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할머니와 전태윤에게 속히 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냥 자기 남편이 평범한 회사원인 줄 알았고 재벌 집 큰 도련님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소설 속에서만 보았던 이야기가 현실로 되자 하예정은 완전히 멍해졌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헤어질 수 없었고, 떠나갈 수도 없어 갈등에 휩싸였다.하지만 이모가 걸었던 길을 다시 걷기엔 너무 어려웠다.이모가 젊었을 때는 성공하기 좋은 시기여서 기회를 잡기만 하면 바로 일어설 수 있었는데 지금 그녀가 처한 시기와는 완전히 달랐다.그녀도 당연히 여자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남자에게 의지해서 평생을 살 생각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언니의 결혼생활에서 그녀는 남자의 ‘넌 내가 책임질게’와 같은 헛소리 따위는 믿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남자들은 어떻게든 지내면서 변해버리는 것이다.이때, 정장 차림의 남자 여러 명이 한 남자를 둘러싸고 주사실로 들어왔다.그들의 출현은 하예정의 주의를 현실로 돌리게 했다.두 사람 모두 저도 모르게 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성소현은 전태윤일 줄로 알았다가 가운데 둘러싸여 있는 그 남자를 보고 눈을 깜박이며 중얼댔다.“왜 저 사람이?”병원에서 그를 만날 줄은 몰랐다.하예정은 중얼거리는 성소현을 바라보며 물었다.“저 사람들을 알아요?”“한 사람밖에 몰라. 주위 사람들은 그의 경호원들이야. ”“저 사람 누구예요?”하예정은 호기심에 차 물었다.“마찬가지로 대단한 인물이야. 웃는 얼굴 속에 칼을 숨기고 있는 사람이야. 겉보기에는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매우 독한 사람이야.”‘...이름은 말 안 해주네.'“너희 집 전태윤과 협력관계를 가지고 있는 파트너야. A 시의 예진 그룹 사람이야. 바로 내가 전에 말했던 전씨 집안만큼 좋은 가풍을 가지고 있는 예씨 집안 말이야. 그는 예씨 집안의 다섯째고 예씨 집안의 현재 가주의 친동생이야. 문을 나설 때면 태윤 씨만큼 위풍당당해. 다만 태윤 씨는 나 같은 팬 때문에 경호원들을 데리고 다니지만, 저 사
“참, 그 가문의 가주도 너처럼 초고속 결혼을 했어. 그 집 사모님은 비록 시골에서 자랐지만, 너보다 운이 아주 좋았어. 양부모님이 주워다 키우셨지만, 친자식처럼 아주 잘 키워줬거든. 진심으로 아껴주는 양부모가 있고 예뻐해 주는 오빠도 있었는데, 게다가 나중에 친부모를 되찾고 보니 뜻밖에도 만성에서 가장 부유한 집안이었지 뭐야. 단번에 농촌 출신을 벗어나 만성의 남 씨 집안의 아가씨가 되어 신분과 지위 상관없이 예씨 집안의 식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어.”성소현은 재벌 집의 아가씨로서 다른 재벌 집의 일들을 훤히 알고 있었다.자기 사촌 여동생인 하예정은 예씨 집안의 사모님만큼 운이 좋지 않았다.“예정아, 나가서 인사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나 저 사람이랑 몇 번 만난 적이 있어.”하예정은 웃으면서 말했다.“아는 사이면 가서 인사하는 게 좋을 거예요.”“나도 가서 인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넌 여기 앉아 있어, 내가 가서 인사할게. 병원에 경호원들을 저렇게 많이 데리고 오다니, 간호사가 주삿바늘로 찔러 죽일까 봐 그러는 건지.”하예정은 넘어갈 듯 웃었다.성소현은 예준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면서 그를 향해 걸어갔다.가까이 가지도 않았는데 예준하는 갑자기 몸을 돌려 화장실로 달려갔다.그의 경호원들은 긴장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너희 집 도련님 왜 이러는 거야?”성소현이 궁금한 듯 물었다. 예준하의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설사인 듯싶다.예준하의 경호팀도 성소현을 보고 의외인 듯한 표정들이었다. 아마 예준하가 설사해 병원에 오게 되었을 때 성씨 집안의 아가씨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성소현 아가씨는 왜 여기 계신 겁니까?”경호원 중 한 명이 묻자, 성소현은 대답했다.“사촌 동생이 다쳐서 함께 링거를 맞으러 왔어요. 그쪽 도련님은 속이 안 좋아 온 거에요?”그 경호원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사는 보았어요?”“네. 약도 처방받았습니다. 링거를 맞아야 한답니다.”
