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성은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2년 전 낙태 수술이 뭘 빼앗아 갔다고?”그가 정확히 들었다는 걸 알고 있기에 다시 반복할 이유가 없었다.“희연이 풀어줘요. 사랑하는 사람이 희연이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굳이 탓하겠다면 사고나 치고 다니는 임지혜 씨를 탓해요. 조사해보면 임지혜 씨가 8년 전에 뭔 짓을 했는지 알 거예요. 그 사람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쳤어요. 희연이는 지금 그때 당한 거 그대로 갚아줬을 뿐이고 차로 친 것도 임지혜 씨가 모진 말을 해서 홧김에 그런 거예요. 현성 씨 그 약혼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착한 사람이 아니라고요.”나는 말하다가 잠시 멈칫하고 비웃었다.“아, 내가 잘못 말했네요. 당신은 못 하는 게 없는 고현성이죠, 정말. 남이 무슨 짓을 하든 다 아는데. 지금은 단지 임지혜 씨의 잘못도 눈감아주고 있는 거고요.”고현성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이 일은 내가 제대로 조사할 거야. 근데 2년 전 그 일은 제대로 설명해. 아이를 지운 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무슨 일? 다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의사가 수술을 했지만 자궁 소파술이 제대로 되지 않아 자궁이 감염되고 말았다. 그리고 아직 완전히 회복되기도 전에 고현성과 관계를 가졌다.내가 싸늘하게 말했다.“별일 아니에요. 사람마다 체질이 달라서 아이를 지운 후에 몸이 제대로 회복하지 못했어요. 의사가 내가 앞으로 아이를 가지기 어려울 거라고 하더라고요. 안 그러면 내가 왜 선양 그룹을 현성 씨한테 줬겠어요? 그동안 선양 그룹을 혼자서 경영하느라 너무 힘들었고 후계자도 없어서 준 거죠.”한참이 지나서야 고현성이 말했다.“왜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어?”“현성아, 지금 누구랑 얘기하는 거야?”병실 안의 임지혜가 고현성을 부르자 나는 싸늘하게 웃고는 다시 경찰서로 갔다.최희연을 보석으로 나오게 하고 싶었지만 지금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권력을 내 손으로 직접 고현성에게 갖다 바쳤고 고현성은 그걸 이
“연애 말이야. 없었던 거로 하자.”이젠 사랑하는 척도 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내가 피식 웃었다.“그래요. 내가 바라던 바예요.”“수아야, 그때 너랑 이혼한 건 지혜한테 해주지 못한 결혼식을 돌려주기 위해서였어. 진짜 너한테 상처 주고 싶지 않았어. 미안해.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도 좋아.”“전처한테 미련이 남았어요?”나는 싸늘하게 웃었다.“미안할 거 없어요. 현성 씨는 날 사랑하지 않을 뿐이고 나도 아쉬울 게 없어요. 이혼을 후회하고 있다는 둥, 이젠 날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둥, 임지혜 씨에 대한 마음이 진짜 사랑인지 모르겠다는 이딴 어이없는 소리만 하지 말아요. 만약 그런 소리 했다간 현성 씨가 너무 역겨울 것 같아요.”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고현성이 대답했다.“이렇게까지 날을 세울 거 없어. 너한테 죄책감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함부로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야.”“이 전화를 한 목적이 뭐예요?”“아이 일은 정말 미안해...”“그만 해요. 사과받을 생각 없으니까. 아이 일은 아이한테 사과해야죠, 내가 아니라. 현성 씨가 뭔 생각인지 잘 알아요. 나한테 사과해서 양심의 가책이라도 덜어낸 다음에 임지혜 씨랑 결혼하겠다는 말이잖아요.”고현성은 아무 말이 없었다.나는 전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끄고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다시 휴대전화를 켜고 고현성에게 문자를 보냈다.[됐어요. 현성 씨 탓하지 않을게요. 이제부턴 각자 살아요. 현성 씨는 임지혜 씨와 행복하게 살고 난 새로운 삶을 살 거예요.]참으로 가식적인 말이었다. 아마 고현성도 내가 탓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최희연의 일 말고는 정말 탓할 게 없었다.사실 따지고 보면 다 내 탓이었다. 모든 게 다 자업자득이었고 고생을 사서 했다.몸이 점점 추워져 나는 숨을 내뱉었다. 두 다리에 갑자기 힘이 풀린 바람에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먼 곳의 파도가 밀려오면서 내 몸을 적시려던 그때 누군가 힘 있는 팔
조민수는 며칠 동안 쭉 연씨 별장에 있으면서 나의 일상을 보살펴줬다. 그러는 사이 그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상주로 언제 돌아가려고?”그러자 조민수가 웃으며 물었다.“그렇게 날 내쫓고 싶어?”“새언니가 화낼까 봐 그러지.”내가 대답했다.“네 새언니는 어려서 자주 삐져.”새언니는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예전에 오빠에게서 들었는데 확실히 좀 제멋대로인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다 이유가 있었고 절대 아무 이유 없이 그러진 않았다.만약 임지혜 같은 스타일을 만나면 거두절미하고 바로 해결해버렸기에 조민수의 옆에는 이성이 매우 적었다. 그런 그녀와 달리 나는 신경 쓰기도 귀찮았다. 그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틈을 준 것이었다.내가 웃으면서 말했다.“새언니 아직 어리니까 오빠가 많이 양보해줘.”그러더니 뭔가 생각났는지 조민수가 피식 웃었다.“난 걔를 탓한 적이 한 번도 없어.”새언니에 대한 조민수의 마음은 진심 같았다.“두 사람 꼭 행복해야 해.”“응. 알았어. 그렇게 할게.”내가 말했다.“오빠, 빨리 상주로 돌아가. 새언니가 보고 싶어 하겠어.”“그럼 넌? 난 여기 남아있을 거야.”