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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동과
고현성이 살짝 멈칫했다.

“또 무슨 수작이야?”

창밖에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의 23살 생일까지 두 달도 남지 않았다. 그날은 섣달 그믐날인데 그때까지 내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매끈한 배를 어루만졌다.

“내가 현성 씨 좋아하는 거 알잖아요. 나에 대한 모든 편견을 내려놓고 딱 3개월만 연애해요, 우리.”

고현성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꿈도 꾸지 마.”

휴대전화 너머로 온기라곤 전혀 없는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방 안에 가득한 외로움이 날 덮치는 것 같았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심장이 저릿할 정도로 아팠다.

나는 울고 있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

“현성 씨, 나랑 이혼하고 싶다면서요? 그럼 이렇게 해요. 나랑 3개월 연애하는 동안에 예뻐해 주고 챙겨줘요. 설령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날 사랑하는 척해요. 만약 3개월 버티면 이혼해 줄게요. 그리고 연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다 현성 씨한테 줄게요. 생각해봐요. 3개월만 버티면 나랑 이혼할 수 있고 수십조 원에 달하는 재산을 손에 넣을 수 있어요. 그리고 당당하게 임지혜 씨와 결혼할 수도 있고요. 현성 씨한테는 전혀 밑지는 장사가 아니에요.”

고현성이 덤덤하게 물었다.

“너랑 같이 3개월 동안 연기하라고?”

3개월 동안 관중은 나 하나뿐이었다. 결국에는 나 자신을 기만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말했다.

“네. 나랑 연애해요.”

“허. 역겨운 소리 좀 그만할래?”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고현성은 내가 보는 앞에서 검은색 마이바흐를 몰고 별장을 나가버렸다.

...

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 머리가 윙 했고 목이 너무 말라 침을 삼킬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어젯밤에 너무 많이 운 모양이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의사의 말대로 약을 먹은 다음 준비한 후 회사로 출근했다.

고현성의 아내인 것 외에 나는 선양 그룹의 대표였다. 한창 회사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데 고씨 가문 진화 그룹의 회장 고승철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고승철이 어두운 목소리로 진지하게 당부했다.

“임지혜가 미국에서 돌아온 거 알아? 요즘 현성이 단속 잘해. 나머지는 나한테 맡기고.”

그 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언제 돌아왔어요?”

고승철이 대답했다.

“어제.”

어제 고현성이 임지혜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심지어 이혼으로 유혹해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가 임지혜의 앞에서 나와 애정행각을 하기 싫어서였다.

고현성은 그가 날 사랑한다고 임지혜가 오해하는 게 싫었던 것이었다.

그 생각에 나는 가슴이 칼로 도려내듯 아팠다.

‘잡을 수 없다면 그냥 시원하게 놓아주자.’

나는 웃으면서 애써 밝은 척했다.

“아버님, 저 현성 씨랑 이혼하고 싶어요.”

고승철이 멈칫하다가 물었다.

“뭐라고?”

“현성 씨 절 사랑하지 않아요. 저랑 결혼한 후로 아버님과의 관계도 나빠졌잖아요. 저랑 이혼하면 관계가 다시 좋아질 거에요.”

고승철은 절대 우리의 이혼을 동의할 리가 없었다. 다만...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주식 양도 계약서를 보면서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선양 그룹 주식 전부 다 현성 씨한테 양도할게요.”

고승철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임지혜가 귀국하자마자 사모님 자리를 내놓는 것도 모자라 선양 그룹 주식까지 전부 다 우리한테 준다고? 넌 욕심도 없어?”

‘욕심?’

나는 촉촉해진 눈가를 닦으면서 씁쓸한 마음을 삼켰다.

“그때 우리 연씨 가문과 정략 결혼하려던 가문이 수도 없이 많았어요. 내가 고씨 가문을 선택한 게 무엇 때문일 것 같아요?”

그러고는 나 자신을 비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아버님, 처음부터 끝까지 고씨 가문이 우릴 필요로 했었고 전 그저 그 사람만 필요했을 뿐이에요.”

고승철은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전화를 끊은 후 주식 양도 계약서에 내 이름을 사인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연씨 가문에는 나 혼자만 남았다. 이젠 나마저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연씨 가문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은 고현성뿐이었다.

