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현성이 살짝 멈칫했다.“또 무슨 수작이야?”창밖에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의 23살 생일까지 두 달도 남지 않았다. 그날은 섣달 그믐날인데 그때까지 내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매끈한 배를 어루만졌다.“내가 현성 씨 좋아하는 거 알잖아요. 나에 대한 모든 편견을 내려놓고 딱 3개월만 연애해요, 우리.”고현성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꿈도 꾸지 마.”휴대전화 너머로 온기라곤 전혀 없는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방 안에 가득한 외로움이 날 덮치는 것 같았다.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심장이 저릿할 정도로 아팠다.나는 울고 있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 덤덤하게 웃으며 말했다.“현성 씨, 나랑 이혼하고 싶다면서요? 그럼 이렇게 해요. 나랑 3개월 연애하는 동안에 예뻐해 주고 챙겨줘요. 설령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날 사랑하는 척해요. 만약 3개월 버티면 이혼해 줄게요. 그리고 연씨 가문의 모든 재산도 다 현성 씨한테 줄게요. 생각해봐요. 3개월만 버티면 나랑 이혼할 수 있고 수십조 원에 달하는 재산을 손에 넣을 수 있어요. 그리고 당당하게 임지혜 씨와 결혼할 수도 있고요. 현성 씨한테는 전혀 밑지는 장사가 아니에요.”고현성이 덤덤하게 물었다.“너랑 같이 3개월 동안 연기하라고?”3개월 동안 관중은 나 하나뿐이었다. 결국에는 나 자신을 기만하는 거나 다름없었다.나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말했다.“네. 나랑 연애해요.”“허. 역겨운 소리 좀 그만할래?”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고현성은 내가 보는 앞에서 검은색 마이바흐를 몰고 별장을 나가버렸다....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 머리가 윙 했고 목이 너무 말라 침을 삼킬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어젯밤에 너무 많이 운 모양이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의사의 말대로 약을 먹은 다음 준비한 후 회사로 출근했다.고현성의 아내인 것 외에 나는 선양 그룹의 대표였다. 한창 회사 서류를 처리하고 있는데 고씨 가문 진화 그룹의 회장 고승철에게서 전화
고현성이 화를 내면서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내가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 나가려던 그때 가장 만나기 싫었던 그 사람을 만났다. 바로 고현성이 지금까지 사랑하고 있는 여자 임지혜.나는 임지혜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건네고 그냥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임지혜가 나지막하게 나를 불렀다.“고씨 가문 사모님 맞죠?”순간 멈칫한 나는 그녀를 흘겨보았다.“왜 그러시죠?”“사모님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좋아요?”임지혜의 도발에 나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옅은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지만 립스틱은 진한 레드색을 발랐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에도 얇은 롱원피스에 하얀색 코트로 가녀린 몸을 가리고 있었다.‘예쁘긴 하네. 이러니까 현성 씨가 그렇게 좋아하지.’연적끼리 만나봤자 좋을 일이 없었다. 나는 임지혜를 무시하고 그냥 가려 했지만 그녀가 나를 비웃었다.“내 자리를 빼앗아 갔는데 편할 리가 없겠죠. 현성이가 수아 씨를 사랑해요? 귓가에 대고 달콤한 얘기를 해주던가요? 밥도 해준 적 없죠? 특별한 날에 선물 사주던가요? 한 번도 그런 적 없죠? 현성이는 절대 수아 씨한테 해주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그저 선양 그룹 대표라는 이유로 사모님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에요.”임지혜의 한마디 한마디가 나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그녀가 한 말들은 전부 고현성이 그녀에게 해줬던 것들이었다. 질투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질투해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모님 자리도 지키지 못하게 생겼는데...나는 덤덤하게 웃으며 맞받아쳤다.“그럼 지혜 씨는요? 3년 전에 난 지혜 씨한테 기회를 줬었어요. 지금 인정하든 안 하든 현성 씨 와이프는 나예요. 그리고 지혜 씨 말이 맞아요. 난 선양 그룹 대표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현성 씨한테 결혼을 강요했어요. 근데 당신은...”절대 남에게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내가 아니었다. 상대가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가만히 있지만 건드린다면 그대로 갚아주는 성격이었다.그런데 고현성은 이런 나를 3년이나 모욕했다