내가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나도 하고 싶은 일이 있어. 개인적인 시간을 줘야지.”그를 돌려보낸 건 그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새언니와 싸운 상태이기에 더더욱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되었다.조민수는 망설이다가 결국 타협했다.“그럼 오늘 저녁에 나랑 파티에 참석하자.”“갑자기 무슨 파티?”조민수가 히죽 웃더니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임지혜 말이야, 자기는 너보다 더 귀하다고 했지? 오늘 저녁에 대체 누가 파렴치한 건지 제대로 보여주겠어. 수아야, 거절하지 마.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두려움이란 걸 알아야 해. 고현성이 하도 오냐오냐해서 너한테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는 거라고.”“난 신경 쓰지 않아.”“내가 신경 쓰여서 그래.”...나는 컨디션이 매우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민수와 함께 파티에 가기로
조민수는 운성시를 떠나기 싫어했지만 내가 계속 다그쳤다. 나를 집에 데려다준 후에도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버티고 있자 한숨을 쉬면서 물었다.“꼭 날 내쫓아야겠어?”이제 내 옆에 남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유일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최희연마저 감옥에 있었다.솔직히 말해서 조민수를 보내기 아쉬웠다. 그런데 요즘 그에게 자주 전화가 오는 사람이 있었다. 조민수에게도 처리해야 하는 일이 많아 그의 시간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죽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내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혼자 있을 시간을 좀 줘.”“9년이나 혼자 있었는데 부족해?”나는 순간 멈칫했다. 부모님이 돌아간 지 올해도 9년이었다.9년이라는 시간을 바삐 보낸 탓에 날 위해서 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유일하게 했던 선택이 내 인생의 가장 잘못된 결정이 되고 말았다.만약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고현성과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그동안 챙겨줘서 고마워, 오빠.”나의 결정을 바꿀 수 없자 조민수가 알겠다고 했다. 그는 방으로 들어와 직접 메이크업을 지워주었다. 서툴긴 했지만 그래도 인내심 있고 꼼꼼하게 지워주었다. 얼굴에 생긴 옅은 흉터를 본 순간 조민수는 더 속상해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이건 또 무슨 흉터야?”나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고현성이 임지혜를 지키려고 날 밀어버린 바람에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고현성에게 나도 아프다고 분명히 얘기했었지만 그는 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그 후에도 이 상처에 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실수로 넘어진 거야.”“아무리 넘어져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넘어져?”조민수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지만 내가 말하길 꺼리자 더는 캐묻지 않았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고씨 가문과의 계약을 취소하면 조씨 가문에 손해가 커?”나도 줄곧 사업을 해온 사람이라 조민수는 나에게 숨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어
많은 사람 앞에서 ‘바람이 사는 거리’를 연주한 적이 없었고 부모님이 돌아간 후에 이 곡을 건드린 적도 없었다. 용기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피하고 있었다.오늘이 어쩌면 마지막 수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곡을 가르치고 싶었다. 내 마음속에서 가장 소중했던 것을 학생들에게 주면서 앞으로도 날 기억하길 바랐다.바람이 사는 거리의 선율이 퍼져나갔다.악보가 기억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사람이 연주하는 걸 몇 번 듣기도 했다. 나는 과거와 얼마 전에 교실에서 듣던 연주곡, 그리고 꼬마 아가씨라 부르던 그 목소리를 추억하면서 연주했다. 피아노 소리가 전해졌고 심금을 울렸다.바람이 사는 거리... 사실 바람은 이곳에 살지도 남아있지도 않았고 그냥 스쳐 지나갔다. 우리가 어렸을 때 우리의 시간을 가져갔고 고현성은 바람이 지나간 뒤 이곳을 떠났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바람은 이미 지나갔고 거리에는 낙엽만이 가득했다. 어렴풋했던 화면들이 점점 희미해지다가 마지막에는 보이지 않았다. 뒷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한 사람의 추억만 남았다.모두 내 곁을 떠났고 이젠 나 혼자만 남았다...나는 웃고 있었지만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연주를 멈추자 학생들이 왜 우냐고 물었다.“그건 선생님의 비밀이야.”수업이 끝난 후 나는 가방을 챙기고 교실을 나가다가 멈칫하고 말았다.‘고현성이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내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에요?”고현성은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고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가 입술을 깨물면서 덤덤하게 물었다.“방금 왜 울었어?”내가 웃으며 물었다.