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성은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2년 전 낙태 수술이 뭘 빼앗아 갔다고?”그가 정확히 들었다는 걸 알고 있기에 다시 반복할 이유가 없었다.“희연이 풀어줘요. 사랑하는 사람이 희연이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굳이 탓하겠다면 사고나 치고 다니는 임지혜 씨를 탓해요. 조사해보면 임지혜 씨가 8년 전에 뭔 짓을 했는지 알 거예요. 그 사람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쳤어요. 희연이는 지금 그때 당한 거 그대로 갚아줬을 뿐이고 차로 친 것도 임지혜 씨가 모진 말을 해서 홧김에 그런 거예요. 현성 씨 그 약혼녀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착한 사람이 아니라고요.”나는 말하다가 잠시 멈칫하고 비웃었다.“아, 내가 잘못 말했네요. 당신은 못 하는 게 없는 고현성이죠, 정말. 남이 무슨 짓을 하든 다 아는데. 지금은 단지 임지혜 씨의 잘못도 눈감아주고 있는 거고요.”고현성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이 일은 내가 제대로 조사할 거야. 근데 2년 전 그 일은 제대로 설명해. 아이를 지운 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무슨 일? 다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의사가 수술을 했지만 자궁 소파술이 제대로 되지 않아 자궁이 감염되고 말았다. 그리고 아직 완전히 회복되기도 전에 고현성과 관계를 가졌다.내가 싸늘하게 말했다.“별일 아니에요. 사람마다 체질이 달라서 아이를 지운 후에 몸이 제대로 회복하지 못했어요. 의사가 내가 앞으로 아이를 가지기 어려울 거라고 하더라고요. 안 그러면 내가 왜 선양 그룹을 현성 씨한테 줬겠어요? 그동안 선양 그룹을 혼자서 경영하느라 너무 힘들었고 후계자도 없어서 준 거죠.”한참이 지나서야 고현성이 말했다.“왜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어?”“현성아, 지금 누구랑 얘기하는 거야?”병실 안의 임지혜가 고현성을 부르자 나는 싸늘하게 웃고는 다시 경찰서로 갔다.최희연을 보석으로 나오게 하고 싶었지만 지금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권력을 내 손으로 직접 고현성에게 갖다 바쳤고 고현성은 그걸 이
“연애 말이야. 없었던 거로 하자.”이젠 사랑하는 척도 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내가 피식 웃었다.“그래요. 내가 바라던 바예요.”“수아야, 그때 너랑 이혼한 건 지혜한테 해주지 못한 결혼식을 돌려주기 위해서였어. 진짜 너한테 상처 주고 싶지 않았어. 미안해.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도 좋아.”“전처한테 미련이 남았어요?”나는 싸늘하게 웃었다.“미안할 거 없어요. 현성 씨는 날 사랑하지 않을 뿐이고 나도 아쉬울 게 없어요. 이혼을 후회하고 있다는 둥, 이젠 날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둥, 임지혜 씨에 대한 마음이 진짜 사랑인지 모르겠다는 이딴 어이없는 소리만 하지 말아요. 만약 그런 소리 했다간 현성 씨가 너무 역겨울 것 같아요.”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고현성이 대답했다.“이렇게까지 날을 세울 거 없어. 너한테 죄책감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함부로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야.”“이 전화를 한 목적이 뭐예요?”“아이 일은 정말 미안해...”“그만 해요. 사과받을 생각 없으니까. 아이 일은 아이한테 사과해야죠, 내가 아니라. 현성 씨가 뭔 생각인지 잘 알아요. 나한테 사과해서 양심의 가책이라도 덜어낸 다음에 임지혜 씨랑 결혼하겠다는 말이잖아요.”고현성은 아무 말이 없었다.나는 전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끄고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다시 휴대전화를 켜고 고현성에게 문자를 보냈다.[됐어요. 현성 씨 탓하지 않을게요. 이제부턴 각자 살아요. 현성 씨는 임지혜 씨와 행복하게 살고 난 새로운 삶을 살 거예요.]참으로 가식적인 말이었다. 아마 고현성도 내가 탓하지 않는다는 소리를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최희연의 일 말고는 정말 탓할 게 없었다.사실 따지고 보면 다 내 탓이었다. 모든 게 다 자업자득이었고 고생을 사서 했다.몸이 점점 추워져 나는 숨을 내뱉었다. 두 다리에 갑자기 힘이 풀린 바람에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먼 곳의 파도가 밀려오면서 내 몸을 적시려던 그때 누군가 힘 있는 팔
조민수는 며칠 동안 쭉 연씨 별장에 있으면서 나의 일상을 보살펴줬다. 그러는 사이 그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상주로 언제 돌아가려고?”그러자 조민수가 웃으며 물었다.“그렇게 날 내쫓고 싶어?”“새언니가 화낼까 봐 그러지.”내가 대답했다.“네 새언니는 어려서 자주 삐져.”새언니는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예전에 오빠에게서 들었는데 확실히 좀 제멋대로인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다 이유가 있었고 절대 아무 이유 없이 그러진 않았다.만약 임지혜 같은 스타일을 만나면 거두절미하고 바로 해결해버렸기에 조민수의 옆에는 이성이 매우 적었다. 그런 그녀와 달리 나는 신경 쓰기도 귀찮았다. 그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틈을 준 것이었다.내가 웃으면서 말했다.“새언니 아직 어리니까 오빠가 많이 양보해줘.”그러더니 뭔가 생각났는지 조민수가 피식 웃었다.“난 걔를 탓한 적이 한 번도 없어.”새언니에 대한 조민수의 마음은 진심 같았다.“두 사람 꼭 행복해야 해.”“응. 알았어. 그렇게 할게.”내가 말했다.“오빠, 빨리 상주로 돌아가. 새언니가 보고 싶어 하겠어.”