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윤의 눈가에 슬픔이 스쳤지만 어제처럼 격하게 반응하진 않았다.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예정아, 정말 저 동물들을 키우고 싶어? 그럼 내가 장씨 아저씨더러 길을 안내해서 너랑 효진 씨를 데리고 우리 집 과수원들을 구경시켜줄게. 닭을 키우기 적합한 곳이 있으면 바로 거기서 키워. 네가 직접 돌보고 싶으면 직접 돌보고 그게 아니면 도우미들이 돌봐줘도 돼.”하예정이 미간을 찌푸렸다.“구정 때 당신 본가에서 보냈는데 과수원을 전혀 못 봤어요.”“서원 리조트 옆에 산이 몇 개 있는데 과수를 많이 심었어. 그게 바로 과수원이야. 거긴 우리 집안의 대저택이라 매년 구정 때마다 거기서 보내.”시댁에 뜬금없이 리조트가 하나 생겨도 하예정은 더이상 놀랄 것 없었다.갑부니까.모든 분야로 돈만 벌 수 있다면 그들은 전부 섭렵할 것이다.“날 이 별장에서 내보내려고요?”하예정은 뒤늦게 전태윤의 말에서 요점을 포착했다.전태윤은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도 마주 봤다. 부부가 서로 마주 본 순간 하예정은 그제야 전태윤도 요 이틀 얼마나 수척해졌는지 알아챘다. 그녀가 힘든 만큼 그도 똑같이 괴로웠다.“예정아, 미안하단 말을 수없이 해왔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과하고 싶어. 널 그렇게 오랫동안 속이지 말아야 했어. 나에 대한 믿음이 다 깨졌잖아. 지금 당장 날 용서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는 건 바라지도 않아. 단지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내가 그 믿음을 다시 쌓아 올릴 수 있게. 그리고 쉽게 이혼 얘기를 꺼내지 말아 줄래?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너무 아파.”진짜 이혼할 지경에 이르지 않는 한 말다툼하고 감정이 격해질 때 이혼 얘기를 꺼내면 상대의 마음에 비수를 꽂는 것과 다름없다.하예정은 한참 침묵한 후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나 지금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내가 한 말과 행동에 가끔 후회하기도 해요... 태윤 씨, 나 인제 더는 태윤 씨랑 할 얘기 없으니까 제발 여기서 나가게 해줘요. 돌아가서 마음을 좀 진정하고 싶어요. 우리 결혼 생
앞으로 계속 감금당할 거란 생각에 그녀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다행히 전태윤이 이 상황을 이해하고 그녀에게 자유를 돌려주었다.“이모부.”주우빈은 이모에게 안길 때 이모부를 보더니 신이 나서 두 팔을 벌리며 안아달라고 했다.전태윤은 아이의 요구를 만족하며 바로 안아주었다.“높게 들어줘요, 이모부. 더 높게.”전태윤이 웃으며 주우빈을 높이 들었다. 아이는 신이 나서 깔깔대며 웃었다.“이 트럭은...”하예진이 묻기도 전에 전태윤이 덥석 가로챘다.“처형, 예정이가 직접 키운 닭을 잡아먹고 싶다길래 효진 씨가 대신 이 닭들을 사 왔어요. 지금 막 장씨 아저씨한테 길을 안내해서 예정이를 데리고 우리 집 과수원으로 가볼 참이었어요. 이 닭들을 과수원에 넣어 키우면 어떨지 고민하고 있었거든요.”하예진은 동생을 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뜬금없이 웬 닭을 키워?”하예정이 말했다.“이미 사 왔으니 어디 둘 곳은 있어야잖아...”하예진은 동생과 제부를 번갈아 보더니 동생이 소란을 피우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그런데 잠깐, 그녀는 뭔가 놓친 듯싶었다.좀 전에 전태윤은 집사더러 길을 안내하여 하예정을 데리고 과수원으로 가보라고 했는데, 이는 예정이한테 자유를 돌려준 건가?“태윤 씨, 난 안 갈래요. 장씨 아저씨보고 기사와 함께 과수원으로 가라고 하면 돼요. 언니가 마침 왔으니 난 언니네랑 돌아갈게요.”전태윤이 자상하게 대답했다.“그래, 너 하고 싶은대로 해.”그는 아무 의견이 없었다.하예정은 그의 품에서 우빈이를 안아오며 언니와 심효진에게 말했다.“언니, 효진아, 가자 인제.”“응, 그래.”심효진과 하예진은 가면서 고개 돌려 전태윤을 쳐다봤다.하예정은 우빈을 안고 차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우빈을 안에 태웠다. 그녀도 이제 막 타려고 할 때 전태윤이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예정아.”세 여자는 순간 바짝 긴장했다. 특히 하예정은 본능적으로 전태윤이 번복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 빨리 도망쳐야겠다고 황급히 차 문을 열었다. 하지만