사실 고현성도 능력이 뛰어났다. 3년 전 권력이 없어서 그가 사랑했던 여자를 지키지 못한 것 외에 사업할 때는 수단이 악랄했고 무슨 일을 처리하든 항상 과감했다. 그리고 상대가 두려움에 떨 정도로 강했다.

3년 전 권력이 없으면 얼마나 힘든지 뼈저리게 느낀 후에는 권력을 쌓기 시작했다. 하여 지금의 고씨 가문은 연씨 가문을 집어삼키기에 충분했다.

비록 양측 모두 손해가 크겠지만 고현성은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고승철이 자리에서 물러날 때를, 임지혜가 귀국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이젠 모든 준비를 마쳤고 연씨 가문이 그의 계획 안에 있었다. 고현성이 망가뜨리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차라리 그에게 주는 게 나았다. 어차피 3개월 후면 연씨 가문을 물려받을 사람이 없으니까.

주식 양도 계약서에 사인한 후 나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유언장에는 이 한마디뿐이었다.

[현성 씨, 이번 생에 이루고 싶은 거 다 이루길 바랄게요.]

나는 서류를 들고 진규만 변호사를 찾아갔다. 그는 아버지가 생전에 고용했던 변호사였다.

진규만은 놀란 눈으로 유언장을 훑어보았다. 그 모습에 내가 덤덤하게 웃었다.

“제가 떠난 후에 이걸 다 현성 씨한테 주세요. 저의 묘 앞에서 피아노곡을 한 곡 연주해줬으면 좋겠네요.”

진규만의 두 눈에 슬픔이 가득했다.

“대표님, 어떤 곡을 좋아하세요?”

나는 아무 곡이나 말했다.

“바람이 사는 거리.”

고현성을 처음 만난 그해에 그가 연주한 첫 번째 피아노곡이 바로 ‘바람이 사는 거리’였다.

이 곡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나에게 들려준 마지막 피아노곡이었다.

나는 진규만을 만난 다음 고현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현성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왜 또 전화했어?”

‘또?’

올해 나는 그에게 딱 두 번 전화했었다. 한 번은 어젯밤에 건 그 전화였다.

나는 인내심을 갖고 웃으며 물었다.

“저녁에 집에 와서 밥 먹을 거예요?”

고현성이 싸늘하게 대답했다.

“아니.”

하늘에 하얀 눈이 계속 내렸다. 눈꽃이 손바닥에 닿자 차가운 느낌이 가슴속까지 스며들었다.

“임지혜 씨가 귀국했...”

고현성이 나의 말을 자르고 냉랭하게 말했다.

“지혜한테 무슨 짓 하려고? 경고하는데 지혜한테 무슨 일 생기면 내 손에 죽는 수가 있어.”

‘날 죽이겠다...’

오늘 저녁에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던 건 이혼 얘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고현성은 내가 이토록 악랄한 여자라 생각하고 있었다.

‘날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해줘야지.’

내가 싸늘하게 말했다.

