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이 앞당겨졌다. 임지혜의 요구대로 섣달그믐날에 올리기로 했다. 고씨 가문에 새해 명절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임지혜는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안방에서 신랑이 데리러 오길 기다렸다. 그런데 정작 신랑은 우울한 표정으로 서재에 앉아 있었다.오늘은 결혼식 날이었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마치 오늘 결혼식의 주인공이 그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무슨 사명을 완성하듯 무감각했다.고현성은 결혼반지를 이리저리 만지다가 연수아와 결혼할 때 그녀가 직접 끼워준 반지라는 게 문득 떠올랐다. 연수아 생각에 그의 마음은 저도 모르게 울컥했다. 연수아만 그의 마음을 흔들 수 있었다.소파에 앉아 있던 그는 연수아에게 전화하고 싶었다. 휴대전화를 들자마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는데 연수아였다.그 이름을 본 순간 고현성은 잠깐 멍해졌다.‘왜 갑자기 나한테 전화했지?’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수아의 이름을 부르려는데 목놓아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고현성 씨, 수아가 집에서 숨을 거뒀어요...”고현성이 경악한 얼굴로 물었다.“숨을 거두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집에서 숨을 거두다니?’휴대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고현성은 큰일이 났다는 예감이 밀려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수아가... 세상을 떠났어요.”휴대전화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고현성이 연씨 가문으로 달려갔을 때 여자 한 명이 있었는데 그도 아는 연수아의 절친 최희연이었다.‘연수아는?’연수아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생기라곤 없는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안색이 매우 창백했고 볼에 옅은 흉터가 있었다. 화장기 없는 그녀의 얼굴을 처음 봤는데 생각보다 앳됐고 아무 근심 걱정 없는 꼬마 아가씨 같았다.사실 연수아도 어린데...고현성은 부들부들 떨면서 그녀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는 품에 끌어안았다. 마치 소중한 뭔가를 잃은 것처럼 두려움이 밀려왔다.마침 그때 임지혜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고현성은 온몸을 떨면서 연수아를 안고 있었다.그 순간
고현성이 주는 상처를 수도 없이 받으면서 떠날 때는 축복을 건넸다. 차라리 그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렇게 용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진규만이 또 말했다.“연수아 씨가 바라던 게 하나 있었습니다.”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고현성을 보며 진규만은 한숨을 내쉬었다.“연수아 씨가 떠날 때 직접 보내 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바람이 사는 거리’를 연주해달라고 했습니다.”고현성은 고개를 들어 놀란 눈으로 진규만을 쳐다보았다.“뭐라고요?”“고현성 씨가 연주하는 ‘바람이 사는 거리’를 듣고 싶다고 했어요.”‘난 피아노 칠 줄 모르는데...’고현성의 시선이 옆에 있던 고정재에게 향했다. 그는 검은 코트를 입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고 그의 옆에 비싼 피아노가 있었다.고현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진작 알고 있었어?”“응. 쟤가 좋아했던 사람은 나였어.”고정재는 절반 정도 닫힌 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연수아의 목 아랫부분만 보였는데 몸이 매우 말라 있었고 발목에 점 하나가 있었다. 왠지 연수아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 본 적이 있었는데 이 모습이 아니었고 게다가 피부도 더 거칠어 보였다. 연수아는 늘 예쁘게 보이길 원했었는데 지금은...고정재의 의혹이 점점 더 커졌다. 하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아 결국 그 의혹을 잠재웠다. 그제야 연수아가 하얀 옷을 입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연수아의 존재를 처음 알았을 때 연수아가 입고 있었던 옷이었다. 뜻밖에도 그는 다 기억하고 있었고 이런 작을 일까지도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다.마치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어떻게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했을까?고정재는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 그때 이름을 알려줬더라면 이런 오해가 생기지 않았을 텐데.연수아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고정재의 성격이라면 절대 상처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연수아도 매일 평온하게 환하게 웃으면서 지냈을 것이다.‘꼬마 아가씨...’고현성은 연수아가 죽기 전 옆에 두었던 카
