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무 말이 없자 고현성은 끝까지 계속 빤히 쳐다보았다.버스가 다음 역에 도착했을 때 나는 황급히 버스에서 내렸고 고현성은 더는 따라오지 않았다. 나는 택시를 타고 다시 아까 그곳으로 돌아가 차를 가지고 별장으로 돌아갔다.커다란 별장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나는 소파에 앉아 한참 동안 멍하니 있었다. 머릿속에 고현성이 했던 그 한마디가 계속 맴돌았다.“지혜한테 결혼식을 올려주기로 했어.”자세히 생각해보면 임지혜에게 결혼식을 빚진 건 사실이었다. 3년 전에 임지혜가 고현성을 포기했고 고현성도 임지혜를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였다.만약 임지혜가 6억 원을 받지 않고 운성시를 떠나지 않았더라도 고현성은 그녀와 헤어지려 했을 것이다.사랑 속에서 누가 옳고 누가 틀렸다고 할 수 있겠는가?성대한 결혼식을 3년 전에 임지혜에게 줬어야 했다. 나는 그저 우연히 기회가 생겨 그 자리를 차지했고 이젠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을 뿐이었다.내가 한창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최희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최희연은 몇 안 되는 나의 절친이었고 운성시에서 고양이 카페를 운영했다. 카페에 들어가자마자 고양이들이 여유롭게 걸어 다녔다. 그나저나 카페는 항상 적자 상태였고 지금까지 내가 투자한 덕에 겨우 살아남았다.나는 휴대전화를 귓가에 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최희연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옆에 음악 센터가 있잖아. 저녁에 피아노 공연이 있는데 미국에서 온 연주가래. 너 피아노 좋아하지? 지금 이리 와. 저녁에 같이 공연 보러 가자.”내가 좋아하는 피아노 공연은 단지 고현성이 연주하는 피아노였다.고개를 살짝 수그리자 테이블 위에 놓인 10억짜리 은행 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길거리를 거닐며 사랑을 사려 한 바람에 미친 사람 취급당했고 고현성에게 초라한 모습마저 보여주고 말았다.돈이 있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으니 차라리 최희연에게 카페 운영 자금으로 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최희연과 공연을 보기로 했다.“한 시간 정도면 도착해.”나는 방을
운성시에 눈이 며칠 동안 끊임없이 내린 바람에 도시 전체가 흰 눈으로 뒤덮였다. 우리 둘은 좁고 긴 골목에 마주하여 서 있었고 옅은 가로등 불빛이 그를 비춰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으며 마치 만화에서 나온 남자 같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살짝 놀라는가 싶더니 빤히 보면서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꼬마 아가씨, 어디 살아?”“연씨 별장...”고현성이 연씨 별장에 가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 허둥지둥 주소를 말했다. 그러자 고현성은 환하게 웃으면서 목도리를 풀어 나에게 둘러주었다. 그의 온기가 아직 남아있었다.고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자. 집에 데려다줄게.”‘웃을 때 참 예쁘네...’그림을 찢고 나온 듯한 얼굴이었고 또 무척이나 다정했다.나는 그의 옆에서 걸으면서 손을 살며시 잡았다. 고현성이 살짝 멈칫했지만 거절하지 않고 내 손을 더 꽉 잡고 집 쪽으로 걸어갔다.가는 길 내내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다. 그렇게 별장 문 앞에 도착해서야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현성 씨, 들어가서 차 한잔하고 갈래요?”고현성이 웃으면서 거절했다.“시간이 늦었어.”밤이 늦은 건 사실이었다. 나는 발끝을 들어 고현성의 옷에 소복이 쌓인 눈을 털어주었다.“그럼 다음에 봐요.”그는 약속하지도 않고 거절하지도 않았다. 순간 오늘 저녁의 모든 게 다 나의 착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어지면 이 사람은 임지혜의 신랑이 될 텐데.고현성은 임지혜에게 결혼식을 올려줘야 한다고 했었다. 그리고 난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사람이고.‘난 대체 뭘 기대하는 거야?’나는 어두운 얼굴로 별장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재빨리 방으로 들어와 불을 켜고 통유리 쪽으로 다가가 아래층의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변함없는 자세로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무심한 듯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나는 얼굴을 창문에 기댄 채 나지막하게 인사를 건넸다.‘잘 가요, 현성 씨. 다신 보지 말아요. 이번 생에 당신이 원하는 걸 다 이루길 바랄게요