전태윤의 말에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가 번복할 줄 알았는데 다행히 아니었다.하예진이 재빨리 말했다.“제부, 걱정 말아요. 요 며칠 제가 쭉 예정이를 지킬게요. 운전도 안 되고 술도 많이 못 마시게 할게요!”그녀는 또 한마디 더 보탰다.“얘가 진짜 술 먹고 싶다 그러면 집에서 맥주 두 병 마시게 할게요. 바에는 두 번 다시 안 보내요.”“네, 처형, 그럼 요 며칠은 처형한테 잘 부탁드릴게요.”전태윤은 또다시 하예정에게 말했다.“예정아, 처형 집에 며칠 머무르다가 집에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내가 데리러 갈게. 만약 나랑 함께 있기 싫다면 넌 발렌시아 아파트로 돌아가고 난 여기서 지낼게.”하예정은 그를 한참 지켜보다가 말했다.“잘 있어요.”곧이어 그녀는 차에 올라탔다.“제부, 몸 잘 챙겨요. 예정이는 내가 잘 보살필게요. 제부가 예정이를 데리러 올 때 통통하게 살을 찌워놓을게요.”하예정은 말을 잇지 못했다.‘이 언니가 지금 날 돼지도 사육할 기세네?’하예진은 제부에게 당부한 뒤 차에 타고 안전벨트를 매며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전태윤은 차가 멀어져갈 때까지 묵묵히 지켜보았다.“효진 씨.”심효진도 막 떠나려 할 때 전태윤이 그녀를 불렀다.“하실 말씀 있으시면 얼른 분부하세요, 대표님.”심효진이 공손하게 말했다.전태윤은 바지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이건 어제 내가 예정이를 위해 준비한 발렌타인 선물 중 하나에요. 새 차인데 예정의 차 앞부분이 훼손됐으니 효진 씨가 나 대신 새 차 키를 예정이에게 보내줄래요?”한편 심효진은 차 키를 받지 않았다.“태윤 씨는 본인한테 자신이 없어요. 아니면 예정이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가요? 오늘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고요! 앞으로 예정의 손에 직접 선물을 쥐여줄 기회가 많고 많은데 왜 굳이 저를 통해서 전해주려고 해요?”전태윤은 입술을 앙다물고 손을 거두어들였다.“고마워요, 효진 씨. 후에 직접 예정이한테 줄게요. 저기 혹시 예정의 앞에서 나 대신
장씨 아저씨가 공손하게 대답하더니 또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도련님, 밖에 바람이 많이 불고 추우니 집 안으로 들어가세요. 오늘 일어나서부터 아무것도 못 드셨죠?”전태윤은 꿈쩍하지 않은 채 장씨 아저씨에게 물었다.“만약 내가 굶어서 쓰러지면 예정이가 돌아올까요?”장씨 아저씨는 말문이 막혔다.전태윤은 이런 자신이 우스웠다.“그냥 한번 물어본 거예요. 내 몸 갖고 장난치지 않아요. 예정이랑 아이도 낳고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살아야죠. 백발이 되는 그날까지 살지 못한다면 얼마나 아쉽겠어요.”장씨 아저씨가 얼른 말했다.“사모님은 끼니를 꼭꼭 챙겨 드세요. 저는 사모님의 이런 마음가짐이 참 바람직하다고 봐요.”전태윤이 일부러 굶어서 쓰러졌는데 만에 하나 사모님이 모질게 돌아오지 않으면 결국 도련님만 굶어 죽는 게 아닌가?“예정이는... 날 사랑하는 마음이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처럼 깊지 않아요.”그래서 그녀는 좀 더 모질게 마음먹을 수 있었다.“일구야.”전태윤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강일구를 불렀다.강일구는 곧바로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차 대기해. 리조트에 가서 며칠 지낼 거야.”“네.”강일구는 서둘러 기사에게 통지했다.몇 분 후 전태윤의 럭셔리 차량이 이 큰 별장을 떠나서 살기등등한 기세로 서원 리조트에 돌아갔다.리조트의 중심 정원 홀에서 할머니가 한창 도우미가 끓여온 커피를 건네받았다.장소민이 시어머니께 말했다.“어머님은 이젠 연세도 있으시고 원래 잠도 잘 못 주무시는데 커피까지 드시면 잠이 더 안 와요.”“커피는 내 수면에 영향 주지 않아. 진정 영향을 주는 건 태윤이네 부부야.”할머니는 커피 두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정신 좀 차리고 어떻게 도울지 생각해봐야겠어.”장소민이 말했다.“어머님,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더 간섭하시려고요? 그들 부부가 알아서 해결하게 놔두시죠. 태윤이랑 예정이가 지금 이렇게 된 건 어머님이 간섭했기 때문이에요. 저는 항상 예정이가 태윤이랑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생
어르신은 목이 메어 허탈하게 말했다.“그건 타고난 성격이니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어르신이 또다시 혼잣말을 이었다.“우여곡절이 있어야 서로를 더 소중히 여기게 돼.”장소민은 말문이 막혔다.이때 도우미가 한 명 들어왔다.“어르신, 사모님, 큰 도련님이 돌아오셨어요.”할머니는 화들짝 놀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날렵한 동작이 할머니의 연세를 무색하게 했다.“소민아, 난 방에 가서 누우련다. 태윤이가 나에 대해 묻거든 걔네 부부 일로 걱정에 휩싸여 몸져누웠다고 하거라.”장소민이 말했다.“그럼 태윤이가 어머님을 병원에 실어갈 거예요. 저는 분명 미리 말했어요. 그때 가서 저를 탓하면 안 돼요, 어머님.”“화장터로 보내지만 않으면 돼.”할머니는 가장 빠른 속도로 제 방에 돌아가 침대에 누워 아픈 척했다.