몇 분 후 전태윤이 도착했다.“예정아.”그의 눈에는 하예정만 보였고 옆에 앉아 성소현과 잡담을 나누고 있는 예준하는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전태윤은 빠른 걸음으로 하예정에게 다가가서 먼저 링거를 한눈 보고는 몸을 숙이고 하예정의 다친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받쳐 들고는 마음이 아픈 듯 물었다.“아파?”“해 보면 아픈지 안 아픈지 알 수 있어요.”전태윤은 자책하면서 말했다.“예정아, 미안해. 또 내가 잘못했어.”하예정은 입을 삐죽대다 말했다.“당신과 상관없어요. 제가 실수로 다친 거예요.”전태윤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하지만 하예정은 그와 잠시 눈을 마주치고는 바로 얼굴을 돌렸고 이는 그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그는 한참 서 있다가 다시 입을 뗐다.“수액이 끝나면 집에 데려다 줄 테니 푹 쉬어. 상처에 염증이 생기지 않도록 며칠 동안 찬물에 손대지 말고.”“당신은 일이 바쁘잖아요. 안 데려다줘도 돼요. 소현 언니가 배웅해 줄 거예요.”오늘은 토요일인데도 그의 회사의 모든 사람이 위층 아래층 상관없이 야근하는 것을 보면 정말 바쁜 것이 분명했다.전태윤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고 옆에서 이 장면을 그저 지켜보던 성소현과 예준하는 서로를 의아스럽게 쳐다봤다.성소현이 가볍게 기침을 한 후에야 전태윤은 예준하를 발견 했다.“당신이 왜 여기에...?”예준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이렇게 사람이 앉아 있는데도 몇 분 동안이나 발견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저한테 투명 인간 능력이 있는가 봐요.”“예준하 씨, 어떻게 여기에 있게 된 거예요?”전태윤은 예준하의 농담에 개의치 않았다. 들어왔을 때 하예정밖에 안 보여 다른 사람은 눈여겨보지 못했다.그도 예준하가 여기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어떻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급성 위장염에 걸렸는데 도저히 버티지 못해 병원에 찾아왔어요.”전태윤은 성소현을 힐끗 쳐다보며 그녀와 예준하가 의외로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예정이 링거 다 떨어졌어요. 간호사를 불러 바늘을 뽑아
성소현은 하예정에게 물었다.“예정아, 태윤 씨가 데려다주는 게 나아, 아니면 내가 데려다주는 게 나아?”“저절로 택시를 타고 갈게요.”하예정은 성소현도 전태윤도 자신을 데려다주지 못하게 했다. 양쪽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어휴, 사람이란 참 어려워.'“전태윤이 데려다주는 게 좋겠어. 나 나온 지 너무 오래돼서 이젠 가봐야 할 것 같아. 우리 어머니는 내가 외출한 줄도 몰라.”성소현이 자진해서 양보했다.그녀는 전태윤의 두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는 하예정을 놓은 후 먼저 밖으로 나갔다.“전태윤 씨.”성소현은 갑자기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려 전태윤의 이름을 부르고는 말했다.“전태윤 씨, 하예정에게 강요하지 마요. 그리고 우리 집안 가족은 영원히 하예정의 친정 식구예요. 친정 식구들의 지지가 없다고 그녀를 괴롭힐 생각 마요. 며칠 전처럼 감히 예정이의 자유를 제한한다면 제가 쳐들어갈 테니까요.”전태윤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차갑게 대답했다.“당신은 문을 두드릴 기회도 없을 거예요.”그는 지금 하예정을 손에 받들어 아끼기도 모자란데 어찌 괴롭힐 수 있을까.“예정아, 만약 그가 너에게 잘 대해주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나에게 말해. 난 언제든지 너의 편이니까. 그리고 전태윤 씨, 당신은 아직 저를 누나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누나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하예정의 친정 식구들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만큼 당신이 하예정에 대한 사랑이 깊지 않다는 뜻인 거예요.”전태윤은 침묵했다.그는 순간 욕을 하고 싶었다.‘사업가 집안들 사람은 모두 이렇단 말이야. 성기현도 마찬가지야.'성소현은 이번에는 자신이 이겼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가버렸다.“예정아, 난 너의 친정 식구들을 매우 존중해. 성소현 씨는 일부러 우리 부부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하는 거야.”하예정은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당신이 오기 전에 소현 언니가 당신과 관련된 말을 많이 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우리 사이가 틀어지라 한 말은 아니에요. 그러니 너무 나쁘게