나는 연애를 하고 싶었고 사랑받는 게 어떤 건지 느껴보고 싶었다. 설령 그게 진심이 아니더라도. 왜냐하면 나에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서 그런 속상한 일 같은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나는 실눈을 뜨고 웃으며 말했다.“당신이랑 상관없는 일이에요.”차를 몰고 가려는데 고현성이 갑자기 차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너무나도 위험한 행동에 나는 차를 멈추고 욕했다.“미쳤어요?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요!”고현성의 얼굴에는 두려움이라곤 없었고 나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냥 쫓아내려는데 그가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아직도 날 사랑해?”질문이면서도 긍정의 한마디였다.3개월 후면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된다는 사람이 지금 이런 소리를 했다. 자신이 함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따지고 보면 그에게 이런 기회를 준 것도 나였다. 나의 나약한 모습을 그에게 완전히 보여주고 말았다.‘굳이 탓하려면 확고한 내 사랑을 탓해야지. 내가 현성 씨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정도로 확고하니까.’“그래요. 사랑해요. 그래서 싫어요?”나는 웃으며 말했지만 홧김에 한 말인 것도 사실이었다. 고현성은 실눈을 뜬 채 운전에 집중하라고 했다.“연씨 별장으로 가.”“현성 씨는?”나의 질문에 그가 덤덤하게 대답했다.“나도 같이 가야지.”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됐어요. 난 현성 씨를 우리 집에 데려가고 싶지 않아요.”“그럼 고씨 별장으로 가.”나는 차를 운전하여 고씨 별장에 도착했다. 고현성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내 손목을 잡고 별장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누가 정리했는지 매우 깨끗했고 소파도 흰 천으로 뒤덮어놓은 게 사람 사는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고현성은 손목을 내려놓고 흰 천을 치웠다. 나는 소파에 앉았고 그는 주방으로 들어가 따뜻한 물 한 잔을 떠다 주었다.따뜻한 물을 들고 있는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오후 시간이라 창밖의 햇살이 나의 몸을 비춰 너무도 따뜻했다. 고현성은 아무
고현성이 나를 보면서 끈질기게 답을 원했다. 가끔 그가 왜 이러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혼까지 한 마당에 왜 이제 와서 걱정하는 척하는 건지...나는 그가 잡고 있던 손을 빼내고 최대한 진정하려 애를 썼다.“딱히 이유는 없어요. 그냥 애정 결핍이라 그런가 봐요. 그래서 돈을 줘서라도 사랑을 받고 싶은 거고. 어차피 이런 짓이 처음인 것도 아닌데요, 뭐.”잠시 후 나는 그의 눈을 빤히 보면서 말했다.“그때 연씨 가문으로 당신과의 결혼을 바꿨잖아요. 이젠 사랑을 바꾸는 거죠.”“그럼 나랑 연애하자.”나는 들고 있던 가방을 떨어뜨리면서 경악한 표정으로 물었다.“뭐라고요?”“너랑 연애하겠다고. 사랑하는 척, 아끼는 척하면서 행복을 느끼게 해줄게. 그리고 네 말에 거역하지도 않고 완벽한 남자 친구가 되어줄게.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그 한마디에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고현성은 다른 여자의 남편이었다. 내가 아무리 초라해도, 거리에서 아무 남자를 찾는 한이 있더라도 고현성과 연애하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이혼 전에 이미 기회를 주기도 했었다. 게다가 지금 그의 말투는 나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나에 대한 연민처럼 느껴졌다.나는 그를 뼛속까지 사랑했지만 끝내는 거절했다. 아무래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나 보다.나는 초라한 모습으로 고씨 별장에서 나왔다. 집으로 돌아온 후 줄곧 방 안에만 갇혀 있었고 고현성이 문자를 보내도 못 본 척 무시해버렸다.[왜 도망쳤어?]이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고현성이 사랑하는 여자는 임지혜였고 임지혜의 남편이었다. 만약 이혼 전에 나에게 이런 얘기를 했더라면 나는 아주 기뻐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다 끝난 마당에 그의 동정과 은혜는 받고 싶지 않았다.죽을 때까지 외로운 한이 있더라도 필요가 없었다.그 후 일주일 동안 나는 연씨 별장에만 틀어박혀 어디도 가지 않았다. 병이 점점 악화되어 힘없는 날이 더 많았고 한 번 침대에 누우면 하루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그렇게 흐리멍덩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
