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악하며 물었다.“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9년 전에 네가 만났던 사람은 고현성이 아니야.”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고 내 이름을 부르는 최희연의 목소리만 들렸다. 순간 머릿속이 텅 비더니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최희연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그 뜻을 이해했다.나에게는 마음속 깊이 간직한 비밀이 있었다. 바로 고현성을 9년이나 짝사랑했다는 것이었다.어렸을 적엔 항상 그의 뒤를 쫓아다녔고 성인이 된 후에는 바라고 바라던 그의 아내가 되었다.9년, 나는 9년이나 그 남자만을 바라보았고 조심스럽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짝사랑을 지켜왔었다.그 사람이 나에게 그 어떤 사랑도, 동정도 주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그의 옆을 지켰다. 왜냐하면 나의 사랑은 순수했고 평생 고현성 하나뿐이었으니까.그런데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가 고현성이 아니라는 소리를 들었다.모든 추억과 감정들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그 생각에 가슴이 갑자기 저리기 시작했다.결국 나는 다시 응급실로 실려 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조민수가 병실에 있었다. 내가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며 머리를 쓰다듬더니 나지막하게 물었다.“수아야, 왜 울어?”‘내가 울었다고?’처음으로 ‘고현성’을 봤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훤했고 다정한 목소리로 꼬마 아가씨라고 부르던 모습, 교실에서 날 위해 ‘바람이 사는 거리’를 연주해주던 모습이 또렷하게 기억났다.우리 둘의 추억이 얼마 없어서 그런지 나는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겼다. 마치 귀한 보물처럼 마음속에 간직했다.그런데 지금 최희연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9년 전에 네가 만났던 사람은 고현성이 아니야.”만약 그때 날 꼬마 아가씨라 부르던 남자가 고현성이 아니라면... 3년 동안 고씨 가문 사모님으로서 받았던 고통이 다 우스워지는 게 아닌가?그리고 나의 사랑도 나를 기만했던 거고?마음속의 고통이 가시지 않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를 내저었다. 칼로 가슴을 도려낸 듯 피가 뚝뚝 흐르는 것 같았다.
만약 고정재가 9년 전에 피아노곡을 연주하고 날 꼬마 아가씨라 부르던 그 남자라면 최희연의 고양이 카페에서 봤던 익숙한 모습이 아마 그 사람일 것이다.수년 전처럼 인상이 깊었고 기억 속의 따뜻했던 그 남자의 모습과 완전히 겹쳤다.그때 최희연이 나에게 물었었다.“수아야, 왜 울어?”나도 울고 싶지 않았지만 그 뒷모습은 내가 9년이나 따라다녔던 뒷모습이었고 뼛속까지 그리워했던 남자였으며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부렸던 욕심이었다.그날 밤 음악 콘서트가 끝난 후 나는 그 사람을 찾으러 무대 뒤로 갔었다. 그런데 아무 수확이 없어 실망감을 드러낸 채 음악 센터를 나왔었다.그러다가 하이힐을 신고 길거리를 거닐고 있던 그때 바닥에 비스듬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나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고 그가 눈웃음을 지으면서 나에게 말했다.“꼬마 아가씨, 왜 또 따라와?”그때의 ‘고현성’이야말로 내가 진심으로 사랑한 남자였다. 그날 밤 그는 일부러 그곳에서 나를 기다렸고 나는 그 사람을 고현성이라 불렀다.내가 사람을 착각했다는 걸 분명 알면서도 바로잡지 않았고 계속 기다리고 있는 걸 알면서도 설명하지 않았다. 사실 그도 다정하면서 잔인하고 매정한 사람이었다....요즘 운성시는 비가 그치질 않았다. 내가 돌아왔을 때도 하늘은 어둡고 칙칙했다. 내가 운성시로 돌아오기 전에 조민수는 나의 사망 신고를 철수했다. 다시 말해 유언장이 아직 효력을 발생하지 않았다.고현성이 선양 그룹을 관리하긴 했지만 명의상으로는 여전히 내 회사였다.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고현성과 선양 그룹을 빼앗으려고 돌아온 게 아니었으니까.나는 고정재를 만나서 대답을 듣고 싶었고 그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9년 동안 간직해온 마음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나는 캐리어를 끌고 공항 밖으로 걸어 나갔다. 택시에 타자마자 최희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내가 수술을 마치고 상태가 안정되고 나서야 최희연은 마음을 놓고 진서준을 만나러 갔다. 두 사람이 지금 어떻게