“왜 갑자기 돈 벌 생각을 하는 거야? 넌 지금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내가 저축한 돈은 기껏해야 몇천만 원밖에 안 돼. 돈이 부족하지는 않지만, 부자도 아니지. 성소현이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건 나와 태윤 씨 앞에 놓인 현실적인 문제여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어.”“이젠 화 안 내는 거야?”“화가 나도, 나와 태윤 씨와의 미래를 생각해야 하니까.”하예정이 한숨을 내쉬었다.“그냥 평범한 남자를 찾아서 시집가려고 했는데, 왜 헤어 나올 수 있는 큰 구덩이에 뛰어들었는지. 소현 언니가 그러는데, 내가 이혼 소송을 해도 태윤 씨가 동의하지 않으면 이혼할 수 없대.”“네가 이혼 소송을 하면, 그는 너를 평생 감금할 거야.”“이런 화나는 말은 꺼내지도 마.”하예정은 포크로 멜론 한 조각 찍어 먹었다.“멜론이 참 달구나.”“내가 고른 건데 당연히 달지. 처음에는 우리 모두 소현이가 알게 되면 너와 반목할까 봐 걱정했는데, 지금 소현이의 반응을 보면 아주 이성적이야, 너를 원망하지 않는 걸 보니.”만약 성소현이 원망하더라도, 전 대표와 인연이 없는 걸 탓할 수밖에. 전 대표는 그녀를 좋아한 적도 없고, 그녀에게 어떠한 약속도 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녀는 전 대표를 좋아할 권리가 있지만, 전 대표도 그녀를 거부할 권리가 있으니. 넌 전 대표와의 현실적인 문제만 생각하면 돼, 다른 것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하예정은 포크를 내려놓고 또 한숨을 내쉬었다.“나절로 잘 생각해 볼게.”“알았어, 말하지 않을게, 잘 생각해 봐.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난 널 지지할 거야. 왜, 더 안 먹어?”“입맛이 없어.”심효진도 강요하지 않았다.마음을 다친 사람들은 모두 이런 거다. 폭음폭식 하지 않으면 아예 먹지 않고, 실면증에 시달리면서 어두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밖에서 발소리가 나더니 전 씨 할머니와 장소민 고부가 함께 들어왔다.“할머니.”장소민을 본 적이 없는 심효진은 함부로 인사하지 못했다.하예정이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할
전태윤에게 전화한 후, 하예정은 저녁에 먼저 발렌시아 아파트로 가서 전태윤과 잘 이야기하고 나중에 셋방으로 돌아갈 거라고 언니한테 전화했다.하예진이 대답했다.“그래, 네가 올 때까지 언니가 기다릴게.”전화를 한 후 하예정은 바로 가게로 돌아가지 않고 학교 앞 강변을 따라 혼자 걸었다.찬 바람이 불자 그녀의 머리는 점차 냉정해졌다.그녀와 전태윤의 앞에 놓인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가 화를 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녀와 전태윤의 현실 차이이다.자신이 너무 멀리 갔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돌아선 하예정은 멀리서 자신을 따라오는 심효진을 발견하고 절친에게 다가갔다.“나쁜 생각 안 하니까 걱정 말어.”심효진이 웃었다.“네가 나쁜 생각 안 하는 걸 알아. 단지 네가 필요한 게 있어 부르면 인차 들을 수 있어서 그래.”잠깐 심효진을 바라보던 하예정은 갑자기 그녀를 껴안고 감동되어 말했다.“효진아, 네가 내 친구인 건 내 인생의 행운이야.”“내 행운이기도 해.”심효진은 하예정의 등을 다독이고는 그녀를 놓아주고 나란히 걸었다.“밥 먹고 들어갈래?”“태윤 씨에게 데리러 오라고 했어.”동문서답.“용서하기로 한 거니?”“그저 화가 났을 뿐 미운 건 아니야, 내가 직시해야 할 것은 그와의 차이인데, 그와 잘 이야기하고 싶어서.”“그래, 소통이 매우 중요하니까.”하예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좀 지나 전태윤이 소정남과 같이 왔다.소정남은 심효진과 저녁 식사를 같이하려고 온 거였다.하예정이 전태윤의 차에 앉아 떠나는 것을 보고 소정남은 심효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두 사람 화해했어요? 태윤이가 복권에 당첨된 것처럼 날듯이 기뻐하며 회사에서 나오던데.”“복권에 당첨돼도 자기 재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뭐 그리 흥분할 거 있겠어요? 예정이가 그와 이야기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에요. 화해가 어디 그리 쉽다고요, 제가 말했듯이, 예정이는 어떤 일이 있어도 피하지 않을 거예요. 다만 어떻게 해결할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뿐이에요.”소정남이 맞장구를 쳤다.“