“수아야, 금방 수술했으니까 푹 쉬어야 해.”나는 죽지 않았다. 조민수는 나를 데리고 운성시를 떠나 수술을 시켜줬다. 성공률이 단 1%밖에 안 되는 그 수술을.그날 밤 조민수가 연씨 별장에 도착했을 때 내가 숨이 거의 넘어가기 직전이라고 했다. 그때 나는 하얀색 치마를 입고 침대에 누워있었는데 얼굴에 핏기라곤 전혀 없었다.수술이 완전히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실패하지도 않았다. 적어도 나에게 시간을 더 벌어주었다.최희연이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힘겹게 입을 벌리자 다급하게 말렸다.“의식이 금방 돌아왔고 아직 기계를 꽂고 있어서 잠시 말하기 어려울 거야.”나는 알겠다고 눈을 깜빡였다. 최희연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며칠 전에 조민수 씨의 제안대로 고현성한테 전화했어. 그 사람이 와서 보더니 네가 죽은 줄 알고 얼마나 슬프게 울던지. 널 위해 장례식까지 치러줬고 변호사더러 네 유언장까지 읽게 했어.”‘장례식이라... 운성에 이젠 연수아라는 사람이 없겠네?’그 생각에 나의 두 눈에 슬픔에 가득 차올랐다.최희연은 계속 누워있어서 굳어버린 나의 팔을 주물러주며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민수 씨가 널 죽은 사람으로 위장해서 고현성을 벌하려 했어. 속상하고 후회하면서 평생 죄책감 갖고 살라고. 근데 장례식에서 가슴이 찢어질 듯이 우는 거 보고 내가 마음이 약해져서 그냥 사실을 얘기해줬어.”‘가슴이 찢어질 듯이?’내가 정신을 잃기 전에 고현성이 집으로 날 찾아와서 이런 얘기를 했었다.“그동안 계속 생각했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대체 누구인지... 내가 예전에 역겨워했던 그 여자더라고.”그리고 이런 말도 했었다.“내 아내가 되어줘. 우리 재결합하자.”그때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고현성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결국 임지혜와 결혼하기로 했다.나는 입술을 적시면서 힘겹게 물었다.“넌 그 사람 밉지 않아?”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졌다.전에 고현성은 임지혜를 위해서 최희연을 감옥에 보냈다. 감옥에서의 하루는 마치 1년 같았다. 그
나는 경악하며 물었다.“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9년 전에 네가 만났던 사람은 고현성이 아니야.”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고 내 이름을 부르는 최희연의 목소리만 들렸다. 순간 머릿속이 텅 비더니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최희연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그 뜻을 이해했다.나에게는 마음속 깊이 간직한 비밀이 있었다. 바로 고현성을 9년이나 짝사랑했다는 것이었다.어렸을 적엔 항상 그의 뒤를 쫓아다녔고 성인이 된 후에는 바라고 바라던 그의 아내가 되었다.9년, 나는 9년이나 그 남자만을 바라보았고 조심스럽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짝사랑을 지켜왔었다.그 사람이 나에게 그 어떤 사랑도, 동정도 주지 않아도 나는 여전히 그의 옆을 지켰다. 왜냐하면 나의 사랑은 순수했고 평생 고현성 하나뿐이었으니까.그런데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가 고현성이 아니라는 소리를 들었다.모든 추억과 감정들이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그 생각에 가슴이 갑자기 저리기 시작했다.결국 나는 다시 응급실로 실려 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조민수가 병실에 있었다. 내가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며 머리를 쓰다듬더니 나지막하게 물었다.“수아야, 왜 울어?”‘내가 울었다고?’처음으로 ‘고현성’을 봤던 장면이 아직도 눈에 훤했고 다정한 목소리로 꼬마 아가씨라고 부르던 모습, 교실에서 날 위해 ‘바람이 사는 거리’를 연주해주던 모습이 또렷하게 기억났다.우리 둘의 추억이 얼마 없어서 그런지 나는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겼다. 마치 귀한 보물처럼 마음속에 간직했다.그런데 지금 최희연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9년 전에 네가 만났던 사람은 고현성이 아니야.”만약 그때 날 꼬마 아가씨라 부르던 남자가 고현성이 아니라면... 3년 동안 고씨 가문 사모님으로서 받았던 고통이 다 우스워지는 게 아닌가?그리고 나의 사랑도 나를 기만했던 거고?마음속의 고통이 가시지 않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를 내저었다. 칼로 가슴을 도려낸 듯 피가 뚝뚝 흐르는 것 같았다.