고현성은 내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발견하고는 소파에 편하게 앉아 내가 저녁을 다 먹기를 기다렸다. 몇 시간 동안 내버려 둔 탓에 음식이 차갑게 식어버렸다.입맛이 없어서 맛도 잘 느껴지지 않았던 나는 밥을 천천히 먹었다. 그런데 기다리다가 인내심이 바닥난 고현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와서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연수아, 대체 어쩌겠다는 거야?”나는 그릇을 내려놓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때 고현성의 시선이 음식 쪽으로 향했다.“다 네가 한 거야?”고현성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나는 설거지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무덤덤하게 말했다.“낮에 현성 씨한테 저녁에 집에 와서 밥 먹겠냐고 물어봤었잖아요. 들어오겠다고 해서 현성 씨가 좋아하는 요리들로 한상 차렸죠.”고현성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대체 무슨 수작인 거야?”나는 수저를 치우던 동작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두 눈 사이에 예전에 느꼈던 따뜻함은 이제 더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나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결국 침묵을 택했다. 아무 말 없이 주방에서 설거지하고 나왔을 때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위층을 올려다보며 올라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안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어보니 고현성이 소파에 앉아 있었고 다리 위에 얇은 금색 노트북이 놓여있었다.나는 잠옷을 챙기고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손가락이 하얗게 될 때까지 욕조에 앉아 있다가 욕실 문을 연 순간 짙은 기운이 날 감싸 안았다.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하고 침대까지 끌려갔다. 마지막에 고현성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지혜가 그러는데 3년 전에 네가 강요해서 미국으로 간 거래.”고현성은 이미 내가 그런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그가 그렇게 사랑했던 여자는 3년 전에 그와 6억 원 사이에서 고민도 없이 6억 원을 선택했다.그렇다. 3년 전에 내가 임지혜에게 선택을 하라고 한 건 사실이었다.만약 임지혜가 고현성을 선택했더라면 나는 고씨 가문과의
3개월도 남지 않았는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생명이 끝나가는데도 나는 제대로 된 연애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나의 소원은 고현성과 뜨거운 연애를 하는 것이었다. 고현성이 나를 조금만 달래줘도 나는 아마 날뛰듯이 기뻐할 것이다.그나저나 나는 평생 귀한 대접과 사랑을 받은 적이 없었다. 하여 임지혜를 자주 질투했고 미친 것처럼 고현성을 욕심냈다.고현성이 나를 괴롭히고 모욕해도 기꺼이 당해주었다. 그의 앞에서 나는 한없이 보잘것없고 비굴한 존재였다.나는 항상 자신을 낮추었고 지금까지 한 번도 반항하지 않았다....고현성은 평소처럼 그냥 휙 가버린 게 아니라 샤워를 마친 후 소파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회사 서류를 처리했다.나는 잠옷을 입고 가볍게 물었다.“오늘 여기서 자고 가려고요?”나는 시력이 좋아 그의 노트북 화면에 나타난 서류를 정확히 보았다. 전부 예전에 선양 그룹과 체결했던 계약이었다.최근 선양 그룹에 많은 문제가 생겼다. 거래처들이 줄줄이 계약을 파기하면서 주가가 뚝뚝 떨어졌다. 이 모든 게 다 고현성이 한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까발리지 않았다. 그가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정이길 바랐다.고현성이 무시하자 나도 더는 방해하지 않고 서랍에서 이혼 합의서를 꺼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혼에 관해 그와 상의하려는데 임지혜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임지혜의 두려움 가득한 목소리가 방에 울려 퍼졌다.“현성아, 살려줘. 그 여자가 사람을 시켜서 날 납치했어. 내 몸을 더럽혀서 너랑 어울리지 않는 여자로 만들겠대.”고현성은 거의 본능적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네가 시킨 거야?”나는 두 손을 펼쳐 보이며 웃었다.“아니라고 하면 믿을 거예요?”고현성이 나가려고 하자 나는 달려가서 그를 잡았다. 그러고는 용기 있게 그의 얼굴을 만지면서 물었다.“현성 씨는 왜 그 여자 말을 그렇게 철석같이 믿어요? 자작극일 수도 있잖아요.”“난 지혜를 잘 알아. 걔는 너 같은 사람이 아니야.”나는 순간 멈칫했다.‘너 같