“그게 현성 씨랑 무슨 상관이죠?”고현성은 말문이 막힌 나머지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계속 끈질기게 물었다.“비밀이 뭔데?”결국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말귀 못 알아들어요?”비밀이라는 게 바로 그해의 그 사람이었다. 눈앞의 고현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고현성과 이곳에서 싸우고 싶지 않아 이 말을 던지고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최희연이 고개를 내저으면서 이상한 소리를 했다.“이상하게 요즘 자꾸 수아 네가 보고 싶고 마음이 불안해. 갑자기 내 곁을 떠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서준이가 소리 없이 날 떠났던 것처럼.”나는 화들짝 놀랐다가 웃으며 말했다.“바보야, 난 계속 여기 있잖아.”“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아.”...감옥을 나온 후 나는 망설이다가 진서준이 사는 마을로 내려갔다. 마침 진서준의 할머니가 진서준과 바람 쐬러 나왔는데 나는 방해하지 않고 멀리서 따라갔다. 잠시 후 할머니가 잠깐 자리를 비웠다.진서준은 지금 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그 사람 요즘 어떻게 지내요?”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요?”그가 대답했다.“최희연이요.”“기억하고 있었어요?”“내가 바보도 아니고 당연히 기억하죠.”내가 물었다.“그럼 전에는 왜 모른 척했는데요?”나는 잠깐 멈칫하다가 웃었다.“혹시 열등감 때문이에요? 희연이랑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진서준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난 희연이랑 어울리지 않아요.”눈앞의 남자는 두 다리를 잃었지만 눈빛은 뚜렷했다. 만약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고 건강했더라면 건달이라고 해도 자신의 성과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 때문에 우린 모두 임지혜라는 여자를 만나고 말았다.“서준 씨, 희연이는 서준 씨가 필요해요.”“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에요, 이젠.”시골의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나는 차가운 하천을 보면서 슬픔에 잠겼다.“적어도 서준 씨는 살아있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을 가질 수 있는 능력도 있고. 근데... 난 암 말기예요. 살아봤자 한두 주일이나 더 살까요? 내일 갑자기 숨이 멎을지도 몰라요. 나한테는 미래라곤 없어요.”진서준의 충격받은 얼굴을 보며 나는 웃으면서 계속 말했다.“그러니까 자신한테 행복해질 기회를 줘요.”“수아 씨...”“알아서 잘해요. 희연이 실망하게 하지 말고.”나는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 이젠 다른 말
거의 죽을 때가 되니까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는지 내가 웃으며 말했다.“네. 용서할게요.”“연수아, 너 왜 그래?”내가 눈살을 찌푸린 채 물었다.“네?”“너 뭔가 이상해.”“아무 일 없어요.”“집이야? 지금 너희 집 밑이야.”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은 다음 방바닥에 떨어진 진통제를 치웠다. 그러고는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메이크업까지 했다. 준비하는 사이 고현성이 전화가 와도 받질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고현성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얼마 전에 우리 집 비밀번호를 알았기 때문이었다.1227, 바로 12월 27일이었다.고현성과 연애하기로 한 날에 알려줬었다. 그때 고현성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었다.“왜 1227이야?”나는 대충 둘러댔다.“그냥 아무 번호나 설정한 거예요.”메이크업을 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립스틱을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고현성은 왠지 예전과 다른 모습이었고 상의는 흰 셔츠 하나만 입고 있었다.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 이렇게 얇게 입었어요?”그러자 고현성이 피식 웃었다.“지금 날 걱정하는 거야?”내가 흘겨보자 고현성은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그동안 계속 생각했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대체 누구인지...”내가 가볍게 물었다.“그래서 누군지 알았어요?”“응. 내가 예전에 역겨워했던 그 여자더라고.”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나라고 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억울했다. 전혀 기쁘지 않았고 억울하기만 했다.내가 덤덤하게 물었다.“그래요?”흔들림 없는 나와 달리 되레 고현성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는 나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듯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런데 배가 너무 아파서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고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수아야,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래?”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무슨 기회요?”“내 아내가 되어줘. 우리 재결합하자.”나는 정신이 흐리멍덩했다.