만약 고정재가 9년 전에 피아노곡을 연주하고 날 꼬마 아가씨라 부르던 그 남자라면 최희연의 고양이 카페에서 봤던 익숙한 모습이 아마 그 사람일 것이다.수년 전처럼 인상이 깊었고 기억 속의 따뜻했던 그 남자의 모습과 완전히 겹쳤다.그때 최희연이 나에게 물었었다.“수아야, 왜 울어?”나도 울고 싶지 않았지만 그 뒷모습은 내가 9년이나 따라다녔던 뒷모습이었고 뼛속까지 그리워했던 남자였으며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부렸던 욕심이었다.그날 밤 음악 콘서트가 끝난 후 나는 그 사람을 찾으러 무대 뒤로 갔었다. 그런데 아무 수확이 없어 실망감을 드러낸 채 음악 센터를 나왔었다.그러다가 하이힐을 신고 길거리를 거닐고 있던 그때 바닥에 비스듬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나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고 그가 눈웃음을 지으면서 나에게 말했다.“꼬마 아가씨, 왜 또 따라와?”그때의 ‘고현성’이야말로 내가 진심으로 사랑한 남자였다. 그날 밤 그는 일부러 그곳에서 나를 기다렸고 나는 그 사람을 고현성이라 불렀다.내가 사람을 착각했다는 걸 분명 알면서도 바로잡지 않았고 계속 기다리고 있는 걸 알면서도 설명하지 않았다. 사실 그도 다정하면서 잔인하고 매정한 사람이었다....요즘 운성시는 비가 그치질 않았다. 내가 돌아왔을 때도 하늘은 어둡고 칙칙했다. 내가 운성시로 돌아오기 전에 조민수는 나의 사망 신고를 철수했다. 다시 말해 유언장이 아직 효력을 발생하지 않았다.고현성이 선양 그룹을 관리하긴 했지만 명의상으로는 여전히 내 회사였다.하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고현성과 선양 그룹을 빼앗으려고 돌아온 게 아니었으니까.나는 고정재를 만나서 대답을 듣고 싶었고 그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9년 동안 간직해온 마음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나는 캐리어를 끌고 공항 밖으로 걸어 나갔다. 택시에 타자마자 최희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내가 수술을 마치고 상태가 안정되고 나서야 최희연은 마음을 놓고 진서준을 만나러 갔다. 두 사람이 지금 어떻게
최희연의 말은 나의 심장을 쿡쿡 찔렀다. 나는 단 한 번도 이런 문제들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까.만약 진짜 최희연의 말대로 그런 거라면 내가 운성시로 돌아온 목적이 무엇일까?그런데 나의 마음은 나더러 운성시로 돌아가라고 했다.나는 두 눈을 감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나한테 다 생각이 있어.”잠시 후 나는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그나저나 넌 왜 계속 현성 씨의 편을 들어?”아무리 원수에게 은혜를 베푼다고 해도 이건 너무 지나친 거 아닌가?나의 질문에 최희연이 멋쩍게 대답했다.“난 네가 걱정돼서 그러지.”내가 또 다른 걸 물을까 봐 최희연은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전화를 끊은 후 내 머릿속에는 최희연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그녀가 했던 질문들은 전부 피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지금까지도 아직 정확한 답을 찾지 못했고 대답해주는 사람도 없었다.한 시간 후 차가 연씨 별장 문 앞에 멈춰 섰다. 캐리어를 끌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본 순간 나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현성 씨가 왜 여기에 있어요?”그는 흰 셔츠에 검은 넥타이를 매고 있었고 하얀 손목에는 매끄러운 염주를 하고 있었다. 전에는 이런 걸 하고 다니는 습관이 없었는데.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소용돌이처럼 깊이 빠질 것만 같았다.잠시 후 그가 눈살을 찌푸리고 낯선 사람을 대하듯 물었다.“날 알아?”나는 경악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당신은 날 몰라요?”그는 나를 싸늘하게 본 후 휙 가버렸다.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재빨리 고승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승철이 전화를 받고 무척이나 놀란 듯했다.“수아야, 네가 나한테 전화할 줄은 몰랐어...”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고승철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어쨌거나 내가 운성시로 돌아오기 전에 조민수가 내 소식을 알렸으니까. 고씨 가문은 이런 소식에 아주 예민했다. 그리고 선양 그룹도 아직 그들의 손에 완전히 들어간 게 아니었다.