임지혜는 나를 보더니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면서 물건을 집어 던졌다.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진짜 내가 한 짓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본 고현성이 다급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고현성의 가슴팍은 따뜻해서 늘 상대에게 안정감을 주었다.임지혜도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고현성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그리고 내 남편은 임지혜를 다독이느라 여념이 없었다.“괜찮아. 내가 있는 한 절대 너한테 무슨 짓 하지 못해.”고현성의 다정함은 임지혜만의 것이었다. 나에게 말할 땐 말투가 싸늘하게 바뀌었다.“병원에는 왜 왔어? 당장 집에 가지 못해?”임지혜의 앞에서 그는 늘 나를 집에 돌려보냈다.나는 시선을 거두었고 고현성이 임지혜에게 다정하게 대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임지혜는 고현성을 믿고 뜨거운 물을 나의 얼굴에 확 뿌렸다. 나는 고통스럽게 소리를 지르면서 뒷걸음질 치다가 뭔가에 부딪힌 바람에 넘어지려 했다. 그 순간 누군가 내 팔을 잡았다.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현성 씨.”고현성은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임지혜를 째려보고는 나를 응급실로 데려갔다. 정교하게 한 메이크업이 번지면서 한쪽 얼굴의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점심에 넘어졌을 때 생긴 상처였고 손톱으로 긁으면서 더 심해졌다.고현성은 거즈와 알코올을 가져와 말없이 소독해주었다. 너무도 아팠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그가 나에게 건네는 잠깐의 따뜻함을 만끽했다.검은 머리도 다 젖고 말았다. 나는 고현성의 길고 하얀 손가락을 내려다보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고현성 씨.”고현성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왜?”나는 욕심을 드러내며 물었다.“내가 연씨 가문을 현성 씨한테 주고 이혼도 하겠다고 하면 나랑 연애해볼 생각 있어요?”고현성이 움직임을 멈추고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물었다.“어제 지혜가 귀국한 다음부터 계속 이상했어. 대체 뭐 하자는 거야?”고현성은 나에게 인내심이 별로 없다고 얘기했었다. 잔뜩 찌푸린 미간만 봐도 지금
나는 꿈을 꾸었다. 그곳은 연씨 가문 별장이었고 집에 부모님과 고현성이 있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면서 나의 23살 생일 파티를 어떻게 할까 상의하고 있었다.내가 소파 옆에 서 있는데 고현성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수아 빨간색 좋아하니까 빨간 장미꽃을 세팅하는 건 어때요? 제가 피아노도 직접 연주할게요.”고현성의 표정은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창밖의 햇살이 그에게 비추면서 더욱 멋있어 보였다. 나는 손을 내밀어 그의 미간을 어루만지려 했다. 그런데 손가락은 그를 뚫고 허공에 머물렀다. 당황한 내가 계속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내가 목놓아 울부짖던 그때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나는 두 눈을 번쩍 떴다. 병실에 누워있었고 낮에 입었던 밝은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으며 옆에는 싸늘한 표정의 고현성이 서 있었다.꿈속에서 다정했던 고현성을 봤던 탓인지 차가운 그를 차마 볼 수가 없어 두 눈을 감았다.“아까 무슨 일 있었어요?”고현성은 시선을 늘어뜨린 채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 고승철이 갑자기 병실 안으로 들어오더니 고현성을 째려보면서 화를 냈다.“방금 넘어져서 얼굴이 피범벅이 됐어.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 여자만 아니었더라도 병원에 와서 이런 일 당하지 않았을 텐데. 수아야, 너 평소에 현성이를 너무 풀어줬어. 남편을 잘 단속했어야지.”‘남편이라... 방금 이혼하자고 했는데.’나는 고현성을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이목구비가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었고 아버지의 얘기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나는 웃으면서 고승철에게 말했다.“아버님, 우리 이혼했어요.”그 소리에 고현성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고 고승철도 놀란 눈치였다. 다행히 내가 낮에 귀띔이라도 한 덕에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낮에 그 얘기를 꺼내더니 벌써 이렇게 빨리...”나는 입술을 깨물었다.“빠른가요? 현성 씨는 3년 전에 이미 이혼하고 싶어 했어요. 지금까지 끌어도 아무도 득을 본 사람이 없고요. 아 참, 전 사업 머리가 없어서 선양 그룹이
운성시의 하늘에 흰 눈이 흩날리고 있었고 대지를 하얀색으로 뒤덮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나는 안에 금색 롱원피스를 입었고 밖에는 하얀 코트를 입었다. 그리고 거기에 예쁜 실버 귀걸이를 매치했고 메이크업까지 한 채 길거리를 목적 없이 걸어 다녔다.운성시는 아주 시끌벅적했지만 나는 외톨이처럼 어울리지 못했다. 나는 방황하듯 사람들 사이에 서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찬바람이 스치면서 눈꽃이 얼굴에 내려앉아도 전혀 춥지 않았다. 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평범하고 키도 평범한 한 사람을 따라갔다.그 사람이 담배를 피우던 그때 나는 용기 내어 다가가 은행 카드를 건네면서 부탁했다.“내가 10억 원 줄 테니까 나랑 3개월만 연애할래요?”그는 마치 바보를 쳐다보듯 나를 보았다.“미안해요. 난 여자 친구가 있어요.”혼자 걸어 다니는 걸 보고 용기 내서 다가간 것이었는데...“알겠어요. 괜찮아요.”나는 실망한 얼굴로 발걸음을 돌리다가 또 다른 평범한 남자를 찾았다. 사실 나 정도 얼굴이라면 남자들이 거절할 리가 없었고 게다가 10억으로 유혹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 때문에 그들은 되레 날 미친 사람 취급했다.