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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임지혜는 나를 보더니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면서 물건을 집어 던졌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진짜 내가 한 짓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본 고현성이 다급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고현성의 가슴팍은 따뜻해서 늘 상대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임지혜도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고현성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그리고 내 남편은 임지혜를 다독이느라 여념이 없었다.

“괜찮아. 내가 있는 한 절대 너한테 무슨 짓 하지 못해.”

고현성의 다정함은 임지혜만의 것이었다. 나에게 말할 땐 말투가 싸늘하게 바뀌었다.

“병원에는 왜 왔어? 당장 집에 가지 못해?”

임지혜의 앞에서 그는 늘 나를 집에 돌려보냈다.

나는 시선을 거두었고 고현성이 임지혜에게 다정하게 대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임지혜는 고현성을 믿고 뜨거운 물을 나의 얼굴에 확 뿌렸다. 나는 고통스럽게 소리를 지르면서 뒷걸음질 치다가 뭔가에 부딪힌 바람에 넘어지려 했다. 그 순간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현성 씨.”

고현성은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임지혜를 째려보고는 나를 응급실로 데려갔다. 정교하게 한 메이크업이 번지면서 한쪽 얼굴의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점심에 넘어졌을 때 생긴 상처였고 손톱으로 긁으면서 더 심해졌다.

고현성은 거즈와 알코올을 가져와 말없이 소독해주었다. 너무도 아팠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그가 나에게 건네는 잠깐의 따뜻함을 만끽했다.

검은 머리도 다 젖고 말았다. 나는 고현성의 길고 하얀 손가락을 내려다보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고현성 씨.”

고현성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나는 욕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내가 연씨 가문을 현성 씨한테 주고 이혼도 하겠다고 하면 나랑 연애해볼 생각 있어요?”

고현성이 움직임을 멈추고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물었다.

“어제 지혜가 귀국한 다음부터 계속 이상했어. 대체 뭐 하자는 거야?”

고현성은 나에게 인내심이 별로 없다고 얘기했었다. 잔뜩 찌푸린 미간만 봐도 지금 짜증이 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그의 미간을 어루만지면서 물었다.

“정말 싫어요?”

나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나지막했고 또 비굴했다. 처음 만져본 그의 미간이었다. 고현성이 갑자기 나의 손목을 잡더니 매력적이면서도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다른 사람과 다 연애할 수 있어. 설령 상대가 바보라고 해도. 근데 너랑은 절대 안 하니까 포기해.”

나는 재빨리 손을 거두고 옆으로 내려놓았다. 마음속의 씁쓸함과 속상함이 삽시간에 커지면서 더는 참고 싶지 않았다.

고현성은 계속하여 집중해서 약을 발라주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웃으면서 물었다.

“현성 씨, 난 뭐 아프지 않은 줄 알아요?”

그가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뭐?”

나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았다.

“난 아프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억지 부리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계속 괴롭힌 거 맞죠? 근데 있잖아요, 현성 씨. 당신이랑 결혼했을 때 난 고작 20살이었어요. 아직 남의 무시와 냉대를 견딜 수 없는 나이였다고요. 게다가 나한테 그렇게 대하는 사람이 내가 가장 의지해야 하는 남편이에요. 사실 난 현성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강하지 않아요.”

고현성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내가 그의 예쁜 눈매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

“왜 갑자기... 연애하고 싶다는 건데?”

고승철이 도착할 시간이 다 되자 나는 이 화제를 끝내려고 말머리를 돌렸다.

“현성 씨, 우리 이혼해요. 연씨 가문의 모든 걸 다 현성 씨한테 줄게요.”

고현성이 갑자기 손에 힘을 가하자 나는 아픈 나머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하지만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젠 이런 삶이 지겨워졌어요. 현성 씨 임지혜 씨랑 결혼하고 싶어 했잖아요.”

