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성이 밖에서 2분 정도 전화를 받고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고 달리 방법이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내가 가볍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고현성이 한숨을 내쉬었다.“이따가 나가야 하는데 너도 같이 갈래?”나는 알면서도 물었다.“임지혜 씨 때문이에요?”고현성이 두 눈을 감았다.“교통사고 당해서 다쳤대.”나는 계속하여 인내심 있게 물었다.“그래서 지금 보살펴주러 가려고요?”고현성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떠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떠나기 전 나는 그에게 귀띔했다.“우리 전에 했던 약속 기억해요? 연애하는 동안에는 임지혜 씨를 만나선 안 된다고 했었어요.”고현성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기억해. 그래서...”‘내 의견을 물으려고? 뭘 믿고 내가 보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현성 씨, 지금 가면 이 게임 중지할 겁니다.”나는 영화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현성 씨가 가겠다고 하면 막지는 않을게요. 가면 약속을 어긴 거로 생각하겠어요. 현성 씨, 사실 난 현성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해심 많은 여자가 아니에요.”고현성은 날 묵묵히 바라보다가 결국 나가버렸다. 창문 앞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내려다보았는데 아주 단호했다.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침대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초저녁쯤 고현성의 어머니가 밥 먹으러 내려오라고 하자 나는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캐리어를 끌면서 거실로 내려갔다. 마당에 눈이 소복이 쌓이기 시작했다.고현성의 어머니는 나를 보고 다정하게 물었다.“가려고?”“네. 비행기 시간이 곧 돼서요. 그동안 실례 많았습니다.”“실례는 무슨. 내 며느리인데 뭘 그런 예의를 차리고 그래.”“어머님, 저랑 현성 씨 이혼한 지 좀 됐어요.”고현성의 어머니가 아무 말이 없자 내가 웃으며 물었다.“눈사람 만들어도 돼요?”“당연하지. 내가 도와줄까?”“괜찮아요. 다 만들면 갈게요.”나는 눈이 두껍게 쌓인 곳을 찾아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릴 적에 부모님과 만들어본 적이 있어 그리
고현성은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2년 전 낙태 수술이 뭘 빼앗아 갔다고?”그가 정확히 들었다는 걸 알고 있기에 다시 반복할 이유가 없었다.“희연이 풀어줘요. 사랑하는 사람이 희연이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굳이 탓하겠다면 사고나 치고 다니는 임지혜 씨를 탓해요. 조사해보면 임지혜 씨가 8년 전에 뭔 짓을 했는지 알 거예요. 그 사람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쳤어요. 희연이는 지금 그때 당한 거 그대로 갚아줬을 뿐이고 차로 친 것도 임지혜 씨가 모진 말을 해서 홧김에 그런 거예요. 현성 씨 그 약혼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착한 사람이 아니라고요.”나는 말하다가 잠시 멈칫하고 비웃었다.“아, 내가 잘못 말했네요. 당신은 못 하는 게 없는 고현성이죠, 정말. 남이 무슨 짓을 하든 다 아는데. 지금은 단지 임지혜 씨의 잘못도 눈감아주고 있는 거고요.”고현성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이 일은 내가 제대로 조사할 거야. 근데 2년 전 그 일은 제대로 설명해. 아이를 지운 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무슨 일? 다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의사가 수술을 했지만 자궁 소파술이 제대로 되지 않아 자궁이 감염되고 말았다. 그리고 아직 완전히 회복되기도 전에 고현성과 관계를 가졌다.내가 싸늘하게 말했다.“별일 아니에요. 사람마다 체질이 달라서 아이를 지운 후에 몸이 제대로 회복하지 못했어요. 의사가 내가 앞으로 아이를 가지기 어려울 거라고 하더라고요. 안 그러면 내가 왜 선양 그룹을 현성 씨한테 줬겠어요? 그동안 선양 그룹을 혼자서 경영하느라 너무 힘들었고 후계자도 없어서 준 거죠.”한참이 지나서야 고현성이 말했다.“왜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어?”“현성아, 지금 누구랑 얘기하는 거야?”병실 안의 임지혜가 고현성을 부르자 나는 싸늘하게 웃고는 다시 경찰서로 갔다.최희연을 보석으로 나오게 하고 싶었지만 지금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권력을 내 손으로 직접 고현성에게 갖다 바쳤고 고현성은 그걸 이