“나랑 연애할래요?”“머리가 어떻게 됐어요? 가족한테 연락해 줄까요?”나는 멋쩍게 웃었다.“아닙니다. 다른 사람 찾아볼게요.”또 다른 사람을 잡고 물었다.“나랑 연애할래요?”“미안해요...”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제대로 된 연애가 하고 싶었고 사랑을 받고 싶었을 뿐인데. 왜냐하면 난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느낌이 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행복이라는 게 대체 어떤 걸까?내가 해본 거라곤 임지혜를 미친 듯이 질투한 것뿐이었다.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한 사람에게 다가갔다.“나랑 연애할래요?”그런데 그때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언니, 진짜 언니였어요?”내가 경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고씨 가문 사람 고민영이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고현성이 싸늘하게 서 있었다.나는 민망함이 극에 달했고 고민영이 놀란 기색이 역력한
내가 아무 말이 없자 고현성은 끝까지 계속 빤히 쳐다보았다.버스가 다음 역에 도착했을 때 나는 황급히 버스에서 내렸고 고현성은 더는 따라오지 않았다. 나는 택시를 타고 다시 아까 그곳으로 돌아가 차를 가지고 별장으로 돌아갔다.커다란 별장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나는 소파에 앉아 한참 동안 멍하니 있었다. 머릿속에 고현성이 했던 그 한마디가 계속 맴돌았다.“지혜한테 결혼식을 올려주기로 했어.”자세히 생각해보면 임지혜에게 결혼식을 빚진 건 사실이었다. 3년 전에 임지혜가 고현성을 포기했고 고현성도 임지혜를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였다.만약 임지혜가 6억 원을 받지 않고 운성시를 떠나지 않았더라도 고현성은 그녀와 헤어지려 했을 것이다.사랑 속에서 누가 옳고 누가 틀렸다고 할 수 있겠는가?성대한 결혼식을 3년 전에 임지혜에게 줬어야 했다. 나는 그저 우연히 기회가 생겨 그 자리를 차지했고 이젠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을 뿐이었다.내가 한창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그때 최희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최희연은 몇 안 되는 나의 절친이었고 운성시에서 고양이 카페를 운영했다. 카페에 들어가자마자 고양이들이 여유롭게 걸어 다녔다. 그나저나 카페는 항상 적자 상태였고 지금까지 내가 투자한 덕에 겨우 살아남았다.나는 휴대전화를 귓가에 대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최희연의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옆에 음악 센터가 있잖아. 저녁에 피아노 공연이 있는데 미국에서 온 연주가래. 너 피아노 좋아하지? 지금 이리 와. 저녁에 같이 공연 보러 가자.”내가 좋아하는 피아노 공연은 단지 고현성이 연주하는 피아노였다.고개를 살짝 수그리자 테이블 위에 놓인 10억짜리 은행 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길거리를 거닐며 사랑을 사려 한 바람에 미친 사람 취급당했고 고현성에게 초라한 모습마저 보여주고 말았다.돈이 있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으니 차라리 최희연에게 카페 운영 자금으로 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최희연과 공연을 보기로 했다.“한 시간 정도면 도착해.”나는 방을
석지훈은 내 말에 대꾸하지 않았고 여전히 차가운 태도를 유지했다. 아마도 내가 왕자현을 칭찬한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그는 내가 왕자현의 외모에 반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석지훈은 내가 늘 그의 미모에 유혹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그의 팔에 매달렸다. 그는 차갑게 나를 보며 물었다.“왜?”나는 일부러 물었다.“나한테 화났어요?”그는 냉정하게 대답했다. “아니.”또 아니란다.나는 다시 물었다.“혹시 질투하는 거예요?”그는 차갑게 말했다.“아니.”“내 마음속에는 오빠가 제일 잘생겼어요!”나는 발끝을 세워 석지훈의 턱에 입을 맞춘 후 두 손으로 그의 뺨을 감싸 쥐고 그의 눈을 바라보며 웃는 얼굴로 설명했다.“내 마음속에선 오빠가 제일 멋있어요! 아무도 오빠랑 비교할 수 없어요! 그리고 오빠가 잘생기지 않았더라도 난 오빠를 좋아했을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건 오빠라는 사람이지 오빠의 외모가 아니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석지훈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거짓말.”그가 이렇게 대답한다는 것은 화가 풀렸다는 의미였다.나는 다시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그런데 중심을 잃고 몸이 살짝 기울어지자 석지훈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왕자현의 저택의 따뜻한 방에서...최희연이 나를 찾아왔을 때 나는 온몸에 피로를 느끼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때 석지훈은 방을 나가 왕자현을 만나러 갔다.왕자현이 그에게 문자를 보냈기 때문이다.[석지훈, 거실에서 얘기 좀 해.]나는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물었다.“무슨 일이야?”“나는 자현 씨의 아내이니 조만간 그와 관계를 갖게 될 거야. 이건 피할 수 없는 일이잖아. 나 처녀막 수술을 하고 싶어.”나는 입술을 깨물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최희연이 먼저 말했다.“내가 이러는 건 뭔가를 숨기려는 게 아니야. 그는 내가 처녀가 아니라는 것도, 내가 낙태를 했다는 것도, 그리고 내가 두 남자를 만났다는 것도
