 최희연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그녀가 했던 질문들은 전부 피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까지도 아직 정확한 답을 찾지 못했고 대답해주는 사람도 없었다.한 시간 후 차가 연씨 별장 문 앞에 멈춰 섰다. 캐리어를 끌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본 순간 나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현성 씨가 왜 여기에 있어요?”그는 흰 셔츠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하얀 손목에는 매끄러운 염주를 하고 있었다. 전에는 이런 걸 하고 다니는 습관이 없었는데.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소용돌이처럼 깊이 빠질 것만 같았다.잠시 후 그가 눈살을 찌푸리고 낯선 사람을 대하듯 물었다.“날 알아?”나는 경악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당신은 날 몰라요?”그는 나를 싸늘하게 본 후 휙 가버렸다.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재빨리 고승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승철이 전화를 받고 무척이나 놀란 듯했다.“수아야, 네가 나한테 전화할 줄은 몰랐어...”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고승철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어쨌거나 내가 운성시로 돌아오기 전에 조민수가 내 소식을 알렸으니까. 고씨 가문은 이런 소식에 아주 예민했다. 그리고 선양 그룹도 아직 그들의 손에 완전히 들어간 게 아니었다.
“정재의 행방은 나도 몰라. 걔는 나랑 연락이라는 걸 안 하거든.”고승철이 실망스러운 말투로 말하다가 갑자기 물었다.“그나저나 정재 행방은 왜?”문득 고현성이 금운의 마을에서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고정재는 성격이 무뚝뚝한 데다가 속으로 고씨 가문을 업신여기고 있어 고승철과 점점 연락을 끊었다고 했다.행방을 모른다는 고승철의 말에 나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드리워졌다. 조민수는 고정재가 아직 운성시에 있다는 것만 알아냈지, 구체적인 행방은 찾지 못했다.고승철이 나를 부르면서 또 물었다.“정재를 찾는 이유가...”나는 그의 말을 자르고 대충 둘러댔다.“우리 엄마가 생전에 피아노를 좋아하셨거든요. 예전에 고정재 씨 연주회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아주 진한 감동을 받았어요. 그래서 우리 엄마 9주년 제사에 고정재 씨를 초대하고 싶어서요.”아마 이보다 더 구차한 변명은 없을 것이다. 고승철은 내가 얘기하길 꺼리자 더는 캐묻지 않고 고정재의 행방을 알고 있는 사람을 알려주었다.“현성이는 무조건 형 소식 알고 있을 거야.”“그럼 아버님이 대신 물어봐 주실 수 있어요?”내가 망설이며 묻자 고승철이 난감해하며 거절했다.“정재 일은 지금까지 신경 쓴 적이 없었어. 그러니까 수아 네가 직접 현성이한테 물어봐. 정재 어디 있는지.”고승철의 교활한 속셈을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나더러 직접 고현성을 찾아가라고 한 건 우리에게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어서였다.그렇다. 그는 아직 우리가 다시 잘되길 바라고 있었다. 왜냐하면 연씨 가문이 아직 나의 손에 있으니까.그런데 문제는 고현성이 나를 잊어버렸다. 갑자기 찾아가서 고정재의 행방에 대해 묻는다면 절대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내가 고승철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자 고승철은 전화를 뚝 끊은 다음 고현성이 지금 지내고 있는 거처의 주소를 보냈다. 나는 그 문자를 보자마자 그냥 삭제해버렸다.다른 방법을 찾아서 고정재를 찾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고현성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우린 만나지 말았
나는 몇몇 의사들과 함께 별장에서 몇 시간이나 기다렸지만 석지훈 일행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한민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통화 중이었다.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불안한 마음에 단톡방에서 예유진의 카톡을 추가하고 음성 통화를 걸었다.석지훈에 대해 묻자 예유진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그는 통화를 끊기 전에 말했다.“3분만 기다려요.”나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지만 그 3분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나는 방안을 초조하게 서성거렸다.3분도 채 되지 않아 예유진에게서 전화가 왔다.“형과 민수는 별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습격을 당했어요. 민수는 중상을 입고 지금 중환자실에 있고 형은 아직까지 행방불명이에요.”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행방불명이라니요?”“우리 사람들 모두 형을 못 찾았대요.”나는 곧바로 함승윤에게 연락해 전 세계 위치 추적 시스템을 가동시켰다. 그러고는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사방이 피투성이였지만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함승윤에게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시간이 흐를수록 그에 대한 걱정은 커져만 갔다. 