한참 누워 있었지만 노크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할머니는 속으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설마 이 녀석이 너무 화나서 할머니가 ‘몸져누웠다’라는 데도 신경 쓰지 않는 걸까?아이고, 인기척이라도 해줄 것이지.언제까지 이렇게 누워있을 수도 없는 노릇인 것을, 몰래 가서 손주 녀석이 뭘 하는지 훔쳐봐야 하는 걸까?전태윤은 대체 뭘 하고 있을까?그는 돌아온 후 방안에 할머니가 안 보이자 두말없이 나가버렸다.장소민이 재빨리 쫓아가 그의 뒤에서 관심 조로 물었다.“태윤아, 너 괜찮은 거지?”전태윤이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괜찮아요, 엄마.”“안색이 안 좋아 보여. 제대로 쉬지 못했어? 예정이는?”“처형이랑 함께 나갔어요.”장소민은 흠칫 놀라서 걸음을 멈추다가 아들이 또 멀리 가버리자 재빨리 뒤쫓아가며 물었다.“나가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말 그대로 나갔다는 뜻이에요.”전태윤은 결국 야외 수영장 앞에서 멈춰 섰다.이어서 그는 외투를 벗기 시작했다.“너 미쳤어? 지금 이 날씨에 수영하면 감기 걸려!”장소민은 더 따져 물을 겨를 없이 얼른 달려가 아들을 제지했다. 이 추운 날에 수영장에 뛰어드는 건 빙어로 되는
“엄마.”전태윤은 지금 똑바로 설명하지 않으면 엄마가 진짜 그에게 재벌 집 딸들과 선 자리를 마련하여 오해를 불러올 것 같았다.그는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예정이가 처형과 함께 나갔다는 건 친정에 돌아가 한동안 지내면서 마음을 식힌다는 뜻이에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게 아니라고요. 나도 걔가 안 돌아오는 건 용납할 수 없어요.”하예정을 풀어주고 그녀가 처형을 따라가는 걸 허락하는 일이 전태윤에게 얼마나 어려운 결정인지 하늘은 알고 있겠지!“나도 마음을 식혀야 하는데 좀처럼 진정이 안 돼서 수영장이라도 뛰어들려고 했어요. 그럼 혹시 차분해질 수 있겠는지... 엄마, 난 전혀 고육지책을 쓸 의향이 없어요.”장소민이 눈을 깜빡이며 그에게 물었다.“너희 두 사람 아직 이혼 안 했어?”“엄마는 내가 이혼하길 무지 바라시네요?”“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엄마는 늘 너희 두 사람이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어. 너희 둘은 사교 영역이 달라서 예정이가 비집고 들어가기도 힘들 거야. 지금은 이해할 수도 없고 체감할 수도 없겠지만 화해하고 난 후에 예정이를 데리고 사업 미팅에 가거나 여러가지 연회, 자선단체 등 행사에 참석할 때면 바로 느끼게 될 거야. 넌 괜찮겠지. 남들이 널 비웃는 걸 천연덕스럽게 받아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예정이는 달라. 상류층 사모님들의 사교 모임에는 벼락부자의 아내들도 끼어들기 힘든데 예정이는 오죽할까. 따돌림을 당하고 인정받지 못하고 갖은 야유와 비난만 받을 거야”장소민은 평생 재벌가에서 지내다 보니 평소 사귀는 사람들도 전부 그녀와 지위가 비슷한 사모님들이다.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겐 왕왕 가볍게 고개만 끄덕일 뿐 상대를 자신의 사교 영역에 들이는 건 불가능하다.그녀의 시어머니처럼 전혀 틀을 차리지 않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하지만 네가 예정이를 사랑하고 엄마도 너희 둘이 이혼하는 걸 원치 않아. 이혼하고 너 평생 솔로로 지낼까 봐 두려워. 세상에 어느 엄마가 제 아들이 독신으로 사는 걸 원하겠어? 게다가 이렇게 훌
“소민아, 사람 시켜서 저 녀석한테 생강차를 끓여주라고 해. 태윤이가 매워 죽게 생강을 많이 넣어.”어르신이 방에서 나오며 밖에 있는 며느리에게 분부했다.장소민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도우미에게 생강차를 끓이라고 했다.고부가 나란히 수영장 앞에 왔을 때 전태윤은 여전히 물고기처럼 물속을 헤엄치고 있었다.“전태윤.”할머니가 무게감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전태윤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할머니를 힐끗 보더니 계속 앞으로 헤엄쳐갔다. 수영장 가장자리로 헤엄쳐간 후 그는 물속에서 나와 자리에 앉았다.할머니는 수영장을 에돌아 그의 앞에 다가가더니 속상한 표정으로 말했다.“여기 앉아서 뭐해? 얼른 방에 들어가.”“할머니, 나 머리 좀 식히고 싶어요.”어르신이 그를 질책했다.“머리 식히려거든 문 잠그고 방 안에 있어도 돼. 아무도 널 방해하지 않을 테니 마음껏 머리를 식혀. 왜 굳이 물속에 뛰어드는 건데?”“나름 효과 있더라고요.”전태윤이 담담하게 말했다.“차가운 물에 몸을 담그니 머리가 맑아지고 복잡했던 마음도 훨씬 편해졌어요.”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진정이 됐으면 어서 옷 입고 방에 돌아가. 여기 오래 앉아있으면 감기 걸려.”