“정재의 행방은 나도 몰라. 걔는 나랑 연락이라는 걸 안 하거든.”고승철이 실망스러운 말투로 말하다가 갑자기 물었다.“그나저나 정재 행방은 왜?”문득 고현성이 금운의 마을에서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고정재는 성격이 무뚝뚝한 데다가 속으로 고씨 가문을 업신여기고 있어 고승철과 점점 연락을 끊었다고 했다.행방을 모른다는 고승철의 말에 나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드리워졌다. 조민수는 고정재가 아직 운성시에 있다는 것만 알아냈지, 구체적인 행방은 찾지 못했다.고승철이 나를 부르면서 또 물었다.“정재를 찾는 이유가...”나는 그의 말을 자르고 대충 둘러댔다.“우리 엄마가 생전에 피아노를 좋아하셨거든요. 예전에 고정재 씨 연주회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아주 진한 감동을 받았어요. 그래서 우리 엄마 9주년 제사에 고정재 씨를 초대하고 싶어서요.”아마 이보다 더 구차한 변명은 없을 것이다. 고승철은 내가 얘기하길 꺼리자 더는 캐묻지 않고 고정재의 행방을 알고 있는 사람을 알려주었다.“현성이는 무조건 형 소식 알고 있을 거야.”“그럼 아버님이 대신 물어봐 주실 수 있어요?”내가 망설이며 묻자 고승철이 난감해하며 거절했다.“정재 일은 지금까지 신경 쓴 적이 없었어. 그러니까 수아 네가 직접 현성이한테 물어봐. 정재 어디 있는지.”고승철의 교활한 속셈을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나더러 직접 고현성을 찾아가라고 한 건 우리에게 기회를 만들어주고 싶어서였다.그렇다. 그는 아직 우리가 다시 잘되길 바라고 있었다. 왜냐하면 연씨 가문이 아직 나의 손에 있으니까.그런데 문제는 고현성이 나를 잊어버렸다. 갑자기 찾아가서 고정재의 행방에 대해 묻는다면 절대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내가 고승철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하자 고승철은 전화를 뚝 끊은 다음 고현성이 지금 지내고 있는 거처의 주소를 보냈다. 나는 그 문자를 보자마자 그냥 삭제해버렸다.다른 방법을 찾아서 고정재를 찾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고현성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우린 만나지 말았
나는 항상 메이크업을 했다. 하나는 깔끔하게 살고 싶어서였고 다른 하나는 얼굴의 옅은 흉터를 가리기 위해서였다.나는 입술에 팥색 립스틱을 바른 다음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웨이브를 넣었다. 그러고는 고급스러운 원피스를 입고 하이힐까지 신은 후 남자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고현성과 고정재의 얼굴이 똑같긴 했지만 고정재는 절대 우리 집 밑에서 기다리지 않았다. 하여 아까 차에서 내리자마자 자연스럽게 고현성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었다.고현성의 눈빛이 차갑고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나에게 궁금한 게 많으면서도 경계하는 듯했다.나는 입술을 깨물고 그에게 물었다.“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그가 아무 말이 없자 내가 계속 말했다.“여긴 우리 집이에요.”고현성이 물었다.“너희 집이라고?”막연한 그의 눈빛을 보며 내가 대답했다.“네. 우리 집이에요.”고현성이 갑자기 물었다.“누구야, 너?”바람이 나의 긴 머리를 스쳤다. 나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면서 물었다.“왜 그렇게 망부석처럼 서 있어요? 이 집에 사는 사람이 현성 씨한테 중요한 사람인가요?”가시 돋친 나의 말에 고현성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경고하듯 목소리를 내리깔았다.“말조심해.”나는 일단 한발 물러섰다.“알았어요. 그럼 대답해봐요. 왜 여기에 있는지? 아까 갔잖아요.”그는 나와 말을 섞고 싶지 않은지 입을 꾹 다물었다.고현성은 늘 이런 남자였다. 모르는 사람이거나 싫어하는 사람은 거들떠보지 않았고 심지어 무시하기도 했다.그의 이런 모습에 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거기에 예전에 나에게 못 해줬던 것까지 생각이 난 바람에 좋지 않은 태도로 말했다.“당장 가요. 그렇지 않으면 신고할 겁니다.”잠시 후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에게 알려주었다.“여긴 내 집이고 당신은 이곳에 있으면 안 돼요. 그러니까 당장 나가요.”내가 다시 별장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연수아 맞지?”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날 기억해요?”“사람들이 연수아라는 여자가
나는 그들 사이의 일이 이렇게나 복잡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정희가 한평생 그 남자를 원망해도 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어떻게 보아도 아버지가 먼저 잘못한 게 틀림없었다.그리고 어머니는 그저 그런 아버지에게 당한 것뿐이었다.나는 갑자기 어머니와 이정희가 모두 불쌍한 여성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불쌍한 건 나의 친아버지였다.친아버지는 병에 시달리면서도 석씨 가문을 위해 이곳에서 일생을 갇혀 지냈다. 그런 굳건한 의지는 결코 누구나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그래서 나는 더욱 세 사람 중 누가 맞고 누가 틀렸는지를 구분할 수 없었다.