고현성은 아무 말이 없었고 잘생긴 얼굴이 한없이 어두워졌다. 나는 가방에서 이혼 합의서를 꺼냈다.

“여기에 사인만 하면 현성 씨는 자유예요.”

이대로 포기하기 싫었지만 꽉 잡고 있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리고 나에게 줬던 상처들을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고현성은 이혼 합의서를 열심히 훑어보다가 덤덤하게 물었다.

“진짜 연씨 가문도 버리려고?”

“난 10억 원만 챙기고 나머지는 다 현성 씨한테 줄게요.”

고현성은 아무 말 없이 이혼 합의서를 쥐고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펜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는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사인했다.

‘사인했네... 진작 나랑 이혼하고 싶었구나.’

이혼 합의서 하나로 나와 고현성의 관계는 끝이 나고 말았다.

나는 이혼 합의서를 받고 억지 미소를 쥐어짰다.

“변호사한테 나머지는 처리하라고 할게요. 며칠 후면 절차가 마무리될 거예요. 선양 그룹 지분도 몇 달 사이에 다 양도할게요.”

‘남은 시간 동안 될 대로 되라고 하지 뭐.’

나는 갑자기 온몸이 홀가분해지면서 얼굴의 상처도 아프지 않은 것 같았다. 드디어 미련 없이 그를 놓아주었고 그에게 자유를 주었다.

지금쯤이면 고승철도 도착했을 것이다. 나와 고현성은 임지혜의 병실로 걸어갔다.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임지혜에게 따져 묻는 고승철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 남자들 네가 찾은 거 아니었어?”

줄곧 고승철을 두려워했던 터라 임지혜의 목소리가 다 떨렸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전 그런 적 없어요.”

“네가 계좌 이체한 기록까지 있는데도 발뺌해? 임지혜, 감히 내 며느리한테 덮어씌우려고? 꿈 깨! 절대 널 우리 집안에 들이는 일은 없을 거야.”

나는 고개를 돌려 고현성을 쳐다보았다. 전혀 흔들림 없는 기색을 보니 아무래도 내가 괜한 생각을 한 듯싶었다. 고현성은 똑똑한 사람이라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듣지 않고 직접 알아봐도 다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임지혜를 까발리지 않았고 심지어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녀를 위로했다. 임지혜가 무슨 짓을 해도 다 용서하고 넘어갔을 뿐인데 나는 어리석게도 내 결백을 밝히려 했으니... 심지어 고현성의 아버지까지 동원했다.

그 생각에 나는 황급히 돌아섰다. 그런데 병원 문 앞까지 나오자마자 뭔가 이상한 느낌에 코를 어루만졌다.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조용한 밤하늘에는 하얀 눈꽃이 계속 날렸다. 손을 내밀어 눈꽃을 받던 그때 나는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두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눈으로 뒤덮인 계단에 털썩 넘어지고 말았다.

그 순간 그때의 고현성이 눈앞을 스쳤다. 그는 다정하게 나를 부르면서 물었다.

“꼬마 아가씨, 이 늦은 시간에 아직도 집에 안 가고 여기서 뭐 해?”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웃었다.

“선생님이 연주하는 피아노 듣고 싶어서요. ‘바람이 사는 거리’를 연주해줄 수 있어요?”

“알았어. 내일 수업에 들려줄게.”

그해 나는 교실로 들어가서 고현성의 연주곡을 들을 용기가 없어 교실 밖에 쪼그리고 앉아 감상했다. 흰 벽과 파란 유리 창문 아래에서 나는 방황하며 울었다.

고현성을 좋아한다는 건 참 쉬운 일이었다.

...

계단에 넘어진 나는 아직 의식을 완전히 잃지 않았다. 그때 그 따뜻했던 고현성이 보이는 것 같았고 날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연수아, 정신 차려. 조금만 버텨!”

그리고 또 서글픈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고현성은 나에게 거의 애걸복걸했다.

“너만 괜찮아지면... 연애할게. 평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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