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성이 살짝 멈칫했다.“또 무슨 수작이야?”창밖에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의 23살 생일까지 두 달도 남지 않았다. 그날은 섣달 그믐날인데 그때까지 내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매끈한 배를 어루만졌다.“내가 현성 씨 좋아하는 거 알잖아요. 나에 대한 모든 편견을 내려놓고 딱 3개월만 연애해요, 우리.”고현성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꿈도 꾸지 마.”휴대전화 너머로 온기라곤 전혀 없는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방 안에 가득한 외로움이 날 덮치는 것 같았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심장이 저릿할 정도로 아팠다.나는 울고 있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현성 씨, 나랑 이혼하고 싶다면서요? 그럼 이렇게 해요. 나랑 3개월 연애하는 동안에 예뻐해 주고 챙겨줘요. 설령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날 사랑하는 척해요. 만약 3개월 버티면 이혼해 줄게요. 그리고 연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다 현성 씨한테 줄게요. 생각해봐요. 3개월만 버티면 나랑 이혼할 수 있고 수십조 원에 달하는 재산을 손에 넣을 수 있어요. 그리고 당당하게 임지혜 씨와 결혼할 수도 있고요. 현성 씨한테는 전혀 밑지는 장사가 아니에요.”고현성이 덤덤하게 물었다.“너랑 같이 3개월 동안 연기하라고?”3개월 동안 관중은 나 하나뿐이었다. 결국에는 나 자신을 기만하는 거나 다름없었다.나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말했다.“네. 나랑 연애해요.”“허. 역겨운 소리 좀 그만할래?”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고현성은 내가 보는 앞에서 검은색 마이바흐를 몰고 별장을 나가버렸다....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 머리가 윙 했고 목이 너무 말라 침을 삼킬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어젯밤에 너무 많이 운 모양이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의사의 말대로 약을 먹은 다음 준비한 후 회사로 출근했다.고현성의 아내인 것 외에 나는 선양 그룹의 대표였다. 한창 회사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데 고씨 가문 진화 그룹의 회장 고승철에게서 전화
고현성이 화를 내면서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내가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 나가려던 그때 가장 만나기 싫었던 그 사람을 만났다. 바로 고현성이 지금까지 사랑하고 있는 여자 임지혜.나는 임지혜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고 그냥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임지혜가 나지막하게 나를 불렀다.“고씨 가문 사모님 맞죠?”순간 멈칫한 나는 그녀를 흘겨보았다.“왜 그러시죠?”“사모님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좋아요?”임지혜의 도발에 나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옅은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지만 립스틱은 진한 레드색을 발랐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에도 얇은 롱원피스에 하얀색 코트로 가녀린 몸을 가리고 있었다.‘예쁘긴 하네. 이러니까 현성 씨가 그렇게 좋아하지.’연적끼리 만나봤자 좋을 일이 없었다. 나는 임지혜를 무시하고 그냥 가려 했지만 그녀가 나를 비웃었다.“내 자리를 빼앗아 갔는데 편할 리가 없겠죠. 현성이가 수아 씨를 사랑해요? 귓가에 대고 달콤한 얘기를 해주던가요? 밥도 해준 적 없죠? 특별한 날에 선물 사주던가요? 한 번도 그런 적 없죠? 현성이는 절대 수아 씨한테 해주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그저 선양 그룹 대표라는 이유로 사모님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에요.”임지혜의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그녀가 한 말들은 전부 고현성이 그녀에게 해줬던 것들이었다. 질투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질투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모님 자리도 지키지 못하게 생겼는데...나는 덤덤하게 웃으며 맞받아쳤다.“그럼 지혜 씨는요? 3년 전에 난 지혜 씨한테 기회를 줬었어요. 지금 인정하든 안 하든 현성 씨 와이프는 나예요. 그리고 지혜 씨 말이 맞아요. 난 선양 그룹 대표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현성 씨한테 결혼을 강요했어요. 근데 당신은...”절대 남에게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내가 아니었다. 상대가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가만히 있지만 건드린다면 그대로 갚아주는 성격이었다.그런데 고현성은 이런 나를 3년이나 모욕했다