세 사람 모두 잘못한 것 같기도 하고 모두 잘못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나는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석지훈에게 주고 석지훈이 다 읽기를 기다렸다가 그를 밀실로 데리고 갔다. 그 엄청난 비밀은 그렇게 순식간에 세상에 까발려졌고 비밀을 마주한 석지훈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서렸다.“밀실의 비밀번호는 오빠 어머니 생신이에요.”석지훈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너희 아버지께서 나한테 이 밀실에 대해서 말해준 적이 있는데 비밀번호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어. 그리고 이 밀실에 자신의 지나온 삶이 숨겨져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드셨지만 열어볼 생각은 하지 않으셨대. 밀실의 비밀번호를 잊어버린 건 어쩌면 하늘의 뜻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서 그냥 밀실을 그대로 놔두려고 했대. 너희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에 내 어머니께서 엄청 많은 비밀번호를 시도해보고 그 분야의 전문가도 찾았지만 모두 무용지물이었어. 오로지 본인의 생일만 시도를 안 해본 거지. 그러고 나서 홧김에 이곳을 없애려고 한 걸 내가 말렸어. 너희 아버지께서도 일생을 바쳐 지켜온 곳인데 이렇게 없어지길 원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만약 내가 그날 어머니를 말리지 않았다면 일이 이 지경까지 되진 않았을 거야!”만약 석지훈이 자신의 어머니를 말리지 않았더라면 이정희도 이 비밀을 알게 됐을 것이고 어쩌면 아버지를 이해할 수도
남자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응.”이정희는 남자의 딱딱한 대답에 투덜거렸다.“오빠 진짜 차가워.”남자는 다시 애정이 어린 말투로 이정희를 달랬다.“그런 말 하지 마. 너도 알잖아, 나 꿀 발린 말 잘 못 하는 거. 그래도 난 한 번도 너한테 무관심했던 적은 없어.”이정희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알지 그럼. 오빠가 나랑 결혼해줄 거란 것도 잘 알고.”“맞아. 넌 미래에 정식으로 내 아내가 될 사람이야.”“그럼 혹시 오빠도 오빠 아버지처럼 많은 첩을 둘 거야? 만약 그런 거라면 난 오빠랑 결혼하지 않을래!”남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니, 난 아버지와 달라. 난 내가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고 넌 내 인생의 전부야. 유이야, 우린 어린 시절부터 소꿉친구였고 알고 지낸 지도 오래됐잖아. 네가 날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내가 어떻게 감히 널 속상하게 만들겠어.”하지만 그 남자는 말과 달리 이정희를 평생 속상하게 했고 이정희가 평생 집착하게 했으며 이정희를 평생 차갑게 대했다.그렇게 내 아버지는 결국 자신의 아버지와 똑같은 길을 가게 되었다.이윽고 이정희의 노랫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극이 끝나갈 때쯤 이정희가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난 오빠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 거니까 오빠도 날 실망하게 하지 마. 그렇지 않으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오빠가 나중에 날 배신하면 난 그 두 배로 오빠한테 갚아줄 거야!”그리고 이정희는 정말 그렇게 했다.자신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과 복잡한 관계도 스스럼없이 가졌고 결국엔 석지훈까지 낳았다.나는 황급히 밀실에서 나와 로비로 갔다. 석지훈은 내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 서린 것을 보고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관을 아직 닫지 않았기에 나는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이정희의 얼굴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린 시절 이정희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무대 위에서 사랑하는 남자에게 열심히 황매극을 불러주던 천진한
그 편지는 매우 짧았다.「올해는 너를 사랑한 지 12년째 되는 날이자 너와 결혼한 지 3년째야. 네가 내 아내라서 행운이고 내가 너의 남편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야. 하지만 나는 널 평생 사랑해줄 수 없을 것 같아!유이야, 내 기억력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어. 의사가 말하길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 주변의 사람들을 잊어버릴 거래. 그게 당장 오늘 밤이 될 수도, 내일이 될 수도, 어쩌면 내가 이 밀실에서 나가는 순간일 수도 있어.난 내가 너를 잊을까 봐 너무 무서워.난 내가 피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안타깝게도 운명을 피해가긴 무리였나 봐.유이야, 내가 너를 잊은 후에도 다시는 너를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고 가족들까지 잊어버리는 날이 오더라도 너를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을 거야! 내 나약함 때문에 석씨 가문의 가주로서의 사명과 책임에 금이 가게 할 수는 없거든.