전태윤은 입술을 앙다물었다.장소민이 그의 외투를 가져와 몸에 걸쳐주며 말했다.“너 감기 걸리기만 해봐, 엄마가 바로 예정이 찾아가서 따질 거야. 걔가 널 아프게 했어.”“엄마가 과연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올까요?”전태윤은 엄마가 하예정을 찾아가 따지는 걸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장소민은 말만 독하게 할 뿐 정작 너무 지독한 일은 하지 못한다.장소민은 침을 꼴깍 삼켰다.“엄마는 제 새끼를 위해서라면 못 할 일이 없어.”어르신도 말했다.“태윤아, 일단 방에 가서 옷부터 갈아입고 나랑 얘기하자.”전태윤은 할머니를 올려다보며 비난 조로 말했다.“난 또 할머니가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있어야 쾌유할 줄 알았죠.”그가 돌아올 때 할머니가 보이지 않자 미리 숨어 계신다는 걸 눈치챘다. 할머니가 늘 해오던 수법은 바로 아픈 척
옷을 갈아입은 후 엄마의 감시하에 그는 생강차를 마셨는데 너무 매워서 미간을 확 구겼다.“엄마, 생강을 왜 이렇게 많이 넣었어요. 매워 죽겠네.”“너희 할머니가 생강 많이 넣어서 체내의 한기를 빼라고 했어. 생강차 마시기 싫으면 앞으로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던가.”전태윤이 그릇을 내려놓았다.“엄마, 난 진짜 마음 식히려고 그랬어요. 일부러 어리석은 짓을 한 게 아니라고요.”“알았어, 알았다고. 그래서 지금은 충분히 진정했지? 어서 할머니 찾아가서 얘기 나눠. 할머니야말로 제일 처음 이 일을 시작한 장본인이셔. 네 할머니만 아니었어도 넌 지금처럼 되지 않았을 거야.”장소민은 시어머니에게 불만이 조금 남아있었다.전태윤은 매우 훌륭해서 장가 못 갈 걱정이 없는데 어르신이 한사코 그더러 자신을 구한 생명의 은인과 결혼하라고 다그쳤다.애초에 다들 감격에 겨워 하예정에게 정중한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었지만 그녀가 일절 거절했다.그 뒤로 어르신과 하예정이 사이좋게 지냈고 하예정은 어르신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장소민은 사석에서 남편에게 구시렁대기도 했다. 하예정이 혹시 할머니의 신분을 알고 더 많은 것을 탐내느라 그들이 주는 거액의 보상금을 거절한 게 아닐까?장소민의 남편은 일단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자고 했다.보다 보니 하예정이 어느덧 그의 며느리가 되었다.하예정은 할머니의 정체를 아예 몰랐고 전태윤과 혼인 신고할 때도 그가 전씨 그룹 대표라는 걸 몰랐다. 장소민은 나중에 이 일들을 알게 됐다. 만약 몰랐다면 그녀는 진짜 하예정이 가식녀라고 오해했을지도 모른다.그 이후에는 부부가 서로를 깍듯하게 대하고 비록 한방에서 지내도 교류가 아주 드물며 잘 때 역시 따로 잔다고 했다. 심지어 전태윤은 계약서를 작성하여 하예정에게 서명하라고 했다.계약서 내용이 무엇인지 장소민은 몰랐다.하지만 제 아들은 절대 스스로 손해 보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 계약서는 분명 하예정에 관한 단속 사항이 더 많을 것이다.언제부터인지 아
고현이 입을 열었다.“호영 씨는 너무 뻔뻔스럽네요.”전호영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제가 뻔뻔스럽지 않았다면 고현 씨의 마음을 훔치지 못했을걸요. 우리 큰형을 따라 배웠거든요. 우리 형이 형수님에게 구애한 적 없지만 뻔뻔스럽게 자신의 미래 아내를 쫓아다녀야 한다고 저에게 말했거든요. 우리 큰형도 옛날에 체면을 중요시하게 여겼지만, 우리 형수님과 지내면서 점점 뻔뻔스럽게 되었어요.”전태윤 부부가 금방 결혼했을 때 많은 갈등이 있었고 냉전도 자주 했었다.전호영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감히 더 깊이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다.때로는 전태윤 부부가 싸움이 심해질 때면 전씨 할머니까지 나서야 했다.고현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전 대표님께서 호영 씨가 자신을 뻔뻔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아마 호영 씨는 이 세상에서 없어질지도 몰라요.”고현은 전씨 가문의 형제들이 맏형 전태윤을 유난히 존중했고 또 가장 두려워한다고 전해 들었다.전태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여전히 차갑고 도도한 모습이지만 하예정 앞에서는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전씨 가문은 형제들은 서원 리조트에서 함께 산 덕분에 사촌 형제지간일지라도 정이 아주 깊었다.따라서 맏형 전태윤의 지위도 높았고 그의 형제들도 그를 잘 따랐다.“큰형이 지금 여기에 없는데요 뭐. 그리고 제가 한 말도 사실인걸요. 우리 형도 형수님이 생긴 뒤로 뻔뻔해졌거든요. 우리도 따라 한 것뿐이에요.”고현은 여전히 웃으며 말을 건넸다.“호영 씨가 뻔뻔한 사실을 남에게 밀지 마세요. 그만하고 우리 얼른 가요. 호영 씨, 네가 오늘 제가 드레스 입고 하이힐을 신는다면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요? 제가 비웃음을 당해도 괜찮겠어요?”전호영은 그녀가 벗은 하이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제가 뭘 더 신경 쓰겠어요? 제가 언제 다른 사람이 비웃을까 봐 두려워했었나요? 저는 남들 시선이 두렵지 않고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이에요. 남들이 시선이 신경 쓰였다면 오늘 같은 달콤함도 없었을 거예요.”전호영은 다른 사