나와 최희연은 고현성을 만나기 전부터 친구였다. 하여 내가 고현성을 좋아하는 마음도 알고 있었고 모든 비밀번호가 고현성을 만난 그날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바로 2009년 12월 27일, 첫눈이 내리던 그날이었다.“수아야, 안색이 너무 창백해. 억지로 웃지 않아도 돼.”“그래? 날씨가 추워서 그런가?”나는 카페에서 최희연과 잠깐 얘기를 나눈 후 나왔다. 별장으로 돌아가 계속 틀어박혀 있으려던 그때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전화를 받고 물었다.“누구세요?”“고씨 가문 사모님 임지혜입니다.”내가 피식 웃었다.“아직 결혼하지 않았잖아요.”임지혜는 잠깐 멈칫하다가 집념을 버리지 않고 말했다.“알아요. 근데 수아 씨한테 알려주고 싶었어요. 내가 바로 고현성의 아내고 당신 때문에 고씨 가문 사모님의 자리를 3년이나 놓친 임지혜라고요. 연수아 씨, 난 현성이를 3년 기다렸고 당신을 3년 참았어요. 지금은 그때 잘못된 걸 바로잡았을 뿐이에요. 난 드디어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고현성의 아내가 되었어요.”고현성의 아내 자리가 남들의 존경의 받아야 한다는 이유가 돼서는 안 되었다. 그녀가 자기 자신을 아끼면 모를까.나는 딱히 관심 없는 말투로 말했다.“네.”그런데 임지혜가 말하다가 갑자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사실 난 수아 씨를 탓한 적이 없어요. 그때 수아 씨가 아니었더라도 다른 재벌 집 딸이 사모님이 되었을 테니까요.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수아 씨처럼 착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런 사람을 상대하느라 몇 년 동안 편히 살지도 못했을 거예요. 어찌 보면 수아 씨한테 내가 고마워해야 해요.”나는 차분하게 물었다.“그래요?”‘난 착한 게 아니라 싸우기 싫었을 뿐인데.’“네. 내가 잘못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현성이랑 오래전부터 결혼하고 싶었거든요.”잠깐 멈칫하다가 임지혜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이제 난 현성이의 아내 임지혜예요.”나는 싸늘하게 그녀에게 귀띔했다.“아직 결혼하지 않았잖아요. 아버님이 허락하지도
요즘은 운성시에 눈보다 비가 더 많이 내렸다. 휴대전화를 귓가에 대자 고현성의 원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아까 폭우가 쏟아져서 옷이 다 젖었는데 계속 문 열어주지 않을 거야?”말투에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운 속상함이 살짝 묻어있었다. 나는 시선을 거두고 물었다.“무슨 일로 왔어요?”“연수아, 내가 지금 네 남자 친구라는 거 잊은 건 아니지?”‘기억하고 있었구나...’“난 당신이 후회한 줄 알았어요.”내가 말했다.“며칠 동안 연락 안 해서?”나는 낮은 목소리로 그렇다고 했다. 말투에 속상함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이 바보야, 내가 말했잖아. 회사 일 처리해야 한다고. 앞으로 두 달 동안 회사에 급한 일이 없는 이상 쭉 네 옆에 있을 거야.”고현성은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다정하게 말했다.“무슨 일이 있더라도 널 옆에 데리고 다닐게.”그의 말에 나는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고현성이 나에게 이토록 다정하고 친절할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그에게 매달리기만 하는 여자라고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들었어?”내가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자 고현성이 물었다.“현성 씨.”“응?”“문 열어줄게요.”나는 전화를 끊은 후 안방에 뒀던 진통제를 숨겼다. 그리고 전에 바닥에 넘어지면서 생긴 흉터를 가리려고 메이크업도 했다.얼굴에 상처가 났을 때 손톱으로 세게 긁은 적이 있었다. 분풀이이자 고현성이 나에게 준 상처라는 걸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참 부질없는 짓이었다. 자신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됐었는데...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아래층으로 내려가 문을 열어주었다. 문을 열자마자 고현성은 손가락으로 이마에 딱밤을 때리면서 장난을 쳤다. 화들짝 놀란 나를 보며 고현성이 덤덤하게 웃었다.“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얼어 죽을 뻔했다고.”나는 아무 거짓말이나 했다.“화장실 다녀왔어요.”고현성이 나를 힐끗 보더니 갑자기 물었다.“방금 화장했어?”나는 무심코 부인했다.“아니요.”그런데 고현성이 끈질기게 캐물었다.“날 위해 일
고현성도 참 웃긴 남자였다. 단 두 달만 연애하기로 했고 또 두 달 후면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될 텐데 지금 물어봤자 의미가 있을까?그리고 두 달의 연애는 그저 연기에 불과했고 그가 나에게 베푸는 은혜와 보상이었다.나는 고현성의 목을 끌어안고 웃었다.“사랑하죠, 당연히. 현성 씨도 알잖아요. 연씨 가문 딸인 내가 고씨 가문에 시집간 건 현성 씨를 사랑해서라는 거.”예전이든 지금이든 나는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나의 말에 고현성은 피식 웃더니 품에 꼭 끌어안고 따뜻한 손으로 등을 어루만졌다.“수아야, 사랑해.”그 순간 나는 경악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한참이 지난 후 정신을 차렸다. 나와 연애할 때 사랑하는 척, 아끼는 척해주겠다고 했었고 거역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심지어 행복을 느끼게 해주겠다고 했었다.지금 그는 그때의 약속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진심으로 받아들일 수는 있어도 진심인지 물어봐서는 안 되었다. 