정말 미안해, 유이야.언제가 됐든 기억을 잃는 날이 온다면 그땐 내가 먼저 너를 알아볼게.믿어줘, 이번 생에 절대 널 실망하게 하는 일은 없어.」나는 또 다른 편지 봉투를 열어 보았고 역시나 모두 이정희에 관한 것이었다. 제일 처음 보았던 편지가 시간상으로 제일 마지막 편지였는데 마침 이정희와 결혼한 지 3년째 되던 해였다. 그 말인즉슨, 아버지는 30여 년 동안 이 밀실을 드나들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절대 석만호가 말한 27년이 다가 아니었다.현정우는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말했다.“원래 가주님을 대신해서 유품을 정리할 때 가주님의 베개 옆에 두꺼운 일기장이 있는 걸 봤습니다. 일기장에 적힌 이름은 안혜인이었는데 아마도 원래 가주님과 안혜인 씨, 그러니까 가주님 어머니 사이의 사소한 일들을 적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일기장은 후에 석 대표님께서 핀란드로 가져갔습니다.”이 편지들은 온통 아버지가 이정희와 보낸 나날들에 대한 것이었다.오늘 무엇을 했는지와 같은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도 빠짐없이 적어두었다. 나는 시간을 들여 모든
“네, 사모님은 돌아가실 때까지도 모르셨을 겁니다.”그렇다. 그녀는 이미 죽었다.갑자기 마음속에 의문이 가득 차올랐다.나는 급히 휴대폰을 들어 석만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의 번호를 삭제했던 것 같았다.나는 현정우의 휴대폰으로 석만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나는 그에게 물었다.“이 벽의 비밀번호가 왜 이정희의 생일인 거예요?”석만호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물었다.“회장님 방에 있는 밀실 말씀이십니까?”나는 차분하게 말했다.“맞아요. 비밀번호는 이정희의 생일이었어요.”“저는 모릅니다. 회장님께서 27년 동안 그 밀실을 열지 않으셨거든요.”내 친아버지는 27년 동안 이 밀실을 열지 않으셨다...27년...그때는 내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였고 어머니를 막 만난 시기였다.나는 직감적으로 무슨 큰 비밀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나는 문을 열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고 현정우는 내 뒤를 따랐다. 들어가자마자 방 안 가득 코스모스가 눈에 들어왔다. 표본으로 만들어진 말린 꽃으로 수십 년 동안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밀실 곳곳에는 사진들이 놓여 있었다. 사진 속에는 모두 같은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근대 시대의 화장을 하고 있었고 흑백사진이었지만 젊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옛 시대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뚜렷한 윤곽을 가진 그녀는 분명 이정희였다.아버지의 밀실에는 이정희의 사진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나는 엄마의 인생이 한낱 웃음거리가 아니었을까 두려웠다.나는 밀실을 한 바퀴 돌았다. 안에 있는 물건들은 모두 옛날 물건이었지만 이정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현정우는 책상 위에서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편지 봉투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그는 나에게 편지를 건네준 후 서랍을 열었다.서랍 안에는 수많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나는 편지 봉투의 먼지를 털어냈다. 현정우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진실은 더욱 잔혹할지도 몰라요.”잔
담현아는 황급히 부인했다.“말도 안 돼요. 난 아직 어린데 무슨 애를 가져요. 그리고 아저씨도 아직 우리 집에 정식으로 인사드린 적 없어요. 연말쯤에나 생각해 보려고요.”“임신한 줄 알았잖아.”담현아는 재빨리 대답했다.“아니라니까요.”그녀는 윤민이를 안고 정원을 나서려고 했다. 내가 조심하라고 당부하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석씨 가문 전체가 언니 거고 지훈 오빠도 여기에 있는데 누가 우리를 건드리겠어요.”조심하라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너무 많은 일을 겪었기에 특히 아이들 일에는 절대 방심할 수 없었다.담현아는 윤민이를 안고 정원을 나섰다.나는 윤아를 비서에게 넘겨주었고 그는 담현아를 따라갔다.두 아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정원에는 다시 나와 현정우만 남았다.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생전에 쓰시던 방에 같이 가자고 했다.가는 길에 현정우는 휴대폰으로 날씨 예보를 확인하고는 말했다.“가주님, 곧 비가 올 것 같습니다. 내일 저녁이나 되어야 그칠 것 같네요.”“음, 다행히 봄비는 보슬보슬 내리니까.”나는 아버지 방문을 열었다. 방안은 음침했다.이곳에 오는 것은 두 번째였지만 여전히 으스스했다.현정우는 방의 불을 켰다. 밝은 불이 아니라 어두운 불이었다. 현정우는 오랫동안 석씨 가문 사람이었기에 내 아버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설명했다.“저는 훈련을 받고 여러 차례 선발 과정을 거친 후 처음부터 이 정원을 지키는 일을 했어요. 