하예정은 고개를 돌려 그에게 물 주전자를 든 오른손을 흔들어 보였다.다친 손은 왼손이다.“한 손으로는 일하기 힘들어. 이 꽃들은 내가 숙희 아주머니한테 잘 돌보라고 했으니 신경 쓰지 마.”전태윤은 꽃에 물을 주지 못하게 그녀의 손에서 물 주전자를 뺏고는 그녀를 그네 의자에 눌러 앉혔다.“당신은 여기 앉아있는 걸 가장 좋아하니, 여기 앉아서 그네를 타. 내가 외투를 가져다줄테니.”“춥지 않아요.”전태윤은 그녀의 말을 못 들은 듯 외투를 가져다 그녀의 다리에 덮어 주었다.“밥하러 갈 테니 무슨 일 있으면 불러. 손에 절대 물 묻히지 말고.”전태윤은 그녀에게 거듭 당부한 후에야 저녁을 준비하러 다시 부엌으로 돌아갔다.하예정은 그네 의자에 좀 앉아 있다가 일어나 주방 입구에 서서 전태윤이 저녁 준비하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았다.그를 보고 있노라니 과거의 사소한 일들이 생각났다. 그가 그녀에게 신분을 숨긴 일을 제외하면 평소 생활에서 그는 점점 더 잘 그녀를 보살펴 주고 있다.그들 사이에도 달콤함이 있었다.잠시 그를 바라보던 하예정은 소파에 앉아 TV를 켰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전태윤은 가끔 고개를 내밀어 그녀의 동정을 살폈다.마음이 긴장해 졌다.그녀가 그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도대체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른다.전태윤은 마음속으로 자기의 냉철함과 자제력이 하예정을 만난 후 통제력을 잃었다고 비웃었다.한 시간 남짓 후.전태윤이 준비한 간단한 저녁 식사가 완성되었다.반찬 세 개와 국 한 개.모두 하예정이 좋아하는 음식이었다.그는 하예정에게 국과 밥을 떠주고 반찬을 집어주고 나서야 젓가락을 건네주었다.하예정이 전태윤을 바라보며 말했다.“태윤 씨, 나한테 너무 잘해주지 마세요.”“바보, 당신은 내 와이프인데 당신에게 잘 해주지 않고 누구한테 잘해주겠어?”“당신을 실망시킬까 봐 두려워요.”“괜찮아, 희망이든 실망이든 다 받아들일 수 있어. 당신이 나에게 이혼을 제기하지 않고 나를 떠나지 않는 한, 난 다 받아들일 수 있어.
“처음 당신이 나를 속인 걸 알았을 때, 나는 너무 화가 났어요... 됐어요, 당신 머리카락이 다 곤두선 것 같으니, 그 얘기는 그만할게요. 화가 채 풀리지도 않고, 아직 마음 정리도 안 되었는데 당신 대신 사정하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서고...”그녀와 한편이던 절친도 그를 대신해서 사정했다“당신이 화낼 권리가 있어, 내가 잘못했어. 당신을 그렇게 오랫동안 속이지 말았어야 했어. 신분을 밝힐 때도 직접 솔직하게 말할 용기가 없어서 다른 방법을 선택해서 당신에게 알렷어... 다 예준성이 그러라고 시킨 거야!”하예정은 잠자코 있다가 입을 열었다.“이 일은 결국 당신이 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에요.”“예전에 당신을 믿지 않은 것을 인정해. 당신을 경계하고, 당신이 돈을 노린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당신의 인품을 절대적으로 믿어.”하예정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망설이다가 다시 결심한 듯 물었다.“태윤 씨, 우리 다시 합의서를 쓸까요? 당신의 정체를 알고 화내는 것은 부차적인 일이고, 난 지금 우리의 현실적 차이를 더 고려해야 해요. 당신은 억만장자 전씨 가문의 큰 도련님이지만, 난 부모도 없는 고향에 볼품없는 친척만 득실득실한 아무 능력도 없는 평범한 여자예요. 모든 면에서 당신과 어울리지 않아요.”“예정아!”전태윤은 엄숙한 어조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당신이 어떤 신분이든, 난 이미 마음먹었어. 당신만 나와 어울린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자신을 비하하는 그런 말은 하지 마.”“난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고 있을 뿐이에요.”하예정은 결코 스스로를 깎아내리지 않는다.“난 당신의 능력이 필요 없어, 내가 능력이 있으면 돼, 난 당신과 가족을 부양할 수 있고, 앞으로 우리 아이를 부양할 능력이 있어, 내가 번 돈이면 우리가 축구팀을 낳더라도, 부양할 수 있어. 자신을 압박하지 마, 당신이 가족을 부양할 필요가 없어, 당신은 지금처럼만 있으면 돼, 난 의견 없어.”전태윤은 하예정이 이혼을
고현이 입을 열었다.“호영 씨는 너무 뻔뻔스럽네요.”전호영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제가 뻔뻔스럽지 않았다면 고현 씨의 마음을 훔치지 못했을걸요. 우리 큰형을 따라 배웠거든요. 우리 형이 형수님에게 구애한 적 없지만 뻔뻔스럽게 자신의 미래 아내를 쫓아다녀야 한다고 저에게 말했거든요. 우리 큰형도 옛날에 체면을 중요시하게 여겼지만, 우리 형수님과 지내면서 점점 뻔뻔스럽게 되었어요.”전태윤 부부가 금방 결혼했을 때 많은 갈등이 있었고 냉전도 자주 했었다.전호영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감히 더 깊이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다.때로는 전태윤 부부가 싸움이 심해질 때면 전씨 할머니까지 나서야 했다.고현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전 대표님께서 호영 씨가 자신을 뻔뻔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아마 호영 씨는 이 세상에서 없어질지도 몰라요.”고현은 전씨 가문의 형제들이 맏형 전태윤을 유난히 존중했고 또 가장 두려워한다고 전해 들었다.전태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여전히 차갑고 도도한 모습이지만 하예정 앞에서는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전씨 가문은 형제들은 서원 리조트에서 함께 산 덕분에 사촌 형제지간일지라도 정이 아주 깊었다.