“연애 말이야. 없었던 거로 하자.”이젠 사랑하는 척도 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내가 피식 웃었다.“그래요. 내가 바라던 바예요.”“수아야, 그때 너랑 이혼한 건 지혜한테 해주지 못한 결혼식을 돌려주기 위해서였어. 진짜 너한테 상처 주고 싶지 않았어. 미안해.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도 좋아.”“전처한테 미련이 남았어요?”나는 싸늘하게 웃었다.“미안할 거 없어요. 현성 씨는 날 사랑하지 않을 뿐이고 나도 아쉬울 게 없어요. 이혼을 후회하고 있다는 둥, 이젠 날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둥, 임지혜 씨에 대한 마음이 진짜 사랑인지 모르겠다는 이딴 어이없는 소리만 하지 말아요. 만약 그런 소리 했다간 현성 씨가 너무 역겨울 것 같아요.”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고현성이 대답했다.“이렇게까지 날을 세울 거 없어. 너한테 죄책감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함부로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야.”“이 전화를 한 목적이 뭐예요?”“아이 일은 정말 미안해...”“그만 해요. 사과받을 생각 없으니까. 아이 일은 아이한테 사과해야죠, 내가 아니라. 현성 씨가 뭔 생각인지 잘 알아요. 나한테 사과해서 양심의 가책이라도 덜어낸 다음에 임지혜 씨랑 결혼하겠다는 말이잖아요.”고현성은 아무 말이 없었다.나는 전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끄고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다시 휴대전화를 켜고 고현성에게 문자를 보냈다.[됐어요. 현성 씨 탓하지 않을게요. 이제부턴 각자 살아요. 현성 씨는 임지혜 씨와 행복하게 살고 난 새로운 삶을 살 거예요.]참으로 가식적인 말이었다. 아마 고현성도 내가 탓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최희연의 일 말고는 정말 탓할 게 없었다.사실 따지고 보면 다 내 탓이었다. 모든 게 다 자업자득이었고 고생을 사서 했다.몸이 점점 추워져 나는 숨을 내뱉었다. 두 다리에 갑자기 힘이 풀린 바람에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먼 곳의 파도가 밀려오면서 내 몸을 적시려던 그때 누군가 힘 있는 팔
조민수는 며칠 동안 쭉 연씨 별장에 있으면서 나의 일상을 보살펴줬다. 그러는 사이 그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상주로 언제 돌아가려고?”그러자 조민수가 웃으며 물었다.“그렇게 날 내쫓고 싶어?”“새언니가 화낼까 봐 그러지.”내가 대답했다.“네 새언니는 어려서 자주 삐져.”새언니는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예전에 오빠에게서 들었는데 확실히 좀 제멋대로인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다 이유가 있었고 절대 아무 이유 없이 그러진 않았다.만약 임지혜 같은 스타일을 만나면 거두절미하고 바로 해결해버렸기에 조민수의 옆에는 이성이 매우 적었다. 그런 그녀와 달리 나는 신경 쓰기도 귀찮았다. 그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틈을 준 것이었다.내가 웃으면서 말했다.“새언니 아직 어리니까 오빠가 많이 양보해줘.”그러더니 뭔가 생각났는지 조민수가 피식 웃었다.“난 걔를 탓한 적이 한 번도 없어.”새언니에 대한 조민수의 마음은 진심 같았다.“두 사람 꼭 행복해야 해.”“응. 알았어. 그렇게 할게.”내가 말했다.“오빠, 빨리 상주로 돌아가. 새언니가 보고 싶어 하겠어.”“그럼 넌? 난 여기 남아있을 거야.”내가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나도 하고 싶은 일이 있어. 개인적인 시간을 줘야지.”그를 돌려보낸 건 그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새언니와 싸운 상태이기에 더더욱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되었다.조민수는 망설이다가 결국 타협했다.“그럼 오늘 저녁에 나랑 파티에 참석하자.”“갑자기 무슨 파티?”조민수가 히죽 웃더니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임지혜 말이야, 자기는 너보다 더 귀하다고 했지? 오늘 저녁에 대체 누가 파렴치한 건지 제대로 보여주겠어. 수아야, 거절하지 마.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두려움이란 걸 알아야 해. 고현성이 하도 오냐오냐해서 너한테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는 거라고.”“난 신경 쓰지 않아.”“내가 신경 쓰여서 그래.”...나는 컨디션이 매우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민수와 함께 파티에 가기로