고현성은 내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발견하고는 소파에 편하게 앉아 내가 저녁을 다 먹기를 기다렸다. 몇 시간 동안 내버려 둔 탓에 음식이 차갑게 식어버렸다.입맛이 없어서 맛도 잘 느껴지지 않았던 나는 밥을 천천히 먹었다. 그런데 기다리다가 인내심이 바닥난 고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와서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연수아, 대체 어쩌겠다는 거야?”나는 그릇을 내려놓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때 고현성의 시선이 음식 쪽으로 향했다.“다 네가 한 거야?”고현성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나는 설거지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무덤덤하게 말했다.“낮에 현성 씨한테 저녁에 집에 와서 밥 먹겠냐고 물어봤었잖아요. 들어오겠다고 해서 현성 씨가 좋아하는 요리들로 한상 차렸죠.”고현성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대체 무슨 수작인 거야?”나는 수저를 치우던 동작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두 눈 사이에 예전에 느꼈던 따뜻함은 이제 더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나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결국 침묵을 택했다. 아무 말 없이 주방에서 설거지하고 나왔을 때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위층을 올려다보며 올라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안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어보니 고현성이 소파에 앉아 있었고 다리 위에 얇은 금색 노트북이 놓여있었다.나는 잠옷을 챙기고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손가락이 하얗게 될 때까지 욕조에 앉아 있다가 욕실 문을 연 순간 짙은 기운이 날 감싸 안았다.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침대까지 끌려갔다. 마지막에 고현성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지혜가 그러는데 3년 전에 네가 강요해서 미국으로 간 거래.”고현성은 이미 내가 그런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여자는 3년 전에 그와 6억 원 사이에서 고민도 없이 6억 원을 선택했다.그렇다. 3년 전에 내가 임지혜에게 선택을 하라고 한 건 사실이었다.만약 임지혜가 고현성을 선택했더라면 나는 고씨 가문과의
3개월도 남지 않았는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생명이 끝나가는데도 나는 제대로 된 연애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나의 소원은 고현성과 뜨거운 연애를 하는 것이었다. 고현성이 나를 조금만 달래줘도 나는 아마 날뛰듯이 기뻐할 것이다.그나저나 나는 평생 귀한 대접과 사랑을 받은 적이 없었다. 하여 임지혜를 자주 질투했고 미친 것처럼 고현성을 욕심냈다.고현성이 나를 괴롭히고 모욕해도 기꺼이 당해주었다. 그의 앞에서 나는 한없이 보잘것없고 비굴한 존재였다.나는 항상 자신을 낮추었고 지금까지 한 번도 반항하지 않았다....고현성은 평소처럼 그냥 휙 가버린 게 아니라 샤워를 마친 후 소파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회사 서류를 처리했다.나는 잠옷을 입고 가볍게 물었다.“오늘 여기서 자고 가려고요?”나는 시력이 좋아 그의 노트북 화면에 나타난 서류를 정확히 보았다. 전부 예전에 선양 그룹과 체결했던 계약이었다.최근 선양 그룹에 많은 문제가 생겼다. 거래처들이 줄줄이 계약을 파기하면서 주가가 뚝뚝 떨어졌다. 이 모든 게 다 고현성이 한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까발리지 않았다. 그가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정이길 바랐다.고현성이 무시하자 나도 더는 방해하지 않고 서랍에서 이혼 합의서를 꺼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혼에 관해 그와 상의하려는데 임지혜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임지혜의 두려움 가득한 목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현성아, 살려줘. 그 여자가 사람을 시켜서 날 납치했어. 내 몸을 더럽혀서 너랑 어울리지 않는 여자로 만들겠대.”고현성은 거의 본능적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네가 시킨 거야?”나는 두 손을 펼쳐 보이며 웃었다.“아니라고 하면 믿을 거예요?”고현성이 나가려고 하자 나는 달려가서 그를 잡았다. 그러고는 용기 있게 그의 얼굴을 만지면서 물었다.“현성 씨는 왜 그 여자 말을 그렇게 철석같이 믿어요? 자작극일 수도 있잖아요.”“난 지혜를 잘 알아. 걔는 너 같은 사람이 아니야.”나는 순간 멈칫했다.‘너 같