따라서 맏형 전태윤의 지위도 높았고 그의 형제들도 그를 잘 따랐다.“큰형이 지금 여기에 없는데요 뭐. 그리고 제가 한 말도 사실인걸요. 우리 형도 형수님이 생긴 뒤로 뻔뻔해졌거든요. 우리도 따라 한 것뿐이에요.”고현은 여전히 웃으며 말을 건넸다.“호영 씨가 뻔뻔한 사실을 남에게 밀지 마세요. 그만하고 우리 얼른 가요. 호영 씨, 네가 오늘 제가 드레스 입고 하이힐을 신는다면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요? 제가 비웃음을 당해도 괜찮겠어요?”전호영은 그녀가 벗은 하이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제가 뭘 더 신경 쓰겠어요? 제가 언제 다른 사람이 비웃을까 봐 두려워했었나요? 저는 남들 시선이 두렵지 않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이에요. 남들이 시선이 신경 쓰였다면 오늘 같은 달콤함도 없었을 거예요.”전호영은 다른 사
사실 전호영은 차를 세울 때 고현이 평소에 자주 타는 그 마이바흐 차를 보았다.“집 안에 있어. 들어가 봐.”진미리는 물건을 들여 집 안으로 들어가려다 다시 전호영의 손에 물건을 전호영 손에 쥐여주었다.“난 꽃에 물을 좀 주고 들어갈게. 날도 어두워질 것 같으니 먼저 들어가 봐.”전호영은 자주 고씨 가문의 저택으로 왔고 진작에 고씨 가문을 그의 두 번째 집으로 생각했다.전호영은 혼자 집 안으로 들어갔다.집에 들어서자 그는 한 여자가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를 들고 메시지를 보내는 모습을 보았다.그 여자는 고현과 정말 똑같이 생겼다.만약 고현이 치마를 입고 가발을 쓴다면 저렇게 예쁠 것이다.고현은 원래 긴 가발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전호영이 말하는 소리를 듣더니 재빨리 가발을 쓰고 앉아 있었다.전호영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알고 싶었다.그녀는 전호영 앞에서 치마를 입은 적 있었다.당시 고현은 그날이 전호영 앞에서 치마를 입는 유일한 날이라고 생각했었다.그러나 고현은 지금 또 치마를 입고 있다.그녀는 전호영을 위해 한 번이고 두 번이고 늘 그녀의 원칙을 깨뜨렸다.아니, 눈앞의 여자가 바로 그의 고현이었다.전호영은 씩 웃었다.그는 다가가더니 먼저 손에 들고 있던 가방들을 내려놓고 꽃다발을 고현에게 건네주며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여신님, 이 꽃다발을 당신에게 드릴게요.”고현의 시선은 꽃다발에 가려져 더는 휴대전화를 쳐다보지 못했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전호영을 올려다보며 빙그레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며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서프라이즈도 해주고 싶었는데, 호영 씨 표정을 보니 놀라지 않은 것 같네요.”“현이 씨가 저를 위해 치마를 한 번 갈아입었을 때 제가 재빨리 현이 씨 도도한 모습을 기억해 버렸죠.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전호영은 고현이 꽃다발을 받기를 기다렸다가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그녀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물었다.“준비되었다고 했는데 정말 이렇게 나가려고요? ”고현은 지금 드레스를 입고 가발을 착용
잠시 후, 진미리가 말했다.“됐어. 나도 상관 안 할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엄마는 몇 년 더 살고 싶어.”“엄마, 저는 효녀거든요.”진미리가 입을 열었다.“난 네가 불효녀라고 말 한 적 없어. 네가 여자 신분을 회복하는 일에 엄마가 더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말이야. 더 관여하면 내가 열 받아서 죽을 것 같아. 내가 몇 년을 더 살아서 네가 결혼하고 자식까지 낳는 것을 보려면 너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게 좋겠어. 네가 여자로 살든 남자로 살든 네가 개의치 않는데 나도 더는 상관하지 않을래. 내가 진작에 상관하지 말았어야 했어.”말을 마친 진미리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엄마, 어디 가세요?”“엄마 바람 좀 쐬면서 기분 전환 좀 할게. 네 아빠한테 잔소리 좀 해야겠어.”고진호는 밖에서 꽃들에 물을 주고 있었다.그러자 고현이 말을 건넸다.“그럼 나가서 아빠에게 몇 마디 잔소리하고 오세요. 잔소리하시고 나면 그래도 제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실걸요.”진미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꽃에 물을 주던 고진호는 진미리가 나오는 것을 보더니 물었다.“현이가 연습 잘하고 있어요?”“휴, 말도 마세요. 지금에야 와서 가르치려고 하니 너무 어려워요. 오후 몇 시간 만에 20년이 넘는 습관을 고치려고 하니 너무 어려워요.”고진호가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그럴 줄 알았어요. 됐어요. 내버려 둬요. 현이가 행복하기만 하면 현이가 어떤 신분으로 살아가든 상관없잖아요.”갑자기 고현이 여자라는 일이 드러나게 되면 아마 강성 전체가 뒤흔들릴지도 모른다.전화 폭격을 당할 장면을 미리 생각한 고진호도 미리 전원을 끄려고 계획했다.“현이가 드레스는 입고 싶지만, 하이힐 대신 구두를 신겠대요. 휴... 진작 알았다면 애당초 현이가 소란 피울 때 반대했야 했는데. 벌써 20년이 흘러 멀쩡한 딸이 아들로 변하게 되다니...”“현이가 입고 싶은 대로 입게 놔둬요.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대상은 현이지, 우리가 아니잖아요.”고진호는 고현이