문을 열지 않아 고현성의 얼굴에 나타난 기대를 보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물었다.“그래서요?”“수아야, 나랑 다시 만나.”내가 거절하려던 그때 고현성은 전화 한 통을 받고 가버렸다. 나는 통유리 앞에 서서 고현성을 내려다보았다. 베이지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나를 등진 뒷모습은 몇 년 전에 좋아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그는 다급하게 차를 몰고 떠났다.나는 다시 돌아서서 침대에 앉았다. 그때 조민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고 걱정스럽게 물었다.“몸은 좀 어때?”“괜찮아. 그냥 예전이 그리워서 가끔 떠오르긴 해. 민수 오빠, 희연이 말고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은 게 있는데 오빠가 내 얘기 들어볼래?”조민수가 다정하게 말했다.“응. 말해주면 나야 좋지.”“현성 씨를 처음 만났을 때 난 14살이었어. 현성 씨가 연주한 첫 곡이 ‘바람이 사는 거리’였는데 그 곡은 엄마가 생전에 나한테 연주해준 마지막 곡이었거든. 그렇게 그 사람이 내 마음속에 들어왔고 지금까지 속상한 일이 있어도 다 괜찮다고 생각했어.”“수아야,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오빠, 나 때문에 고씨 가문과 맞서지 마.”조민수는 멈칫하다가 속상한 말투로 말했다.“그래. 네 마음이 어떤지 알겠어.”‘내 마음이라...’나는 한결같이 그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다.“고마워, 오빠.”“수아야, 며칠 후면 설이야.”내가 부탁했다.“운성에는 오지 마.”내가 죽는 모습을 조민수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수아야...”전화를 끊은 후 나는 침대에서 그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지금일 수도 있고 내일 혹은 모레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요 이틀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세 번째 날에 나는 고현성의 전화를 받았다.“미안해.”“괜찮아요. 지혜 씨랑 행복하게 살아요.”사흘 전 고현성이 다급하게 떠났던 이유가 임지혜의 자살 소동 때문이었다.비밀이 아니라서 기사만 찾아보면 알 수 있었다. 임지혜는 이런 방법을 써서라도 고현성을 옆에 두고 싶어 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든 이젠 중요
때로는 아저씨라고 부르기도 했다.고정재는 사 온 선물을 들고 담씨 가문 별장에 들어가려던 참에 메시지를 받았다.그는 선물을 내려놓고 담현아에게 답장을 보냈다.[괜찮으니 너무 많이 먹지 마. 이따가 집에 가면 내가 만들어 줄게.]담현아의 소원은 항상 하나하나 다 이루어 주었다.결국 그에게 시집가기에는 담현아가 아까웠다.고정재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손을 뻗어 문을 두드렸다. 한 남자가 문을 열어줬다.고정재가 전에 조사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담현아의 오빠인 담현우였다.그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했다.“안녕하세요. 저는 고정재입니다. 현아에게는 오라고 하지 않았어요. 제가 직접 방문하러...”담현우는 그의 말을 끊고 표정을 찡그리며 속삭였다.“알죠. 알죠. 현아가 이런 상황에 부닥치는 걸 원치 않으시잖요! 매부, 내가 미리 말해 주는 건데. 우리 엄마 절대 다루기 쉽지 않으니까 조심해야 해요. 좀 있다가는 제가 절대로 도와줄 수 없으니까요!"처남은 아주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고정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상기시켜 줘서 고마워요.”담현우가 옆으로 물러나자 고정재는 담현아의 부모님이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봤다.그는 신발을 벗어서 슬리퍼로 갈아 신고 안으로 들어가 두 분 앞에 앉았다. 두 어르신은 온화한 모습이었다.고정재는 정중하게 말했다.“아버님, 어머님. 사실 제가 어떻게 불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아직 저를 받아들이지 않으신 것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담현아의 어머니는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우리가 자네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무슨 배짱으로 우리 담씨 집안에 찾아왔나?"담현아의 어머니는 매우 무례한 태도로 말했다.사실 담현아 아버지는 눈앞의 고정재에 매우 만족했다. 그의 외모와 몸매는 물론 그의 성품은 최고 중의 최고였다.단지 나이가 조금...사실 서른네 살이면 괜찮았다. 담현아에 비해 많아 보일 뿐이다. 고정재를 밖에 내놓으면 얼마나 많은 아가씨들이 뒤꽁무니를 쫓을