“그럼 저녁에 들어올 거예요? 질투 때문에 무슨 나쁜 짓을 할지 나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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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아무 말이 없자 고현성은 끝까지 계속 빤히 쳐다보았다.버스가 다음 역에 도착했을 때 나는 황급히 버스에서 내렸고 고현성은 더는 따라오지 않았다. 나는 택시를 타고 다시 아까 그곳으로 돌아가 차를 가지고 별장으로 돌아갔다.커다란 별장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나는 소파에 앉아 한참 동안 멍하니 있었다. 머릿속에 고현성이 했던 그 한마디가 계속 맴돌았다.“지혜한테 결혼식을 올려주기로 했어.”자세히 생각해보면 임지혜에게 결혼식을 빚진 건 사실이었다. 3년 전에 임지혜가 고현성을 포기했고 고현성도 임지혜를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였다.만약 임지혜가 6억 원을 받지 않고 운성시를 떠나지 않았더라도 고현성은 그녀와 헤어지려 했을 것이다.사랑 속에서 누가 옳고 누가 틀렸다고 할 수 있겠는가?성대한 결혼식을 3년 전에 임지혜에게 줬어야 했다. 나는 그저 우연히 기회가 생겨 그 자리를 차지했고 이젠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을 뿐이었다.내가 한창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최희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최희연은 몇 안 되는 나의 절친이었고 운성시에서 고양이 카페를 운영했다. 카페에 들어가자마자 고양이들이 여유롭게 걸어 다녔다. 그나저나 카페는 항상 적자 상태였고 지금까지 내가 투자한 덕에 겨우 살아남았다.나는 휴대전화를 귓가에 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최희연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옆에 음악 센터가 있잖아. 저녁에 피아노 공연이 있는데 미국에서 온 연주가래. 너 피아노 좋아하지? 지금 이리 와. 저녁에 같이 공연 보러 가자.”내가 좋아하는 피아노 공연은 단지 고현성이 연주하는 피아노였다.고개를 살짝 수그리자 테이블 위에 놓인 10억짜리 은행 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길거리를 거닐며 사랑을 사려 한 바람에 미친 사람 취급당했고 고현성에게 초라한 모습마저 보여주고 말았다.돈이 있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으니 차라리 최희연에게 카페 운영 자금으로 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최희연과 공연을 보기로 했다.“한 시간 정도면 도착해.”나는 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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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성시에 눈이 며칠 동안 끊임없이 내린 바람에 도시 전체가 흰 눈으로 뒤덮였다. 우리 둘은 좁고 긴 골목에 마주하여 서 있었고 옅은 가로등 불빛이 그를 비춰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으며 마치 만화에서 나온 남자 같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살짝 놀라는가 싶더니 빤히 보면서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꼬마 아가씨, 어디 살아?”“연씨 별장...”고현성이 연씨 별장에 가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 허둥지둥 주소를 말했다. 그러자 고현성은 환하게 웃으면서 목도리를 풀어 나에게 둘러주었다. 그의 온기가 아직 남아있었다.고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가자. 집에 데려다줄게.”‘웃을 때 참 예쁘네...’그림을 찢고 나온 듯한 얼굴이었고 또 무척이나 다정했다.나는 그의 옆에서 걸으면서 손을 살며시 잡았다. 고현성이 살짝 멈칫했지만 거절하지 않고 내 손을 더 꽉 잡고 집 쪽으로 걸어갔다.가는 길 내내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다. 그렇게 별장 문 앞에 도착해서야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현성 씨, 들어가서 차 한잔하고 갈래요?”고현성이 웃으면서 거절했다.“시간이 늦었어.”밤이 늦은 건 사실이었다. 나는 발끝을 들어 고현성의 옷에 소복이 쌓인 눈을 털어주었다.“그럼 다음에 봐요.”그는 약속하지도 않고 거절하지도 않았다. 순간 오늘 저녁의 모든 게 다 나의 착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어지면 이 사람은 임지혜의 신랑이 될 텐데.고현성은 임지혜에게 결혼식을 올려줘야 한다고 했었다. 그리고 난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사람이고.‘난 대체 뭘 기대하는 거야?’나는 어두운 얼굴로 별장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재빨리 방으로 들어와 불을 켜고 통유리 쪽으로 다가가 아래층의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변함없는 자세로 그 자리에 서 있었고 무심한 듯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나는 얼굴을 창문에 기댄 채 나지막하게 인사를 건넸다.‘잘 가요, 현성 씨. 다신 보지 말아요. 이번 생에 당신이 원하는 걸 다 이루길 바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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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만을 향한 애틋한 사랑   제615화

    “지훈 오빠도 핀란드에 있어요. 언니도 나랑 같이 가요.”담현아의 제안은 꽤나 솔깃했다.하지만 아직 귀국하지 않은 석윤민이 마음에 걸렸다.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석지훈이 너무도 그리웠기 때문이다.그와 떨어진 지 고작 이틀이었지만 그 시간이 유난히 길게만 느껴졌다.우리는 많은 사람을 데리고 가지 않기로 했다. 공항에 도착하면 한민수와 예유진이 마중을 나올 예정이었기에 우리 둘만 비행기를 타고 핀란드로 향하기로 했다.나는 한참을 설득한 끝에 경호원들을 돌려보냈다. 어쩌면 그들에게도 짧은 휴가를 주는 셈이었다.우리는 오후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비행기를 타기 전, 담현아는 고정재에게 짧은 문자를 남겼다.[저 당분간 핀란드에 다녀올게요.]나는 그녀의 핸드폰 화면을 보며 물었다.“이게 다야?”그러자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뭐가 더 있어야 해요?”나는 그녀의 핸드폰을 받아 들고 잠시 생각한 후 타자하기 시작했다.[일 때문에 가는 거예요. 도착하면 전화할게요. 그때쯤이면 정재 씨도 막 일어났겠죠. 잘 자요, 정재 씨.”담현아는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황급히 말했다.“나, 한 번도 그 사람을 정재 씨라고 불러본 적 없어요!”나는 웃으며 핸드폰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잘 자요, 정재 씨를 잘 자요, 아저씨로 바꿨고, 마지막에 한 마디를 더 추가했다.“보고 싶을 거예요.”나는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오, 꽤나 달콤한데?”그러자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그럼요. 다만 입 밖에 쉽게 내뱉지 못할 뿐이에요.”그녀는 핸드폰을 넣으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말했다.“현아야, 여자한테 애교는 곧 무기야!”나는 석지훈에게 애교 부리는 걸 좋아했다.특히 내가 잘못했을 때.그러자 담현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저도 알아요. 근데 유독 아저씨 앞에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그런 혼란스러움이야말로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증거였다.