사실 전호영은 차를 세울 때 고현이 평소에 자주 타는 그 마이바흐 차를 보았다.“집 안에 있어. 들어가 봐.”진미리는 물건을 들여 집 안으로 들어가려다 다시 전호영의 손에 물건을 전호영 손에 쥐여주었다.“난 꽃에 물을 좀 주고 들어갈게. 날도 어두워질 것 같으니 먼저 들어가 봐.”전호영은 자주 고씨 가문의 저택으로 왔고 진작에 고씨 가문을 그의 두 번째 집으로 생각했다.전호영은 혼자 집 안으로 들어갔다.집에 들어서자 그는 한 여자가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를 들고 메시지를 보내는 모습을 보았다.그 여자는 고현과 정말 똑같이 생겼다.만약 고현이 치마를 입고 가발을 쓴다면 저렇게 예쁠 것이다.고현은 원래 긴 가발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전호영이 말하는 소리를 듣더니 재빨리 가발을 쓰고 앉아 있었다.전호영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알고 싶었다.그녀는 전호영 앞에서 치마를 입은 적 있었다.당시 고현은 그날이 전호영 앞에서 치마를 입는 유일한 날이라고 생각했었다.그러나 고현은 지금 또 치마를 입고 있다.그녀는 전호영을 위해 한 번이고 두 번이고 늘 그녀의 원칙을 깨뜨렸다.아니, 눈앞의 여자가 바로 그의 고현이었다.전호영은 씩 웃었다.그는 다가가더니 먼저 손에 들고 있던 가방들을 내려놓고 꽃다발을 고현에게 건네주며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여신님, 이 꽃다발을 당신에게 드릴게요.”고현의 시선은 꽃다발에 가려져 더는 휴대전화를 쳐다보지 못했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전호영을 올려다보며 빙그레 웃는 그의 얼굴을 보며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서프라이즈도 해주고 싶었는데, 호영 씨 표정을 보니 놀라지 않은 것 같네요.”“현이 씨가 저를 위해 치마를 한 번 갈아입었을 때 제가 재빨리 현이 씨 도도한 모습을 기억해 버렸죠.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전호영은 고현이 꽃다발을 받기를 기다렸다가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그녀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물었다.“준비되었다고 했는데 정말 이렇게 나가려고요? ”고현은 지금 드레스를 입고 가발을 착용
잠시 후, 진미리가 말했다.“됐어. 나도 상관 안 할래.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엄마는 몇 년 더 살고 싶어.”“엄마, 저는 효녀거든요.”진미리가 입을 열었다.“난 네가 불효녀라고 말 한 적 없어. 네가 여자 신분을 회복하는 일에 엄마가 더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말이야. 더 관여하면 내가 열 받아서 죽을 것 같아. 내가 몇 년을 더 살아서 네가 결혼하고 자식까지 낳는 것을 보려면 너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게 좋겠어. 네가 여자로 살든 남자로 살든 네가 개의치 않는데 나도 더는 상관하지 않을래. 내가 진작에 상관하지 말았어야 했어.”말을 마친 진미리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엄마, 어디 가세요?”“엄마 바람 좀 쐬면서 기분 전환 좀 할게. 네 아빠한테 잔소리 좀 해야겠어.”고진호는 밖에서 꽃들에 물을 주고 있었다.그러자 고현이 말을 건넸다.“그럼 나가서 아빠에게 몇 마디 잔소리하고 오세요. 잔소리하시고 나면 그래도 제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실걸요.”진미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로 밖으로 나갔다.꽃에 물을 주던 고진호는 진미리가 나오는 것을 보더니 물었다.“현이가 연습 잘하고 있어요?”“휴, 말도 마세요. 지금에야 와서 가르치려고 하니 너무 어려워요. 오후 몇 시간 만에 20년이 넘는 습관을 고치려고 하니 너무 어려워요.”고진호가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그럴 줄 알았어요. 됐어요. 내버려 둬요. 현이가 행복하기만 하면 현이가 어떤 신분으로 살아가든 상관없잖아요.”갑자기 고현이 여자라는 일이 드러나게 되면 아마 강성 전체가 뒤흔들릴지도 모른다.전화 폭격을 당할 장면을 미리 생각한 고진호도 미리 전원을 끄려고 계획했다.“현이가 드레스는 입고 싶지만, 하이힐 대신 구두를 신겠대요. 휴... 진작 알았다면 애당초 현이가 소란 피울 때 반대했야 했는데. 벌써 20년이 흘러 멀쩡한 딸이 아들로 변하게 되다니...”“현이가 입고 싶은 대로 입게 놔둬요.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대상은 현이지, 우리가 아니잖아요.”고진호는 고현이
