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녀는 서준명의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욕실에서 샤워 준비를 하는 동안, 서준명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보고 부소경이 전화를 받아 그녀의 귓가에 가져다주었다.신세희는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휴...오후에 그만큼 시달렸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뜨겁게 달아오른 남자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다리가 떨렸다.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부소경의 체력은 30분도 되지 않아 다시 회복된다…“별 일 없어요, 오빠. 근데 시간도 늦었는데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전화 했어요?"찰나, 서준명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보였다."할아버지와 서재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어. 할아버지가 주무시는 걸 확인하고 나오니 이 시간이 되었네."서준명은 사실 그대로 말했다.뿐만 아니라, 오늘 고가령과 고소정이 아이와 함께 찾아와 어르신을 뵈었다.지난번에 준 산삼을 받아신 서씨 어르신은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어릴 때부터 고가령이 자라는 것을 지켜본 서씨 어르신은 그녀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두 사람은 서씨 어르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저녁까지 먹고 집으로 돌아갔다.항상 입이 짧았던 어르신은 오늘 밥도 많이 드시고 늦게까지 즐거워하시다 잠에 드셨다.할아버지가 괜찮아진 것을 본 서준명은 고가령과 고소정 모녀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려고 했지만저녁 10시가 넘어도 두 사람은 집으로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갈 기미도 안보였다.역시 두 모녀는 서씨 가문에 눌러 앉아 살려고 들어온 것이다. 서씨 가문에서 살면 밖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대접을 받기 때문이다.시간을 보던 고가령이 하품을 하자 할아버지가 집사를 불렀다."저... 빨리 가령이와 소정이 이부자리...""할아버지!"서준명은 제때 할아버지의 말을 끊었다."할아버지 10시도 훨씬 넘었어요. 가정부들도 자야 돼요.""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서준명은 소파에서 일어나 고가령과 고소정을 보며 말했다."고모... 내일 오전에 가정부들한테 별원을
서준명은 그녀의 비명소리에 깜짝 놀랐다.“세희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신세희는 어쩔 바를 몰라 대답했다.“아니, 그러니까... 오빠 저 침대에서 떨어졌어요.”서준명은 바로 눈치를 챘다.“미안해 세희야. 시간이 너무 늦었다. 내일 출근해서 봐.”그리고 서준명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그 시각, 신세희는 부소경의 품에 안긴채 침대로 향했다.부소경은 그녀의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던지고 다시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여보! 사촌 오빠 전화에 대체 뭐 하는 거예요! 내가 받는게 싫었으면 당신이 받지 말지! 휴 정말 됐어요!”그녀의 화난 목소리에도 부소경은 그저 어깨만 으쓱거렸다.“서준명한테 전해. 다시 늦은 시간에 전화하면 죽여버린다고.”“사촌 오빠라고요! 사촌 오빠!”“남녀 사이에 오빠가 어디 있어!”그는 신세희의 입술을 틀어막았다.그는 세상 만물 이치에서 신세희에게 다가오는 남자들은 다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여보...”“오후에 사무실에서도, 아까도 이미...”“왜? 남편 실력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 같아?”그녀의 말에 신경이 쓰였는지 부소경은 부드럽게 그녀를 달래주었다.다음날 아침.먼저 잠에서 깬 부소경은 곤히 잠든 신세희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신세희는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말했다.“좋은 아침이요, 야수 같은 남편님.”“나를 더 꽉 껴안고 울부짖은 사람이 누군데. 이제와서 야수?”그의 말에 신세희는 부소경의 팔을 꽉 껴안았다.“우리 남편 나쁜 남자였네요.”“더 나쁜 남자가 될 수도 있어.”그녀의 나른한 목소리와 반쯤 풀린 눈은 부소경의 아침을 더욱 활기차게 만들었다.지금 이대로 다시 침대에 누우면 오늘은 출근을 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그는 바로 침대에서 내려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오늘은 몸에 꽉 맞는 옷 금지! 하이힐 금지! 편한 차림에 운동화 신어.”“네네, 남편님”그의 말대로 신세희는 통 큰 바지에 하얀색 후드티를 입었다.금방 잠에서 깬 신유리는 그녀를 보