석지훈은 내가 그의 아내라고 말했다.하지만 그때 나는 아직 그의 아내가 아니었다.그의 마음속에는 줄곧 내가 그의 아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나는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아직 저한테 여보라고 부른 적이 없어요."석지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윤아, 듣고 싶어?"그의 목소리는 매력적이고 유혹적이다.나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들었다."그래, 근데 네가 나를 기분 좋게 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해. 착하지. 아래층에 내려가서 걔들이랑 놀아줘. 나는 조금만 자고 일어나서 같이 있어 줄게. 한 어르신 쪽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더 이상 걱정하지 마. 그 사람은 이제 두려워할 만한 대상이 아니야."석지훈의 얼굴은 여전히 약간 창백하다. 장시간의 이동이 그를 지치게 했는지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보였다.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푹 쉬어요."일어나서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아직 강아지와 놀고 있는 승아가 보였다. 나는 송이연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저녁에 뭐 먹을까요?"어느새 또 저녁이 다가오고 있었다."아직 별생각 없어요. 배가 별로 안 고프네요. 근데 승아가 새우를 먹고 싶어 해서 인터넷으로 좀 주문해 놓았어요. 이따가 새우로 뭘 좀 할 건데, 수아 씨는 뭐 먹고 싶어요?""그럼 이연 씨가 새우를 하고, 저는 감자 카레를 만들게요."석지훈은 부상 때문에 자극적인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네, 곁들일 반찬도 좀 만들게요."막 말을 끝내자 담현아가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운성시에 있어요?][집에 있어. 이제 막 저녁밥 하려고 해.][그러면 나도 가서 밥 좀 얻어먹을래요.]나는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말했다."좀 있으면 담현아가 올 거에요. 이연씨는 모를 텐데, 고현성의 작은 형수이고, 고정재의 아내예요."송이연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득 나에게 말했다."오혜원 일은 진지하게 생각해 봤는데요. 걔 때문에 시혁 씨가 힘들어하는 건 원치 않지만, 우리 승아가 평생 안전하고 걱정이
"몰라요. 걔가 찼어요."한민수의 말투는 이상할 정도로 분개했다.나는 그가 무엇에 그토록 분개하는지 알 수 없었다."이 일은 제가 지켜봐 주고 있을게요."한민수와의 전화를 끊고 나는 승아와 잠시 놀아주었다. 그러다 문득 고정재가 아직 동성시에서 장모를 상대하고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나는 문자로 그에게 물었다.[일은 어떻게 되어가요?]그는 나에게 답장했다.[전에 현성이 일 때문에 이틀 동안 운성시에 다녀오느라 늦었어. 지금 막 동성시에 도착했고. 내가 이미 사람을 보내서 담현아를 조사하게 했어. 오늘 밤에 소식이 있을 거야.]고정재는 며칠 동안 아직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나는 계속해서 그에게 물었다.[현아는요?][운성시에 있어. 오늘 밤에 담현아 부모님을 뵙고 운성시로 돌아갈 거야. 그 아이는 아직도 나를 만나기를 부끄러워하네.][현아는 아직 어리고 순수하니 당연한 일이죠.][응, 오늘 밤에 일을 해결해야겠어.]고정재가 말한 '일'은 무슨 일을 가리키는 걸까?!나는 어렴풋이 수치심을 느꼈다.하하하, 내가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거지?나는 서둘러 고개를 흔들며 위층 침실로 돌아갔다.석지훈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었다. 심각한 부상 때문에 일어나서 움직이는 것이 어려웠다. 그저 조용히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석지훈은 책을 읽을 때 고개를 조금만 숙이고 턱을 살짝 당긴다. 그의 몸에 비추어진 아침 햇살이 사람을 온화해 보이게 했다.석지훈은 웃지 않을 때는 아주 냉담하지만, 웃을 때는 매우 매력적인 남자였다. 나는 그를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나는 다시 다가가서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석지훈은 나를 흘끗 보며 못 참는 듯 농담을 건넸다."석부인 요즘 너무 달라붙는군.""오빠한테만 달라붙지 다른 사람한테는 안 그래요."내가 너무나 당당하게 말하는 것을 보자 석지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말했다."점점 더 뻔뻔해지는군. 왜 아래층에서 걔네와 같이 있지 않고?""저는 오빠랑 같이 있고