조민수는 운성시를 떠나기 싫어했지만 내가 계속 다그쳤다. 나를 집에 데려다준 후에도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버티고 있자 한숨을 쉬면서 물었다.“꼭 날 내쫓아야겠어?”이제 내 옆에 남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유일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최희연마저 감옥에 있었다.솔직히 말해서 조민수를 보내기 아쉬웠다. 그런데 요즘 그에게 자주 전화가 오는 사람이 있었다. 조민수에게도 처리해야 하는 일이 많아 그의 시간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죽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내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혼자 있을 시간을 좀 줘.”“9년이나 혼자 있었는데 부족해?”나는 순간 멈칫했다. 부모님이 돌아간 지 올해도 9년이었다.9년이라는 시간을 바삐 보낸 탓에 날 위해서 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유일하게 했던 선택이 내 인생의 가장 잘못된 결정이 되고 말았다.만약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고현성과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그동안 챙겨줘서 고마워, 오빠.”나의 결정을 바꿀 수 없자 조민수가 알겠다고 했다. 그는 방으로 들어와 직접 메이크업을 지워주었다. 서툴긴 했지만 그래도 인내심 있고 꼼꼼하게 지워주었다. 얼굴에 생긴 옅은 흉터를 본 순간 조민수는 더 속상해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이건 또 무슨 흉터야?”나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고현성이 임지혜를 지키려고 날 밀어버린 바람에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고현성에게 나도 아프다고 분명히 얘기했었지만 그는 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그 후에도 이 상처에 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실수로 넘어진 거야.”“아무리 넘어져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넘어져?”조민수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지만 내가 말하길 꺼리자 더는 캐묻지 않았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고씨 가문과의 계약을 취소하면 조씨 가문에 손해가 커?”나도 줄곧 사업을 해온 사람이라 조민수는 나에게 숨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어
많은 사람 앞에서 ‘바람이 사는 거리’를 연주한 적이 없었고 부모님이 돌아간 후에 이 곡을 건드린 적도 없었다. 용기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피하고 있었다.오늘이 어쩌면 마지막 수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곡을 가르치고 싶었다. 내 마음속에서 가장 소중했던 것을 학생들에게 주면서 앞으로도 날 기억하길 바랐다.바람이 사는 거리의 선율이 퍼져나갔다.악보가 기억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사람이 연주하는 걸 몇 번 듣기도 했다. 나는 과거와 얼마 전에 교실에서 듣던 연주곡, 그리고 꼬마 아가씨라 부르던 그 목소리를 추억하면서 연주했다. 피아노 소리가 전해졌고 심금을 울렸다.바람이 사는 거리... 사실 바람은 이곳에 살지도 남아있지도 않았고 그냥 스쳐 지나갔다. 우리가 어렸을 때 우리의 시간을 가져갔고 고현성은 바람이 지나간 뒤 이곳을 떠났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바람은 이미 지나갔고 거리에는 낙엽만이 가득했다. 어렴풋했던 화면들이 점점 희미해지다가 마지막에는 보이지 않았다. 뒷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한 사람의 추억만 남았다.모두 내 곁을 떠났고 이젠 나 혼자만 남았다...나는 웃고 있었지만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연주를 멈추자 학생들이 왜 우냐고 물었다.“그건 선생님의 비밀이야.”수업이 끝난 후 나는 가방을 챙기고 교실을 나가다가 멈칫하고 말았다.‘고현성이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내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에요?”고현성은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고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가 입술을 깨물면서 덤덤하게 물었다.“방금 왜 울었어?”내가 웃으며 물었다.“그게 현성 씨랑 무슨 상관이죠?”고현성은 말문이 막힌 나머지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계속 끈질기게 물었다.“비밀이 뭔데?”결국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말귀 못 알아들어요?”비밀이라는 게 바로 그해의 그 사람이었다. 눈앞의 고현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고현성과 이곳에서 싸우고 싶지 않아 이 말을 던지고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최희연이 고개를 내저으면서 이상한 소리를 했다.“이상하게 요즘 자꾸 수아 네가 보고 싶고 마음이 불안해. 갑자기 내 곁을 떠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서준이가 소리 없이 날 떠났던 것처럼.”나는 화들짝 놀랐다가 웃으며 말했다.“바보야, 난 계속 여기 있잖아.”