“그럼 넌? 난 여기 남아있을 거야.”내가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나도 하고 싶은 일이 있어. 개인적인 시간을 줘야지.”그를 돌려보낸 건 그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새언니와 싸운 상태이기에 더더욱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되었다.조민수는 망설이다가 결국 타협했다.“그럼 오늘 저녁에 나랑 파티에 참석하자.”“갑자기 무슨 파티?”조민수가 히죽 웃더니 갑자기 진지하게 말했다.“임지혜 말이야, 자기는 너보다 더 귀하다고 했지? 오늘 저녁에 대체 누가 파렴치한 건지 제대로 보여주겠어. 수아야, 거절하지 마.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두려움이란 걸 알아야 해. 고현성이 하도 오냐오냐해서 너한테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는 거라고.”“난 신경 쓰지 않아.”“내가 신경 쓰여서 그래.”...나는 컨디션이 매우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민수와 함께 파티에 가기로
조민수는 운성시를 떠나기 싫어했지만 내가 계속 다그쳤다. 나를 집에 데려다준 후에도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버티고 있자 한숨을 쉬면서 물었다.“꼭 날 내쫓아야겠어?”이제 내 옆에 남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유일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최희연마저 감옥에 있었다.솔직히 말해서 조민수를 보내기 아쉬웠다. 그런데 요즘 그에게 자주 전화가 오는 사람이 있었다. 조민수에게도 처리해야 하는 일이 많아 그의 시간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죽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내가 고개를 끄덕였다.“응. 혼자 있을 시간을 좀 줘.”“9년이나 혼자 있었는데 부족해?”나는 순간 멈칫했다. 부모님이 돌아간 지 올해도 9년이었다.9년이라는 시간을 바삐 보낸 탓에 날 위해서 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유일하게 했던 선택이 내 인생의 가장 잘못된 결정이 되고 말았다.만약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고현성과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그동안 챙겨줘서 고마워, 오빠.”나의 결정을 바꿀 수 없자 조민수가 알겠다고 했다. 그는 방으로 들어와 직접 메이크업을 지워주었다. 서툴긴 했지만 그래도 인내심 있고 꼼꼼하게 지워주었다. 얼굴에 생긴 옅은 흉터를 본 순간 조민수는 더 속상해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이건 또 무슨 흉터야?”나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고현성이 임지혜를 지키려고 날 밀어버린 바람에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고현성에게 나도 아프다고 분명히 얘기했었지만 그는 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그 후에도 이 상처에 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실수로 넘어진 거야.”“아무리 넘어져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넘어져?”조민수는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지만 내가 말하길 꺼리자 더는 캐묻지 않았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고씨 가문과의 계약을 취소하면 조씨 가문에 손해가 커?”나도 줄곧 사업을 해온 사람이라 조민수는 나에게 숨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어
많은 사람 앞에서 ‘바람이 사는 거리’를 연주한 적이 없었고 부모님이 돌아간 후에 이 곡을 건드린 적도 없었다. 용기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피하고 있었다.오늘이 어쩌면 마지막 수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곡을 가르치고 싶었다. 내 마음속에서 가장 소중했던 것을 학생들에게 주면서 앞으로도 날 기억하길 바랐다.바람이 사는 거리의 선율이 퍼져나갔다.악보가 기억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사람이 연주하는 걸 몇 번 듣기도 했다. 나는 과거와 얼마 전에 교실에서 듣던 연주곡, 그리고 꼬마 아가씨라 부르던 그 목소리를 추억하면서 연주했다. 피아노 소리가 전해졌고 심금을 울렸다.바람이 사는 거리... 사실 바람은 이곳에 살지도 남아있지도 않았고 그냥 스쳐 지나갔다. 우리가 어렸을 때 우리의 시간을 가져갔고 고현성은 바람이 지나간 뒤 이곳을 떠났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기다렸다. 바람은 이미 지나갔고 거리에는 낙엽만이 가득했다. 어렴풋했던 화면들이 점점 희미해지다가 마지막에는 보이지 않았다. 뒷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한 사람의 추억만 남았다.모두 내 곁을 떠났고 이젠 나 혼자만 남았다...나는 웃고 있었지만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연주를 멈추자 학생들이 왜 우냐고 물었다.“그건 선생님의 비밀이야.”수업이 끝난 후 나는 가방을 챙기고 교실을 나가다가 멈칫하고 말았다.‘고현성이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내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여긴 어쩐 일이에요?”고현성은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고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가 입술을 깨물면서 덤덤하게 물었다.“방금 왜 울었어?”내가 웃으며 물었다.