“걱정하지 마세요. 준비하고 계세요. 저랑 함께 연회에 가요.”고현이 말을 이었다.“그럼 집에서 기다릴게요.”“좀 이따가 봐요.”그는 고현이 왜 반나절 휴가를 냈는지 전호영은 더는 묻지 않았다.전호영은 먼저 서둘러 고씨 가문의 저택으로 간 다음 다시 얘기하려고 했다.전호영과의 통화를 마친 고현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으려다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진미리를 보더니 다시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전호영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척했다.“메시지 보내는 척 하지 마.”진미리는 일어나서 걸어가더니 손을 뻗어 고현의 휴대전화를 가져다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엄마, 저는 핸드폰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회사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저를 찾아야 하거든요.”고현은 다시 휴대전화를 방패막이로 삼고 싶어 했다.“회사 일 전부 고빈에게 맡겼잖아. 고빈이가 처리하게 놔둬. 빈이가 오늘 저녁 연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리고 빈이는 너보다 어리지 않아. 너보다 겨우 10분 정도 어릴 뿐이야. 게다가 남자로서 빈이는 당연히 그 무거운 짐을 짊어져야 해. 남존여비라고 당연히 남자가 무거운 짐을 지게 해야지.”고현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엄마, 그 생각은 너무 보수적이에요.”“남들에게는 보수적인 사상일지 모르지만, 우리 집에서는 남자가 무거운 짐을 지게 하고 딸이 가볍게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것이 우리 집안의 규칙이야.”진미리는 고현 옆에 앉았다.고현은 진미리와 논쟁하려 하지 않고 바로 머리를 수그렸다.“네네, 우리 엄마는 가장 예뻐요. 우리 엄마가 하신 모든 말은 다 정확해요.”진미리는 고현을 노려보고 있었다.“엄마, 또 왜요? 오후 내내 저를 노려보신 횟수가 지난 20여 년을 합친 것보다 더 많아요.”진미리는 딸의 허벅지를 툭툭 치며 꾸지람했다.“똑바로 앉아! 사나이처럼 앉지 마. 넌 지금 우리 가문의 딸이야. 고씨 가문의 아들이 아닌 딸이라고! 그리고 앉자마자 하이힐을 벗지 마. 어느 집 딸이 자리에 앉자마자 하이힐을 벗는 것을 봤어?”고현은 투덜댔다.“
전호영의 전화를 받은 고현은 잠시 멈추고 쉴 수 있는 핑계를 주었다.고현은 자신의 하이힐을 신고 걸어 다니는 자태를 감시하고 있는 진미리에게 말했다.“엄마, 호영 씨 전화예요.”“그래.”고현은 소파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앉았고 그녀의 걸음걸이 자태를 보던 진미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따라왔다.남자의 분장에 익숙해진 고현이 치마로 갈아입고 하이힐을 신으면 진미리의 요구대로 잘 걸을 수 없었다. 재벌가 딸들의 우아한 자태로 걷는다는 것은 하늘을 오르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고현은 하이힐을 신고 삐뚤삐뚤 걸어 다녔다.어쨌든 진미리는 고현이 하이힐을 신고 걷는 모습이 매우 못마땅했다.고현은 소파에 앉자마자 바로 하이힐을 벗어 던졌다.진미리는 고현의 상황을 살피지도 않은 채 하늘을 찌르는 듯한 굽 높은 신발을 신고 걷는 연습을 시켰다. 비록 연회에 참석할 때 신을 하이힐은 그렇게 높지 않지만 말이다.고현은 내심 불만이었다.하지만 진미리는 굽 높은 신발로 연습을 해야 연회 때 신어야 할 하이힐을 쉽게 신을 수 있다고 했다.“호영 씨.”고현은 부드럽게 전호영을 불렀다. 그녀는 지금처럼 전호영의 전화를 기다린 적이 없었고 또한 이렇게 부드러운 말투로 전호영의 이름을 부른 적도 없었다.그녀는 성격이 차가운 편이라 전호영을 사랑하게 되더라도 그에게 부드럽게 대하지 않을뿐더러 다른 여자들처럼 애교도 부리지 않았다.가끔 고현이 전호영과 이야기할 때 약간의 웃음을 띠면서 말을 건네기만 해도 전호영은 며칠 동안 행복하게 지낼 수 있었다.“오후에 회사에 돌아가지 않았어요. 반나절을 쉬려고 우리 부모님 집으로 왔어요.”고현의 부드러움은 전호영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만 사용됐고 다시 입을 열어 말했을 때는 말투가 정상으로 돌아갔다.전호영이 물었다.“괜찮으세요? 어디 아픈 건 아니죠?”그녀는 워커홀릭이라 결혼하기 전의 전태윤처럼 평일에 쉬는 일이 거의 없었다. 주말이 되어 집에서 쉰다 해도 사실 업무를 처리하기 위함이었다.고현은 가끔