“엄마, 잠깐만.”아이는 방으로 달려가더니 나비 장식이 있는 머리끈을 신세희에게 건넸다.“엄마, 높게 머리 묶어봐.”신세희는 아이의 요구대로 머리를 높게 묶었다.머리를 높게 묶으니 아이의 말대로 진짜 학생처럼 보였다.아이는 신세희의 차림이 마음에 들기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너무 편한 차림인 것 같아 신경이 쓰였지만 몸이 힘든 것을 생각해 그냥 그대로 입고 부소경과 함께 유리를 유치원에 등원시켰다.유리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볼 때까지 고소정을 만나지 못했다.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제 일로 인해 전학을 갔을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신세희는 아이를 선생님한테 맡기고 다시 차에 올라타 회사로 향했다.회사에 도착한 후, 부소경에게 손을 흔들며 들어가고 부소경도 그의 회사로 향했다.신세희는 손에 가방을 쥐고 휴대폰을 보며 고개를 숙이고 회사로 들어섰다.엘리베이터에 탑승하기 전, 누군가 뒤에서 소리를 질렀다.“세희야!”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엘리베이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서준명이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오빠...”“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어제 일은 내가 미안해.”그가 먼저 어제 일에 대해 말을 꺼내자 신세희가 물었다.“고소정... 그 여자가 어떻게 오빠 개인 명함을 갖고 있죠? 그거 때문에 소경 씨가 저한테 오빠도 적게 만나라고 하는데… 사실 그 개인 명함 갖고 있는 사람 별로 없잖아요.”“그 명함이 왜 고소정한테 있는 거죠? 직원은 오빠의 명함때문에 들여보내준 거라고 했어요.”“휴. 그러니까.”서준명은 한숨을 쉬더니 입을 열었다.“그러니까 어제 선희 씨랑 다시 사귀기로 했어. 그래서 점심에 같이 밥을 먹으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나한테 전화가 오셔서 고가령 고모랑 같이 밥을 먹으라고 하시는 거야.”“그래서 레스토랑에 갔고, 그때 룸에 명함지갑을 놓고 나왔어. 고가령이 그 명함을 손에 넣는 것을 본 아버지가 나한테 전화 하신거고.”“그래서 혹시나
고소정이 부르는 오빠 소리에 서준명은 소름이 끼쳤다.어제저녁,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가 할아버지를 기쁘게 하지 않았다면 절대 참지 않았을 것이다.“너는 여기 어쩐 일이야?”“아 오빠, 저 지나가는 길이였어요.”고소정은 싱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어제 오빠가 집에 들어와 지내도 된다고 해서 오늘 엄마랑 필요한 물건을 사러 나왔어요. 그리고 식구들한테 드릴 선물도 사려고요.”고소정은 말을 하면서 신세희를 힐끗거렸다.신세희가 들었으면해서 일부러 그녀 앞에서 말을 한 것이다.그리고 고소정은 쇼핑백을 서준명에게 건네며 말했다.“오빠, 이건 오빠 선물이에요.”그러자 서준명은 그녀의 손을 쳐냈다.“필요 없어!”고소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신세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오늘의 고소정은 착한 여동생 역할인 듯했다.아주 두 눈을 뜨고 봐주지 못할 지경이다.“오빠, 나 먼저 올라갈게요. 여동생이랑 이야기 나누세요!”“엇! 뭐야!”그때, 뒤에서 로비를 떠들썩하게 하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그 사람은 바로 엄선희였다.엄선희는 민정아의 손을 잡고 신세희 곁으로 다가왔다.엄선희는 아니꼬운 시선으로 고소정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이건 또 어디서 굴러온 쓰레기야?”엄선희는 고소정을 흘겨보며 다시 신세희를 바라보았다.신세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민정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팔짱을 끼고 고소정의 앞에 다가가 기선제압을 하는 것 같았다.“세희 씨! 이 여자한테 그동안 얼마나 많은 남자 등골 빼먹었는지 물어봤어?”“길에 나가서 아무 여자나 잡아와도 얘보단 낫겠다. 아주 축 늘어진 감자처럼 죽을 상이네.”민정아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로비라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마구 내뱉었다.“정아야!”“여자라면 말 좀 이쁘게 해!”“오빠!”“구서준 집에서 그만 나와! 이제 집으로 들어와 살아! 이모한테서 제대로 된 신부수업도 받고!”서준명은 민정아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민정아는 서준명을 쳐다보며 말했다.“우리 세희 씨가 부씨 가문에서 얼마나