나는 당연히 연시혁에게 더 마음이 기울였다.나는 그가 훗날 예전의 고현성처럼 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오히려 송이연의 곁에 누군가가 함께 있기를 바란다.마음속으로 갑자기 어떤 결정을 내렸다.“음, 이연 씨 먼저 쉬어요.”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조수에게 문자를 보냈다.[몇 명을 보내서 오혜원을 감시해. 조금이라도 이상한 움직임이 보이면 즉시 나에게 보고하도록!]절대 오혜원이 문제를 일으키게 해서는 안 된다!위층 침실로 돌아와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석지훈은 아직 자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마자 그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나는 웃으며 물었다.“언제 일어났어요?”“네가 처음 들어왔을 때.”방금 별장에 돌아왔을 때 석지훈을 흘끗 보고 갔었다. “저 때문에 시끄러워서 깬 거예요?”그는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아래층은?”“이연 씨예요. 이연 씨랑 승아는 당분간 여기에서 지낼 거예요. 아, 그리고 한민수가 병원에서 했던 말들...일부러 우리에게 들으라고 한 말인 거 알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뭘 해야 하고 뭘 하면 안되는지 알아요. 이 일에 관여하지 않을 거예요.”석지훈은 담담하게 응, 하고 대답했다.나는 그가 호숫가에서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나는 그가 무엇을 신경 쓰는지, 무엇을 질투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고현성이 떠올랐다.석지훈이 고현성을 염두에 둔 것이든 아니든 나는 그에게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나는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나는 당신의 아내이고, 고현성에게는 어떤 미련도 없어요. 그 사람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저와는 큰 관계가 없어요.”석지훈의 눈빛이 깊어졌다.“정말?”“석지훈 씨, 뭐가 그렇게 걱정되세요?”석지훈이 고개를 돌리자 나는 그에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정말이에요.”석지훈이 입꼬리를 올렸다.“까불기는.”나는 일부러 놀리듯 물었다.“왜 웃어요?”석지훈이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나 놀리는
나는 깜짝 놀랐다. 오혜원이 나한테 되물어볼 줄은 생각도 못 했다.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네 뜻대로는 안 될 거야.”“네 눈엔 내가 그냥 나쁜 사람으로만 보여? 옛날엔 네가 살아있길 바랐는데, 그 과정에서 좀 잘못된 짓을 했을 뿐이야.”잘못된 짓일 ‘뿐’이라니...참 쉽게 말한다.“적어도 거짓말쟁이는 맞지.”더 상대하기도 귀찮아서 형수랑 송이연에게 운성시에서 얼마 동안 머물 예정인지 물었다. 형수는 조민수가 동성시에서 사업 때문에 바빠서 당분간 못 떠나고, 한 일주일 정도 있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송이연은 망설이면서 말했다.“일단은...”“뭐가 겁나요?”내가 물었다.송이연은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겁내는 건 아니에요.”나는 바로 집으로 들어가서 승아를 안았다. 승아는 순하게 나를 고모라고 불렀다. 나는 웃으면서 물었다.“고모 보고 싶었어?”“응, 작은 고모 보고 싶었어.”“그러면 고모네 가서 며칠 지낼래?”승아는 신나서 물었다.“엄마도 같이 가?”“응, 엄마도 같이 갈 거야.”이럴 때일수록 절대 승아를 이곳에 두고 갈 수 없다.이곳에 두는 건 송이연을 협박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그럼 나 작은 고모네 갈래.”송이연이 와서 그런지 승아는 엄청나게 신나서 내 품에서 빠져나가 마당으로 송이연을 찾으러 갔다.송이연은 힘겹게 송승아를 안아 올렸다.“엄마, 우리 고모네 가도 돼? 고모네에 강아지 있대~”승아에게 우리 집에 개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그런데 그 집은 핀란드를 말하는 거였다.뭐, 괜찮다. 나중에 비서를 시켜서 한 마리 데려오면 되는 일이다.송이연은 웃으면서 대답했다.“그래.”나는 오혜원이 울적한 표정을 짓는 걸 뒤로하고 송이연과 승아를 데리고 내 별장으로 돌아왔다. 그때 석지훈은 아직 침실에서 자고 있었다.나는 송이연이랑 승아를 1층 방으로 안내했다.다 정리하고 나서야 송이연에게 물었다.“왜 걔를 처리하지 않는 거예요?”내가 말한‘걔’는 오혜원을 의미했다.송이연의 권력이면 오혜원을 처