“그게 현성 씨랑 무슨 상관이죠?”고현성은 말문이 막힌 나머지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계속 끈질기게 물었다.“비밀이 뭔데?”결국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말귀 못 알아들어요?”비밀이라는 게 바로 그해의 그 사람이었다. 눈앞의 고현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고현성과 이곳에서 싸우고 싶지 않아 이 말을 던지고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최희연이 고개를 내저으면서 이상한 소리를 했다.“이상하게 요즘 자꾸 수아 네가 보고 싶고 마음이 불안해. 갑자기 내 곁을 떠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서준이가 소리 없이 날 떠났던 것처럼.”나는 화들짝 놀랐다가 웃으며 말했다.“바보야, 난 계속 여기 있잖아.”“나한테 뭔가 숨기고 있는 것 같아.”...감옥을 나온 후 나는 망설이다가 진서준이 사는 마을로 내려갔다. 마침 진서준의 할머니가 진서준과 바람 쐬러 나왔는데 나는 방해하지 않고 멀리서 따라갔다. 잠시 후 할머니가 잠깐 자리를 비웠다.진서준은 지금 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그 사람 요즘 어떻게 지내요?”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요?”그가 대답했다.“최희연이요.”“기억하고 있었어요?”“내가 바보도 아니고 당연히 기억하죠.”내가 물었다.“그럼 전에는 왜 모른 척했는데요?”나는 잠깐 멈칫하다가 웃었다.“혹시 열등감 때문이에요? 희연이랑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진서준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난 희연이랑 어울리지 않아요.”눈앞의 남자는 두 다리를 잃었지만 눈빛은 뚜렷했다. 만약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고 건강했더라면 건달이라고 해도 자신의 성과를 이루었을 것이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 때문에 우린 모두 임지혜라는 여자를 만나고 말았다.“서준 씨, 희연이는 서준 씨가 필요해요.”“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에요, 이젠.”시골의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나는 차가운 하천을 보면서 슬픔에 잠겼다.“적어도 서준 씨는 살아있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을 가질 수 있는 능력도 있고. 근데... 난 암 말기예요. 살아봤자 한두 주일이나 더 살까요? 내일 갑자기 숨이 멎을지도 몰라요. 나한테는 미래라곤 없어요.”진서준의 충격받은 얼굴을 보며 나는 웃으면서 계속 말했다.“그러니까 자신한테 행복해질 기회를 줘요.”“수아 씨...”“알아서 잘해요. 희연이 실망하게 하지 말고.”나는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 이젠 다른 말
거의 죽을 때가 되니까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는지 내가 웃으며 말했다.“네. 용서할게요.”“연수아, 너 왜 그래?”내가 눈살을 찌푸린 채 물었다.“네?”“너 뭔가 이상해.”“아무 일 없어요.”“집이야? 지금 너희 집 밑이야.”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은 다음 방바닥에 떨어진 진통제를 치웠다. 그러고는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메이크업까지 했다. 준비하는 사이 고현성이 전화가 와도 받질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고현성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얼마 전에 우리 집 비밀번호를 알았기 때문이었다.1227, 바로 12월 27일이었다.고현성과 연애하기로 한 날에 알려줬었다. 그때 고현성이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었다.“왜 1227이야?”나는 대충 둘러댔다.“그냥 아무 번호나 설정한 거예요.”메이크업을 하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립스틱을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고현성은 왠지 예전과 다른 모습이었고 상의는 흰 셔츠 하나만 입고 있었다.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 이렇게 얇게 입었어요?”그러자 고현성이 피식 웃었다.“지금 날 걱정하는 거야?”내가 흘겨보자 고현성은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그동안 계속 생각했었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대체 누구인지...”내가 가볍게 물었다.“그래서 누군지 알았어요?”“응. 내가 예전에 역겨워했던 그 여자더라고.”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나라고 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억울했다. 전혀 기쁘지 않았고 억울하기만 했다.내가 덤덤하게 물었다.“그래요?”흔들림 없는 나와 달리 되레 고현성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는 나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듯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런데 배가 너무 아파서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고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수아야,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줄래?”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무슨 기회요?”“내 아내가 되어줘. 우리 재결합하자.”나는 정신이 흐리멍덩했다.