임지혜는 나를 보더니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면서 물건을 집어 던졌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진짜 내가 한 짓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본 고현성이 다급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고현성의 가슴팍은 따뜻해서 늘 상대에게 안정감을 주었다.임지혜도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고현성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그리고 내 남편은 임지혜를 다독이느라 여념이 없었다.“괜찮아. 내가 있는 한 절대 너한테 무슨 짓 하지 못해.”고현성의 다정함은 임지혜만의 것이었다. 나에게 말할 땐 말투가 싸늘하게 바뀌었다.“병원에는 왜 왔어? 당장 집에 가지 못해?”임지혜의 앞에서 그는 늘 나를 집에 돌려보냈다.나는 시선을 거두었고 고현성이 임지혜에게 다정하게 대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임지혜는 고현성을 믿고 뜨거운 물을 나의 얼굴에 확 뿌렸다. 나는 고통스럽게 소리를 지르면서 뒷걸음질 치다가 뭔가에 부딪힌 바람에 넘어지려 했다. 그 순간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현성 씨.”고현성은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임지혜를 째려보고는 나를 응급실로 데려갔다. 정교하게 한 메이크업이 번지면서 한쪽 얼굴의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점심에 넘어졌을 때 생긴 상처였고 손톱으로 긁으면서 더 심해졌다.고현성은 거즈와 알코올을 가져와 말없이 소독해주었다. 너무도 아팠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그가 나에게 건네는 잠깐의 따뜻함을 만끽했다.검은 머리도 다 젖고 말았다. 나는 고현성의 길고 하얀 손가락을 내려다보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고현성 씨.”고현성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왜?”나는 욕심을 드러내며 물었다.“내가 연씨 가문을 현성 씨한테 주고 이혼도 하겠다고 하면 나랑 연애해볼 생각 있어요?”고현성이 움직임을 멈추고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물었다.“어제 지혜가 귀국한 다음부터 계속 이상했어. 대체 뭐 하자는 거야?”고현성은 나에게 인내심이 별로 없다고 얘기했었다. 잔뜩 찌푸린 미간만 봐도 지금
나는 꿈을 꾸었다. 그곳은 연씨 가문 별장이었고 집에 부모님과 고현성이 있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면서 나의 23살 생일 파티를 어떻게 할까 상의하고 있었다.내가 소파 옆에 서 있는데 고현성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아 빨간색 좋아하니까 빨간 장미꽃을 세팅하는 건 어때요? 제가 피아노도 직접 연주할게요.”고현성의 표정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창밖의 햇살이 그에게 비추면서 더욱 멋있어 보였다. 나는 손을 내밀어 그의 미간을 어루만지려 했다. 그런데 손가락은 그를 뚫고 허공에 머물렀다. 당황한 내가 계속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내가 목놓아 울부짖던 그때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나는 두 눈을 번쩍 떴다. 병실에 누워있었고 낮에 입었던 밝은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으며 옆에는 싸늘한 표정의 고현성이 서 있었다.꿈속에서 다정했던 고현성을 봤던 탓인지 차가운 그를 차마 볼 수가 없어 두 눈을 감았다.“아까 무슨 일 있었어요?”고현성은 시선을 늘어뜨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고승철이 갑자기 병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고현성을 째려보면서 화를 냈다.“방금 넘어져서 얼굴이 피범벅이 됐어.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 여자만 아니었더라도 병원에 와서 이런 일 당하지 않았을 텐데. 수아야, 너 평소에 현성이를 너무 풀어줬어. 남편을 잘 단속했어야지.”‘남편이라... 방금 이혼하자고 했는데.’나는 고현성을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이목구비가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었고 아버지의 얘기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나는 웃으면서 고승철에게 말했다.“아버님, 우리 이혼했어요.”그 소리에 고현성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고승철도 놀란 눈치였다. 다행히 내가 낮에 귀띔이라도 한 덕에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낮에 그 얘기를 꺼내더니 벌써 이렇게 빨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빠른가요? 현성 씨는 3년 전에 이미 이혼하고 싶어 했어요. 지금까지 끌어도 아무도 득을 본 사람이 없고요. 아 참, 전 사업 머리가 없어서 선양 그룹이
