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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고현성이 살짝 멈칫했다.

“또 무슨 수작이야?”

창밖에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의 23살 생일까지 두 달도 남지 않았다. 그날은 섣달 그믐날인데 그때까지 내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매끈한 배를 어루만졌다.

“내가 현성 씨 좋아하는 거 알잖아요. 나에 대한 모든 편견을 내려놓고 딱 3개월만 연애해요, 우리.”

고현성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꿈도 꾸지 마.”

휴대전화 너머로 온기라곤 전혀 없는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방 안에 가득한 외로움이 날 덮치는 것 같았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심장이 저릿할 정도로 아팠다.

나는 울고 있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

“현성 씨, 나랑 이혼하고 싶다면서요? 그럼 이렇게 해요. 나랑 3개월 연애하는 동안에 예뻐해 주고 챙겨줘요. 설령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날 사랑하는 척해요. 만약 3개월 버티면 이혼해 줄게요. 그리고 연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다 현성 씨한테 줄게요. 생각해봐요. 3개월만 버티면 나랑 이혼할 수 있고 수십조 원에 달하는 재산을 손에 넣을 수 있어요. 그리고 당당하게 임지혜 씨와 결혼할 수도 있고요. 현성 씨한테는 전혀 밑지는 장사가 아니에요.”

고현성이 덤덤하게 물었다.

“너랑 같이 3개월 동안 연기하라고?”

3개월 동안 관중은 나 하나뿐이었다. 결국에는 나 자신을 기만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말했다.

“네. 나랑 연애해요.”

“허. 역겨운 소리 좀 그만할래?”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고현성은 내가 보는 앞에서 검은색 마이바흐를 몰고 별장을 나가버렸다.

...

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 머리가 윙 했고 목이 너무 말라 침을 삼킬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어젯밤에 너무 많이 운 모양이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의사의 말대로 약을 먹은 다음 준비한 후 회사로 출근했다.

고현성의 아내인 것 외에 나는 선양 그룹의 대표였다. 한창 회사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데 고씨 가문 진화 그룹의 회장 고승철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고승철이 어두운 목소리로 진지하게 당부했다.

“임지혜가 미국에서 돌아온 거 알아? 요즘 현성이 단속 잘해. 나머지는 나한테 맡기고.”

그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언제 돌아왔어요?”

고승철이 대답했다.

“어제.”

어제 고현성이 임지혜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심지어 이혼으로 유혹해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가 임지혜의 앞에서 나와 애정행각을 하기 싫어서였다.

고현성은 그가 날 사랑한다고 임지혜가 오해하는 게 싫었던 것이었다.

그 생각에 나는 가슴이 칼로 도려내듯 아팠다.

‘잡을 수 없다면 그냥 시원하게 놓아주자.’

나는 웃으면서 애써 밝은 척했다.

“아버님, 저 현성 씨랑 이혼하고 싶어요.”

고승철이 멈칫하다가 물었다.

“뭐라고?”

“현성 씨 절 사랑하지 않아요. 저랑 결혼한 후로 아버님과의 관계도 나빠졌잖아요. 저랑 이혼하면 관계가 다시 좋아질 거에요.”

고승철은 절대 우리의 이혼을 동의할 리가 없었다. 다만...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주식 양도 계약서를 보면서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선양 그룹 주식 전부 다 현성 씨한테 양도할게요.”

고승철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임지혜가 귀국하자마자 사모님 자리를 내놓는 것도 모자라 선양 그룹 주식까지 전부 다 우리한테 준다고? 넌 욕심도 없어?”

‘욕심?’

나는 촉촉해진 눈가를 닦으면서 씁쓸한 마음을 삼켰다.

“그때 우리 연씨 가문과 정략 결혼하려던 가문이 수도 없이 많았어요. 내가 고씨 가문을 선택한 게 무엇 때문일 것 같아요?”

그러고는 나 자신을 비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아버님, 처음부터 끝까지 고씨 가문이 우릴 필요로 했었고 전 그저 그 사람만 필요했을 뿐이에요.”

고승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전화를 끊은 후 주식 양도 계약서에 내 이름을 사인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연씨 가문에는 나 혼자만 남았다. 이젠 나마저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연씨 가문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은 고현성뿐이었다.

사실 고현성도 능력이 뛰어났다. 3년 전 권력이 없어서 그가 사랑했던 여자를 지키지 못한 것 외에 사업할 때는 수단이 악랄했고 무슨 일을 처리하든 항상 과감했다. 그리고 상대가 두려움에 떨 정도로 강했다.

3년 전 권력이 없으면 얼마나 힘든지 뼈저리게 느낀 후에는 권력을 쌓기 시작했다. 하여 지금의 고씨 가문은 연씨 가문을 집어삼키기에 충분했다.

비록 양측 모두 손해가 크겠지만 고현성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고승철이 자리에서 물러날 때를, 임지혜가 귀국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이젠 모든 준비를 마쳤고 연씨 가문이 그의 계획 안에 있었다. 고현성이 망가뜨리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차라리 그에게 주는 게 나았다. 어차피 3개월 후면 연씨 가문을 물려받을 사람이 없으니까.

주식 양도 계약서에 사인한 후 나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유언장에는 이 한마디뿐이었다.

[현성 씨, 이번 생에 이루고 싶은 거 다 이루길 바랄게요.]

나는 서류를 들고 진규만 변호사를 찾아갔다. 그는 아버지가 생전에 고용했던 변호사였다.

진규만은 놀란 눈으로 유언장을 훑어보았다. 그 모습에 내가 덤덤하게 웃었다.

“제가 떠난 후에 이걸 다 현성 씨한테 주세요. 저의 묘 앞에서 피아노곡을 한 곡 연주해줬으면 좋겠네요.”

진규만의 두 눈에 슬픔이 가득했다.

“대표님, 어떤 곡을 좋아하세요?”

나는 아무 곡이나 말했다.

“바람이 사는 거리.”

고현성을 처음 만난 그해에 그가 연주한 첫 번째 피아노곡이 바로 ‘바람이 사는 거리’였다.

이 곡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나에게 들려준 마지막 피아노곡이었다.

나는 진규만을 만난 다음 고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현성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왜 또 전화했어?”

‘또?’

올해 나는 그에게 딱 두 번 전화했었다. 한 번은 어젯밤에 건 그 전화였다.

나는 인내심을 갖고 웃으며 물었다.

“저녁에 집에 와서 밥 먹을 거예요?”

고현성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아니.”

하늘에 하얀 눈이 계속 내렸다. 눈꽃이 손바닥에 닿자 차가운 느낌이 가슴속까지 스며들었다.

“임지혜 씨가 귀국했...”

고현성이 나의 말을 자르고 냉랭하게 말했다.

“지혜한테 무슨 짓 하려고? 경고하는데 지혜한테 무슨 일 생기면 내 손에 죽는 수가 있어.”

‘날 죽이겠다...’

오늘 저녁에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던 건 이혼 얘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고현성은 내가 이토록 악랄한 여자라 생각하고 있었다.

‘날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해줘야지.’

내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럼 저녁에 들어올 거예요? 질투 때문에 무슨 나쁜 짓을 할지 나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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