문을 열지 않아 고현성의 얼굴에 나타난 기대를 보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물었다.“그래서요?”“수아야, 나랑 다시 만나.”내가 거절하려던 그때 고현성은 전화 한 통을 받고 가버렸다. 나는 통유리 앞에 서서 고현성을 내려다보았다. 베이지색 코트를 입고 있었고 나를 등진 뒷모습은 몇 년 전에 좋아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그는 다급하게 차를 몰고 떠났다.나는 다시 돌아서서 침대에 앉았다. 그때 조민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고 걱정스럽게 물었다.“몸은 좀 어때?”“괜찮아. 그냥 예전이 그리워서 가끔 떠오르긴 해. 민수 오빠, 희연이 말고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은 게 있는데 오빠가 내 얘기 들어볼래?”조민수가 다정하게 말했다.“응. 말해주면 나야 좋지.”“현성 씨를 처음 만났을 때 난 14살이었어. 현성 씨가 연주한 첫 곡이 ‘바람이 사는 거리’였는데 그 곡은 엄마가 생전에 나한테 연주해준 마지막 곡이었거든. 그렇게 그 사람이 내 마음속에 들어왔고 지금까지 속상한 일이 있어도 다 괜찮다고 생각했어.”“수아야,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오빠, 나 때문에 고씨 가문과 맞서지 마.”조민수는 멈칫하다가 속상한 말투로 말했다.“그래. 네 마음이 어떤지 알겠어.”‘내 마음이라...’나는 한결같이 그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다.“고마워, 오빠.”“수아야, 며칠 후면 설이야.”내가 부탁했다.“운성에는 오지 마.”내가 죽는 모습을 조민수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수아야...”전화를 끊은 후 나는 침대에서 그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지금일 수도 있고 내일 혹은 모레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요 이틀일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세 번째 날에 나는 고현성의 전화를 받았다.“미안해.”“괜찮아요. 지혜 씨랑 행복하게 살아요.”사흘 전 고현성이 다급하게 떠났던 이유가 임지혜의 자살 소동 때문이었다.비밀이 아니라서 기사만 찾아보면 알 수 있었다. 임지혜는 이런 방법을 써서라도 고현성을 옆에 두고 싶어 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든 이젠 중요
“피도 눈물도 없는 것 같아. 정말 얼음장처럼 차가워!”한민영의 날 선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그 순간, 석지훈이 천천히 눈을 뜨고 낮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민영아.”그의 차분한 목소리에 한민영은 순간 말을 멈추고 눈길을 돌렸다.그녀는 애써 무심한 척하며 대답했다.“왜?”석지훈은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내가 아직 한씨 가문에 빚진 게 뭐가 있지?”그의 질문은 단순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어마어마했다.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그 한마디에 숨을 죽였다.한민영은 입술을 깨물며 말문이 막힌 듯 대답하지 못했다.분위기가 점점 무겁게 가라앉자, 한민수는 눈치 빠르게 상황을 전환하려 애쓰며 얼른 말을 꺼냈다.“자, 여기까지 하자. 앞으로 경쟁사를 어떻게 처리할지 논의하자. 그들이 유럽뿐만 아니라 국내 세력까지 강탈하면서 지금처럼 성장한 건 골치 아프잖아.”하지만 석지훈은 한민수의 중재를 무시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내가 혼수상태에 빠져 있을 때 네가 수아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를 줄 알았어? 내가 굳이 언급하지 않은 건 한씨 가문에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야.”그는 한민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한 어조로 덧붙였다.“한민영, 나라는 사람은 마음먹으면 항상 독하게 행동에 옮기는 거 잘 알고 있을 거야. 내 앞에서 감히 이득을 보려는 사람은 없을 거야. 내 영역에서 내 여자를 괴롭히는 사람은 더더욱 없을 테고...”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뜨며 무심한 어조로 마무리했다.“설령 그 대상이 한씨 가문이든, 한씨 가문의 미래 후계자든... 난 봐줄 마음이 없어.”나도 그의 입에서 ‘독하다’는 말이 직접적으로 나오는 것을 처음 들었다. 그의 단호한 태도에 한민영은 멍하니 바라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야? 석지훈, 네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도, 내가 말실수했다는 것도, 네 여자를 괴롭혔다는 것도 모두 인정해. 그래도 나는 네 오랜 친구야. 그리고 한씨 가문은 너를 키