석지훈은 갑자기 나를 놓아주고 침대 옆에 가서 앉았다. 다리 한쪽을 의자에 올리고 팔꿈치를 무릎에 괴는 모습이 평소와 달리 건들거렸다.게다가 검은 코트 차림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나는 그가 화가 났고 내가 달래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아니면 내가 그에게 사과해야 할 수도 있었다.하지만 나는 일부러 그의 비위를 맞추지 않았다.오히려 그를 놀리고 싶었다.나는 그의 옆에 가서 신발을 벗고 침대에 올라갔다. 방은 매우 따뜻했다. 바깥은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지만, 방안은 봄처럼 따스했다. 나는 조용히 패딩을 벗었다.안에는 스웨터를 입고 있었지만 나는 벗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내가 아무 반응이 없자 석지훈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정말 잘생겼어?”석지훈은 아직도 그 일에 매달리고 있었다. 나는 웃음을 참으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잘생기지 않았어요? 왕자현 씨는 분위기가 끝내주잖아요. 정말 멋있어 보이던데!”석지훈: “...”침대 옆에 앉아 있던 남자의 얼굴은 매우 어두웠다. 그는 갑자기 손을 뻗어 내 발목을 잡고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내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는 내 입술에 키스했다.“잠시 밖에 나갔다 올게.”‘밖에 나갔다 온다고? 이건 너무하잖아!’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오빠.”그는 곁눈질로 나를 차갑게 쳐다보더니 흘끗 보고는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나: “...”그는 고의로 나를 벌주는 것이었다석지훈은 질투하는 것도 모자라서 복수까지 하는 것이었다.나는 침대에서 뒹굴며 그가 언제 방으로 돌아올지 생각했다.하지만 문 앞에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실망감이 점점 커져서 나는 옷을 챙겨 입고 석지훈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가 그가 왕자현의 거실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거실에는 값비싸 보이는 피아노가 한 대 놓여있었다.왕자현도 거기에 있었고 차를 끓이고 있었다.내가 들어가자 두 남자는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석지훈은 미간을 찌
“희연아, 남편 정말 잘 얻었네!”최희연은 농담처럼 물었다.“부럽지?”나는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하얀 도포를 입은 절세 미남이라, 정말 너무 완벽해. 모든 여자들의 이상형이잖아. 쯧, 진짜 부럽다!”“칭찬도 잘한다!”내가 왕자현을 이렇게 칭찬한 건 최희연이 그에게 관심을 좀 더 가졌으면 해서였다. 왕자현은 그녀가 기댈 만한 남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리고 왕자현은 이런 칭찬을 받을 만했다.내가 통나무집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왕자현은 연주를 멈추고 나를 보며 웃었다.“연수아 씨.”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저를 아세요?”“네. 희연이 절친이잖아요.”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일어서더니 긴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내 옆을 보고 웃었다.“석 대표님도 와 계시는데.”나는 깜짝 놀라 황급히 통나무집 안으로 들어갔다.문 옆 복도에서 석지훈이 두 손을 등 뒤로 모으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위치는 마침 왕자현과 마주 보고 있었는데 마침 내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나는 방금 전까지 그가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게다가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이 어두워 보였다.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지훈 씨, 왔어요.”그는 시선을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내가 이제껏 본 적 없는 차가운 눈빛이었다. 그가 나를 무시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작게 “응.” 하고 대답했다. 왕자현과 최희연의 앞에서 내 체면을 세워준 것이다.왕자현이 말했다.“연수아 씨, 희연이가 그러는데 두 분 여기서 며칠 묵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방금 손님방을 하나 정리해 두었어요. 뒤편에 있으니 사람을 시켜 안내해 드리죠.”왕자현은 사람을 시켜 우리를 방으로 안내했다. 석지훈은 앞서 걸었고 나는 1미터쯤 뒤에서 따라갔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그에게 거칠게 밀쳐져 문틀에 부딪혔다.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나는 당황하며 물었다.“왜 그래요?”석지훈의 표정은 매우 어두웠다. 나는 그가 이런 모습인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내가 그에게