“걱정하지 마세요. 준비하고 계세요. 저랑 함께 연회에 가요.”고현이 말을 이었다.“그럼 집에서 기다릴게요.”“좀 이따가 봐요.”그는 고현이 왜 반나절 휴가를 냈는지 전호영은 더는 묻지 않았다.전호영은 먼저 서둘러 고씨 가문의 저택으로 간 다음 다시 얘기하려고 했다.전호영과의 통화를 마친 고현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려다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진미리를 보더니 다시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전호영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척했다.“메시지 보내는 척 하지 마.”진미리는 일어나서 걸어가더니 손을 뻗어 고현의 휴대전화를 가져다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엄마, 저는 핸드폰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회사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저를 찾아야 하거든요.”고현은 다시 휴대전화를 방패막이로 삼고 싶어 했다.“회사 일 전부 고빈에게 맡겼잖아. 고빈이가 처리하게 놔둬. 빈이가 오늘 저녁 연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리고 빈이는 너보다 어리지 않아. 너보다 겨우 10분 정도 어릴 뿐이야. 게다가 남자로서 빈이는 당연히 그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해. 남존여비라고 당연히 남자가 무거운 짐을 지게 해야지.”고현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엄마, 그 생각은 너무 보수적이에요.”“남들에게는 보수적인 사상일지 모르지만, 우리 집에서는 남자가 무거운 짐을 지게 하고 딸이 가볍게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것이 우리 집안의 규칙이야.”진미리는 고현 옆에 앉았다.고현은 진미리와 논쟁하려 하지 않고 바로 머리를 수그렸다.“네네, 우리 엄마는 가장 예뻐요. 우리 엄마가 하신 모든 말은 다 정확해요.”진미리는 고현을 노려보고 있었다.“엄마, 또 왜요? 오후 내내 저를 노려보신 횟수가 지난 20여 년을 합친 것보다 더 많아요.”진미리는 딸의 허벅지를 툭툭 치며 꾸지람했다.“똑바로 앉아! 사나이처럼 앉지 마. 넌 지금 우리 가문의 딸이야. 고씨 가문의 아들이 아닌 딸이라고! 그리고 앉자마자 하이힐을 벗지 마. 어느 집 딸이 자리에 앉자마자 하이힐을 벗는 것을 봤어?”고현은 투덜댔다.“
전호영의 전화를 받은 고현은 잠시 멈추고 쉴 수 있는 핑계를 주었다.고현은 자신의 하이힐을 신고 걸어 다니는 자태를 감시하고 있는 진미리에게 말했다.“엄마, 호영 씨 전화예요.”“그래.”고현은 소파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앉았고 그녀의 걸음걸이 자태를 보던 진미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따라왔다.남자의 분장에 익숙해진 고현이 치마로 갈아입고 하이힐을 신으면 진미리의 요구대로 잘 걸을 수 없었다. 재벌가 딸들의 우아한 자태로 걷는다는 것은 하늘을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고현은 하이힐을 신고 삐뚤삐뚤 걸어 다녔다.어쨌든 진미리는 고현이 하이힐을 신고 걷는 모습이 매우 못마땅했다.고현은 소파에 앉자마자 바로 하이힐을 벗어 던졌다.진미리는 고현의 상황을 살피지도 않은 채 하늘을 찌르는 듯한 굽 높은 신발을 신고 걷는 연습을 시켰다. 비록 연회에 참석할 때 신을 하이힐은 그렇게 높지 않지만 말이다.고현은 내심 불만이었다.하지만 진미리는 굽 높은 신발로 연습을 해야 연회 때 신어야 할 하이힐을 쉽게 신을 수 있다고 했다.“호영 씨.”고현은 부드럽게 전호영을 불렀다. 그녀는 지금처럼 전호영의 전화를 기다린 적이 없었고 또한 이렇게 부드러운 말투로 전호영의 이름을 부른 적도 없었다.그녀는 성격이 차가운 편이라 전호영을 사랑하게 되더라도 그에게 부드럽게 대하지 않을뿐더러 다른 여자들처럼 애교도 부리지 않았다.가끔 고현이 전호영과 이야기할 때 약간의 웃음을 띠면서 말을 건네기만 해도 전호영은 며칠 동안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다.“오후에 회사에 돌아가지 않았어요. 반나절을 쉬려고 우리 부모님 집으로 왔어요.”고현의 부드러움은 전호영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만 사용됐고 다시 입을 열어 말했을 때는 말투가 정상으로 돌아갔다.전호영이 물었다.“괜찮으세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그녀는 워커홀릭이라 결혼하기 전의 전태윤처럼 평일에 쉬는 일이 거의 없었다. 주말이 되어 집에서 쉰다 해도 사실 업무를 처리하기 위함이었다.고현은 가끔