운성시의 하늘에 흰 눈이 흩날리고 있었고 대지를 하얀색으로 뒤덮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나는 안에 금색 롱원피스를 입었고 밖에는 하얀 코트를 입었다. 그리고 거기에 예쁜 실버 귀걸이를 매치했고 메이크업까지 한 채 길거리를 목적 없이 걸어 다녔다.운성시는 아주 시끌벅적했지만 나는 외톨이처럼 어울리지 못했다. 나는 방황하듯 사람들 사이에 서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찬바람이 스치면서 눈꽃이 얼굴에 내려앉아도 전혀 춥지 않았다. 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평범하고 키도 평범한 한 사람을 따라갔다.그 사람이 담배를 피우던 그때 나는 용기 내어 다가가 은행 카드를 건네면서 부탁했다.“내가 10억 원 줄 테니까 나랑 3개월만 연애할래요?”그는 마치 바보를 쳐다보듯 나를 보았다.“미안해요. 난 여자 친구가 있어요.”혼자 걸어 다니는 걸 보고 용기 내서 다가간 것이었는데...“알겠어요. 괜찮아요.”나는 실망한 얼굴로 발걸음을 돌리다가 또 다른 평범한 남자를 찾았다. 사실 나 정도 얼굴이라면 남자들이 거절할 리가 없었고 게다가 10억으로 유혹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그들은 되레 날 미친 사람 취급했다.“나랑 연애할래요?”“머리가 어떻게 됐어요? 가족한테 연락해 줄까요?”나는 멋쩍게 웃었다.“아닙니다. 다른 사람 찾아볼게요.”또 다른 사람을 잡고 물었다.“나랑 연애할래요?”“미안해요...”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제대로 된 연애가 하고 싶었고 사랑을 받고 싶었을 뿐인데. 왜냐하면 난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느낌이 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행복이라는 게 대체 어떤 걸까?내가 해본 거라곤 임지혜를 미친 듯이 질투한 것뿐이었다.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한 사람에게 다가갔다.“나랑 연애할래요?”그런데 그때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진짜 언니였어요?”내가 경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고씨 가문 사람 고민영이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고현성이 싸늘하게 서 있었다.나는 민망함이 극에 달했고 고민영이 놀란 기색이 역력한
내가 아무 말이 없자 고현성은 끝까지 계속 빤히 쳐다보았다.버스가 다음 역에 도착했을 때 나는 황급히 버스에서 내렸고 고현성은 더는 따라오지 않았다. 나는 택시를 타고 다시 아까 그곳으로 돌아가 차를 가지고 별장으로 돌아갔다.커다란 별장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나는 소파에 앉아 한참 동안 멍하니 있었다. 머릿속에 고현성이 했던 그 한마디가 계속 맴돌았다.“지혜한테 결혼식을 올려주기로 했어.”자세히 생각해보면 임지혜에게 결혼식을 빚진 건 사실이었다. 3년 전에 임지혜가 고현성을 포기했고 고현성도 임지혜를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였다.만약 임지혜가 6억 원을 받지 않고 운성시를 떠나지 않았더라도 고현성은 그녀와 헤어지려 했을 것이다.사랑 속에서 누가 옳고 누가 틀렸다고 할 수 있겠는가?성대한 결혼식을 3년 전에 임지혜에게 줬어야 했다. 나는 그저 우연히 기회가 생겨 그 자리를 차지했고 이젠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을 뿐이었다.내가 한창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최희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최희연은 몇 안 되는 나의 절친이었고 운성시에서 고양이 카페를 운영했다. 카페에 들어가자마자 고양이들이 여유롭게 걸어 다녔다. 그나저나 카페는 항상 적자 상태였고 지금까지 내가 투자한 덕에 겨우 살아남았다.나는 휴대전화를 귓가에 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최희연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옆에 음악 센터가 있잖아. 저녁에 피아노 공연이 있는데 미국에서 온 연주가래. 너 피아노 좋아하지? 지금 이리 와. 저녁에 같이 공연 보러 가자.”내가 좋아하는 피아노 공연은 단지 고현성이 연주하는 피아노였다.고개를 살짝 수그리자 테이블 위에 놓인 10억짜리 은행 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길거리를 거닐며 사랑을 사려 한 바람에 미친 사람 취급당했고 고현성에게 초라한 모습마저 보여주고 말았다.돈이 있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으니 차라리 최희연에게 카페 운영 자금으로 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최희연과 공연을 보기로 했다.“한 시간 정도면 도착해.”나는 방을