석지훈이 떠나고 30분쯤 지났을까, 내가 휴대폰을 내려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최희연이 온천 회관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내 몸에 남은 흔적을 보고는 일부러 놀리듯 물었다.“방금 온천 옆에서 남자 바지랑 셔츠를 봤는데 어떤 차가운 남자 옷 같더라! 쯧쯧, 내가 눈치 없이 온 거 아니야?”나는 일어나 최희연이 보는 앞에서 옷을 입으며 되받아쳤다.“너랑 왕자현 씨는...”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챈 최희연은 황급히 말을 막았다.“아무 말도 하지 마. 나랑 자현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결혼하고 나서 지금까지 그런 쪽으로는 아무 말도 안 했고 포옹이나 손잡는 것도 한 번도 없었어. 그는 항상 부드럽고 예의 바르게 행동해. 그리고 내 얼굴은... 어쨌든 그는 석지훈과 달라!”나는 웃으며 물었다.“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다 네가 말한 거잖아. 근데 왜 갑자기 지훈 씨를 그 사람이랑 비교하는 건데? 솔직히 말해 봐. 만약 그가 너를 원한다면, 넌 그에게 응할 거야?”내 질문을 들은 최희연은 잠시 멍해졌다.“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그가 원한다면 거절하지는 않을 거야. 그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사람이고 나는 왕씨 가문의 하나뿐인 안주인이니까.”나는 그녀 앞에서 한 바퀴 돌며 일부러 물었다.“희연아, 너에게 그는 그저 이용 가치가 있는 관계일 뿐이야?”최희연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이 그래. 이용이라고 하기도 뭐하지만. 그는 내 마음을 알면서도 기꺼이 받아들였어. 아마도 은혜를 갚기 위해서겠지!”나는 호기심에 다시 물었다.“무슨 은혜?”“내가 예전에 그를 구해준 적이 있어. 그가 운 좋게 나에게 구출된 게 아니라 내가 운 좋게 그를 구해준 거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그는 내 삶에 나타난 지 겨우 5년밖에 안 됐지만 난 왠지 모르게 그를 전적으로 믿어. 세상에서 날 배신하지 않을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이야. 이런 믿음은 정말 이상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인연이라는 게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이
[본사 와서 벌 받아.]“쌤통이야.”나는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석지훈이 진유겸을 만난 것은 30분 후였다. 그는 시내 중심가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아이스랜드의 3, 4월은 매우 추웠는데 진유겸은 허리를 굽힌 채 마치 버려진 노숙자처럼 그곳에 앉아 있었다.석지훈은 그의 옆에 앉아 물었다.“무슨 일이냐?”진유겸과 석지훈은 오랜 숙적이었다. 유럽에서 끊임없이 영역 다툼을 벌였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상대이기도 했다. 둘은 첨예하게 대립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면서 오랜 세월 동안 일종의 암묵적인 공감대를 형성해 왔다. 친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진유겸은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내 여자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됐어.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모르겠다.”석지훈은 침묵했다. 연수아 외에는 누구도 위로해 본 적이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진유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었으니까.“지훈아, 우리 같은 남자들은 왜 항상 원하는 걸 얻지 못하는 걸까? 내가... 민솔의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건 사실이야. 난 희연이가 처리할 시간을 줄 줄 알았어. 근데 며칠 만에 갑자기 모든 게 변해버렸어.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아무도 한 사람을 위해 영원히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거.”석지훈이 물었다.“이제 어떻게 할 거냐?”진유겸은 하늘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모르겠어. 왕자현은...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있지만 심오하고 예측 불가능한 사람이야. 아무도 그를 쉽게 제거할 수 없어.”그는 갑자기 말을 멈추고 석지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석지훈은 그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자신과 진유겸은 모두 세계 최고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만약 둘이 손을 잡는다면 분명 왕자현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하지만 그가 왜 진유겸을 도와야 한단 말인가?그의 여자와 최희연은 절친한 친구였으니 그는 항상 최희연의 편이었지 진유겸을 도와 그녀를 다치게 하는 쪽이 아니었다.