임원들은 고빈의 주위에는 적어도 여성 지인들이 많아 그녀들과 만나면서 먹고 놀 수 있다지만, 고현은 그야말로 전호영에 의해 망가졌다고 생각했다.전호영이 아주 훌륭하고 관성의 제일 갑부인 전씨 가문 출신이라고 해도 뭐가 소용 있겠는가!동성연애는 국내 사람들이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데...“상상력이 풍부하시네요. 고빈 씨에게 드리는 꽃이 아니거든요. 고현 씨는 회사에 없어요? 나가셨어요?”전호영이 물었다.고빈은 손이 전호영에 의해 뿌리쳐졌지만, 화도 내지 않고 일부러 전호영에게 말했다.“우리 형에게 매달리더니 너무 심하게 매달린 건 아닌가 봐요? 우리 형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다니. 우리 형이 오후에 회사에 돌아오지도 않았어요. 모르셨어요?”전호영은 정말 몰랐다.그는 고현이 오늘 저녁에 그녀와 함께 연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사실밖에 몰랐다.오늘 밤 두 사람이 참석하는 연회는 강성에 있는 한 재벌가의 저택에서 열리기 때문에 전호영은 일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달려왔다.그는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바로 왔다.전호영은 매일 양복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갈아입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선천적으로 잘생긴 외모로 옷을 대충 입어도 쉽게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곤 했다.“호영 씨 표정을 보니 우리 형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네요. 하하! 우리 형을 반년 넘게 귀찮게 하여 동성애자로 만들더니 결국 우리 형의 마음을 완전히 움직이지는 못했네요.”고빈은 동정 어린 표정으로 전호영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시간이 없어서 잔소리 그만할게요.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그럼 저는 이만.”고빈은 전호영을 뒤로 한 채 임원들과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리를 떠났다.전호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프런트 데스크로 돌아와 아직 퇴근하지 않은 직원에게 물었다.“고 대표님께서 오늘 오후 정말로 회사로 돌아오지 않았어요?”“네, 오후에 돌아오지 않으셨어요.”전호영이 다시 물었다.“어디로 가신다는 말은 안 하셨어요? 사업 때문에 나가신 거예요?”전
하예진은 말을 잇지 못하고 살며시 노동명을 안아주었다.잠시 후 노동명은 그녀를 가볍게 밀어내며 부드럽게 말했다.“돌아가서 쉬어.”“잘 자요. 동명 씨도 내일 관성으로 돌아가야 하잖아요.”두 사람은 서로 인사한 뒤 하예진은 노동명의 방을 나섰다. 노동명은 휠체어를 타고 그녀를 현관문 밖으로 나와 그녀가 옆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문을 닫았다.밤새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고 가지 않았다.다음 날 노동명은 아침 식사를 마친 후 하예진의 배웅을 받으며 차를 타고 하루 호텔을 떠났다.하예진은 공항까지 따라가지 않고 노동명을 차에 태우고 호텔 입구에 서서 그를 배웅했다.공항까지 배웅하면 더 아쉬울 것 같았다.노동명이 타고 있던 차가 보이지 않게 되자 하예진은 그제야 경호원들과 함께 전호영이 안배해 준 차를 향해 걸어갔다.노동명이 관성으로 돌아갔으니 그녀도 계속 일을 해야 했다.바쁠 때는 시간이 유난히 빨리 지난다.날이 조금 전에 밝은 것 같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또 저녁이 되었다.전호영은 고현이 오후에 회사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그는 평소처럼 저녁 무렵 차를 몰고 고씨 그룹으로 가서 고현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그리고 같이 밥 먹으러 가려고 했다.고현은 사업이 무척 바빠서 전호영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매일 식사 시간이 바로 그와 고현이 정을 쌓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다.그의 차는 고씨 그룹에 들어가서 늘 주차하던 곳에 멈춰 섰고 전호영은 조수석에서 꽃다발을 안아 들고 차에서 내렸다.전호영은 사무실 건물 입구에서 밖으로 나가는 고빈을 만났다. 고빈은 회사 임원 몇 명과 함께 걸으면서 얘기를 나누었다.전호영을 본 고현 일행은 멈추어 섰다.“회사엔 왜 왔어요?”고빈이 입을 열자마자 물었다.전호영은 그 물음에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제가 왜 당신 회사에 올 수 없어요?”전호영은 매일 고씨 그룹으로 왔다.그럼 전호영을 쫓아내기라도 하겠다는 의미인가!고빈이 감히 그를 쫓아낸