때로는 아저씨라고 부르기도 했다.고정재는 사 온 선물을 들고 담씨 가문 별장에 들어가려던 참에 메시지를 받았다.그는 선물을 내려놓고 담현아에게 답장을 보냈다.[괜찮으니 너무 많이 먹지 마. 이따가 집에 가면 내가 만들어 줄게.]담현아의 소원은 항상 하나하나 다 이루어 주었다.결국 그에게 시집가기에는 담현아가 아까웠다.고정재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손을 뻗어 문을 두드렸다. 한 남자가 문을 열어줬다.고정재가 전에 조사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담현아의 오빠인 담현우였다.그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자신을 소개했다.“안녕하세요. 저는 고정재입니다. 현아에게는 오라고 하지 않았어요. 제가 직접 방문하러...”담현우는 그의 말을 끊고 표정을 찡그리며 속삭였다.“알죠. 알죠. 현아가 이런 상황에 부닥치는 걸 원치 않으시잖요! 매부, 내가 미리 말해 주는 건데. 우리 엄마 절대 다루기 쉽지 않으니까 조심해야 해요. 좀 있다가는 제가 절대로 도와줄 수 없으니까요!"처남은 아주 괜찮은 사람인 것 같다.고정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상기시켜 줘서 고마워요.”담현우가 옆으로 물러나자 고정재는 담현아의 부모님이 거실의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봤다.그는 신발을 벗어서 슬리퍼로 갈아 신고 안으로 들어가 두 분 앞에 앉았다. 두 어르신은 온화한 모습이었다.고정재는 정중하게 말했다.“아버님, 어머님. 사실 제가 어떻게 불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아직 저를 받아들이지 않으신 것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담현아의 어머니는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우리가 자네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무슨 배짱으로 우리 담씨 집안에 찾아왔나?"담현아의 어머니는 매우 무례한 태도로 말했다.사실 담현아 아버지는 눈앞의 고정재에 매우 만족했다. 그의 외모와 몸매는 물론 그의 성품은 최고 중의 최고였다.단지 나이가 조금...사실 서른네 살이면 괜찮았다. 담현아에 비해 많아 보일 뿐이다. 고정재를 밖에 내놓으면 얼마나 많은 아가씨들이 뒤꽁무니를 쫓을
석지훈은 내가 그의 아내라고 말했다.하지만 그때 나는 아직 그의 아내가 아니었다.그의 마음속에는 줄곧 내가 그의 아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나는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아직 저한테 여보라고 부른 적이 없어요."석지훈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윤아, 듣고 싶어?"그의 목소리는 매력적이고 유혹적이다.나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들었다."그래, 근데 네가 나를 기분 좋게 해줄 때까지 기다려야 해. 착하지. 아래층에 내려가서 걔들이랑 놀아줘. 나는 조금만 자고 일어나서 같이 있어 줄게. 한 어르신 쪽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더 이상 걱정하지 마. 그 사람은 이제 두려워할 만한 대상이 아니야."석지훈의 얼굴은 여전히 약간 창백하다. 장시간의 이동이 그를 지치게 했는지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보였다.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푹 쉬어요."일어나서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아직 강아지와 놀고 있는 승아가 보였다. 나는 송이연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저녁에 뭐 먹을까요?"어느새 또 저녁이 다가오고 있었다."아직 별생각 없어요. 배가 별로 안 고프네요. 근데 승아가 새우를 먹고 싶어 해서 인터넷으로 좀 주문해 놓았어요. 이따가 새우로 뭘 좀 할 건데, 수아 씨는 뭐 먹고 싶어요?""그럼 이연 씨가 새우를 하고, 저는 감자 카레를 만들게요."석지훈은 부상 때문에 자극적인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네, 곁들일 반찬도 좀 만들게요."막 말을 끝내자 담현아가 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운성시에 있어요?][집에 있어. 이제 막 저녁밥 하려고 해.][그러면 나도 가서 밥 좀 얻어먹을래요.]나는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말했다."좀 있으면 담현아가 올 거에요. 이연씨는 모를 텐데, 고현성의 작은 형수이고, 고정재의 아내예요."송이연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득 나에게 말했다."오혜원 일은 진지하게 생각해 봤는데요. 걔 때문에 시혁 씨가 힘들어하는 건 원치 않지만, 우리 승아가 평생 안전하고 걱정이
"몰라요. 걔가 찼어요."한민수의 말투는 이상할 정도로 분개했다.나는 그가 무엇에 그토록 분개하는지 알 수 없었다."이 일은 제가 지켜봐 주고 있을게요."한민수와의 전화를 끊고 나는 승아와 잠시 놀아주었다. 그러다 문득 고정재가 아직 동성시에서 장모를 상대하고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나는 문자로 그에게 물었다.[일은 어떻게 되어가요?]그는 나에게 답장했다.[전에 현성이 일 때문에 이틀 동안 운성시에 다녀오느라 늦었어. 지금 막 동성시에 도착했고. 내가 이미 사람을 보내서 담현아를 조사하게 했어. 오늘 밤에 소식이 있을 거야.]고정재는 며칠 동안 아직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나는 계속해서 그에게 물었다.[현아는요?][운성시에 있어. 오늘 밤에 담현아 부모님을 뵙고 운성시로 돌아갈 거야. 그 아이는 아직도 나를 만나기를 부끄러워하네.][현아는 아직 어리고 순수하니 당연한 일이죠.][응, 오늘 밤에 일을 해결해야겠어.]고정재가 말한 '일'은 무슨 일을 가리키는 걸까?!나는 어렴풋이 수치심을 느꼈다.하하하, 내가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거지?나는 서둘러 고개를 흔들며 위층 침실로 돌아갔다.석지훈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있었다. 