왜냐하면 내 옆에 딱 두 달만 있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아는 고현성은 절대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아니었다.임지혜와 결혼하기로 약속한 이상 무조건 그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마치 지금 날 싫어하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처럼.나는 머리를 그의 가슴팍에 기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현성이 나를 꽉 끌어안고 물었다.“넌 언제부터 날 사랑했어?”내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아주 오래전에. 하도 오래전이라 기억도 잘 안 나요.”...저녁에 고현성은 우리 집에서 잤다. 잠자리를 해선 안 된다는 나의 조건 때문에 그냥 품에 안기만 했다. 고현성이 내 침대에서 밤을 보낸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나는 일찍 일어나서 욕실로 들어갔다. 고현성이 깨기 전에 진통제를 먹었고 화장도 했다. 옅은 화장이었지만 창백한 안색은 가릴 수 있었다.화장을 마치자마자 고현성이 잠에서 깼다. 그는 비몽사몽 나를 보다가 한참 후에 말했다.“나 어젯밤에 여기서 잤어?”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
고현성이 밖에서 2분 정도 전화를 받고 들어왔다. 그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고 달리 방법이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내가 가볍게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고현성이 한숨을 내쉬었다.“이따가 나가야 하는데 너도 같이 갈래?”나는 알면서도 물었다.“임지혜 씨 때문이에요?”고현성이 두 눈을 감았다.“교통사고 당해서 다쳤대.”나는 계속하여 인내심 있게 물었다.“그래서 지금 보살펴주러 가려고요?”고현성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떠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떠나기 전 나는 그에게 귀띔했다.“우리 전에 했던 약속 기억해요? 연애하는 동안에는 임지혜 씨를 만나선 안 된다고 했었어요.”고현성이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기억해. 그래서...”‘내 의견을 물으려고? 뭘 믿고 내가 보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현성 씨, 지금 가면 이 게임 중지할 겁니다.”나는 영화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현성 씨가 가겠다고 하면 막지는 않을게요. 가면 약속을 어긴 거로 생각하겠어요. 현성 씨, 사실 난 현성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해심 많은 여자가 아니에요.”고현성은 날 묵묵히 바라보다가 결국 나가버렸다. 창문 앞에 서서 그의 뒷모습을 내려다보았는데 아주 단호했다.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침대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초저녁쯤 고현성의 어머니가 밥 먹으러 내려오라고 하자 나는 옷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캐리어를 끌면서 거실로 내려갔다. 마당에 눈이 소복이 쌓이기 시작했다.고현성의 어머니는 나를 보고 다정하게 물었다.“가려고?”“네. 비행기 시간이 곧 돼서요. 그동안 실례 많았습니다.”“실례는 무슨. 내 며느리인데 뭘 그런 예의를 차리고 그래.”“어머님, 저랑 현성 씨 이혼한 지 좀 됐어요.”고현성의 어머니가 아무 말이 없자 내가 웃으며 물었다.“눈사람 만들어도 돼요?”“당연하지. 내가 도와줄까?”“괜찮아요. 다 만들면 갈게요.”나는 눈이 두껍게 쌓인 곳을 찾아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릴 적에 부모님과 만들어본 적이 있어 그리
나는 그들 사이의 일이 이렇게나 복잡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정희가 한평생 그 남자를 원망해도 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어떻게 보아도 아버지가 먼저 잘못한 게 틀림없었다.그리고 어머니는 그저 그런 아버지에게 당한 것뿐이었다.나는 갑자기 어머니와 이정희가 모두 불쌍한 여성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불쌍한 건 나의 친아버지였다.친아버지는 병에 시달리면서도 석씨 가문을 위해 이곳에서 일생을 갇혀 지냈다. 그런 굳건한 의지는 결코 누구나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그래서 나는 더욱 세 사람 중 누가 맞고 누가 틀렸는지를 구분할 수 없었다.세 사람 모두 잘못한 것 같기도 하고 모두 잘못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나는 손에 들고 있던 편지를 석지훈에게 주고 석지훈이 다 읽기를 기다렸다가 그를 밀실로 데리고 갔다. 그 엄청난 비밀은 그렇게 순식간에 세상에 까발려졌고 비밀을 마주한 석지훈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서렸다.“밀실의 비밀번호는 오빠 어머니 생신이에요.”