“응, 내일 돌아가려고. 예진이도 너무 바빠서 영향 줄까 봐 그래. 관성으로 돌아가서 우빈이도 돌봐야 예진이가 걱정하지 않지. 내가 강성으로 돌아가서 나와 우빈을 위해 강산을 다스려야 되거든. 하하!”노동명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옆에서 듣고 있던 하예진이 말했다.“나중에 빚이 쌓일까 봐 두렵네요.”노동명이 되물었다.“뭐가 두려워? 수십 조의 빚만 아니라면 다 갚아줄 수 있어. 넌 마음 놓고 가서 일해. 하늘이 무너져도 내가 버텨줄 테니까. 파산될 걱정은 하지 마.”수십 조의 빚이라고?하예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현재 하예진의 상황으로 놓고 보면 수억 원의 빚만 져도 그녀는 너무 걱정되어 흰머리가 나올 것 같았다.전태윤은 또 음성메시지를 보내왔다.“우리 처형에게 너 같은 후원자가 있으니 반드시 강성에서 성공할 거야.”노동명은 하예진에게 전태윤의 음성메시지를 들려주며 말했다.“들어봐, 태윤이가 너를 엄청나게 믿고 있어.”“항상 저를 이렇게 믿어주시는데 제가 더 열심히 해야 기대에 부응할 수 있겠네요.”“너도 혼자 견디지 말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나에게 도움을 청해. 내가 다리를 다쳤지만 머리가 다친 건 아니거든. 나도 너 대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어.”하예진은 노동명이 다리를 다쳤다는 둥 머리를 다쳤다는 둥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싫어했다.“동명 씨의 다리는 좋아질 거예요. 저는 그런 말 듣기 싫어요. 앞으로 절대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동명 씨가 다리 나아지면 저랑 결혼도 하셔야죠.”노동명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네가 그런 말을 해 주니 내 다리도 분명 나아질 거야.”하예진은 얼굴이 붉어지더니 부끄러워하며 대답했다.“너무 오래 얘기하지 마세요. 일찍 쉬어요. 저도 방에 가서 쉴게요. 내일 또 회사 일로 많이 뛰어다녀야 하거든요.”“응, 가. 잘 자.”노동명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굿나잇 키스를 해달라고 암시했다.하예진은 다가가서 허리를 굽히더니 노동명의 칼자국이 있는 얼굴에 입을 맞추
“형인 씨 마음속엔 아직 네가 있을지도 몰라.”노동명이 말했다.그는 오히려 주형인이 우빈 앞에서 그의 험담을 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주형인이 험담하면 할수록 우빈은 그를 싫어할 것이고 오히려 노동명과 우빈의 정이 더 깊어져만 갈 테니까.노동명은 마침내 우빈이 주씨 집에서 돌아올 때마다 그에게 무척 잘해준 이유를 알게 되었다.우빈도 미안했던 모양이다.주형인이 그의 험담을 했기 때문이다.“형인 씨는 저에 대한 사랑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을 거예요. 저를 사랑했다면 저를 배신하고 상처를 주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주씨 집안 가족들이 저를 괴롭히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을 거예요. 남자가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어요? 시어머니와 갈등이 생긴다 해도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노력했을 텐데. 어떻게 시어머니와 그의 누나가 저를 비난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었겠어요?”“그 사람은 마음이 편치 않았을 뿐이에요. 제가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만약 형인 씨와 서현주 씨가 아주 행복하게 잘 지내고 그렇게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행복하게 살면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를 기다렸을 텐데. 제가 죽든 살든 상관했겠어요? 우빈에 대한 감정조차 옅어졌을걸요. 그들만의 아기가 생기면 우빈에 대한 감정이 워낙 깊지 않은데다 감정이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노동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문득 화제를 돌렸다.“맞아. 그런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과 일들을 생각하지 말자. 나 내일 관성으로 돌아갈 거야. 예진아, 나랑 같이 가서 새 옷 몇 벌 사 오자. 우빈에게 줄 장난감도 좀 골라줘. 내가 매번 선물한 장난감을 녀석이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하예진도 전남편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진작에 태연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였지만 노동명 앞에서 전남편 얘기를 꺼내면 노동명이 질투할까 봐 걱정했다.교통사고를 당한 후 노동명도 많이 연약해졌다.주로 다리 장애로 자신감을 잃은 노동명은 마음이 매우 약해졌다.노동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