심각한 부상 때문에 일어나서 움직이는 것이 어려웠다. 그저 조용히 침대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석지훈은 책을 읽을 때 고개를 조금만 숙이고 턱을 살짝 당긴다. 그의 몸에 비추어진 아침 햇살이 사람을 온화해 보이게 했다.석지훈은 웃지 않을 때는 아주 냉담하지만, 웃을 때는 매우 매력적인 남자였다. 나는 그를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나는 다시 다가가서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석지훈은 나를 흘끗 보며 못 참는 듯 농담을 건넸다."석부인 요즘 너무 달라붙는군.""오빠한테만 달라붙지 다른 사람한테는 안 그래요."내가 너무나 당당하게 말하는 것을 보자 석지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말했다."점점 더 뻔뻔해지는군. 왜 아래층에서 걔네와 같이 있지 않고?""저는 오빠랑 같이 있고
나는 당연히 연시혁에게 더 마음이 기울였다.나는 그가 훗날 예전의 고현성처럼 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오히려 송이연의 곁에 누군가가 함께 있기를 바란다.마음속으로 갑자기 어떤 결정을 내렸다.“음, 이연 씨 먼저 쉬어요.”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조수에게 문자를 보냈다.[몇 명을 보내서 오혜원을 감시해. 조금이라도 이상한 움직임이 보이면 즉시 나에게 보고하도록!]절대 오혜원이 문제를 일으키게 해서는 안 된다!위층 침실로 돌아와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석지훈은 아직 자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자마자 그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나는 웃으며 물었다.“언제 일어났어요?”“네가 처음 들어왔을 때.”방금 별장에 돌아왔을 때 석지훈을 흘끗 보고 갔었다. “저 때문에 시끄러워서 깬 거예요?”그는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아래층은?”“이연 씨예요. 이연 씨랑 승아는 당분간 여기에서 지낼 거예요. 아, 그리고 한민수가 병원에서 했던 말들...일부러 우리에게 들으라고 한 말인 거 알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뭘 해야 하고 뭘 하면 안되는지 알아요. 이 일에 관여하지 않을 거예요.”석지훈은 담담하게 응, 하고 대답했다.나는 그가 호숫가에서 정신이 오락가락할 때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나는 그가 무엇을 신경 쓰는지, 무엇을 질투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고현성이 떠올랐다.석지훈이 고현성을 염두에 둔 것이든 아니든 나는 그에게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나는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나는 당신의 아내이고, 고현성에게는 어떤 미련도 없어요. 그 사람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저와는 큰 관계가 없어요.”석지훈의 눈빛이 깊어졌다.“정말?”“석지훈 씨, 뭐가 그렇게 걱정되세요?”석지훈이 고개를 돌리자 나는 그에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정말이에요.”석지훈이 입꼬리를 올렸다.“까불기는.”나는 일부러 놀리듯 물었다.“왜 웃어요?”석지훈이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나 놀리는
나는 깜짝 놀랐다. 오혜원이 나한테 되물어볼 줄은 생각도 못 했다.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네 뜻대로는 안 될 거야.”“네 눈엔 내가 그냥 나쁜 사람으로만 보여? 옛날엔 네가 살아있길 바랐는데, 그 과정에서 좀 잘못된 짓을 했을 뿐이야.”잘못된 짓일 ‘뿐’이라니...참 쉽게 말한다.“적어도 거짓말쟁이는 맞지.”더 상대하기도 귀찮아서 형수랑 송이연에게 운성시에서 얼마 동안 머물 예정인지 물었다. 형수는 조민수가 동성시에서 사업 때문에 바빠서 당분간 못 떠나고, 한 일주일 정도 있어야 할 것 같다고 했다.송이연은 망설이면서 말했다.“일단은...”“뭐가 겁나요?”내가 물었다.송이연은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겁내는 건 아니에요.”나는 바로 집으로 들어가서 승아를 안았다. 승아는 순하게 나를 고모라고 불렀다. 나는 웃으면서 물었다.“고모 보고 싶었어?”“응, 작은 고모 보고 싶었어.”“그러면 고모네 가서 며칠 지낼래?”승아는 신나서 물었다.“엄마도 같이 가?”“응, 엄마도 같이 갈 거야.”이럴 때일수록 절대 승아를 이곳에 두고 갈 수 없다.이곳에 두는 건 송이연을 협박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그럼 나 작은 고모네 갈래.”송이연이 와서 그런지 승아는 엄청나게 신나서 내 품에서 빠져나가 마당으로 송이연을 찾으러 갔다.송이연은 힘겹게 송승아를 안아 올렸다.“엄마, 우리 고모네 가도 돼? 고모네에 강아지 있대~”승아에게 우리 집에 개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그런데 그 집은 핀란드를 말하는 거였다.뭐, 괜찮다. 나중에 비서를 시켜서 한 마리 데려오면 되는 일이다.송이연은 웃으면서 대답했다.“그래.”나는 오혜원이 울적한 표정을 짓는 걸 뒤로하고 송이연과 승아를 데리고 내 별장으로 돌아왔다. 그때 석지훈은 아직 침실에서 자고 있었다.나는 송이연이랑 승아를 1층 방으로 안내했다.다 정리하고 나서야 송이연에게 물었다.“왜 걔를 처리하지 않는 거예요?”내가 말한‘걔’는 오혜원을 의미했다.송이연의 권력이면 오혜원을 처