석지훈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너희 아버지께서 나한테 이 밀실에 대해서 말해준 적이 있는데 비밀번호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셨어. 그리고 이 밀실에 자신의 지나온 삶이 숨겨져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드셨지만 열어볼 생각은 하지 않으셨대. 밀실의 비밀번호를 잊어버린 건 어쩌면 하늘의 뜻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서 그냥 밀실을 그대로 놔두려고 했대. 너희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에 내 어머니께서 엄청 많은 비밀번호를 시도해보고 그 분야의 전문가도 찾았지만 모두 무용지물이었어. 오로지 본인의 생일만 시도를 안 해본 거지. 그러고 나서 홧김에 이곳을 없애려고 한 걸 내가 말렸어. 너희 아버지께서도 일생을 바쳐 지켜온 곳인데 이렇게 없어지길 원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만약 내가 그날 어머니를 말리지 않았다면 일이 이 지경까지 되진 않았을 거야!”만약 석지훈이 자신의 어머니를 말리지 않았더라면 이정희도 이 비밀을 알게 됐을 것이고 어쩌면 아버지를 이해할 수도
남자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응.”이정희는 남자의 딱딱한 대답에 투덜거렸다.“오빠 진짜 차가워.”남자는 다시 애정이 어린 말투로 이정희를 달랬다.“그런 말 하지 마. 너도 알잖아, 나 꿀 발린 말 잘 못 하는 거. 그래도 난 한 번도 너한테 무관심했던 적은 없어.”이정희는 다시 웃으며 말했다.“알지 그럼. 오빠가 나랑 결혼해줄 거란 것도 잘 알고.”“맞아. 넌 미래에 정식으로 내 아내가 될 사람이야.”“그럼 혹시 오빠도 오빠 아버지처럼 많은 첩을 둘 거야? 만약 그런 거라면 난 오빠랑 결혼하지 않을래!”남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니, 난 아버지와 달라. 난 내가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고 넌 내 인생의 전부야. 유이야, 우린 어린 시절부터 소꿉친구였고 알고 지낸 지도 오래됐잖아. 네가 날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내가 어떻게 감히 널 속상하게 만들겠어.”하지만 그 남자는 말과 달리 이정희를 평생 속상하게 했고 이정희가 평생 집착하게 했으며 이정희를 평생 차갑게 대했다.그렇게 내 아버지는 결국 자신의 아버지와 똑같은 길을 가게 되었다.이윽고 이정희의 노랫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극이 끝나갈 때쯤 이정희가 웃음소리가 작게 들려왔다.“난 오빠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 거니까 오빠도 날 실망하게 하지 마. 그렇지 않으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오빠가 나중에 날 배신하면 난 그 두 배로 오빠한테 갚아줄 거야!”그리고 이정희는 정말 그렇게 했다.자신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과 복잡한 관계도 스스럼없이 가졌고 결국엔 석지훈까지 낳았다.나는 황급히 밀실에서 나와 로비로 갔다. 석지훈은 내 얼굴에 두려움이 가득 서린 것을 보고는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일 있었어?”관을 아직 닫지 않았기에 나는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이정희의 얼굴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린 시절 이정희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무대 위에서 사랑하는 남자에게 열심히 황매극을 불러주던 천진한
그 편지는 매우 짧았다.「올해는 너를 사랑한 지 12년째 되는 날이자 너와 결혼한 지 3년째야. 네가 내 아내라서 행운이고 내가 너의 남편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야. 하지만 나는 널 평생 사랑해줄 수 없을 것 같아!유이야, 내 기억력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어. 의사가 말하길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 주변의 사람들을 잊어버릴 거래. 그게 당장 오늘 밤이 될 수도, 내일이 될 수도, 어쩌면 내가 이 밀실에서 나가는 순간일 수도 있어.난 내가 너를 잊을까 봐 너무 무서워.난 내가 피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안타깝게도 운명을 피해가긴 무리였나 봐.유이야, 내가 너를 잊은 후에도 다시는 너를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고 가족들까지 잊어버리는 날이 오더라도 너를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내가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을 거야! 내 나약함 때문에 석씨 가문의 가주로서의 사명과 책임에 금이 가게 할 수는 없거든.정말 미안해, 유이야.언제가 됐든 기억을 잃는 날이 온다면 그땐 내가 먼저 너를 알아볼게.믿어줘, 이번 생에 절대 널 실망하게 하는 일은 없어.」나는 또 다른 편지 봉투를 열어 보았고 역시나 모두 이정희에 관한 것이었다. 제일 처음 보았던 편지가 시간상으로 제일 마지막 편지였는데 마침 이정희와 결혼한 지 3년째 되던 해였다. 그 말인즉슨, 아버지는 30여 년 동안 이 밀실을 드나들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절대 석만호가 말한 27년이 다가 아니었다.현정우는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말했다.“원래 가주님을 대신해서 유품을 정리할 때 가주님의 베개 옆에 두꺼운 일기장이 있는 걸 봤습니다. 일기장에 적힌 이름은 안혜인이었는데 아마도 원래 가주님과 안혜인 씨, 그러니까 가주님 어머니 사이의 사소한 일들을 적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일기장은 후에 석 대표님께서 핀란드로 가져갔습니다.”이 편지들은 온통 아버지가 이정희와 보낸 나날들에 대한 것이었다.오늘 무엇을 했는지와 같은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도 빠짐없이 적어두었다. 나는 시간을 들여 모든