“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아.”...감옥을 나온 후 나는 망설이다가 진서준이 사는 마을로 내려갔다. 마침 진서준의 할머니가 진서준과 바람 쐬러 나왔는데 나는 방해하지 않고 멀리서 따라갔다. 잠시 후 할머니가 잠깐 자리를 비웠다.진서준은 지금 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그 사람 요즘 어떻게 지내요?”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요?”그가 대답했다.“최희연이요.”“기억하고 있었어요?”“내가 바보도 아니고 당연히 기억하죠.”내가 물었다.“그럼 전에는 왜 모른 척했는데요?”나는 잠깐 멈칫하다가 웃었다.“혹시 열등감 때문이에요? 희연이랑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진서준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난 희연이랑 어울리지 않아요.”눈앞의 남자는 두 다리를 잃었지만 눈빛은 뚜렷했다. 만약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고 건강했더라면 건달이라고 해도 자신의 성과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 때문에 우린 모두 임지혜라는 여자를 만나고 말았다.“서준 씨, 희연이는 서준 씨가 필요해요.”“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에요, 이젠.”시골의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나는 차가운 하천을 보면서 슬픔에 잠겼다.“적어도 서준 씨는 살아있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을 가질 수 있는 능력도 있고. 근데... 난 암 말기예요. 살아봤자 한두 주일이나 더 살까요? 내일 갑자기 숨이 멎을지도 몰라요. 나한테는 미래라곤 없어요.”진서준의 충격받은 얼굴을 보며 나는 웃으면서 계속 말했다.“그러니까 자신한테 행복해질 기회를 줘요.”“수아 씨...”“알아서 잘해요. 희연이 실망하게 하지 말고.”나는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 이젠 다른 말
거의 죽을 때가 되니까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는지 내가 웃으며 말했다.“네. 용서할게요.”“연수아, 너 왜 그래?”내가 눈살을 찌푸린 채 물었다.“네?”“너 뭔가 이상해.”“아무 일 없어요.”“집이야? 지금 너희 집 밑이야.”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은 다음 방바닥에 떨어진 진통제를 치웠다. 그러고는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메이크업까지 했다. 준비하는 사이 고현성이 전화가 와도 받질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고현성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얼마 전에 우리 집 비밀번호를 알았기 때문이었다.1227, 바로 12월 27일이었다.고현성과 연애하기로 한 날에 알려줬었다. 그때 고현성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었다.“왜 1227이야?”나는 대충 둘러댔다.“그냥 아무 번호나 설정한 거예요.”메이크업을 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립스틱을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고현성은 왠지 예전과 다른 모습이었고 상의는 흰 셔츠 하나만 입고 있었다.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 이렇게 얇게 입었어요?”그러자 고현성이 피식 웃었다.“지금 날 걱정하는 거야?”내가 흘겨보자 고현성은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그동안 계속 생각했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대체 누구인지...”내가 가볍게 물었다.“그래서 누군지 알았어요?”“응. 내가 예전에 역겨워했던 그 여자더라고.”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나라고 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억울했다. 전혀 기쁘지 않았고 억울하기만 했다.내가 덤덤하게 물었다.“그래요?”흔들림 없는 나와 달리 되레 고현성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는 나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듯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런데 배가 너무 아파서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고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수아야,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래?”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무슨 기회요?”“내 아내가 되어줘. 우리 재결합하자.”나는 정신이 흐리멍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