연 씨 가문에는 대를 이을 자식이 없었다.나는 오혜원에게 따져 물었다.“내가 전에 뭐라고 했지?”오혜원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지더니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 엄마가 거실에서 나오며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수아야, 무슨 말을 하는 거니? 왜 그런 말투로 말하는 거야?”엄마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혜원이가 왜 돌아왔는지 궁금해서요! 그리고 우리 새언니랑 이연 씨는 왜 운성에 있는 거예요?”“네 오빠랑 새언니는 나를 보러 운성에 왔고 이연 씨는 승아 보러 온 거란다. 너는 오늘 갑자기 왜 왔어?”나는 엄마에게 되물었다.“저는 맨날 오는 거 아니었어요?”“나는 네가 아직 핀란드에 있는 줄 알았지.”엄마가 말했다.나는 오혜원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말했다.“맞아요, 원래는 핀란드에 있어야 하는데 성가신 파리 몇 마리 때문에... 운성에 돌아와서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 엄마, 연 씨 저택이랑 새언니랑 이연 씨에게 경호원을 더 배치해서 안전을 확보해야겠어요.”“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나까지 걱정되게? 설마 또 전처럼...”엄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나는 엄마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아니에요. 그냥 집안의 도둑을 경계하는 것뿐이에요.”나는 ‘집안의 도둑'이라는 말을 분명하게 강조했다. 엄마는 뭔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나를 쳐다보았다가 오혜원을 포함한 다른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그녀의 시선은 오혜원에게 멈췄다.엄마는 곤란한 표정으로 물었다.“너희 사이에 무슨 오해가 있는 거니? 수아 네가 혜원이를 반기지 않는 것 같구나.”나는 입술을 꾹 다물고 웃으며 말했다.“그럴 리가요. 혜원이가 돌아와서 엄마가 이렇게 기뻐하는데 제가 어떻게 반기지 않겠어요? 그냥 좀 감회가 새로워서요.”엄마는 반신반의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오혜원을 괴롭힐까 봐 걱정하는 듯 엄마는 말없이 서 있는 오혜원의 손을 잡고 저택 안으로 들
고현성의 일에는 더 이상 관여할 수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그저 방관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고현성이 이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는 생각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었으니까.그의 능력은 석지훈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한민수는 석지훈에게 몇 가지 보고를 마친 후 자리를 떴다. 떠나기 전, 그는 석지훈에게 당부했다.“빨리 몸 회복해. 난 핀란드에 오래 있을 수 없어. 형이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야.”석지훈은 되물었다.“무슨 일이라도 있어?”“급한 일이 있어서 운성에 다녀와야 해.”“그럼 핀란드 쪽 일은 모두 너한테 맡길게.”한민수는 순간 당황하며 되물었다.“무슨 뜻이야?”“저녁에 사모님 모시고 운성으로 돌아갈 거야.”한민수의 얼굴은 분노로 파랗게 질렸지만 석지훈은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한민수가 떠난 후, 나는 조심스럽게 석지훈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물었다.“오빠, 왜 그렇게 급하게 운성으로 돌아가려는 거예요?”석지훈의 몸에는 오랜 세월 쌓인 흉터가 가득했다. 특히 심장 근처에 새로 생긴 총상은 보기만 해도 숨이 막혔다. 그는 오로지 얼굴과 목에만 흉터가 없었다.내 손가락이 그의 피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자 그는 나지막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아침에 운성으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하지 않았어?”맞다. 운성에 돌아가서 오혜원을 감시하려고 했었다.하지만 갑작스러운 사건 때문에 그만뒀었고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그런데 그가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니.“그 일은 급한 거 아니에요.”석지훈은 그의 몸 위에서 마음대로 움직이는 내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너무 오래 머물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때 그가 입을 열었다.“다친 김에 요양 삼아 운성에 가서 우리 사모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겠어. 이쪽 일은 한민수에게 맡기고 겸사겸사 쉬어야지.”석지훈은 다쳐야만 쉴 수 있었다.그리고 그는 언제나 나와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했다.나는 감동했다.“네, 그렇지만 너무 서두르지 마