연 씨 가문에는 대를 이을 자식이 없었다.나는 오혜원에게 따져 물었다.“내가 전에 뭐라고 했지?”오혜원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지더니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엄마가 거실에서 나오며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수아야, 무슨 말을 하는 거니? 왜 그런 말투로 말하는 거야?”엄마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혜원이가 왜 돌아왔는지 궁금해서요! 그리고 우리 새언니랑 이연 씨는 왜 운성에 있는 거예요?”“네 오빠랑 새언니는 나를 보러 운성에 왔고 이연 씨는 승아 보러 온 거란다. 너는 오늘 갑자기 왜 왔어?”나는 엄마에게 되물었다.“저는 맨날 오는 거 아니었어요?”“나는 네가 아직 핀란드에 있는 줄 알았지.”엄마가 말했다.나는 오혜원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말했다.“맞아요, 원래는 핀란드에 있어야 하는데 성가신 파리 몇 마리 때문에... 운성에 돌아와서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 엄마, 연 씨 저택이랑 새언니랑 이연 씨에게 경호원을 더 배치해서 안전을 확보해야겠어요.”“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나까지 걱정되게? 설마 또 전처럼...”엄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나는 엄마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아니에요. 그냥 집안의 도둑을 경계하는 것뿐이에요.”나는 ‘집안의 도둑'이라는 말을 분명하게 강조했다. 엄마는 뭔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나를 쳐다보았다가 오혜원을 포함한 다른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그녀의 시선은 오혜원에게 멈췄다.엄마는 곤란한 표정으로 물었다.“너희 사이에 무슨 오해가 있는 거니? 수아 네가 혜원이를 반기지 않는 것 같구나.”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혜원이가 돌아와서 엄마가 이렇게 기뻐하는데 제가 어떻게 반기지 않겠어요? 그냥 좀 감회가 새로워서요.”엄마는 반신반의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오혜원을 괴롭힐까 봐 걱정하는 듯 엄마는 말없이 서 있는 오혜원의 손을 잡고 저택 안으로 들
고현성의 일에는 더 이상 관여할 수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그저 방관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고현성이 이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는 생각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었으니까.그의 능력은 석지훈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한민수는 석지훈에게 몇 가지 보고를 마친 후 자리를 떴다. 떠나기 전, 그는 석지훈에게 당부했다.“빨리 몸 회복해. 난 핀란드에 오래 있을 수 없어. 형이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야.”석지훈은 되물었다.“무슨 일이라도 있어?”“급한 일이 있어서 운성에 다녀와야 해.”“그럼 핀란드 쪽 일은 모두 너한테 맡길게.”한민수는 순간 당황하며 되물었다.“무슨 뜻이야?”“저녁에 사모님 모시고 운성으로 돌아갈 거야.”한민수의 얼굴은 분노로 파랗게 질렸지만 석지훈은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한민수가 떠난 후, 나는 조심스럽게 석지훈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물었다.“오빠, 왜 그렇게 급하게 운성으로 돌아가려는 거예요?”석지훈의 몸에는 오랜 세월 쌓인 흉터가 가득했다. 특히 심장 근처에 새로 생긴 총상은 보기만 해도 숨이 막혔다. 그는 오로지 얼굴과 목에만 흉터가 없었다.내 손가락이 그의 피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자 그는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아침에 운성으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하지 않았어?”맞다. 운성에 돌아가서 오혜원을 감시하려고 했었다.하지만 갑작스러운 사건 때문에 그만뒀었고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그런데 그가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니.“그 일은 급한 거 아니에요.”석지훈은 그의 몸 위에서 마음대로 움직이는 내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너무 오래 머물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때 그가 입을 열었다.“다친 김에 요양 삼아 운성에 가서 우리 사모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겠어. 이쪽 일은 한민수에게 맡기고 겸사겸사 쉬어야지.”석지훈은 다쳐야만 쉴 수 있었다.그리고 그는 언제나 나와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했다.나는 감동했다.“네, 그렇지만 너무 서두르지 마