별장 문 앞에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그들 중 한민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어머, 아가씨도 여기 있었어요?”그의 말투는 여전히 어색하고 낯설었지만, 옆에 있던 원태웅이나 한 번 게임을 같이했던 유진, 그리고 나에게 늘 차갑게 대했던 한민영보다는 훨씬 나았다.문제는 지금 내가 석지훈의 셔츠 한 장만 걸친 채 머리카락도 흐트러진 상태라는 점이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 상황은 아무리 봐도 난처하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게다가 그들은 석지훈의 친구들이자, 나를 완전히 용서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그런 사실이 떠오르자 더욱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결국 한민수의 질문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석지훈에게 말했다.“오빠, 나 먼저 들어가서 옷 좀 갈아입을게요.”나는 서둘러 별장 안으로 들어와 2층 방으로 올라갔다.침대에 앉자 복잡한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석지훈의 SNS에 등장하는 사람 중 나를 반기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그 사실이 나를 한없이 우울하게 만들었다.‘괜한 생각은 그만하자.’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비며 스스로를 다독였다.옷장으로 가서 은빛이 도는 몸에 딱 붙는 미니 드레스를 꺼내 입었다.어차피 밖에 나갈 일이 없으니 높은 구두는 신지 않았다.가볍게 화장을 마친 뒤 침대를 정리하려 돌아섰을 때, 아침에 석지훈이 벗겨 준 궁전 스타일의 드레스가 바닥에 던져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윤 비서의 말에 따르면, 그 드레스는 F국 왕실의 것이었다.F국 왕실에 대해 내가 아는 건 예전에 석만호가 해 준 이야기뿐이었다.그는 내 친모가 F국의 공작과 결혼했다고 말했다.‘날 납치한 사람들이 왜 F국 왕실의 드레스를 가지고 있었던 거지? 왜 나한테 그 옷을 입히려 했을까? 이게 무슨 의미일까?’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친모에게 연락할 생각은 없었다. 비록 석만호가 준 연락처가 내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긴 했지만 말이다.그때, 아래층에서 갑자기 다투는 소
석지훈은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 막지 않았다.항상 그랬다. 그는 나를 제지하거나 간섭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했다.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그러자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그의 가슴이 드러났고, 그곳엔 상처들이 가득했다.아침에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그의 몸이 잠옷에 가려져 있어서 자세히 볼 틈도 없었다.그러나 지금, 그의 몸에 새겨진 상처들은 너무도 선명했다. 상처들은 각기 다른 깊이와 모양을 지니고 있었다.얕은 상처는 세월의 흔적으로 이미 희미해졌지만, 깊은 상처는 비교적 최근에 생긴 듯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깊은 상처는 그의 복부에 있었다.길게 그어진 흉터는 그의 단단한 복부 근육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나는 손끝으로 그 거친 흉터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그의 상처가 전해주는 차가운 감촉에 마음이 먹먹해졌다.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오빠, 안 아파요?”그는 낮고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익숙해졌어.”‘익숙해졌다고?’그의 말에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속삭이듯 말했다.“익숙해졌다고 해도, 아픈 기억은 사라지지 않잖아요.”그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침묵했다.나는 그의 허리와 복부 위로 몸을 기울여 얼굴을 살짝 댔다. 그의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며, 내 마음은 더욱 아려왔다.나의 위로를 눈치챘는지, 석지훈은 작은 강아지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어루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사는 세상에서는 위험을 피할 수 없어.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더 많은 위험이 닥칠 거야. 나와 함께하기 두렵지 않아?”그가 자신이 사는 세상에 관해 이야기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오빠의 세계... 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머릿속에 불현듯 최현욱의 말이 떠올랐다.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오빠의 세계는... 어떤 곳이에요?”내 손끝은 그의 허리띠에 닿아 있는 금속 부분을 천천히 매만지고 있었다.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담담한 어조로 말했