“난 항상 쓸모없는 것 같아요. 사실 아직도 오빠가 왜 나를 사랑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난 성격도 좋지 않고 몸도 약하고 다른 사람을 잘 챙기지도 못하는 데다 이혼까지 했는데...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나 싶거든요. 그런데 하필이면 오빠의 눈에 들었어요. 강하고 잘생기고 눈 높고 완벽한 사람이 날 좋아하는 게 처음엔 무서웠어요... 아니다. 처음엔 내가 먼저 오빠를 좋아한다고 했었죠. 난 항상 궁금했어요. 오빠가 대체 나의 어떤 점을 보고 나를 좋아하게 됐는지...”“희망.”그가 대답했다.나는 의아하게 물었다.“무슨 희망이요?”“사랑에 상처받고 힘들어도 넌 여전히 하늘을 보고 있었어. 안 그랬으면 나를 선택하지 않았겠지. 넌 항상 희망과 따뜻함을 갈망했고 누군가가 널 구해 주길 바랐지.”그랬다. 그때 고정재가 몇 번이나 나에게 호감을 표시했지만 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석지훈이 나타나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가 강대해서가 아니라 그는 나에게 그 누구도 주지 못했던 믿음과 편안함을 줬기 때문이었다. 그는 항상 내 뒤에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힘들어 보이면 어김없이 나타났으니까.그때 석지훈은 진짜 내 뒤에 있었다.나는 항상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그런데 내가 원한다고 해서 그가 내게 주겠는가?그는 구세주가 아니었다.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석지훈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세상 모든 일에 이유가 있어야 해? 널 좋아하는 데 이유가 필요하다면 아마 우린 평생 인연이 닿지 않았을 거야. 사랑해. 수아야, 나도 모르게 너한테 빠졌어.”석지훈의 달콤한 말에 나는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나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웃다가 울다가 내 모습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까. 그런데도 석지훈은 내 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우리 사모님은 정말 예뻐.”“오빠, 닭살 돋는 말 좀 그만 해요.”바로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한민수가 서 있었다. 우리가 괜찮은 것을 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두
석지훈은 의식을 잃었고 나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나는 정말... 정말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군가가 나를, 그리고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석지훈을 구해 주길 바랐다.나는 흐느껴 울었다. 몇 분 뒤 윤 비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사모님, 석 대표님 상태는 어떠십니까?”강렬한 희망의 빛이 내 마음을 비추었다. 나는 급히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윤 비서님, 빨리 지훈 씨를 구해 줘요!”너무 급하게 일어나는 바람에 나는 그만 호수에 빠지고 말았다.아마 몸이 너무 약해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었다. 나중에 윤 비서가 나를 구해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나는 꿈을 꾸었고 같은 꿈을 계속해서 반복해서 꾸었다.꿈에는 부모님과 두 아이만 나왔다.그리고 승아와 연시혁, 그리고 내가 있었다.그저 우리 가족만 꿈에 나타났다.이상한 꿈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예고하는 것 같았다.나는 불안한 마음에 악몽이라고 생각되어 번쩍 눈을 떴다. 옆을 돌아보니 석지훈이 내 옆에 누워 있었다.윤 비서는 나와 석지훈을 같은 병실, 같은 침대에 눕혀 놓았다. 침대는 아주 넓었다. 아마 내가 몸을 뒤척이다 석지훈의 상처를 건드릴까 봐 그런 것 같았다.석지훈은 아직 의식이 없었다.붕대를 온몸에 감고 있었고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그리고 입술은 바싹 말라 있었다.나는 그가 이렇게 약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단 한 번도 없었다.나는 손을 뻗어 그의 눈썹을 살며시 만졌다. 그러자 그가 눈을 떴다. 나는 놀라서 물었다.“언제 깨어났어요?”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너 먼저.”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나는 마음이 너무 무거웠고 그의 약한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내가 우는 것을 보자 석지훈은 손을 뻗어 내 눈물을 닦아 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난 괜찮아.”“너무 무서웠어요.”나는 말했다.“어. 네 마음 다 알아.”역시 석지훈은 내 마음을 다 알고 있었다.“석지훈,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