두 사람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고소정은 소리를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오빠, 다른 친척분들도 아주 재밌는 사람들이네요.”그리고 그녀는 민정아를 쳐다보며 회사 사모님이라도 되는 것 마냥 말했다.“오빠 사촌 동생 맞죠? 그러니까 내 언니가 되는건가? 저는 고소정이라고 해요. 앗, 미안해요 언니, 언니 선물을 미리 준비하지 못했네요.”민정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머리를 긁적거렸다.“미친년이!”엄선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그리고 고소정을 흘겨보며 말했다.“너, 사람 잘못 찾았어! 서씨 가문에서 돈이라도 많이 갖고 가려고 한 것 같은데, 그것도 일단 내 맘에 들어야 하지 않겠어?”고소정은 미간을 찌푸렸다.“저... 오늘부터 서씨 가문에 들어가서 살게 됐어요.”“누구 마음대로 집에 들어와 살아! 어디라고!”그녀는 버럭 화를 냈다. 곁에 있던 민정아도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고소정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곁에 있던 신세희는 그 모습을 보고 고소정이 쉽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했다.세 사람 중 신세희가 제일 냉정하게 판단을 하고 있었다.그녀는 민정아와 엄선희의 팔을 잡고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두 사람 그만해! 화내니까 얼굴에 주름지는 것 좀 봐! 그만하고 올라가자. 내가 점심에 아주 좋은 마사지숍으로 쏜다!”신세희가 민정아와 엄선희를 끌고 올라갔다.엘리베이터에서 그녀는 아무 일도 없는 척 민정아를 보며 말했다.“정아 씨, 저 여자 쉬운 여자 아니야. 아주 무서운 여자야.”“그치? 나도 느꼈어!”민정아는 바로 신세희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말했다.“그러면 어떡하면 좋을지 우리 세희 씨가 알려줄래?”“저 미친년이 지금 제일 부족한게 무엇일까?”그녀의 말에 민정아의 머릿속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어머! 세희 씨, 오늘 나랑 같은 계열의 색상에 비슷한 스타일의 옷도 입고. 우린 역시 잘 통하나 봐. 안되겠다. 점심에 어디 근사한 곳으로 가서 밥이나 먹을까?”“어디로?”“남편들 불러! 나도 내 남
“오빠... 어떻게 저한테...”서준명은 바로 굳은 표정을 풀고 말했다.“너랑 너희 엄마가 우리 집에 들어와 지내도 괜찮아. 하지만 얌전히 있어. 허튼수작이라도 부리면 바로 쫓아낼 테니까.”고소정은 서준명이 이토록 앞뒤가 다른 사람인 줄 몰랐다.그는 자신을 동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엄마가 한 말에 따르면 엄마는 서씨 가문에서 자라 서씨 가족 사람들과 아주 애틋한 사이라고 했다. 예전엔 서씨 가문의 공주님이라고 불리기도 했었다.근데 지금은 대체 왜 이렇게 변했을까? 겪어보지 않은 갖은 수모에 다시 외국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자신들의 뒤를 봐주던 사람이 최근에 돌아가셔서, 앞으로의 생활이 조금이라도 편하려면 서씨 가문에 빌붙을 수 밖에 없다.고소정은 하는 수없이 다시 미소를 지으며 서준명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오빠, 무슨 소리예요. 저 세희 씨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니에요. 세희 씨는 의심병이 심한 것 같아요. 저 귀국하고 어떻게든 새로운 계약서를 따내려고 노력했어요. 어제는 너무 시간이 급해..”“그만해! 변명하지 말고 열심히 일이나 해!”서준명은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그녀의 말을 끊었다.한참 후, 그가 선심을 쓴다는 말투로 말했다.“혼자 힘으로 이룬 것만이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을 수 있어. 직장도 좋고 서씨 가문의 도움도 있으니 너도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어.”“네 오빠. 저 진짜 열심히 일 할게요.”뒤로 돌아선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그녀가 우는 것을 본 그녀의 어머니는 깜짝 놀라 물었다.“소정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준명이가 너를 괴롭혔어?”“엄마!”그녀의 말에 고소정은 더욱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엄마! 엄마는 처음부터 금수저였잖아! 태어날 때부터 고귀한 신분, 좋은 학교에 유학까지 다녀오고 나도 그렇고! 근데 대체 저 여자들보다 못한 게 뭐야!”“저 여자들?”고가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오빠 약혼녀! 엄선희!”“그리고 사촌 동생인지 뭔지 하는 저 민정아! 민정아 남