  • 너만을 향한 애틋한 사랑   제614화

    담현아의 나이는 확실히 어렸지만 내 아이가 그녀를 언니라고 부르기엔 애매했다. “그냥 작은고모라고 부르는 게 어때?”그러자 담현아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그럼 아저씨는 고모부가 되는 거예요?”나는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갑자기 정재 씨랑 친척이 된 거야?”그러다 생각이 바뀌어 말했다.“사실 삼촌이라고 부르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정재 씨는 삼촌, 넌 작은숙모?”이 친척 관계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그래요, 언니가 아저씨랑 더 오래 알고 지냈으니까, 그쪽 기준으로 부르면 되겠네요. 사실 나도 작은숙모라는 호칭이 더 맘에 들어요!”고정재가 한 말이 맞았다. 우리가 아무리 가까워도, 그가 예전부터 우리의 피아노 곡을 계속 연주한다 해도 담현아는 결코 우리를 오해하지 않을 사람이었다.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떳떳한 사이니까.“그럼 그렇게 하자! 아까 경찰이 그러던데, 너 최근 2년 동안 경찰서만 5번이라며? 핀란드에 있는 애가 어떻게 국내에서 이렇게 사고를 치고 다니는 거야?”그녀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별일 아니에요.”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해서 나도 더 묻지 않았다.집에 도착했을 땐 거의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밤새 클럽에서 놀다가 경찰서와 병원을 오가느라 그녀는 이미 녹초가 되어 있었다. 소파에 털썩 눕더니 아예 꼼짝도 안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깊이 잠들었다. 나는 옷장에서 담요를 꺼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마침 고정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현아는 자?”그는 담현아가 내 집에 있는 걸 알고 있었다. 정말 모르는 게 없는 남자였다.“네, 방금 잠들었어요.”나는 침대에 기댄 채 대답했다. 곧이어 전화 너머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많이 다쳤어? 민영이가 꽤 심하다고 그러던데.”고민영이 그에게 말한 모양이었다.“병원에서 치료받았어요. 괜찮아요.”“그래. 현아 신경 써줘서 고마워.”나는 낮게 말했다.“별말씀을, 친구잖아요.”나는 전화를 끊고 다시 잠을 청했다.그리

  • 너만을 향한 애틋한 사랑   제613화

    고민영이 놀라며 물었다.“형수님, 무슨 일이에요?”나는 조용히 앉아 있는 담현아를 가리키며 설명했다.“이분은 민영 씨 오빠의 와이프예요. 두 사람은 이제 막 혼인 신고를 마쳤고 아직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어요. 민영 씨가 작은형수랑 싸우면 오빠가 곤란해지지 않겠어요?”고민영은 깜짝 놀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누구요?”나는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누구겠어요? 정재 씨죠.”그 말을 듣자마자 고민영은 당황하며 담현아에게 급히 사과했다.“죄송해요, 작은 형수님. 저는 두 분이 그런 관계인지 전혀 몰랐어요... 아까 일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제가 형수님을 알지도 못했잖아요. 저도 당연히 제 친구를 도와야 했고요. 그냥 오해였던 거예요. 우리 합의할까요?”담현아는 원래 쿨한 성격이라 작은 일로 꽁해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고정재가 곤란해지는 것도 원치 않았기에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요. 애초에 제 잘못이었어요.”고민영도 성격이 꽤 시원시원했지만 문제는 그녀의 친구였다. 그 친구는 여전히 담현아를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며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나는 그녀에게 말했다.“얼른 병원 갈까? 상처 치료해야지.”“네, 치료는 해야죠.”담현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고민영의 친구가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굳이 병원에 갈 필요도 없겠는데? 얼굴이 그 모양인데 흉터가 남든 말든 똑같지 않을까? 괜히 의료 자원을 낭비하지 말고.”담현아는 성질이 급한 편이었다. 그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을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대놓고 비웃으며 말했다.“수아 언니, 무식한 년이랑 말싸움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그런 년보다 몸매 좋고 예쁘고 돈 많고 남자 친구도 더 잘생기면 그만이죠. 굳이 입 아프게 싸울 필요가 없잖아요.”고민영의 친구는 화가 나서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이 벌떡 일어났지만 고민영은 급히 그녀를 붙잡으며 말했다.“내 형수님이야. 좀 참아!”담현아는 그 친구를 향해 가볍게 침을 뱉고는 경찰서를 나섰다. 나는 철없는