“네, 사모님은 돌아가실 때까지도 모르셨을 겁니다.”그렇다. 그녀는 이미 죽었다.갑자기 마음속에 의문이 가득 차올랐다.나는 급히 휴대폰을 들어 석만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의 번호를 삭제했던 것 같았다.나는 현정우의 휴대폰으로 석만호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나는 그에게 물었다.“이 벽의 비밀번호가 왜 이정희의 생일인 거예요?”석만호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물었다.“회장님 방에 있는 밀실 말씀이십니까?”나는 차분하게 말했다.“맞아요. 비밀번호는 이정희의 생일이었어요.”“저는 모릅니다. 회장님께서 27년 동안 그 밀실을 열지 않으셨거든요.”내 친아버지는 27년 동안 이 밀실을 열지 않으셨다...27년...그때는 내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였고 어머니를 막 만난 시기였다.나는 직감적으로 무슨 큰 비밀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나는 문을 열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고 현정우는 내 뒤를 따랐다. 들어가자마자 방 안 가득 코스모스가 눈에 들어왔다. 표본으로 만들어진 말린 꽃으로 수십 년 동안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밀실 곳곳에는 사진들이 놓여 있었다. 사진 속에는 모두 같은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근대 시대의 화장을 하고 있었고 흑백사진이었지만 젊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옛 시대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뚜렷한 윤곽을 가진 그녀는 분명 이정희였다.아버지의 밀실에는 이정희의 사진으로 가득 차 있었다.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나는 엄마의 인생이 한낱 웃음거리가 아니었을까 두려웠다.나는 밀실을 한 바퀴 돌았다. 안에 있는 물건들은 모두 옛날 물건이었지만 이정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현정우는 책상 위에서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편지 봉투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그는 나에게 편지를 건네준 후 서랍을 열었다.서랍 안에는 수많은 편지가 들어 있었다.나는 편지 봉투의 먼지를 털어냈다. 현정우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진실은 더욱 잔혹할지도 몰라요.”잔
담현아는 황급히 부인했다.“말도 안 돼요. 난 아직 어린데 무슨 애를 가져요. 그리고 아저씨도 아직 우리 집에 정식으로 인사드린 적 없어요. 연말쯤에나 생각해 보려고요.”“임신한 줄 알았잖아.”담현아는 재빨리 대답했다.“아니라니까요.”그녀는 윤민이를 안고 정원을 나서려고 했다. 내가 조심하라고 당부하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석씨 가문 전체가 언니 거고 지훈 오빠도 여기에 있는데 누가 우리를 건드리겠어요.”조심하라는 말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너무 많은 일을 겪었기에 특히 아이들 일에는 절대 방심할 수 없었다.담현아는 윤민이를 안고 정원을 나섰다.나는 윤아를 비서에게 넘겨주었고 그는 담현아를 따라갔다.두 아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정원에는 다시 나와 현정우만 남았다.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생전에 쓰시던 방에 같이 가자고 했다.가는 길에 현정우는 휴대폰으로 날씨 예보를 확인하고는 말했다.“가주님, 곧 비가 올 것 같습니다. 내일 저녁이나 되어야 그칠 것 같네요.”“음, 다행히 봄비는 보슬보슬 내리니까.”나는 아버지 방문을 열었다. 방안은 음침했다.이곳에 오는 것은 두 번째였지만 여전히 으스스했다.현정우는 방의 불을 켰다. 밝은 불이 아니라 어두운 불이었다. 현정우는 오랫동안 석씨 가문 사람이었기에 내 아버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설명했다.“저는 훈련을 받고 여러 차례 선발 과정을 거친 후 처음부터 이 정원을 지키는 일을 했어요. 근데 밖에 나갈 기회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석 회장님은 1년 내내 매일 방 안에만 계셨거든요. 가장 멀리 가본 곳이라고 해 봐야 새해에 가족들과 거실에서 식사하는 정도였어요. 그래서 석씨 가문 사람들은 회장님을 두고 방에 무슨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나 보다 하고 수군거렸었지요. 