나는 마치 중심을 잃은 사람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함승윤이 핀란드에 도착했을 때, 나는 별장 입구에 앉아 있었다. 그때 핀란드에는 이미 차가운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아직 석지훈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그에게 병원에 같이 가자고 했다.나는 마음속으로 매우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우선 병원에 가서 한민수를 만나야 했다.한민수는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 상태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민영이 병원에 도착했지만 나를 보고 눈을 흘기더니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그 후 의사에게 한민수의 상태를 물어본 함승윤이 내 옆으로 와서 말했다.“한민수 씨의 상태는 매우 심각해서 오늘은 의식을 되찾기 어려울 것 같답니다. 가주님께서는 계속 여기서 기다리실 건가요?”“기다릴 거예요. 깨어날 때까지.”석지훈의 행방을 알고 있는 건 한민수뿐이었다. 나는 참을성 있
한민영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나는 단단히 제압당한 채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바로 그때, 별장 주변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났다.처음에는 그들 편인 줄 알았지만 의료 가방을 든 사람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창백해지는 것을 눈치챘다. 아마 그들은 별장 주변에 경호원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었다.순간 내 머리에 총구가 겨눠졌다.“비켜! 우리를 보내 줘!”한민영은 다가와 냉소적으로 비웃으며 말했다.“멍청하긴.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고 왔냐? 여긴 석지훈의 본거지다. 과연 석지훈이 아무 대비를 안 해놨을 것 같아? 너희가 어느 세력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로 어리석은 걸 보면 대단한 조직은 아닌 것 같네.”나는 등 뒤에 있던 사람이 완전히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리고 침착하게 영어로 그를 설득했다.“날 놔줘. 그러면 널 보내 줄게. 걱정 마. 너와 네 동료의 목숨에는 관심 없어.”그는 이미 이곳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나를 풀어 주었다. 나는 빠르게 몇 걸음 달려가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 곁으로 몸을 피했다.그때 한민영이 차갑게 명령했다.“저놈들 처리해.”처리...그 말은 죽이라는 뜻이었다.나는 재빨리 막아섰다.“보내줘.”그녀는 충격받은 듯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너도 저놈들처럼 멍청한 거야? 네 목숨을 노린 놈들을 살려 준다고?”그녀는 언제나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나는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너보다야 덜 멍청하지.”“내가 보내 준다고 했으니 보내 줘야지. 다음번엔 쉽게 봐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원래 있던 의사들은?”그들은 분명 한민수가 보낸 의사들을 납치한 뒤 신분을 위장했을 것이다. 예상대로 저 뒤쪽에 서 있던 검은색 승용차를 가리키더니 재빨리 도망쳤다.나는 곧바로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에게 의사들을 구출하라고 지시했다.경호원 몇 명이 달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한민영은 검은 가죽 라이더 재킷을 걸친 채 비웃듯 말
하지만 그는 한 가지 맞는 말을 했다. 고현성은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들이 그를 어떻게 대하든 그것은 그들의 일이었다.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원태웅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다만 답답한 마음에 석지훈에 대한 걱정까지 겹쳐 도저히 잠들 수가 없었다.석지훈이 돌아오지 않으니, 나도 편히 잠들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승철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현성이 갑자기 바보가 됐다.]나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솔직히 걱정되고 죄책감도 들었지만 이제 그는 나와 무관한 사람이었다.나는 그를 신경 쓸 수 없었다.내가 조금이라도 그를 신경 쓰는 순간, 석지훈의 가슴에 칼을 꽂는 것과 다름없었다.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무관심, 모른 척하는 것뿐이었다.내가 답장을 보내지 않자 고승철이 다시 메시지를 보내왔다.[수아야, 네 곁에 지금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우리 현성이를 친구처럼 대해 줬으면 한다. 기회가 되면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해 줘라.]그는 내가 고현성에게 온기를 주길 바랐다.하지만 고현성은 오직 수아라는 이름만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대할수록 그는 나에게 더욱 의지하게 될 것이다.