“난 항상 쓸모없는 것 같아요. 사실 아직도 오빠가 왜 나를 사랑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난 성격도 좋지 않고 몸도 약하고 다른 사람을 잘 챙기지도 못하는 데다 이혼까지 했는데...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나 싶거든요. 그런데 하필이면 오빠의 눈에 들었어요. 강하고 잘생기고 눈 높고 완벽한 사람이 날 좋아하는 게 처음엔 무서웠어요... 아니다. 처음엔 내가 먼저 오빠를 좋아한다고 했었죠. 난 항상 궁금했어요. 오빠가 대체 나의 어떤 점을 보고 나를 좋아하게 됐는지...”“희망.”그가 대답했다.나는 의아하게 물었다.“무슨 희망이요?”“사랑에 상처받고 힘들어도 넌 여전히 하늘을 보고 있었어. 안 그랬으면 나를 선택하지 않았겠지. 넌 항상 희망과 따뜻함을 갈망했고 누군가가 널 구해 주길 바랐지.”그랬다. 그때 고정재가 몇 번이나 나에게 호감을 표시했지만 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석지훈이 나타나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가 강대해서가 아니라 그는 나에게 그 누구도 주지 못했던 믿음과 편안함을 줬기 때문이었다. 그는 항상 내 뒤에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힘들어 보이면 어김없이 나타났으니까.그때 석지훈은 진짜 내 뒤에 있었다.나는 항상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그런데 내가 원한다고 해서 그가 내게 주겠는가?그는 구세주가 아니었다.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석지훈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세상 모든 일에 이유가 있어야 해? 널 좋아하는 데 이유가 필요하다면 아마 우린 평생 인연이 닿지 않았을 거야. 사랑해. 수아야, 나도 모르게 너한테 빠졌어.”석지훈의 달콤한 말에 나는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나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웃다가 울다가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까. 그런데도 석지훈은 내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우리 사모님은 정말 예뻐.”“오빠, 닭살 돋는 말 좀 그만 해요.”바로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한민수가 서 있었다. 우리가 괜찮은 것을 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두
석지훈은 의식을 잃었고 나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나는 정말... 정말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군가가 나를, 그리고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석지훈을 구해 주길 바랐다.나는 흐느껴 울었다. 몇 분 뒤 윤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사모님, 석 대표님 상태는 어떠십니까?”강렬한 희망의 빛이 내 마음을 비추었다. 나는 급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윤 비서님, 빨리 지훈 씨를 구해 줘요!”너무 급하게 일어나는 바람에 나는 그만 호수에 빠지고 말았다.아마 몸이 너무 약해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었다. 나중에 윤 비서가 나를 구해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나는 꿈을 꾸었고 같은 꿈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꾸었다.꿈에는 부모님과 두 아이만 나왔다.그리고 승아와 연시혁, 그리고 내가 있었다.그저 우리 가족만 꿈에 나타났다.이상한 꿈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예고하는 것 같았다.나는 불안한 마음에 악몽이라고 생각되어 번쩍 눈을 떴다. 옆을 돌아보니 석지훈이 내 옆에 누워 있었다.윤 비서는 나와 석지훈을 같은 병실, 같은 침대에 눕혀 놓았다. 침대는 아주 넓었다. 아마 내가 몸을 뒤척이다 석지훈의 상처를 건드릴까 봐 그런 것 같았다.석지훈은 아직 의식이 없었다.붕대를 온몸에 감고 있었고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그리고 입술은 바싹 말라 있었다.나는 그가 이렇게 약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단 한 번도 없었다.나는 손을 뻗어 그의 눈썹을 살며시 만졌다. 그러자 그가 눈을 떴다. 나는 놀라서 물었다.“언제 깨어났어요?”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너 먼저.”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나는 마음이 너무 무거웠고 그의 약한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내가 우는 것을 보자 석지훈은 손을 뻗어 내 눈물을 닦아 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난 괜찮아.”“너무 무서웠어요.”나는 말했다.“어. 네 마음 다 알아.”역시 석지훈은 내 마음을 다 알고 있었다.“석지훈,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