나는 석지훈을 집에 데려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가 먼저 청혼하지 않는 한,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었다.만약 내가 그를 집에 데려간다면 부모님께서 결혼을 재촉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마치 내가 그와 빨리 결혼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보일 테니, 반드시 막아야 했다.물론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와의 결혼이 기다려지기도 했다.나는 대충 둘러댔다.“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직 급한 거 없어요. 제가 일정 잡으면 미리 알려드릴게요.”그러자 엄마는 만족한 듯 말했다.“이건 네 일만이 아니야. 시혁이도 있잖니. 나랑 네 아빠가 얘기를 좀 해봤는데, 시혁이도 연씨 가문의 자식이니까 네 아빠가 어른으로서 그 여자애랑 직접 얘기를 좀 해 보려고 해. 두 사람이 지금처럼 어색하게 지내지 않도록 계기를 만들어 주고 싶어.”엄마는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그리고 돈 걱정은 하지 마. 연씨 가문이 운성시에서의 명망은 사라졌지만, 나랑 네 아빠가 몇억 원 정도 모아 놨단다. 그 돈으로 시혁이한테 운성시에 집을 마련해 주고, 예단도 준비해서 그 여자애랑 제대로 된 결혼식을 올리게 해 주고 싶어. 그래야 네 큰아버지한테도 체면이 서지 않겠니.”큰아버지는 그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지만, 부모님은 운 좋게 살아남았다.아무래도 부모님은 송이연의 진짜 정체를 아직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굳이 그 사실을 알릴 생각은 없었다.부모님은 진심으로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일을 추진하려는 게 마음이 쓰였다. 게다가 연시혁도 연씨 가문의 사람이기에, 나 역시 내심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만약 두 사람이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물론 그녀가 연시혁을 용서하지 않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나는 여자로서 그 선택을 존중하고 지지했다. 그리고 이 일에 있어서는 결과가 어떻든 송이연의 결정을 따르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나는 언제까지나 승아의 고모로 남을 테니까...“시혁 오빠가 자존심이
나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석지훈은 어느새 내 옆에 몸을 기댄 채, 팔로 머리를 받치고 누워 있었다. 그의 눈빛은 날카롭고도 깊었고, 얼굴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숨결이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나는 목이 타들어 갔지만 애써 마른침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오빠... 언제 자요?”그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되물었다.“왜?”나는 그 시선을 피하려 애쓰며 무심한 척 대답했다.“그... 그냥요. 이제 좀 자고 싶어졌어요.”나의 대답에 그의 미소가 한층 더 짙어졌다. 그리고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나의 귀를 스쳤다.“아가...”그 한마디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얼떨결에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네?”“키스해 줘.”갑자기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에 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그의 말투엔 마치 당연하다는 듯한 여유와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 분위기에 눌린 나는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굳어 있는 나를 보고, 석지훈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그러더니 두 손가락으로 내 뺨을 부드럽게 스치며 조용히 물었다.“하기 싫어?”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가볍게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 그의 입가에도 입술을 살짝 포갰다. 그러고는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똑바로 마주했다.그는 말없이 고개를 기울이더니 내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방 안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이 부드럽게 퍼져 있었다.햇살에 물든 그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그 눈빛만큼은 달랐다.말없이 나를 끌어당기는 그 눈빛엔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격정이 가득 차 있었다....나는 녹초가 된 몸을 침대에 눕히자마자 곧바로 깊은 잠에 빠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오후 네 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니, 함께 있던 석지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베개 옆에 낯익은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이걸 어디서 찾았지?’휴대폰을 집어 들어 전원을 켜자, 화면에는 부모님께서 걸어왔었던 부