근데 밖에 나갈 기회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석 회장님은 1년 내내 매일 방 안에만 계셨거든요. 가장 멀리 가본 곳이라고 해 봐야 새해에 가족들과 거실에서 식사하는 정도였어요. 그래서 석씨 가문 사람들은 회장님을 두고 방에 무슨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나 보다 하고 수군거렸었지요. 하지만 회장님이 돌아가신 후 사모님이 이 방을 정리했고 석 대표님도 함께 계셨는데 아무런 비밀도 없었습니다. 다만, 작은 밀실이 하나 있는데 아무도 열 수 없었죠. 부수지 않는 이상은요. 사모님은 부수려고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아직 이정희에게 원망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내가 두 아이를 데리고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하려는 것은 석지훈을 위해서였다.나는 그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지길 바랐다.강해온이 아이들을 데리고 석 씨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그런데 그와 함께 담현아도 와 있었다. 나는 놀라서 그녀에게 물었다.“너 여긴 어떻게 왔어? 아니, 너 내 비서랑 어떻게 아는 사이야?”“지훈 오빠가 나보고 언니랑 같이 있으라고 하던데요.”이 시간에 석지훈이 담현아를 나에게 보내다니...나는 담현아에게 의아하게 물었다.“이해가 안 돼. 내일 아침이면 우린 떠날 건데, 너 괜히 왔다 가는 거잖아?”담현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나도 이해가 안 돼요. 근데 연락은 아침에 받았는데 내가 일이 있어서 늦어졌어요. 그러다가 저녁에 이쪽으로 오는 길에 고속도로에서 강 비서님을 만났거든요. 그냥 인사만 하려고 했는데, 목적지가 같더라고요. 아, 맞다! 윤민이가 방금 나보고 이모라고 불렀어요!”나는 그녀의 품에서 윤민이를 받아안으며 물었다.“네가 가르쳤어?”“강 비서님이 가르쳤어요. 이 녀석 너무 똑똑해요! 볼수록 너무 사랑스러워요. 근데 수아 언니, 나 윤아랑 윤민이 양엄마 하면 안 될까요?”나는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너 아직 한참 어리잖아.”내가 거절하자 담현아는 시무룩하게 말했다.“사람 무시하지 말아요. 나도 결혼한 성인이거든요.”“알았어, 알았어. 성인인 거 인정할게.”내가 쉽게 허락하지 않자 담현아는 더 이상 조르지 않고 말했다.“알았어요. 그럼 양엄마는 안 할 테니까 그냥 이모 할게요.”담현아는 아직 어려서 아이들의 양엄마가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담현아와 함께 정원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석지훈이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이들을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누가 데려왔어?”내가 설명했다.“내가 강 비서에게 부탁했어요.”석지훈은 담현아의 품에서 윤아를 안아 들었다. 윤아는 그의 품에서 얌
수아야. 넌 참 가여운 사람이야.난 도대체 내가 왜 불쌍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하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석지훈을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나는 그의 허리를 꼭 껴안고 부드럽게 말했다.“오빠, 내가 어떻게 오빠에게 차갑게 대할 수 있겠어요? 난 그냥...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오빠가 날 원망할까 봐 무서웠고요.”석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나는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추고 단호하고 따뜻하게 말했다.“난 오빠를 좋아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생에도 다음 생에도 오빠를 사랑하고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나는 고현성과 사귈 때 키스를 거의 하지 않았고 석지훈과도 자제하는 편이었다.아마도 장례식 중이라 그런지 석지훈은 나를 놓아준 후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지 않았다. 그저 나를 품에 안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현정우의 말대로, 남자는 그저 따뜻함을 원하는 존재인 것 같다. 따뜻함을 충분히 주면 만족하는 것 같았다.지금의 석지훈처럼 말이다.그는 계속 내 뺨에 자신의 뺨을 부비며 애교를 부렸다.꼭 어린아이 같았다.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행동이었다.그는 내가 아직도 그 자세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일어나 나를 눕히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윤아야, 왜 나를 안 불렀어?”나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깨울까 봐...”내 말을 듣자 석지훈의 표정이 누그러졌다.“다음에는 그러지 마.”그는 손을 들어 내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내일 아침에 어머니 장례식이 끝나면 너랑 같이 운성에 갈 거야. 운성에서 며칠 있다가 아이들과 함께 핀란드로 가자.”나는 놀라서 물었다.“나랑 아이들을 핀란드에 데려간다고요?”석지훈은 검은색 셔츠 하나만 입고 있었다. 그는 창밖의 달빛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내가 말했잖아. 앞으로 널 내 세상으로 데려가겠다고. 윤아야, 더 이상 너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 널 내 곁에 두고 싶어. 우리 핀란드와 운성을 오가며