임원들은 고빈의 주위에는 적어도 여성 지인들이 많아 그녀들과 만나면서 먹고 놀 수 있다지만, 고현은 그야말로 전호영에 의해 망가졌다고 생각했다.전호영이 아주 훌륭하고 관성의 제일 갑부인 전씨 가문 출신이라고 해도 뭐가 소용 있겠는가!동성연애는 국내 사람들이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데...“상상력이 풍부하시네요. 고빈 씨에게 드리는 꽃이 아니거든요. 고현 씨는 회사에 없어요? 나가셨어요?”전호영이 물었다.고빈은 손이 전호영에 의해 뿌리쳐졌지만, 화도 내지 않고 일부러 전호영에게 말했다.“우리 형에게 매달리더니 너무 심하게 매달린 건 아닌가 봐요? 우리 형이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다니. 우리 형이 오후에 회사에 돌아오지도 않았어요. 모르셨어요?”전호영은 정말 몰랐다.그는 고현이 오늘 저녁에 그녀와 함께 연회에 참석해야 한다는 사실밖에 몰랐다.오늘 밤 두 사람이 참석하는 연회는 강성에 있는 한 재벌가의 저택에서 열리기 때문에 전호영은 일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달려왔다.그는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바로 왔다.전호영은 매일 양복을 입고 다녔기 때문에 갈아입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는 선천적으로 잘생긴 외모로 옷을 대충 입어도 쉽게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곤 했다.“호영 씨 표정을 보니 우리 형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모양이네요. 하하! 우리 형을 반년 넘게 귀찮게 하여 동성애자로 만들더니 결국 우리 형의 마음을 완전히 움직이지는 못했네요.”고빈은 동정 어린 표정으로 전호영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시간이 없어서 잔소리 그만할게요.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그럼 저는 이만.”고빈은 전호영을 뒤로 한 채 임원들과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리를 떠났다.전호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프런트 데스크로 돌아와 아직 퇴근하지 않은 직원에게 물었다.“고 대표님께서 오늘 오후 정말로 회사로 돌아오지 않았어요?”“네, 오후에 돌아오지 않으셨어요.”전호영이 다시 물었다.“어디로 가신다는 말은 안 하셨어요? 사업 때문에 나가신 거예요?”전
하예진은 말을 잇지 못하고 살며시 노동명을 안아주었다.잠시 후 노동명은 그녀를 가볍게 밀어내며 부드럽게 말했다.“돌아가서 쉬어.”“잘 자요. 동명 씨도 내일 관성으로 돌아가야 하잖아요.”두 사람은 서로 인사한 뒤 하예진은 노동명의 방을 나섰다. 노동명은 휠체어를 타고 그녀를 현관문 밖으로 나와 그녀가 옆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문을 닫았다.밤새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말도 오고 가지 않았다.다음 날 노동명은 아침 식사를 마친 후 하예진의 배웅을 받으며 차를 타고 하루 호텔을 떠났다.하예진은 공항까지 따라가지 않고 노동명을 차에 태우고 호텔 입구에 서서 그를 배웅했다.공항까지 배웅하면 더 아쉬울 것 같았다.노동명이 타고 있던 차가 보이지 않게 되자 하예진은 그제야 경호원들과 함께 전호영이 안배해 준 차를 향해 걸어갔다.노동명이 관성으로 돌아갔으니 그녀도 계속 일을 해야 했다.바쁠 때는 시간이 유난히 빨리 지난다.날이 조금 전에 밝은 것 같았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또 저녁이 되었다.전호영은 고현이 오후에 회사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그는 평소처럼 저녁 무렵 차를 몰고 고씨 그룹으로 가서 고현이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그리고 같이 밥 먹으러 가려고 했다.고현은 사업이 무척 바빠서 전호영에게 줄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매일 식사 시간이 바로 그와 고현이 정을 쌓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다.그의 차는 고씨 그룹에 들어가서 늘 주차하던 곳에 멈춰 섰고 전호영은 조수석에서 꽃다발을 안아 들고 차에서 내렸다.전호영은 사무실 건물 입구에서 밖으로 나가는 고빈을 만났다. 고빈은 회사 임원 몇 명과 함께 걸으면서 얘기를 나누었다.전호영을 본 고현 일행은 멈추어 섰다.“회사엔 왜 왔어요?”고빈이 입을 열자마자 물었다.전호영은 그 물음에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제가 왜 당신 회사에 올 수 없어요?”전호영은 매일 고씨 그룹으로 왔다.그럼 전호영을 쫓아내기라도 하겠다는 의미인가!고빈이 감히 그를 쫓아낸