  • 너만을 향한 애틋한 사랑   제612화

    나는 방 안에 계속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다 고정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현성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아. 계속 널 찾고 있어. 며칠 후에 심리 상담을 받아보게 하려고 해.”나는 힘겹게 대답했다.“현성이가 절 기억하지 못해요.”그런데 어떻게 나를 찾고 있다는 거지?“계속 수아를 찾고 있어.”그는 나를 잊었으면서도 내 이름만은 기억하고 있었다.그 말을 듣자 마음이 저려 왔다.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내가 아무 말 없이 침묵하자 고정재는 다시 말을 이었다.“그냥 현성이 정신 상태랑 내 계획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야. 넌 부담 가질 필요 없어. 그리고 굳이 책임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 어차피 지금 네 곁에는 지훈 씨가 있잖아. 현성이한테 더 이상 마음을 쏟을 이유는 없어.”고정재는 언제나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말을 했다.나는 깊이 숨을 들이쉬고 말했다.“저도 선은 지킬 줄 알아요.”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더 이상 고현성과 엮여서는 안 된다는 걸.그런데도...그 오만했던 남자가 이렇게까지 망가졌다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가슴 한구석이 답답해났다.전화를 끊고 나서도 계속 방안에 틀어박힌 채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도 석지훈에게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그는 늘 그랬다. 밖에 있을 때면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었다.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은 것처럼 말이다.그때 원태웅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는 만나서 한잔 하자고 했지만 나는 거절하고 약을 먹고 그대로 잠들었다.한밤중, 담현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수아 언니, 나 맞았어요. 물론 나도 한 대 때리긴 했지만.”나는 반쯤 잠이 든 상태로 물었다.“누구한테?”“고민영.”나는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어쩌다 싸운 거야?”“태웅 오빠랑 클럽에서 놀다가 새벽에 나가려는데 우연히 고민영이랑 부딪혔어요. 처음엔 쿨하게 괜찮다고 했는데, 옆에 있던 친구가 끝까지 깐죽거리면서 날 모욕했어요. 그래서 나도 못 참고 한마디 했죠. 솔직히 싸울

  • 너만을 향한 애틋한 사랑   제611화

    아이스랜드의 눈보라는 점점 더 매서워졌다. 최희연은 몸을 움츠리며 조용히 말했다.“전... 자격이 없어요.”눈앞에 서 있는 이 순수한 남자를, 마치 풍경화에서 걸어 나온 듯한 이 남자를...그녀는 감히 사랑할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나는 열등감이었다. 전에 그가 말했던 한마디로 결코 해결되지 않는 문제였다.“희연 씨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마세요.” 게다가 지금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복수뿐이었다.왕자현은 그녀의 말을 듣고 더 이상 설득하지 않았다. 단기간에 그녀의 생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굳이 강요하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어차피 앞으로의 시간은 많았다. 남은 시간은 수십 년이나 되지 않는가.수십 년의 세월이라니, 그는 그것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설레었다.이전처럼 혼자가 아니라 그의 곁에는 아내가 있었다.그와 평생을 함께할 유일한 사람.부인.그는 이 단어를 되뇌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내일 병원에 함께 가서 흉터를 치료하죠. 세계적으로 유명한 의사들을 초빙했습니다. 희연 씨의 얼굴을 완벽하게 회복시켜 줄 거라고 약속하더군요.”그 말을 듣자 그녀의 어두운 눈동자가 한순간 빛났다.왕자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기다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미소를 지었다.“혹시 후회하진 않나요? 그때 저와 함께 운성시를 떠나지 않았던 것, 그리고... 그분을 기다리겠다고 했던 선택을.”5년 전.왕자현은 우연히 운성시에 들렀다가 그녀를 만났다.그때 그는 심한 부상을 입은 채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었고 그를 숨겨주고 돌봐준 사람이 바로 최희연이었다.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약속했다.두 달 동안 함께 지내며 최희연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진서준이 살아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왕자현이 떠나던 날, 그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물었다.“희연 씨, 저랑 함께 아이스랜드에서 살겠어요? 평생을 약속할게요.”그때 그녀는 어떻게 대답했었지?그녀