최희연의 말은 나의 심장을 쿡쿡 찔렀다. 나는 단 한 번도 이런 문제들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까.만약 진짜 최희연의 말대로 그런 거라면 내가 운성시로 돌아온 목적이 무엇일까?그런데 나의 마음은 나더러 운성시로 돌아가라고 했다.나는 두 눈을 감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나한테 다 생각이 있어.”잠시 후 나는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그나저나 넌 왜 계속 현성 씨의 편을 들어?”아무리 원수에게 은혜를 베푼다고 해도 이건 너무 지나친 거 아닌가?나의 질문에 최희연이 멋쩍게 대답했다.“난 네가 걱정돼서 그러지.”내가 또 다른 걸 물을까 봐 최희연은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후 내 머릿속에는 최희연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그녀가 했던 질문들은 전부 피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까지도 아직 정확한 답을 찾지 못했고 대답해주는 사람도 없었다.한 시간 후 차가 연씨 별장 문 앞에 멈춰 섰다. 캐리어를 끌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본 순간 나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현성 씨가 왜 여기에 있어요?”그는 흰 셔츠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하얀 손목에는 매끄러운 염주를 하고 있었다. 전에는 이런 걸 하고 다니는 습관이 없었는데.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소용돌이처럼 깊이 빠질 것만 같았다.잠시 후 그가 눈살을 찌푸리고 낯선 사람을 대하듯 물었다.“날 알아?”나는 경악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당신은 날 몰라요?”그는 나를 싸늘하게 본 후 휙 가버렸다.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재빨리 고승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승철이 전화를 받고 무척이나 놀란 듯했다.“수아야, 네가 나한테 전화할 줄은 몰랐어...”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고승철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어쨌거나 내가 운성시로 돌아오기 전에 조민수가 내 소식을 알렸으니까. 고씨 가문은 이런 소식에 아주 예민했다. 그리고 선양 그룹도 아직 그들의 손에 완전히 들어간 게 아니었다.
“정재의 행방은 나도 몰라. 걔는 나랑 연락이라는 걸 안 하거든.”고승철이 실망스러운 말투로 말하다가 갑자기 물었다.“그나저나 정재 행방은 왜?”문득 고현성이 금운의 마을에서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고정재는 성격이 무뚝뚝한 데다가 속으로 고씨 가문을 업신여기고 있어 고승철과 점점 연락을 끊었다고 했다.행방을 모른다는 고승철의 말에 나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드리워졌다. 조민수는 고정재가 아직 운성시에 있다는 것만 알아냈지, 구체적인 행방은 찾지 못했다.고승철이 나를 부르면서 또 물었다.“정재를 찾는 이유가...”나는 그의 말을 자르고 대충 둘러댔다.“우리 엄마가 생전에 피아노를 좋아하셨거든요. 예전에 고정재 씨 연주회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아주 진한 감동을 받았어요. 그래서 우리 엄마 9주년 제사에 고정재 씨를 초대하고 싶어서요.”아마 이보다 더 구차한 변명은 없을 것이다. 고승철은 내가 얘기하길 꺼리자 더는 캐묻지 않고 고정재의 행방을 알고 있는 사람을 알려주었다.“현성이는 무조건 형 소식 알고 있을 거야.”“그럼 아버님이 대신 물어봐 주실 수 있어요?”내가 망설이며 묻자 고승철이 난감해하며 거절했다.“정재 일은 지금까지 신경 쓴 적이 없었어. 그러니까 수아 네가 직접 현성이한테 물어봐. 정재 어디 있는지.”고승철의 교활한 속셈을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나더러 직접 고현성을 찾아가라고 한 건 우리에게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어서였다.그렇다. 그는 아직 우리가 다시 잘되길 바라고 있었다. 왜냐하면 연씨 가문이 아직 나의 손에 있으니까.그런데 문제는 고현성이 나를 잊어버렸다. 갑자기 찾아가서 고정재의 행방에 대해 묻는다면 절대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내가 고승철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자 고승철은 전화를 뚝 끊은 다음 고현성이 지금 지내고 있는 거처의 주소를 보냈다. 나는 그 문자를 보자마자 그냥 삭제해버렸다.다른 방법을 찾아서 고정재를 찾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고현성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우린 만나지 말았