‘F국 왕실? 왜 러국에서 F국 왕실의 물건이 발견된 거지?’머릿속이 혼란스러웠고 답을 찾을 수 없는 답답함에 몸도 마음도 피폐해지었다. 결국 석지훈의 품에 기댄 채 금세 잠들어 버렸다.동성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아침 일곱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헬리콥터는 석씨 가문의 별장, 석지훈이 전에 머물던 곳에 착륙했다.나는 희미하게 눈을 뜨고 그를 바라봤다. 그는 나를 안고 헬리콥터에서 내린 뒤 별장으로 들어갔다. 헬리콥터는 곧바로 잔디밭에서 이륙 준비를 했고 진유겸과 그 일행은 다시 운성시로 떠났다.석지훈은 별장에 들어선 뒤에도 나를 품에서 내려놓지 않은 채 곧장 방으로 향했다. 방에 도착한 후, 커다란 침대 위에 나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나서야 그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시작했다.나는 지친 몸으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욕실 쪽에서 물소리가 끊겼고 인기척이 들려서 눈을 떠보니, 검은색 실크 잠옷을 입고 나온 석지훈이 보였다. 넓은 가슴팍이 살짝 드러나 있었다.나는 눈을 깜빡이며 나지막이 그를 불러보았다.“오빠...”그는 내 곁으로 다가와 앉더니 손을 뻗어 내 볼을 살짝 꼬집듯 어루만졌다. 그러고 나서 부드러운 손길로 내 어깨를 덮고 있던 코트와 신고 있던 신발을 벗겨냈다.나는 그의 손길에 저항하지 않았고 조용히 지나간 상황을 설명했다.“누군가가 나를 구해준 것 같아요...”그는 담담히 대답했다.“알고 있어.”“하지만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어요.”나는 그 사람이 최현욱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 외에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설명하지 않아도 돼.”석지훈은 진유겸이 했던 말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나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쑥스러웠다. 눈앞의 그를 마주하자, 마음이 뒤숭숭했다.8개월 만에 다시 만난 탓인지 어딘가 어색하고 서먹했다. 그런데 그가 한참 동안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바람에 더더욱 몸 둘 바를 몰랐다.하지만 그의 눈빛은 맑고 따뜻했다. 어떤 욕망이나 불순한 기색도 없었다. 그
사실 윤승민은 석지훈을 의식해 억지로 예의를 차린 것뿐이었다.이 생각이 들자 나는 마음이 조금 울적해졌다.나는 윤승민을 지나쳐 헬기에 올라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창백한 얼굴의 최희연이 진유겸의 품에 기대 있었다.진유겸은 검은 가죽 재킷을 입고 냉랭한 표정으로 내 뒤에서 막 들어온 석지훈을 노려보더니 불만스럽게 물었다.“내 여자는 이렇게 상처투성이가 됐는데 네 여자는 왜 이렇게 활발하게 뛰어다니는 거야?”진유겸은 최희연이 다친 것 때문에 화가 나고 속상한 상태였다.나는 얼른 해명했다.“난 처음에 그 사람들이 희연이를 기절시키는 걸 보고 그다음에 그 사람들이 몽둥이를 나에게 휘두르자 바로 기절한 척했어요.”진유겸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그 바보들이 그걸 믿었단 말이에요?”석지훈은 진유겸의 맞은편에 앉았고 나는 석지훈의 옆으로 가서 앉으며 추측하듯 말했다.“그 사람들이 내가 연기한 걸 알았을 수도 있지만 굳이 더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서 그냥 넘어간 것 같아요.”진유겸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수아 씨는 운이 좋았네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석지훈의 팔에 기댄 뒤 몰래 그의 얼굴을 살폈다.석지훈도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우리는 이렇게 오랜 시간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있었다.한참 뒤 최희연은 간신히 힘을 내어 나에게 물었다.“수아야, 넌 괜찮아? 나는 머리가 좀 어지럽고 힘이 없어서 말하기도 힘들어.”나는 대답했다.“괜찮아. 다만 다리가 좀 아프고 피곤할 뿐이야.”최희연은 부드럽게 물었다.“왜?”“저택을 떠난 뒤에 걸어서 도시까지 왔어. 길엔 온통 눈이 쌓여 있었고 입은 옷이 너무 무거워서 더 춥고 피곤하네.”최희연은 웃으며 말했다.“그나저나 너 지금 입고 있는 그 전통 드레스 정말 예쁘다. 그런데 네 머리 위에 있는 흰 꽃장식 많이 망가진 것 같네.”눈밭에서 여러 번 넘어졌기 때문에 작은 흰 꽃장식은 이미 엉망이 된 상태였다.하지만 최현욱이 매번 그것을 주워 내 머리에 다시 꽂아 주었다.