  • 너만을 향한 애틋한 사랑   제610화

    “미쳤거나 바보가 됐거나 아니면 사람도 귀신도 아닌 존재가 됐다고 할까요? 저도 모르겠어요. 근데 제가 갖지 못하는 남자가 잘되는 건 절대 못 보죠.”나는 소리쳤다.“미친년.”나는 그녀의 전화를 끊어버리고 곧바로 함승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빠르게 고현성의 행방을 찾아내 병원으로 이송시켰고 나는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병실에 도착했을 때 고현성은 이미 의식을 잃었다.그리고 온몸에는 상처가 가득했다.심지어 얼굴에는 깊게 베인 흉터까지 남아 있었다.나는 병실 밖으로 나와 분노에 차서 물었다.“임지혜는?”“가주님께서 처리하시도록 잡아뒀습니다.”나는 눈이 붉어질 만큼 화가 치밀어 오른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데려오세요.”그 순간, 병실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고현성이 깨어났다.나는 급히 병실로 들어갔다.그는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나를 보자 몸을 움츠리며 뒷걸음질쳤다.낯선 환경이 불안한 듯 늘 강하던 그가 이토록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나는 화가 났다.아니, 화를 낼 기력조차 없이 가슴이 무너졌다. 그리고 결국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그가 과거에 내게 했던 일들을 떠올리면 우리가 이미 끝난 사이라는 걸 생각하면 분명 난 그에게 아무런 감정을 가져선 안 된다.그런데도 이 순간만큼은 그가 무사하기를 간절히 바랐다.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고현성.”그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고현성이... 누구예요?”순간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네 이름이야”그는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제가... 고현성이에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네가 기억하는 건 뭐야?”그는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불안한 눈빛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그쪽은 누구예요?”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난... 네 친구 수아야, 연수아.”그렇게 부르는 게 맞겠지.나는 그의 얼굴에 난 상처를 살펴보려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그는

  • 너만을 향한 애틋한 사랑   제609화

    나는 그녀에게 아무런 잘못도 한 적이 없는데 굳이 나와 고현성을 갈라놓으려 했다.겉으로는 유서정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그건 결국 그녀 안에 숨겨진 어두운 인격이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었다.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엄마는 조용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수아야, 이제 너도 성인이 되었으니 더 이상 네게 숨길 필요 없는 이야기들이 있어. 혜원이가 귀국하고 싶어 해. 네 능력이라면 쉬울 것 같은데 좀 도와줄 수 있겠니?”도와줄 수 있겠냐고?절대 안 되지.오혜원을 해외로 내쫓은 사람이 바로 나고, 그녀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도록 막은 것도 나였다.그리고 그녀가 돌아와서 또다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하지만 나는 엄마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지금까지도 오혜원이 저지른 짓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그러나 이제 와서 말해봤자 엄마를 괴롭게 할 뿐이었다.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고현성이었다.나는 급히 엄마에게 말했다.“저, 전화 좀 받고 올게요.”그러고는 급히 저택 밖으로 나가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고현성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걸어왔다.나는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으며 말했다.“대체 뭐 하는 거야?”차마 예상치 못한 한마디였다.“누구세요?”나는 순간 멍해졌다.“뭔 소리야?”전화 너머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제 핸드폰에 그쪽 번호가 저장된 거예요?”나는 비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고현성, 재미있어? 설마 또 기억을 잃었다는 소릴 하려는 거야? 이미 한 번 속았는데 또 속을 것 같아? 이제 와서 그런 수작 부린다고...”그는 말을 끊더니 나지막이 말했다.“제 이름이... 고현성이에요?”“...?”설마... 진심인가?그 순간, 누군가 핸드폰을 낚아채더니 전화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아 씨, 저 기억하세요?”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지혜 씨?”“네, 저예요.”나는 순간 충격에 휩