하지만 회장님이 돌아가신 후 사모님이 이 방을 정리했고 석 대표님도 함께 계셨는데 아무런 비밀도 없었습니다. 다만, 작은 밀실이 하나 있는데 아무도 열 수 없었죠. 부수지 않는 이상은요. 사모님은 부수려고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아직 이정희에게 원망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내가 두 아이를 데리고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하려는 것은 석지훈을 위해서였다.나는 그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지길 바랐다.강해온이 아이들을 데리고 석 씨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그런데 그와 함께 담현아도 와 있었다. 나는 놀라서 그녀에게 물었다.“너 여긴 어떻게 왔어? 아니, 너 내 비서랑 어떻게 아는 사이야?”“지훈 오빠가 나보고 언니랑 같이 있으라고 하던데요.”이 시간에 석지훈이 담현아를 나에게 보내다니...나는 담현아에게 의아하게 물었다.“이해가 안 돼. 내일 아침이면 우린 떠날 건데, 너 괜히 왔다 가는 거잖아?”담현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나도 이해가 안 돼요. 근데 연락은 아침에 받았는데 내가 일이 있어서 늦어졌어요. 그러다가 저녁에 이쪽으로 오는 길에 고속도로에서 강 비서님을 만났거든요. 그냥 인사만 하려고 했는데, 목적지가 같더라고요. 아, 맞다! 윤민이가 방금 나보고 이모라고 불렀어요!”나는 그녀의 품에서 윤민이를 받아안으며 물었다.“네가 가르쳤어?”“강 비서님이 가르쳤어요. 이 녀석 너무 똑똑해요! 볼수록 너무 사랑스러워요. 근데 수아 언니, 나 윤아랑 윤민이 양엄마 하면 안 될까요?”나는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너 아직 한참 어리잖아.”내가 거절하자 담현아는 시무룩하게 말했다.“사람 무시하지 말아요. 나도 결혼한 성인이거든요.”“알았어, 알았어. 성인인 거 인정할게.”내가 쉽게 허락하지 않자 담현아는 더 이상 조르지 않고 말했다.“알았어요. 그럼 양엄마는 안 할 테니까 그냥 이모 할게요.”담현아는 아직 어려서 아이들의 양엄마가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담현아와 함께 정원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석지훈이 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아이들을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누가 데려왔어?”내가 설명했다.“내가 강 비서에게 부탁했어요.”석지훈은 담현아의 품에서 윤아를 안아 들었다. 윤아는 그의 품에서 얌
수아야. 넌 참 가여운 사람이야.난 도대체 내가 왜 불쌍하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하지만 지금은 그 이유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석지훈을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었다. 나는 그의 허리를 꼭 껴안고 부드럽게 말했다.“오빠, 내가 어떻게 오빠에게 차갑게 대할 수 있겠어요? 난 그냥...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오빠가 날 원망할까 봐 무서웠고요.”석지훈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나는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추고 단호하고 따뜻하게 말했다.“난 오빠를 좋아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생에도 다음 생에도 오빠를 사랑하고 절대 떠나지 않을 거예요.”나는 고현성과 사귈 때 키스를 거의 하지 않았고 석지훈과도 자제하는 편이었다.아마도 장례식 중이라 그런지 석지훈은 나를 놓아준 후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지 않았다. 그저 나를 품에 안고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현정우의 말대로, 남자는 그저 따뜻함을 원하는 존재인 것 같다. 따뜻함을 충분히 주면 만족하는 것 같았다.지금의 석지훈처럼 말이다.그는 계속 내 뺨에 자신의 뺨을 부비며 애교를 부렸다.꼭 어린아이 같았다.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행동이었다.그는 내가 아직도 그 자세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일어나 나를 눕히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윤아야, 왜 나를 안 불렀어?”나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깨울까 봐...”내 말을 듣자 석지훈의 표정이 누그러졌다.“다음에는 그러지 마.”그는 손을 들어 내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내일 아침에 어머니 장례식이 끝나면 너랑 같이 운성에 갈 거야. 운성에서 며칠 있다가 아이들과 함께 핀란드로 가자.”나는 놀라서 물었다.“나랑 아이들을 핀란드에 데려간다고요?”석지훈은 검은색 셔츠 하나만 입고 있었다. 그는 창밖의 달빛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내가 말했잖아. 앞으로 널 내 세상으로 데려가겠다고. 윤아야, 더 이상 너와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 널 내 곁에 두고 싶어. 우리 핀란드와 운성을 오가며