석지훈이 방을 나가자 나는 침대에 누워 심심함을 느꼈다. 하지만 석지훈이 왕자현을 안다는 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제 진유겸에 왕자현까지 만나러 간다니.하필 그 두 사람 다 최희연과 얽혀있는 남자들인데.문득 석지훈이 내게 덮어주었던 양복이 온천 옆에 놓여있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일어나 밖으로 나가 양복을 가지고 방으로 돌아왔다. 양복 주머니에는 석지훈의 휴대폰이 들어있었다. 휴대폰을 꺼내자 화면이 켜지면서 원태웅이 보낸 알 수 없는 문자가 있었다.나는 원태웅이 석지훈에게 보낸 문자가 항상 궁금했다.석지훈의 휴대폰에는 비밀번호 잠금이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 호기심에 못 이겨 문자를 열어보니 원태웅이 여러 개의 문자를 보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맨 위로 스크롤을 올려 몇 시간 전 대화 내용을 보니 석지훈이 원태웅에게 말한 내용이었다.[모든 기억이 돌아왔어.]원태웅은 놀란 이모티콘을 보내며 답했다.[벌써요?]석지훈: [...][그럼 형은 어디에 있어?]석지훈은 간단하게 답했다.[아이스랜드.][아이스랜드에는 왜? 설마 윤아 때문인가? 윤아가 아이스랜드에 있어? 맞다, 형이 갑자기 나한테 문자를 보낸 이유가 뭐지? 윤아가 또 형한테 화난 거 아니야?]원태웅은 석지훈의 습관을 꿰뚫고 있었다.석지훈은 담담하게 답했다.[...]나는 석지훈을 너무 잘 안다. 이 말줄임표는 원태웅을 상대하고 싶지 않지만 그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듣고 싶다는 의미였다.[여자는 화가 나도 달래기 쉬워. 게다가 형은 잘생겼으니 누가 정말 형한테 화를 내겠어? 내 말 믿어. 윤아는 분명 거절할 거야. 그럼 그냥 좀 더 박력 있게 나가. 그리고 윤아가 좋아하는 말 많이 해줘. 뭘 좋아하든 그냥 다 맞춰줘. 원칙 같은 건 필요 없어. 자기 여자 앞에서 무슨 원칙이야. 내 말 들어. 틀림없다니까.]석지훈이 답장이 없자 원태웅이 계속해서 말했다.[윤아는 그냥 좀 까다로울 뿐 온순해서 달래기 쉬워.]내가 까다롭다고?석지훈이 대꾸하지 않자 신이 난 원태웅
하지만 그건 과거의 연수아일 뿐이었다.지금의 그녀는 그에게 의지하고 예전보다 성격도 더 까칠해졌지만 살아있는 사람다웠다.그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연수아는 진심으로 그에게 의지하고 그를 가장 사랑하는 남자로 여기며 그에게서 원하는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른 평범한 여자들처럼 꾸밈없이 사랑하고 모든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에게 화가 나면 바로 표정을 굳히는 것처럼 말이다.이런 모습이 진짜 연수아였다. 더 이상 과거 고현성에게 그랬던 것처럼 조심스러워하거나 가질 수 없는 사랑에 아파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직 그, 석지훈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까탈스러운 게 아니라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었다. 그의 윤아는 까다롭지 않다. 그의 윤아는 그저 평범한 행복을 바랄 뿐이었다. 기쁠 땐 웃고, 슬플 땐 우는 그런 그녀야말로 석지훈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비록 그가 시시때때로 그녀를 달래줘야 한다 해도 괜찮았다.석지훈은 정말 괜찮다고 생각했다.그녀의 사랑을 받는 이런 나날들이 행복했다.그는 심지어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이렇게 평생 그녀 곁에 있을 수 있었을 텐데...하지만...인생은 늘 엇갈리고 어쩔 수 없는 일투성이다.석지훈은 옆에 있는 윤 비서를 바라보며 갑자기 뜬금없이 말했다.“윤아가 내 곁에 온 후로 너뿐만 아니라 태웅이를 포함한 몇몇이 규칙을 잊고 나한테 하지 말아야 할 질문들을 계속하더라. 몇 번이나 주의를 줬는데도 멈추질 않고. 내가 우습게 보여? 설마 내 뒷말을 하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아니라고 하지 마. 다 알고 있으니까.”연수아가 석지훈의 곁에 나타난 후에야 윤 비서를 비롯한 원태웅 등은 석지훈에게 부드러운 면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사자 수염을 건드리듯 조심스럽게 농담도 하고 그랬지만 나름대로 선은 지켰다고 생각했다.윤 비서 일행은 늘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결국 석지훈에게 들통나고 말았다.역시 석 대표님은 세상에서