  • 너만을 향한 애틋한 사랑   제608화

    함승윤이 답장을 보내왔다.[전 그냥 왕재민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얘기한 것뿐입니다. 꽤나 폐쇄적인 사람이라 외부 사람들과 전혀 교류하지 않는 데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전부 가문에서 나서서 해결합니다. 사람들은 왕재민을 본 적도 없을 겁니다. 심지어 석씨 가문도 왕재민의 사진조차 본 적 없습니다.]나는 그에게 답했다.[꽤 신비롭네요.]최희연은 이렇게 신비로운 사람을 어떻게 알게 된 걸까?기회가 되면 그녀에게 한번 물어봐야겠다.그의 이야기에 함승윤은 흥미를 보이며 말했다.[왕씨 가문은 엄청난 재벌가예요. 그런데 석씨 가문은 단 한 번도 왕씨 가문과 사업적으로든, 인간적으로든 관계를 맺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희연 씨가 사모님이 되었고 가주님은 희연 씨의 절친이다 보니 어쩌면 이 관계를 장기적으로 유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나는 즉시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비록 석씨 가문을 위한 말이었지만 모든 걸 이익만으로 따질 수는 없었다.예를 들면 나랑 희연이 관계처럼.나는 더 이상 그의 메시지에 답하지 않았다. 핸드폰을 내려놓자 갑자기 석지훈이 보고 싶어졌다. 그와 떨어져 있는 매 순간이 고통스러웠다.언제부터 이렇게까지 그에게 의지하게 되었을까?나는 한숨을 내쉬었다.그 모습을 본 김은정은 나를 보며 물었다.“왜 그러니?”나는 대충 둘러대며 말했다.“그냥... 오빠가 보고 싶어서요.”그 말을 들은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분은 잘 계시니?”김은정이 말하는 그분은 나의 친어머니였다.나는 담담하면서도 씁쓸한 목소리로 답했다.“상황이 별로 좋지 않아요.”그녀는 내 곁에 앉더니 마치 어릴 적처럼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그때 네게 신장을 기증했을 때 엄마는 그분을 본 적이 없었어. 병원에서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했거든. 너희 아빠와 난 그 분이 너를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다는 사실에 원망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기꺼이 신장을 내어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했어.

  • 너만을 향한 애틋한 사랑   제607화

    최희연은 자신이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겨우 두 번 왔던 아이스랜드를 집이라 부를 수 있을까?그녀는 오두막의 담장 근처에서 알래스카 말라뮤트를 산책시키고 있었다. 거의 그녀와 키가 비슷할 정도로 큰 대형견이었다. 왕자현의 여동생이 아이스랜드에서 키우고 있었다.여동생은 아이스랜드 수도인 레이카비크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아이스랜드를 떠나야 할 일이 있어 임시로 왕자현에게 맡긴 것이었다. 그는 개를 싫어하지도, 그렇다고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다.그는 사람들에게 시켜 알래스카 말라뮤트를 위한 작은 통나무집을 문 앞에 지어주게 했다.그런데 알래스카 말라뮤트는 왕자현이 두려운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통나무집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눈치를 아주 잘 보는 개였다.산책을 마친 최희연은 개를 작은 통나무집에 묶어두고서야 연수아의 메시지를 확인했다.순간 그녀에게 아이스랜드에 왔다는 말을 미처 하지 못했던 것이 떠올랐다.연수아가 메시지로 진유겸의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그녀는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그를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너무나도 싫었다.그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너무도 아팠다.그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녀의 마음은 너무나도 모순적이었다.그를 미워하면서도 한편으로 얼마나 사랑했을까?진서준이 세상을 떠난 후로 진유겸은 그녀가 기댈 수 있는 가장 큰 존재였다.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의 삶에서 사라졌다.그것도 아주 잔인한 방식으로.그녀는 생각할수록 서러웠다.“희연 씨,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순간 귓가에 다정하지만 사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눈앞에는 하얀 고풍스러운 옷을 걸친 왕자현이 서 있었다. 소매는 넓었고 끝부분에는 정교한 자수가 새겨져 있었다.원래도 창백한 그의 얼굴은 눈 속에서 더욱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마치 그림에서 막 걸어 나온 듯했다.최희연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무심코 입을 열었다.“자현 씨.”왕자현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며 물었다.“넋이 나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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