나는 항상 메이크업을 했다. 하나는 깔끔하게 살고 싶어서였고 다른 하나는 얼굴의 옅은 흉터를 가리기 위해서였다.나는 입술에 팥색 립스틱을 바른 다음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웨이브를 넣었다. 그러고는 고급스러운 원피스를 입고 하이힐까지 신은 후 남자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고현성과 고정재의 얼굴이 똑같긴 했지만 고정재는 절대 우리 집 밑에서 기다리지 않았다. 하여 아까 차에서 내리자마자 자연스럽게 고현성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었다.고현성의 눈빛이 차갑고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나에게 궁금한 게 많으면서도 경계하는 듯했다.나는 입술을 깨물고 그에게 물었다.“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그가 아무 말이 없자 내가 계속 말했다.“여긴 우리 집이에요.”고현성이 물었다.“너희 집이라고?”막연한 그의 눈빛을 보며 내가 대답했다.“네. 우리 집이에요.”고현성이 갑자기 물었다.“누구야, 너?”바람이 나의 긴 머리를 스쳤다.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면서 물었다.“왜 그렇게 망부석처럼 서 있어요? 이 집에 사는 사람이 현성 씨한테 중요한 사람인가요?”가시 돋친 나의 말에 고현성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경고하듯 목소리를 내리깔았다.“말조심해.”나는 일단 한발 물러섰다.“알았어요. 그럼 대답해봐요. 왜 여기에 있는지? 아까 갔잖아요.”그는 나와 말을 섞고 싶지 않은지 입을 꾹 다물었다.고현성은 늘 이런 남자였다. 모르는 사람이거나 싫어하는 사람은 거들떠보지 않았고 심지어 무시하기도 했다.그의 이런 모습에 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거기에 예전에 나에게 못 해줬던 것까지 생각이 난 바람에 좋지 않은 태도로 말했다.“당장 가요. 그렇지 않으면 신고할 겁니다.”잠시 후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에게 알려주었다.“여긴 내 집이고 당신은 이곳에 있으면 안 돼요. 그러니까 당장 나가요.”내가 다시 별장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연수아 맞지?”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날 기억해요?”“사람들이 연수아라는 여자가
고현성은 왜 이혼해야 하냐고 물었다. 왜 이혼했냐가 아니라.전자는 이혼한 것이 아쉽다는 뜻이 담겨있었고 후자는 그저 이혼한 이유가 알고 싶다는 것이었다.‘내 착각이야?’순간 고현성이 기억을 잃은 게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만약 진짜 기억을 잃었다면 이렇게 묻지 말았어야 했다. 게다가 참 어이없는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계속 내 옆을 떠나고 싶었던 사람이 그였고 또 이혼하려 했던 사람도 그였으니까.그때 내가 이혼 합의서와 연씨 가문의 권력으로 연애하자고 유혹했을 때도 고현성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토록 나를 싫어했었다.나는 나의 손목을 잡은 그의 손을 뿌리치고 웃으며 물었다.“이유 알고 싶어요? 현성 씨 질문에 대답할 테니까 현성 씨도 내 질문에 대답해요. 어때요?”나의 미소는 진심 어린 미소가 아니었다. 고현성이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물었다.“뭐가 알고 싶은데?”“현성 씨 형 고정재 어디 있어요?”“사람들이 우리 이혼한 이유가 네가 줄곧 좋아한 사람이 형이어서래. 그리고 난 그냥 대체품일 뿐이고. 맞아?”고현성이 잔뜩 굳은 얼굴로 물었다. 내가 당황하거나 미안해하거나 후회하는지 보려고 나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나는 다른 사람에게서 내가 고정재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는 게 두려워 도망치듯 별장으로 들어갔다.다시 통유리 앞으로 왔을 때 고현성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번에도 고정재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했다.무릎으로 머리를 받치고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조민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운성으로 왔어?”“응. 그 사람 만났어.”조민수가 또 물었다.“고현성을?”“응. 고현성.”조민수가 머뭇거리면서 내 이름을 불렀다.“수아야.”내가 물었다.“왜?”“너 선양 그룹 꼭 되찾아야 해...”“오빠,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조민수가 무슨 계획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고씨 가문이 지금 선양 그룹의 자원을 이용하여 대성 그룹을 공격하고 있어. 근데 내가 어떻게 선양 그룹을 공격