점심에 차를 너무 많이 마셨던 탓에 밥도 못 먹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배고파요.”석지훈은 짧게 응수하고는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문가에 서서 무덤덤한 눈빛으로 천장의 하얀 등을 바라보았다. 나는 그가 속으로 굉장히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힘들어도 모든 고통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나에게조차 마음을 열지 않았다.특히 그의 어머니가 나 때문에...나는 그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현정우가 밥을 가져왔다. 석지훈은 많이 먹지 않았고 나도 입맛이 없어서 많이 먹지 못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석지훈은 다시 거실로 돌아갔다. 그동안 그는 나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나는 침대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녘에 석지훈을 찾아갔다. 그는 이미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좀 쉬라고 권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나중에.”아침부터 하루 종일 석지훈은 계속 바쁘게 일했고 석나은도 그를 따라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나는 뭘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손 놓고 있었었다. 특히 열심히 일하는 석나은과 비교되니 아주 한심해 보였다.나는 힘없이 정원으로 돌아와 문턱에 앉았다. 현정우도 내 옆에 앉았고 우리 둘 다 하는 일 없이 앉아 있는 꼴이었다.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물었다.“나 진짜 쓸모없는 것 같아요.”이럴 때 석지훈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니까.위로조차 해 주지 못했다.현정우는 대답했다.“지금 가주님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최선입니다. 어쨌든 관에 누워 계신 분이... 가주께서는 그냥 여기서 석 대표님을 기다리세요. 지쳐서 방에 돌아왔을 때 누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가주님, 남자는 많은 걸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작은 온기면 충분해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그의 마지막 말에는 어딘가 모르게 쓸쓸함이 묻어났다.나는 의아해서 물었다.“요즘 왜 이렇게 감성적이에요?”현정우: “...”내 말에 현정우는 나를 상대하기 싫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네가 지훈 씨라고 부르면 멀게 느껴져.”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시큰하게 아파왔다.석지훈이 언제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였던가?자신의 슬픔을 이렇게 드러낼 정도로 약해지다니. 순간 마음속 죄책감이 더욱 깊어졌다.나는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눈시울을 붉히며 사과했다.“죄송해요. 다 저 때문에... 희연이가...”그녀는 내 말을 듣고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비록 그녀가 죽였다고 하지만 내가 죽인 거나 다름없었다. 단지 석지훈한테 죄책감이 좀 덜할 뿐이었다.그는 다시 말했다.“넌 잘못 없어.”석지훈은 항상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에게 죄책감을 느꼈다.난 차라리 그가 날 원망하길 바랐다.적어도 화라도 냈으면 좋을 것 같았다.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나는 어쩔 줄 몰라 말했다.“오빠, 내가 같이 있어 줄게요.”오늘 밤 나는 그와 함께 있어주기로 했다.나는 몸이 안 좋아서 후반야쯤 되니 힘들었고 결국 석지훈 어깨에 기대 잠들었다.나는 또 꿈을 꿨다.꿈에는 엄마만 나왔다.엄마는 나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나는 나지막이 불렀다.“엄마.”“수아야, 넌 참 가엾구나.”나는 놀라서 물었다.“엄마,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사랑하는 남자, 애들 둘, 부모님, 친구, 돈, 권력... 다 있는데 내가 왜 가엽다는 거지?“수아야, 넌 가여운 사람이야.”엄마는 왜 날 가엽다고 하는 걸까?나는 다급하게 물었다.“엄마, 무슨 말이에요?”엄마는 대답 없이 꿈속에서 점점 사라져 갔다. 나는 놀라 눈을 뜨고 바닥에 엎드린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런 내 모습에 석지훈은 날 안아줬다.“왜 그래?”“오빠, 나 악몽을 꿨어요.”나는 그를 오빠라고 불렀다.나는 엄마의 이 꿈을 악몽이라고 했다.요즘 들어 자꾸 엄마 꿈을 꾼다.지난번에는 나에게 비밀을 알려주겠다고 했고 이번엔 내가 가엽다고 했다.왜 이런 꿈을 꿀까?뭔가 징조인가?그런 생각을 하니 문득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