우리 사이의 선이 어디까지인지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벼랑 끝에 서 있는 나에게 도대체 어떤 선택이 옳은 걸까?그렇다고 고현성에게 너무 잔인하게 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석지훈에게도 상처를 주고 싶지도 않았다.나는 여전히 고승철의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도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내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민수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그때 에르크의 하늘은 이미 밝아오고 있었고 아침 햇살이 구름을 뚫고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날씨 예보에서는 오늘 눈이 올 거라고 했지만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눈이 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나는 창가에 서서 물었다.“일은 다 처리했어요?”“네, 근데 지훈이가 조금 다쳤어요. 잠시 후에 의사가 집으
핀란드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지만 도로는 여전히 미끄러웠다. 차가 급하게 멈추며 흔들렸지만 담현아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그러자 운전하던 예유진이 갑자기 물었다.“방금 예하나라고 했어요?”나는 원태웅이 예전에 예유진이 자신의 여동생을 좋아했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의 여동생이 예씨 가문의 실권자라고도 했다. 하지만 실권자는 예지한이었고 고양이 카페의 직원인 예하나가 아니었다.게다가 예하나는 자신이 제당 출신이라고 했다.이렇게 우연이 겹칠 수 있을까?“네, 예하나.”그는 깊게 숨을 내쉰 뒤 다시 차를 몰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형수님, 그분은 잘 지내고 있나요?”그는 예하나를 예지한으로 착각하고 있었다.나는 그에게 뭔가를 더 물어보려 했지만 담현아 갑자기 자신의 핸드폰을 내게 건넸다.화면에는 짧은 한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예지한의 어릴 적 이름이 하나예요. 고양이 카페의 그 사람, 아마 예지한 일 거예요.”나는 속으로 놀랐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꽤나 여유롭게 살고 있어요.”내 말을 듣고 예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렇다면 다행이네요.”그는 나를 에르크 저택 앞까지 데려다준 뒤 예하나의 연락처를 물었다.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하나 씨는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아요. 전자기기를 일절 쓰지 않더군요.”그는 순간 멍해진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니 아무리 찾아도 못 찾았던 거네요.”그는 담현아와 함께 떠났고 나는 한동안 저택 문 앞에 서 있다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그곳에서 자고 있던 저먼 셰퍼드 두 마리가 갑자기 놀라 깨더니 나를 향해 낮게 짖었다. 그러나 곧 나를 알아보고는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한밤중이라 조금 무서웠지만 녀석들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나 보고 싶었어?”녀석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는지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갑자기 나를 덮쳐 바닥에 넘어뜨렸다. 나는 한참을 몸부림친 끝에 겨우 일어났다.다시 쓰러
“급한 일이에요. 얼른 넘겨줘요.”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서둘러 핸드폰을 석지훈에게 건넸다.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이내 차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먼저 유진이랑 함께 에르크로 돌아가 있어.”곧이어 뒤따라오던 차도 멈춰 섰다. 나는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조용히 차 문을 열고 내렸다.뒤차로 향하려던 순간 석지훈이 나를 불렀다.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아가.”나는 허리를 숙여 차 안의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엔 걱정이 가득했다.“무슨 일이에요?”그는 미안한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해, 집까지 데려다주지 못해서.”집...에르크에 있는 그곳.석지훈에게는 그곳이 진짜 집이었다.운성시에 정착한 것이 어쩌면 그에게는 큰 희생이었을지도 모른다.예유진이 나를 에르크로 데려가는 동안, 나는 줄곧 말이 없었다. 어쩌면 이곳에서 정착해야 되는 게 아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더 이상 그와 떨어져 지내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다.하지만 국내에는 내가 결코 놓을 수 없는 석씨 가문이 있었다.고정재가 말했듯, 나는 그것을 반드시 손에 쥐고 있어야 했다.더 이상 과거처럼 무관심한 태도로 있다가 모든 걸 빼앗길 수는 없었다.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를 들은 담현아가 물었다.“언니, 뭔 일 있어요?”“아니, 그냥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나는 깊은 고민에 빠진 채 예유진에게 물었다.“유진 씨, 둘째 오빠랑 민수 씨가 떠난 이유가 뭐예요? 혹시 위험한 일이에요?”그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자세한 건 저도 말해줄 수 없어요. 아직 형수님이랑 결혼한 사이도 아니다 보니 사업적으로나 사적으로도 공유할 수 없는 일이에요.”나는 늘 우리가 부부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왔다. 자연스럽게 함께했고 이미 충분히 깊은 관계라고 여겼다.당연히 법적으로 그의 아내가 된다면 더욱 행복할 것이다.하지만 지금,