“아, 그럼 됐어요.”헛걸음했다는 생각에 내가 한숨을 쉬면서 그냥 가려는데 안에서 한 소녀가 달려 나왔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하얀 피부, 그리고 허리도 아주 잘록했다.그녀는 문 앞에서 두리번거리다가 혼자 있는 나를 보고는 달려와서 팔을 잡고 물었다.“혹시 연수아 언니?”내가 고개를 끄덕였다.“누구...”“희연 언니 후배 윤다은입니다. 오늘 저녁에 제가 잘못을 저질러서 잡혀 왔는데 희연 언니가 보석해주겠다고 했거든요. 언니는 마을에 있어서 오지 못하니까 친구한테 부탁했다고 했어요. 근데 우리 오빠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어요.”참으로 밝고 활기가 넘치는 소녀였다. 사람들과의 소통이 서툴렀던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정하게 물었다.“오빠는요? 나 운전하고 왔는데 데려다줄까요?”그때 복도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베이지색 코트에 안에는 옅은 색 스웨터를 매치했고 목에는 그 베이지색 목도리를 하고 있었다.그의 그윽한 눈빛에 나는 삽시간에 빠져들었다. 그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똑똑하게 들었다.“꼬마 아가씨.”목소리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내가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가만히 있자 윤다은이 나의 팔을 잡고 그에게로 다가갔다.“오빠, 이분이 바로 희연 언니 친구 연수아 언니야. 날 보석해주러 왔어.”그러고는 나에게 소개해주었다.“수아 언니, 우리 오빠 고정재예요. 나한테 고현성이라고 오빠가 더 있어요. 그리고 난 두 오빠의 엄마가 입양한 딸 윤다은이에요.”고정재라는 이름을 듣기만 해도 미칠 것만 같은데 내 앞에 떡하니 서 있으니 오죽하겠는가.내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아무 말 없이 고정재를 빤히 쳐다보자 윤다은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언니, 왜 아무 말이 없어요?”나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다. 그러자 윤다은도 히죽 웃었다.“수아 언니가 우릴 집까지 데려다주겠대.”고정재는 길고 하얀 손을 내밀면서 정중하게 인사했다.“고정재입니다.”나는 그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면서 그때 나에게 했었던 질문을 떠올렸다.
운성시의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주룩주룩 내렸다. 고정재는 베이지색 목도리로 비를 막아주었다. 그의 다정함에 나의 마음은 뒤죽박죽이 돼버린 동시에 속상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런데 그날 왜 나를 속였는지 물으려고 입을 떼자마자 고현성이 갑자기 튀어나와 나의 말을 가로챘다. 나는 경악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고현성이 온몸이 홀딱 젖은 채로 비를 맞고 있었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고정재가 나서서 설명했다.“다은이가 잘못한 일이 있었는데 연수아 씨가 우릴 데려다줬어.”나를 꼬마 아가씨라고 부른 것 외에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건 예의상 부른 것이었다.내가 잠깐 멈칫한 그때 치명적인 문제 하나가 떠올랐다. 바로 고정재에게 있어서 나는 남동생의 전처라는 것. 그것도 한때 고현성의 합법적인 아내...갑자기 그날 밤 왜 자신이 고정재라고 말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내가 누구인지 알고 나와 일정한 거리를 뒀을 수도 있었다.나는 그렁그렁한 두 눈으로 고정재를 쳐다보았다.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기고 싶었으나 고현성이 옆에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그때의 꼬마 아가씨처럼 고정재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면서 뒤에 숨고 싶었지만 이젠 나는 어른이 되었다. 꼬마 아가씨가 어엿한 성인 여성이 되었다.마음이 저릿해진 나는 이 자리를 떠나고 싶어 고개를 숙이고 차에 올라탔다. 나는 차에 시동을 걸고 똑같게 생긴 두 남자를 쳐다보았다.한 사람은 친절하고 다정하기 그지없었지만 한 사람은 인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차갑기만 했다.내가 베이지색 목도리를 옆에 내려놓고 가려는데 고현성이 갑자기 조수석 차 문을 열었다. 나는 싫은 티를 내면서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봄이긴 해도 온몸이 흠뻑 젖으면 불편하기만 했다. 고현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수석에 올라타더니 차갑게 물었다.“전 남편을 집까지 데려다주는 건 괜찮겠지?”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데려다주고 싶지 않았지만 낮에 조민수의 전화가 생각나 잠시 망설이다가 태워주기로 했다.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