고소정은 미소를 지었다.자신감이 붙은 그녀가 말했다.“엄마! 앞으로 우리 같이 부씨 가문에 시집가자! 우린 이 도시에서 가장 부유한 집의 안주인이 될 자격이 있어!”“당연하지!”고가령은 그런 딸을 품에 끌어안으며 말했다.“그러니까 서씨 가문을 잘 잡아야 해. 그들이 우리의 가장 든든한 발판이 되어줄 거야. 알겠어?”“알지, 엄마.”모녀를 태운 차가 멀리 떠나고 있었다.한편, 신세희는 찝찝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고소정은 엄마인 고가령과 함께 서씨 가문 본가에 입주하겠다고 뜻을 밝혔다.만약 그녀의 짐작이 맞다면 파티에서 서씨 가문을 초대한 목적도 고가령 때문일 것이다.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섭섭함이 몰려왔다.자신의 엄마가 떠올랐다.그날 밤, 퇴근한 신세희는 신유리, 부소경과 함께 엄마의 집을 찾았다.딸이 가족들과 함께 나타나자 서진희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오늘이 주말도 아닌데 어떻게 왔어?”신세희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엄마를 보며 말했다.“엄마, 잘 지냈지?”그러자 서진희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당연하지. 요즘은 춤 연습에 집중하고 있어. 춤은 잘 못 추지만 조금씩 성장하는 맛이 있어. 열심히 해야지.”“엄마는 리듬감이 좋으니까 잘해낼 거야. 춤 연습하면서 친구는 좀 사귀었어?”신세희가 물었다.“그럼. 거의 나랑 또래라서 편해.”서진희가 말했다.“용돈 두둑이 줄 테니까 부담 갖지 말고 밥도 사고 커피도 사고 그래.”신세희가 웃으며 말했다.그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부소경이 골드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장모님, 한도가 없는 카드니까 마음대로 써요. 백화점은 물론이고 식당, 마트 어디서든 가능해요.”서진희도 사양하지 않고 카드를 받았다.“고마워.”그날 밤, 그들 일가는 서진희의 집에서 밥을 먹었다. 신세희는 약간 안쓰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엄마를 바라보고는 했다.서진희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굳이 따져 묻지 않았다.엄마라서 딸의 감정을 가장 잘 느끼고 있었다.신세희는 안
“고모, 사실… 고모도 우리 할아버지를 신경 쓰고 계셨죠?”서준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서진희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되물었다.“내가 아니라고 말하면 너는 속상해할 거야?”서준명이 대답했다.“아니요, 고모.”“준명이 너는 참 든든하고 착한 아이야. 고모한테는 아주 훌륭한 조카지. 너를 가족으로 인정한 건 우리가 혈연관계이기도 하지만 네가 네 할아버지나 아버지와는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해. 너는 한 번도 이 고모에게 싫은 감정을 드러낸 적 없고 오히려 내 어머니가 살던 집을 깨끗하게 관리해 주었지. 네가 정 많은 아이라는 건 내가 잘 알아.”“고마워요, 고모.”서준명이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네 할아버지는 달라.”서진희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할아버지에게 나는 원치 않은 아이였겠지. 나는 태어날 것을 거부할 능력이 없었어. 아기 때도, 어린이집 다닐 때도 나는 네 할아버지의 혐오의 대상이었어.”“네 할아버지는 내가 죄악의 근원이라는 듯이 행동했고 나도 그렇게 느꼈어. 태어날 때부터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가 나였으니까.”“자신감 없고 어두운 성격을 가지지 않았던 건 네 작은할머니가 낙천적이고 현명한 여자였기 때문이야. 내 엄마가 없었으면 아마 나는 네 할아버지 구박에 미쳐버렸을지도 몰라.”“그런 사람을 내 아버지로 인정할 수 있을까? 신경 쓰이긴 하지. 하지만 미움이 더 큰 것도 당연한 거 아니야?”“내가 속상한 건 난 태어날 때부터 아빠 없이 태어난 아이이기 때문이야. 하지만 고가령은 다르지. 우린 어릴 때 같이 공부하고 친하게 지냈지만 걔는 항상 우월감에 취해 있었어. 지금도 네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지.”“준명아, 이건 질투일까?”서준명은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고모, 못 받은 사랑은 제가 채워드릴게요. 저를 아들로 생각해 주세요. 평생 고모한테 효도할게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못 해준 거, 제가 다 해드릴게요. 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아도 괜찮아요.”“고마워, 준명아.”서진희가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