석지훈이 곧 전 세계였다.그는 다른 이들의 전부이기도 했다.그리고 나에게도, 그는 전부였다.“그래요. 오빠가 있으면 그게 곧 전 세계죠.”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석지훈은 슬며시 내 손을 잡고 한민수 일행을 뒤따라갔다.앞서가던 한민수는 계속 담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아마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겠지만 그 역시 물러날 줄 아는 사람이었다.마치 한씨 가문에서 자신의 위치를 명확히 알고 물러난 것처럼 이번에도 과감히 포기했다.예유진도 마찬가지였다.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가문의 혈통이라는 거대한 산에 짓눌려 있었다.마치 과거에 내 아버지에게 발각된 석지훈처럼...아버지는 갖은 술수를 동원해 석지훈의 손에서 석씨 가문을 빼앗아 내게 넘겼다.몇십 년 동안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었고 늘 곁에 두고 가르친 사람이었지만 결국엔 나라는 낯선 존재가 더 중요했다.정해진 현실 속에서 운명은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노력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한민수는 자신이 너무 오래 담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예유진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유진아, 넌 어떤 순간에 여자한테 가장 설레?”그는 걸음을 멈추고 무언가를 떠올리며 다소 아련하게 말했다.“내 셔츠를 입고 있을 때.”한민수는 흥미를 느낀 듯 되물었다.“사모님도 네 셔츠를 입은 적 있어?”그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나는 곁눈질로 석지훈을 바라보았더니 그의 귓불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문득, 내가 그의 셔츠를 입고 발코니에 서 있던 게 떠올랐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마 그때 그의 마음은 크게 요동쳤을 것이다. 그저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었다.그 생각에 나도 모르게 실소가 새어 나왔다.한민수는 고개를 돌리더니 나를 향해 물었다.“왜 혼자 웃어요?”나는 입술을 오므리며 대답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재밌는 거 있으면 좀 공유해줘요.”나는 웃기만 했고 그는 시시하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공항 밖으로 나와 그들은 한차에 탔고 나는
“지훈 오빠도 핀란드에 있어요. 언니도 나랑 같이 가요.”담현아의 제안은 꽤나 솔깃했다.하지만 아직 귀국하지 않은 석윤민이 마음에 걸렸다.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석지훈이 너무도 그리웠기 때문이다.그와 떨어진 지 고작 이틀이었지만 그 시간이 유난히 길게만 느껴졌다.우리는 많은 사람을 데리고 가지 않기로 했다. 공항에 도착하면 한민수와 예유진이 마중을 나올 예정이었기에 우리 둘만 비행기를 타고 핀란드로 향하기로 했다.나는 한참을 설득한 끝에 경호원들을 돌려보냈다. 어쩌면 그들에게도 짧은 휴가를 주는 셈이었다.우리는 오후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비행기를 타기 전, 담현아는 고정재에게 짧은 문자를 남겼다.[저 당분간 핀란드에 다녀올게요.]나는 그녀의 핸드폰 화면을 보며 물었다.“이게 다야?”그러자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뭐가 더 있어야 해요?”나는 그녀의 핸드폰을 받아 들고 잠시 생각한 후 타자하기 시작했다.[일 때문에 가는 거예요. 도착하면 전화할게요. 그때쯤이면 정재 씨도 막 일어났겠죠. 잘 자요, 정재 씨.”담현아는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황급히 말했다.“나, 한 번도 그 사람을 정재 씨라고 불러본 적 없어요!”나는 웃으며 핸드폰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잘 자요, 정재 씨를 잘 자요, 아저씨로 바꿨고, 마지막에 한 마디를 더 추가했다.“보고 싶을 거예요.”나는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오, 꽤나 달콤한데?”그러자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그럼요. 다만 입 밖에 쉽게 내뱉지 못할 뿐이에요.”그녀는 핸드폰을 넣으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말했다.“현아야, 여자한테 애교는 곧 무기야!”나는 석지훈에게 애교 부리는 걸 좋아했다.특히 내가 잘못했을 때.그러자 담현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저도 알아요. 근데 유독 아저씨 앞에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그런 혼란스러움이야말로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증거였다.