내 손가락은 나도 모르게 그의 허리에 닿았고 붉어진 눈으로 그를 빤히 쳐다봤다.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지만 그 순간 그가 날 끌어안았다.나는 결국 그에게 안겨 방으로 돌아왔다.그는 내 몸의 물기를 닦아주고 침대에 눕혔다.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나를 보고 석지훈은 의외로 농담을 건넸다.그는 예전보다 더 뻔뻔해진 것 같았다.나는 그를 노려보며 대꾸하지 않았다. 석지훈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윤아야, 넌 내 사람이야.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우리 어머니 일은... 내게 위협이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난 누구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아. 설령 어머니가 정말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면 난 슬프고 안타깝겠지만 그뿐이야. 그분이 내 행복을 막는 걸림돌이 될 순 없어. 그분뿐만 아니라, 이 세상 누구도 네가 억울한 일을 당하게 둘 수 없어.”석지훈은 몸을 숙여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너야. 아이들도 너에 비할 바가 못 돼. 아이들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너야말로 내가 평생 지켜야 할 여자라는 거야. 아이들은 네가 내게 준 최고의 선물이고! 윤아야, 앞으로는 네 마음이 나에게서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직접 널 내 세상으로 데려갈게. 괜찮겠니?”그 후에도 석지훈은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했고 내가 원하는 안정감과 편안함을 주었다.난 조용히 응수했다. 그는 내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잠깐 자고 있어. 유겸이가 아직 아이스랜드에 있는데 만나고 와야 해. 그리고 친구라고 하기도 뭐한 친구도 만나야 하고.”예전 같았으면 절대 나에게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난 그를 보내주며 말했다.“가서 볼일 보고 와요.”석지훈이 일어서자 난 그의 손목을 잡고 물었다.“친구라고 하기도 뭐한 친구는 누군데요?”그는 나지막이 대답했다.“왕자현.”석지훈과 왕자현이 아는 사이라고?...석지훈은 무릎까지 오는 검은색 코트로 갈아입고 온천 회관을 나섰다. 계속해서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윤 비서는 석지훈이 나
나는 그 사람이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게 싫었다.하지만 또 그가 나에게 이렇게 잘해주기를 바랐다.화가 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지만 그를 향한 나의 마음은 변함없었다. 그를 만날 수 있었던 건 얼마나 큰 행운인가.아니, 그 사람 눈에 든 게 얼마나 다행인지.“윤아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눈가가 빨개진 채로 그를 쳐다보니 석지훈은 내 몸에 묻은 눈을 털어주고 자신의 정장을 벗어 내게 덮어주며 한숨을 쉬었다.“나는 연애를 해본 적이 없어서 여자를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몰라. 태웅이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놓아두는 게 정답이라고 해서 내가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잊었어.”나는 억울해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석지훈은 하얀 입김을 뿜으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태웅이가 그러더라. 차가운 남자 좋아하는 사람 없다고. 나도 네가 내가 무뚝뚝해서 여러 번 화를 냈다는 걸 알아. 그리고 핀란드를 떠날 때마다 제대로 말하지 않아서 화를 냈다는 것도. 미안해. 내가 부족해서 네가 원하는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게 했고 우리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이에게도 힘든 시간을 주었어.”역시, 석지훈은 정말 다 알고 있었다.그는 내 마음속 깊은 곳의 모든 생각을 알고 있었다.그는 눈밭에 쭈그리고 앉아 나를 꽉 껴안으며 말했다.“어머니 일은 아직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어. 이 일로 네게 실망을 안겨 줘서 미안해. 그러니, 우리 당분간 결혼은 미루는 게 어떨까?”눈이 그의 몸 위로 떨어졌다. 그는 얇은 셔츠 한 장만 입고 있었다. 나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그의 말을 들었다.“먼저 내 세상에 적응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어때? 아가야, 나는 모든 걸 알고 모든 걸 이해해. 표현이 서툴렀을 뿐이야. 앞으로 더 잘할게. 그러니까 화 풀어, 응?”석지훈이 이렇게까지 낮추다니.나는 그를 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깊은 눈으로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일단 따뜻한 곳으로 가자. 몸 녹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