“응, 내일 돌아가려고. 예진이도 너무 바빠서 영향 줄까 봐 그래. 관성으로 돌아가서 우빈이도 돌봐야 예진이가 걱정하지 않지. 내가 강성으로 돌아가서 나와 우빈을 위해 강산을 다스려야 되거든. 하하!”노동명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옆에서 듣고 있던 하예진이 말했다.“나중에 빚이 쌓일까 봐 두렵네요.”노동명이 되물었다.“뭐가 두려워? 수십 조의 빚만 아니라면 다 갚아줄 수 있어. 넌 마음 놓고 가서 일해. 하늘이 무너져도 내가 버텨줄 테니까. 파산될 걱정은 하지 마.”수십 조의 빚이라고?하예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현재 하예진의 상황으로 놓고 보면 수억 원의 빚만 져도 그녀는 너무 걱정되어 흰머리가 나올 것 같았다.전태윤은 또 음성메시지를 보내왔다.“우리 처형에게 너 같은 후원자가 있으니 반드시 강성에서 성공할 거야.”노동명은 하예진에게 전태윤의 음성메시지를 들려주며 말했다.“들어봐, 태윤이가 너를 엄청나게 믿고 있어.”“항상 저를 이렇게 믿어주시는데 제가 더 열심히 해야 기대에 부응할 수 있겠네요.”“너도 혼자 견디지 말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장 먼저 나에게 도움을 청해. 내가 다리를 다쳤지만 머리가 다친 건 아니거든. 나도 너 대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어.”하예진은 노동명이 다리를 다쳤다는 둥 머리를 다쳤다는 둥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싫어했다.“동명 씨의 다리는 좋아질 거예요. 저는 그런 말 듣기 싫어요. 앞으로 절대로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동명 씨가 다리 나아지면 저랑 결혼도 하셔야죠.”노동명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네가 그런 말을 해 주니 내 다리도 분명 나아질 거야.”하예진은 얼굴이 붉어지더니 부끄러워하며 대답했다.“너무 오래 얘기하지 마세요. 일찍 쉬어요. 저도 방에 가서 쉴게요. 내일 또 회사 일로 많이 뛰어다녀야 하거든요.”“응, 가. 잘 자.”노동명은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그녀에게 굿나잇 키스를 해달라고 암시했다.하예진은 다가가서 허리를 굽히더니 노동명의 칼자국이 있는 얼굴에 입을 맞추
“형인 씨 마음속엔 아직 네가 있을지도 몰라.”노동명이 말했다.그는 오히려 주형인이 우빈 앞에서 그의 험담을 하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주형인이 험담하면 할수록 우빈은 그를 싫어할 것이고 오히려 노동명과 우빈의 정이 더 깊어져만 갈 테니까.노동명은 마침내 우빈이 주씨 집에서 돌아올 때마다 그에게 무척 잘해준 이유를 알게 되었다.우빈도 미안했던 모양이다.주형인이 그의 험담을 했기 때문이다.“형인 씨는 저에 대한 사랑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을 거예요. 저를 사랑했다면 저를 배신하고 상처를 주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주씨 집안 가족들이 저를 괴롭히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을 거예요. 남자가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겠어요? 시어머니와 갈등이 생긴다 해도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노력했을 텐데. 어떻게 시어머니와 그의 누나가 저를 비난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었겠어요?”“그 사람은 마음이 편치 않았을 뿐이에요. 제가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만약 형인 씨와 서현주 씨가 아주 행복하게 잘 지내고 그렇게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행복하게 살면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를 기다렸을 텐데. 제가 죽든 살든 상관했겠어요? 우빈에 대한 감정조차 옅어졌을걸요. 그들만의 아기가 생기면 우빈에 대한 감정이 워낙 깊지 않은데다 감정이 있으면 얼마나 있다고...”노동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더니 문득 화제를 돌렸다.“맞아. 그런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과 일들을 생각하지 말자. 나 내일 관성으로 돌아갈 거야. 예진아, 나랑 같이 가서 새 옷 몇 벌 사 오자. 우빈에게 줄 장난감도 좀 골라줘. 내가 매번 선물한 장난감을 녀석이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하예진도 전남편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진작에 태연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였지만 노동명 앞에서 전남편 얘기를 꺼내면 노동명이 질투할까 봐 걱정했다.교통사고를 당한 후 노동명도 많이 연약해졌다.주로 다리 장애로 자신감을 잃은 노동명은 마음이 매우 약해졌다.노동명