담현아의 나이는 확실히 어렸지만 내 아이가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기엔 애매했다. “그냥 작은고모라고 부르는 게 어때?”그러자 담현아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그럼 아저씨는 고모부가 되는 거예요?”나는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갑자기 정재 씨랑 친척이 된 거야?”그러다 생각이 바뀌어 말했다.“사실 삼촌이라고 부르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정재 씨는 삼촌, 넌 작은숙모?”이 친척 관계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그래요, 언니가 아저씨랑 더 오래 알고 지냈으니까, 그쪽 기준으로 부르면 되겠네요. 사실 나도 작은숙모라는 호칭이 더 맘에 들어요!”고정재가 한 말이 맞았다. 우리가 아무리 가까워도, 그가 예전부터 우리의 피아노 곡을 계속 연주한다 해도 담현아는 결코 우리를 오해하지 않을 사람이었다.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떳떳한 사이니까.“그럼 그렇게 하자! 아까 경찰이 그러던데, 너 최근 2년 동안 경찰서만 5번이라며? 핀란드에 있는 애가 어떻게 국내에서 이렇게 사고를 치고 다니는 거야?”그녀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별일 아니에요.”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해서 나도 더 묻지 않았다.집에 도착했을 땐 거의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밤새 클럽에서 놀다가 경찰서와 병원을 오가느라 그녀는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소파에 털썩 눕더니 아예 꼼짝도 안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이 잠들었다. 나는 옷장에서 담요를 꺼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마침 고정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현아는 자?”그는 담현아가 내 집에 있는 걸 알고 있었다. 정말 모르는 게 없는 남자였다.“네, 방금 잠들었어요.”나는 침대에 기댄 채 대답했다. 곧이어 전화 너머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많이 다쳤어? 민영이가 꽤 심하다고 그러던데.”고민영이 그에게 말한 모양이었다.“병원에서 치료받았어요. 괜찮아요.”“그래. 현아 신경 써줘서 고마워.”나는 낮게 말했다.“별말씀을, 친구잖아요.”나는 전화를 끊고 다시 잠을 청했다.그리
고민영이 놀라며 물었다.“형수님, 무슨 일이에요?”나는 조용히 앉아 있는 담현아를 가리키며 설명했다.“이분은 민영 씨 오빠의 와이프예요. 두 사람은 이제 막 혼인 신고를 마쳤고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어요. 민영 씨가 작은형수랑 싸우면 오빠가 곤란해지지 않겠어요?”고민영은 깜짝 놀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누구요?”나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누구겠어요? 정재 씨죠.”그 말을 듣자마자 고민영은 당황하며 담현아에게 급히 사과했다.“죄송해요, 작은 형수님. 저는 두 분이 그런 관계인지 전혀 몰랐어요... 아까 일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제가 형수님을 알지도 못했잖아요. 저도 당연히 제 친구를 도와야 했고요. 그냥 오해였던 거예요. 우리 합의할까요?”담현아는 원래 쿨한 성격이라 작은 일로 꽁해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고정재가 곤란해지는 것도 원치 않았기에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요. 애초에 제 잘못이었어요.”고민영도 성격이 꽤 시원시원했지만 문제는 그녀의 친구였다. 그 친구는 여전히 담현아를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며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나는 그녀에게 말했다.“얼른 병원 갈까? 상처 치료해야지.”“네, 치료는 해야죠.”담현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고민영의 친구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굳이 병원에 갈 필요도 없겠는데? 얼굴이 그 모양인데 흉터가 남든 말든 똑같지 않을까? 괜히 의료 자원을 낭비하지 말고.”담현아는 성질이 급한 편이었다. 그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대놓고 비웃으며 말했다.“수아 언니, 무식한 년이랑 말싸움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그런 년보다 몸매 좋고 예쁘고 돈 많고 남자 친구도 더 잘생기면 그만이죠. 굳이 입 아프게 싸울 필요가 없잖아요.”고민영의 친구는 화가 나서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이 벌떡 일어났지만 고민영은 급히 그녀를 붙잡으며 말했다.“내 형수님이야. 좀 참아!”담현아는 그 친구를 향해 가볍게 침을 뱉고는 경찰서를 나섰다. 나는 철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