점심에 차를 너무 많이 마셨던 탓에 밥도 못 먹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배고파요.”석지훈은 짧게 응수하고는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문가에 서서 무덤덤한 눈빛으로 천장의 하얀 등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가 속으로 굉장히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힘들어도 모든 고통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나에게조차 마음을 열지 않았다.특히 그의 어머니가 나 때문에...나는 그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현정우가 밥을 가져왔다. 석지훈은 많이 먹지 않았고 나도 입맛이 없어서 많이 먹지 못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석지훈은 다시 거실로 돌아갔다. 그동안 그는 나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나는 침대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녘에 석지훈을 찾아갔다. 그는 이미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좀 쉬라고 권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중에.”아침부터 하루 종일 석지훈은 계속 바쁘게 일했고 석나은도 그를 따라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나는 뭘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손 놓고 있었었다. 특히 열심히 일하는 석나은과 비교되니 아주 한심해 보였다.나는 힘없이 정원으로 돌아와 문턱에 앉았다. 현정우도 내 옆에 앉았고 우리 둘 다 하는 일 없이 앉아 있는 꼴이었다.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물었다.“나 진짜 쓸모없는 것 같아요.”이럴 때 석지훈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니까.위로조차 해 주지 못했다.현정우는 대답했다.“지금 가주님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최선입니다. 어쨌든 관에 누워 계신 분이... 가주께서는 그냥 여기서 석 대표님을 기다리세요. 지쳐서 방에 돌아왔을 때 누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가주님, 남자는 많은 걸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작은 온기면 충분해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의 마지막 말에는 어딘가 모르게 쓸쓸함이 묻어났다.나는 의아해서 물었다.“요즘 왜 이렇게 감성적이에요?”현정우: “...”내 말에 현정우는 나를 상대하기 싫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네가 지훈 씨라고 부르면 멀게 느껴져.”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시큰하게 아파왔다.석지훈이 언제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였던가?자신의 슬픔을 이렇게 드러낼 정도로 약해지다니. 순간 마음속 죄책감이 더욱 깊어졌다.나는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눈시울을 붉히며 사과했다.“죄송해요. 다 저 때문에... 희연이가...”그녀는 내 말을 듣고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비록 그녀가 죽였다고 하지만 내가 죽인 거나 다름없었다. 단지 석지훈한테 죄책감이 좀 덜할 뿐이었다.그는 다시 말했다.“넌 잘못 없어.”석지훈은 항상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에게 죄책감을 느꼈다.난 차라리 그가 날 원망하길 바랐다.적어도 화라도 냈으면 좋을 것 같았다.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나는 어쩔 줄 몰라 말했다.“오빠, 내가 같이 있어 줄게요.”오늘 밤 나는 그와 함께 있어주기로 했다.나는 몸이 안 좋아서 후반야쯤 되니 힘들었고 결국 석지훈 어깨에 기대 잠들었다.나는 또 꿈을 꿨다.꿈에는 엄마만 나왔다.엄마는 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나는 나지막이 불렀다.“엄마.”“수아야, 넌 참 가엾구나.”나는 놀라서 물었다.“엄마,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사랑하는 남자, 애들 둘, 부모님, 친구, 돈, 권력... 다 있는데 내가 왜 가엽다는 거지?“수아야, 넌 가여운 사람이야.”엄마는 왜 날 가엽다고 하는 걸까?나는 다급하게 물었다.“엄마, 무슨 말이에요?”엄마는 대답 없이 꿈속에서 점점 사라져 갔다. 나는 놀라 눈을 뜨고 바닥에 엎드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런 내 모습에 석지훈은 날 안아줬다.“왜 그래?”“오빠, 나 악몽을 꿨어요.”나는 그를 오빠라고 불렀다.나는 엄마의 이 꿈을 악몽이라고 했다.요즘 들어 자꾸 엄마 꿈을 꾼다.지난번에는 나에게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했고 이번엔 내가 가엽다고 했다.왜 이런 꿈을 꿀까?뭔가 징조인가?그런 생각을 하니 문득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