나는 깜짝 놀란 얼굴로 뒤로 돌며 물었다.“나는 오빠가 여기로 올 줄 알았는데. 어떻게 내 뒤에 있어요?”밤하늘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돌아보니 석지훈은 평소에 자주 입던 검은색 정장을 벗어 던진 채 얇은 검은색 군복 스타일의 외투를 입고 있었다. 허리에는 검은색 버클 벨트를 둘러 약간 조여 맨 것 같았다.이 때문에 석지훈의 전체적인 실루엣은 더욱 길고 강인해 보이면서도 날렵한 느낌을 줬다.게다가 차가운 석지훈의 표정과 뒤로 깍지를 낀 손까지 몸 전체에서 엄격하고 단정한 분위기를 뿜어냈다.약간 흐트러진 앞머리는 그의 이미를 가리고 있어 살짝 부드러운 인상을 더해주었지만 지금의 그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나는 석지훈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재빨리 석지훈에게 달려가 품에 뛰어들었다.그리고 석지훈의 목을 꽉 껴안으며 외쳤다.“지훈 오빠.”“왜? 이제 나한테 화 안 나?”석지훈의 목소리는 어딘가 너그럽고 다정한 기색이 묻어 있었다.나는 석지훈의 어깨에 턱을 대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는 오빠에게 화난 게 아니에요. 그냥 나 자신한테 화가 났던 거예요.”석지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미안한 마음에 말했다.“미안해요. 분명 내 잘못인데 괜히 오빠에게 화풀이했어요.”석지훈은 한 손을 들어 늘 그랬던 것처럼 내 뒤통수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윤 비서 말로는 여자들이 가끔 그러는 건 정상이래.”석지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단 한 번도 나를 탓하지 않았다.하지만 석지훈은 서운한 적이 없었을까?석지훈도 분명 서운하고 힘든 적이 있었을 것이다.“미안해요, 지훈 오빠.”“다음번엔 이런 일 없도록 해.”석지훈은 손을 내 목덜미에 대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다시는 날 모른 척하지 마.”석지훈은 언제나 가벼운 말투로 말했지만 그의 말과 행동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은 엄청났다.석지훈이 언제나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지금까지 폭풍우 같은 인생을 헤쳐나온 남자이기 때문일까?석지훈의 눈빛은 항상
예를 들면 지금 최현욱은 나를 데리고 이 얼어붙은 설원을 벗어나고 있었다.대략 두세 시간을 더 걸었을까 최현욱은 지친 기색으로 나를 눈밭에 내려놓으며 투덜댔다.“너 진짜 무거워.”나는 고집스럽게 말했다.“나 진짜 50킬로도 안 돼.”나의 몸무게는 50킬로가 안 되긴 했지만 최현욱이 나를 업고 이렇게 오래 걸었으니 분명 힘들었을 것이다.나는 일어나며 말했다.“내가 조금 더 걸어볼게.”그러자 최현욱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그쳤다.“서둘러야 해. 우리 지금 떠난 지 네다섯 시간이나 됐어. 저들이 네가 도망친 걸 눈치챘을 거야. 빨리 도시로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 둘 다 붙잡힐 거라고.”최현욱의 말투는 상당히 긴박했다. 나는 얼른 앞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최현욱은 뒤에서 웃으며 쫓아왔다.“빨리 좀 가. 꾸물거리지 말고.”우리는 그렇게 거의 뛰는 수준으로 걸었다. 나는 30분도 채 못 가 기운이 빠졌지만 억지로 버티며 30분을 더 걸었다.그러다 결국 나머지 거리는 최현욱이 다시 나를 업고 걸었다.새벽 12시가 가까워졌을 때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나는 얼른 최현욱의 등에서 뛰어내려 그 불빛을 향해 달려갔다.최현욱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넘어지지 마.”“얼른 핸드폰부터 구해서 전화해야 해.”지금 최희연이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어 나는 마음이 초조했다.우리는 마침내 도시 안으로 들어왔다.도시는 번화했고 작은 상점들이 아직도 장사를 하고 있었다. 길가의 큰 가게들도 여전히 불을 밝히고 있었다.나는 놀란 얼굴로 최현욱에게 물었다.“다들 아직 문을 안 닫았네?”최현욱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아마 너를 위해 열어둔 걸지도 모르지.”당시 나는 방금 큰 저택 안의 사람들도 이 도시의 사람들도 전부 최현욱이 거액을 써서 매수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몰랐다.이유는 아주 간단했다.최현욱은 나를 알고 싶어 했다. 그것도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말이다.하지만 그 외국인은 석지훈에게 진짜 원한이 있었고 최현욱은 그 복수심을 교묘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